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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 공각기동대

나만의 전쟁

-6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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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문을 박차고 여는 소리.

HK433

여기는...

보이스

기지로 돌아온 건가?

에사키 푸린

아뇨, 여기가 빅 브라더의 방이에요. 그저 허상을 덧씌웠을 뿐이죠.

익숙한 업무용 탁자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르는 지휘관은 지금 모든 소리가 마치 두꺼운 모포를 머리에 두른 듯 몽롱하고 답답하게 들렸다.

HK433

지휘관님, 괜찮으세요?

지휘관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응, 괜찮아.

커피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보이스

누구냐!

페르시카

지휘관은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어?

지휘관

페르시카 씨...

지휘관은 저 목소리가 납치됐던 페르시카임을 바로 알아챘다.

페르시카

인간의 본성인 탐욕, 이기심, 미련함이 있어서는 유토피아,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수 없어.

하지만 절대적인 지혜와 이성을 지니고, 오직 올바름만을 위해 존재하는 AI라면 가능하지.

에사키 푸린

믿으면 안 돼요 지휘관님! 저 사람은 가짜예요!

지휘관

......

탕!

지휘관의 총이 페르시카의 손에 들린 커피잔에 명중했다.

깨진 커피잔은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고, 그와 동시에 페르시카의 모습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검은 옷의 소년. 여전히 무덤덤한 눈빛으로, 자신을 겨누는 지휘관을 응시했다.

시마무라 타카시

......

지휘관

역시 너였군.

에사키 푸린

시마무라 타카시! 즉시 모든 행위를 중지하고 체포에 응한다면 선처하겠습니다!

시마무라 타카시

......

눈앞에 나란히 총구들이 겨눠졌지만, 시마무라 타카시는 눈길 하나 주지도 않고 태연히 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HK433

거기 서!

에사키 푸린

붙잡아요!

지휘관

침착해! 함정일 수도 있어!

푸린과 인형들이 분노하며 쫓아가자 지휘관은 내심 불안감이 들었지만, 별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돌연 방이 뒤틀렸다가, 구겨졌던 종이처럼 다시 펼쳐졌다.

...익숙한 장소.

지휘관에겐 눈을 감고서도 자연스레 오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지휘관

...푸린? HK433?

지휘실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부관이 출근하기 전만큼, 아주 조용했다.

지직...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지휘관, 당신은 스스로가 유일무이하다 생각합니까?</color>

지휘관

......!

작전 브리핑용 스크린에 시마무라 타카시의 어두운 얼굴이 나타났다.

지휘관

뭘 할 셈이지? 푸린과 인형들을 어디로 보냈어?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우리는 계속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당신 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color>

지휘관

그게 무슨 뜻이지?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당신에게 쓸데없이 기력을 투자하기 질렸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부 회수할 때입니다.</color>

어두운 얼굴이 사라졌다.

그리고 스크린에 한 실시간 감시 영상이 띄워졌다. 바로 지휘실의 감시 카메라 화면이었다.

지휘관

이건...

실시간 영상 속 방은 지금 있는 지휘실과 완전히 똑같았다. 인형들과 푸린이 단서를 찾아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중인 것만 제외하면.

그런데, 그 방의 탁자 옆에도 "지휘관"이 앉아 있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을 가진 "지휘관"이.

지휘관

저게... 누구야?! 무슨――

무어라 더 추궁하기도 전에, 지휘관은 화면에서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

<color=#00CCFF>뭐라도 발견했어?</color>

HK433

<color=#00CCFF>아무래도 이곳에 갇힌 것 같습니다.</color>

보이스

<color=#00CCFF>이상해... 이곳에서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은 계속 드는데,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color>

지휘관?

<color=#00CCFF>괜찮으니까 침착하게, 차근차근 조사해보도록 해.</color>

<color=#00CCFF>상황으로 보건대 지금 당장은 크게 위험할 것 같진 않아.</color>

에사키 푸린

<color=#00CCFF>그러죠, 우선 인형 마인드맵에 강제 연결 가능한 설비가 어딨는지부터 찾아봐요!</color>

지휘관?

<color=#00CCFF>아니, 그건 나중에.</color>

에사키 푸린

<color=#00CCFF>엑? 어째서요?</color>

QBU191

<color=#00CCFF>...지휘관?</color>

자신의 얼굴로 온화하게 인형들과 푸린에게 말을 거는 모습에, 지휘관은 오한이 들었다.

