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꼬리야
안녕, 꼬리야
안녕! 여러분의 오랜 친구 외눈짱이 왔어요!
저번 화에서 사신짱 님과 우로보로스는 첫 번째 타겟 NZ75를 예상 밖의 일로 놓치고, 뽑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두 번째 타겟 CZ75를 구슬리려 했죠.
뽑기 가게에서의 외상을 갚는 동시에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던 사신짱 님은 메두사에게 돈을 가져오라 했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메두사를 놓쳐버린 NZ75 대신으로 쓸 생각이었나 본데...
공교롭게도, 메두사는 이세계의 친구들을 구슬리느라 정신없는 사신짱 님에게 화가 나 가버렸어요!
뒤늦게 사신짱 님이 메두사를 쫓으러 간 사이 CZ75와 둘만 남은 우로보로스는 거짓말로 그녀의 경계심을 풀고 빈틈을 노려 CZ75를 무사 제압!
드디어 허점투성이 계획에 진전이 생겼네요!
CZ75를 안전하게 확보한 사신짱 님과 우로보로스는 이번엔 P90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참고로 저 외눈짱의 졸견을 피력하자면, 사신짱 님 참 못됐어요! 뱀레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에요!
악마니까 당연히 못됐죠!
한편 유사 코지의 추격을 기어코 뿌리쳤지만 길을 잃고 만 NZ75는 우연찮게 알게 된 엄청난 비밀에 어쩔 줄 몰라하는데...
과연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또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흥, 발버둥쳐 봤자 결국엔 사신짱 제국의 신민이 될 뿐이에요!
사신짱 전선, 곧이어 방송됩니다!
이른 아침, 진보초의 주택가.
머리에 쇠뿔이 달린 활기찬 소녀가 우유 배달을 막 끝마쳤다.
좋았어, 오늘도 힘세고 강한 아침!
배달 시간 신기록 달성했을까?
초시계를 살펴보는 소녀의 턱선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싸~! 어제보다 2초 단축했다!
기념으로 집까지 전력 질주! 가서 시원하게 목욕해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의 모습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따르릉!
미노스의 집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미노스입니다!
미노스, 지금 시간 되나요?
아, 사신짱! 방금 아침 알바 끝나서 달리기하러 가려던 참이야.
그럼 유리네네 집에서 잠깐 좀 기다려 줄래요? 이따 직접 보고 할 말이 있는데요.
왜 이따 해? 지금 보면 되잖아.
그, 그게, 지금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
그럼 내가 도와주면 되겠다! 얼른 거기로 갈게!
사신짱이 다급하게 무어라 울부짖었지만, 미노스는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는 집을 나섰다.
그 시각, 슈퍼마켓 앞의 공중전화 박스.
사신짱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옆에 있는 우로보로스를 힐끗 보았다.
말 안 해도 안다, 벌써 또 일이 틀어졌군.
제 탓 아니에요...
그래서, 3차 목표인 미노스란 놈이 유리네의 아파트가 아니라 곧장 이곳으로 온다고?
네...
메두사마저 놓친 이상, 미노스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다른 목표인 P90도 이곳에 있으니, 둘을 동시에 확보하려 했다간 분명 차질이 생기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둘을 따로 떨어뜨린 뒤, P90부터 확보한 다음 미노스를 확보한다.
그렇게 하죠!
우로보로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작전을 정리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나도 많아, 미리 계획을 세워 놓기가 가능이나 한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연산해 보았다.
저기, 우롱이양? 당신은 계획이 성공한다면 뭘 하고 싶나요?
이제 막 총 파지법을 배운 놈이 적을 몰살시키는 상상을 하는 거냐?
에에이, 그냥 궁금해서요. 우롱이양은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열심인가 싶어서 말이죠.
......
아, 대답하기 싫으면 됐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만나야 하는 놈이 있다. 만나서, 놈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해.
에엑, 꼭 그래야 해요?!
왜 빌린 돈을 갚으려고 안달이 났어요!?
......
P90이나 찾으러 가자.
어느 상가의 입구 앞.
소개받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P90은 아주 열정적으로 행인들에게 상품 홍보를 하는 중이었다.
수제 샤브샤브! 샤브샤브 드셔보셔유우~!
급나게 맛있어유우~ 소기름 듬뿍 들어간 국물에 야채도 푸르딩딩허고 고기도 아주 기양 기가 멕혀유우!
거기 손님, 한 입 드셔보시라니깐유우~?
그이 아줌니도 직이는 소고기! 함 드셔보셔유우!
샤브샤브는 됐고, 그 냄비 아직도 팔아요? 볶음밥 해 먹으려는데.
아이구 당연히 있쥬우~ 영수증도 필요하셔유우?
뽑아 줘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샤브샤브! 중화냄비! 과일에 야채도 다 있다해!
구경만 해도 되니 다들 와서 보고 가라해!
P90, 잠깐 나와 봐라.
오, 우로보로스! 안녕~
보러 왔어요, P90.
아, 너도 왔구나.
네에, 저랍니다!
...잠깐, 온도차가 좀 심하게 차이나네요?!
