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새와 장미
M950A
......
으으, 머리가 지끈거려... 어라, 여긴 어디지...?
깜깜해서 하나도 안 보이잖아. 누가 불 껐어?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기억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일이라니, 그거야... 어... 어젯밤에 내가 뭘 했더라...?
여긴... 뭐야, 나 지금 레벨 2 플랫폼에 있는 거야?
메모리 정리하고 시치미 뗄 셈이야?
너, 발렌타인 파티에서 지휘관한테 억지로 술 먹여서 취하게 하고 덤으로 난동도 부렸잖아.
난동? 웃기지 마, 내가 그럴 리가――
넌 항상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 하고, 정 피할 수 없을 땐 꼭 변명거리를 찾지.
이번엔 또 뭐라 변명할 거야? 알코올 분해 과정에서 열이 발생해 시스템에 착란을 일으켰다고? 아니면, 인간의 숙취를 모방한 결과로 폭주했다 할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으... 다 기억났어, 기억났다고...
그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봐.
그, 그러니까... 내가 지휘관한테 억지로 술을 먹이고, 그리고... 그리고 마당에서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어. 랩도 해보고 발라드도 불러보고...
그리고?
으음... 그러다 누가 날 붙잡고 말렸어.
그게 누군데?
그리즐리였나...? Zas였을지도... 아니, 지나가던 다른 애였던가... 몰라, 그건 기억 안 나.
아무튼 한소리 들은 거에 기분이 상해서, 숙소로 돌아가서 공개 채널을 열고 거기서 계속 노래를 불렀어.
그런 다음엔?
그런 다음엔... 지금 내 눈앞에서 또 다른 나인 척하는 건방진 녀석이 누군지 생각하는 중이지!
M950A는 한걸음에 달려들어, 자신의 모습을 빌린 침입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윽?!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자, 자기 목을 조르다니 수복 비용이 아깝지도 않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위장이네. 가까이서 보니까 계단 현상까지 보여. 방금까진 내가 머리가 지끈거려서 잘 못 봤지만, 그런 솜씨로 날 속이려면 한참 멀었다고!
바른대로 말해, 너 누구야!
큭, 들켰나... 우선 손부터 놔.
여긴 내 방이니까, 무단 침입자를 즉각 처분할 권한도 있어.
물리적으로 네 마인드맵을 날려버린 뒤에 천천히 네 정체를 밝혀 볼까, 아니면 얌전히 자백할래?
히익, 뭘 그렇게 사납게 굴어!?
좋아. 셋...
자, 잠깐...
둘...
나야 스테츠킨! 스테츠킨이라고!!
스테츠킨은 기겁하며 홀로그램 위장을 풀었고, M950A는 붙잡았던 동료를 내려놨다.
말해, 또 무슨 꿍꿍이길래 이딴 장난을 쳤어?
콜록콜록... 폭력이면 다인 줄 알아? 지휘관한테 이를 거야.
이르든 뭘 하든 확실하게 설명부터 해, 너 내 방에 왜 들어왔어?
내 물건 훔치려고 왔지? 저번에 물자 빼돌린 일로 징계를 받았으면서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생인형 잡지 마셔! 난 지금 마카로프랑 같이 공무 수행 중이라고!
마카로프? 걔라면 믿을 만하지만... 걘 지금 어딨는데?
어... 아마 다른 사람을 취조할 준비 중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구나. 당장 신고해야지.
아 진짜 정말 공무 수행 중이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네 물건들은 다 반값으로 내놔도 팔릴까 말까인 중고품인데 내가 왜 훔쳐!
정 못 믿겠으면 그불게 보던가!
무슨 공무를 게시판에서 확인하란 거야? 뭐, 속는 셈치고 봐주지.
어디 보자... 어젯밤 감시 카메라에, 지휘관의 방에서 수상한 그림자가 찍혔다고?
11시 반쯤의 사진이야. 넌 그때 한창 마당에서 게릴라 콘서트 중이었잖아, 수상한 사람 못 봤어?
