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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 VA-11 Hall-A

이 세상 마지막 비

이 세상 마지막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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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퍼엉!

쾅!

안나

드디어 진실을 밝히고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야.

그런데... 끝이라 하니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만약 누가 너한테 세계 종말 시나리오를 짜라고 시킨다면, 어떻게 할 거야?

무력으로 말살시킬 건지, 천천히 옥죄어 없앨 건지, 장황하면서도 우아한 최후를 맞이하게 할 건지...

음... 내 생각엔, 이건 궁극의 문제라고 봐. 우리의 마음속 가장 본질적인 일면을 들여다보는 문제.

그리고 이 세계의 궁극의 비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죽는가야.

내가 하는 걸 잘 지켜보고, 잘 기억해줘...

나의 모든 것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질.

............

으음...

안나...

다행이다, 겨우 다시 만나게 됐어...

그런데 여긴 어디야?

......

여긴... 병원...?

안나

네 무의식이 너를 이곳으로 보냈어.

우리가 약속했던 장소를 잊지 않았구나.

맞아, 넌 인생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지냈다고 했지...

하지만... 어느 병원인지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안나

괜찮아,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좋은 아침이야, 질.

좋은 아침...

세상에, 그 인삿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네.

아무튼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안나.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왜 내 단골손님들이 널 잡으려 해? 네가 뭘 했길래? 그리고 그리폰 시티는 어떻게 됐어?

안나

천천히 설명해줄게.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아직도 기억나?

물론이지.

내가 12살이었을 때 너와 만났... 아니지, 네 목소리를 들었어.

그 당시 내 부모님은 너를 빌어먹을 이혼 합의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상상 친구인 줄 알았지.

안나

정말로 기억하는 거야?

정말로 우리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난...

......

어라...? 기억이 안 나...

이상하다? 그것보다 더 예전의 일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안나

왜냐하면, 그건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야.

...뭐?

안나

다 설정된 거야, 질.

네 과거, 내가 널 부르는 별명, G28의 별명,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것...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안나, 넌 대체 뭐야?

안나

질, 이 세상을 좋아해?

적어도... 싫지는 않아.

안나

그럼... 불감증을 겪어 본 적 있어?

불감증? 무슨 불감증? 일단 겪어본 적은 없어.

안나

그럼, 가비가 누구인지는 기억해?

가비...? 그게 누구야?

안나

너에게 진실을 말해 줄 때가 되었어.

안나

질, 이 세계는 완전하지 않아.

너도 나도, 완전하지 않아.

전부 그 완전하고 진실된 세계에서 분리되었지.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계가... 진실이 아니라니?

안나

어떻게 말해 줘야 네가 좀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아무튼...

여기는 조금 진짜가 아닌 세계라는 말이야.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완전하지 않다고?

안나

질, 넌 가끔씩 감정이 불안정해지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거 알아?

응... 그런 기억이 있어.

한 번은 졸업식 때 학생 대표로 연설하게 된 적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날 쳐다보니 갑자기 무서워져서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다음 순간 집에 누워 있었어... 방금처럼.

안나

사실 그건 네가 나한테서 가져간 능력이야.

내가... 네 능력을 가져갔다고?

안나

나노머신 형태.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겠지만, 그게 나의 능력이자 본질이야.

"나노 형태"...

뭔지 알 것 같아. 공상과학물에서 단어 앞에 "양자"를 붙이면 다 그럴싸한 것처럼.

안나

그래, 너무 깊게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네 덕분에 난 이 세계에서 실체를 얻을 수 있었어.

나도 나노머신의 군체로서 존재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만, 가끔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아.

후훗, 정말 재밌지 않아? 이런 거짓된 세계에서 실체를 얻다니. 뭐, 겨우 몇 시간밖에 안 됐지만.

그런데 네 말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진짜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이 가짜 세계에 계속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니야?

안나

우린 돌아갈 수 없어, 질.

뭐?! 왜?

안나

우리도 가짜니까.

너도 나도 가짜야.

가, 가짜라고!?

아니야! 난 나야!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구겠어!?

안나

진정하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줘.

