행복한 사명
KP31
그리폰 기지.
지휘관님, 진심이신가요?
물론 진심이지. 농담으로라도 널 불러서 이런 임무를 맡기겠다고는 안 해.
하지만, 어째서 이런 임무를 제게...
수오미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얼마 후 진행될 웨딩드레스 패션쇼의 안내 수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수오미에게 내린 임무는 바로 이 패션쇼의 모델을 맡는 것이다.
...전 정찰이나 순찰 임무가 더 자신 있는데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란 거 알잖니. 그리고 전에도 더욱 강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네, 그렇게 말한 적은 있지만...
강해지기 위해선, 우선 자신의 단점을 파악하고 극복해야 해.
이번 것과 비슷한 의뢰는 전에도 받은 적이 있으니, 경험이 많은 인형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래도 역시, 가능하면 많은 인형들에게 다양한 일을 접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전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네가 단독 임무를 선호하는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타인과의 협력도 매우 중요하단다.
이번 의뢰는 그리폰의 대외 이미지랑도 많이 관계되어 있어. 더불어서, 너도 임무 중 많은 걸 배워 종합적인 수행 능력을 높여야만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중요한 사명을 맡길 수 있을 거야.
지휘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할게요.
며칠 후, 촬영 스튜디오.
스튜디오 내의 벽과 바닥은 미리 설정해둔 파노라마에 맞춰 여러 아름다운 풍경을 비추었다.
형형색색의 가상 풍경 속에서, 실재하는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인형뿐이었다.
자 자, 시선은 카메라 말고 저 등을 향하고.
네.
좋아, 그 자세로 가만히.
말 그대로 꽃단장한 수오미는 얌전히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정식으로 런웨이에 오르기 전에 의상과 분장을 맞추고, 패션쇼 때 사용될 홍보용 사진과 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촬영하기 전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소요되었다.
......
처음 해보는 임무지만, 딱히 어려운 점은 없네.
수많은 스태프들의 시선 속에서, 수오미는 아직 어색하지만 조신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스태프가 지시를 할 때마다, 그에 맞춰 자세를 바꿨다.
"말도 잘 듣고, 프로 모델보다 훨씬 낫구먼!"
첫날부터 어느 사진사가 그녀를 칭찬할 정도였다.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하지만, 역시 신경 쓰이는걸...
수오미의 시선은 스튜디오의 다른 한쪽을 향했다.
저기, 앞으로 얼마나 남았죠? 빨리 돌아가서 오늘자 '버닝 피버 마스크 Rebirth' 봐야 하는데...
아직도 방송 타령이냐. 출발하기 전에 녹화 예약해뒀잖아.
업무 중에는 딴 생각 말고 업무에만 집중해.
이번 패션쇼에 파견된 인형이 자신만이 아니란 사실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신예 디자이너들이 저마다 다른 스타일의 의상을 선보이는 만큼, 모델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설마, 다 어울리기 껄끄러운 인형들일 줄이야...
이래서 지휘관님께서 협동심을 키우라고 하신 걸까?
일부러 가까이하기 싫은 인형들이랑 함께 보낸 게 아니기를 빌 수밖에. 너무 불편해...
좋았어, 이번엔 무릎 꿇고 앉아봐.
방금 게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긴 했지만, 잘 풀리면 오늘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쟤네한테 질 순 없어... 지휘관님께 난 다른 동료 없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다음날, 스튜디오.
좋아, 여기까지. 잠깐 휴식하자.
전 괜찮아요. 계속 진행하셔도 돼요.
너야 인형이니까 휴식할 필요 없는 건 알지만, 스태프들도 점심은 먹어야지.
아무튼, 한 시간 뒤에 다시 오렴. 우리도 따로 토론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화장이 너무 옅은가? 어째 제가 생각하던 대로의 효과가 안 나오는 것 같아요. 모델의 머리색에 맞춰서 수정해야겠어요.
지금 바로 메이크업 담당한테 말할게요.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다음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부터 보는 게 어떨까요?
제시간에 못 맞추면 어떡해요? 지금도 일정이 잔뜩 밀렸는데...
정 시간이 모자라면 컴퓨터로 보정하죠.
제정신이에요? 그걸 손님들이 보면 뭐라 생각하겠어요? 다들 한눈에 눈치챌 거라고요!
생각만큼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네...
지시에 따라 다 했는데... 역시 난 모델에 적성이 안 맞나 봐.
홍보용 사진 촬영을 놓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스태프들을 뒤로하며, 수오미는 찌푸린 얼굴로 스튜디오 옆 휴게실로 향했다.
오전 일정을 미리 마친 탓에, 휴게실엔 그녀 말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심심풀이용 텔레비전만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지난주 있었던 배급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동으로 돌변한 사건에, 경찰은 폭력 사태가 벌어지도록 조장한 선동 분자를 수배함과 더불어 엄중 처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새롭게 발표된 격리벽 외부 난민 수용 정책을 놓고, 각계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설문 조사 결과, 과반수의 응답자가 이번 정책이 또다시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텔레비전을 한동안 보니, 세상은 익히 알던 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화면 속의 초연이 피어나는 세상이야말로, 수오미에게 익숙한 직장의 풍경이었다.
...대체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분명 이런 곳보다 전선이 날 더 필요로 할 텐데.
나보다 먼저 스튜디오서 나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 너도 업무가 순조로운가 보군.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뒤돌아 보니, 웨딩드레스 차림에도 그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은 여전한 PKP가 뚜벅뚜벅 휴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에 계속해야 해요. 당신은요?
내 담당 사진사가 오늘 분량은 다 끝났다고 했다.