내가 어떻게 알아, 노래하는 데 열중해서 누가 날 잡아끌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오오~ 그러니까 넌 어젯밤에 소음공해밖에 안 일으켰고,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단 소리지?
뭐야?!
아쉽지만 하는 수 없지, 엘리트 전술인형인 M950A가 한밤중에 숙소 앞 마당에서 고성방가나 하느라 지휘관 방에 누가 숨어들었는지도 못 봤다니 말이야.
그런 같잖은 도발에 내가 넘어가나 봐라.
아무튼, 누가 지휘관의 방에 들어갔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알았으면 당장 내 방에서 나가.
그렇게 앞뒤 꽉꽉 막힌 성격이니까 방에 이딴 재미없는 음향 설비밖에 없는 거라고.
흥이다, 나 갈래.
스테츠킨은 툴툴대며 방을 나섰고, M950A 혼자 조용한 그녀의 방에 남겨졌다.
그리고 한참 뒤,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하고 쿵쿵 발을 굴렀다.
으으으――!! 날 깔봤겠다!? 두고봐, 내가 누구보다 먼저 진실을 밝혀내서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니까!
지휘관의 휴게실.
좋아... 현장 유지 상태는 양호하네.
M950A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덧신을 신고 방으로 들어가 수사를 시작했다.
먼지는 말끔하게 청소됐어. 물건들도 최근에 정리한 흔적이 있고... 침대 머리맡에 초콜릿? 범인이 남긴 걸 수도 있겠네...
잠깐, 이쪽 자리에 누가 앉았던 흔적이 있네? 지휘관은 그날 취해서 여기 앉았을 리는 없으니... 누구지? 위치도 딱 창문의 정면인데.
누가 여길 돌아다녔고, 방의 스탠드도 켜져 있었다면... 분명 창문에 그 모습이 비쳤겠지? 엄청 중요한 단서야, 관련 있는 증거를 찾아낸다면...
...찾았다! 검은색에 긴 머리카락! 게시판에 올라왔던 사진도 분명 장발이었어, 범인의 것일지도 몰라!
M950A는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집어 투명한 봉투에 넣고 곧장 지휘실로 향했다.
그런데, 지휘실의 문을 열기 직전 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
파티의 그 일은, 제가... 제가 한 거예요...
제가, 훌쩍... 제가 M950A를 부추겨서, 지휘관님한테 술을 먹이게 했어요...
오호라, 그때 나한테 한 말이 지휘관을 취하게 만들려고 부추기는 거였다고?
미안해... 잘못했어... 하, 하지만... 훌쩍... 나 진짜 지휘관님 방에 아주 잠깐밖에 안 있었다구!
초콜릿... 초콜릿만 두고 나왔는데... 우으...
아, 침대의 그 초콜릿은 네가 둔 거였구나.
우으으... 네가 노래 들으라면서 날 붙잡았단 말이야... 그리고 Zas도 날 봐서... 계획이 들통날까 봐 초콜릿만 두고 바로 나왔다구...
어... 그건 전혀 기억에 없는데...
M950A는 한숨을 푹 쉬고, 팔짱을 낀 채 지휘관과 FNC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10분 후.
좋아, 내 차례지?
요점만 말할게. 지휘관의 방에서 이걸 발견했어.
단서라도 찾은 거야?
직접 봐.
M950A는 그 검은 머리카락이 담긴 투명 봉투를 꺼내 들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으로 봐선, 그 여자는 짙은 색의 긴 생머리가 분명해.
지금 우리 중에 이 특징에 가장 가까운 건 스테츠킨인데, 걔 어젯밤 당번이었단 건 다들 알지?
잠깐, 뭐? 게시판의 영상이며 사진이며 다 지웠을 텐데? 누가 백업본 올렸어?!
누구긴 누구겠어, 이렇게 관심에 목마른 녀석은 MDR 말곤 없지.
