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계 병법
97typeS
핼러윈으로부터 1주일 전.
인형 숙소.
...그후, 지휘관님은 M1919를 구하러 가셨어요.
어떤 내용이든, 공주를 구하는 기사님 이야기는 참 멋지지 않나요?
하지만... 결국 그날 담력 시합은 성사되지 못한 거네?
그렇죠. 하지만 적어도 저는 재미있었어요.
64식은 97식 산탄총에게 재작년 핼러윈에 있었던 흥미진진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97식 산탄총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턱을 괸 채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결론을 따지자면, 결국 누가 깜짝 놀랐네.
네, 누가 뭐래도 귀신의 집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아쉽다. 그런 돌발 사고 없이 담력 시합이 제대로 진행됐다면, 훨씬 더 재밌었을 텐데.
64식은 잠깐 고민했다.
우리 기지의 낡은 시설로는 또 무슨 말썽이 일어날 것 같지만...
며칠 뒤면 또 귀신날인데, 스프링필드 씨가 행사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그 말에, 97식 산탄총이 갑자기 방패를 땅땅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올해는 내가 담력 시합을 주최해도 되겠네?
왜 귀신날마다 꼭 그런 놀이를 해야 하는 건가요? 그냥 방에서 얌전히 있으면서,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말고——
귀신날이 아니라 핼러윈이야!
좋았어, 이따가 지휘관한테 건의하러 가야지! 64식도 같이 갈래?
아뇨, 저는 됐어요. 직접 참여하는 것보단 녹화 영상으로 감상하는 게 더 좋거든요. 그러니까 빠짐없이 녹화해 주셔야 해요?
핼러윈 당일.
인형 숙소.
모니터를 바라보던 64식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저기 호크 씨? 빠짐없이 녹화해 달라고 부탁드리긴 했지만, 이것까지 녹화할 필요가 있었나요?
흔들리는 녹화 영상에 보이는 건, 적잖이 당황한 표정인 지휘관의 얼굴이었다.
핼러윈으로부터 며칠 전.
그리폰 지휘실.
어... 음... 참 기묘한 의상이구나 호크...
그쵸? 재단사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자료를 잔뜩 뒤져보길 잘했다니까요.
NZ75 녀석이 대신 디자인해 주겠다고 뗑깡 부리는 걸 겨우겨우 말렸고 말이죠.
헤헤헤, 입은 모습을 제일 먼저 지휘관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아... 응, 정말 잘 어울리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왔니?
맞다 맞다, 깜빡할 뻔했네.
지휘관, 이번 핼러윈 행사는 제가 맡아도 될까요? 담력 시합을 열고 싶어요!
담력 시합이라... 저번에 하려 했을 땐 진짜 난리가 났었지.
좋아, 네게 맡기지 호크. 자세한 내용은 카리나에게 제출하도록.
네, 지휘관!
아, 지휘관도 꼭 보러 와야 해요, 알았죠? 일정 다 짜면 복사해서 드릴 테니까요!
응? 나도 참가하라고?
그야 당연하죠! 그리고... 그때 지휘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응... 응? 할 말이 있다고?
왜 이리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지...
다시, 핼러윈 당일.
인형 숙소.
초소형 카메라를 빌려서 모자에 달았어. 이러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녹화할 수 있을 거야!
호크 씨가 그걸 쓰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 화면이 너무 흔들려서 NZ75와 Spitfire 씨도 구별 못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니... 지휘관님께 고백하려고요? 귀신날에?
아 글쎄 귀신날이 아니라 핼러윈이라니까!
그리고 고백이라니 무슨 소리야?!
호크가 시계를 보았다.
아이고, 벌써 입장할 시간이네.
그럼 휴식 끝, 시합장으로 돌아갈게!
네, 힘내세요. 녹화 영상 기대할게요.
핼러윈 기념 담력 시합장. 강단 위에 올라선 97식 산탄총 앞에는 시합 참가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모두 잘 들어!
이번 담력 시합은 귀신 팀과 도전자 팀으로 나뉠 거야. 제한 시간 내에 귀신 팀이 과반수를 놀래키면 귀신 팀의 승리, 그러지 못하면 도전자 팀의 승리!
난 여기서 너희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겠어! 자아, 그럼 시합 개시!
강단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97식 산탄총이 올해 핼러윈 행사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이 가는 곳을, 모자에 부착된 카메라가 부지런히 뒤쫓았다.
