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
"녀석의 도발이다... 그러니 내가 직접 올라가서 끝내주겠다."
예고르의 통신기에서 요란한 소리와 비명이 들려온다.
아군이에요! 살려주세요!
콜록... 제발 부탁할게요! 전 협박당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제발!
대위님, 안젤리아로 의심되는 목표를 잡았지만. 저희 의료인원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안젤리아의 모습으로 간단하게 분장시킨 것입니다.
그 인형이 절 기절시키고 여기에 버리고 갔어요. 콜록... 지금 치료가... 콜록콜록! 부탁해요...
...
지금 감염되어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대위님?
데리고 귀환하라, 오면서 치료하고.
예고르는 탱크에 기댄 채, 손으로 눈을 세게 문질렀다.
안젤리아는 빌딩에 있는 거였군...
자신을 치료할 시간을 벌려고 한 거였어! 이 XX!
예고르는 탱크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지휘실로 향했다.
대위님! 그리폰 소대가 빌딩 방향으로 도주 중입니다!
방어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젤리아를 지키려고 마지막 저항을 할 셈이다!
정찰부대는 어디 있나? 그리폰보다 먼저 빌딩에 진입 가능한가?
가능합니다만, 현재 빌딩이 그리폰의 중화기부대의 사거리 안에 있어, 함부로 접근했다간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원위치에서 대기시켜라. 모든 전투인원은 들어라, 즉시 목표 빌딩으로 향해 포위하라!
안젤리아! 네년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봤자 헛수고다, 빌딩에 돌아간다 해도 다 개죽음뿐이다!
이번이야말로 놓치지 않겠다!
10분 후, 철수부대가 빌딩에 돌아와, 416이 안젤리아에게 아드레날린을 주사했다.
후우... 고맙다, 많이 나아졌어.
주사를 놓을 때 그 울부짖던 소리를 녹음했어야 했네요.
내 장례식에 가서 틀지 마.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다.
지휘관, 그리폰 철수부대는 이미 빌딩에 돌아와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할 거야.
폭탄은 이미 다 개조했고 나와 AN94가 서둘러 설치하고 있어, 물론 기폭장치도 말이야!
정말 이렇게 할 거야? 우리 뜻대로 될지는...
최악의 경우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겠지만, 그것도 각오한 바다.
SOP2와 HK416은 아직...
아직 임무가 남아 있어... 지휘관이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니, 너희는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돼.
미안, 이게 지휘관의 명령인걸. 나보고 후퇴하라 해도 명령을 어길 수는 없잖아?
지휘관, 왜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서 날 구하려는 거야?
위기 따위 이미 익숙하다. 이건 그저 평소에도 있는 임무다.
그래서 너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거지?
그렇기에 지휘관이 더 중요한 거지? 리스크 없이 승리는 없어.
그리폰에 필요한 건 전략적 안목이 있는 지휘관이지 나 같은 바보가 아니야.
글쎄, 내가 보기엔 우리 모두 불합격인걸. 그래서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있는 거잖아?
여긴 전장이야. 인정 따윈 없어! 지휘관, 당신은 내게 빚진 것 없어!
그럼 이제 지휘관님에게 빚진 거네요, 안젤리아. 나중에 감사의 편지 내용이라도 생각해 봐요.
이미 결정했으면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우도록 하자, 안젤리아.
... 그래.
우리 임무는 저 깡통폭탄이 모두 설치될 때까지 적을 지연시키는 거야.
군은 분명 모든 수단을 써서 빌딩으로 쳐들어올 거야. 최대한 시간을 벌어!
SOP2, 416, 군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어!
정말로... 모든 주력부대를 끌어왔구나.
지금 안젤리아가 빌딩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어!
그러고 보니 군의 주력부대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이게 처음이지...
나도 인형 소체로 싸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단 한 숨 푹 자둬, RO.
일어날 때쯤이면 안젤리아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이젠 나도 도움 안 될 테니까, 너한테 맡기지 뭐.
아니... 역시 깨어있어줄래, RO?
어? 왜?
우리 둘 함께 있어야 AR팀이니까.
맘대로 해.
내가 모든 것을 기록해줄게, AR팀이 군의 주력부대에 맞서는 장면을 말이야.
적이 온다! 화력소대는 포격 준비해!
지휘관님, 여기가 최후의 방어선이에요. 반드시 저들의 습격을 막아내, 리벨리온에게 시간을 벌어주셔야 해요!
군의 병력이 끝없이 쏟아져 점점 우세를 취해갔다!
AK12, 얼마 못 버티겠어! 지금 얼마나 됐어!
아직 설치 중이야, 기다려 봐!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몰라, 좀 더 서두를 수 없어?
SOP2, 왼쪽에!
봤어 봤어!
최저한의 IED 설치 완료!
AK12, 이제 기폭장치를...
416, 전방에 유탄!!
콰앙!!
416, 무슨 일이야! 416!
총알이 다 떨어졌어! 지금 몰려오고 있어!
전방 수류탄! SOP2 엎드려!
퍼엉! 폭발이 끝나지 않는다.
416! SOP2! 어떻게 됐어, 빨리 대답해!
416-! 대답하라고!
방어선이 뚫렸어, 이미 예고르가 빌딩 안에 진입했어!
지금 전력으로 추격을 피하는 중이야!