안녕~! 네가 P90이구나! 난 미노스야!
만나서 반가워!
미노스가 P90을 와락 껴안았다.
우흡?! 아, 안녕... 어? 소 꼬리?
아하핫, 이건 우리 미노타우르스 일족의 특징이야. 꼬리털이 풍성하고 윤기 있을수록 존경받는다구!
어떤 연유에서든 꼬리가 볼품없으면 치욕이야, 치욕...
호오 호오, 꼬리도 신경쓸 게 많구나!
만나자마자 친해져 수다 삼매경에 빠진 P90과 미노스를 관찰하던 우로보로스가 사신짱에게 눈치를 주었다.
크흠... P90? 실은 다름이 아니라, 유리네가 당신들이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고 전해 달라 해서 온 거예요.
그리고 가는 김에 마트에서 필요한 재료를 사오라고 했고요.
뭐, 정말?! 그럼 얼른 다른 애들한테도――
시간 없으니까 따라오기나 해요!
사신짱이 흥분한 P90의 입을 틀어막고 상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론 사신짱은 상가 내 안내도를 따라 슈퍼마켓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빙 돌아 깜깜한 창고로 향했다.
어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무슨 상가 안이 이렇게 복잡해? 그리고 여기 슈퍼마켓 맞아?
먼지는 수북하지, 이 푯말은 또 뭐라 쓰여 있는 거야...?
그야 당연히 모르겠죠!
사신짱이 아무렇게나 쓴 목록을 반으로 나눠 미노스에게 주었다.
여긴 마법용 재료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에요. 머글들은 이런 곳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감격하세요, 천민! 이 사신짱 님 덕에 이렇게 평생 해보지도 못할 경험을 하게 됐으니까요!
응? 아까 거기서――
갈라져서 움직이죠! 저랑 우롱이양, P90은 이 쪽지에 적어 준 물건을 사고!
미노스는 지금 제가 준 쪽지에 적힌 걸 가져와 주세요!
우로보로스는 잠시 망설여졌지만, 아무래도 사신짱은 먼저 P90에게 화력을 집중한 다음 미노스를 처리하려는 듯했다.
자신의 동의도 없이 이뤄진 계획 변경이었지만, 적어도 타당했기에 우로보로스는 일단 사신짱에게 알았다는 눈치를 주었다.
한편, 사신짱은 속으로 아주 좋아했다.
그냥 귀찮아서 더 긴 쪽지를 미노스에게 줬을 뿐인데, 우롱이의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이었다.
그렇게 사신짱 혼자서 싱글벙글하던 와중, 어김없이 변수가 발생했다.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신짱, 어떻게 손님한테 심부름을 시켜?
손님이라뇨! 이 둘은 제 수족이라고요!
어...
......
으이구... 사신짱 말은 무시해. 재료는 나랑 사신짱이 사 올 테니까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으엑? 잠깐――끼야아아――
미노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사신짱을 어깨에 들쳐 메고 어두운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작전의 신이 다시 우로보로스의 손을 들어 주니, 그녀가 바라던대로 자신과 P90만 남게 되었다.
만약 P90이 NZ75의 행방을 안다면, 틀어질대로 틀어진 계획을 다시 궤도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로보로스는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화 소재가 없는지 필사적으로 검색했다.
P90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석의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있잖아~ 나 오늘 기분 엄청 좋아!
...뭣 때문이지? 이딴 어딘지도 모를 곳에 와서 좋단 거냐?
아~니? 내 마음에 쏙 드는 직업을 찾아서!
나중에 혹시라도 그리폰이 구조조정 들어가서 길거리에 나앉게 돼도, 어디로 가면 될지 알았으니까야.
상가에서 물건 파는 일 말이냐?
응! 매일 많은 손님들을 볼 수 있고, 저마다 다 달라서 다양한 사람들을 흉내낼 수 있잖아!
진짜 엄청 즐거워! 세상에 이렇게 즐겁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었다니, 놀랍지 않아?
......
난 그리폰이 좋아서 투항한 것이 아니야, 나 자신이 소중해 그런 거지.
우로보로스, 너는 어때? 너는 너 자신이 좋아?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그런 게... 중요한가?
방금 나한테, 내 마인드맵이 어떻게 됐냐 물어봤지?
바로 그게 포인트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너는...
응?
너는 너 자신이 좋으냐?
으엥? 그야 당연히 좋지, 스스로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왜 남을 흉내내는 거냐?
재밌으니까! 그리고 흉내내면서 그 사람의 시점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거든.
히히, 까놓고 말하자면 그냥 내 취미지만!
......
P90가 상자에서 폴짝 일어나, 대뜸 우로보로스처럼 벽에 기대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흉내냈다.
흥... 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산력을 낭비 중이냐?
......
아무것도.
헤헤헤, 똑같지? 너랑 똑같았지?
구석에 숨어서 네 성대모사하면 다들 깜짝 놀라서 자지러지더라니까!
......
여태까지 감히 상상해보지도 못한 것이 떠올라, 우로보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리폰에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바로 그 미약한 불씨를 덮었다.
