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 연기
다크존 동부의 중심지, 마룰로스. 항구와 운하가 가까워 교통이 발달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기회의 땅이다.
여어, 임무는 어땠어? 뭐 좋은 거 구했음 보여 줘 봐, 비싸게 쳐 줄게.
허탕쳤어, 다음에 부탁해.
없어? 그럼 새로 들여온 장비나 좀 보고 가, 싸게 쳐 줄게. 이만한 것들이면 다음에 나가서 못해도 몇 명은 더 딸 수 있을걸?
상인에게 적당히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지휘관의 왼쪽에, 두 남성이 사람 한 명을 걷어차는 광경이 보였다.
이 자식 내 총을 슬쩍하려고 해!? 아주 살기 싫은가 봐? 엉!?
으윽... 제, 제발요, 총 한 자루만 빌려 주세요! 임무 받아서 2배, 아니 3배로 갚을 테니――
빌리긴 XX 뭘 빌려! 나가봤자 바로 뒤질 녀석이!
이를 지나쳐 골목길을 돌자, 무장한 대원 두 명이 계단에 걸터앉아 통조림을 먹고 있었다.
이번 의뢰인 완전 쓰레기였어, 1만 코엔 주기로 했더니 8천밖에 안 주더라.
받은 걸로 감사해, 요새 일자리도 없어서 미치겠는데.
그리고 두 블록쯤 지나 길을 건너려던 지휘관이, 무언가를 보곤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북부 교외 거점을 친 놈을 아직도 못 찾았다며?
묵직한 가방과 무기를 지닌 두 남성이었다.
헹! 그래봤자 대원이라던데, 마룰로스에 있다면 우리 손바닥 안이지.
……
두 사람이 충분히 멀어진 후, 지휘관은 길 끄트머리의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는 불도 들어오지 않아, 안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위치는 분명히 여긴데... 응?
왼발에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채여, 지휘관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불이 켜졌고, 눈부신 백열광이 상자 옆으로 동글동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앗...
경단 머리에 커다란 가방을 멘 소녀가 멋쩍어하며 상자 뒤에서 일어섰다.
여기 숨을 곳이 전혀 없잖아!
너도 나와.
응?
오른쪽의 진열대 꼭대기에서 검은 옷차림의 소녀가 사뿐히 내려왔다.
와아 이걸 들키네?
한 명 더 있었네?!
내가 너보다 먼저 와 있었거든? 들어오는 거 다 봤어.
그렇게 큰 가방 들고 숨는다는 데가 상자 뒤야? 님 머리 장식임? 아닌 척 하지 마셔, 증거 사진 찍어 놨어.
검은 옷의 소녀가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뽐내듯 내밀었다.
뭐야 넌! 내가 얼마나 잘 숨었는데, 저 사람이 갑자기 불을... 그나저나 너희 누구야?
먼지로 가득한 창고에서,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난 "쿠로". 견적 보니 다들 대원인가 봐?
경단 머리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틸"이라고 해.
그저께 익명의 의뢰인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여기서 임무를 받으라 했어.
어? 나돈데.
나도야. 그런데 이 임무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
다 모였군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임무의 의뢰인입니다.
창고 한가운데에 놓인 천으로 덮인 상자에서, 전원이 켜진 무전기가 반짝였다.
여러분은 한 분대로 임무를 수행해 주세요. 물건을 노스리지까지 가져다 주시면 됩니다.
갑작스런 4번째 목소리가 창고에서 울리니, 세 사람은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상자 앞으로 모였다.
그런데 무전기가 뜸을 들이자, 쿠로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헤이, 다른 사람이 있단 얘긴 못 들었는데?
특수한 물건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전기 아래의 상자를 열어보세요.
쿠로가 걷어낸 하얀 방진포 아래엔 직사각형의 상자가 있었다.
엄청 크다?!