AK12, 기폭장치는!
늦었어...
그게 무슨...
적이 이미 빌딩에 들어온 상황에서 폭탄들을 모두 연결할 수가 없어!
지금 그 많은 기폭장치를 설치할 시간이 부족해!
안 되는 건가?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이대로 끝나고 마는 걸까? 안젤리아...
안젤리아... 이제 어쩌면 좋지? 다른 방법은 없는가...?
.....
...안젤리아?
SOP2, 빨리 따라와, 발목지뢰 몇 개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AK12, 폭탄 설치는 어떻게 됐어!?
AK12!? AN94!? 제길, 누가 좀 대답해!
공기가 굳어져 간다, 끝없는 총소리가 점점 다가오기만 한다.
안젤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드레날린 한 대 더 놔줘.
현재 몸 상태로는 더 이상 주사할 수 없다...
한 대 더 놔주라고.
... 94, 놔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안젤리아는 아드레날린을 한 대 더 주입했다.
하아... 하아... 하아아...
구슬땀이 이마에서 쏟아져 내린다, 안젤리아는 쉴 새 없이 심호흡을 하며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 계획을 말해줄게, 우리를 구하러 온 인형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멀수록 좋으니까.
당신을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말이야?
미안하지만, 무리야. 이미 예고르의 부대가 여길 완전히 포위했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명령하는 거야.
.....
AK12는 안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좋아, 행운을 빌게.
94, SOP2와 416보고 아래층에서 철수하라고 해, 우리도 거기서 합류할 테니까.
그럼 안젤리아는...
안젤리아가 알아서 할 거야.
알았다, 지금 연락하겠다.
안젤리아, 승산은 얼마나 있어?
10%, 혹은 그 이하.
여전히 낙천적이네.
성공한다면, 날 데리고 떠날 수 있도록 해, 최대한 빨리.
알았어, 명령을 기다릴게.
AK12와 AN94가 자리를 떠났다.
안젤리아는 AK12가 마저 설치하지 못한 기폭 스위치를 줍고, 낡은 의자를 세워 천천히 앉았다.
AK12가 주워준 권총을 꺼내, 자조하며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알 좀 남겨두는 건데, 그러면 적어도 내 손으로 예고르 그 자식을 죽여버릴 텐데 말이야.
밑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위층에 생명 신호가 있습니다.
인형의 신호는 더 위의 옥상에 있습니다, 생명 신호와 매우 멉니다만...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모두 주목, 목표는 3층에 있다, 원위치에서 대기하며 경계를 유지하라.
내가 직접 보러 가겠다.
대위님, 혼자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녀석의 도발이다... 그러니 내가 직접 올라가서 끝내주겠다.
인형을 곁에 두지 않았다는 건 분명 다른 수작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 빌딩을 샅샅이 검사해서 상황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네, 대위님.
안젤리아, 어디 한번 네년이 죽기 전까지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나 보겠다.
예고르는 계단을 올라 드디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안젤리아.
예고르 대위.
또 만났군.
네년의 부하는 같이 없나?
너도 똑같잖아?
네년쯤 나 하나면 충분하다.
큰 소리는 잘 치는군, 저렇게 사람을 잔뜩 끌고 와서 요란하게 내 뒤꽁무니나 쫓고 말이야, 아무리 내게 반했어도 저건 좀 창피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것뿐인가? 생각한 것보다 시시한 녀석이군, 안젤리아. 네년에게 실망했다.
시시한 여자라서 미안하네.
설마 날 죽이기 전에 수다 좀 떨 생각이었어?
내가 무슨 영화 속 삼류 악당으로 보이나?
그 얼굴은 딱 그런 상인데. 그리고 지금 너도 그렇게 제정신은 아니지...
붕괴액은 육체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니까. 피폭으로 인한 정신변이를 참으면서 나한테 놀아나니 아주 미칠 것 같지 않아?
그래, 나와 내 부하들의 좀 전의 행동은 꽤 이성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폭발 이후로 우리 머릿속엔 단 한가지 생각, 널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폰의 꼭두각시로 인형극을 보여봤자 우리의 복수를 향한 갈망을 꺾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네년의 죽음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안젤리아는 아무 말도 없지만 그 등 뒤에 감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예고르가 보았다.
죽어라!
예고르가 총을 뽑았다, 하지만 그 동시에...
총을 뽑는 움직임이 아주 능숙하네, 적이 아니었다면 반했을지도 몰라.
...!
왜 안 쏘는 거지?
내 생각이 맞다면, 이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
안젤리아가 기폭 스위치를 들었다.
충동에 휩싸여서 바로 빌딩에 쳐들어 오고, 왜 내가 계속 이 빌딩에 남아있는지 생각해 봤어?
이때 예고르가 통신을 받았다.
대위님, 빌딩에 IED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몇 개밖에 못 찾았지만, 배치 방식을 보아 훨씬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서야 눈치챘나 보네? 그래, 내가 허약한 것처럼 꾸며서 너희를 이 빌딩에 모이게 해서 인형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폭탄을 설치했지.
그리고 네가 얼간이처럼 빌딩에 쳐들어왔을 때, 너희 전부 한방에 날려버려 네가 날 배신한 것을 복수하려고 했지.
안젤... 리아...!
