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극Ⅰ
3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헨리에타를 벤치의 등받이에 기대게 했다.
자는 중에 말도 없이 두고 가서 미안하지만, 지금 내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첫 번째 "비타"를 완결 내면서, 이곳의 상황과 법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의체"들의 의식은 이 가상 공간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담당관"이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시 접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인형들이 우연찮게 이곳을 발견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접속해 "비타"에 들어간 탓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오류를 일으켜버린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끝을 보지 않으면, 인형들의 마인드맵은 풀려날 수 없다.
뭐가 문제인지 알아냈으니, 이제 뭘 해야하는 지는 간단하다.
고의적인 공격도 아니니, 그저 이 소녀들이 저마다 멋진 꿈을 끝까지 꿀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어떤 아이들인지 알고 나니 거친 수단을 쓰기도 거부감이 든다.
카리나, 지금부터 다음 "비타"로 들어갈 거야.
네, 전 지금 카노의 마인드맵을 정밀 검사하고 있어요.
뭐 쓸 만한 단서라도 찾았어?
카노 본인은 기억 못하는 것 같지만, 일단 "비타" 내에서의 기록은 남아 있어요. 그동안 딱히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접속 당시의 기록이 없어요.
애들이 숙소에 모여서 피자를 먹던 부분에서 기록이 끊겼어요.
...누가 일부러 기록을 삭제했다고?
인형에겐 직접 자신의 기록을 삭제할 권한이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다른 가능성이 없어요.
역시 배후애 누가 있다는 건가...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 일단은 그렇게 추측해야겠죠.
알았어. 그런데, 누가 고의로 이런 짓을 했다면 대체 뭐가 목적일까?
이제 겨우 두 명 만났을 뿐이지만, 네 말대로 저 애들에게는 그럴 만한 동기가 없는 것 같던데.
저한테 물어보셔도...
하지만, 저희가 거기에 접속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분명 아직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 더 있을 거예요.
저도 계속해서 단서가 더 없나 조사해볼게요.
부탁한다.
맡겨만 주세요~
자, 지휘관님은 서둘러 다음 "비타"에 가 주세요. 거기서 새로운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르고, 빨리 살펴봐야 우리 인형을 더 빨리 데려올 수 있잖아요.
물론, 지휘관님의 연기는 계속 모니터링 중이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 주세요!
너도 하여간...
그럼 출발할게.
헨리에타가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살며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정원 밖으로 나왔다.
헨리에타의 그 믿음직하고 존경스러운 담당관을 연기하기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이렇게 잠시 떨어져 있을 때마저도 자신의 행동거지를 의식하고 마니 말이다.
아까까지 있었던 건물이 저기 있다. 헨리에타와 함께 한번 들어갔다 나온 덕분에, 어떻게 "비타"에 들어가는지 요령을 대충 알았다.
건물의 로비는 여전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 본능적인 직감으로 손을 뻗어 더듬으니 그 보이지 않는 문에 다시 한번 닿았다.
헨리에타와 했던 것처럼 몸을 천천히 문 안으로 밀어넣자, 막을 뚫고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균형을 잃고, 어둠에서 또 다른 어둠으로 떨어졌다.
감각이 일순간 마비됐다. 지금 내가 아래로 떨어지는 건지, 위로 솟구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발바닥이 땅에 닿은 느낌이 뇌로 전해졌다.
손님, 괜찮으세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시작으로, 감각이 점차 돌아왔다.
하지만 주위의 환경이 순식간에 변해, 시야도 갑작스레 밝아져 다시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손님? 제 말 들리세요?
눈이 빛에 적응하고 나니, 그제서야 주위가 제대로 보였다.
나는 어딘가의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테이블 위에 창문의 무늬를 수놓으면서, 때마침 건너편 건물의 처마 끝자락을 넘어 내 얼굴에도 내리쬔 것이었다.
눈부시지만, 포근하고 산뜻한 기분... 그야말로 심신이 편안해지는 오후의 한때였다.
손님, 혹시 주무셨나요?
음?!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깬 사람처럼, 나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짧은 금발 머리에 눈이 정말 예쁜 웨이트리스 소녀가 있었다.
잠 깨셨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갑작스레 만날 줄이야.