상자는 눈대중으로도 길이 100cm 이상, 너비와 높이 50cm가량으로 확실히 사람 한 명이서는 운반이 힘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물건이 좀 크므로, 저희가 판단한 결과 지금 모인 여러분 3명의 조합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럼 보수는? 셋이서 나누는 거야?
아뇨, 각자에게 말씀드린 대로의 보수를 지급하겠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지휘관은 상자의 재질이 티타늄 합금이고, 최첨단 지문 인식형 자물쇠까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상자에 뭐가 들었지?
여러분은 모르셔도 됩니다.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자의 말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전기를 통해 창고에 울려 퍼지는 저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은근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쿠로는 상자 속을 들여다보길 포기하고 지휘관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챘다.
어이어이어이, 이런 수상한 일을 시킬 거면 성의라도 좀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두둑한 보수로는 성의가 부족한가요?
너무하잖아. 우린 그쪽이 누군지,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반드시 내용물을 알아야만 하나요?
그 말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 많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쉬이 열 수 없는 저 최첨단 자물쇠는 내용물 보호만이 아니라, 의뢰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꼭 그럴 필욘 없겠지.
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 19시에 출발해, 24시간 내로 노스리지 호텔로 이송하세요. 이동 중 총격 등으로 강한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 주세요.
안에 아주 정교한 도자기가 들었다는 느낌으로 말이죠.
무운을 빌겠습니다.
잠깐, 19시까지 기다리라니 어째서?
무전기는 대답이 없었다.
어? 야, 이봐! 여보세요? 알로 모시모시!?
쿠로가 성질을 내며 무전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면상 까이기만 해봐, 내가 다크존 곳곳에 박제해 버릴 거야!
상자를 자세히 살피던 지휘관이 가볍게 들어올렸다.
대략 60kg 정도인가... 이동 수단이 필요하겠어.
그런 거람 이따 차 빌려서 길 따라 쭈욱 가면 날 밝은 무렵이면 도착할 거야. 24시간이나 필요 없어.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거 같은데...
저기 있잖아, 너희는 의뢰인이 누군지 알아?
누구도 답하지 못해, 창고에 잠깐 침묵이 내렸다.
그걸 먼저 깬 것은 손의 먼지를 툭툭 털고 밖으로 향한 지휘관이었다.
아직 시간 있으니, 준비해야지. 이따 보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협력해 보자고.
마룰로스의 작은 진료소.
오랜만이야.
의료용품이 잔뜩인 진료소 안에서, 탁자 앞의 단발 머리 여성이 턱을 괸 채 지휘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에비타.
지휘관은 가져온 가방 안에서 물건들을 꺼내 탁자에 늘어놓았다. 무기, 탄약, 부품... 탁자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저번 임무에서 얻은 것들이야, 얼마에 사 줄래?
어디 보자 이 정도라면... 2만 3천 코엔쯤 되겠네.
겨우? ...아, 그리고 이것도.
물방울 모양의 금 펜던트를 꺼내 건넸다.
이번 건은 허탕이었어. 민간인이었는데, 돈을 주면 대원을 고용할 수 있단 말을 듣고 나를 찾아왔더라고. 사연이 좀 딱해서...
그렇지, 그 얘기를 한 사람이 마룰로스의 큰 병원에서 온 의사라고 했는데, 혹시 알아?
들었는지 아닌지, 에비타는 금 펜던트를 대충 보고는 바로 견적을 냈다.
3만.
응? 무게도 안 재고?
필요 없어.
듣자 하니 너, 그 의뢰 때문에 생쥐단한테 찍혔다며? 너 잡겠다고 아주 혈안이라더라.
나도 들었어.
에비타는 담담히 물건을 받고 뒤의 진열대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늘 사던 대로? E3 군용 의료 키트 5개, 농축 진통제 3개, 수술 키트 3개... 다 하면 거스름돈 1만 3천 6백 코엔 남네.
에비타는 능숙하게 상자에서 약품을 꺼냈다.
그러고 잠깐 머뭇거리더니 진열대에서 하얀 약병을 하나 더 꺼냈다.
그건 살 돈 없는데?