그렇게 이를 갈면서 노려보지 마, 손에 힘 푸는 게 어때? 날 죽였다간 내 인형들이 바로 예비 스위치를 눌러버릴 테니까.
그 정도로 내가 겁먹을 것 같으냐!
어련하겠어.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이 빌딩에는 일반 폭탄 말고도 붕괴액 캡슐까지 섞여 있어, 터졌다간 저 외부의 부대까지 휘말릴 거야.
... 붕괴액이라고? 마지막까지 날 놀릴 셈이냐? 그러지도 못하면서 허풍치지 마라!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거짓말이다, 아직도 붕괴액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가져왔겠나!
왜 없을 것 같은데? 내가 한 번에 다 써버렸을까 봐?
핵폭탄을 한 번도 안 써본 놈하고 한 번 써본 놈 중에 누가 더 다음 한 방을 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네 부하에게 물어보렴, 지금 내가 숨겨둔 선물을 찾느라 바쁠 테니까.
예고르는 한 손으로 안젤리아를 겨눈 채, 다른 손으로 통신기를 켰다.
이 빌딩에서 고농도 붕괴액 반응이 탐지되는가?
놈의 말은 들었으며 저희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붕괴선 오염이 너무 심해 탐지가 불가능합니다.
...
그럼, 좀 믿을만하니?
그렇다면 무엇을 꾸물거리는 거냐. 한번 네 계획대로 스위치를 눌러봐라!
크하하하하하하!
뭐가 웃기다는 거지?
아니, 너 스스로도 압박감에 눌려 죽을 것 같으면서 다른 사람을 압박하는 게 너무 웃겨서 말이지.
좋아, 한 가지 좋은 소식 알려주지, 너 오늘 운 아주 좋은 거다. 생각이 바뀌었어.
빌딩을 포위한 부대를 도시구역 밖으로 철수시키고 나하고 내 인형들을 보내주면.
너희를 살려줄 수도 있어.
무슨 개꿈을 꾸는 거냐, 안젤리아! 여기까지 와서 놓칠 것 같으냐!
배짱 있으면 어디 한번 스위치를 눌러 함께 죽어 보지 그러냐!
너야말로 적당히 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아니면 또 한 번 피폭당해 보시던가! 이번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내가 죽음을 무서워할 것 같으냐? 우린 군인이다! 네가 잘 아는 군인이다!
그래, 잘 알고 있지, 예고르. 넌 저들의 상관이야!
인형은 너에게 아무 가치도 없겠지만, 저 인간들은 너의 전우이며 형제잖아. 네 복수를 위해서 겨우 살아남은 그들을 또 휘말리게 할 셈이야?
내 부하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네 부하들을 붕괴액 범벅으로 만들 셈이냐고! 네 생각만 하지 마! 그들의 미래,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 보라고! 내가 이 스위치만 누르면 너도, 그 누구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사라질 거야!
허세 부리지 마라! 미쳤냐!
그래, 미쳤다! 지금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젠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고 내가 기댈 건 이것밖에 없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나와 싸구려 인형 몇 개로 이렇게 많은 적들을 지옥으로 끌고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 네가 어떻게 하든 난 결국 승리하는 거야.
자아... 빨리 정해, 서로 살아서 돌아갈지, 아니면 네 부하와 같이 나와 함께 저세상으로 갈 건지!
예고르는 저 사악하게 웃는 안젤리아의 눈동자에 더 이상 다른 갈망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오직 그가 선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예고르도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서히, 예고르는 총을 내렸다.
...
네가 이겼다, 안젤리아.
잠시 목숨을 건졌군.
모두 주의하라, 빌딩에 붕괴액이 섞인 폭발물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전원 3km 밖의 안전거리까지 철수하라. 명령이다, 즉시 실시하라!
안젤리아는 일어서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젤리아, 들려? 군의 부대가 후퇴하기 시작했어, 철수 경로를 차단하던 적도 물러났어!
알았어, 마중 나와.
안젤리아는 뒤돌아 예고르를 향했다.
군관으로서 넌 정말 좋은 상사야. 네가 훌륭한 군인인 것을 인정하지.
하지만, 넌 줄을 잘못 섰어.
AK12와 AN94가 동시에 창가에서 뛰어내려 들어와 총으로 예고르를 겨눴다.
그래서, 이제 날 제거할 셈이냐.
널 죽여 봤자 아무 이득이 없는걸.
철혈의 엘더브레인이 도망간 지금, 우리끼리 죽이고 있을 이유가 있어?
당연히 있다.
나도 널 죽일 이유는 잔뜩 있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이대로 끝나진 않는다, 안젤리아...
...어디 두고 보자.
예고르의 원한으로 가득한 시선 속에서 안젤리아는 AK12의 등에 업혔다.
두고 보자면 그때까지 두고 보자고, 이건 기념품으로 선물해줄게, 너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네.
안젤리아가 스위치를 바닥에 버리자, AK12와 AN94가 그녀를 데리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예고르는 천천히 창가에 다가가 스위치를 집어, 아무 말 없이 텅 빈 창밖을 바라보았다.
30분 후.
대위님, 폭발물 처리반의 보고로, 빌딩에 설치한 폭탄은... 모두 기폭장치가 없었습니다.
드론으로 이 빌딩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어떤 고농축 붕괴액의 용기를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
대위님...
그래... 알았다...