헤헤헤, 분위기가 달아오를 무렵 지휘관이 오면——
삐익.
그때, 통신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호크?
잠깐 와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식재료 컨베이어 벨트가 고장 나서 고기를 못 꺼내겠어.
뭐? 지금?
응. 슬슬 저녁 파티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고기를 제때 전달하지 못하면 반찬으로 64식의 훈제——
으아아 알았어! 내 위장을 위해서라도 당장 갈게!
56-1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97식 산탄총은 그녀가 위치한 좌표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30분 후.
97식 산탄총은 다시 시합장으로 돌아와, 양 팀의 활동 구역 사이를 오갔다.
보안... 아니, Model L.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그동안 별문제 없었지?
사소한 말썽은 있었지만, 아직 별일은 없어. 지금 MG3와 같이 이동 중이야.
알았어.
맞다, 혹시 지휘관 못 봤어?
지휘관님 말이야? 아직 못 봤어.
그렇구나... 알았어, 상황 발생하면 연락해.
상황이라는 건... 말썽 말하는 거야, 아님 지휘관님을 말하는 거야?
...둘 다!
97식 산탄총은 통신을 끊고, 다시 시합장 주위를 돌아다녔다.
시합이 시작된 지도 꽤 됐는데, 지휘관은 언제 오려나...
에이, 그냥 대충 돌아다니자. 어쩌면 재밌는 장면을 목격할지도 모르고, 우연히 지휘관이랑 맞닥뜨릴지도 모르——
삐익.
통신기가 또다시 97식 산탄총의 혼잣말을 끊었다.
으아아... 호크, 빨리 와서 도와줘!
80식 선배? 무슨 일이야? 침착하게 말해.
으으... 03식이 지휘관 어록 수첩을 잃어버렸어...
그 말을 들은 97식 산탄총은 머리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03식 녀석 지금 발광하기 직전이야... 나를 끌고 구석구석 찾으러 다니고 있다고!
겨우겨우 빈틈을 타서 통신을 연결했어...
점점 더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못 찾으면 지휘관을 찾아가서 모조리 다시 적을 수 있도록 어록을 복창시키겠대...
그리고 오늘은 무슨... 귀신날이라서 지휘관을 혼자 밖에 돌아다니게 둘 수 없다나 뭐라나...
그, 그그그, 그건 안 돼!
나도 가서 같이 03식의 그 수첩인지 뭔지를 찾아 줄 테니까! 걔 거기서 꼼짝 못 하게 해!
97식 산탄총은, 또다시 부리나케 80식과 03식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절대로 03식이 지휘관한테 가게 하면 안 돼! 그랬다간 오늘 지휘관은 밤새도록 방에서 나오지 못할 거야!
...1시간 후.
97식 산탄총은 맥빠진 모습으로 담력 시합장에 돌아왔다.
아니 세상에... 지금 같은 시대에 어록 수첩 따위를 적는 녀석이 어디 있어? 겨우 찾아내서 망정이지...
그리고 왠지 담력 시합도 말썽투성이인 것 같고...
그런데, 지휘관은 진짜 어디 간 거야? 봤다는 사람도 없으니 원...
약간 풀죽은 97식 산탄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시합 중인 인형들을 촬영하려 했다.
삐익.
다시 한번 통신기가 울렸다. 털털한 97식 산탄총도 이번 만큼은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또 뭐야! 누가 또 뭘 잃어버렸어?! 또 뭐가 고장 난 거야!
나 좀 제발 그만 찾으라고! 짠 거 먹으라면 먹고 말지!
97식 산탄총은 통신기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통신기 너머에선 정적이 흐르다가, 나지막이 목소리가 나왔다.
저기... 호크?
아... 미안, MG3구나. 난 또...
괜찮아... 그것보다, 숲 쪽에 좀 큰 말썽이 생겼는데 잠깐 와 줄래?
응? 담력 시합에서 사고야?
알았어, 바로 갈게!
...10분 후.
그리폰 기지 근처 작은 숲.
아이고 M870, 참 특이한 핼러윈 분장이구나?
어... 넘어졌는데 너무 둥그레서 못 일어나니까 소리 지른 거였어?
핼러윈 담력 시합이 끝난 뒤.
인형 숙소.
...그래서, 결국 그렇게 빵! 하고 터뜨렸어요?
64식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97식 산탄총이 녹화한 영상을 보며 물었다.