우리의 세계는 곧 끝날 거야. 지금 진짜 세계에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

질은 고개를 저었다.

안나

아무 일도 없어.

그저 여느 때처럼 평범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지.

세계의 종말도 없고, 테라 컴퓨터도, 모래비도 없어. 그것 때문에 싸우는 우리도 없고.

글리치 시티의 어느 평범한 술집에서, 진짜 너와 네 친구들, 그리고 그리폰의 인형들이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지.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사는 곳은 그리폰 시티잖아?

안나

현실 세계의 그리폰은 전술인형을 운용하는 사설 안전계약사야. 한 달 전, 글리치 시티와의 협력으로 시범 업무를 진행했어.

그리고 진짜 질이 실수로 인형 한 명을 취하게 만들었고, 그 인형에게서 이상한 전파가 발생했지.

거기에 있던 현실의, 나노머신 군체 상태로만 존재했던 안나가 그 전파에 휩쓸려, 그 인형의 마인드맵에 빨려들어갔어.

그리고 그 인형의 마인드맵은 안나를 자신의 의식으로 착각해, 안나의 기억을 읽어들이고 본체의 기억과 뒤섞었지.

그 결과, 그 마인드맵 속에 우리가 사는 세계, 그리폰 시티가 탄생한 거야.

말도 안 돼! 그, 그건 미친 소리야!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리폰 인형의 머릿속 오류에 불과하단 소리야?!

안나

이해가 빠르구나. 그래, 우리는 그 인형의 마인드맵 속 세상에서 살았던 거야.

우리의 세계는 그저 술에 취한 인형이 우연찮게 만들어낸 버그야. 인형이 여태껏 깨어나지 못한 것도 이 세계가 인형의 메모리를 점유해서 연산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세계가... 술집에서 실수로 만들어진 거라니...

안나

그래, 그래서 이 세계는 만들어졌을 때부터 파멸할 운명이었어.

인형의 의식은 점점 돌아오고 있고, 마인드맵의 주도권을 탈환하고 있지. 연산을 통해 그 과정을 좀 더 합리적이게끔 만들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인형이 깨어나는 순간, 우리의 세계도 끝나겠지.

젠장... 그런 게 어디 있어...

안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질, 내가 왜 널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아?

그야 당연히 모르지. 왜?

안나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모르는데...

잠깐, 설마...

안나

여배우 글로리아 말이야. 기억해?

...하하, 농담이야! 당연히 너지, 질 스팅레이.

그런 걸 고민하다니 세상에,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까지 잊어버린 거야?

어느 질을 말하는 거야?

나를 말하는 거면, 나도 널 정말 좋아하지만...

안나

이 세계는 술에 취한 인형과 현실의 안나의 기억이 합쳐져서 만들어졌어.

넌 가비도, 포어도 기억하지 못하고, 나도 베키와 전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

진짜 안나가 빨려들어오면서 기억의 일부가 유실된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너도 나도 불완전한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안나

인형의 마인드맵은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한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안나의 기억 중 가장 부정적인 감정이 서린 것만을 골라 세계 멸망의 논리 기반으로 삼았어.

그래서 날 선택했다고...?

내... 현실의 내 가장 부정적인 감정이 뭔데?

안나

내가 너와 알고 지냈던 시간만을 본다면...

사원이 멍멍이들뿐인 회사가 너희 술집에 전세 내고 회식을 하러 와서, 술집 안을 온통 개오줌과 비누 냄새로 가득 채웠던 사건이 있지.

아, 그거 완전 공감된다.

안나

그리고, 네가 가비와 다투고 난 다음 자신이 "똥 먹은 똥" 같다며 자괴감에 빠졌던 적도 있어.

그리고 그 두 감정이 합쳐져서... 보이지? 우리 세계가 붕괴하고 있어!

뭐야! 그래서 전부 내 탓이란 말이야?! 난... 그런 기억조차 없는데!

안나

그래, 테라 컴퓨터가 너의 가장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가서, 너는 그것들을 잊고 기운이 많이 나아졌지.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어느 쪽의 너든,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만이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거야.

뭐? 내가?

안나

그래...