예고르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그저 허무하게 안젤리아가 남긴 기폭 스위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허세인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럴 것이라고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년은 정말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또다시 너희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대위님...
다음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위님의 명령을 위해서 언제든지 희생하겠습니다.
예고르는 하사를 바라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다음 작전 때 보지, 이 나라를 위해선 우리가 더 위대한 희생을 해야 한다.
다음 작전으로 이동하지, 조국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같은 시간.
안젤리아! 설마 안에 붕괴액까지 섞은 줄은 몰랐어! 근데 붕괴액이 뭐야?
하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땐 정말 아무 방법도 없었어, 녀석들을 놀래킬 수밖에 없었지.
예고르가 내가 혼자인 것을 보면 분명 의심할 테니, 그 의심을 극대화해서 스스로 겁에 질리게 한 거지.
정말 억지스러운 위협 수단이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예고르를 동요시킬 수 없어.
녀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많은 부하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은 견디지 못하지,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니까...
안젤리아, 만약에 기폭장치까지 다 설치했으면, 정말로 눌렀나요?
... 글쎄, 진짜 해봐야 알겠지, 상황따라 다른 법이야.
평소에는 온갖 계획을 준비하면서 이럴 때는 상황을 보자는 말을 하는구나.
물론 약간 해프닝이나 애드리브가 발생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너무 위험했어, 나마저 조마조마했다니까.
솔직히 나도 확신이 없었어, 그저 군이 너무 빨리 폭탄을 찾아내지 않기를, 여기가 붕괴선에 뒤덮였기를, 예고르가 내 허세에 정신이 흐려지기를 빌었어...
결국엔... 정말 운이 따라준 거야. 예고르가 감염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복수하러 뛰어오지 않았다면. 녀석의 경험으로 분명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그럼 난 정말 속수무책이었겠지...
그래도 결국엔 우리 모두 살아남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안젤리아가 모두를 구한 것이다.
응응, 나도 설마 우리 모두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나야말로 살았지, 너희는 그저 휘말린 거야.
모두 고맙다, 그리고 지휘관도...
그럼, 이제 지휘관님을 구하러 가야는 것이죠?
음... 군의 부대는 안 쫓아와.
아직 증거를 인멸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쁠 터.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다행히 지휘관은 딱히 위험도 없이 지금까지 세이프 하우스에 숨어 있었으니까, 식은 죽 먹기겠지!
어? 경호원?
그치그치! 그래도 지휘관 혼자 그렇게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지휘관님 곁에 사람이 더 있어, 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잡담 정도는 할 수 있어.
아하하! 미안 미안, 그래도 지휘관 그렇게 구석에 숨어 있으면 별로 위험할 것도 없잖아?
혹은, 위협이 나타나는 대로 누군가가 해치웠거나.
그래? 그게 누구야?
카리나 씨가 엘리트 인형을 두 명 보내서 지휘관님을 지키고 있어.
겨우... 두 명 뿐이야?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그 두 명만으로도 여유만만할 거야.
그래? 나도 몰랐는데, 그게 누구야?
하나는 IOP가 오랫동안 숨겨온 엘리트 인형이야, 사람과 잘 어울리지는 못해도, 실력은 있어.
이름은...
그리폰 인형 M82A1입니다.
통신채널에서 치열한 총격전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또 어디서 싸우고 있는 거야?
제 싸움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카리나 님께서 구조부대가 온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지휘관님이 위험하시니 서두르세요.
위험하다고? 무슨 일이야?
타앙!
총소리가 들려! 방위각 300 방향에서 온다!
저도 들었으니까 조용히 하세요.
일단 소개하죠, M870P, 문제인형이고, 실력 빼면 시체인 녀석이죠
"실력과 멋을 빼면" 시체인 거야, 똑바로 말해.
잘 왔다, 자식들아. 하지만 지금 이런 난장판에서 처음 보는 인형하고 파티할 생각은 없거든!
지금 우리 둘이서만 지휘관을 지키고 있단 말이야, 너희들 후딱 안 뛰어와?
저기 누굴 상대하고 있어? 특징이라도 말해 줄래?
저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 있는 것들은...
인형일까요? 인간일까요? ...혹은 "신의 사자"일까요?
과연 우리가 이걸 해치울 수 있을지는 몰라!
한 마디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몰라"라고 하는 건 "못해"라는 뜻이야!
그래 알았어, 근데 어떤 녀석들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얀 인형을 본 적 있으신가요?
특히... 저기 저 하얀 망토 두른 망나니 녀석 말이야.
...
뭐... 하얀 인형이라고?
진짜 서둘러야겠어.
지휘관님이 정말로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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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의 통신기에서 요란한 소리와 비명이 들려온다.
<color=#00CCFF>아군이에요! 살려주세요!</color>
<color=#00CCFF>콜록... 제발 부탁할게요! 전 협박당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제발!</color>
<color=#00CCFF>대위님, 안젤리아로 의심되는 목표를 잡았지만. 저희 의료인원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안젤리아의 모습으로 간단하게 분장시킨 것입니다.</color>
<color=#00CCFF>그 인형이 절 기절시키고 여기에 버리고 갔어요. 콜록... 지금 치료가... 콜록콜록! 부탁해요...</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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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00CCFF>지금 감염되어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대위님?</color>
데리고 귀환하라, 오면서 치료하고.
