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폭스트롯
79type
그리폰 지휘실.
계십니까, 지휘관?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왔습니다!
들어와.
79식은 언제나처럼 씩씩한 발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내게 경례를 하고서, 손에 든 태블릿 PC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건?
이번 연회를 위해 제작한 예복 디자인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서 날 찾은 거구나... 그런데 며칠 전에 카리나가 네 디자인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어?
그렇습니다만, 그 디자인은 여성스러움이 부족한 것 같아 지휘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여성스러움을 더 어필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남자라서 말이지... 여성스러움에 대해 뭐라 하기가 좀 어렵구나.
카리나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카리나 씨는 자신이 보기엔 이미 훌륭하니, 지휘관께 여쭤보는 것이 어떻겠냐 하셨습니다.
그러니 남성의 입장에서 조언해 주세요!
아무리 내가 같은 여성이라 해도 말이지, 여성스러움이란 너무 주관적인 문제라서 뭐라 하기도 어려운데...
하지만 지휘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좋아,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디...
음... 화장 코디와 악세서리, 거기에 예복의 재단 설계까지...
정말 완벽한 디자인이구나. 하지만...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부족한 점을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아니, 부족한 점은 없는데...
내가 보기엔, 여성스러움이란 겉모습을 꾸미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좀 더... 뭐라 해야 할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품이지.
기품이 없으면, 아무리 겉모습이 아름다워도 결국 망신만 당할 뿐이야.
기품이요?
79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도 괜찮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거든.
쉽게 말하자면, 타인을 대하는 매너나 평소의 행실을 손봐야 한다는 소리야.
......
그리폰 인형 숙소.
쉽다고 하셨지만, 역시 잘 모르겠어...
아아, 여성다워지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
79식, 무슨 고민이 있나요?
아, 대장!
왜 그러세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건 당신답지 않아요.
그게...
고민이라면 걱정 말고 제게 털어놔 보세요!
같은 소대의 전우로서, 고민이 있다면 함께 해결해야죠!
(대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숨기는 건 실례겠지.)
사실...
79식은 지휘관과 상담한 일을 M99에게 설명했다.
그렇군요... 저도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렇죠? 대체 무슨 뜻인지...
지휘관께서 얼버무리려고 한 소리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너무 애매모호해요!
음... 무도회에 가 본 적이 있는 인형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임무를 받자마자 스프링필드부터 IDW까지 다 물어보고 다녔어요!
하지만 저마다 하는 말이 달라서, 지휘관께 여쭤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휘관마저도 애매모호한 답을 주셨지 뭐예요.
지휘관도 만능 초인은 아니니까요...
네, 그건 그렇죠.
솔직히, 저도 79식이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봐요. 그 고민은 저도 달리 방도를 모르겠지만...
하지만 너무 진지하기만 해서도 안 돼요. 너무 깊게 파고들다간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답니다.
대장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네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도 반성할 줄 안단 말이에요!
지휘관과 여러분 덕분에 제 마인드맵도 많이 성장했다고요!
네에 네에... 아, 알았으니까 그만 노려보세요 대장!
아주 중요한 연회인 건 맞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계속 고민만 하다간 예복을 만들 시간도 없어져요!
아차...!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당장 64식과 88식한테 가야겠어요!
저렇게 허둥지둥인데 정말 괜찮을까...
그래도 79식이니까 별문제 없겠지?
연회 당일.
빠듯했지만 제시간에 예복을 완성해서 다행이야... 팔에도 인공 피부를 덧씌웠으니 문제없겠지...
79식은 테이블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연회장을 오고 가는 손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길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역시 실패인가...
때마침,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성 손님이 79식의 눈에 들어왔다.
(와아, 정말 인기가 많은 사람이네.)
(저런 게 매력 있는 여성상인가?)
79식은 앉은 자리에서 그 여성 손님의 자세를 따라 하며, 다리를 꼬고 중지와 약지 사이에 와인잔을 걸쳐 보았다.
......
(아니야, 너무 어색해! 어휴, 이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휘관에게 오기 싫다고 말할걸...)
(나 같은 전술 인형이 연회에서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겠지...)
삐이.
통신 연결.
79식, 지금 한가한가요?
대장, 무슨 일이죠? 혹시 연회에 침입자라도?!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K2하고 새 친구들을 만났는데, 같이 그... 이름이 뭐랬더라? 아! 텍사스 홀덤이란 게임을 하자는데, 79식도 같이 할래요?
전 됐어요. 대장이라도 즐겁게 노세요.
아, 알았어요...
만약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같이 놀아요!
통신 종료.
(하아... 놀 기분도 안 나...)
(그냥 연회가 끝날 때까지 이러고 있자.)
79식은 이 괴로운 시간을 참고 견디기로 했다. 그러던 그때, 어느 익숙한 모습이 연회장의 로비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건... 지휘관?)
(지휘관의 상태가 안 좋아 보여... 가 보자.)
연회장 바깥.
아이고 맙소사...
느긋하고 편하게 즐길 예정이었던 연회에 불청객... 아니, 훼방꾼이 나타났다.
AK12가 바람을 넣는 바람에, 사태는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그렇다고 연회에 참여한 애들에게 당장 기지로 돌아가자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매너가 아니고, 손님들과 협력사에게 해명하기도 힘들다.
왜 모처럼의 휴일에 이런 말썽이 생긴 거야... 에, 에취!
이거야 원, 엎친 데 덮친 격이네...
한창 짜증을 부릴 때, 옆에서 누군가가 내게 화장지를 건넸다.
지휘관, 어디 아프신가요?
아, 79식이구나. 고마워.
그런데 왜 너도 바깥에 있는 거지?
지휘관이 어딘가 편찮은 듯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시길래 따라나왔습니다.