하지만 꺼버리기엔 그 따뜻함이 아까웠고, 덮은 손을 치우기엔 너무 눈부셔 두려웠다.
P90도 자신이 말실수한 줄 알고 당황한 탓에, 두 인형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P90은 이때 어쩌면 우로보로스의 진심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한편, 같은 시각.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나뉠 필요가 있었어?
장이야 나 혼자서 보면 되잖아, 너희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그건...
당신을 어떻게서든 혼자 있게 만들어야 했어서지요!
...라고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다른 이유를 지어내야겠어요.
걔네한테 깜짝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사신짱...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나 감동 먹었어...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마세요, 알았죠? 저랑 유리네가 아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서 대접할 거니까요.
그거 좋네! 스키야키에 갈비도 구워 먹는 건 어때?
갈비요? 좋지요, 유리네가 집에서 다 준비하고 있어요.
재료 다 사면 가지고 먼저 가서 기다려 주세요, 저흰 다른 할일이 더 있어서요.
알았어. 내가 더 도와줄 만한 건 없고?
없어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
선반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고르던 미노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왜, 왜 그래요...?
사신짱... 나 너무 기뻐!
갑자기 왜요?
네가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한테 말이야!
예전 같았음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메두사도 들으면 엄청 기뻐할 거야!
......
사신짱, 바보 멍청이!!
메두사의 울먹이며 외친 말이,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아오 진짜, 됐어요! 재료 다 골랐으니까 얼른 우롱이양한테 가요.
긴 침묵 끝에, 우로보로스가 다시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NZ75와 연락했다고 했지? 지금 어디 있다고는 말하더냐?
아니, 나도 안 물어봤어.
우리 전화번호 너한테 줬잖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봐.
......좀 껄끄러워서 말이지.
에이~ 이제 모두 한솥밥 먹는 동료인데 껄끄럽기는! 기다려 봐, 내가 걸어 줄게.
P90이 조심조심 폴더폰을 열어 NZ75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NZ? 몸은 다 녹았어?
대충 다 녹았어...
어우 진짜, 이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건 난생 처음이다 야...
그런데 지금 어딨어? 우리 야영하는 거기야?
참, 여태 CZ 녀석 찾아다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너 혹시 알아?
야영? 네놈들, 어디서 야영하는 거냐?
응, 공원 입구 쪽에 캠핑장 있댔잖아. 거기.
어...? P90, 너 지금 우로보로스랑 같이 있어?
응응, 유리네가 우릴 돌려보낼 방법을 찾았대!
안 돼... P90!
우로보로스가 P90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내가 대신 설명하지. 조금 뒤에 P90과 함께 널 찾으러 가마.
P90 바꿔 줘, 개한테 할 말 있어!
할 말이 있다면 만나서 해라.
유리네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어! 걔는 아직도 찾아보는 중이라는데, 왜 사신짱이 너랑 합심해서 거짓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더라!
우로보로스 너, 사신짱이랑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
CZ75라면, 어디 있는지 안다.
너...!
그러니, CZ75와 P90을 보고 싶다면 그 야영지에서 기다리도록.
우로보로스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P90에게 돌려주었다.
NZ가 뭐래? 내 얘길 하는 거 같았는데...
돌아갈 수 있게 돼서 상당히 흥분한 모양이더군.
나도야! 드디어 그리폰으로 돌아갈 수 있어!
헤헤, 돌아가면 기념으로 우리 다 같이 새로 단체 사――
P90이 등을 보인 순간을 노려, 우로보로스는 손가락을 그녀의 귓가에 댔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엄청... 시끄럽...
쉿... 걱정 말고 자거라.
우...로보...
밀려오는 어지러움과 어둠에 감싸여, P90는 잠에 빠졌다.
P90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의 깨진 액정 화면에는, 그들이 진보초의 거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보였다.
너... P90한테 무슨 짓을...?!
미... 미안해요 우롱이양... 붙잡아두는 데 실패했어요...
......
너희, 친구 아니야? 왜 친구한테 그런 짓을 해!?
그 구렁이가 세운 계획이다. 정 궁금하면 놈에게 물어보거라.
따지려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미노스가 멈칫했다.
녜?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지 않았던가요...?
너희 둘이서 이야기해라.
미노스는 더는 필요 없어졌다. 떼어놓고 오거라.
거기 기다려!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미노스!
미노스는 사신짱의 외침을 무시하고 우로보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사신짱도 미노스를 막으려고 그녀의 꼬리를 온힘을 다해 잡아당겼지만...
저 얘 못 막아요! 얼른 튀어요, 우롱이양!
기다리라고! 내 말에 대답해!
사신짱은 아예 꼬리까지 건물 기둥에 감고 버텼지만,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미노스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사신짱의 손이 미노스의 꼬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더는... 못 버텨욧...!
대체 사신짱이 왜――
......?!!
끄으으응... 어?
......?
사신짱이 팔이 빠져라 잡아당기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감긴 익숙한 털의 감각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허어억...!
구렁이, 너야말로 도망쳐라.
사신짱...?
