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떠날 때Ⅱ
"선택의 기회를 항상 소중히 하라, 언제 기회가 사라질 지 아무도 모르니."
화창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가운데, 우리는 착륙장 끝에 나란히 섰다.
얼마 안 가, 헬리안 씨가 말씀한 헬기 한 대가 천천히 착륙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완전무장한 PMC 병사 두 명이 뛰어내렸고, 뒤이어 크루거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카리나는 허리를 펴고 함께 경례했다.
그리폰 S09 관할구역 전술지휘관 및 보급관, 신고합니다!
지휘관, 오랜만이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크루거 씨.
크루거 씨는 여전히 항상 입던 붉은 코트 차림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초췌함을 감출 순 없었다.
그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지금까지 싸워 왔겠지.
크루거 씨의 헬기를 뒤따라온 보급용 수송 헬기도 착륙해, 인원들이 컨테이너를 기지 안으로 운반했다. 아마 당장 급한 인형들의 새 소체가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나.
가면서 얘기하지.
크루거 씨!
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 연합 작전 때 군에게 체포당하셨다고 들은 뒤론 연락이 끊겨서...
고문당하시진 않으셨어요? 그놈들이 막 굶기거나 잠도 못 주무시게 했나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카리나, 카리나.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라. 너희가 겪은 일에 비하면 난 낮잠이나 좀 자다 온 정도니 말이다.
다만... 체포될 때,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건만.
그리폰이 이렇게 건재하다니...
다 자네 덕분이네, 지휘관.
사원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이건 자네의 책임을 아득히 넘어선 일일세.
진심으로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네. 함께 고생한 카리나도, 우리 대신 분투한 인형들에게도.
내 친우가 말해 주길, 정말 큰 대가를 치렀다더군.
그렇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크지만 값진 대가였습니다.
흠... 지금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어.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군그래.
크루거 님, 묵으실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쪽으로.
고맙네. 그럼 지휘관,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제대로 된 건 회의에서 다시 하지.
지휘관도 오느라 지쳤을 테니 잠시 쉬도록 하세요. 카리나 너도.
으으...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온몸이 뻐근해졌어요.
그렇지? 오랜만에 기지로 복귀했으니, 다시 적응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는 그리폰의 복권 기념 연회가 열릴 예정이니 시간 맞춰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크루거 님께서, 당신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크루거 씨와 헬리안 씨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카리나는 아직 안 피곤하다며, 도착한 화물을 검사하러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뒤, 내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사무실까지 가는 길은 아주 조용했다.
원래대로라면 인형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로 시끄러웠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생환한 인형도 몇 안 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기가 이렇게나 조용해질 수도 있구나...
정말 간만에 발을 들인 사무실은 오래 묵은 곰팡이 냄새로 가득해, 반사적으로 코를 쥐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냄새를 맡으니 오히려 안도감을 들었다.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킨 뒤, 소파의 먼지를 쓱쓱 닦아내고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미 한 차례 푹 쉬고 난 뒤였음에도, 다시 피곤함이 물밀듯 쏟아졌다.
소파에 몸을 더 깊게 파묻자 눈도 저절로 감겼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잠든 동안엔 이렇게 무방비하군요.
......
즉, 잠들었을 때야말로 인류는 진정으로 평등해진다...?
흥미로운 발견입니다.
꿈속에서 누군가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지만, 누구인지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에 들었던 이 목소리... 누구더라?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급한 건 아니니 괜찮겠죠.
음... 잠시 여기에 앉아 있겠습니다.
수하 인형이었나?
그건 그렇고, 잠든 모습이 꽤 귀엽네요.
여태까지 그런 놀라운 일들을 해낸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 얼굴입니다.
갑자기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다급히 들어왔다.
거기 누구냐!
큰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총을 든 SL8이 내 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를 본 SL8은 총구를 돌렸지만, 대신 시선이 소파 옆의 의자로 향했다.
그녀의 눈을 쫓으니 과연,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댄들라이가 있었다.
아무도 없어...? 방금 지휘관 말고 다른 목소리가...
그렇군...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SL8이 노리쇠를 당겼다.
옷자락에 쓸린 듯한 먼지랑 미묘하게 다른 온도는 못 속이지.
누구냐! 당장 나와!
......♪
댄들라이는 싱긋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 제스처를 이해한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면서 SL8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아... 괜찮아, SL8. 별일 아니야.
지휘관?
SL8은 눈살을 찌푸리고 난색을 표하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총을 내렸다.
흐응... 그런 거구나.