햇빛 때문에 아픈 눈을 문지르면서, 나는 이 "비타"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자료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틀림없었다. 지금 눈앞의 이 소녀가 바로 "리코"였다.
리코?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놀란 나머지, 입에서 멋대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와 버렸다.
네?
리코는 잠깐 당혹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웨이트리스로서의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순간 아차 싶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를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면 누구라도 수상하다 여길 게 뻔했다.
저... 제가 손님을 전에 뵌 적이 있나요?
크흠... 아니.
잠이 덜 깨서 말이 헛나왔네, 미안해.
그런데, 여기는...?
호텔 VILLA GADDI의 레스토랑입니다만... 정말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시다면 방으로 모셔드릴까요?
아니, 됐어. 잠이 덜 깼을 뿐이니까. 그리고 여기에 좀 더 있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커피라도 드릴까요?
그거 좋지. 부탁할게.
리코는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받은 주문을 접수하러 갔고, 나도 이참에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확실히 이곳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의 입구 너머로 호텔의 로비와 접수처도 보였다.
헌데, 리코는 현재 "쟝 클로체"의 신분인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젤리카 때와 마찬가지로, 누가 "프라텔로"의 기억을 지워버린 걸까?
그 부분을 바로잡아 정해진 각본대로 진행하면, 이 "비타"의 문제도 해결되는 걸까?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마인드맵을 빼앗긴 인형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갇힌 인형은 누구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도중, 아주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후후.
......SPAS?!
바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하필이면 그때 리코가 카트로 주문한 커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그 익숙한 모습은 바깥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아... 응. 향이 많이 독특한데, 보통 커피는 아닌 거 같네?
와, 향만으로 아시겠어요?
손님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시길래, 정신 차리는데 좋은 리스트레토로 가져왔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내린 거예요. 시간이 좀 걸려서 죄송합니다.
그, 그래...?
고마워, 감사히 마실게.
커피의 향이 코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보니... 매우 쓰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커피 향의 여운이 나를 추억에 잠기게 했다. 마치 학창 시절 첫사랑과 함께 마시던 커피 같은 느낌이었다.
커피의 온기가 이내 온몸에 퍼지면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 오후가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커피에 우유를 조금 넣어 섞었다. 우유 거품은 잔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며 서서히 커피에 녹아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커피잔을 지켜보는 리코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손님의 모습이... 엄청 리얼해서요.
음...? "리얼하다"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소리를...
리코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한발짝 내게 내디뎠다.
저기...! 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손님, 혹시 성함이... "쟝" 아니신가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 계정의 신분을 사실은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기억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왜 여기서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있는 거지?
그 표정... 맞으시군요.
아주 예리한걸.
역시 그랬구나...
역시?
오늘, 아주 익숙한 사람과 만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예전부터 비슷한 기분이 들 때마다, 얼마 안 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거든요.
오늘은 "왠지 모르게 낯익은 사람"과 만나고, 또 어째선지 "그 사람의 이름은 쟝"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틀렸나요?
......
그래, 네 말이 맞아.
와아!
그럼 쟝 씨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셨던 것도 비슷한 이유인가요?
...그런 셈이지.
너를 본 순간, 네가 "리코"란 직감이 들었어.
다, 다행이다...!
이런 기분이 진짜인 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설마 저랑 똑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쟝 씨를 봤을 때 "리얼하다"고 느낀 거겠죠?
그 반드시 일어날 거라 느끼는 건, 일종의 예지 능력이니?
아뇨...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저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뭔가를 원하면 어느 순간 그게 제 앞에 나타나요.
굳이 말하자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 아닐까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네... 제가 바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져요.
물론, 어쩌면 제가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그렇게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쟝 씨를 봤을 때, 어째선지 저는 지금 엄청 행복하고, 지금의 삶이 무지무지 만족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 죄송해요, 또 갑자기 이런 말을... 제가 폐를 끼쳤나요?
아니,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아도 된단다.
쟝 씨는 상냥하시네요... 이런 상냥함도 정말 익숙해서...
아, 저도 제 말이 많이 이상하단 건 알아요. 하지만 쟝 씨라면 분명 이해하시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모르겠어요. 왜 제가 쟝 씨의 성함을 아는지 모르겠는 것처럼요.
