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재단사
Saiga12
그리폰 기지의 복도.
정기 회의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 연회 준비는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아... 그냥 평범하게 모이기만 할 뿐이면 미소녀의 얼굴이 아까운데...
그때, 익숙한 모습이 기지에 나타났다.
아, 지휘관! 오랜만이에요!
안녕, Saiga. 오는 길이 어째 썰렁하던데, 다들 뭐 바쁜 일이라도 생겼니?
아, 지휘관은 아직 모르시겠네요. 저희, 성대한 파티를 열기로 했어요!
오, 그래? 휴가라고 내가 너무 무관심했나...
그럼 평소처럼 내가 음료수나 간식거리 준비하면 되지?
......
네? "성대한"이라니까요? 이번에는 결코 조촐한 파티가 아니에요.
조촐하지 않은 파티...?
네! 간만에 찾아온 다시 없을지도 모를 기회에, 모두 무기 들고 밥 먹게 하실 셈이세요?
어... 그야 다들 전술인형이기도 하니...
무엇보다, 제복이 문제예요!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라지만, 생각해 보세요.
요리사가 요리할 땐 셰프복을 입는 게 당연하지만, 퇴근하면 집에서 잠옷을 입을 거 아니에요?
아하... 말 되네. 파티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면, 다들 전투로 인한 긴장감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기왕 파티 여는 거, 모두가 마음놓고 편하게 놀아야겠지?
그렇죠! 그리고 가능하면 평소에는 잘 안 입는 옷이 좋겠어요.
생각해 보니... 다들 움직이기 편한 것만 따져서 옷장에 치마가 거의 없단 말이죠.
그럼 드레스 코드를 예복으로 정하자. 원단을 주문하고... 자세한 건 M200이랑 QBU-88과 상담해보면 되겠지.
와아~ 지휘관 최고!
그런데, 다들 그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 놓고 파티에서 밥만 먹게 하실 셈이세요?
으음... 드레스엔 역시 무도회겠지? 그로자한테 연락해 둬야겠어.
역시 지휘관은 세계 최고의 지휘관이에요!
지휘관은 드레스 관련 업무를 배정하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히히히, 지휘관은 진짜 구슬리기 쉽다니까!
이걸로 우리 기지 미소녀들의 드레스 차림을 볼 수 있게 됐다! 야호! ...음, 다음에는 수영복 파티 열자고 해야지!
그리폰 기지의 무용실.
무도회의 소문이 퍼지면서 찾는 인형들이 며칠 새 부쩍 늘었다.
무도회라니 좋은 기회네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SVD의 코를 납짝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그런 데에서까지 승부욕을 불태워야 되겠어? 모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는데, 기념 사진을 많~이 찍는 게 좋지 않을까?
사진 같은 걸로 어떻게 결판을 내요? 흥미 없어요.
진정한 전술인형은 춤도 제일이어야 한다고요.
졌다 졌어... 계속 곁에 있다간 나까지 압박감에 짓눌릴 것 같아...
방에 가서 미소녀 앨범으로 힐링해야지...
그거 또 만들었어요? 이번엔 또 누구한테 주려고요?
이젠 기지 애들 모두가 다 한 권씩 받았을 지경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KSVK한테는 못 줬는데. 아 맞아, 저번에 개한테 실례했을지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요?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 초대하고, 앨범을 선물하려 했지.
훈련 때는 꾸준히 난이도 바꾸면서, 사람 꼬시는 방법은 여전히 그거뿐이에요?
......
자괴감 든다.
선심 써서 충고하는데요, 매번 똑같은 패턴으론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난 항상 누구에게나 진심인걸!
그럼 왜 선물이 항상 그건데요?
이 세상에 앨범을 거부할 사람은 없으니까!
미소녀 앨범이라면 더더욱!
어휴 진짜... 아 몰라, 언젠가는 당신도 깨닫겠죠.
밤이 되고, 무도회의 막이 올랐다.
