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연꽃
SPP1
......
가구 포장 센터.
일찍 왔군.
아, PKP 씨. 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
그럼 왜 그렇게 거리를 둬요...?
저랑 가까이 있기 싫으세요?
아니, 그저 혼자 있는 편이 익숙해서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렇군요.... 아무튼, 우리 함께 잘해 봐요!
그래.
......
35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요청하신 간결한 포장입니다. 이쪽의 카트를 이용해 바깥의 택배 서비스 센터로 가져가십시오.
오오, 딱 원하던 대로네요! 감사합니다!
40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고마워요. 이렇게 포장했으니 아무리 봐도 이게 꽃병인지 모르겠지? 후후후.
65번 고객...
우웅......
기세 좋게 잘해보자고 했는데...
일을 하나도 못하고 있잖아!
포장 센터에 3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 PKP 씨는 괜찮으세요?
포장도 엄청 힘든 일 같은데.
문제없다.
저도 도울까요? 포장지 찾는 일이라던가...
네 현재 복장으로는 협소한 공간에서의 이동에 지장이 생긴다. 됐어.
조심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애초에 우리 둘한테 맡겨진 일이니까 협력해야죠!
...그렇다면야.
방금 그 손님이 더 경사스러운 스타일로 부탁했죠? 중국풍이니까 빨간색 포장지가 좋겠네요.
어... 그런데 빨간색이 잔뜩이네...
R2로 부탁한다.
R...2요?
포장재마다 번호를 붙여놨다.
앗, 꺼낼 때 번호표를 못 봤는데...
금색 테두리가 있는 것.
이, 이건가요?
내가 하지.
으으...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 무늬와 번호를 잘 기억해라. 내가 말하는 번호를 가져와 줘.
네, 그러면――
SPP-1이 포장재를 제자리에 두고 몸을 돌리자, 치맛자락이 옆의 장식재 선반에 걸렸다.
조심해!
꺄악!
......
아아... 물건이 전부 쏟아졌잖아...
저, 이건 제가――
됐어. 가만히 있어라.
여긴 2명이 움직이기엔 너무 좁아.
하지만...
......네.
결국 아무런 도움도 못 되고 PKP 씨한테 폐만 끼쳤어...
손님도 점점 많아져 가는데...
침울해진 SPP-1은 방치된 수족관 안에 쪼그려 앉았다.
132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오! 잘 포장했네요.
뭐야, 이제 겨우 133번이라고?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거야?
보자, 내가 150번이니까... 스무 명이나 남았잖아!
다리 아파... 그냥 사지 말까...
......!
그래! 포장을 못한다면,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대신 손님의 시선을 끌자!
이 정도로 큰 수족관이라면 공연하기에도 충분해!
내 수중 능력을 뽐낼 기회가 왔어!
어디 보자... 전선이랑 플라스틱 껍데기도 있네? 좋았어!
이걸로 모터를 만들어서, 빛나는 부분은 전구로...
여기다 남는 천을 감싸면... 됐다!
응? 저 수족관에 물을 채우네?
저거 저번 아쿠아리움 행사 때 쓴 거 아니야? 이건 가구 전시회인데, 어디다 쓸 셈이지?
벌써 다음 전시회 준비라도 하나... 앗, 저기 위에 누가 있어!
여러분, 안녕하세요!
기다리느라 피곤하실 여러분을 위해 특별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수중 무용, "푸른 연꽃"을 감상해 주세요!
우아한 음악과 함께, SPP-1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물속에서, 빛나는 해파리가 작은 소녀의 모습을 비췄다.
으으... 물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
하지만 전술인형인 나에게 이 정도 온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SPP-1은 해파리를 발목의 고리에 연결하고 함께 우아하게 헤엄쳤다. 치맛자락과 해파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에, 관객들에게서 잇따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멋지다...
어디서 프로라도 섭외해 왔나?
아닐걸? 저 애, 아까 포장하는 데서 봤어. 스태프겠지.
프로든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그냥 조용히 보자. 근데 제목이 뭐랬더라? 바다의 정령?
푸른 연꽃! 전혀 다르잖아.
150번 고객, 화물 수령하십시오.
우와... 어? 벌써 내 차례야?
와, 깔끔하네! 고마워요!
모두의 관심이 이쪽으로 모였어! 작전 대성공!
이게 바로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요! 어때요, PKP 씨! 도움이 됐죠?
......
지휘관이 PKP와 이야기를 나누고 대기열 쪽으로 왔을 때까지도, SPP-1은 수족관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물속에서 재주를 넘는 그녀와, 그녀를 비추는 빛나는 해파리의 모습은 속세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지휘관과 SPP-1의 눈이 마주쳤다.
......
......헤헤.
SPP-1은 기지개를 켜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지휘관님.
인어? 세이렌? 물의 정령? 지휘관은 그녀의 모습을 무어라 비유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수고했어, SPP-1. 이제 대기열도 많이 줄었으니 그만 나와서 쉬렴.
SPP-1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하지만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몸이 나아가질 않았다.
뭐지!? 뭔가가 날 붙잡고 있어!
아, 발찌가...! 즉석에서 만든 거라 벌써 고장났나? 빨리 전원을 꺼야 해...!
SPP-1,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으으, 발찌가 안 꺼져요...
벗을 순 없어?
해볼게요...!
SPP-1은 몸을 웅크려, 자신을 잡아당기는 고리를 억지로라도 벗으려 했다.
하지만 플라스틱 껍데기로 급조한 그것은 인형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렸고, 급기야는 스파크까지 튀기 시작했다.
아앗! 케흑, 우으읍...!
당장 물을 빼는 수밖에 없다고 지휘관이 생각한 순간, 붉은 구명 튜브가 수족관 안으로 날아듦과 동시에 총성이 터졌다.
총알이 수족관의 측면을 깼고, 물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지휘관은 정면에 서 있었기에 물을 뒤집어쓰지 않았고, 물도 순식간에 다 빠졌다.
어... PKP?
SPP-1의 상태부터 확인해라. 바닥의 물은 내가 어떻게든 처리하지.
PKP는 말을 툭 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SPP-1은 붉은 구명 튜브를 껴안은 채로 수족관 밖으로 나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니? 기능에 문제는 없고?
괘... 괜찮아요...
SPP-1은 세게 발차기를 해, 망가진 발찌를 털어냈다.
또 PKP에게 폐를 끼쳤어요...
괜찮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PKP가 워낙에 완벽주의자라서 그래, 너까지 걔의 기준에 맞추려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겨우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망쳐 버렸는걸요...
게다가 신세까지 져서...
걔 성격에 그런 걸 신경 쓰진 않을걸?
하지만 저는 신경 쓰여요! 우으... 아, 그거다!
그거라니?
지휘관님! 저 돈 좀 빌려주세요!
응?!
일단 빌려주세요! 월급 받으면 바로 갚을게요!
SPP-1의 생떼를 못 이긴 지휘관은 결국 가진 현금을 전부 빌려주었다.
SPP-1의 월급의 절반은 되는 액수였는데... 대체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
그 궁금증은, 그날 밤 지휘관이 PKP와 다시 만났을 때 풀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