그냥,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르쳐드리면, 쟝 씨께서 제 의문을 풀어 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너만 괜찮다면. 나도 많이 궁금하던 참이야.
네!
그러니까... 저는 매일 학교에 가고요, 수요일이랑 금요일 오후엔 우체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저는 몸집이 작아서 큰 물건은 못 드니까, 작업을 배정해 주는 아저씨는 항상 저한테 편지나 작은 소포만 주세요.
친절한 아저씨구나.
네, 가끔씩 제가 직접 구운 과자를 가져다 드리면 껄껄 웃으면서 엄청 좋아하세요.
아저씨도 정말 행복하겠는걸.
헤헤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저녁에는 바이올린을 배워요. 펠로 선생님은 무지 엄격하시지만, 항상 제가 소질이 있으니 열심히 연습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주말엔 이 호텔에서 일해요. 아침에 엄마가 해 주신 계란 프라이 샌드위치를 먹고, 학교랑은 정반대 방향으로 서쪽, 테베레 강의 다리를 건너요.
다리는 엄청 길지만, 건널 때 성 체칠리아 교회를 볼 수 있어요!
그 교회는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거 있죠!
흠... 바이올린만이 아니라, 네겐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에헤헤... 그럴까요?
다리를 건너서, 제일 가까운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강을 따라 십몇 분이면 여기로 와요.
처음엔 엄청 고급 호텔이라서 무지무지 긴장됐지만...
매니저님도 저한테 잘해 주시고, 같이 일하는 언니들도 모두 착해요. 가끔 퇴근할 때 주방장 아저씨가 비싼 식재료를 주실 때도 있어요.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
헤헤... 정말 행복해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왜 제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게 정말로 일어나는 걸까요? 제가 무슨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항상 누가 와서 저를 도와줘요.
갖고 싶은 게 생겨도 너무 쉽게 얻게 돼요.
그건 좀 부러운데...
하지만, 지나치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행복해서 실감이 안 날 정도로요.
그래서 가끔 고민하곤 해요. 이렇게 행복한 삶은 사실 내 것이 아닌 게 아닐까... 하고요.
전부 다 그저 달콤한 꿈일 뿐이고, 잠에서 깨는 순간 전부 다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그래서, 제가 정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쟝 씨, 쟝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정말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흠... 확실히, 넌 또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꿈이라니. 단순히 주변 사람들이 너를 많이 챙겨 줘서가 아닐까?
그런가요... 하긴, 이런 얘길 하면 다들 "괜한 걱정이다", "다 그렇게 산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실감이 나질 않아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은 중요하단다. 어릴 땐 대부분 그걸 모르다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행복했던 그때 그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리코, 넌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자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아주 똑똑하다는 증거지.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건... 무서운 느낌이에요.
제가 보고 듣는 모두가 거짓은 아닐지, 이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진 않을지...
그런 공허한 두려움이 느껴져서, 무서워요... 하지만 지금의 행복을 잃고 싶지는 않아서...
걱정 마렴, 넌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
정말로요?
이렇게 실감나지 않는 행복이라도요?
지금의 행복을 잃기는 싫다고 했잖아?
...그렇네요. 쟝 씨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 말이 맞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되네요.
......
리코는 내게 다시 인사하고, 카트를 밀며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손 안의 독특하면서도 진한 커피를 다시 음미했다.
이건 세상에 둘 도 없는 행복의 맛과 향이다. 이런 커피를 만들어내려면, 아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행복한 삶을 만끽하는 그녀를 보면서, 아주 잠시나마 나는 매우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카리나, 들리니?
넵, 계속 모니터링 중이에요.
방금의 대화도 다 들었지?
네... 역시, 자료에 있는 리코와는 딴판이에요.
만약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정말 저렇게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가정해봤자 허무할 뿐이야. 우리로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행을 극복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
그렇죠... 그래도 전 저희가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면, 미래의 아이들도 좀 더 행복해질 거라 믿어요.
그러니 더더욱 서둘러 우리 인형들을 되찾아야지.
방금 창문 밖에서 SPAS가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너도 봤어?
SPAS가요? 아뇨, 전 못 봤어요.
내가 진짜 잘못 봤나...?
