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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 공각기동대

포도 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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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Z64 구역, 거주 단지 인근의 거리.

390호

지휘관님! 기다려 주세요!

지휘관

계속 따라올 필요 없어.

390호

그래도...!

지휘관

임무 평점 신경쓰는 거라면 만점 줄 테니 걱정 마.

390호

네?

지휘관은 다소 쌀쌀맞은 투로, 평가 알림창의 각 항목 평점을 최대치로 찍었다.

지휘관

이러면 됐지?

390호

......

이해불가, 억울함. 씁쓸한 감정이 390호의 마인드맵을 가득 채워 미각 시스템에까지 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쓸쓸히 떠나려는 지휘관을 바라보는 그녀에겐, 지휘관의 뒷모습에서 단호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390호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건가요?

지휘관

......

390호

네, 당신이 어떻게 아셨는진 몰라도 제가 임무 평점을 정말정말 신경쓰는 건 맞아요.

<size=50>하지만 이런 굴욕적인 방식으로는 얻고 싶지 않아요!</size>

390호는 손을 들어, 임무 평가 인터페이스를 불러내 방금 지휘관이 제출한 만점 평가를 취소시켰다.

지휘관

너...

390호

저는 제 실력으로 그 평점에 걸맞는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지휘관

......

390호

그럼 오늘의 안내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봬요.

내일엔 기필코——

지휘관

HK433.

390호

...네? HK433라니, 그게 무슨...

줄곧 과묵하던 방문객이 돌연 고개를 들어, 390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서야, 390호는 가을바람처럼 초라하던 방문객의 눈이 의지로 가득차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저 두 눈에는 그보다 아픔이 더 많았다.

지휘관

내가 떠나기 전, 네가 나에게 알려 주려 한 일은 대체 뭐였니?

390호

당신이 떠나기 전, 제가 알려드리려 한 일...이라뇨?

어제의 정기 순시를 끝낸 지휘관은 지휘실로 돌아왔다.

정기 순시 일지를 펼쳐 텅 빈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휘관은 본인의 머릿속도 새하얘지는 듯했다.

펜을 쥐고 한참을 고민하다, 지휘관은 짧게 글 한 줄을 적었다.

"이상 무"

지휘관

......

<color=#A9A9A9>(그래, 모두 아무 이상 없어. 전부 다 점점 나아질 거야...)</color>

HK433

......

HK433이 탁상 위에 커피를 살며시 내려놓고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HK433

지휘관님,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발언은 제 임무 평점에 영향이 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감히 말하건대, 제가 최근 지휘관님의 정신 상태와 신체 건강을 관찰한 결과 휴일을 가지심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온전한 휴가를 이용해 심신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는——

지휘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그건 기지가 원래 질서를 되찾은 다음에 얘기하자.

HK433

인형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으시면서, 스스로는 그렇게 끙끙 앓으실 건가요?

지휘관

......

HK433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HK433

지휘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업무와는 무관계하고, 지휘관님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점용할 수도 있지만...

지휘관

말해보렴.

HK433

사실, 저희——

HK433의 말은 페르시카의 긴급 통신에 끊어졌다.

그리고 그 후, 말하지 못한 말들은 전부 현실에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지키지 못한 수많은 "다음"과 함께.

지휘관

......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줘.

390호

잠시만요! 잠시만요, 지휘관님!

뒤돌아 떠나려는 지휘관을 390호가 불러 세웠다.

390호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어째선지 저와 당신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처음 뵈었을 때의 그 눈빛부터...

지휘관

오해라...

지휘관의 눈동자에 다시금 그 예리함이 나타났다.

390호

소명해 주세요.

지휘관

왜 나를 배신했지? 왜 보이스와 푸린을 팔았어?

390호

무,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당신에 대한 배신 행위 따위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보이스와 푸린은 누구죠?

지휘관

......

390호

혹시 그 배신이란 게, 그 두 이름과 관계 있나요?

아직 저를 믿어 주신다면, 그 두 분의 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돌아가서 조회해 보겠습니다.

지휘관

......

390호

...지휘관님?

방문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시대에 잊혀진 유령처럼, 유유히 길모퉁이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2Z64 구역, 미니러브 사무실.

232호

보고. 과속 운전자 260호를 체포, 연행하여 신문과에 인수인계합니다.

260호

<size=50>들어가기 싫다고! 이거 놔 XX! 배짱 있음 맞짱 뜨자니까!</size>

388호

수고했어요, 232호.

388호는 바둥대는 260호를 능숙하게 인계받고, 욕지거리를 멈추지 않는 입을 틀어막은 후 번쩍 들어 수감 구역으로 향했다.