정성 들여 꾸민 익숙한 얼굴들이, 줄줄이 댄스 플로어로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Saiga, 하얀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네요.
헤헤, 지휘관도 눈치가 참 좋다니까? 아주 작은 더러움도 용납하지 않는 이 순백!
그나저나 M76 너 오늘따라 더 예쁘다~ 괜찮으면 나랑 한 곡 출래?
...싫어요. 전 이기기 위해서 춤에 전념해야 한다고요. 당신이 파트너면 실력 발휘에 지장이 생길 게 뻔해요.
매정하긴!
그래도 쌀쌀맞은 미소녀도 귀여워~
아아... 오늘 이렇게 잔뜩 힘 줘 꾸미고 온 애들을 보니 눈이 정말 즐겁다아~
그럼 천천히 감상하세요, 전 몸 풀러 갈 거예요.
그래~ 같이 춤출 사람은 더 찾아보면 되겠지.
연회장의 조명이 동시에 전부 켜지자, 한순간 눈이 부셨다.
하아... 다 아는 사이라지만, 이런 자리에 흔치 않은 복장인데 처음 보는 사람으로 봐주면 안 되나?
Saiga-12는 의욕 넘치게 연회장을 한바퀴 순회했지만, 결국 좋은 댄스 파트너를 찾지 못해 풀이 죽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에 가 술을 주문하려던 그때, 익숙한 듯 익숙치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킬리안 로즈 한 잔 만들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추가 요구 사항 있으십니까?
아뇨, 그쪽 표준대로 해 주세요.
이런 이름의 칵테일은, 분명 사람을 심취하게 하는 맛이 나겠죠?
못 들어본 목소리! 신입인가?
안녕~? 어머나, 많이 낯익은 미소녀네!
저요?
회색빛의 소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처음 보는 미소녀에게 Saiga-12가 작업을 걸던 그때...
연회장의 불이 꺼졌다.
앗——
릴렉스 릴렉스~ 좀 있으면 댄스 타임인데, 그냥 하기엔 너무 밝아서 불을 끈 거란다~
그랬군요... 고마워요.
천만에~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니?
혹시 KSVK랑 닮았다 생각하세요? 제 언니예요, 닮은 것도 당연하죠.
그래!? 그, 그럼... 왜 걔가 널 여기 혼자 뒀니?
언니가 오늘은 일 때문에 바쁘다면서 저한테 초대장을 양보했어요.
제 이름은 드셰브니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드셰브니... 예쁜 이름이네.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자, 조명도 그에 맞춰 반짝였다.
주문하신 킬리안 로즈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넌 춤 추러 안 가?
전 춤 안 춰요.
에이, 댄스 파티인데 춤을 안 추면 아깝지.
봄이 와도 고집부리며 잠에서 깨지 않는 꽃이 있는 것처럼...
무도회에 왔다고 꼭 모두를 따라할 필요는 없죠.
그야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으니까 그렇지.
해보지도 않곤 좋은지 싫은지 모르잖아?
...언니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열정적인가요?
아아아니 당연히 아니지!
난 미소녀한테만 열정적이라고!
그, 그게... 나랑 네 언니는 직장 동료잖아? 언니 대신 널 돌봐줄 의무가 있어.
모두가 춤추니까 너도 하라는 게 아니라, 재밌으니까 같이 추러 가자고 권하는 거야.
...실은 저, 춤출 줄 몰라요. 제일 간단한 왈츠도 못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왈츠가 얼마나 쉬운데!
정말요? 전문 학원 같은 데서 배우는 사람도 있다던데.
정말로 쉽다니까! 드셰브니, 네가 달을 쫓는 장미라 생각해 보렴. 바람을 맞으며 동그란 달의 그림자를 찾는 장미.
네 치마가 빙글 돌면, 정말 예쁜 장미 같을 거야.
네 손의 그 킬리안 로즈랑 정말 잘 어울릴걸?
말을 듣으니 조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하지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겁나요.
