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수업
Z62
...깊은 밤.
인형 숙소.
덜컥.
Z-62는 사뿐사뿐 방으로 들어와, 조심조심 문을 잠갔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일단, 이런 것도 좋은 시작이겠지?
아직 기억이 뚜렷할 때 기록해두자...
Z-62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06X년 X월 X일."
"해변에 소설책 3권을 가지고 가서 읽으면 보람찬 여행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C-MS는 Z-62와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봐 봐. 어디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말이야.
자 그럼, 임무 수고해.
...바닷가.
Z-62는 들뜬 마음으로 백사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는 와중, 통신기의 착신음이 수시로 울렸다.
이런 게 인어 수색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C-MS 씨가 맡긴 일이니까 열심히 하자!
이렇게 중용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Z-62는 체크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에 체크를 하고, 통신기를 연결했다.
저... C-MS 씨, "바닷가에 하얀 조개로 C, 분홍색 조개로 M, 나머지 조개로 S 만들기" 임무도 마쳤어요!
또 할 일은 없나요?
네? 차, 찬 수박이요? 알겠어요... 저기, C-MS 씨, 지금 어디 계세요...?
Z-62는 어리둥절해 하며 통신기를 바라봤다.
내가 보고할 때 말이 간결하지 못한 건가...?
Z-62가 계속 말을 걸어봤지만, 통신기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체념한 Z-62는 전자 지도를 열어, 바닷가 주위의 지도 정보를 검색했다.
수박... 수박 파는 곳... 찾았다!
이 포인트를 경유해서 왕복하면 시간도 많이 절약되겠다. 그런데, 수박을 얼마나 차게 해야 할까? 모두와 나눠 먹기 위한 거겠지?
잠시 후, Z-62의 품에는 수박이 들려 있었다.
차게 식히는 건... 바다에 담가 두면 되려나?
물가에 자리를 잡은 Z-62는 수박을 물에 내려놓아 절반쯤 잠기도록 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Z-62는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오전 내내 바빠서 책을 읽을 틈이 없었어... 이참에 몇 페이지라도 읽자.
하지만 Z-62가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기가 무섭게 일이 터지고 말았다.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위에 뒀던 수박이, 하나의 점이 되어 수평선 너머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 어떡해!
Z-62는 당황해 막 읽으려던 책도 집어 던지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으으... 역시 한눈팔면 안 되는구나...
수박을 고정할 방법이 없을까...?
Z-62는 손뼉을 쳤다.
그래, 내가 수박을 안고 있으면 되겠다!
물이 너무 차갑지 않으면 좋겠는데... 으으...
Z-62는 수박을 한 통 더 사 와, 이번에는 수박을 안고 바다에 들어갔다.
이 통신기, 방수 기능은 있겠지...?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머리 위에 올려 두자. C-MS 씨가 또 무슨 지시를 내릴지 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Z-62는 한 손으로 통신기를 켜 C-MS를 호출했다.
안 받네...
다른 일을 하느라 통신 요청을 못 본 걸까?
저... C-MS 씨...? 저 지금 수박 차갑게 식히고 있어요... 어... 다른 지시가 있으면 호출해 주세요...
으...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고 오히려 짜증 내진 않겠지...?
Z-62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수박을 안고 물속에 있으면 이상하겠지... 보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렇게 수박을 차갑게 식혀도 밖으로 나가면 다시 또 미지근해지지 않을까? 어쩌지...
......
평소에는 존재감이 희박한 Z-62라 해도, 지금의 모습은 마침 지나가던 지휘관도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말처럼, 정말 기묘한 광경이었다.
Z-62 쟤 지금 뭐 하는 거지... 해달 흉내라도 하나...?
아이고, 통신기가 얼굴에 미끄러졌네... 손으로 다시 올리려는 건가? 하지만 지금 저 자세로는 균형을 잘 잡지 않으면 수박 때문에 뒤집어질 텐데...
아니 그것보다, 왜 수박을 끌어안고 물속에 있는 거지?
한참을 구경하던 지휘관이 무심코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43분이나 지났네...
...응? 뭐야, 나도 여기서 40분 넘게 있었다고?!
풍덩!
꺄악! 어푸어푸...