글 제목도 봐, "충격! 지휘관의 한밤중의 밀회가 유출!" 올리자마자 조회수가 오늘 최고치 찍었으니, 포인트 잔뜩 벌었다고 낄낄대고 있을걸?
그 녀석이 보자보자 하니까... 계정을 5일 정지시켜야겠어.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아무튼 너희의 용의자 리스트에 한 명 빠졌어.
응? 그게 누군데?
자세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기록이 있더라. 지휘관의 방을 방문한 인형이 한 명 더 있어.
M1014. 머리 길이도, 색도 사진과 흡사해. 이미 여기로 오라고 불렀어.
아하... 한번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지휘관, 지휘관의 권한으로 걔의 방문 시간을 알 순 없어?
M1014도 아니야, 오늘 아침에 날 깨운 게 걔거든.
하지만 M950A의 말도 일리가 있잖아? 만약 M1014가 숙소에 들어가서 아침까지 있었던 거라면, 그대로 사건은 종결이란...
...아, 방문 시간이 오늘 아침이구나. 그럼 걔는 결백하네.
으... 내가 헛짚은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뭐, 너도 확실한 시간은 몰랐잖아.
하지만, 이래서는 그게 대체 누구인지 밝혀내기가 점점...
...지휘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음? 뭔데?
왜 그 사람이 FNC도, M1014도 아니라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어? 사실 그게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어?! 그, 그건...
시치미 뗄 생각 마. 내가 지휘관이랑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시선 슬쩍 피하는 것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다 알아.
얼른 말해, 사진 속의 그 사람 대체 누구야?
취... 취해서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런데 왜 아니라고 단정짓는 건데...
몰라, 말하기 싫으면 지휘관 마음대로 해.
어, 어디 가?
내가 범인인 것도 아닌데 뭐. 오늘은 임무도 없으니까 방에서 빈둥댈 거야.
......
M950A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지휘실을 나갔다.
하지만 그날 저녁, M950A는 홀로 훈련장에 있었다.
사격 훈련 완료. 성적 결산 중...
전술인형 M950A - 화력 등급 A, 명중 등급 A, 사속 등급 S.
재시작.
알겠습니다. 사격 훈련을 시작합니다.
......
사격 훈련 완료. 성적 결산 중...
전술인형 M950A - 화력 등급 A, 명중 등급 A, 사속 등급 S.
한 번 더.
......
훈련장에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시간이 흘렀고, 바깥은 점점 어둠이 드리웠다.
결국 한참 지난 뒤에야 총성이 멎었다.
후우... 후우...
쉬지 않고 사격하느라 지친 M950A은 뜨거워진 총을 내려놓고, 훈련장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으, 모의 훈련인데 옷까지 찢어 먹었네... 나중에 수선해야지.
후우... 역시 이런 스트레스 해소법은 나랑 안 어울리나? 총소리를 들을수록 오히려 짜증만 더 치솟았어...
흠 흠, 탄식 소리가 들리길래 와 봤더니 역시나. 거기 길 잃은 아가씨, 혹시 인도가 필요하진 않니?
누, 누구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M950A이 벌떡 일어나 보니, 창밖에 웬 자그마한 드론이 둥둥 떠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시시한 장난은. 지휘관이지?
후후후... 내가 바로 "그리폰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지.
나는야 달무리의 정령, 창밖의 솔새! 고민이 있는 사람 앞에만 나타나는 요정이야.
내가 사이버 요괴한테까지 위로받을 정도로 꼴불견인 처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겉모습만 보고 무시하는 거 같은데, 사이버 요괴도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있다고.
어디, 내가 한번 맞춰 볼까? 흐음... 너는 지금... 지휘관 때문에 고민하고 있구나?
그리폰에서 지휘관 생각 안 하는 인형이 있기나 해?
...그래 뭐, 숨길 것도 없지. 벌써 쫙 퍼진 소문이잖아.
기지를 돌아다니면서, 지휘관의 방에 수상한데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
하지만 넌 용의자도 아니잖아?
그 녀석의 정체 따윈 나랑 아무 상관 없어.