T-5000 녀석, 어제 그 난리를 피우긴 했지만 정말로 그 방송 때문에 돌아갔더군. 덕분에 녀석은 아직도 남아서 어제 분량까지 마저 찍고 있는 중이다.
난 이제 실내 촬영을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실외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지.
당신은 고민이 없어 보여서 부럽네요.
호오? 이건 인형의 기본 소양이라고 본다만. 쓸데없는 고민은 업무에 하등 도움 될 것 없다.
비꼰 게 아니에요.
그저, 지휘관님이 인사 배정을 잘못하신 것 같아서요...
...이렇게 사치 부리기만 하는 홍보에 어울리는 것보다, 제가 필요한 임무가 있을 텐데.
임무는 그저 임무일 뿐이다. 좋고 나쁨의 구별은 없어.
진정한 엘리트 인형은 임무를 가리지 않고, 그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임무를 완수하면 된다.
내가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네, 알아요. 임무는 완수할 거예요.
흥... 그래? 그럼 난 먼저 기지로 복귀하지.
PKP는 콧방귀를 뀌고는 휴게실에서 나갔다.
지휘관님이 주신 임무인 이상... 잘 하지는 못할지언정, 끝까지 완수해야 해...
며칠 후, 스튜디오.
스톱 스톱, 잠깐 멈춰. 으음... 이거 안 되겠는데.
네?
어... 인형에게 이런 말 하는 건 좀 이상한데, 미소가 너무 딱딱해.
좀 더 밝게, 진심으로 기쁜 듯이 웃을 수 없을까? 다른 애들은 그런 문제 전혀 없는 거 같던데.
아... 최선을 다해볼게요.
아니, 원래 지금쯤이라면 실외 촬영 들어가야 할 때인데 너만 계속 만족스러운 사진인 안 나오고 있거든... 이래서는 우리도 영 골치 아픈데.
아, 그 제복은... 그리폰에서 오신 분이군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일이...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먼저 들어가 쉬고 계십시오.
지휘관님...?
스태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잠시 스튜디오에서 내보냈다. 고개를 돌려 수오미를 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지휘관님이 직접 오시게 만들다니... 정말 죄송해요...
아니, 미안해할 것 없어.
항상 통신 화면 너머로만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나야말로 여태까지 직접 보러 오지 못해서 미안해.
PKP가 말하길 컨디션이 안 좋다던데,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겠니?
그 녀석... 지휘관님께 고자질을 한 건가요?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부정적인 평가는 전혀 하지 않았어. 오히려 널 많이 걱정하던걸?
으으...
지휘관님이 내려주신 사명을 저버린 것도 모자라...
그딴 녀석에게 연민까지 받다니...
수오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훌쩍이며 속상해하는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에, 나는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많이 분하니?
분하고 말고요! 사명도 다하지 못하고 헛수고만 하다니... 면목 없어요...
울고 싶다면 크게 울어도 괜찮아.
흑... 으아아아아아앙!
옳지 옳지, 이제 진정해. 그럼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겠니?
대체 무슨 고민이길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지 말이야.
지휘관님...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지.
사실은... 첫날부터, 지휘관님이 제게 이 임무를 맡긴 게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의심했어요.
분명 우리 그리폰은 지금도 온갖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는데, 저는 이런 곳에서 예쁘게 차려입고, 한가하게 사진을 찍고 있으니...
이런 것도 임무라 할 수 있는 건가요?
수오미는 속상해하며 눈을 감았다. 눈가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차라리 더욱 가치 있는 임무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정작,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 똑바로 못 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파요... 스튜디오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참 좋은 질문이네.
정말요...? 지휘관님은 거짓말 잘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어... 이런 것까지 거짓말로 달랠 필요는 없지.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끊임없이 다뤄지던 논쟁이야.
사람들은 항상 질문하지. "세계에는 아직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는데도, 왜 인류는 우주로 나가려고 하는가?"
"세계에는 아직도 격리벽 바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왜 벽 안에선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가?" 같은 걸 말이야.
네, 바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재난들을 무시한 채 여기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아직도 나쁜 일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나도 그런 건 가만두고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세상의 고통 때문에, 삶을 전혀 즐기지 않는 건 건전하지 않다고 봐.
네가 보기에, 이런 패션쇼는 그저 상류층이 사치스러운 돈 자랑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엉망진창인 세상에서도, 인류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여.
아름다움을 창조한다고요?
그래. 지금 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도, 아주 아름답지 않니?
지휘관님, 너무... 거창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말 그렇다 해도, 전 이렇게 예쁜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걸요...
그럼 다르게 생각해 보자. 너에게 자격이 없다면, 과연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을 자격이 있을까?
비록 세상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여전히 천당 같은 곳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사람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너는 그저 드레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마네킹이 아니야.
네 사진과 영상을 보는 이들에게 있어, 너는 이상적인 삶과 아름다움의 대변인인 거지.
오염지대에서 싸우는 것만큼, 미래의 희망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지 않을까?
희망을 전하는... 사명...
그 말을 듣자, 수오미는 새하얀 두 손을 굳게 꼬옥 쥐었다.
감사합니다, 지휘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정말 괜찮겠니?
괜찮아요. 지휘관님은 제가 사명을 다하는 그날을 지켜봐 주세요.
차분하면서도 결의로 가득 찬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날 밤, 이번 웨딩드레스 패션쇼의 공식 홍보 모델로 선정된 사진을 받았다.
사진 속의 그 아이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고,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수오미는 자신의 사명을 내 상상 이상으로 훌륭하게 완수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