예상대로, Z-62는 균형을 잃고 뒤집어졌다.
지휘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차, 통신기! 통신기... 통신기... 찾았다!
아, 안경... 이쪽으로 떨어진 것 같았는데...
괜찮니, Z-62?
한 팔로 수박을 껴안고서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던 Z-62는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에 한 번 놀라고, 지휘관의 목소리에 두 번 놀랐다.
꺄악!? 지, 지휘관님?! 여긴 무슨 일이세요?!
지휘관은 Z-62의 수박을 가리켰다.
지나가던 중에 네가 보이길래.
그런데, 왜 이런 데서 혼자 수박을 안고 물속에 있는 거니?
어... 그게... C-MS 씨가 저에게 찬 수박을 가져오라고 해서요...
그래서 40분 넘게 물속에 있었다고...?
그, 그게... C-MS 씨가 통신을 받지 않아서...
잠깐만요, 제가 40분 넘게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아세요?! 서, 설마 계속 보고 계셨어요!?
응?! 아, 아니. 40분 전에 지나가다 보고 지금 또 지나가다 본 거야.
으으으... 그래도... 제 부끄러운 꼴을 보시다니...
어, 얼른 잊어버리세요!
어... 미안하지만 그러긴 어렵겠구나. 워낙에 희한한 광경이었는 데다, 인간은 잊으라 하면 오히려 더 잘 기억하는 생물이거든.
히이잉...
그건 그렇고, 내가 너희한테 순찰하라 하지 않았니? 순찰 안 하고 왜 여기서 수박을 차게 식히고 있어?
그, 그건... C-MS 씨가...
내가 맞춰 볼까... 그 녀석이 찬 수박 가져오라 하기 전에도 이상한 심부름을 잔뜩 시켰지?
네... 하, 하지만 전 이번 작전에서 C-MS 씨의 부하잖아요.
걔가 멋대로 그러는 거긴 하지만, 대장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부하의 의무란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란 뜻은 아니야.
너무 그렇게 상명하복이란 틀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이지. 우리 기지도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잖아?
Z-62는 어떻게 생각하니? 적어도 난 너희를 험하게 다룬 적 없다고 보는데.
네, 맞아요...
저도 알고는 있어요... C-MS 씨가 그냥 저에게 장난을 치고 있단 걸...
그런 말에 지휘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내가 오해한 것 같구나.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C-MS 녀석, 네가 물속에서 고생하는 동안 물총을 들고 다른 조를 습격하고 다닌 모양이야.
널... 까맣게 잊은 것 같아.
아... 그랬군요...
Z-62가 복잡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점점 숙이자, 지휘관은 조금 당황했다.
어... 너무 속상해할 것 없어. 봐서 알잖니, 그 녀석 원래 그런 거. 내가 나중에 따끔하게 훈계할게, 응?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역시,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말은 안 하는 편이 낫다니까...
지휘관이 Z-62를 달래줄 말을 쥐어 짜내려는 와중, Z-62가 다시 고개를 들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헤헤... 속상하지 않으니까 안심하세요, 지휘관님.
이거 참, 오히려 네가 날 위로하는구나.
C-MS 씨가 절 잊어버린 일은...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괜찮아, 내가 정말 혼내줄 테니까!
아니에요, 지휘관님.
전 원래부터... 존재감이 희박했으니까요... 오늘 C-MS 씨가 절 잠깐이나마 부하로서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기뻐요.
그거 꽤 비관적인 말인걸...
네?! 그, 그래도 사실인걸요...
평소에 임무 중에도 인원 체크가 끝나자마자 동료들이 제가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어요.
...그건 더 불쌍한 이야기인데.
헤헤... 한번은 동료들이 심령 사건인 줄 알았다니까요!
"어라? 왜 한 명 모자라지? 누가 빠졌어?" 하면서,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요.
저... Z-62?
아, 죄송해요! 저 혼자 너무 많이 떠들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잘못됐잖아. 정상적으론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돼.
제가... 자꾸 잊히는 일 말인가요?
그래.
하, 하지만... 전 원래부터 남에게 인상을 주기 어려운 타입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어느샌가 익숙해졌고요... 그럼 괜찮지 않나요?
나야 물론 안 좋다 생각하지.
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니?
