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달빛의 사랑
RMB93
꿈을 꾸었다.
인형으로선 불가능할 터인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선 달도, 별도, 등불도 없어 온통 깜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의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리고 내 옆에는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새벽녘의 햇살에 은빛 머리카락이 비치는 그 모습은... 마치 밤을 부르는 정령 같기도, 아침을 인도하는 천사 같기도 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 만져도 될까?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니, 그녀를 만지면 인형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부팅하는 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무기 각인 동기화에 메모리 정리도 해야 하니까 양해해 줘...
그러나저러나... 나 오늘 비번이거든? 출근 안 해도 된단 말이야. 설마 특근은 아니지?
비번인 건 나도 아는데, 엄청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지휘관의 명성이 달린 문제야.
어머, 그거 의외네. 지휘관한테 명성이랄 만한 게 있었어?
농담할 상황 아니야.
...그래, 알았어. 그래서 무슨 일인데?
어제 파티에서 엄청 취했던데, 설마 누구한테 손이라도 댄 거야?
그랬으면 오히려 편했지... 반대야, 지휘관이 취해서 곯아떨어진 틈을 타 지휘관에게 손댔을지도 몰라.
혹시 M950A 아닐까? 걔 어제 지휘관이랑 같이 마시던데, 취하면 엄청 과감해지더라.
말 돌리지 마, 내가 너 취조하러 온 거 진작에 눈치챘으면서.
어머~ 그랬니~? 그럼 지휘관의 명성을 위해 협조할게. 어디서부터 진술하면 돼?
그럼――
아, 잠깐 잠깐. 엄청 급하진 않지?
너야말로 비번인데 따로 급한 일이 있어?
아니, 하지만 우선 몸단장부터 좀 하고 대답하려고.
봐봐, 충전 케이블 꽂은 채로는 불편하단 말이야.
...미안, 내가 실례했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마카로프가 방에서 나갔다.
간밤에 재밌는 일이 있었나 보네...
여성이 몸단장하는 덴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이지. 준비하면서 게시판이나 좀 볼까...
잠시 후, RMB-93도 복도로 나왔다.
어머, 사람이 더 있었네?
스테츠킨도 참고인으로 불렀어?
아니, 난 그냥 구경하러 왔지.
이 녀석은 그 문제의 영상을 그불게에다 올려서 이번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야. 징계를 겸해서 조사에 협력 중이지.
그렇구나. 역시 넌 특근이랑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구나, 스테츠킨... 불쌍해라.
그럼 이 불쌍한 인형에게 기부 좀 해 주세요~
금액이 마이너스여도 괜찮지? 아직 너한테 받을 돈이 있어서 말이야.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진 몰라도 적당히 해.
이건 엄청 심각한 사안이라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 줄래?
음... 간단히 설명하자면, 어젯밤 지휘관의 방에서 신원불명의 장발인 여성의 그림자가 포착됐어. 스테츠킨이 감시 시스템이 업데이트된 직후에 발견했고.
지휘관을 사모하는 인형도 많은데, 누가 몰래 방에 숨어들었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캡처한 거 있어?
당연히 있지. 봐 봐.
흐음...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실루엣인걸.
내가 어젯밤에 한 일도 딱히 별거 없었어.
밤 9시 정각부터 파티장 외부의 보안 임무를 수행했어.
파티는 밤 10시 51분쯤에 끝났고, 그후에 M950A가 숙소 쪽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거랑, 그리즐리랑 Zas가 지휘관을 방으로 데려가는 것도 봤지. 그 둘은 지휘관의 방에 들어갔다 한 20분 정도 뒤에 나왔어.
음...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네. 그 뒤엔 뭘 했어?
감시 시스템이 재가동한 뒤의 일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 기록에 남았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전부 말하지 않았잖아. 그리즐리랑 Zas가 방을 나선 뒤와 시스템이 복구되기 전까지 몇 분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땐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꼭 말해야 해?