아무튼, 찾아보면 리코 말고도 이상한 점이 더 있겠지?
벌써 한 가지 발견했어요. 창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잘 보세요.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패턴이 있어요.
더 멀리는 아예 안 보이고 말이지.
이 공간은 왠지 미완성인 것 같아요. 모든 사물이 리코가 말한 경로에만 구현되어 있어요, 딱 그 애의 기억이 투영된 것처럼요.
게다가, 하나같이 시각적 묘사가 너무 단순해요. 레벨 2 플랫폼의 모의 공간이라기 보단, 정말 누군가의 꿈 속 같아요.
꿈이라... 아무래도, 지금 난 리코의 "비타"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 모양이군.
저도 이상하게 느껴져서 아까 그 공간의 스캔을 돌려봤는데, 지금 막 결과가 나왔어요. 잠시만요... 맞네요, 지금 지휘관님이 계신 곳은 "비타" 내에서 다시 구성된 모의 공간이에요.
다시 구성했다니? 무슨 차이가 있는데?
그러니까, 치킨집의 치킨과 햄버거집의 치킨 정도의 차이랄까요? 둘다 패스트푸드점의 치킨이지만, 전혀 다르잖아요.
아주 알기 쉬운 설명이네...
흐음... 그래서 말인데요, 잘하면 그 공간의 구성을 해제할 수도 있겠어요.
뭐? 아까는 외부에서 간섭할 수 없다며?
이론상으로는야 그렇지만, 그 공간만큼은 "비타"의 권한 소유자가 만들지 않은 것 같아서요. 공간 구성에 활용되고 있는 연산의 알고리즘을 추적해냈는데, 방식이 우리 인형들의 마인드맵이랑 똑같아요.
리코가 아니라 우리 인형이 연산해낸 공간이라고?
네, 거기 있는 거 다 또 하나의 시뮬레이션이에요.
방금까지 지휘관님이랑 대화한 리코도 진짜 리코인지 의심돼요.
저게 가짜라니, 설마...
하지만 자료에 기록된 리코의 성격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걸요? 그 공간 전체가 시뮬레이션이니, 저 리코도 그 일부일 가능성이 높아요.
생김새만 똑같고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나...
마치 달콤한 꿈처럼요.
이번 "비타"의 주인공인 진짜 리코는 우리 인형의 마인드맵의 연산력을 빌려, 거기서 공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즉, 진짜 리코는 저 "꿈 속의 리코"가 최대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화감의 의문이 풀리는군.
하아아... 나도 저렇게 행복한 꿈을 꿔보고 싶다아아...
꿈 같은 소린 그만 하고, 어떻게 하면 돼?
어휴... 지휘관님은 섬세하지 않으시다니까요.
방법은 이미 찾았어요, 이쪽의 권한으로 인형의 연산 지원을 중단시키면 돼요.
연산이 중단되면, 모의 공간은 바로 사라지겠죠.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이건가... 리코가 깨어나면 엄청 실망하겠군.
지휘관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그 공간은 전부 시뮬레이션이에요. 아무리 지금 저희가 그 의체들이 상처 입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동정할 필요까진 없어요.
지금이든 나중이든, 결국 저희가 인형들을 데리고 돌아가면 그 공간이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래... 그렇지, 당장의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지. 조언 고마워.
카리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행복한 리코"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짓은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거짓. 연산으로 만들어진 모의 공간에서의 행복도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어진다. 나도, 어딘가에 있을 진짜 리코도.
카리나, 처리해.
네.
카리나의 대답과 함께, 주변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했을 때처럼 주위가 형용할 수 없는 어둠으로 바뀌더니, 내 몸이 저 따뜻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끝없이 추락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떨어지는 감각이 아까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 이러다 하루 종일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어둠에서 영영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쿵!
예고도, 대비도 없이 지면에 추락했다.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지만, 전신 골절이라도 입은 듯 온몸이 격통에 휩싸였다.
그리고 뭐가 보이기도 전에, 날카로운 총성과 함성이 귀를 때렸다.
전체 대사 보기 (136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헨리에타를 벤치의 등받이에 기대게 했다.