예고르는 탱크에 기댄 채, 손으로 눈을 세게 문질렀다.
안젤리아는 빌딩에 있는 거였군...
자신을 치료할 시간을 벌려고 한 거였어! 이 XX!
예고르는 탱크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지휘실로 향했다.
<color=#00CCFF>대위님! 그리폰 소대가 빌딩 방향으로 도주 중입니다!</color>
방어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젤리아를 지키려고 마지막 저항을 할 셈이다!
정찰부대는 어디 있나? 그리폰보다 먼저 빌딩에 진입 가능한가?
<color=#00CCFF>가능합니다만, 현재 빌딩이 그리폰의 중화기부대의 사거리 안에 있어, 함부로 접근했다간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color>
그럼 원위치에서 대기시켜라. 모든 전투인원은 들어라, 즉시 목표 빌딩으로 향해 포위하라!
안젤리아! 네년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봤자 헛수고다, 빌딩에 돌아간다 해도 다 개죽음뿐이다!
이번이야말로 놓치지 않겠다!
10분 후, 철수부대가 빌딩에 돌아와, 416이 안젤리아에게 아드레날린을 주사했다.
후우... 고맙다, 많이 나아졌어.
주사를 놓을 때 그 울부짖던 소리를 녹음했어야 했네요.
내 장례식에 가서 틀지 마.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다.
지휘관, 그리폰 철수부대는 이미 빌딩에 돌아와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할 거야.
폭탄은 이미 다 개조했고 나와 AN94가 서둘러 설치하고 있어, 물론 기폭장치도 말이야!
정말 이렇게 할 거야? 우리 뜻대로 될지는...
최악의 경우 우리 모두 여기서 죽겠지만, 그것도 각오한 바다.
SOP2와 HK416은 아직...
아직 임무가 남아 있어... 지휘관이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니, 너희는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돼.
미안, 이게 지휘관의 명령인걸. 나보고 후퇴하라 해도 명령을 어길 수는 없잖아?
지휘관, 왜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서 날 구하려는 거야?
...
위기 따위 이미 익숙하다. 이건 그저 평소에도 있는 임무다.
그래서 너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거지?
그렇기에 지휘관이 더 중요한 거지? 리스크 없이 승리는 없어.
그리폰에 필요한 건 전략적 안목이 있는 지휘관이지 나 같은 바보가 아니야.
글쎄, 내가 보기엔 우리 모두 불합격인걸. 그래서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있는 거잖아?
여긴 전장이야. 인정 따윈 없어! 지휘관, 당신은 내게 빚진 것 없어!
그럼 이제 지휘관님에게 빚진 거네요, 안젤리아. 나중에 감사의 편지 내용이라도 생각해 봐요.
이미 결정했으면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우도록 하자, 안젤리아.
... 그래.
우리 임무는 저 깡통폭탄이 모두 설치될 때까지 적을 지연시키는 거야.
군은 분명 모든 수단을 써서 빌딩으로 쳐들어올 거야. 최대한 시간을 벌어!
SOP2, 416, 군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어!
정말로... 모든 주력부대를 끌어왔구나.
지금 안젤리아가 빌딩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어!
그러고 보니 군의 주력부대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이게 처음이지...
나도 인형 소체로 싸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단 한 숨 푹 자둬, RO.
일어날 때쯤이면 안젤리아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이젠 나도 도움 안 될 테니까, 너한테 맡기지 뭐.
아니... 역시 깨어있어줄래, RO?
어? 왜?
우리 둘 함께 있어야 AR팀이니까.
맘대로 해.
내가 모든 것을 기록해줄게, AR팀이 군의 주력부대에 맞서는 장면을 말이야.
적이 온다! 화력소대는 포격 준비해!
지휘관님, 여기가 최후의 방어선이에요. 반드시 저들의 습격을 막아내, 리벨리온에게 시간을 벌어주셔야 해요!
군의 병력이 끝없이 쏟아져 점점 우세를 취해갔다!
<color=#00CCFF>AK12, 얼마 못 버티겠어! 지금 얼마나 됐어!</color>
아직 설치 중이야, 기다려 봐!
<color=#00CCFF>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몰라, 좀 더 서두를 수 없어?</color>
<color=#00CCFF>SOP2, 왼쪽에!</color>
<color=#00CCFF>봤어 봤어!</color>
최저한의 IED 설치 완료!
AK12, 이제 기폭장치를...
<color=#00CCFF>416, 전방에 유탄!!</color>
콰앙!!
416, 무슨 일이야! 416!
<color=#00CCFF>총알이 다 떨어졌어! 지금 몰려오고 있어!</color>
<color=#00CCFF>전방 수류탄! SOP2 엎드려!</color>
퍼엉! 폭발이 끝나지 않는다.
416! SOP2! 어떻게 됐어, 빨리 대답해!
416-! 대답하라고!
<color=#00CCFF>방어선이 뚫렸어, 이미 예고르가 빌딩 안에 진입했어!</color>
<color=#00CCFF>지금 전력으로 추격을 피하는 중이야!</color>
AK12, 기폭장치는!
늦었어...
그게 무슨...
적이 이미 빌딩에 들어온 상황에서 폭탄들을 모두 연결할 수가 없어!