서비스야.
당분간은 마룰로스에 머물지 말고 밖으로 다녀. 외부로 나가는 임무를 찾는 게 좋겠다.
그 말을 들은 지휘관은 약병을 위로 던지며 눈을 부라렸다.
왜, 생쥐단의 배후가 누구길래 네가 강력 진통제를 서비스로 줄 정도야?
"도스".
그 이름에 약병을 던지고 받던 지휘관의 손이 멈췄다. 손에서 미끄러진 약병은 탁자 위를 구르다, 아슬아슬하게 에비타가 잡았다.
도스 안토니오.
너도 알지? 안토니오 패밀리는 몇 대에 걸쳐 다크존을 지배해 온 거물이야, 아무리 사소한 피해라도 반드시 보복할 만큼 집요하고. 놈들한테 찍혔으니 각오 단단히 하도록 해.
...E3 군용 의료 키트는 2개 빼 줘.
뭐?
돈이 모자라.
네 말이 맞아, 앞으로 탄약이 더 필요하겠어.
주문 변경 사항을 똑똑히 들었지만, 에비타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그대로 지휘관에게 내밀었다.
됐어, 여태까지 내 의뢰 전부 완벽하게 해냈으니 서비스인 셈 쳐.
...고마워.
그래서, 앞으로 어떡하려고?
마침 밖으로 나가는 임무가 들어왔거든.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제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네.
에비타에게서 물건과 거스름돈을 받았는데도, 지휘관은 바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
질문에 대한 답을 못 들었어.
북쪽 마을에 자원봉사하러 왔다가 그 사람한테 나를 소개한 의사, 정말 몰라?
에비타가 잠깐 멈칫하더니, 슬며시 웃으며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그 금 펜던트에 딱 맞는 크기였다.
역시 못 속이겠다니까.
다음에 또 의뢰 맡기려면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직접 연락해.
어차피 돈이 없으면 도스의 추적을 피하지도 못한다고.
지휘관은 손을 흔들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 등을 눈으로 배웅하는 탁자 앞의 에비타는, 기다란 속눈썹에 눈빛이 가려졌다.
그래~서, 우리 왜 여기에 모인 거야? 차 타는 거 아니야?
19시 15분, 마룰로스 운하의 부두.
창고에서 나온 세 사람은 상자를 들고서 승선할 준비를 했다.
19시 정시 출발로 약속했는데 뭔가 이상하네.
밀수꾼으로 위장해서 화물선을 타고 가는 편이 말썽이 적을 거라 생각해.
맞아, 우리가 배 타고 갈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할 거야.
커다란 배낭을 멘 미틸은 눈부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넌 단순히 재밌어 보여서 그러는 거 아님?
어? 아아니 그냐앙, 확실히 더 나은 계획이라 생각했을 뿐이야.
상자를 든 세 사람은 화물선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부두는 딱 그곳에만 등불이 켜져 있었다.
명심해. 우린 상인이고, 상자에 든 건 상품이야. 티 내지 마.
맡겨 둬~ 나 흉내내기 잘해!
저깄다!
돌연 뒤에서 들려온 외침과 함께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날아든 총탄이 옆의 컨테이너에 박혔다.
에라이 XX 귀찮게 진짜.
신속하게 상자를 내려놓고 총을 장전한 쿠로가 총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대응 사격 2발을 가했다.
아니 이제 출발인데 벌써!? 배로 가면 안전할 거라며!
부둣가는 텅 비어서 컨테이너 몇 개뿐이고, 배라곤 몇백 m 떨어진 곳에 정박한 화물선이 전부. 이런 데서 싸웠다간 선원들의 눈길을 끌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누군진 아직 모르니, 신분을 들켜선 안 돼.
우선 창고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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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존 동부의 중심지, 마룰로스. 항구와 운하가 가까워 교통이 발달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기회의 땅이다.
여어, 임무는 어땠어? 뭐 좋은 거 구했음 보여 줘 봐, 비싸게 쳐 줄게.