자는 중에 말도 없이 두고 가서 미안하지만, 지금 내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첫 번째 "비타"를 완결 내면서, 이곳의 상황과 법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의체"들의 의식은 이 가상 공간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담당관"이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시 접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인형들이 우연찮게 이곳을 발견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접속해 "비타"에 들어간 탓에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오류를 일으켜버린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끝을 보지 않으면, 인형들의 마인드맵은 풀려날 수 없다.
뭐가 문제인지 알아냈으니, 이제 뭘 해야하는 지는 간단하다.
고의적인 공격도 아니니, 그저 이 소녀들이 저마다 멋진 꿈을 끝까지 꿀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어떤 아이들인지 알고 나니 거친 수단을 쓰기도 거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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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00CCFF>네, 전 지금 카노의 마인드맵을 정밀 검사하고 있어요.</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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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가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살며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정원 밖으로 나왔다.
헨리에타의 그 믿음직하고 존경스러운 담당관을 연기하기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이렇게 잠시 떨어져 있을 때마저도 자신의 행동거지를 의식하고 마니 말이다.
아까까지 있었던 건물이 저기 있다. 헨리에타와 함께 한번 들어갔다 나온 덕분에, 어떻게 "비타"에 들어가는지 요령을 대충 알았다.
건물의 로비는 여전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 본능적인 직감으로 손을 뻗어 더듬으니 그 보이지 않는 문에 다시 한번 닿았다.
헨리에타와 했던 것처럼 몸을 천천히 문 안으로 밀어넣자, 막을 뚫고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균형을 잃고, 어둠에서 또 다른 어둠으로 떨어졌다.
감각이 일순간 마비됐다. 지금 내가 아래로 떨어지는 건지, 위로 솟구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발바닥이 땅에 닿은 느낌이 뇌로 전해졌다.
손님, 괜찮으세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시작으로, 감각이 점차 돌아왔다.
하지만 주위의 환경이 순식간에 변해, 시야도 갑작스레 밝아져 다시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손님? 제 말 들리세요?
눈이 빛에 적응하고 나니, 그제서야 주위가 제대로 보였다.
나는 어딘가의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테이블 위에 창문의 무늬를 수놓으면서, 때마침 건너편 건물의 처마 끝자락을 넘어 내 얼굴에도 내리쬔 것이었다.
눈부시지만, 포근하고 산뜻한 기분... 그야말로 심신이 편안해지는 오후의 한때였다.
손님, 혹시 주무셨나요?
음?!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깬 사람처럼, 나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짧은 금발 머리에 눈이 정말 예쁜 웨이트리스 소녀가 있었다.
잠 깨셨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갑작스레 만날 줄이야.
햇빛 때문에 아픈 눈을 문지르면서, 나는 이 "비타"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자료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틀림없었다. 지금 눈앞의 이 소녀가 바로 "리코"였다.
리코?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놀란 나머지, 입에서 멋대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와 버렸다.
네?
리코는 잠깐 당혹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웨이트리스로서의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순간 아차 싶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를 다짜고짜 이름으로 부르면 누구라도 수상하다 여길 게 뻔했다.
저... 제가 손님을 전에 뵌 적이 있나요?
크흠... 아니.
잠이 덜 깨서 말이 헛나왔네, 미안해.
그런데, 여기는...?
호텔 VILLA GADDI의 레스토랑입니다만... 정말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시다면 방으로 모셔드릴까요?
아니, 됐어. 잠이 덜 깼을 뿐이니까. 그리고 여기에 좀 더 있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커피라도 드릴까요?
그거 좋지. 부탁할게.
리코는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받은 주문을 접수하러 갔고, 나도 이참에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확실히 이곳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의 입구 너머로 호텔의 로비와 접수처도 보였다.
헌데, 리코는 현재 "쟝 클로체"의 신분인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젤리카 때와 마찬가지로, 누가 "프라텔로"의 기억을 지워버린 걸까?
그 부분을 바로잡아 정해진 각본대로 진행하면, 이 "비타"의 문제도 해결되는 걸까?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마인드맵을 빼앗긴 인형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갇힌 인형은 누구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도중, 아주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후후.
......SPAS?!
바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하필이면 그때 리코가 카트로 주문한 커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그 익숙한 모습은 바깥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아... 응. 향이 많이 독특한데, 보통 커피는 아닌 거 같네?
