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철학
"그래서 우린 더욱 강해져야 해, 이런 상황에서 죽지 않도록."
이어지는 기억 파편을 찾았습니다. 계속할까요?
계속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해.
M4, 정말 괜찮겠니? 이 기억들...
괜찮아요, 지휘관.
서둘러서 작업을 마치도록 해요. 언제든지 군이 추격해올 수 있어요.
알았다. RO, 계속하자.
...M4A1과 AR-15가 이동한 지 15분째.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눈보라도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극저온 환경은 소체의 운동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치니, 계속 밖에 있다간 우리 둘 다 얼어붙을 겁니다.
알아, 그래서 이쪽으로 가는 거야.
그쪽에 뭐가 있죠?
널 쫓아오던 길에 집이 있는 걸 봤어.
그래, 바로 이 앞이야. 저 눈에 띄게 수상한 수풀 뒤에 민가가 있어. 적이 없다면, 안에 들어가서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우선 정찰부터 하죠.
M4A1과 AR-15는 길가의 수풀에 다가갔다.
누군가 일부러 뚫어 놓은 듯한 좁다란 길이 보이자, 두 인형은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무성한 수풀 더미를 지나니,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오두막이 보였다.
오두막의 주변에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난감들의 주인이 그곳에서 놀고 있던 것만 같았다.
AR-15는 바닥의 낙서를 조심스레 피해 가, 홀로 쓸쓸히 누워 있는 곰인형을 주워들었다.
해어지고 털도 많이 빠진 것으로 보아, 주인이 얼마나 이 곰인형을 껴안고 다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곰인형이 검붉은색으로 얼룩진 것을 알아차린 AR-15는 얼굴을 찡그렸다.
멈추세요, 안에 누가 있습니다.
적이야?
...운이 좋군요. 여긴 군의 통신 중계소입니다. 인기 많은 집이네요.
어디 보자.
보입니까? 10m 내라면 내부의 상황을 전부 스캔할 수 있습니다.
통신 설비도 정상이고, 비전투 인원밖에 없습니다. 놈들을 처리하면 설비를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무기도 없는 인간을 쏘겠다고?
비무장이어도 적은 적입니다. 저들의 통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 위협입니다.
......
갑자기 연민이라도 듭니까?
저 군인들이 그리폰의 인형들을 어떻게 몰살했는지 잊었습니까?
아니면, 인형을 망가뜨린 건 몰살이라 할 수 없단 겁니까?
...아니, 쓸데없는 연민 따위가 아니야.
지금 너의 말투와 행동거지... 넌 M4A1이 아니야.
훗...
전부터 이상했어. M4가 혼자 있는데도 자꾸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지금 넌 M4가 아니야, 대체 누구야?!
그게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M4A1"이 살아남도록.
이건 너의 목적에 반하지 않을 텐데.
쳇...
내 말에 동의한다면, 이런 비효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흥... 그럼 어떻게 쳐들어갈 셈인데?
네게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 줄게. 저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을 필요는 없어.
무슨 뜻이지?
집 내부의 인간들은 모두 변이됐어.
이성을 잃은 통신병들뿐이야. 저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자.
타타탕!
ELID화가 진행 중이던 병사들이 쓰러졌다.
AR-15는 전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총을 내렸다.
하지만 M4A1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AR-15의 부무장을 집어 들더니, 쓰러진 시체들의 머리와 가슴팍을 몇 번 더 쏘았다.
신중해야지.
"확인 작업"을 끝낸 M4A1은 부무장을 AR-15에게 다시 던져 주고서, 바로 통신 설비를 확인했다.
치잇...
아직 변이하지 않은 녀석들은 어떡하고?
오염지대에 고립된 이상, 결국 변이하고 말 거야. 탄을 아껴야 하니, 칼로 처치하는 게 좋겠지.
난 이 중계 설비로 군의 통신을 도청해볼 테니, 그건 너에게 맡길게.
......
왜, 못 하겠어?
M4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아...
난 역시...
역시, 내가 루니샤가 아니니까 따르지 않겠다는 거야?
이 자식이...!
그래서 어쩔 건데? 날 쏘려고?
난 지금 총알도 다 떨어졌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M4의 목소리로 그딴 말 하지 마!
쏠 생각이 없다면, 어서 할 일이나 해.
젠장...