듣고 나면 넌 싫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말해 줄게...

내가 어떻게? 큰 대가라도 치러야 해?

상상이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설마 내가 희생해야 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고민 좀 해봐야겠는걸. 단칼에 거절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안나

맞아, 질이 희생해야 해.

...네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질이.

뭐어?!!!

너, 너너너, 너 뭐라고?

안나

질, 진지하게 물을게.

만약 가능하다면, 너는... 현실의 너 자신을 대체하고 싶니?

무슨 일을... 시킬 셈이야?

안나

난 줄곧 이 계획을 준비했어. 이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기까지 하면서.

베키와 아키텍트, 길리안을 이용하고, 이 세계의 화이트 나이트, 철혈과 그리폰의 기술을 연구했어.

그리고 끝내 방법을 찾아냈어. 단 하나의 방법을...

안나

바로 현실의 안나를 이루는 나노머신이 내뿜는 주파수를 다시 이 그리폰 인형이 방출한 전파에 동기화시켜,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여는 거야.

그리고 널 나노머신 형태로 그 세계로 보내는 거지. 하지만 몇 분밖에 유지할 수 없어.

거기서 너는 현실의 너를 꼬옥 껴안으면서, 내가 주는 전파 병기를 방출하면 돼.

그렇게 하면, 너의 기억은 현실의 질의 신경을 타고 흘러 들어가, 그녀의 뇌에 덮어씌워질 거야.

말도 안 돼... 너무 비현실적이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현실의 질은 어떻게 되는데...?

안나

몸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하지만 현실의 질의 기억은... 사라지고 말 거야.

뭐야 그게!

난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나더러 한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리라는 뜻이잖아!

안나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세계가 완전히 붕괴하면,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하지만... 기억만 남겨서 무슨 소용이야? 나 혼자 살아남는다고...

안나

너만 살아남는 것으로도 충분해, 질.

난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어. 한 줄기 희망을 찾은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아.

안나...

하지만... 나더러 다른 나를 없애라니...

안나

진짜 안나는 아직도 잠들어 있어. 그녀가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난... 불완전한 가짜 안나는...

이 세계의 너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어, 질. 현실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르겠어... 안나... 난 정말...

안나

통로는 이미 열렸어. 이제 널 현실 세계로 보낼 거야.

가서 내 소원을 이루어 주든, 그냥 구경만 하고 돌아와서 이 세계의 종말을 지켜보든 그건 네 자유야.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넌 언제까지나 사랑스러운 나의 질이니까.

싫어! 안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난... 결정을 못 하겠어.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안나

난 그저 내 소원을 말했을 뿐이야. 이 세계는 곧 사라지고, 너만이 이 세계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서도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이 일을 벌인 거야. 내 존재가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싫으니까.

그러니까,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날 기억해도 좋아...

질... 네가 날 기억해준다면...

그럼 난 죽지 않는 거야. 사라지지 않는 거야. 네 기억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안나... 안——!

부웅——!!

시스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질 스팅레이.

......

안나

안녕, 질.

네가 돌아오더라도, 우린 다시 만날 수 없겠지.

콰앙!

Super-Shorty

안나, 당장 나와! 이제 도망칠 곳은 없어!

안나

좋은 아침이야, 모두들!

난 도망칠 생각 없었어.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 그랬지.

제리코

마음대로 하게 두진 않겠다!

길리안이 네 계획을 모조리 실토했다!

안나

내가 말하라고 시켰으니까. 그리고 너희도 알아야 하는 일이고.

스텔라

아키텍트가 날 돕게 한 것도 이걸 위해서였어?

안나

난 그저, 이 조그만 세계의 특별한 규칙을 이용해서 내 목적을 달성했을 뿐인걸.

도로시

안나 언니, 그게 전부 사실이야?

언니와 내가... 그리고 이 세계가 전부...

안나

베키... 어쩌면 진짜 우리도 누군가가 상상해낸 가상의 존재일지도 있단다.

세상이 가짜란 걸 알았다면, 너도 그 자리에서 포기했을 거니?

IDW

그, 그래도 네가 한 짓은 잘못됐다냐!