그, 그럼 사람 적은 데서 연습할까?!
...네?
여기서 가까운 데에 무용실이 있거든!
풉... 그치만 제가 실수하는 꼴을 언니한테만 보이는 것도 부끄러운걸요.
아, 안 볼게. 절대 안 볼게.
네가 달을 찾는 동안 나도 내 달을 찾으면 돼!
어찌어찌 설득된 드셰브니는, Saiga-12에게 이끌려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다.
조금 긴장되면서도 스릴감이 느껴졌다. 달빛 아래서 처음 보는 미소녀와 함께 춤춘다고 생각하니, Saiga-12의 가슴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드셰브니는 말이 적었지만, 입가의 저 미소는 즐겁다는 뜻이 분명했다.
두 분 거기서 뭐하세요?
아이 깜짝이야! M76 너야말로 여기서 뭐해?!
저야 춤 연습하고 있었죠.
...Saiga 씨, KSVK 데리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사람 잘못 봤어, 얘는 KSVK의 동생 드셰브니야.
동생...?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요?
내가 제대로 안 말했나... 얜 KSVK의 여동생이라니까?
좀 어려보이는 소체일 뿐이지, 저한텐 KSVK로 인식되는걸요 뭘.
그래서 KSVK, Saiga 씨가 몇 번째 희생양인가요?
이런, 들켜 버렸나?
그리 많지 않아, Saiga가 13번째다.
뭐...라고...?
SVD는요? 그녀도 당신의 정체를 알아봤나요? 몇 초나 걸렸어요?
물론 SVD한테도 들켰지. 걸린 시간도 대충 너와 비슷했다.
그건 좀 아쉬운데요... 역시 춤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나.
KSVK... 너... 너 날 속였어...?
그 말대로. 평소 장난 안 하던 자가 갑자기 장난을 치면 성공하기 쉬운 법 아닌가?
그... 그럼 같이 춤 추는 건...?
하하, 정체가 들통난 이상 계속할 의미가 있나.
그... 그렇지...
그럼 오늘의 장난은 여기까지인 걸로. 괜찮지?
응...
"드셰브니"는 미소와 함께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표정은, 틀림없는 KSVK 본인이었다.
저도 연습 계속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응... 난... 좀 혼자서 생각을 좀...
내가 13번째로 속았다고?
왠지 좀 속상한걸...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속은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덜 속상했을지도...
아아... 난 장난에 당해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무도회도 막을 내린 뒤, Saiga는 인파 속에서 찾던 인물을 발견했다.
KSVK! 나랑 얘기 좀 하자!
음? 물론이지.
아까의 장난에 대한 보복이라면 개의치 않아.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럴 생각 없어.
그냥, 너한테 미안하다 전하고 싶어서.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당한 자는 너인데, 왜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하려는 것이지?
오늘 일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보자마자 달려들어서 앨범 주고 그래서 많이 실례였지? 미안해...
아하... 흠, 확실히 좀 많이 놀라긴 했다.
그런 선물을 받는 건 난생 처음이었어서, 꽤 신기한 경험이었어.
그것 때문에 나쁜 인상을 줬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난 그저... 내 호감을 표현하고, 미소녀의 호감도 얻고 싶어서 그랬어.
그런데 곰곰이 되새겨 보니까,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정말 미안해.
타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먼저 호의를 표한다...?
그런 적극적인 태도는 실로 훌륭한 것이다만.
하지만 무턱대고 들이대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난처하단 걸 깨달았거든.
게다가 주는 물건이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 걸 수도 있는 데다, 아직 상대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
...어?
내일 오후 2시, 카페에서 기다리겠다.
뭐?
사과하려 한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야. 여우도 어린 왕자와 시간을 정하고 다시 만났잖나?
그러니, 우리도 내일 처음 만난다고 생각하면 돼.
후훗, 의례라... 언제 해도 역시 기대감으로 흥분되는군.
......으, 응! 절대 안 늦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