그러는 너야말로, 예전의 너와 다르다는 생각은 안 들어?
뭐...?
예전의 AR-15이라면, 감정에 흔들리는 인형들을 깔보면서 군말 않고 임무를 수행했잖아.
헌데 지금 너에게선 그 나약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설마, 예전의 그 냉혹하고 굳센 모습은 루니샤를 위해 억지로 연기한 거고, 실은 무능하고 나약한 인형이었던 거야?
뭐라고!?
아니야? 그래서 저 병사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고, 저들이 변이해 우릴 덮칠 위험성을 무시하는 거야?
루니샤는 이미 총알이 바닥났어. 위험한 상황에서 반격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설마 너 혼자서 어떠한 위협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됐어, 그만!
그만 말해!
하면... 하면 되잖아!
너희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다 끝나면 루니샤에게 돌아와. 난 레벨 2 플랫폼에 접속해서, 그리폰이나 안젤리아의 위치를 찾아보겠어. 누구든 찾아낸다면 한 줄기 희망이 보이겠지.
으음...
이, 이건 정말 의외인데...?
우와, AR-15가 댄들라이한테 아주 혼쭐이 났네?
그... 그냥 비상 상황이니까 굳이 대꾸 안 한 거야!
그리고 녀석이 M4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니까 난처했을 뿐이라고!
어... M4 씨가 한 말이라서 반박 못 했다는 거네?
그, 그게 뭐 어때서!
......
......
......
......
제가 관찰한 바를 종합해 보자면, AR팀은 감정에 너무 연연하여 작전 효율이 예상보다 훨씬 낮습니다.
성능마저 뛰어나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은 전멸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살인 기계로 전락하지 않은 거야.
그런가요? 하지만 전술인형은 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설령 상대가 기계가 아닌 생물이라도 말이죠.
당신의 말은 마치 식칼로 고기를 썰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변론하더라도, 인류는 직접 하기 싫은 더러운 일을 인형에게 떠넘겼습니다.
......
이건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에는 전부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요.
제 생각엔,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하는 인형은 차라리 카페에서 손님이나 받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적을 상대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은 인간이든 인형이든 무능한 행위입니다.
괜찮아, 지휘관은 적한테 절대 용서 없거든!
그리폰의 기록을 확인하니, 지휘관님은 특히나 적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기를 선호하시더군요. 그 점만큼은 신뢰가 갑니다.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크흠... 수다는 그만하는 게 어때요? 지금 전송 중 약간 문제가 생겼는데 좀 도와주세요.
기억 파편을 초기화하는 도중 잠깐 렉이 걸렸을 뿐이야. 레벨 2 플랫폼에서라면 너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어.
그래도 나 혼자 하게 두지 말아 줘, 이 파일들을 정리하자 한 건 너잖아.
정말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빨리 쓸모없는 파편들을 청소하자.
후우, 드디어 끝났다...
M4 씨도 시간 날 때 마인드맵 공간을 정리해 주세요.
죄송해요...
그럼 기억 파편 계속 업로드할 수 있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이게 무슨 드라마인 줄 아니...
기억이 드라마 취급받다니 왠지 기분 나쁜데...
크흠... 다 해결됐으면 시간 낭비 말고 어서 업로드해 줘.
네, 즉시 진행할게요.
여기는...
네 마인드맵의 가장 밑바닥이지. 잘 쉬었어?
제 몸을 돌려줘요!
이제 진정됐어?
결국 이게 목적이었군요... 처음부터 제 몸을 빼앗을 속셈이었어요!
아니, 난 네 몸에 관심 없어. 나는 내가 바라는 진실을 쫓을 뿐이야.
그래서 네가 함부로 자신을 끝장내도록 놔둘 수 없었어. 우리의 여정이 그런 식으로 끝나게 놔둘 수 없었어.
제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안젤리아와 리벨리온, 그리고 그리폰도 아직 전멸하지 않았어. 이걸 봐.
이건...?!
네가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내가 군의 통신을 도청해서 얻은 정보야.
그러니까...
지휘관님과 안젤리아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
그런데 넌 입자포로 몹쓸 짓을 하려 했어.
......
제 몸을 돌려줘요. 그분들을 찾으러 가겠어요.
너에겐 정말 실망이야. 지금 네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전...
당연히...
지금 너의 마인드맵은 불안정해.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어.