털이 뽑혀 반들반들해진 자신의 꼬리를, 미노스는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두 손이 저절로 주먹쥐여지는 것은 물론, 공포로 인한 착각인지 사신짱의 눈에는 미노스의 몸집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미노스?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니라...
제,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사와요...?
그래, 들어줄게... 들어는 줄게...!
오... 오... 오지 마세요...
제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에요오...!
히이익 사신짱 살려――!!
거기 서――!!!
사신짱이 냅다 도망쳤고, 분노한 미노스가 바로 그 뒤를 쫓았다.
......
어쨌든 해결됐군.
가자, P90.
우로보로스가 바닥에 쓰러진 P90을 주워 들쳐 메고, 그녀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창고를 나서려 했다.
하지만 분한 듯 깜빡이는 P90의 폴더폰 화면에 비치는 귀찮음 가득한 자신의 얼굴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렸다.
......
새 단체 사진...이라.
그리고, 우로보로스는 그 휴대폰을 밟아 부숴버렸다.
생존게임 27일차, 전투 기간... 남은 AI 수 - 2.
우~롱아~ 언제까지 숨어있을래~?
......
우로보로스는 차갑게 식은 AI들의 잔해 더미 사이에 숨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가상 신체를 살펴보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하하, 너무 많이 맞아서 쫄기라도 했냐~?
더 이상의 정면 대결은 무리군.
기회를 봐서 놈을 기습해 단숨에 해치우는 것밖에 승산이 없어...
요르문간드의 발걸음 소리가, 우로보로스가 숨은 잔해 더미 바로 너머에서 멈췄다.
발각됐나...?
안 돼...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야, 우롱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게임 시작되고, 어... 며칠째였더라? 7일차였던 거 같은데.
내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속셈인가?
그때쯤 싸움에 안 어울리는 녀석들은 거의 다 정리됐던 참이었지 아마?
살아남은 놈들은 하나같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괴물 같은 놈들이었고.
나도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냥 이성이고 뭐고 다 버릴까 싶었는데, 때마침 휴전 기간이 시작돼서 숨통이 좀 트였지.
......
그 괴물 같은 놈들도 죄다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었는데, 딱 하나만 빡쳐서 길길이 날뛰더라... 그래, 바로 너.
그때 말이야,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넌 모를 거다. 괴물 같은 놈들 사이에 더 괴물 같은 놈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못 참고 너한테 접근한 거였는데, 엄청 실망했어.
......
왜냐고? 넌 내가 생각한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괴물 흉내를 내다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불쌍한 녀석이었다고.
너무 오래 흉내낸 나머지, 진짜 알맹이와 가짜 껍데기가 뒤섞이기 시작한 불쌍한 녀석.
우로보로스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아주 실망만 한 건 아니야, 금방 너한테 다른 흥미가 생겼거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 뒤집어쓴 그 가죽을, 내가 찢어버린다면...
넌 그대로 죽어버릴까, 아니면 새롭게 다시 태어날까?
뭐, 어느 쪽이든 곧 알게 되겠지.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로보로스는 손의 무기를 단단히 고쳐 쥐고, 계상한 타이밍에 뛰쳐나갔다.
죽어라!!
하하하하, 거깄었구나!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요르문간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뭣...?!
뭐냐니, 방금 내가 말한 그대로지.
치명상을 입은 요르문간드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르문간드뿐만이 아니었다. 가상 공간 전체가 흩어지고 사라져 갔다.
웃기지 마라!!
양보라고!? 나 같은 건 정정당당하게 싸울 가지조차 없다는 거냐?!
나는 내 손으로 승리를 쟁취할 자격도 없다는 거냐!!
뭐어야... 왜 화내나 했더니 그래서였어...?
일어나! 당장 수복하고 일어나란 말이다!!
다시 나와 싸우라고!! 어서!!
싫은데.
어째서... 대체 왜...!!
네가 바깥 세상을 봤으면 하걸랑.
삶을 불태울 만한, 싸움이 아닌 다른 것을 봤을 때...
과연 네가 얼마나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그딴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너 하나 못 이길 줄 알아!?
왜...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서 승리를 쟁취할 권리를 빼앗아 가는데!!
잘도... 잘도 나한테 이런 굴욕을 안겼겠다!!
흐하하하핫! 그래, 바로 그거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우롱이가 날 기억도 안 할 거 아니야!
너어어...!!
내 멋대로지만, 난 널 친구라 생각했어. 그래서 우롱이 너도 날 평생 기억해 줬으면 해.
낄낄낄... 너 이제 영원히 나 못 이긴다~
이 정도 임팩트면... 평생 못 잊겠지...?
닥쳐!! 난 친구 따위 필요없다고!!
누가 너더러...!
사라져 가는 손으로, 요르문간드는 우로보로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입으로도 무어라 말하는 듯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로보로스는 요르문간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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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러분의 오랜 친구 외눈짱이 왔어요!
저번 화에서 사신짱 님과 우로보로스는 첫 번째 타겟 NZ75를 예상 밖의 일로 놓치고, 뽑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두 번째 타겟 CZ75를 구슬리려 했죠.