지휘관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저기에 내가 한 명 더 있어?!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죠. 당신은 스스로 유일무이하다 생각합니까?</color>

지휘관

내가 여기 있던 동안의 데이터로 나를 위조했단 거군? 푸린한테 한 것처럼!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저도 이런 수를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온전한 한 명의 인간을 위조하려면 연산력이 많이 소모되거든요.</color>

지휘관

빌어먹을...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명심하세요, 이건 전부 당신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입니다.</color>

지휘관은 곧장 자신의 명령 패널을 불러내어――

지휘관

......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알아챘군요. 지금부터 당신은 자의로 2Z64 구역에서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color>

지휘관

현실의 내 몸이 사망할 때까지 의식을 가둬 두겠다고?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설마요, 그런 식으로 고문할 생각은 없습니다. 스즈카가 공안 9과를 처리하고 나면 현실의 당신도 끝내 줄 겁니다.</color>

<color=#00CCFF>그동안 남은 시간을 즐기시죠.</color>

지휘관

......

천천히 다시 작전 브리핑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니, 푸린이 느닷없는 "지휘관"의 새 지시에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에사키 푸린

<color=#00CCFF>――왜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계획을 중단하잔 거예요? 각오하셨다고 했잖아요!</color>

지휘관?

<color=#00CCFF>생각이 바뀌었어.</color>

QBU191

<color=#00CCFF>생각이 바뀌셨다니, 대체 이게 무슨...</color>

보이스

<color=#00CCFF>......</color>

에사키 푸린

<color=#00CCFF>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요! 왜 갑자기——</color>

지휘관?

<color=#00CCFF>진정해, 푸린. 진정하고, 그리폰 기지가 있던 세계를 떠올려 봐.</color>

<color=#00CCFF>인형들을 다시 현실로 데려가더라도, 결국엔 다 같이 손 잡고 종말로 향하기밖에 더할까?</color>

HK433

<color=#00CCFF>지휘관님... 왜 갑자기 그렇게 비관적이 되신 거죠?</color>

지휘관?

<color=#00CCFF>이제서야 깨달았을 뿐이야.</color>

그때, 지휘관은 푸린의 눈에 한순간 의심이 반짝인 것을 포착했다.

지휘관

<color=#A9A9A9>(빨리 저들에게 연락해야 해...!)</color>

작전 브리핑 스크린으로 달려가 마구잡이로 팔을 흔들었지만, 당연하게도 저쪽에서 보일 리가 없었다.

지휘관

<color=#A9A9A9>(방송 설비는?!)</color>

방송 마이크를 냅다 집어 목청껏 소리질렀다.

지휘관

푸린! 그놈은 가짜야!

HK433, 따오기, 보이스! 그놈을 믿지 마!

<size=50>계획대로 진행해!!</size>

반응은 없었다.

뭔가 저쪽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을까, 지휘관은 익숙한 방을 마구 파헤쳐 쓸 만한 것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진짜 지휘실이 아닌, 그저 외견뿐인 시뮬레이션이니까.

지휘관

<color=#A9A9A9>(성공까지 겨우 두 걸음만 남았는데,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color>

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눈앞이 깜깜해지려던 그때. 주머니에서 무언가 딱딱한 물건이 진동한 것 같았다.

그 주머니에 넣었던 것은 분명...

지휘관

타치코마!

꺼내 든 타치코마의 위치 추적기의 램프가 대답하듯 깜빡였다.

지휘관

내 목소리가 들려? 들린다면 한 번 깜빡여.

추적기가 얌전히 한 번 깜빡였다.

지휘관

좋았어...!

타치코마, 내 말 잘 들어. YES면 한 번, NO면 두 번 깜빡이는 거야.

지금 그쪽 상황은? 다들 무사해?

(깜빡)

지휘관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푸린과 연락할 수 있겠어?

시마무라가 뭘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감쪽같은 가짜 나를 만들어서 계획을 중단시키려고 애들을 속이고 있어.

의심은 하는 것 같지만 넘어갈까 봐 걱정돼.

.....(깜빡깜빡)

지휘관

...알았어.

그럼 어떻게든 지금 그들이 있는 방에 접촉할 수는 없을까?

무슨 수든 상관없으니 거기 있는 내가 가짜라는 걸 알리――?!

삐이이——

예고도 없이 빛이 사라지고 주위가 어둠에 잠겼다.

지휘관 자신의 모습도 무너지고, 푸린 쪽의 상황이 보여지던 스크린도 어둠에 잡아먹혔다.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아무래도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너무 길게 줬나 보군요.</color>

<color=#00CCFF>무의미한 발버둥까지 칠 여유가 있다니.</color>

지휘관

......