그나저나 너, 대화 기록은 비밀로 할 수 있어?
녹음이 끝난 기록은 전부 폭죽과 함께 하늘로 쏘아 올려져서, 깔끔하게 터져 사라질 거야.
뭐야, 이상한 소리나 하고...
사실, 심각한 고민도 아니야. 난 엘리트 전술인형이니까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평소에도 최전방에 나서고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쬐끔 부끄럽지만, 난 아주 강해.
그래, 넌 아주 뛰어난 전술인형이지.
그런데 어젯밤엔 FNC 녀석의 도발에 넘어가서 지휘관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먹였고, 나도 취해서 밖에서 노래나 불러대서 수사에 혼란을 빚었어.
이상한 점도 눈치챘지만, 카라비너처럼 끝까지 추궁할 배짱도 없고...
그리고, 지휘관은 우리를 믿지만 대다수의 상황에서 인형에게 비밀을 맡기면 금방 새어 나가잖아? 그래서 아직 내가――
난 요정이라 그런 거 잘 몰라. 너무 어려워.
어휴, 그렇겠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들은 거 전부 폭죽처럼 하늘로 쏴 버려.
그래도, 지휘관은 솔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잖아?
그저 아직은 진실을 말해 줄 때가 아니라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럼 나중에 알려 줄지도 모르잖아.
논리가 뒤죽박죽이잖아... 지금 날 위로하려는 거야 뭐야?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지휘관은 엄청 믿음직해. 언제 어느 때나 최적의 지휘로 우리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해 줘.
하지만, 난... 여전히 나라는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 그래, 이건 내 문제야...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어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 이런 어이없는 추태까지 보이고 말았어.
지휘관은 마음에 두지 않을걸? 누구나 나름의 생각이란 게 있잖아.
지휘관이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할 때까지 네 술을 받아 준 건, 자기가 취해도 괜찮으니까, 그리폰의 모두를 신뢰하니까였겠지.
만약 그때 정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면, 과연 네가 경계를 안 했을까?
그건 그렇지... 수상한 녀석이 있었다면 분명 한눈에 알아봤을 거야.
......그래, 결국 나 혼자 쓸데없이 고민한 거구나.
원한다면 좀 더 어울려 줄 수도 있어. 마음 다 풀리면 같이 폭죽놀이 하러 가자.
너, 요정 주제에 언어 구사 능력이 상당하다?
아무렴, 난 창밖의 솔새니까!
솔새는 무슨!
M950A이 홱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솔새"를 자처하는 요정 말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어...? 이상하다, 정말 지휘관이 조종하는 게 아닌가?
같은 시각, 인형 숙소.
역시 지휘관님이시네요.
원격 조종이 아니었다면 벌써 들켰을 거예요.
후후, 전술지휘관으로서 항상 한 수 앞을 내다봐야 한다고.
아~ 그러셔?
?!!
M950A이 문을 열어젖히면서 방으로 들이닥쳤다.
우연찮게 숙소에 더미를 두지 않았다면 진짜 속았을 거야, 지휘관...이랑 썬더.
헉, 들켰다.
지휘관님, 빨리 다다음 수를 생각하세요.
썬더는 M950A가 화난 모습 본 적 있어? 참고 자료가 필요한데.
아뇨.
그럼 우린 이제 끝장이야.
......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언제 화났댔어?
하지만 950, 기분 안 좋아 보이는걸.
그냥 예상대로의 진실이라 아무렇지도 않을 뿐이야.
냉정함을 유지하는 건 엘리트 전술인형의 기본 소양이라고.
어, 그럼... 좋은 밤이네.
이제 와서 무슨... 어휴, 좋은 밤이야. 그리고...
고마워 썬더, 지휘관만인 줄 알았는데 너도 있었구나.
네가 걱정돼서.
걱정될 게 뭐가 있다고. 삐져 봤자 잠깐이잖아? 겨우 그런 일 가지고 한참 끙끙대진 않아.
정말로?
아닌 것 같아. 아직도 고민이 많아 보여.