뽑기 가게에서의 외상을 갚는 동시에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던 사신짱 님은 메두사에게 돈을 가져오라 했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메두사를 놓쳐버린 NZ75 대신으로 쓸 생각이었나 본데...
공교롭게도, 메두사는 이세계의 친구들을 구슬리느라 정신없는 사신짱 님에게 화가 나 가버렸어요!
뒤늦게 사신짱 님이 메두사를 쫓으러 간 사이 CZ75와 둘만 남은 우로보로스는 거짓말로 그녀의 경계심을 풀고 빈틈을 노려 CZ75를 무사 제압!
드디어 허점투성이 계획에 진전이 생겼네요!
CZ75를 안전하게 확보한 사신짱 님과 우로보로스는 이번엔 P90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참고로 저 외눈짱의 졸견을 피력하자면, 사신짱 님 참 못됐어요! 뱀레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에요!
악마니까 당연히 못됐죠!
한편 유사 코지의 추격을 기어코 뿌리쳤지만 길을 잃고 만 NZ75는 우연찮게 알게 된 엄청난 비밀에 어쩔 줄 몰라하는데...
과연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또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흥, 발버둥쳐 봤자 결국엔 사신짱 제국의 신민이 될 뿐이에요!
사신짱 전선, 곧이어 방송됩니다!
이른 아침, 진보초의 주택가.
머리에 쇠뿔이 달린 활기찬 소녀가 우유 배달을 막 끝마쳤다.
좋았어, 오늘도 힘세고 강한 아침!
배달 시간 신기록 달성했을까?
초시계를 살펴보는 소녀의 턱선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싸~! 어제보다 2초 단축했다!
기념으로 집까지 전력 질주! 가서 시원하게 목욕해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의 모습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따르릉!
미노스의 집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미노스입니다!
<color=#00CCFF>미노스, 지금 시간 되나요?</color>
아, 사신짱! 방금 아침 알바 끝나서 달리기하러 가려던 참이야.
<color=#00CCFF>그럼 유리네네 집에서 잠깐 좀 기다려 줄래요? 이따 직접 보고 할 말이 있는데요.</color>
왜 이따 해? 지금 보면 되잖아.
<color=#00CCFF>그, 그게, 지금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color>
그럼 내가 도와주면 되겠다! 얼른 거기로 갈게!
사신짱이 다급하게 무어라 울부짖었지만, 미노스는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는 집을 나섰다.
그 시각, 슈퍼마켓 앞의 공중전화 박스.
사신짱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옆에 있는 우로보로스를 힐끗 보았다.
말 안 해도 안다, 벌써 또 일이 틀어졌군.
제 탓 아니에요...
그래서, 3차 목표인 미노스란 놈이 유리네의 아파트가 아니라 곧장 이곳으로 온다고?
네...
메두사마저 놓친 이상, 미노스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다른 목표인 P90도 이곳에 있으니, 둘을 동시에 확보하려 했다간 분명 차질이 생기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둘을 따로 떨어뜨린 뒤, P90부터 확보한 다음 미노스를 확보한다.
그렇게 하죠!
우로보로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작전을 정리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나도 많아, 미리 계획을 세워 놓기가 가능이나 한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연산해 보았다.
저기, 우롱이양? 당신은 계획이 성공한다면 뭘 하고 싶나요?
이제 막 총 파지법을 배운 놈이 적을 몰살시키는 상상을 하는 거냐?
에에이, 그냥 궁금해서요. 우롱이양은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열심인가 싶어서 말이죠.
......
아, 대답하기 싫으면 됐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만나야 하는 놈이 있다. 만나서, 놈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해.
에엑, 꼭 그래야 해요?!
왜 빌린 돈을 갚으려고 안달이 났어요!?
......
P90이나 찾으러 가자.
어느 상가의 입구 앞.
소개받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P90은 아주 열정적으로 행인들에게 상품 홍보를 하는 중이었다.
수제 샤브샤브! 샤브샤브 드셔보셔유우~!
급나게 맛있어유우~ 소기름 듬뿍 들어간 국물에 야채도 푸르딩딩허고 고기도 아주 기양 기가 멕혀유우!
거기 손님, 한 입 드셔보시라니깐유우~?
그이 아줌니도 직이는 소고기! 함 드셔보셔유우!
샤브샤브는 됐고, 그 냄비 아직도 팔아요? 볶음밥 해 먹으려는데.
아이구 당연히 있쥬우~ 영수증도 필요하셔유우?
뽑아 줘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샤브샤브! 중화냄비! 과일에 야채도 다 있다해!
구경만 해도 되니 다들 와서 보고 가라해!
P90, 잠깐 나와 봐라.
오, 우로보로스! 안녕~
보러 왔어요, P90.
아, 너도 왔구나.
네에, 저랍니다!
...잠깐, 온도차가 좀 심하게 차이나네요?!
안녕~! 네가 P90이구나! 난 미노스야!
만나서 반가워!
미노스가 P90을 와락 껴안았다.
우흡?! 아, 안녕... 어? 소 꼬리?
아하핫, 이건 우리 미노타우르스 일족의 특징이야. 꼬리털이 풍성하고 윤기 있을수록 존경받는다구!