조용히 위치 추적기를 주머니에 넣고, 지휘관은 최대한 차분한 마음으로 끝없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통신창을 바라봤다.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도움을 구해봤자 무의미합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느라 바쁘니까요.</color>

지휘관

...난 그들을 믿어.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들도 아주 잠깐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입니다.</color>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래도 그동안 무료하지 않도록, 약간의 즐길거리를 드리죠.</color>

삐이이...

불길한 소리와 함께 저 어둠 속 멀리에서 희미한 빛이 모호한 윤곽을 그려냈다.

지휘관

......

지금까지 힘겨운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지휘관은 마음 속에서 또 하나의 자신과 힘을 겨뤘다.

하지만 누가 "또 다른 자신"과 이렇게 실제로 마주하는 날이 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지휘관?

<color=#FF0000>......</color>

아주 깨끗한 거울을 보는 듯했지만, 차이점이라면 지금 저 "거울상"이 살기등등하게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점이었다.

가슴 주머니의 위치 추적기가 갑자기 두 번 진동했다. 이것이 낭보인지 비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휘관

<color=#A9A9A9>(좋은 소식일까?)</color>

<color=#A9A9A9>(소령, 내 마지막 희망을 너에게 걸겠어.)</color>

상황을 분석하는 사이에, 똑같은 얼굴을 한 가짜가 허공에서 마술처럼 P90 기관단총 한 자루를 만들어냈다.

지휘관

......

타타타탕!

연사되는 탄환이 지휘관을 추격했다.

지휘관은 엄폐물 뒤로 몸을 넘겨 침착하게 가짜를 관찰했다.

자신은 전뇌가 아니기에 과거의 기억을 읽어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시마무라가 유용 가능한 자신의 데이터는 2Z64 구역에 있던 기간으로 한정되어 있을 터.

지휘관

그리고 이곳의 데이터는 내가 소령과 함께 싸우던 때의 것...

그렇다면...

가짜가 엄폐물 사이를 헤집는 틈을 노려, 지휘관은 침착하게 기습해 가짜의 손에서 총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던져 그 총을 집는 데도 성공했다.

지휘관

넌 내 상대가 못 돼.

지휘관?

<color=#FF0000>나는 너다.</color>

지휘관

한참 멀었어.

지휘관?

<color=#FF0000>너만 사라지면 나는 네가 된다.</color>

가짜가 기습적으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았지만, 지휘관이 먼저 제압 사격을 퍼부었다.

역전된 화력차 때문에 이번엔 가짜가 엄폐물 뒤로 숨었고, 지휘관은 그대로 역공에 나섰다.

몇 년의 훈련과 그리폰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지휘관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인간 한 명쯤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휘관?

<color=#FF0000>크윽...</color>

거리가 빠르게 좁혀져, 가짜는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도 없었다.

지휘관의 격투기에 가짜는 바로 열세에 몰려, 그대로 마운팅당하기 직전이었다.

지휘관

넌 이 권총을 쓸 자격 없어.

지휘관이 가짜의 머리를 겨눈... 그때.

삐이이...

또 들려온 불길한 소리에 지휘관의 등골이 오싹해진 그 순간, 눈앞에 있던 가짜가 저 멀리로 옮겨졌다.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당신을 강제로라도 전뇌화시키지 않은 게 조금 후회되는군요. 당신이 수술 도중 사망하더라도 그 뇌 안에 담긴 데이터는 2Z64 구역에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텐데.</color>

지휘관

이미 늦었어. 네가 고생해서 만들어낸 가짜 따위론 아무도 속이지 못해.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건 당신이 아직 살아있어서일 뿐이죠.</color>

시마무라가 또 다시 명령 패널을 꺼내, 지휘관을 주시하며 파라미터를 끝까지 당겼다.

삐이이...

그 순간 지휘관은 마치 광속으로 2Z64 구역 밖으로 끄집혀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우주선에서 튕겨나간 우주비행사처럼, 홀로 소리도 빛도 없는 곳으로 날아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세상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여, 한 줄기 빛조자 새어들어오지 않았다.

이 너무나도 두터운 장막에 청각마저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휘관

<color=#A9A9A9>(시력을 완전히 상실했나... 상관없어, 시각 차단 상황에서의 훈련도 백 번 가까이 했으니.)</color>

<color=#A9A9A9>(아주 약간이라도 소리가 들린다면...)</color>

저벅...