그랬지.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는걸?
하아... M870 씨에게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 같네요.
귀신날에 호박을 멀리하려고 한다거나...
귀신날이 아니라 핼러윈!
그나저나... 하아...
97식 산탄총은 고개를 떨구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왜 그러세요?
결국 시합이 끝날 때까지 지휘관이랑 만나지 못했어...
시합장에서 지휘관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자꾸 다른 일이 생겨서 말을 걸지 못했어.
그랬군요. 그렇게 고생할 정도로 제 훈제 고기가 싫었어요?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해!
네에,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언젠가는 당신도 맛있게 먹게 될 테니...
곧 저녁 식사 시간이죠? 여기서 끙끙 앓아 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카페로 가요. 전 옷부터 갈아입을 테니 호크 씨 먼저 가세요.
97식 산탄총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핼러윈 날 깊은 밤.
그리폰 카페.
식탁에는 하나둘씩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놓였지만, 97식 산탄총은 식욕이 전혀 나질 않았다.
사실, 지휘관에게 꼭 말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정도 아니었지...
하지만, 난 그냥... 에이, 모르겠다. 옥상에서 바람 좀 쐬어야지.
97식 산탄총은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고, 그런 그녀를 밝은 보름달의 달빛이 난간 사이로 비추었다.
이번 담력 시합도 무사히 끝났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현세를 떠도는 악귀들아, 천지신명의 이름으로 썩 물러가라!
꺄아아아아아아악!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갑자기 주문을 읊는 듯한 괴상한 말을 외치자, 97식 산탄총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뛸 뻔했지만 가까스로 난간을 붙잡고 기대었다.
누, 누구야...?
아, 지휘관...?
하하하! 어때, 괜찮았지? 이거 엄청 연습했거든.
어우 깜짝이야! 뭐에요 갑자기!
그런데, 지휘관이 왜 여기에...?
MG3랑 03식, 64식이 다 네가 시합 내내 날 찾으러 돌아다녔다고 하길래.
그래서 찾으러 왔지.
아, 걔네들이...?
지휘관, 담력 시합에 오기로 약속했잖아요!
미안해, 시합장에 가긴 했는데 어째선지 자꾸 너한테 말 걸 틈이 나질 않더라...
그리고 따로 해결해야 할 상황도 있었고. 덕분에 시상식도 못 봤다니까.
정말 보러 온 거 맞아요?
정말이야. 일정 조직도 훌륭하던걸?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네게 상담해도 괜찮겠지?
지휘관의 말에도 97식 산탄총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옷에 대한 감상을 아직 안 말했구나? 아주 보기 좋아. 음... 조합이 상당히 기묘하지만...
그, 그래도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잖니? 진짜 몰라볼 정도야!
이상한 말로 얼버무리려 하지 마요!
아, 들켰나...?
정말 미안해. 사과하는 뜻으로, 저녁 식사가 끝나면 같이 강시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59식이 이상한 옛날 영화를 여럿 추천해 줬거든.
참,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괜찮다면 지금 해 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담력 시합에서 지휘관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는데...
결국 시합이 끝날 때까지 지휘관을 보지 못했어요.
아... 그랬구나. 거참, 왜 핼러윈만 되면 다들 날 놀래키려고 혈안이 되는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너희의 지휘관은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무슨 장난을 쳐도 놀라지 않는다고.
날 비명 지르게 하려면 적어도... 아니, 그냥 이번 생에는 포기하렴.
뭔가 숨기는 거 같은데요...?
그, 그런 거 없어! 자, 어서 내려가서 밥 먹자!
지휘관은 97식 산탄총의 어깨를 토닥이고선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97식 산탄총의 입꼬리는 어째선지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껏 뛰어올라 지휘관의 뒤를 덮쳤다.
으아아아아아악!!
엑? 와아아, 으아아아아아아!!!
꽈당! 쿵, 쿵, 쿵...... 콰직.
...다음날.
그리폰 지휘실.
따르릉——
안녕하세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입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네? 발주하려면 본인이 가서 직접 서명해야 한다고요? 혹시 부관이 대리 서명해도 문제없을까요?
아, 네, 그게... 저희 지휘관님께서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셔서요.
아뇨, 별로 큰일은 아니에요. 어젯밤에 사고로 다리에 골절상을 입으셔서...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아뇨 아뇨, 병문안까지 오시지 않으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