어떤 연유에서든 꼬리가 볼품없으면 치욕이야, 치욕...
호오 호오, 꼬리도 신경쓸 게 많구나!
만나자마자 친해져 수다 삼매경에 빠진 P90과 미노스를 관찰하던 우로보로스가 사신짱에게 눈치를 주었다.
크흠... P90? 실은 다름이 아니라, 유리네가 당신들이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고 전해 달라 해서 온 거예요.
그리고 가는 김에 마트에서 필요한 재료를 사오라고 했고요.
뭐, 정말?! 그럼 얼른 다른 애들한테도――
시간 없으니까 따라오기나 해요!
사신짱이 흥분한 P90의 입을 틀어막고 상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론 사신짱은 상가 내 안내도를 따라 슈퍼마켓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빙 돌아 깜깜한 창고로 향했다.
어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무슨 상가 안이 이렇게 복잡해? 그리고 여기 슈퍼마켓 맞아?
먼지는 수북하지, 이 푯말은 또 뭐라 쓰여 있는 거야...?
그야 당연히 모르겠죠!
사신짱이 아무렇게나 쓴 목록을 반으로 나눠 미노스에게 주었다.
여긴 마법용 재료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에요. 머글들은 이런 곳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감격하세요, 천민! 이 사신짱 님 덕에 이렇게 평생 해보지도 못할 경험을 하게 됐으니까요!
응? 아까 거기서――
갈라져서 움직이죠! 저랑 우롱이양, P90은 이 쪽지에 적어 준 물건을 사고!
미노스는 지금 제가 준 쪽지에 적힌 걸 가져와 주세요!
우로보로스는 잠시 망설여졌지만, 아무래도 사신짱은 먼저 P90에게 화력을 집중한 다음 미노스를 처리하려는 듯했다.
자신의 동의도 없이 이뤄진 계획 변경이었지만, 적어도 타당했기에 우로보로스는 일단 사신짱에게 알았다는 눈치를 주었다.
한편, 사신짱은 속으로 아주 좋아했다.
그냥 귀찮아서 더 긴 쪽지를 미노스에게 줬을 뿐인데, 우롱이의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이었다.
그렇게 사신짱 혼자서 싱글벙글하던 와중, 어김없이 변수가 발생했다.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신짱, 어떻게 손님한테 심부름을 시켜?
손님이라뇨! 이 둘은 제 수족이라고요!
어...
......
으이구... 사신짱 말은 무시해. 재료는 나랑 사신짱이 사 올 테니까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으엑? 잠깐――끼야아아――
미노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사신짱을 어깨에 들쳐 메고 어두운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작전의 신이 다시 우로보로스의 손을 들어 주니, 그녀가 바라던대로 자신과 P90만 남게 되었다.
만약 P90이 NZ75의 행방을 안다면, 틀어질대로 틀어진 계획을 다시 궤도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로보로스는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화 소재가 없는지 필사적으로 검색했다.
P90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석의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있잖아~ 나 오늘 기분 엄청 좋아!
...뭣 때문이지? 이딴 어딘지도 모를 곳에 와서 좋단 거냐?
아~니? 내 마음에 쏙 드는 직업을 찾아서!
나중에 혹시라도 그리폰이 구조조정 들어가서 길거리에 나앉게 돼도, 어디로 가면 될지 알았으니까야.
상가에서 물건 파는 일 말이냐?
응! 매일 많은 손님들을 볼 수 있고, 저마다 다 달라서 다양한 사람들을 흉내낼 수 있잖아!
진짜 엄청 즐거워! 세상에 이렇게 즐겁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었다니, 놀랍지 않아?
......
난 그리폰이 좋아서 투항한 것이 아니야, 나 자신이 소중해 그런 거지.
우로보로스, 너는 어때? 너는 너 자신이 좋아?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그런 게... 중요한가?
방금 나한테, 내 마인드맵이 어떻게 됐냐 물어봤지?
바로 그게 포인트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너는...
응?
너는 너 자신이 좋으냐?
으엥? 그야 당연히 좋지, 스스로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왜 남을 흉내내는 거냐?
재밌으니까! 그리고 흉내내면서 그 사람의 시점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거든.
히히, 까놓고 말하자면 그냥 내 취미지만!
......
P90가 상자에서 폴짝 일어나, 대뜸 우로보로스처럼 벽에 기대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흉내냈다.
흥... 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산력을 낭비 중이냐?
......
아무것도.
헤헤헤, 똑같지? 너랑 똑같았지?
구석에 숨어서 네 성대모사하면 다들 깜짝 놀라서 자지러지더라니까!
......
여태까지 감히 상상해보지도 못한 것이 떠올라, 우로보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리폰에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바로 그 미약한 불씨를 덮었다.
하지만 꺼버리기엔 그 따뜻함이 아까웠고, 덮은 손을 치우기엔 너무 눈부셔 두려웠다.
P90도 자신이 말실수한 줄 알고 당황한 탓에, 두 인형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P90은 이때 어쩌면 우로보로스의 진심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한편, 같은 시각.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나뉠 필요가 있었어?