지금 그 많은 기폭장치를 설치할 시간이 부족해!
안 되는 건가?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이대로 끝나고 마는 걸까? 안젤리아...
안젤리아... 이제 어쩌면 좋지? 다른 방법은 없는가...?
.....
...안젤리아?
<color=#00CCFF>SOP2, 빨리 따라와, 발목지뢰 몇 개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color>
<color=#00CCFF>AK12, 폭탄 설치는 어떻게 됐어!?</color>
<color=#00CCFF>AK12!? AN94!? 제길, 누가 좀 대답해!</color>
공기가 굳어져 간다, 끝없는 총소리가 점점 다가오기만 한다.
안젤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드레날린 한 대 더 놔줘.
현재 몸 상태로는 더 이상 주사할 수 없다...
한 대 더 놔주라고.
... 94, 놔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안젤리아는 아드레날린을 한 대 더 주입했다.
하아... 하아... 하아아...
구슬땀이 이마에서 쏟아져 내린다, 안젤리아는 쉴 새 없이 심호흡을 하며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 계획을 말해줄게, 우리를 구하러 온 인형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멀수록 좋으니까.
당신을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말이야?
미안하지만, 무리야. 이미 예고르의 부대가 여길 완전히 포위했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명령하는 거야.
.....
AK12는 안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좋아, 행운을 빌게.
94, SOP2와 416보고 아래층에서 철수하라고 해, 우리도 거기서 합류할 테니까.
그럼 안젤리아는...
안젤리아가 알아서 할 거야.
알았다, 지금 연락하겠다.
안젤리아, 승산은 얼마나 있어?
10%, 혹은 그 이하.
여전히 낙천적이네.
성공한다면, 날 데리고 떠날 수 있도록 해, 최대한 빨리.
알았어, 명령을 기다릴게.
AK12와 AN94가 자리를 떠났다.
안젤리아는 AK12가 마저 설치하지 못한 기폭 스위치를 줍고, 낡은 의자를 세워 천천히 앉았다.
AK12가 주워준 권총을 꺼내, 자조하며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알 좀 남겨두는 건데, 그러면 적어도 내 손으로 예고르 그 자식을 죽여버릴 텐데 말이야.
밑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위층에 생명 신호가 있습니다.
인형의 신호는 더 위의 옥상에 있습니다, 생명 신호와 매우 멉니다만...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모두 주목, 목표는 3층에 있다, 원위치에서 대기하며 경계를 유지하라.
내가 직접 보러 가겠다.
대위님, 혼자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녀석의 도발이다... 그러니 내가 직접 올라가서 끝내주겠다.
인형을 곁에 두지 않았다는 건 분명 다른 수작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 빌딩을 샅샅이 검사해서 상황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네, 대위님.
안젤리아, 어디 한번 네년이 죽기 전까지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나 보겠다.
예고르는 계단을 올라 드디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안젤리아.
예고르 대위.
또 만났군.
네년의 부하는 같이 없나?
너도 똑같잖아?
네년쯤 나 하나면 충분하다.
큰 소리는 잘 치는군, 저렇게 사람을 잔뜩 끌고 와서 요란하게 내 뒤꽁무니나 쫓고 말이야, 아무리 내게 반했어도 저건 좀 창피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것뿐인가? 생각한 것보다 시시한 녀석이군, 안젤리아. 네년에게 실망했다.
시시한 여자라서 미안하네.
설마 날 죽이기 전에 수다 좀 떨 생각이었어?
내가 무슨 영화 속 삼류 악당으로 보이나?
그 얼굴은 딱 그런 상인데. 그리고 지금 너도 그렇게 제정신은 아니지...
붕괴액은 육체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니까. 피폭으로 인한 정신변이를 참으면서 나한테 놀아나니 아주 미칠 것 같지 않아?
그래, 나와 내 부하들의 좀 전의 행동은 꽤 이성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폭발 이후로 우리 머릿속엔 단 한가지 생각, 널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폰의 꼭두각시로 인형극을 보여봤자 우리의 복수를 향한 갈망을 꺾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네년의 죽음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안젤리아는 아무 말도 없지만 그 등 뒤에 감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예고르가 보았다.
죽어라!
예고르가 총을 뽑았다, 하지만 그 동시에...
총을 뽑는 움직임이 아주 능숙하네, 적이 아니었다면 반했을지도 몰라.
...!
왜 안 쏘는 거지?
내 생각이 맞다면, 이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
안젤리아가 기폭 스위치를 들었다.
충동에 휩싸여서 바로 빌딩에 쳐들어 오고, 왜 내가 계속 이 빌딩에 남아있는지 생각해 봤어?
이때 예고르가 통신을 받았다.
<color=#00CCFF>대위님, 빌딩에 IED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color>
<color=#00CCFF>지금 몇 개밖에 못 찾았지만, 배치 방식을 보아 훨씬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color>
이제서야 눈치챘나 보네? 그래, 내가 허약한 것처럼 꾸며서 너희를 이 빌딩에 모이게 해서 인형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폭탄을 설치했지.
그리고 네가 얼간이처럼 빌딩에 쳐들어왔을 때, 너희 전부 한방에 날려버려 네가 날 배신한 것을 복수하려고 했지.
안젤... 리아...!