허탕쳤어, 다음에 부탁해.
없어? 그럼 새로 들여온 장비나 좀 보고 가, 싸게 쳐 줄게. 이만한 것들이면 다음에 나가서 못해도 몇 명은 더 딸 수 있을걸?
상인에게 적당히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지휘관의 왼쪽에, 두 남성이 사람 한 명을 걷어차는 광경이 보였다.
이 자식 내 총을 슬쩍하려고 해!? 아주 살기 싫은가 봐? 엉!?
으윽... 제, 제발요, 총 한 자루만 빌려 주세요! 임무 받아서 2배, 아니 3배로 갚을 테니――
빌리긴 XX 뭘 빌려! 나가봤자 바로 뒤질 녀석이!
이를 지나쳐 골목길을 돌자, 무장한 대원 두 명이 계단에 걸터앉아 통조림을 먹고 있었다.
이번 의뢰인 완전 쓰레기였어, 1만 코엔 주기로 했더니 8천밖에 안 주더라.
받은 걸로 감사해, 요새 일자리도 없어서 미치겠는데.
그리고 두 블록쯤 지나 길을 건너려던 지휘관이, 무언가를 보곤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북부 교외 거점을 친 놈을 아직도 못 찾았다며?
묵직한 가방과 무기를 지닌 두 남성이었다.
헹! 그래봤자 대원이라던데, 마룰로스에 있다면 우리 손바닥 안이지.
……
두 사람이 충분히 멀어진 후, 지휘관은 길 끄트머리의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는 불도 들어오지 않아, 안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위치는 분명히 여긴데... 응?
왼발에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채여, 지휘관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불이 켜졌고, 눈부신 백열광이 상자 옆으로 동글동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앗...
경단 머리에 커다란 가방을 멘 소녀가 멋쩍어하며 상자 뒤에서 일어섰다.
여기 숨을 곳이 전혀 없잖아!
너도 나와.
응?
오른쪽의 진열대 꼭대기에서 검은 옷차림의 소녀가 사뿐히 내려왔다.
와아 이걸 들키네?
한 명 더 있었네?!
내가 너보다 먼저 와 있었거든? 들어오는 거 다 봤어.
그렇게 큰 가방 들고 숨는다는 데가 상자 뒤야? 님 머리 장식임? 아닌 척 하지 마셔, 증거 사진 찍어 놨어.
검은 옷의 소녀가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뽐내듯 내밀었다.
뭐야 넌! 내가 얼마나 잘 숨었는데, 저 사람이 갑자기 불을... 그나저나 너희 누구야?
먼지로 가득한 창고에서,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난 "쿠로". 견적 보니 다들 대원인가 봐?
경단 머리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틸"이라고 해.
그저께 익명의 의뢰인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여기서 임무를 받으라 했어.
어? 나돈데.
나도야. 그런데 이 임무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
<color=#00CCFF>다 모였군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임무의 의뢰인입니다.</color>
창고 한가운데에 놓인 천으로 덮인 상자에서, 전원이 켜진 무전기가 반짝였다.
<color=#00CCFF>여러분은 한 분대로 임무를 수행해 주세요. 물건을 노스리지까지 가져다 주시면 됩니다.</color>
갑작스런 4번째 목소리가 창고에서 울리니, 세 사람은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상자 앞으로 모였다.
그런데 무전기가 뜸을 들이자, 쿠로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헤이, 다른 사람이 있단 얘긴 못 들었는데?
<color=#00CCFF>특수한 물건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전기 아래의 상자를 열어보세요.</color>
쿠로가 걷어낸 하얀 방진포 아래엔 직사각형의 상자가 있었다.
엄청 크다?!
상자는 눈대중으로도 길이 100cm 이상, 너비와 높이 50cm가량으로 확실히 사람 한 명이서는 운반이 힘들어 보였다.
<color=#00CCFF>보시다시피 물건이 좀 크므로, 저희가 판단한 결과 지금 모인 여러분 3명의 조합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color>
그럼 보수는? 셋이서 나누는 거야?