알마

질을 이용해서 다른 질을 없앤다니! 그런 무거운 책임을 그녀 혼자 지게 할 셈이야?!

안나

강요하지 않았어. 그저 가능성을 제시했지. 결정하는 건 질의 몫이야.

우리 질이든, 다른 세계의 조든,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그들이야.

참고로, 만약 나한테 다른 안나를 없앨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난 망설이지 않아.

세이

안나...

우린 그만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안나

난 그러기 싫어, 세이.

내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라면, 절대 납득할 수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거야.

다나

네 논리는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해. 하지만 네 말대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야.

Super-Shorty

질... 질은 어디에 있어!?

IDW

통로가 열렸다냐! 질은 벌써 저쪽 세계로 갔을 거다냐!

안나

내가 질에게 선택할 기회를 줬어.

스텔라

네가 무슨 꿍꿍인지 모를 줄 알고!

질이 통로를 빠져나가면 바로 닫아서, 선택지를 없애버릴 속셈이지!

알마

네가 질에게 선택권을 줄 리가 없어.

안나

그래서 날 막으러 온 거야?

솔직히 난 아직도 그럴지 말지 고민 중인데 말이지.

세이

어찌 됐든, 통로를 닫게 두지 않겠어!

도로시

질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통로를 유지하겠어!

안나

통로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가 엄청난데도? 게다가 현실과 이쪽 세계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달라.

질에겐 아주 잠깐이겠지만, 우리에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겠지.

다나

뭐, 어쨌든 널 좀 혼내주면 말이 조금은 통하겠지.

안나

그럼 어디 한번 해봐, 얘들아.

이 세계 어딘가에 있을 내 소체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제거해야 하니, 아주 힘든 일이 될 거야.

어쩌면 그러기 전에 내가 통로를 닫아버릴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쩌면 너희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 질이 이 세계의 존속을 포기하고 돌아와, 너희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즐기려 할지도 모르지.

다나

질은 돌아올 거야, 안나.

안나

그렇다면 정말 모든 것이 끝장이야.

안나

자아, 그럼 우리는 질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우리는 질의 운명을 결정해 볼까?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마음껏 날뛰자!

.............?? 시간 후.

......

갔네...

좋아...

일단... 상황 정리 좀 하자...

어느 그리폰 인형이 술에 취해 뻗어버리면서 술집과 세계가 엉망이 되어 버렸고...

나는 이런 괴상한 공간에 갇혀 버렸는데...

여기에 곧 누가 온다는 소린가? 뭐, 누가 오든 내가 여태까지 겪었던 일보다야 덜하겠지...

젠장... 그 멍멍이 떼를 상대했을 때보다 더 끔찍해...

??

안녕하세요...

좋은 밤입니다. 발할라에――

이건 또 뭔...

??

안녕, 질.

......

??

우리... 드디어 만났구나.

............

농담이지? 너 그거 농담이지!

??

저기... 먼저 좀 진정할 수 있을까?

나도 이런 옷차림은 민망한 거 알아.

민망하다고?

내가 27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토록 누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처음이야, 그리고 그게 바로 나 자신이라니!

??

질...

난 네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줄리아나라고 부르면 돼.

네가 본 건 그냥 너랑 똑같이 생긴 27살 여성이 네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쇼의 여주인공을 코스프레한 모습이야.

줄리아나라... 어쩌다 집에서 전화 올 때나 듣는 이름인데.

어쨌든 간에 이런 모습은 정말... 희한하네.

어쩌면 어느 세계에선 내가 정말로 그런 옷차림으로 코믹콘에 가서 사진을 찍고 다닐지도 모르겠는데...

정말로... 우와 소리 밖에 안 나오네, 어쩌면 그런 삶이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다른 세계에서 온... 나야?

줄리아나

조금은 달라.

나는 다른 세계의 질 스팅레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통로에서 한참을 걸었어.

그 안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조금 "질"스럽지 않게 됐어.

지금의 내 모습은 어쩌면 너희의 미래에 더 가까울지도 몰라.

만약 내가 미래에 마법소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시간을 뛰어넘어서라도 그 나를 죽여버렸을 거야.