와, 향만으로 아시겠어요?
손님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시길래, 정신 차리는데 좋은 리스트레토로 가져왔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내린 거예요. 시간이 좀 걸려서 죄송합니다.
그, 그래...?
고마워, 감사히 마실게.
커피의 향이 코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보니... 매우 쓰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커피 향의 여운이 나를 추억에 잠기게 했다. 마치 학창 시절 첫사랑과 함께 마시던 커피 같은 느낌이었다.
커피의 온기가 이내 온몸에 퍼지면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 오후가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커피에 우유를 조금 넣어 섞었다. 우유 거품은 잔에서 소용돌이를 그리며 서서히 커피에 녹아들었다.
그런데, 옆에서 커피잔을 지켜보는 리코의 눈빛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손님의 모습이... 엄청 리얼해서요.
음...? "리얼하다"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소리를...
리코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한발짝 내게 내디뎠다.
저기...! 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손님, 혹시 성함이... "쟝" 아니신가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 계정의 신분을 사실은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기억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왜 여기서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있는 거지?
그 표정... 맞으시군요.
아주 예리한걸.
역시 그랬구나...
역시?
오늘, 아주 익숙한 사람과 만나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예전부터 비슷한 기분이 들 때마다, 얼마 안 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거든요.
오늘은 "왠지 모르게 낯익은 사람"과 만나고, 또 어째선지 "그 사람의 이름은 쟝"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틀렸나요?
......
그래, 네 말이 맞아.
와아!
그럼 쟝 씨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셨던 것도 비슷한 이유인가요?
...그런 셈이지.
너를 본 순간, 네가 "리코"란 직감이 들었어.
다, 다행이다...!
이런 기분이 진짜인 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설마 저랑 똑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쟝 씨를 봤을 때 "리얼하다"고 느낀 거겠죠?
그 반드시 일어날 거라 느끼는 건, 일종의 예지 능력이니?
아뇨...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저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뭔가를 원하면 어느 순간 그게 제 앞에 나타나요.
굳이 말하자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 아닐까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네... 제가 바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져요.
물론, 어쩌면 제가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그렇게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쟝 씨를 봤을 때, 어째선지 저는 지금 엄청 행복하고, 지금의 삶이 무지무지 만족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 죄송해요, 또 갑자기 이런 말을... 제가 폐를 끼쳤나요?
아니,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아도 된단다.
쟝 씨는 상냥하시네요... 이런 상냥함도 정말 익숙해서...
아, 저도 제 말이 많이 이상하단 건 알아요. 하지만 쟝 씨라면 분명 이해하시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모르겠어요. 왜 제가 쟝 씨의 성함을 아는지 모르겠는 것처럼요.
그냥,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르쳐드리면, 쟝 씨께서 제 의문을 풀어 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너만 괜찮다면. 나도 많이 궁금하던 참이야.
네!
그러니까... 저는 매일 학교에 가고요, 수요일이랑 금요일 오후엔 우체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저는 몸집이 작아서 큰 물건은 못 드니까, 작업을 배정해 주는 아저씨는 항상 저한테 편지나 작은 소포만 주세요.
친절한 아저씨구나.
네, 가끔씩 제가 직접 구운 과자를 가져다 드리면 껄껄 웃으면서 엄청 좋아하세요.
아저씨도 정말 행복하겠는걸.
헤헤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저녁에는 바이올린을 배워요. 펠로 선생님은 무지 엄격하시지만, 항상 제가 소질이 있으니 열심히 연습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주말엔 이 호텔에서 일해요. 아침에 엄마가 해 주신 계란 프라이 샌드위치를 먹고, 학교랑은 정반대 방향으로 서쪽, 테베레 강의 다리를 건너요.
다리는 엄청 길지만, 건널 때 성 체칠리아 교회를 볼 수 있어요!
그 교회는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거 있죠!
흠... 바이올린만이 아니라, 네겐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에헤헤... 그럴까요?
다리를 건너서, 제일 가까운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고 강을 따라 십몇 분이면 여기로 와요.
처음엔 엄청 고급 호텔이라서 무지무지 긴장됐지만...
