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대나무
PKP
......
가구 포장 센터.
PKP는 가구 포장 임무를 지시받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왔지만,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일찍 왔군.
아, PKP 씨. 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
그럼 왜 그렇게 거리를 둬요...?
저랑 가까이 있기 싫으세요?
아니, 그저 혼자 있는 편이 익숙해서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렇군요.... 아무튼, 우리 함께 잘해 봐요!
그래.
두 인형은 개점에 대비해 각종 포장재를 준비했다. 도중에 SPP-1이 PKP와 몇 번 부딪칠 뻔했지만, 그때마다 PKP는 멋지게 회피했다.
그래서 멋쩍었는지, SPP-1이 딱 할 말만 하던 PKP에게 말을 걸었다.
저... PKP 씨는 새 옷 안 샀어요?
이미 충분히 많으니 굳이 또 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번에 받았던 옷 샘플 중에서도 내게 어울리는 게 없었으니, 이대로도 충분해.
정말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분명 군청색 옷을 한참 바라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색상은 괜찮았지만, 치맛자락이 너무 거추장스러웠어.
아... 정말 뭐든지 완벽을 추구하는군요
그래. 그리고 지금은 업무 중이니 잡담은 이쯤 하자.
비켜, 그쪽에서 물건을 꺼내야 한다.
아, 네...
얼마 지나지 않아, SPP-1도 자신이 오히려 PKP에게 부담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곤 그녀와 멀찍이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SPP-1이 커다란 수족관 속으로 숨자, 그걸 본 PKP도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겠군.
4번째 고객.
저기요, 포장 교체되나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집들이 선물로 직접 보내려는데, 이 포장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요.
좀 더 심플하면서도 경사스러운 느낌으로 바꿨으면 하는데요.
심플하면서도 경사스럽게.
알겠습니다.
선반에 놓인 온갖 포장재들을 확인하며 PKP는 머리를 굴렸다.
거추장스럽다니 R2 금테 종이는 안 되고, 대신 PU 재질로 모서리를 감싼 뒤 금색 장식을 붙이면...
침착한 느낌의 적갈색을 바탕으로 완충재를 추가해서...
4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와, 훨씬 낫네요!
다음 고객.
이걸 소포로 보내려 하는데요.
어떻게 포장하고 싶으신지?
으음... 그 멍청, 아니 그 사람이랑 화해하려고 선물하는 건데, 딱히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거든요?
그러니 그냥 딱 봐서 럭셔리해 보이면서도 담담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담담하면서도 럭셔리하게. 그럼 차가운 색인 B-3를 메인으로...
모서리를 주의해서 포장하고...
5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친구에게 보낼 건데, 내용물이 뭔지 모르게 하고 싶어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인데, 최대한 정중하게...
......
손님이 점점 더 많아지자, PKP도 더 신속하게 요구에 알맞는 포장 방안을 연산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PKP라도 이런 고속 연산을 장시간 유지하기엔 부담이 컸다.
간단한 일이라 생각했더니, 인간의 요구가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저마다 다른 요구에 맞춰 처리하는 건 장기전만큼 힘들군.
그래도 PKP의 노력 덕분에, 대기 손님의 수가 많이 줄었다.
포장재 선반을 정리할 여유도 생겨, PKP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왠지 조금 이상했다.
이상해.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대기열이 상당히 길었는데, 왜 불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
멋지다! 덤블링! 덤블링 한 번 더 해봐!
덤블링?
PKP는 고개를 들어, 많이 줄어든 인파 너머를 살펴봤다.
SPP-1이 어느샌가 물로 가득 찬 수족관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물속에서 아름다운 무용을 뽐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군... 고맙다, SPP-1.
녀석도 힘들 테니 나도 서둘러야겠어.
150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우와... 어? 벌써 내 차례야?
와, 깔끔하네! 고마워요!
......
지휘관이 가구 포장 센터에 들렀을 땐, PKP의 작업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지휘관을 본 PKP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면서 다음 화물을 포장하러 옆을 지나갔다.
오늘 임무는 어땠어?
그걸 나에게 묻는 건가? 내가 이 임무를 받은 시점에서 완벽한 성공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172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이야, 이 포장 엄청 창의적이네요! 좋아 좋아.
손님들도 다들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네.
물론이지.
각종 요구에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엘리트 전술인형으로서의 가치다.
하하, 역시 PKP구나.
그나저나, 옷을 사지 않았다면서?
내 기준에 맞는 것이 없었다.