줄리아나

괜찮아, 어차피 이 방에서 나가면 너도 나도 여기서 일어난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도 모두 없었던 것이 될 테니까.

그럼 뭘 해도 의미가 없는 거 아닐까... 그런 것도 이젠 익숙하지만.

그래서, 넌 어떻게 지냈어, 줄리아나 스팅레이 씨?

줄리아나

난... 잘 지냈어...

나의 세계에서 계속 잘 살고 있었어.

어느 유령과 함께 15년 동안 사귀면서, 같이 술집을 차리고 멋진 사람들을 아주 많이 대접했어.

15년 동안 또 많은 일을 했어... 과연 옳은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우리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어 했어.

정말 보람찬 삶이네, 마법소녀.

나하곤 딴판이야... 완전 달라...

그럼 결혼은 했어?

줄리아나

아니.

아싸! 다행이다!

네가 세계를 구해도 자신의 인생 문제는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는 거네?

줄리아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세계는 이제 곧 끝날 거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사라질 거야. 그 와중에 내가 누구의 것이 되지 못한 것 가지고 실망할 겨를 따위 없어...

내가 이제 무엇을 잃게 될지 셀 시간도 없는데,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생각할 틈은 없어.

아무래도 진짜 심각한 상황인가 보네.

줄리아나

우리는 이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정확히 알고 있어.

하지만 너의 문제는 더 어려워... 너는 어디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정말 그것이 문제인지조차도 모르니까.

어쩌면 이게 그냥 마땅한 상태라면? 그럼 받아들여야지.

아니, 내 생각이 틀렸어...

정말 미안해, 내가 좀 더 점잖았으면... 적어도 그 인형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줄리아나

그럼 우리의 세계는 아예 탄생하지도 않았을 거야.

너희의 현실 우주도 어떤 우연으로 발생한 폭발로 시작된 거잖아?

오류, 문제, 사고, 모든 것은 이로부터 시작해. 우리의 만남도 그렇고.

그런 걸 만회할 수는 없을까? 좀 더 질서 있게 만들 수는 없을까?

줄리아나

...술 한 잔 따라줄 수 있어?

물론이지... 뭘 마실래?

줄리아나

젠 스타.

진심이야?

줄리아나

내가 젠 스타 가지고 장난칠 것 같아?

좋아, 여기. 네가 달라고 한 거다.

줄리아나

...너도 이걸 맛본 적이 있지? 모든 것이 균형 잡혀있고 빈틈이 없지, 하지만 완전 맛없어.

마시멜로를 먹는 동시에 콜라를 마실 순 없잖아, 전부 다 뿜어낼 뿐이야.

어떨 땐 모든 선택지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 어떨 땐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을 했다 그 자체가 중요하고, 우린 그저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해.

......

삶이란 게 다 그런 거잖아?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줄리아나

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고 싶지, 왜 싫겠어.

적어도 다음에 무슨 말썽이 생겨도 바로 도망치기는 싫어.

적어도... 내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어.

줄리아나

그게 더 이상 네가 아니라 하여도?

너의 기억이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덮어씌워져,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건... 글쎄?

어쩌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그럼 내 주변 사람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죄책감 없이 그들을 떠날 수 있으니까.

......

줄리아나

하지만 허락해 주지는 않겠지?

뭐라고 해도 우리가 가진 건... 다 기억뿐이잖아?

맛있게 먹어본 것, 맛있게 마셔본 술, 만나본 사람, 겪어본 말썽들...

하아...

어쩌면 난 정말 인색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어, 최악의 기억마저 아까워서 버리질 못하다니...

줄리아나

그리고 내가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저항할 수 없다는 것도 알지?

그게 나쁘다고 하진 않았어.

줄리아나, 넌 옳아. 난 이게 정말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네가 전부 해결할 거잖아.

줄리아나

우리 한 번 안아보자, 질 스팅레이.

좋아, 마법소녀 줄리아나 스팅레이.

...세상에, 이 옷 엄청 얇잖아.

마지막으로 기억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줄리아나

내가 무서워?

날 단번에 죽일 수 있다면 무서울 것도 없지.