매니저님도 저한테 잘해 주시고, 같이 일하는 언니들도 모두 착해요. 가끔 퇴근할 때 주방장 아저씨가 비싼 식재료를 주실 때도 있어요.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네.
헤헤... 정말 행복해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왜 제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게 정말로 일어나는 걸까요? 제가 무슨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항상 누가 와서 저를 도와줘요.
갖고 싶은 게 생겨도 너무 쉽게 얻게 돼요.
그건 좀 부러운데...
하지만, 지나치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행복해서 실감이 안 날 정도로요.
그래서 가끔 고민하곤 해요. 이렇게 행복한 삶은 사실 내 것이 아닌 게 아닐까... 하고요.
전부 다 그저 달콤한 꿈일 뿐이고, 잠에서 깨는 순간 전부 다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그래서, 제가 정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쟝 씨, 쟝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정말 꿈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흠... 확실히, 넌 또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꿈이라니. 단순히 주변 사람들이 너를 많이 챙겨 줘서가 아닐까?
그런가요... 하긴, 이런 얘길 하면 다들 "괜한 걱정이다", "다 그렇게 산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실감이 나질 않아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은 중요하단다. 어릴 땐 대부분 그걸 모르다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행복했던 그때 그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리코, 넌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자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아주 똑똑하다는 증거지.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건... 무서운 느낌이에요.
제가 보고 듣는 모두가 거짓은 아닐지, 이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진 않을지...
그런 공허한 두려움이 느껴져서, 무서워요... 하지만 지금의 행복을 잃고 싶지는 않아서...
걱정 마렴, 넌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
정말로요?
이렇게 실감나지 않는 행복이라도요?
지금의 행복을 잃기는 싫다고 했잖아?
...그렇네요. 쟝 씨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 말이 맞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되네요.
......
리코는 내게 다시 인사하고, 카트를 밀며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손 안의 독특하면서도 진한 커피를 다시 음미했다.
이건 세상에 둘 도 없는 행복의 맛과 향이다. 이런 커피를 만들어내려면, 아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행복한 삶을 만끽하는 그녀를 보면서, 아주 잠시나마 나는 매우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color=#00CCFF>카리나, 들리니?</color>
<color=#00CCFF>넵, 계속 모니터링 중이에요.</color>
<color=#00CCFF>방금의 대화도 다 들었지?</color>
<color=#00CCFF>네... 역시, 자료에 있는 리코와는 딴판이에요.</color>
<color=#00CCFF>만약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정말 저렇게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color>
<color=#00CCFF>그렇게 가정해봤자 허무할 뿐이야. 우리로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행을 극복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color>
<color=#00CCFF>그렇죠... 그래도 전 저희가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면, 미래의 아이들도 좀 더 행복해질 거라 믿어요.</color>
<color=#00CCFF>그러니 더더욱 서둘러 우리 인형들을 되찾아야지.</color>
<color=#00CCFF>방금 창문 밖에서 SPAS가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너도 봤어?</color>
<color=#00CCFF>SPAS가요? 아뇨, 전 못 봤어요.</color>
<color=#00CCFF>내가 진짜 잘못 봤나...?</color>
<color=#00CCFF>아무튼, 찾아보면 리코 말고도 이상한 점이 더 있겠지?</color>
<color=#00CCFF>벌써 한 가지 발견했어요. 창밖의 차량과 사람들을 잘 보세요.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패턴이 있어요.</color>
<color=#00CCFF>더 멀리는 아예 안 보이고 말이지.</color>
<color=#00CCFF>이 공간은 왠지 미완성인 것 같아요. 모든 사물이 리코가 말한 경로에만 구현되어 있어요, 딱 그 애의 기억이 투영된 것처럼요.</color>