난 괜찮아... 콜록콜록!
전혀 안 괜찮잖아요!
살짝 감기 걸린 거겠지.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안 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매우 연약하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요... 지금 지휘관의 상태로 봐선, 즉시 기지로 귀환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안 돼, 그리폰 대표로 참석한 거라 연회가 다 끝나기 전엔 돌아갈 수 없어.
(그리고 그 말썽꾼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지...)
그렇다면... 그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야, 이 하이힐이 정말...! 달리기 불편하잖아!
79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몇 분 뒤.
지휘관, 호텔 직원에게서 코트를 빌려왔습니다. 이거라도 걸치세요.
밤이 쌀쌀하니, 계속 찬 바람을 쐬시면 상태가 악화될 겁니다.
괜히 고생하게 만들었구나.
아니에요, 지휘관을 보살피는 것도 엄연히 저희 전술인형의 직책인걸요!
같이 연회장으로 돌아갈까요? 안은 따듯할 거예요.
너 먼저 가 있으렴. 난 바깥공기 좀 더 마시다 갈게.
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79식을 보내고 나니, 이번엔 테라스 반대편에 의기소침하게 있는 인형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 곤경에 처한 사람은 나만이 아닌 것 같군.
......
잠시 후, 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79식은 어디에 있나 살펴보니, 한쪽에서 사람들이 79식을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금한 마음에 그쪽으로 다가가니, 나를 발견한 79식이 손을 흔들었다.
지휘관!
혹시나 싶어, 난 양해를 구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79식에게 소리 낮춰 물었다.
79식,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왜 이렇게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거야?
아뇨, 별일 없어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성 한 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신이 이 인형의 상사인가요?
아, 맞습니다.
걱정 마세요, 별일 없으니까요.
이 인형 아가씨가 절 도와줘서, 모두 그 솜씨를 칭찬하고 있었답니다.
아, 아뇨... 그냥 지나가다 우연찮게...
이 우아한 여성 손님의 치마엔 익숙한 리본이 꿰매있었다.
(저 천... 79식의 치맛자락인가?)
(그래... K5의 점괘가 딱 들어맞았구나. 정말로 치마가 찢어졌네...)
이렇게 완벽하게 수선하다니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솜씨가 대단해서, 스카웃해 가고 싶을 정도군요.
아, 그건 좀...
우리 회사도 고급 의상의 보관 및 수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요. 아가씨라면 적성에 맞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만.
저, 전 이미 직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형은 아니라서...
그러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해 보시죠.
급여는 물론, 사원 복지도 평가가 좋은 회사랍니다.
지휘관...
79식은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니, 내가 나서야겠지.
크흠... 대화 중에 실례합니다.
저희 사원에 대한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그리폰 안전계약사 소속의 인형은 모두 장기 계약을 맺어서 말이죠.
만약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회사를 통해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
수다와 함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K2의 멋진 공연을 끝으로 연회도 막을 내렸다.
손님들이 떠난 연회장은 로비까지 고요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79식은 벽에 기대고서 두 손을 모은 채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79식?
아, 지휘관님! 다 끝났습니까? 저희도 이제 복귀하는 거죠?
그래, 다 끝났어.
그런데, 멍하니 왜 그러고 있니? 또 무슨 고민이라도 생겼어?
아... 벼, 별일 없습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뭘.
아... 부끄러운 꼴을 보여드렸네요.
오늘은 우아한 모습만을 보이려고 했는데... 역시 제겐 여성스러움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네?
확실히... 그 일도 신경 쓰여요.
이직하고 싶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려하지 못할 것도 없는데...
그그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저저저, 저는 그런 마음 전혀 없습니다!!!
아야야... 귀청 떨어지겠다. 그냥 농담이었어.
농담이었나요... 휴우...
지휘관도 정말! 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 미안해.
저는, 지휘관과... 그리고 그리폰의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즐거워요.
직장을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뭐가 고민이니?
고민이 아니라,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왜 그 손님이 저를 스카웃하려 했는지...
전 험한 일을 하는 전술인형이잖아요? 그런 섬세한 서비스업에는 어울리지 않을 텐데...
오늘 79식은 여성의 매력이 넘쳤으니까.
정말요?
정말이야.
하지만 전 오늘 달리 특별한 일은 안 했는데요?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니? 여성스러움이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기품이라고.
일상에서의 사소한 움직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거야. 그래서 오늘처럼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걸 느낀 거고.
...그걸로 충분한가요?
타인을 신경 쓰고, 솔직하게 대하는 거야말로 최고의 어필이지.
음... 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래, 자신이 제대로 어필하고 있는지 애써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태만해서는 안 되겠죠. 앞으로도 더욱 수련하겠습니다!
수련이라니, 어떻게...
그건 여자의 비밀이에요.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어서 기지로 귀환하죠.
어... 그래? 그러자...
79식의 윙크에 난 더는 묻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내 손을 잡고 함께 연회장 현관으로 나서는 것에 응해 주었다.
잠깐, 이 코트도 돌려줘야지.
아, 제가 돌려주고 올게요!
지휘관은 먼저 집합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79식은 빌린 코트를 품에 안고서, 직원 사무실 방향으로 달려갔다.
(높은 구두를 신고 저렇게 달리면 위험할 텐데...)
콰직.
역시나, 발을 삐끗하나 싶더니 겨우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굽이 부러진 구두를 벗고서 다시 달려갔다.
(...확실히, 좀 더 수련할 여지가 있겠구나.)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하며, 나는 연회장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때 79식은 사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가는 것이었단 사실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 일 때문에 79식은 거의 한 달 동안이나 나를 피해 다녔다.
그녀가 어떻게 용기를 내어 나를 다시 마주 보게 됐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