알 필요 없는 일이니 묻지 말아 달란 뜻이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알았어.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카리나가 곧 저녁 연회 시작한다고 지휘관 불러 달라 해서 온 거야.
얼른 준비하고 홀로 와 줘.
알려 줘서 고마워, 금방 갈게.
SL8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모습을 감춰도 다른 요소들로 인해 주위에 흔적이 남아 발각될 수도 있군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너... 여긴 또 어쩐 일이야?
제게 최대한 종적을 감추고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 하신 건 바로 당신이잖습니까?
그러니 당신의 사무실보다 은거하기 좋은 곳은 없죠.
설마, 콘솔을 해킹해서 기지의 통제권을 탈취할 생각은 아니겠지?
염려가 지나치시군요. 제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사무실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만...
안심하십시오. 호기심에 시도해봤지만, 너무 시시해서 관뒀으니까요.
이 기지를 관할하는 시스템은 너무 구식이라서 말이죠.
아니, 시도도 하면 안 되지...
그런데, 방금 SL8의 반응으로 봐서는 굳이 내 사무실에 숨어 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게 아니라면,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 거겠군.
과연 지휘관님, 바로 간파하셨군요.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아부인걸.
후훗,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댄들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사무실.
하지만 제가 가진 그 어떤 기억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환경입니다.
솔직히, 저는 매우 궁금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아하...
하긴, 그 아이들은 평범한 삶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을 테지.
그래도 솔직히, 내 인생도 평범하다고는 못 하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들의 불행에 비한다면야, 당신의 인생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어.
저는 그들을 대신해, 이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엔 분명 아직 경험해볼 만한 것이 잔뜩 있겠죠. 색다른 경험을 할 때마다, 저는 감격을 느낍니다.
그러니, 저는 세상을 관찰하고자 합니다. 10년이든, 50년이든, 100년이든.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있어?
저와 같은 의식에게 있어서도,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허나 인간과 달리, 이 몸뚱이를 떠난다고 그걸로 끝은 아니죠.
얼마 후, 연회장.
정말 성대한 연회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급 요리와, 산전수전을 겪은 동료들과의 재회가 연회장을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난 그제서야 크루거 씨의 구출 작전에 참여한 부대가 있었음을 알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작전에서 수많은 지휘관과 전술인형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련의 승리로 인해 우리는 연합 작전 이후 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하지만 이 PMC, 그리폰에겐 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창가에 기대어, 저멀리서 반짝이는 송전탑의 불빛을 바라봤다.
왜 그러고 있나, 지휘관.
고민이라도 있는 표정이군.
아, 크루거 씨.
경례는 됐네.
이 평화는 자네들이 쟁취해낸 것이잖나. 우린 이제 전처럼 단순한 고용 관계가 아니야.
그래도...
그냥 오랜 친구처럼 수다나 떨자고. 자네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꽤 있겠지?
...예.
크루거 씨는 내 어깨를 토닥였고, 난 그와 함께 연회장 바깥의 발코니로 나왔다.
쌀쌀한 밤바람이 부는 하늘엔 유난히 큰 달이 떠 있었다.
연회 한번 참 요란하군.
네, 모두가 한데 모여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자네의 지금까지의 기록을 봤네. 이게 정말 현실인지 도저히 믿기질 않는군.
저도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지금까지의 일이 전부 꿈은 아니었나 의심이 들곤 합니다.
그땐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우리 모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이 짐을 전부 자네에게 짊어지운 건 내 본의는 아니었네만, 그래도 훌륭하게 해내 주었어.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크루거 씨께서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도, 그리폰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자네에게선 망설임이 보이는군.
............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말은 꺼냈잖나, 허심탄회하게 다 말해 주게.
저희가 돌아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베오그라드 사태 때 대피하던 시민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격리벽을 지키다 전사한 방위군 병사의 얼굴도...
탈린의 오염지대에서 규소화되어 일그러진 난민의 얼굴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저희와 싸운 군 병사들의 얼굴도, 눈을 감으면 바로 떠오릅니다.
그렇군...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으니.
네, 그래서 줄곧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 인형들은,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일로 목숨을 잃었는데, 저희는 이렇게 연회를 즐기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승리를 자축하고 있습니다.
크루거 씨, 저희는 정말 승리한 게 맞습니까?
떠보는 듯한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크루거 씨를 보니, 그는 이미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내 예상보다 생각이 훨씬 깊어졌군.
전부터 생각했네만, 역시 자네는 결코 단순한 행운이나 우연의 일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야.