작은 단서라도 놓칠 수는 없으니까.
왜, 남이 알면 곤란한 일이야?
너한테 그렇게 캐물을 권리는 있고?
당분간은.
다른 사람한테서 네가 M950A가 주정 부리는 모습을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네 입으론 그걸 안 말했잖아.
그런 간교한 은폐는 받아 줄 수 없어. 그 촬영에 쓴 기기 내놔.
거절한다면? 그건 내 개인물품이야.
뭐, 나야 상관없지. M870이랑 FP-6이 나 대신 "부탁"할 테니까.
엑, 걔네들은... 알았어, 보여 줄 테니까 걔네만큼은 봐줘.
RMB-93는 카메라를 꺼내 와 마카로프에게 건넸다.
다 깔끔하게 지워졌잖아... 백업본 없어?
그리즐리가 영상을 통째로 가져가버렸거든. 퍼뜨리지 말라길래 알았다고 했는데, 나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 그럼 이 잠겨진 폴더는 뭐야?
어휴 진짜... 이 이상 숨기면 의심만 더 받겠네.
RMB-93은 패스워드를 입력해 잠겨진 폴더를 열었다.
녹화 영상이 재생되자, 세 인형은 얼굴을 맞대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보다시피, 그냥 시시한 영상이야.
웃기고 있네, 지휘관이 자는 모습을 찍은 게 뭐가 시시한 영상이야?
시간도 딱 그리즐리랑 Zas가 나간 뒤의 그 공백의 몇 분간이네.
나도 감시 시스템이 다시 켜지기 전에 떠났어.
그러니까, 넌 그날의 부관이자 경비원이었으면서 지휘관의 방의 도어 록을 열곤 다시 잠그지도 않고 갔다는 거네?
응? 뭐? 문이 안 잠겼다고?
그러고 보니, 그때 잠깐 의자에 앉아서 쉬다 문을 다시 잠그려 할 때... 아주 잠깐 필름이 끊긴 듯한 느낌을 받았어.
손도 도어 록에 올려져 있어서 잠근 줄 알았는데...
필름이 끊겼다니, 마인드맵 오류 말이야?
그건 아닐걸, 정말 아주 잠깐이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소홀했던 탓이니, 그걸로 징계받아도 할 말 없겠네.
그거야 지휘관이 판단할 일이지.
내가 지휘실의 문을 연 것도 마침 그때였다.
별일 없었으니까 재발하지만 않으면 돼.
그렇게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다 생각하는데...
별일 아니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감시 시스템이 점검 중이던 사이에 누가 아무도 모르게 지휘관의 방에 침입했는데, 만약 그게 적이었다면 우린 지휘관을 잃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내가 수상하다 생각해?
유감이지만, 이 영상 때문에 네 혐의가 더 커졌어.
영상이라니?
RMB가 그리즐리랑 Zas가 나간 뒤에 들어가서 지휘관 찍었어!
자는 얼굴이 꽤 귀여운 게 다른 애들한테 팔면 돈 좀 되겠더라. 지휘관도 볼래?
아니 무슨 수치심 고문도 아니고... 그 영상 당장 지워.
어쨌든, RMB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지휘관이 함부로 단정 짓는 게 불편하지만, 그래도 난 아니야.
봐 봐. 이 사진, 비록 많이 흐릿하지만 어느 정도 파악은 가능해. 침입자는 몸이 가늘고, 머릿결의 그림자도 긴 데다 커튼에 진하게 비치지? 분명 장발에 짙은색이어서야.
그러니까, 네가 머리를 풀었더라도 은색은 투광률이 높으니까 그림자가 이렇게 진하진 않을 거다?
바로 그거야.
확실히 일리 있네...
그럼, 나오기 전에 수상한 건 못 봤어?
봤다면 얘기했겠지.
나도 RMB가 아니라고 믿어, 그럴 이유도 없는걸.
그나저나 지휘관은 왜 그렇게 급하게 변호해?