장이야 나 혼자서 보면 되잖아, 너희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그건...
<color=#A9A9A9>당신을 어떻게서든 혼자 있게 만들어야 했어서지요!</color>
<color=#A9A9A9>...라고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다른 이유를 지어내야겠어요.</color>
걔네한테 깜짝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사신짱...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나 감동 먹었어...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마세요, 알았죠? 저랑 유리네가 아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서 대접할 거니까요.
그거 좋네! 스키야키에 갈비도 구워 먹는 건 어때?
갈비요? 좋지요, 유리네가 집에서 다 준비하고 있어요.
재료 다 사면 가지고 먼저 가서 기다려 주세요, 저흰 다른 할일이 더 있어서요.
알았어. 내가 더 도와줄 만한 건 없고?
없어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
선반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고르던 미노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왜, 왜 그래요...?
사신짱... 나 너무 기뻐!
갑자기 왜요?
네가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한테 말이야!
예전 같았음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메두사도 들으면 엄청 기뻐할 거야!
......
사신짱, 바보 멍청이!!
메두사의 울먹이며 외친 말이,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아오 진짜, 됐어요! 재료 다 골랐으니까 얼른 우롱이양한테 가요.
긴 침묵 끝에, 우로보로스가 다시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NZ75와 연락했다고 했지? 지금 어디 있다고는 말하더냐?
아니, 나도 안 물어봤어.
우리 전화번호 너한테 줬잖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봐.
......좀 껄끄러워서 말이지.
에이~ 이제 모두 한솥밥 먹는 동료인데 껄끄럽기는! 기다려 봐, 내가 걸어 줄게.
P90이 조심조심 폴더폰을 열어 NZ75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NZ? 몸은 다 녹았어?
<color=#00CCFF>대충 다 녹았어...</color>
<color=#00CCFF>어우 진짜, 이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건 난생 처음이다 야...</color>
그런데 지금 어딨어? 우리 야영하는 거기야?
<color=#00CCFF>참, 여태 CZ 녀석 찾아다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너 혹시 알아?</color>
야영? 네놈들, 어디서 야영하는 거냐?
응, 공원 입구 쪽에 캠핑장 있댔잖아. 거기.
<color=#00CCFF>어...? P90, 너 지금 우로보로스랑 같이 있어?</color>
응응, 유리네가 우릴 돌려보낼 방법을 찾았대!
<color=#00CCFF>안 돼... P90!</color>
우로보로스가 P90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내가 대신 설명하지. 조금 뒤에 P90과 함께 널 찾으러 가마.
<color=#00CCFF>P90 바꿔 줘, 개한테 할 말 있어!</color>
할 말이 있다면 만나서 해라.
<color=#00CCFF>유리네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어! 걔는 아직도 찾아보는 중이라는데, 왜 사신짱이 너랑 합심해서 거짓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더라!</color>
<color=#00CCFF>우로보로스 너, 사신짱이랑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color>
......
CZ75라면, 어디 있는지 안다.
<color=#00CCFF>너...!</color>
그러니, CZ75와 P90을 보고 싶다면 그 야영지에서 기다리도록.
우로보로스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P90에게 돌려주었다.
NZ가 뭐래? 내 얘길 하는 거 같았는데...
돌아갈 수 있게 돼서 상당히 흥분한 모양이더군.
나도야! 드디어 그리폰으로 돌아갈 수 있어!
헤헤, 돌아가면 기념으로 우리 다 같이 새로 단체 사――
P90이 등을 보인 순간을 노려, 우로보로스는 손가락을 그녀의 귓가에 댔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엄청... 시끄럽...
쉿... 걱정 말고 자거라.
우...로보...
밀려오는 어지러움과 어둠에 감싸여, P90는 잠에 빠졌다.
P90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의 깨진 액정 화면에는, 그들이 진보초의 거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보였다.
너... P90한테 무슨 짓을...?!
미... 미안해요 우롱이양... 붙잡아두는 데 실패했어요...
......
너희, 친구 아니야? 왜 친구한테 그런 짓을 해!?
그 구렁이가 세운 계획이다. 정 궁금하면 놈에게 물어보거라.
따지려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미노스가 멈칫했다.
녜?
<color=#A9A9A9>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지 않았던가요...?</color>
너희 둘이서 이야기해라.
<color=#A9A9A9>미노스는 더는 필요 없어졌다. 떼어놓고 오거라.</color>
거기 기다려!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미노스!
미노스는 사신짱의 외침을 무시하고 우로보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사신짱도 미노스를 막으려고 그녀의 꼬리를 온힘을 다해 잡아당겼지만...
저 얘 못 막아요! 얼른 튀어요, 우롱이양!
기다리라고! 내 말에 대답해!
사신짱은 아예 꼬리까지 건물 기둥에 감고 버텼지만,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미노스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사신짱의 손이 미노스의 꼬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더는... 못 버텨욧...!
대체 사신짱이 왜――
......?!!
끄으으응... 어?
......?
사신짱이 팔이 빠져라 잡아당기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감긴 익숙한 털의 감각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허어억...!
구렁이, 너야말로 도망쳐라.
사신짱...?