할 수 있어요!
진정될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어. 이 몸을 함부로 다루도록 둘 수 없어.
안전해지면 알아서 몸의 제어권을 네게 돌려줄 테니, 걱정 마.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어차피 다른 수가 없으니까.
침투 끝났어.
왜 이렇게 한참 걸렸어?
그럼 네가 직접 해보던가.
아, 미안. 모든 연결 포트를 차단해서 그러지도 못하지?
흥...
그래서, 현재 상황은?
아무 소득도 없었다고 말하기만 해봐.
꽤 많은 정보를 얻었어.
그리폰은 군을 따돌리고 도시 밖으로 탈출했어. 군은 붕괴액 폭탄의 폭발로 인해 지휘 시스템이 엉망이 됐고.
하지만 장갑 부대가 시내로 집결해서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야.
그리폰이 포위를 뚫었다고?
통신 내용상으로는.
과연 지휘관이야.
그렇다면, 군은 지금 안젤리아를 찾는 중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커.
그런데,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을 거라 생각해?
평범한 인간이라면 피폭으로 진작에 죽었겠지만, 안젤리아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설사 ELID가 된다 해도 철저하게 상대를 괴롭힐걸.
그렇구나.
그럼 이제 어떡해? 그리폰과 합류해, 아니면 안젤리아를 구하러 가?
해가 뜨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지. 지금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시간이...
새로운 적이 나타났어. 한밤중에 벌집이 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쳇...
그런데, 새로운 적이라니?
희미하게 느껴져... 루니샤와 같은 공명이.
그게 무슨――
쿵! 쿵!
무슨 소리지? 지하실인가?
아직 병사가 남아 있었나...
...!
M4A1의 의문에 대답하듯, 분노에 찬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AR-15는 방 안쪽의,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쾅쾅대는 문을 조준했다.
이윽고 문이 부서지고, 작은 형체가 나타났다.
본디 새하얬을 시뻘건 치마를 입은 "소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흉포함을 드러냈다.
여자아이!?
이젠 아니야.
어... 어떡하지?
물러날까?
M4A1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좁은 방에서 벗어난 그 "소녀"가 울부짖으며 M4A1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앙!
AR-15의 탄환이 소녀의 미간에 정확히 명중했다.
소녀는 풀썩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한 판단이야.
말 안 해도 알아.
불쌍한 인간이구나.
이곳에서 살던 민간인인가... 아마 부모도 진작에 죽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애를 혼자 여기 놔두지 않았을 거야.
M4A1은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 눈을 감겨 주었다.
이 아이는 변이로 죽었어.
그 애는 아무 잘못 없어.
알아.
잠깐 도와줄래?
...몇 분 후.
M4A1은 간단히 만든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AR-15는 무덤 앞에 지저분한 곰인형과 들꽃을 두었다.
이걸로 됐겠지.
......
생명이란 이리도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구나.
그래... 이게 바로 세상이야.
아무리 무언가를 지키려 해도, 결국엔 잃고 말아.
어딜 가도 똑같을까? 약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강하면 뭐든 해도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린 더욱 강해져야 해, 이런 상황에서 죽지 않도록.
......
너도 이런 일로 슬퍼할 줄 알아?
나도 너희와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
그렇다고 널 쉽게 인정할 순 없어.
난 M4의 안전을 위해서 너와 협력하고 있을 뿐이야.
네 목적이 무엇이든, 곤경에서 벗어나고도 그 몸을 M4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어.
응, 알고 있어.
민간인...
저런 곳에 민간인이 있었다니...
본디 도시였던 곳이고, 지금도 옐로우존에는 숨어서 생활하는 유랑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설마 우리의 싸움에 민간인이 휘말릴 줄은...
싸움이 존재하는 이상,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기에,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옳고 그름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감염자였다지만, 저렇게 어린아이를 쏴야 했으니 괴로웠겠구나.
...쏘지 않으면, 감염자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니까요.
붕괴 복사에 피폭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뼈가 살을 뚫고 나올 듯이, 온몸이 찢어질 듯이 고통스러웠어.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었는데도 그 정도였으니, 심각하게 피폭되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죽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 고통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당신은 범인을 넘어섰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으시겠죠?
...되도록이면 말이지.