지휘관이 더 수상하네, 혹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아, 아무튼! RMB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해.
믿어 줘서 고마워, 지휘관.
그럼 먼저 실례해도 될까?
그래... 협조 고마워.
그럼 이만~
잠깐!
다 끝났다며, 또 뭔데?
영상 지우고 가.
휴일이 끝나기까진 아직 한참 남았지만, 마음 놓고 쉴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련의 소동도 어찌어찌 일단락되어, 나도 드디어 푹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밤, 방으로 돌아가던 도중 의외의 인물과 숙소 앞 마당에서 마주쳤다.
RMB...?
좋은 밤이야, 지휘관.
아니, 이럴 땐 "다녀오셨어요 서방님~"이 나으려나?
하하, 정말 예쁜 드레스네. 카노가 골라 줬어?
칭찬 고맙지만, 내가 직접 고른 거야.
누가 뭐래도, 역시 내가 직접 고른 게 제일이니까.
맞는 말이네. 그런데 혼자 여기 앉아서 뭐하니?
뭐하긴, 지휘관을 기다리는 중이었지. 지휘관이야말로 왜 그렇게 긴장하셨을까?
걱정 마, 난 스테츠킨처럼 공갈 협박 같은 거 안 해. 잠깐 얘기할 여유는 있지? 마실 것도 준비했으니까 같이 한잔하자.
술이야?
무알코올 수준이니까 안심해.
RMB-93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나는 한잔 건네받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럼, 오늘밤의 달에 건배.
우리는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지휘관의 방에 들렀던 그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꼭 숨겨야만 하는 비밀인 거지?
아예 그날 방문했던 인형들 중 아무한테나 뒤집어씌우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지휘관은 그러지 않았어.
아... 응.
그런 지휘관이 정말 좋다니까.
항상 파격적인 일을 하면서, 우리에게 과하게 제약을 걸지도 않아서.
다른 데도 비슷하지 않나?
당연히 아니지.
내가 그리폰에 오기 전에 어느 금융회사에서 일했단 건, 이력서 봐서 알지?
어휴, 거기 사내 수칙을 책으로 내면 카리나가 여태까지 쓴 작전보고서 전부 합친 것보다 두꺼울걸? 인간이든 인형이든 아주 살 떨리게 관리했어.
듣기만 해도 숨막히네...
뭐, 그런 규칙도 꼼꼼하게 살펴보니 틈이 있어서 숨 돌릴 여유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규칙의 허점을 찾아 빠져나오려고만 해선 다 똑같은 모양이 될 뿐이야.
반듯한 네모 조각들을 직장이란 테이블에서 아무리 굴려 봤자 하나도 재미없는걸.
하하... 재밌는 비유네.
그래서 그리폰이 마음에 들어.
딱 필요한 만큼만 규제하고 개성을 억누르지 않으니까, 인간이 우리에게 설계해 준 개성이 의미 있다는 게 실감되는 거 있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RMB, 그 영상은 대체...
어느 영상?
M950A 거, 아님 지휘관 거?
내 영상.
지휘관만 파격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지휘관을 촬영하면 안 된다는 규정 있어?
화, 확실히 그런 규정은 없다만...
그럼 지금부터 금지하게?
그래도 상관없어, 인형은 인간에게 반항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시킨다면 따를 뿐이야.
...금지할 생각도 없어.
후훗... 지휘관, 나 좀 봐 봐.
응?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 RMB-93은 갑자기 몸을 내게 기울였고, 부드러운 감촉이 순식간에 내 뺨을 지나갔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에게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베일만 스쳤다.
그럼 오늘의 면회는 여기까지~
좋은 꿈 꿔, 지휘관♪
그렇게 RMB-93은 자리를 떠났고,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다 달빛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늦은 밤, 그녀에게서 "필름"이란 주석이 붙은 영상을 받았지만... 과연 그녀가 백업본을 남겼을지는, 영영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