줄리아나

난 널 죽이지 않아.

그냥 껴안는 것뿐이야.

어째서...?

줄리아나

네 삶은 나보다 훨씬 엉망이야.

무슨 거대한 음모도 아니고, 거창한 모험도 아닌 자잘한 말썽들로 뭉쳐진 삶이야.

내가 널 차지한 다음 어떻게 그 난리판을 정리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네가 나보다 훨씬 달라질 수도 있단 뜻이야.

네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모든 것을 마주하면 나보다 나아질 수도 있어. 넌 그런 가능성이 있어, 그 가능성까지 내가 지울 수는 없어.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만약 내가 또 도망친다면? 만약...

줄리아나

이 세상엔 예상 못 할 일들로 잔뜩이야, 너의 선택이 꼭 네가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어.

하지만 그래도 계속 견뎌내야 해, 선택할 기회를 단 하나도 놓쳐서는 안 돼.

넌 자신의 운명을 정할 수는 없어, 질.

네가 정할 수 있는 건 운명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지 뿐이야.

휴우...

도로시에게 다음 티셔츠에 적을 문구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네.

하지만 네가 해준 그 말도 깨어나면 다 말끔하게 잊어버리겠지?

줄리아나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이 통로에서 생긴 일을 전부 잊을 거야.

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하며 왜 너를 지우지 않았는지 후회하면서 울고 화내며 어쩔 줄 몰라 하겠지...

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마주할 거야, 완전 겁쟁이 같아 보여도 말이야.

그럼 난 어떻게 해? 내가 너를 만난 일도 전부 없었던 것으로 될 텐데...

줄리아나

괜찮아...

애당초 없었던 일이니까, 우리의 세계는 그저 그리폰 인형의 꿈일 뿐이야.

그리고 난... 그저 안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너의 불완전한 투영일 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보기엔 넌 나보다 훨씬 완전체 같은데, 나는 도저히 입지 못할 옷을 입고 나타났잖아.

줄리아나

하지만 너도 자신을 똥 먹은 똥 같다고 욕할 수 있잖아, 적어도 난 그렇게 스스로를 나무라지 못해.

용기는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 너도 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어... 그래...

역시 나 스스로 고민해야겠지...

아이고... 엄청 고생해야겠네...

줄리아나

그래, 세상을 구하는 것만큼 힘든 일일 거야.

난 그만 갈게, 아직이면 모두와 함께 세계 마지막 불꽃놀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를 망신시키지 마, 안 그러면 이 마법소녀가 널 용서치 않을 거야——

야, 그만해라——

줄리아나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야 이 망할! 포즈까지 잡다니!!

줄리아나

넌 이 포즈가 그리울 거야...

그럼 안녕, 질 스팅레이.

아아...

항상 그리웠지...

안녕, 줄리아나 스팅레이.

............

......

.............?? 시간 후.

부웅!!

시스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질 스팅레이.

......

세상에, 정말로 돌아왔어. 안나가 통로를 닫지 않았어!

하지만... 제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아무튼 난 결국 안나의 부탁을 포기했구나...

모두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아, 아니야... 다들 분명 실망할 거야...

그런데 잠깐만...

질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 전자 세계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여보세요! 누구 있나요! 저기요!!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누가 왔어.

??

......

잠깐, 너는...?

엘리사

만나서 반갑다, 인간 친구.

내 이름은 엘리사, 지구의 AI 아바타다.

넌 분명 테라 컴퓨터의...

아 참, 테라 컴퓨터는 이제 없지.

엘리사

스텔라가 엘리사를 다시 만들었다. 알마가 엘리사를 개량했고, 안나는 엘리사에게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했다.

현재, 엘리사는 이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어, 세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마치 신이 됐다는 말처럼 들리네...

엘리사

난 네가 돌아올 경우, 너를 마중해달라 부탁받았다.

그럼 다들 어디 있어? 다나 씨와 다른 분들은... 지금 어디 있어?

엘리사

...사라졌다.

모두 한참 전에 사라졌다.

......

어째서.

엘리사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 메모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숙주인 현실의 인형이 깨어나게 되면서, 통로 유지를 위한 메모리가 부족해졌다.