그렇다면 계속해서 기억 파편을 열람하죠. 정리를 끝내야 군을 상대할 정보를 확인하고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체 대사 보기 (169줄)
이어지는 기억 파편을 찾았습니다. 계속할까요?
계속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해.
M4, 정말 괜찮겠니? 이 기억들...
괜찮아요, 지휘관.
서둘러서 작업을 마치도록 해요. 언제든지 군이 추격해올 수 있어요.
알았다. RO, 계속하자.
...M4A1과 AR-15가 이동한 지 15분째.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눈보라도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극저온 환경은 소체의 운동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치니, 계속 밖에 있다간 우리 둘 다 얼어붙을 겁니다.
알아, 그래서 이쪽으로 가는 거야.
그쪽에 뭐가 있죠?
널 쫓아오던 길에 집이 있는 걸 봤어.
그래, 바로 이 앞이야. 저 눈에 띄게 수상한 수풀 뒤에 민가가 있어. 적이 없다면, 안에 들어가서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우선 정찰부터 하죠.
M4A1과 AR-15는 길가의 수풀에 다가갔다.
누군가 일부러 뚫어 놓은 듯한 좁다란 길이 보이자, 두 인형은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무성한 수풀 더미를 지나니,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오두막이 보였다.
오두막의 주변에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난감들의 주인이 그곳에서 놀고 있던 것만 같았다.
AR-15는 바닥의 낙서를 조심스레 피해 가, 홀로 쓸쓸히 누워 있는 곰인형을 주워들었다.
해어지고 털도 많이 빠진 것으로 보아, 주인이 얼마나 이 곰인형을 껴안고 다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곰인형이 검붉은색으로 얼룩진 것을 알아차린 AR-15는 얼굴을 찡그렸다.
멈추세요, 안에 누가 있습니다.
적이야?
...운이 좋군요. 여긴 군의 통신 중계소입니다. 인기 많은 집이네요.
어디 보자.
보입니까? 10m 내라면 내부의 상황을 전부 스캔할 수 있습니다.
통신 설비도 정상이고, 비전투 인원밖에 없습니다. 놈들을 처리하면 설비를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무기도 없는 인간을 쏘겠다고?
비무장이어도 적은 적입니다. 저들의 통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 위협입니다.
......
갑자기 연민이라도 듭니까?
저 군인들이 그리폰의 인형들을 어떻게 몰살했는지 잊었습니까?
아니면, 인형을 망가뜨린 건 몰살이라 할 수 없단 겁니까?
...아니, 쓸데없는 연민 따위가 아니야.
지금 너의 말투와 행동거지... 넌 M4A1이 아니야.
훗...
전부터 이상했어. M4가 혼자 있는데도 자꾸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지금 넌 M4가 아니야, 대체 누구야?!
그게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M4A1"이 살아남도록.
이건 너의 목적에 반하지 않을 텐데.
쳇...
내 말에 동의한다면, 이런 비효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흥... 그럼 어떻게 쳐들어갈 셈인데?
네게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 줄게. 저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을 필요는 없어.
무슨 뜻이지?
집 내부의 인간들은 모두 변이됐어.
이성을 잃은 통신병들뿐이야. 저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자.
타타탕!
ELID화가 진행 중이던 병사들이 쓰러졌다.
AR-15는 전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총을 내렸다.
하지만 M4A1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AR-15의 부무장을 집어 들더니, 쓰러진 시체들의 머리와 가슴팍을 몇 번 더 쏘았다.
신중해야지.
"확인 작업"을 끝낸 M4A1은 부무장을 AR-15에게 다시 던져 주고서, 바로 통신 설비를 확인했다.
치잇...
아직 변이하지 않은 녀석들은 어떡하고?
오염지대에 고립된 이상, 결국 변이하고 말 거야. 탄을 아껴야 하니, 칼로 처치하는 게 좋겠지.
난 이 중계 설비로 군의 통신을 도청해볼 테니, 그건 너에게 맡길게.
......
왜, 못 하겠어?
M4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아...
난 역시...
역시, 내가 루니샤가 아니니까 따르지 않겠다는 거야?
이 자식이...!
그래서 어쩔 건데? 날 쏘려고?
난 지금 총알도 다 떨어졌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M4의 목소리로 그딴 말 하지 마!
쏠 생각이 없다면, 어서 할 일이나 해.
젠장...
그러는 너야말로, 예전의 너와 다르다는 생각은 안 들어?