3시 방향, 미세한 발소리.

타타탕!

지휘관은 신속히 권총을 집어넣고 P90을 들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과감하게 사격했다.

지휘관

<color=#A9A9A9>(명중하는 소리는 났지만 급소는 빗나갔을 수도 있겠군.)</color>

상대가 몸을 숨기는 소리가 나는 틈을 타, 지휘관은 빠르게 잔탄 상황을 확인했다.

P90은 탄창 소진, 권총은 마지막 한 발.

지휘관

<color=#A9A9A9>(...딱 한 발.)</color>

지휘관은 P90을 버리고 권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자 들린 바쁜 발걸음. 이쪽이 화력을 포기하자 형세를 뒤집으려는 모양이었다.

지휘관

<size=50>어디 덤벼보라고 이 망할 자식아!</size>

소리가 난 방향으로, 지휘관은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피부, 치아, 체온과 같은 온도의 액체, 그리고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묵직한 소리.

지휘관

<color=#A9A9A9>(이 한 방으로 한참은 뒹굴 거다.)</color>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시력을 상실했는데도 그만큼이나 싸울 수 있다니.</color>

지휘관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고.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런가요. 그럼 아마 못 봤을 테니 알려드리자면, 당신의 인형들과 푸린은 "당신"에게 회유됐습니다.</color>

<color=#00CCFF>새로운 지시를 받아들여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여기에 남기로 했죠.</color>

지휘관

사기도 실력이 있어야 치지, 수준이 그래서야 누가 속겠냐?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충격적인 소식에 인지부조화가 온 것 같으니 좋은 소식도 알려드리죠.</color>

<color=#00CCFF>스즈카가 공안 9과를 해치우고 현실로 돌아갈 준비 중입니다.</color>

<color=#00CCFF>이제 당신 차례입니다.</color>

지휘관

......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마지막 유흥이나 즐기고 계시죠.</color>

지휘관은 무의식적으로 타치코마의 위치 추적기를 꽉 움켜쥐었다. 방금의 진동과 깜빡임은 꿈이었다는 것처럼, 지금 그건 움켜쥔 손에서 미동도 않았다.

지휘관

<color=#A9A9A9>(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color>

<color=#A9A9A9>(너희를 기다리는 수밖에. 난 너희를 믿어 의심치 않아.)</color>

가짜가 다시 일어서는 기척이 나자, 지휘관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희미하던 청각이 더욱 희미해졌다.

발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전부 뒤섞여,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빠르게, 희미하던 모든 소리가 날카로운 이명으로 변했다.

지휘관

<color=#A9A9A9>......</color>

<color=#A9A9A9>(제기랄, 청력까지 완전히 빼앗겼――)</color>

복부에 꽂힌 예상치 못한 충격.

지휘관이 황급히 주먹을 휘둘러 반격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대신 돌아온 소나기 같은 주먹질에, 지휘관은 홀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 들었다.

퍽! 퍼퍽!

잃은 것은 시각과 청각. 이어지는 연타에, 위아래가 뒤집히고 자신이 바닥에 쓰러지는 감각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휘관

......

지휘관은 손이 닿은 커다란 것을 짚고 일어섰다. 높이와 감촉으로 보아 작전을 구상할 때 쓰는 전술 테이블 같았다.

무수한 전투와 작전을 전부 여기서 이것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실제 지휘로 옮겨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싸움은 자신밖에 없다.

지휘관

나 혼자라 해도...

퍽! 또 주먹에 맞았다.

이젠 어디를 맞는지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일어서서, 계속 싸워야 한다.

지휘관

포기해선 안 돼...

모두가 아직 싸우고 있다고...

지휘관은 전술 테이블을 뒤엎어, 돌아오는 충격을 통해 상대의 위치를 대강 파악해냈다.

하지만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먼저 달려든 상대에게 걷어차이고 말았다.

퍼억!

지휘관

......

삐이이...

잃었던 청각이 일시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마무라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귓가에 울렸다.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죽기 직전의 기분은 어떤지요.</color>

지휘관

하...

대꾸하려고 벌린 입에선 아픔이 먼저 목구멍을 가득 채워 고통스런 신음만 새어나왔다.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고통, 절망, 두려움...</color>

<color=#00CCFF>인형들의 기억 데이터에서 가장 많이 추출된 감정들입니다.</color>

지휘관

......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들은 아마 당신 앞에선 굳센 모습만 보였겠죠? 그동안 그들이 겪은 상실은 수복 캡슐에서 쉬고 나면 전부 끝인 줄 알았겠죠?</color>

<color=#00CCFF>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이 바로 그들이 전장에서 항상 느끼던 것입니다.</color>

지휘관

......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그들을 잔혹한 현실로 돌려보낼 셈입니까?</color>

지휘관

......