미니러브 수감 구역.

388호

일단 여기에 있으세요.

철창문을 열고, 388호는 260호를 휙 던져 넣었다.

이걸로 몇번째일까? 232호에게서 260호의 신변을 인계받아,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

이 일만 계속 순환하는 것일까? 매일 출근해서 만나는 사람, 일어나는 일도 거의 다 변화가 없다.

그렇게 260호의 수감실 앞에 서서, 388호는 생각에 잠겼다.

388호

260호, 이 세상이 계속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아나요?

아니지, 이렇게 말하기보단... 이 세상은 어느 날을 청사진으로, 아주 미세한 연산량의 차이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요.

260호

으으읍! 으읍!

388호

아, 미안해요. 말을 못하는 상태였죠.

388호는 철창 사이로 팔을 뻗어, 260호의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풀었다.

260호

퉷퉷... 흥, 그게 뭐 어쨌는데?

반복되면 되라지, 난 계속 재미 볼 수 있기만 하면 돼.

388호

......

대다수 사람들의 대답도 이와 같았다. 그들은 반복되든 아니든, 자신의 생활이 계속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설마, 의문을 가진 것은 자신뿐일까? 388호가 다시 생각하던... 그때.

260호

어이어이, 그냥 과속 좀 한 거 가지고 미즈카네까지 부를 필욘 없잖아!?

388호

......!

생각에 잠겨서, 388호는 미즈카네 스즈카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운 걸 알아채지 못했다.

388호

...미즈카네 씨.

미즈카네 스즈카

388호, 260호의 안건은 처리했나?

388호

네, 막 심문 담당 동지에게 이관하려던 참입니다.

미즈카네 스즈카

좋아, 새로 맡길 임무가 있어.

...2Z64 구역의 공원.

388호

...전뇌화되지 않은 인간, 콜네임 "지휘관".

멀리 보이는 임무 목표는 지금 공원 벤치에 앉아서, 망연자실하게 끝없는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저런 사람에게 위험 등급을 매길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는 깊은 의심.

388호가 보기에, 저 임무 목표는 그저 상심에 빠진 가엾은 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즈카네 스즈카의 명령이니, 388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388호

안녕하세요, 지휘관.

지휘관

......

388호

옆에 앉아도 개의치 않으시겠죠?

지휘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388호는 벤치의 다른 끝에 앉았다.

잠깐의 짧은 침묵을 가진 뒤, 388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388호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미니러브 조사소 소속 388호입니다.

귀하께 2Z64 구역을 견학하신 소감을 여쭙고자 찾아뵀습니다. 전뇌화 개조를 받지 않은 첫 번째 인간 방문객이신 만큼, 귀하의 의견이 저희에게 무척 중요합니다.

지휘관

......

388호

오늘 귀하의 안내를 맡았던 390호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귀하를 제대로 접대해 드리지 못해 무척 속상해하는 것 같더군요.

지휘관

걔, 일은 잘했어.

388호

보고서에는 거주 단지에서든 각 부서의 기능 구역에서든, 견학하는 귀하의 기분이 매우 저조했다고 합니다.

390호는 그 이유를 불명으로 적었는데,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휘관

......

나를 이렇게 신경쓰는 건 네 업무라서야?

388호

후훗, 아니요.

388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388호

저의 평소 업무 내용은 거의 천편일률이랍니다.

미니러브의 사무실에 앉아 있다, 다른 동지가 질서위반자를 끌고 오면, 제가 신원을 등록하고 신문실로 보내죠.

매일 접하는 사람도 거의 비슷비슷해서, 어떨 땐 제가 똑같은 하루에 갇힌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니까요.

지휘관

그리고 날 조사하러 온 건 특파 임무다?

388호

맞아요, 지금까지 이런 임무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죠. 그래서 조금 의욕이 과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라요.

지휘관

......

방문객은 입을 열지 않았고, 시선도 이리저리 표류하는 듯했다. 하지만 388호는 그것이 근처의 모든 텔레스크린을 찾는 것임을 눈치챘다.

388호

저건 텔레스크린인데, 마주보고 있는 영상과 소리를 기록해요.

지휘관

감시기군. 저것들로 날 찾아낸 거야?

388호

네. 텔레스크린은 저희가 자주 이용하는 소통 도구이기도 하고, 텔레스크린을 통해 권한 이내의 정보와 명령을 취득하기도 해요.

지휘관

단순히 소통 도구야?

388호

"빅 브라더"께서도, 텔레스크린을 통해 2Z64 구역 전체를 관리하세요.