그렇게 이를 갈면서 노려보지 마, 손에 힘 푸는 게 어때? 날 죽였다간 내 인형들이 바로 예비 스위치를 눌러버릴 테니까.
그 정도로 내가 겁먹을 것 같으냐!
어련하겠어.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이 빌딩에는 일반 폭탄 말고도 붕괴액 캡슐까지 섞여 있어, 터졌다간 저 외부의 부대까지 휘말릴 거야.
... 붕괴액이라고? 마지막까지 날 놀릴 셈이냐? 그러지도 못하면서 허풍치지 마라!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거짓말이다, 아직도 붕괴액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가져왔겠나!
왜 없을 것 같은데? 내가 한 번에 다 써버렸을까 봐?
핵폭탄을 한 번도 안 써본 놈하고 한 번 써본 놈 중에 누가 더 다음 한 방을 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네 부하에게 물어보렴, 지금 내가 숨겨둔 선물을 찾느라 바쁠 테니까.
예고르는 한 손으로 안젤리아를 겨눈 채, 다른 손으로 통신기를 켰다.
이 빌딩에서 고농도 붕괴액 반응이 탐지되는가?
<color=#00CCFF>놈의 말은 들었으며 저희도 찾고 있습니다.</color>
<color=#00CCFF>하지만 주변의 붕괴선 오염이 너무 심해 탐지가 불가능합니다.</color>
...
그럼, 좀 믿을만하니?
그렇다면 무엇을 꾸물거리는 거냐. 한번 네 계획대로 스위치를 눌러봐라!
크하하하하하하!
뭐가 웃기다는 거지?
아니, 너 스스로도 압박감에 눌려 죽을 것 같으면서 다른 사람을 압박하는 게 너무 웃겨서 말이지.
좋아, 한 가지 좋은 소식 알려주지, 너 오늘 운 아주 좋은 거다. 생각이 바뀌었어.
빌딩을 포위한 부대를 도시구역 밖으로 철수시키고 나하고 내 인형들을 보내주면.
너희를 살려줄 수도 있어.
무슨 개꿈을 꾸는 거냐, 안젤리아! 여기까지 와서 놓칠 것 같으냐!
배짱 있으면 어디 한번 스위치를 눌러 함께 죽어 보지 그러냐!
너야말로 적당히 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아니면 또 한 번 피폭당해 보시던가! 이번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내가 죽음을 무서워할 것 같으냐? 우린 군인이다! 네가 잘 아는 군인이다!
그래, 잘 알고 있지, 예고르. 넌 저들의 상관이야!
인형은 너에게 아무 가치도 없겠지만, 저 인간들은 너의 전우이며 형제잖아. 네 복수를 위해서 겨우 살아남은 그들을 또 휘말리게 할 셈이야?
내 부하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네 부하들을 붕괴액 범벅으로 만들 셈이냐고! 네 생각만 하지 마! 그들의 미래,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 보라고! 내가 이 스위치만 누르면 너도, 그 누구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사라질 거야!
허세 부리지 마라! 미쳤냐!
그래, 미쳤다! 지금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젠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고 내가 기댈 건 이것밖에 없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나와 싸구려 인형 몇 개로 이렇게 많은 적들을 지옥으로 끌고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 네가 어떻게 하든 난 결국 승리하는 거야.
자아... 빨리 정해, 서로 살아서 돌아갈지, 아니면 네 부하와 같이 나와 함께 저세상으로 갈 건지!
예고르는 저 사악하게 웃는 안젤리아의 눈동자에 더 이상 다른 갈망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오직 그가 선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예고르도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서히, 예고르는 총을 내렸다.
...
네가 이겼다, 안젤리아.
잠시 목숨을 건졌군.
모두 주의하라, 빌딩에 붕괴액이 섞인 폭발물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전원 3km 밖의 안전거리까지 철수하라. 명령이다, 즉시 실시하라!
안젤리아는 일어서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젤리아, 들려? 군의 부대가 후퇴하기 시작했어, 철수 경로를 차단하던 적도 물러났어!
알았어, 마중 나와.
안젤리아는 뒤돌아 예고르를 향했다.
군관으로서 넌 정말 좋은 상사야. 네가 훌륭한 군인인 것을 인정하지.
하지만, 넌 줄을 잘못 섰어.
AK12와 AN94가 동시에 창가에서 뛰어내려 들어와 총으로 예고르를 겨눴다.
그래서, 이제 날 제거할 셈이냐.
널 죽여 봤자 아무 이득이 없는걸.
철혈의 엘더브레인이 도망간 지금, 우리끼리 죽이고 있을 이유가 있어?
당연히 있다.
나도 널 죽일 이유는 잔뜩 있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이대로 끝나진 않는다, 안젤리아...
...어디 두고 보자.
예고르의 원한으로 가득한 시선 속에서 안젤리아는 AK12의 등에 업혔다.
두고 보자면 그때까지 두고 보자고, 이건 기념품으로 선물해줄게, 너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네.
안젤리아가 스위치를 바닥에 버리자, AK12와 AN94가 그녀를 데리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예고르는 천천히 창가에 다가가 스위치를 집어, 아무 말 없이 텅 빈 창밖을 바라보았다.
30분 후.
대위님, 폭발물 처리반의 보고로, 빌딩에 설치한 폭탄은... 모두 기폭장치가 없었습니다.