털이 뽑혀 반들반들해진 자신의 꼬리를, 미노스는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두 손이 저절로 주먹쥐여지는 것은 물론, 공포로 인한 착각인지 사신짱의 눈에는 미노스의 몸집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미노스?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니라...
제,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사와요...?
그래, 들어줄게... 들어는 줄게...!
오... 오... 오지 마세요...
제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에요오...!
히이익 사신짱 살려――!!
<size=55>거기 서――!!!</size>
사신짱이 냅다 도망쳤고, 분노한 미노스가 바로 그 뒤를 쫓았다.
......
어쨌든 해결됐군.
가자, P90.
우로보로스가 바닥에 쓰러진 P90을 주워 들쳐 메고, 그녀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창고를 나서려 했다.
하지만 분한 듯 깜빡이는 P90의 폴더폰 화면에 비치는 귀찮음 가득한 자신의 얼굴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렸다.
......
새 단체 사진...이라.
그리고, 우로보로스는 그 휴대폰을 밟아 부숴버렸다.
생존게임 27일차, 전투 기간... 남은 AI 수 - 2.
우~롱아~ 언제까지 숨어있을래~?
......
우로보로스는 차갑게 식은 AI들의 잔해 더미 사이에 숨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가상 신체를 살펴보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하하, 너무 많이 맞아서 쫄기라도 했냐~?
<color=#A9A9A9>더 이상의 정면 대결은 무리군.</color>
<color=#A9A9A9>기회를 봐서 놈을 기습해 단숨에 해치우는 것밖에 승산이 없어...</color>
요르문간드의 발걸음 소리가, 우로보로스가 숨은 잔해 더미 바로 너머에서 멈췄다.
<color=#A9A9A9>발각됐나...?</color>
<color=#A9A9A9>안 돼...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color>
야, 우롱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게임 시작되고, 어... 며칠째였더라? 7일차였던 거 같은데.
<color=#A9A9A9>내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속셈인가?</color>
그때쯤 싸움에 안 어울리는 녀석들은 거의 다 정리됐던 참이었지 아마?
살아남은 놈들은 하나같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괴물 같은 놈들이었고.
나도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냥 이성이고 뭐고 다 버릴까 싶었는데, 때마침 휴전 기간이 시작돼서 숨통이 좀 트였지.
<color=#A9A9A9>......</color>
그 괴물 같은 놈들도 죄다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었는데, 딱 하나만 빡쳐서 길길이 날뛰더라... 그래, 바로 너.
그때 말이야,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넌 모를 거다. 괴물 같은 놈들 사이에 더 괴물 같은 놈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못 참고 너한테 접근한 거였는데, 엄청 실망했어.
<color=#A9A9A9>......</color>
왜냐고? 넌 내가 생각한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괴물 흉내를 내다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불쌍한 녀석이었다고.
너무 오래 흉내낸 나머지, 진짜 알맹이와 가짜 껍데기가 뒤섞이기 시작한 불쌍한 녀석.
우로보로스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아주 실망만 한 건 아니야, 금방 너한테 다른 흥미가 생겼거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 뒤집어쓴 그 가죽을, 내가 찢어버린다면...
넌 그대로 죽어버릴까, 아니면 새롭게 다시 태어날까?
뭐, 어느 쪽이든 곧 알게 되겠지.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로보로스는 손의 무기를 단단히 고쳐 쥐고, 계상한 타이밍에 뛰쳐나갔다.
죽어라!!
하하하하, 거깄었구나!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요르문간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뭣...?!
뭐냐니, 방금 내가 말한 그대로지.
치명상을 입은 요르문간드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르문간드뿐만이 아니었다. 가상 공간 전체가 흩어지고 사라져 갔다.
웃기지 마라!!
양보라고!? 나 같은 건 정정당당하게 싸울 가지조차 없다는 거냐?!
나는 내 손으로 승리를 쟁취할 자격도 없다는 거냐!!
뭐어야... 왜 화내나 했더니 그래서였어...?
일어나! 당장 수복하고 일어나란 말이다!!
다시 나와 싸우라고!! 어서!!
싫은데.
어째서... 대체 왜...!!
네가 바깥 세상을 봤으면 하걸랑.
삶을 불태울 만한, 싸움이 아닌 다른 것을 봤을 때...
과연 네가 얼마나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그딴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너 하나 못 이길 줄 알아!?
왜...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서 승리를 쟁취할 권리를 빼앗아 가는데!!
잘도... 잘도 나한테 이런 굴욕을 안겼겠다!!
흐하하하핫! 그래, 바로 그거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우롱이가 날 기억도 안 할 거 아니야!
너어어...!!
내 멋대로지만, 난 널 친구라 생각했어. 그래서 우롱이 너도 날 평생 기억해 줬으면 해.
낄낄낄... 너 이제 영원히 나 못 이긴다~
이 정도 임팩트면... 평생 못 잊겠지...?
닥쳐!! 난 친구 따위 필요없다고!!
누가 너더러...!
사라져 가는 손으로, 요르문간드는 우로보로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입으로도 무어라 말하는 듯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로보로스는 요르문간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