<color=#00CCFF>아뇨, 각자에게 말씀드린 대로의 보수를 지급하겠습니다.</color>
한참을 말이 없던 지휘관은 상자의 재질이 티타늄 합금이고, 최첨단 지문 인식형 자물쇠까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상자에 뭐가 들었지?
<color=#00CCFF>여러분은 모르셔도 됩니다.</color>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여자의 말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전기를 통해 창고에 울려 퍼지는 저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은근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쿠로는 상자 속을 들여다보길 포기하고 지휘관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챘다.
어이어이어이, 이런 수상한 일을 시킬 거면 성의라도 좀 보여야 하는 거 아냐?
<color=#00CCFF>두둑한 보수로는 성의가 부족한가요?</color>
너무하잖아. 우린 그쪽이 누군지,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color=#00CCFF>반드시 내용물을 알아야만 하나요?</color>
그 말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 많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쉬이 열 수 없는 저 최첨단 자물쇠는 내용물 보호만이 아니라, 의뢰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꼭 그럴 필욘 없겠지.
<color=#00CCFF>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 19시에 출발해, 24시간 내로 노스리지 호텔로 이송하세요. 이동 중 총격 등으로 강한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 주세요.</color>
<color=#00CCFF>안에 아주 정교한 도자기가 들었다는 느낌으로 말이죠.</color>
<color=#00CCFF>무운을 빌겠습니다.</color>
잠깐, 19시까지 기다리라니 어째서?
무전기는 대답이 없었다.
어? 야, 이봐! 여보세요? 알로 모시모시!?
쿠로가 성질을 내며 무전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면상 까이기만 해봐, 내가 다크존 곳곳에 박제해 버릴 거야!
상자를 자세히 살피던 지휘관이 가볍게 들어올렸다.
대략 60kg 정도인가... 이동 수단이 필요하겠어.
그런 거람 이따 차 빌려서 길 따라 쭈욱 가면 날 밝은 무렵이면 도착할 거야. 24시간이나 필요 없어.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거 같은데...
저기 있잖아, 너희는 의뢰인이 누군지 알아?
누구도 답하지 못해, 창고에 잠깐 침묵이 내렸다.
그걸 먼저 깬 것은 손의 먼지를 툭툭 털고 밖으로 향한 지휘관이었다.
아직 시간 있으니, 준비해야지. 이따 보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협력해 보자고.
마룰로스의 작은 진료소.
오랜만이야.
의료용품이 잔뜩인 진료소 안에서, 탁자 앞의 단발 머리 여성이 턱을 괸 채 지휘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에비타.
지휘관은 가져온 가방 안에서 물건들을 꺼내 탁자에 늘어놓았다. 무기, 탄약, 부품... 탁자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저번 임무에서 얻은 것들이야, 얼마에 사 줄래?
어디 보자 이 정도라면... 2만 3천 코엔쯤 되겠네.
겨우? ...아, 그리고 이것도.
물방울 모양의 금 펜던트를 꺼내 건넸다.
이번 건은 허탕이었어. 민간인이었는데, 돈을 주면 대원을 고용할 수 있단 말을 듣고 나를 찾아왔더라고. 사연이 좀 딱해서...
그렇지, 그 얘기를 한 사람이 마룰로스의 큰 병원에서 온 의사라고 했는데, 혹시 알아?
들었는지 아닌지, 에비타는 금 펜던트를 대충 보고는 바로 견적을 냈다.
3만.
응? 무게도 안 재고?
필요 없어.
듣자 하니 너, 그 의뢰 때문에 생쥐단한테 찍혔다며? 너 잡겠다고 아주 혈안이라더라.
나도 들었어.
에비타는 담담히 물건을 받고 뒤의 진열대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늘 사던 대로? E3 군용 의료 키트 5개, 농축 진통제 3개, 수술 키트 3개... 다 하면 거스름돈 1만 3천 6백 코엔 남네.