이참에 주문 제작 의뢰할까?
그럼 명절도 다 지난 이후에나 수령하게 될 테니 더욱 필요 없다.
그것보다, 임무 완수 후에 이 등롱을 가져가도 될까?
물론 되는데, 어디다 쓰려고?
등롱 축제 때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대로 하렴.
저기, 제 물건은 다 됐나요?
지금 마무리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였네. 그럼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렴.
걱정 마라.
그렇게 PKP가 마지막 포장을 마친 순간이었다.
그녀의 완벽 추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물속에서 발버둥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족관 속에서 SPP-1이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발목의 고리도 불안정하게 번쩍였다.
합선인가?
당장 구조해야 해. 튜브로 ...
...아니, 이것만으론 늦어.
더 신중히 생각할 여유가 없어, PKP는 본능적으로 튜브를 던지면서 총을 들어 수족관의 측면을 쏘았다.
쏟아져 나온 물은 정면에 있던 지휘관에겐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급선무는 해결됐지만,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
어... PKP?
SPP-1의 상태부터 확인해라. 바닥의 물은 내가 어떻게든 처리하지.
......
인형들이 그리폰 기지로 귀환했을 땐 이미 깊은 밤이었다.
오늘의 임무 보고를 마친 PKP도 드물게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간 그녀의 방 문 앞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PKP 씨!
무슨 일이지?
저... 이거, 사과의 뜻으로 드리는 거에요. 받아 주세요!
사과라니?
그러니까, 그게... 오늘...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을 텐데. 나보다 못하단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다음부턴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자신이 서투른 분야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돼.
으... 그, 그래도 이건 제가 잘하는 분야예요!
PKP 씨, 설마 평상복으로 등롱 축제에 갈 생각은 아니죠?
참가할 생각 없다.
거짓말, 지휘관님이랑 말하는 거 다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잘하는 걸로 도와드리려고요. 자요, 제 선물이에요.
PKP는 고개를 숙여, SPP-1이 건넨 선물 상자를 바라봤다.
이건... 옷?
정말 내 마음에 들 거라 확신하나?
네!
빨리 입어 보세요!
알았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생각보단... 괜찮군.
그쵸~ 엄청 잘 어울려요!
네가 만든 건가?
아뇨, 하지만 제가 직접 개량한 디자인이에요.
치맛자락이 거추장스럽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재단을 잘하는 인형한테 부탁해서, 짧게 자르고 꽃무늬도 넣었어요.
...너무 짧은데.
아... 너무 짧았나요? 그건 생각을 못했네요...
괜찮아,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그날 밤, 등롱 축제.
지휘관은 축제 현장의 한구석에서, 예상치 못한 복장의 은발 인형을 발견했다.
PKP?
좋은 밤이다, 지휘관.
새 옷 안 샀다며?
SPP-1이 사과한다면서 준 "선물"이다.
지휘관 이외의 사람에게 받은 옷을 입는 건 처음이라, 느낌이 좀 이상하군...
아하... 정말 잘 어울려.
SPP-1 녀석, 그래서 대뜸 나한테 와서 돈을 잔뜩 빌린 거였구나... 하긴, 꽤 비싼 옷이니.
그럼, 다른 인형에게 선물을 받은 소감은 어때?
이상한 느낌이라 했잖아.
잘하고 못하는 것이 확실한데, 왜 서투른 분야의 일까지 거들려 한 건지 이해가 안 가는군.
해보지 않고선 정말 서투른지 아닌지 알 수 없잖아?
인형의 특기는 다 사전에 설정된다. 시도해봐야 알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SPP-1은 몸집도 작고 소체의 강도도 떨어져, 누가 봐도 가구 운반, 포장 업무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전과 탐구가 그 애의 천성인 거겠지.
그걸 임무에 가져오는 것 자체가 민폐다.
그래도... 잘하는 분야는 확실히 해내더군.
걔가 방해돼서 화나진 않았고?
난 고작 그런 일로 화내지 않는다.
그딴 소소한 문제쯤,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
그렇다니 다행이네.
참, 오늘 축제의 마지막 코너가 뭔진 아니?
마지막 코너? 축제 일정에 그런 게 있었나?
즉석에서 추가된 거야. 어느 인형이 업무 도중 겪었던 일에서 얻은 영감을 다듬어서 만든 수중 무용이라고 해.
제목이 뭐였더라... 아.
"푸른 연꽃".
......
같이 보러 갈까?
지휘관을 바라보며, PKP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