뭐...?
예전의 AR-15이라면, 감정에 흔들리는 인형들을 깔보면서 군말 않고 임무를 수행했잖아.
헌데 지금 너에게선 그 나약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설마, 예전의 그 냉혹하고 굳센 모습은 루니샤를 위해 억지로 연기한 거고, 실은 무능하고 나약한 인형이었던 거야?
뭐라고!?
아니야? 그래서 저 병사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고, 저들이 변이해 우릴 덮칠 위험성을 무시하는 거야?
루니샤는 이미 총알이 바닥났어. 위험한 상황에서 반격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설마 너 혼자서 어떠한 위협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됐어, 그만!
그만 말해!
하면... 하면 되잖아!
너희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다 끝나면 루니샤에게 돌아와. 난 레벨 2 플랫폼에 접속해서, 그리폰이나 안젤리아의 위치를 찾아보겠어. 누구든 찾아낸다면 한 줄기 희망이 보이겠지.
으음...
이, 이건 정말 의외인데...?
우와, AR-15가 댄들라이한테 아주 혼쭐이 났네?
그... 그냥 비상 상황이니까 굳이 대꾸 안 한 거야!
그리고 녀석이 M4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니까 난처했을 뿐이라고!
어... M4 씨가 한 말이라서 반박 못 했다는 거네?
그, 그게 뭐 어때서!
......
......
......
......
제가 관찰한 바를 종합해 보자면, AR팀은 감정에 너무 연연하여 작전 효율이 예상보다 훨씬 낮습니다.
성능마저 뛰어나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은 전멸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살인 기계로 전락하지 않은 거야.
그런가요? 하지만 전술인형은 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설령 상대가 기계가 아닌 생물이라도 말이죠.
당신의 말은 마치 식칼로 고기를 썰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변론하더라도, 인류는 직접 하기 싫은 더러운 일을 인형에게 떠넘겼습니다.
......
이건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에는 전부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요.
제 생각엔,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하는 인형은 차라리 카페에서 손님이나 받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적을 상대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은 인간이든 인형이든 무능한 행위입니다.
괜찮아, 지휘관은 적한테 절대 용서 없거든!
그리폰의 기록을 확인하니, 지휘관님은 특히나 적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기를 선호하시더군요. 그 점만큼은 신뢰가 갑니다.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크흠... 수다는 그만하는 게 어때요? 지금 전송 중 약간 문제가 생겼는데 좀 도와주세요.
기억 파편을 초기화하는 도중 잠깐 렉이 걸렸을 뿐이야. 레벨 2 플랫폼에서라면 너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어.
그래도 나 혼자 하게 두지 말아 줘, 이 파일들을 정리하자 한 건 너잖아.
정말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빨리 쓸모없는 파편들을 청소하자.
후우, 드디어 끝났다...
M4 씨도 시간 날 때 마인드맵 공간을 정리해 주세요.
죄송해요...
그럼 기억 파편 계속 업로드할 수 있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이게 무슨 드라마인 줄 아니...
기억이 드라마 취급받다니 왠지 기분 나쁜데...
크흠... 다 해결됐으면 시간 낭비 말고 어서 업로드해 줘.
네, 즉시 진행할게요.
여기는...
네 마인드맵의 가장 밑바닥이지. 잘 쉬었어?
제 몸을 돌려줘요!
이제 진정됐어?
결국 이게 목적이었군요... 처음부터 제 몸을 빼앗을 속셈이었어요!
아니, 난 네 몸에 관심 없어. 나는 내가 바라는 진실을 쫓을 뿐이야.
그래서 네가 함부로 자신을 끝장내도록 놔둘 수 없었어. 우리의 여정이 그런 식으로 끝나게 놔둘 수 없었어.
제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안젤리아와 리벨리온, 그리고 그리폰도 아직 전멸하지 않았어. 이걸 봐.
이건...?!
네가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내가 군의 통신을 도청해서 얻은 정보야.
그러니까...
지휘관님과 안젤리아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
그런데 넌 입자포로 몹쓸 짓을 하려 했어.
......
제 몸을 돌려줘요. 그분들을 찾으러 가겠어요.
너에겐 정말 실망이야. 지금 네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전...
당연히...
지금 너의 마인드맵은 불안정해.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어.
할 수 있어요!