지휘관

빅 브라더?

388호

2Z64 구역의 최고 관리자십니다. 물론 저 같은 일반인은 만날 수조차 없죠.

그분의 성별, 외모, 연령 등의 정보도 알 수 없고요.

단지 저희가 아는 것은 빅 브라더는 전지전능하시며,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는 것입니다.

지휘관

......

그러니까, "빅 브라더"가 실존인물인지조차도 너희는 알 방도가 없단 뜻이군.

388호

그건 그렇죠. 하지만 빅 브라더가 어떤 분이시든, 2Z64 구역을 타당하게 운영하고 계시단 점만은 사실이죠.

지휘관

타당하게 운영하고 있다...라.

388호가 곁눈질로 보니, 지휘관은 인상을 쓴 것이 아무래도 고민하는 중인 듯했다.

그래서 눈치 있게 모르는 척, 옆에 있던 자판기에서 음료 두 캔을 사 와 하나를 지휘관에게 건넸다.

지휘관

포도 주스? 너답지 않네...

388호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지휘관

아무것도 아니야.

388호

귀하의 질문에는 성심성의껏 대답했습니다. 그럼 답례로 2Z64 구역에 대한 감상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휘관

황당무계. 떠들썩함과 분주함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어.

388호

그 말씀은, 2Z64 구역이 허무한 환상에 불과하다 생각하신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지휘관

그래.

388호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시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방문객 콜네임 "지휘관"은 받은 포도 주스 캔을 손에서 굴리던 걸 멈추고, 잠깐 힘을 주더니...

눈앞에 보이는 텔레스크린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텔레스크린은 정중앙을 맞아 깨져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388호

지휘관...?!

지휘관

지금 우리의 대화는 빅 브라더의 주시에서 벗어났겠지.

388호

......

지휘관

너의 진심을 듣고 싶어.

388호

무엇에 관해서요?

지휘관

넌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 정말로 이곳이... 다른 곳보다 좋다고 생각해?

388호

음...

388호는 잠시 고민하다, 지휘관의 눈을 진지하게 마주보며 대답했다.

388호

지금의 생활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싫지도 않아요.

다른 곳에서 생활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디에서 살든 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겠죠.

지휘관

......

388호

아무래도 당신이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나 보네요.

지휘관

난 그냥... 너랑 다시 술이나 한잔하고 싶었어.

388호

술이요? 지휘관, 알코올은 이미 유통 금지된 지 몇 년이나 됐어요.

저희가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는 시대는 아마 수백년 전이겠죠.

지휘관

......

388호

죄송해요, 긴급 통신이 들어와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지휘관

......

388호는 바쁘게 몇 걸음 뛰다 갑자기 멈춰서 지휘관을 돌아보았다. 지금 저 방문객은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공기 중에 가득 퍼진 포도 주스의 향이 388호의 코를 간질였다.

388호

...들어보긴 했어요, 옛날에 인류는 포도 주스로 술을 빚었다고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둘이서 몰래 한잔할까요?

그리고 388호의 검은 장발은 밤의 어둠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잠시 후, 경보는 부리나케 달려온 정비원에 의해 해제됐고, 깨진 스크린도 새것으로 교체됐다.

공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마냥 다시 썰렁하고 조용해졌다.

지휘관은 여전히 그 벤치에 앉아, 몇 분 전 "따오기"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지휘관

"388호"...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렸구나...

가벼운 알림음과 함께 지휘관의 눈앞에 채팅창이 나타났다.

390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390호

<color=#00CCFF>지휘관님!</color>

390호

<color=#00CCFF>데이터베이스에서 당신이 말씀한 "보이스"와 "푸린"을 검색해보았지만 관련 데이터는 전무했습니다.</color>

<color=#00CCFF>뭔가 이상해요... 아무리 검색에 안 잡히는 단어일지라도 유사 단어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color>

<color=#00CCFF>다른 데이터베이스를 더 찾아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color>

지휘관

......

390호

<color=#00CCFF>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제가 당신을 배신했다는 말씀에 다시 한마디하겠습니다.</color>

<color=#00CCFF>미니트루 우수직원상을 3연속 수상한 제가 그랬을 일은 절대 없어요!</color>

지휘관

......

너는 여전하구나.

390호

<color=#00CCFF>그게 무슨 뜻이죠? 저희 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color>

지휘관은 채팅창을 닫았다.

알록달록한 일터페이스를 바라보다, 지휘관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억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아직 전뇌화 개조를 받지 않았기에 에뮬레이팅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만약에...

그럼 나도 저들처럼, 과거의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