에비타는 능숙하게 상자에서 약품을 꺼냈다.
그러고 잠깐 머뭇거리더니 진열대에서 하얀 약병을 하나 더 꺼냈다.
그건 살 돈 없는데?
서비스야.
당분간은 마룰로스에 머물지 말고 밖으로 다녀. 외부로 나가는 임무를 찾는 게 좋겠다.
그 말을 들은 지휘관은 약병을 위로 던지며 눈을 부라렸다.
왜, 생쥐단의 배후가 누구길래 네가 강력 진통제를 서비스로 줄 정도야?
"도스".
그 이름에 약병을 던지고 받던 지휘관의 손이 멈췄다. 손에서 미끄러진 약병은 탁자 위를 구르다, 아슬아슬하게 에비타가 잡았다.
도스 안토니오.
너도 알지? 안토니오 패밀리는 몇 대에 걸쳐 다크존을 지배해 온 거물이야, 아무리 사소한 피해라도 반드시 보복할 만큼 집요하고. 놈들한테 찍혔으니 각오 단단히 하도록 해.
...E3 군용 의료 키트는 2개 빼 줘.
뭐?
돈이 모자라.
네 말이 맞아, 앞으로 탄약이 더 필요하겠어.
주문 변경 사항을 똑똑히 들었지만, 에비타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그대로 지휘관에게 내밀었다.
됐어, 여태까지 내 의뢰 전부 완벽하게 해냈으니 서비스인 셈 쳐.
...고마워.
그래서, 앞으로 어떡하려고?
마침 밖으로 나가는 임무가 들어왔거든.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제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네.
에비타에게서 물건과 거스름돈을 받았는데도, 지휘관은 바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
질문에 대한 답을 못 들었어.
북쪽 마을에 자원봉사하러 왔다가 그 사람한테 나를 소개한 의사, 정말 몰라?
에비타가 잠깐 멈칫하더니, 슬며시 웃으며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그 금 펜던트에 딱 맞는 크기였다.
역시 못 속이겠다니까.
다음에 또 의뢰 맡기려면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직접 연락해.
어차피 돈이 없으면 도스의 추적을 피하지도 못한다고.
지휘관은 손을 흔들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 등을 눈으로 배웅하는 탁자 앞의 에비타는, 기다란 속눈썹에 눈빛이 가려졌다.
그래~서, 우리 왜 여기에 모인 거야? 차 타는 거 아니야?
19시 15분, 마룰로스 운하의 부두.
창고에서 나온 세 사람은 상자를 들고서 승선할 준비를 했다.
19시 정시 출발로 약속했는데 뭔가 이상하네.
밀수꾼으로 위장해서 화물선을 타고 가는 편이 말썽이 적을 거라 생각해.
맞아, 우리가 배 타고 갈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할 거야.
커다란 배낭을 멘 미틸은 눈부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넌 단순히 재밌어 보여서 그러는 거 아님?
어? 아아니 그냐앙, 확실히 더 나은 계획이라 생각했을 뿐이야.
상자를 든 세 사람은 화물선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부두는 딱 그곳에만 등불이 켜져 있었다.
명심해. 우린 상인이고, 상자에 든 건 상품이야. 티 내지 마.
맡겨 둬~ 나 흉내내기 잘해!
저깄다!
돌연 뒤에서 들려온 외침과 함께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날아든 총탄이 옆의 컨테이너에 박혔다.
에라이 XX 귀찮게 진짜.
신속하게 상자를 내려놓고 총을 장전한 쿠로가 총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대응 사격 2발을 가했다.
아니 이제 출발인데 벌써!? 배로 가면 안전할 거라며!
부둣가는 텅 비어서 컨테이너 몇 개뿐이고, 배라곤 몇백 m 떨어진 곳에 정박한 화물선이 전부. 이런 데서 싸웠다간 선원들의 눈길을 끌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누군진 아직 모르니, 신분을 들켜선 안 돼.
우선 창고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