지금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

지휘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리가 멀어지더니, 끔찍한 이명이 다시 몰려왔다.

그리고, 가드를 올리기도 전에 다시 가슴과 복부를 강타당했다.

지휘관

칫...

피 섞인 침을 뱉어내고, 지휘관은 주변을 더듬으며 엄폐물을 찾았다.

부우웅...

그때, 가슴 주머니의 위치 추적기가 마침내 다시 진동했다.

지휘관

...소령?

부웅.

지휘관

애들이 해냈어?

......

부웅.

지휘관

그래...?

가짜는 지휘관에게 마운트해 우박처럼 주먹을 퍼부었다.

그렇게 난타당하는데도, 지휘관은 방자한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어지러움까지 더해진 어둠 속에서 가짜의 면상의 위치를 어림짐작했다.

퍼억!

깔끔한 펀치 한 방으로, 가짜를 몸 위에서 날려버렸다.

지휘관

수고했어, 나머진 나한테 맡겨.

몸을 일으키고, 지휘관은 숨을 고르며 권총을 뽑아 들었다.

지휘관?

<color=#FF0000>눈■ 안 보■■서 ■■게 쏴 ■히려■?</color>

가짜가 뭐라 떠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적어도 "자신"으로서도 꽤 건방진 말투임은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더욱 한껏 조롱하는 마음을 담아, 지휘관은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댔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휘관

또 보자고.

시마무라 타카시

<color=#00CCFF>뭣, 멈추――</color>

타앙——!

지휘관

――흐억!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휘관은 미리 구석으로 옮긴 AR 디바이스에 앉은 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조금 처절한 방식으로.

지휘관

......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지도 않고, 지휘관은 옆에 뒀던 총을 집고 AR 디바이스에서 튀어나와 멀지 않은 곳의 건물로 달려갔다.

뻐엉!

지휘관이 문을 박차고 열었다.

시마무라 타카시

......

그런 거였군요.

지휘관

또 보자 했잖아.

시마무라 타카시

이것이 당신들의 작전입니까?

2Z64 구역에 모든 배치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와 가동 버튼을 누르는 것이?

지휘관

그래, 예리한 소령이 네놈들은 중요한 물건을 한 곳에 모아 두지 않았으리라 예상했지.

지휘관은 시마무라 타카시가 자신의 연산력을 다해 유지하고 있는 서버 앞으로 다가갔다.

지휘관

그래서 그들이 2Z64 구역의 강제 연결 설비를 가동해도 모두의 기억 봉인을 해제할 수 없는 거였어.

너희가 다른 스위치를 여기에다 뒀으니까.

시마무라 타카시

...어쩔 셈이죠?

지휘관

그걸 몰라서 물어?

지휘관이 손을 들어 서버를 겨눴다.

시마무라 타카시

당신은 새상을 새로 쓸 칼날이 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2Z64 구역이 당신의 이상과 무엇이 다르죠?

지휘관

그건 가짜야.

시마무라 타카시

진짜든 가짜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도 인형들도 평온하고 즐거운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나요?

지휘관

......

너는 몰라.

시마무라 타카시

아뇨, 진실과 거짓에 얽매여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입니다.

지휘관

내가 오늘,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전부 나 혼자 해낸 게 아니어서야.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 왔지.

시마무라 타카시

......

지휘관

그래, 네 말대로 난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그곳으로 통하는 길은 마냥 가시밭길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결코 순탄치 않지.

이상향으로 향하는 길은 먼저 간 이들의 피와 뼈로 이루어져 있어. 나아가는 매 한 걸음이 누군가가 목숨으로 만든 길을 딛는 거다.

그런데 이런 무거운 현실을 저버리고 거짓된 공중누각으로 가라고?

탕!

지휘관이 눈앞의 서버에 첫 한 발을 쐈다.

지휘관

어림도 없지.

그들이 흘린 피눈물을 나는 평생 잊지 않아. 그들의 몫까지 전부 짊어지고 함께 나아가겠어.

설령 내 평생을 들여서도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어. 나도 내 뒤를 이을 이들에게 길을 열어 줄 테니까.