진정될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어. 이 몸을 함부로 다루도록 둘 수 없어.
안전해지면 알아서 몸의 제어권을 네게 돌려줄 테니, 걱정 마.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어차피 다른 수가 없으니까.
침투 끝났어.
왜 이렇게 한참 걸렸어?
그럼 네가 직접 해보던가.
아, 미안. 모든 연결 포트를 차단해서 그러지도 못하지?
흥...
그래서, 현재 상황은?
아무 소득도 없었다고 말하기만 해봐.
꽤 많은 정보를 얻었어.
그리폰은 군을 따돌리고 도시 밖으로 탈출했어. 군은 붕괴액 폭탄의 폭발로 인해 지휘 시스템이 엉망이 됐고.
하지만 장갑 부대가 시내로 집결해서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야.
그리폰이 포위를 뚫었다고?
통신 내용상으로는.
과연 지휘관이야.
그렇다면, 군은 지금 안젤리아를 찾는 중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커.
그런데, 그녀가 아직도 살아있을 거라 생각해?
평범한 인간이라면 피폭으로 진작에 죽었겠지만, 안젤리아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설사 ELID가 된다 해도 철저하게 상대를 괴롭힐걸.
그렇구나.
그럼 이제 어떡해? 그리폰과 합류해, 아니면 안젤리아를 구하러 가?
해가 뜨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지. 지금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시간이...
새로운 적이 나타났어. 한밤중에 벌집이 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쳇...
그런데, 새로운 적이라니?
희미하게 느껴져... 루니샤와 같은 공명이.
그게 무슨――
쿵! 쿵!
무슨 소리지? 지하실인가?
아직 병사가 남아 있었나...
...!
M4A1의 의문에 대답하듯, 분노에 찬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AR-15는 방 안쪽의,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쾅쾅대는 문을 조준했다.
이윽고 문이 부서지고, 작은 형체가 나타났다.
본디 새하얬을 시뻘건 치마를 입은 "소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흉포함을 드러냈다.
여자아이!?
이젠 아니야.
어... 어떡하지?
물러날까?
M4A1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좁은 방에서 벗어난 그 "소녀"가 울부짖으며 M4A1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앙!
AR-15의 탄환이 소녀의 미간에 정확히 명중했다.
소녀는 풀썩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한 판단이야.
말 안 해도 알아.
불쌍한 인간이구나.
이곳에서 살던 민간인인가... 아마 부모도 진작에 죽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애를 혼자 여기 놔두지 않았을 거야.
M4A1은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 눈을 감겨 주었다.
이 아이는 변이로 죽었어.
그 애는 아무 잘못 없어.
알아.
잠깐 도와줄래?
...몇 분 후.
M4A1은 간단히 만든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AR-15는 무덤 앞에 지저분한 곰인형과 들꽃을 두었다.
이걸로 됐겠지.
......
생명이란 이리도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구나.
그래... 이게 바로 세상이야.
아무리 무언가를 지키려 해도, 결국엔 잃고 말아.
어딜 가도 똑같을까? 약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강하면 뭐든 해도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린 더욱 강해져야 해, 이런 상황에서 죽지 않도록.
......
너도 이런 일로 슬퍼할 줄 알아?
나도 너희와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
그렇다고 널 쉽게 인정할 순 없어.
난 M4의 안전을 위해서 너와 협력하고 있을 뿐이야.
네 목적이 무엇이든, 곤경에서 벗어나고도 그 몸을 M4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어.
응, 알고 있어.
민간인...
저런 곳에 민간인이 있었다니...
본디 도시였던 곳이고, 지금도 옐로우존에는 숨어서 생활하는 유랑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설마 우리의 싸움에 민간인이 휘말릴 줄은...
싸움이 존재하는 이상,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기에,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옳고 그름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감염자였다지만, 저렇게 어린아이를 쏴야 했으니 괴로웠겠구나.
...쏘지 않으면, 감염자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니까요.
붕괴 복사에 피폭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뼈가 살을 뚫고 나올 듯이, 온몸이 찢어질 듯이 고통스러웠어.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었는데도 그 정도였으니, 심각하게 피폭되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죽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 고통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당신은 범인을 넘어섰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으시겠죠?
...되도록이면 말이지.
그렇다면 계속해서 기억 파편을 열람하죠. 정리를 끝내야 군을 상대할 정보를 확인하고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