<color=#00CCFF>게다가, 하나같이 시각적 묘사가 너무 단순해요. 레벨 2 플랫폼의 모의 공간이라기 보단, 정말 누군가의 꿈 속 같아요.</color>
<color=#00CCFF>꿈이라... 아무래도, 지금 난 리코의 "비타"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 모양이군.</color>
<color=#00CCFF>저도 이상하게 느껴져서 아까 그 공간의 스캔을 돌려봤는데, 지금 막 결과가 나왔어요. 잠시만요... 맞네요, 지금 지휘관님이 계신 곳은 "비타" 내에서 다시 구성된 모의 공간이에요.</color>
<color=#00CCFF>다시 구성했다니? 무슨 차이가 있는데?</color>
<color=#00CCFF>그러니까, 치킨집의 치킨과 햄버거집의 치킨 정도의 차이랄까요? 둘다 패스트푸드점의 치킨이지만, 전혀 다르잖아요.</color>
<color=#00CCFF>아주 알기 쉬운 설명이네...</color>
<color=#00CCFF>흐음... 그래서 말인데요, 잘하면 그 공간의 구성을 해제할 수도 있겠어요.</color>
<color=#00CCFF>뭐? 아까는 외부에서 간섭할 수 없다며?</color>
<color=#00CCFF>이론상으로는야 그렇지만, 그 공간만큼은 "비타"의 권한 소유자가 만들지 않은 것 같아서요. 공간 구성에 활용되고 있는 연산의 알고리즘을 추적해냈는데, 방식이 우리 인형들의 마인드맵이랑 똑같아요.</color>
<color=#00CCFF>리코가 아니라 우리 인형이 연산해낸 공간이라고?</color>
<color=#00CCFF>네, 거기 있는 거 다 또 하나의 시뮬레이션이에요.</color>
<color=#00CCFF>방금까지 지휘관님이랑 대화한 리코도 진짜 리코인지 의심돼요.</color>
<color=#00CCFF>저게 가짜라니, 설마...</color>
<color=#00CCFF>하지만 자료에 기록된 리코의 성격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걸요? 그 공간 전체가 시뮬레이션이니, 저 리코도 그 일부일 가능성이 높아요.</color>
<color=#00CCFF>생김새만 똑같고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죠.</color>
<color=#00CCFF>그럴 수도 있나...</color>
<color=#00CCFF>마치 달콤한 꿈처럼요.</color>
<color=#00CCFF>이번 "비타"의 주인공인 진짜 리코는 우리 인형의 마인드맵의 연산력을 빌려, 거기서 공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color>
<color=#00CCFF>즉, 진짜 리코는 저 "꿈 속의 리코"가 최대한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고 있다...</color>
<color=#00CCFF>그렇다면 위화감의 의문이 풀리는군.</color>
<color=#00CCFF>하아아... 나도 저렇게 행복한 꿈을 꿔보고 싶다아아...</color>
<color=#00CCFF>꿈 같은 소린 그만 하고, 어떻게 하면 돼?</color>
<color=#00CCFF>어휴... 지휘관님은 섬세하지 않으시다니까요.</color>
<color=#00CCFF>방법은 이미 찾았어요, 이쪽의 권한으로 인형의 연산 지원을 중단시키면 돼요.</color>
<color=#00CCFF>연산이 중단되면, 모의 공간은 바로 사라지겠죠.</color>
<color=#00CCFF>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이건가... 리코가 깨어나면 엄청 실망하겠군.</color>
<color=#00CCFF>지휘관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color>
<color=#00CCFF>그 공간은 전부 시뮬레이션이에요. 아무리 지금 저희가 그 의체들이 상처 입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동정할 필요까진 없어요.</color>
<color=#00CCFF>지금이든 나중이든, 결국 저희가 인형들을 데리고 돌아가면 그 공간이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예요.</color>
<color=#00CCFF>그래... 그렇지, 당장의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되지. 조언 고마워.</color>
카리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행복한 리코"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짓은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거짓. 연산으로 만들어진 모의 공간에서의 행복도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어진다. 나도, 어딘가에 있을 진짜 리코도.
<color=#00CCFF>카리나, 처리해.</color>
<color=#00CCFF>네.</color>
카리나의 대답과 함께, 주변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했을 때처럼 주위가 형용할 수 없는 어둠으로 바뀌더니, 내 몸이 저 따뜻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끝없이 추락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떨어지는 감각이 아까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 이러다 하루 종일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어둠에서 영영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쿵!
예고도, 대비도 없이 지면에 추락했다.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지만, 전신 골절이라도 입은 듯 온몸이 격통에 휩싸였다.
그리고 뭐가 보이기도 전에, 날카로운 총성과 함성이 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