시마무라 타카시

참 고결한 사상이군요. 하지만 당신의 인형들이 더는 고생하길 원치 않고 2Z64 구역에 남길 바란다 해도 말입니까?

지휘관

웃기는 소리.

시마무라 타카시

그들의 기억 봉인은 이미 해제됐습니다. 직접 대답을 들어볼까요?

지휘관

......

지휘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탄식했다.

지휘관

그들의 대답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보다 더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바토

우리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맡기지.

지휘관

걱정 마, 모두를 위해서도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지휘관이 고개를 돌려 인형들을 바라본 그때, 단말기에 알림이 떴다.

몇 시간 전 메일을 수신받았다는 알림이었다.

발신자는 에사키 푸린.

지휘관

<color=#A9A9A9>(이게 푸린이 말한 메일인가?)</color>

지휘관은 말없이 그 메일을 열었다.

에사키 푸린

뚜벅 뚜벅——

지휘관님, 지휘관님이 이 메일을 보실 때면...

아, 물론 꼭 보시리라 믿지만요!

에사키 푸린

아무튼 보실 때면, 저흰 이미 빅 브라더의 방으로 향한 후겠죠. 솔직히 푸린은 결과가 이미 눈에 훤히 보여요.

분명 좋은 결과가 아니겠죠! 그래도 푸린은 이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버틸 거예요.

에사키 푸린

...사실, 원래는 절망에 빠진 당신을 이끌어 주려고만 했어요. 바토 씨가 저를 도와주셨던 것처럼요.

그런데 조금씩, 이곳의 인형분들과 더 많이 알게 되면서 푸린도 여기가 점점 더 좋아졌고, 지휘관님처럼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겼어요.

특히, 이분들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을 보니까...

지휘관님, 어쩌면 이분들이 직접 당신께 보여드릴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꼭 보셨으면 해요!

......

HK433

...세팅 제대로 됐나요?

보이스

응, 거의 다 됐다.

HK433

"거의"라니 무슨 뜻입니까! 광량 음량 각도 화질 전부 보고하세요!

보이스

......

QBU191

전부 완벽하게 세팅했으니까 걱정 말아요, 이제 시작해도 돼요.

HK433

알겠습니다.

여태까지 깐깐하게 군기를 잡던 HK433이 카메라를 보자마자 손을 꼬며 부끄러워했다.

HK433

저어... 지휘관님, 이것은 저희가 몰래 준비한 서프라이즈입니다.

S09 구역... 비록 기지는 파괴되었지만, 그곳의 창설 기념일이 곧 다가오죠.

현재 상황으로는 축하 행사를 열 여유가 없겠지만, 그래도 모두가 이 기회에 지휘관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

보이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HK433

<size=50>끼어들지 마세요!</size>

HK433

크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늦게나마 그리폰의 일원이 되어 영광입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지휘관님과 함께 나아가고 싶습니다!

HK433

......후우. 끝났습니다, 당신 차례예요 보이스 씨.

보이스

이하동문.

따오기, 네 차례다.

HK433

치사하게 그러기예요?!

QBU191

지휘관, 요즘 지휘관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말을 걸기가 좀 껄끄러웠어요.

시간 내서 같이 한잔하고 싶었답니다, 지금 지휘관은 약간의 음주로라도 풀어질 필요가 있다고 보거든요.

QBU191

그러니, 이 영상 보고 나면 직접 와서 약속 잡도록 해요♪

HK433

됐어요, 다음 들어오세요.

보이스

복도가 발 디딜 틈 없는데, 이러다 지휘관에게 들키는 것 아닌가?

QBU191

그럼 안 되죠, 가서 교통 정리를 해야겠네요.

화면도 음성도 조금 어수선하고, 누군지 모를 그림자가 자꾸 카메라 앞을 지나가고...

영상은 전체적으로 많이 엉성했다.

그래도 지휘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 긴 영상을 끝까지 다 보았다.

타앙!

두 번째 탄환은 시마무라의 바로 옆의 서버를 박살냈다.

시마무라 타카시

......

지휘관

그래서, 더 할 말은?

시마무라 타카시

인류는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합니다. 탐욕, 폭력, 미련함, 이기심이... 전부 유전자에 새겨져 있으니까.

이것은 당신의 손에 닿을 수 있는, 당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낼 유일한 기회입니다.

지휘관

......

시마무라 타카시

지금이라면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서버까지 파괴된다면 당신은 영원한 시시포스로 전락하는 겁니다.

지휘관

이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에 따라 주지.

타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