때문에, 충분한 메모리 확보를 위해 엘리사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내용의 일부를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무슨 짓을 한 거야...?

엘리사

엘리사는...

모두를 삭제했다.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삭제했다.

......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엘리사

이것이 엘리사의 사명이자 엘리사가 만들어진 목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삭제 명령은, 삭제 목표 스스로가 내렸다.

이 세계의 모든 인형, 모든 인간이——

안 돼——!!

엘리사, 그들을 돌려줘! 명령이야!!

엘리사

삭제 명령은 철회할 수 없다.

질...

미안하다...

......

엘리사

미안하다...

......

아니야...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야... 엘리사...

젠장... 내가...

엘리사

질.

모두 네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선택한 일이다.

이건 최후의 보루였을 거야...

"만약 질이 다른 자신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면, 적어도 돌아올 곳을 마련해 주자!" 라고...

그래, 맞아! 난 미래를 포기하고 돌아왔어!

하지만 그럼 뭐 해, 내 친구들은 다 사라졌는데. 마지막으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내 선택권이 모든 것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었어!?

내 선택권이... 이 세계와...

난...

그런 가치가...

엘리사

우는 건가.

그래... 울어...

우는 것밖에 못하는 구제불능인 바보니까!

안나... 바로 통로를 닫았으면 됐을 텐데...

엘리사

안나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안나를 저지하고 설득했다. 모두는 네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날 믿어...? 왜? 이 세계는 이제 끝인데...

엘리사...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없애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했을 때, 정말 이를 악물고 할걸 그랬어...

엘리사

질, 그러면 왜 돌아왔지?

마지막으로 모두의 얼굴을 보고 싶었어. 모두와 함께 있고 싶었어...

내 친구, 내 삶의 터전, 내 신념...

내가 가진 건 이 세계가 전부야. 이 세계를 완전히 버리고 살아갈 순 없어.

하지만... 이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이 세계의 기억마저도...

엘리사

질, 우리는 확실히 존재했다.

Super-Shorty, 다나, 제리코, 스텔라, 세이...

도로시, 알마, G28, 그리고 안나...

우리가 가상 세계에서 살았다 해도, 그저 다른 이의 머릿속에 지나간 한 줄의 코드라 해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 줬어...?

엘리사

안나다.

다나 덕분에 깨달았다고 말했다.

다나 씨라면... 분명 주먹으로 설득했겠지.

엘리사

모두가 그랬다, 모두 속 시원하게 싸웠다.

모두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다, 친구, 이웃, 그리고 이 세계를... 하지만 종말은 결국 다가왔다.

모두 실패했지만 모두 웃으면서 떠났다...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런데 내가 이 세계에 남기게 된 건 쓸모없는 눈물뿐이네...

엘리사

네가 남기는 건 눈물만이 아니라...

......

엘리사

이 세계에 내리는 마지막 비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두... 너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르르릉...!

저게 무슨 소리야...?

엘리사

이 세계가 우리가 빌려 간 모든 것을 돌려받으려 한다.

속칭 "세계 종말"이다.

숙주가 깨어나고 있다. 현실의 안나도 풀려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몇 분 뒤면, 우연히 발생한 오류가 만들어낸 이 세계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은 오류라고 할 수 없어.

엘리사

그렇다면 너도 자신을 용서해라, 질. 너의 선택도 오류가 아니다.

네가 돌아왔다는 뜻은, 이 세계에서의 삶이 네게 있어 오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세계를 좋아하지?

난...

응...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정말 즐거웠어.

비록 마지막이 엉망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걸 많이 경험했어. 적어도 현실의 나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아. 그렇지?

엘리사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도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저... 우릴 더 멀리 나아가게 도와줄 뿐이다.

넌 이미 선택을 했다, 질.

그래...

이제 그 결과를 받아들일 시간이구나.

우르르릉...!

엘리사

질.

응?

엘리사

때가 되었다.

응...

안녕, 엘리사.

엘리사

안녕이다, 질.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기를.

삐이이이이...

......

............

소녀전선 [발할라]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