드론으로 이 빌딩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어떤 고농축 붕괴액의 용기를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
대위님...
그래... 알았다...
예고르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그저 허무하게 안젤리아가 남긴 기폭 스위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허세인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럴 것이라고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년은 정말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또다시 너희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대위님...
다음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위님의 명령을 위해서 언제든지 희생하겠습니다.
예고르는 하사를 바라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다음 작전 때 보지, 이 나라를 위해선 우리가 더 위대한 희생을 해야 한다.
다음 작전으로 이동하지, 조국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같은 시간.
안젤리아! 설마 안에 붕괴액까지 섞은 줄은 몰랐어! 근데 붕괴액이 뭐야?
하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땐 정말 아무 방법도 없었어, 녀석들을 놀래킬 수밖에 없었지.
예고르가 내가 혼자인 것을 보면 분명 의심할 테니, 그 의심을 극대화해서 스스로 겁에 질리게 한 거지.
정말 억지스러운 위협 수단이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예고르를 동요시킬 수 없어.
녀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많은 부하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은 견디지 못하지,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니까...
안젤리아, 만약에 기폭장치까지 다 설치했으면, 정말로 눌렀나요?
... 글쎄, 진짜 해봐야 알겠지, 상황따라 다른 법이야.
평소에는 온갖 계획을 준비하면서 이럴 때는 상황을 보자는 말을 하는구나.
물론 약간 해프닝이나 애드리브가 발생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너무 위험했어, 나마저 조마조마했다니까.
솔직히 나도 확신이 없었어, 그저 군이 너무 빨리 폭탄을 찾아내지 않기를, 여기가 붕괴선에 뒤덮였기를, 예고르가 내 허세에 정신이 흐려지기를 빌었어...
결국엔... 정말 운이 따라준 거야. 예고르가 감염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복수하러 뛰어오지 않았다면. 녀석의 경험으로 분명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그럼 난 정말 속수무책이었겠지...
그래도 결국엔 우리 모두 살아남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안젤리아가 모두를 구한 것이다.
응응, 나도 설마 우리 모두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나야말로 살았지, 너희는 그저 휘말린 거야.
모두 고맙다, 그리고 지휘관도...
그럼, 이제 지휘관님을 구하러 가야는 것이죠?
음... 군의 부대는 안 쫓아와.
아직 증거를 인멸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쁠 터.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다행히 지휘관은 딱히 위험도 없이 지금까지 세이프 하우스에 숨어 있었으니까, 식은 죽 먹기겠지!
...
어? 경호원?
그치그치! 그래도 지휘관 혼자 그렇게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지휘관님 곁에 사람이 더 있어, 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잡담 정도는 할 수 있어.
아하하! 미안 미안, 그래도 지휘관 그렇게 구석에 숨어 있으면 별로 위험할 것도 없잖아?
혹은, 위협이 나타나는 대로 누군가가 해치웠거나.
그래? 그게 누구야?
카리나 씨가 엘리트 인형을 두 명 보내서 지휘관님을 지키고 있어.
겨우... 두 명 뿐이야?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그 두 명만으로도 여유만만할 거야.
그래? 나도 몰랐는데, 그게 누구야?
하나는 IOP가 오랫동안 숨겨온 엘리트 인형이야, 사람과 잘 어울리지는 못해도, 실력은 있어.
이름은...
<color=#00CCFF>그리폰 인형 M82A1입니다.</color>
통신채널에서 치열한 총격전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또 어디서 싸우고 있는 거야?
<color=#00CCFF>제 싸움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color>
<color=#00CCFF>카리나 님께서 구조부대가 온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지휘관님이 위험하시니 서두르세요.</color>
위험하다고? 무슨 일이야?
타앙!
<color=#00CCFF>총소리가 들려! 방위각 300 방향에서 온다!</color>
<color=#00CCFF>저도 들었으니까 조용히 하세요.</color>
<color=#00CCFF>일단 소개하죠, M870P, 문제인형이고, 실력 빼면 시체인 녀석이죠</color>
<color=#00CCFF>"실력과 멋을 빼면" 시체인 거야, 똑바로 말해.</color>
<color=#00CCFF>잘 왔다, 자식들아. 하지만 지금 이런 난장판에서 처음 보는 인형하고 파티할 생각은 없거든!</color>
<color=#00CCFF>지금 우리 둘이서만 지휘관을 지키고 있단 말이야, 너희들 후딱 안 뛰어와?</color>
저기 누굴 상대하고 있어? 특징이라도 말해 줄래?
<color=#00CCFF>저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 있는 것들은...</color>
<color=#00CCFF>인형일까요? 인간일까요? ...혹은 "신의 사자"일까요?</color>
<color=#00CCFF>과연 우리가 이걸 해치울 수 있을지는 몰라!</color>
<color=#00CCFF>한 마디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몰라"라고 하는 건 "못해"라는 뜻이야!</color>
그래 알았어, 근데 어떤 녀석들이야?
<color=#00CCFF>저도 잘 모르겠습니다.</color>
<color=#00CCFF>하얀 인형을 본 적 있으신가요?</color>
<color=#00CCFF>특히... 저기 저 하얀 망토 두른 망나니 녀석 말이야.</color>
...
뭐... 하얀 인형이라고?
진짜 서둘러야겠어.
지휘관님이 정말로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