그냥 피곤해서거든?
오후 내내 총만 쏴대서 힘들어 죽겠어.
그치, 손목도 얼얼하고.
그럼 이제 기분 좋아졌어?
아니, 전혀.
M950A이 천천히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짜증 가득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난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져 갔다.
내가 신뢰하는 지휘관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날 바보처럼 가지고 놀았잖아.
그 사진 속의 여자가 누군진 둘째치고, 솔새네 뭐네 하면서 아닌 척 자기변호나 하고 말이야. 진짜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아, 그건...
지휘관은 지금 독 안에 든 생쥐니까 잘 생각하고 말해.
납득 갈 만한 설명이 아니면... 알지?
어... 무서우니까 일단 인상부터 풀어 줄래?
원래는 널 직접 보러 갈 셈이었지만, 네가 계속 훈련장에서 사격 훈련을 하고 있어서 말을 걸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요정을 보낸 거야.
만약 네가 날 보기 싫은 상황인데 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 오히려 역효과 아니겠어?
그래서 그렇게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짓을 하셨다?
과연 지휘관님, 다 계산하신 건가요?
아니... 그렇게까진 아니고, 그냥 좀 떠봤던 거야.
심리 상담해 주는 요정이라니, 역시 안 믿겼지?
어휴... 몇 초 동안은 정말로 믿었다고. 어쩐지 지휘관의 말투가 너무 뚜렷하더라니, 일부러 알아채라고 한 거였구나?
진짜 최악이야.
하하...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지휘관 나름대로 신경써 준 거였단 걸 알았으니 됐어.
수상한 여자든, 이상한 요정이든, 전선의 최전방이든 뭐든... 그냥 나 혼자 쓸데없이 삐진 거였어.
다행이다, 이제 950이 화가 풀린 것 같아요.
그래서, 왜 둘이 같이 있는 거야?
지휘관과 썬더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찬스네요, 지휘관님.
그래.
찬스라니, 그게 무슨...
사실, 너한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뭐어?! 무슨 부탁이 그래!?
나, 보고 싶어.
모두 입어 봤고, 며칠 뒤에 웨딩드레스 촬영회도 있잖아. 950이 드레스 입은 모습도 보고 싶어.
분명 엄청 잘 어울릴 거야.
으으으... 아, 알았어, 입으면 되잖아! 이거 맞지?
하지만... 나 혼자만 입긴 싫어.
오, 그럼 썬더도――
아――니, 지휘관도 입어. 날 끌어들인 건 보나마나 지휘관의 아이디어지?
엉!?
여기까지 계산하셨다면, 지휘관님도 입으세요.
두 사람의 드레스 차림, 엄청 기대돼요.
아니 잠깐, 난 입겠다고 안 했――
......
20분 후.
흠, 이 영사기 꽤 편리한걸? 세세한 조절을 못 하는 게 흠이지만.
내가 영사기를 살펴보며 혼잣말하던 와중, 문이 열렸다.
......
푸흡, 옷차림 멋지네 지휘관. 항상 그렇게 입는 것도 괜찮겠는걸?
부탁이니까 놀리지 말아 줘...
너야말로, 정말 눈부시구나.
피, 피차일반이지 뭐.
그런데 이 옷, 딸랑거리는 게 많아서 입기 좀 힘들었어.
정말 아름다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멋져. 950도, 지휘관님도.
후훗, 그야 물론이지.
M950A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바퀴 빙글 돌았다.
맑고 푸른 하늘에 싱그러운 잔디밭, 그리고 웨딩드레스라니 완벽...하진 않고, 딱 두 가지가 부족하네.
하나는 내 손을 잡아 줄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관, 뭔지 맞춰 봐.
홀로그램으로 투영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 빛의 소녀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 덕에 더욱 돋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눈부셔서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내게 던진 수수께끼...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황색 장미 부케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나는 솔새 요정이니까.
......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내 생각 그대로였다.
그 꽃말은 역시, 그녀와 정말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