Z-62는 잠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어?
왜, 왜냐하면... 항상...
지휘관은 더 말하지 않고, Z-62가 차갑게 식히던 수박을 가져왔다. 그리고 나이프를 꺼내, 작은 조각을 두 개 파낸 뒤 하나를 Z-62에게 건넸다.
그렇지 않아. 자, 받으렴.
내가 오늘 너와 함께 수박을 먹은 일을 기억할 테니까. 나중에 오늘 먹은 수박의 맛을 떠올릴 때, Z-62도 함께 기억할 거야.
Z-62는 수박을 받고, 지휘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니 속상한 일이 있으면 혼자 참지 마렴. 자꾸 그러다간 단 걸 먹어도 씁쓸해져.
네, 지휘관님...
두 사람은 그대로 모래 위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바다를 감상했다. 그러다, Z-62가 정적을 깼다.
사람들에게 잊히는 건... 싫어요...
응?
C-MS 씨가 저를 놀리는 것도, 이상한 심부름이나 시키는 것도 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결국 제가 있는 것도 까먹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저를 기억해 주길 바라서 부하 노릇을 한 건데, 왜 결국 이렇게 된 걸까요...
음...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C-MS면 좋을 텐데.
지휘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Z-62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진심을 본인에게 밝혀야 하지 않겠니?
네!? 그, 그건 너무 무서워요...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너 혼자 속상하기만 할 뿐이란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것도 참 드문 일인데...
Z-62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널 좋아하는 건 꽃을 좋아하는 것과 같단다."
"그들은 네가 피어난 모습을 구경하고, 꽃잎을 만져보는 식으로만 좋아하지."
"하지만 네가 그들을 붙잡고, 줄기 속을 내보이고 뿌리를 파내 보이면서..."
"이것이 나의 진심이니 똑바로 보라 한다면..."
"그들은 기겁하며 도망치겠지..."
Z-62는 책에서 읽은 구절을 중얼거린 뒤 뜸을 들였다.
저도... C-MS 씨가, 사람들이 절 좋아해 주고 평범하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사람들과 친해지면 제가 분수를 잊고,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다 뱉어 버릴까 봐 무서워요...
아하... 무슨 뜻인지 알겠다.
넌 자신의 존재감이 옅은 점을 보호색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Z-62는 손안의 수박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네 진심도 받아줄 수 있어.
네?
누가 뭐래도, 난 네 지휘관이잖아.
줄기 속이든 흙 묻은 뿌리든... 그런 건 여태껏 잔뜩 봐 왔으니까.
너희의 모든 걸 받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자격으로 지휘관 노릇을 하겠니?
지휘관님...
물론 나도 미숙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조언을 해 줄게.
입을 제어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손으로 쓰는 거야. 네 속마음을 문자로 바꾸면서 정리하고 다듬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C-MS 씨가 절 기억해 줬으면 하는 마음을 편지로 쓰라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길 필요도 없고, 간결하게 쓰면 돼. 아무리 C-MS라도 읽은 글을 잊지는 않을 테니까.
Z-62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편지를 써서 C-MS 씨에게 주러 갈게요!
그래, 그게 좋은 시작이지.
이따가 함께 찾으러 가자. 녀석이 마지막으로 물총 장난을 친 곳이 어디였더라...
...깊은 밤.
인형 숙소.
Z-62는 안경을 고쳐 쓰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일기장에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지휘관님과 함께 C-MS 씨를 찾아갔을 때, 타이밍 좋게 날아온 물벼락에 애써 쓴 편지가 다 젖어버렸다."
"그래도 즐거웠다. 루이스 씨가 생각해낸 매복 작전으로 복수했으니까!"
"지휘관님은 끝까지 보지 못하셨지만, C-MS 씨에게 내 진심을 전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잠시 펜을 멈추고, 창밖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음... 지휘관님께도 편지를 써서 보고드리는 게 좋겠지?
응, 그러자. 지휘관님께 보내는 거니까 편지지를 예쁜 것으로...
......
그렇게, Z-62의 여름이 끝났다. 바닷물의 짠맛, 수박의 단맛, 그리고 물총 세례의 시원함도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Z-62는 그 느낌들을 영원히 메모리의 한구석에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