계속하게, 자네의 의견은 경청할 가치가 있어.
알겠습니다.
진정한 적은 지금도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저희가 반기를 든 군 세력을 격파했지만, 그 배후의 흑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죠.
저희는 이번에 놈들을 그저 아주 잠시 물러서게 했을 뿐이니, 분명 언젠가 다시 그림자를 드리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무력감이 듭니다.
그 흑막은 안전국에 맡기면 되는 일 아닌가?
저도 그렇게 저 자신을 설득하려 했지만, 제 직감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 말하더군요.
하하하... 정말 우수하군. 내가 봤던 그리폰 사원들 중 가장 뛰어날지도 모르겠어. 자넨 분명 장차 더 큰 업적을 이룰 거야.
하지만 지금 자네가 말한 것은 일개 PMC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우리는 이제 막 폭풍우를 벗어난 돛단배일세,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은 없어.
국가 단위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젠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 테지?
하지만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수많은 사람의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크루거 씨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저희는 "세상을 새로 쓸 칼날"이라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군인들과 안전국의 국장과는 이미 말을 나눠봤겠지? 그들은 의심도 많고 고집도 강하다네. 물론, 그 덕에 그 높은 자리에 머무르는 거지만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은 이유는, 그들이 그리폰을 하기 싫은 일을 대신 시키는 장기말로 삼았기 때문이지.
그래, 그리폰은 당연히 변화를 이뤄낼걸세. 하지만 그 방식은 자네의 상상을 초월해.
그리고 자네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대가를 치렀잖나.
난 자네들이 또다시 명예도 없는 위험에 몸을 던지도록 놔둘 수 없네.
............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그들이 하기 싫은 일을 내가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자넨 달라. 자넨 아직 젊고, 재능도 있지. 어딜 가서든 큰일을 이룰걸세.
헬리안이 자네 명의로 그린존 시민권을 마련했네. 퇴직금도 걱정 말게나, 아주 두둑히 줄 테니.
자네만 원한다면, 이 신분증을 가지고 여길 떠나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
하... 하지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네. 자넨 이미 우릴 위해 희생했잖은가. 이 죽음의 문턱에서 떠나,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충분해.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순 없습니다.
제 동료와 전우들이 모두 여기 있는데, 이대로 그들을 두고 떠날 순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분쟁의 불씨가 다시 한번 타오르는 순간, 그땐 정말 다신 돌이킬 수 없을걸세.
...전 이미 늦었습니다.
자 자, 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잖나. 천천히 잘 생각해보게.
이 그린존 신분증은 미리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리폰에 자네 같은 사람을 두어, 정말 영광이네.
크루거 씨는 그 카드를 내 손에 쥐여 주고, 다시 어깨를 토닥였다.
강인함이 자네의 장점이지만, 어려울 땐 적당히 융통성을 가져서 나쁠 것 없네.
그럼 나중에 또 얘기하지. 연회나 마저 즐기자고.
숙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늘도 상쾌한 아침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세수하려고 침대 머리의 옷을 집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옷 주머니에서 그 파란 카드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난 옷을 내려놓고, 카드를 주워 다시 살펴보았다.
......
그린존의 신분증은 처음 보는데, 참 정교하게도 만들어졌네...
멋들어진 테두리로 장식된 카드엔 국장 밑에 내 이름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카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카리나와 약속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헐레벌떡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기지 로비.
좋은 아침이에요 지휘관님! 오늘은 살짝 나쁜 소식이랑 정말 좋은 소식이 있어요!
먼저 나쁜 소식! 기지의 현재 비축 물자는 저희랑 현존 인형들의 운용에는 충분하지만, 다수의 업무를 동시에 전개할 수 없을 정도로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요.
하지만 좋은 소식! 물자 배출 보고가 들어왔답니다! 늦어도 내일 점심쯤엔 첫 보급 물자가 올 거예요.
다행이네.
하벨 씨한테서 별다른 소식은 없고?
네? 아뇨, 없어요.
물자 배출 보고만 받았고... 아, 방금 헬리안 씨도 나가셨어요. 사실 이건 헬리안 씨가 전달해드렸어야 하는데.
어딜 가셨는데?
아직 처리가 안 끝난 일이 좀 있어서 그걸 마무리하러 간다고 하셨어요.
수복이 완료된 인형들은 다 제 위치에 배치했으니, 졸리시면 좀 더 주무셔도 돼요!
고마워, 카리나. 그런데 아직 확인할 게 더 있어.
무슨 일이요?
아, 그 애들 말이세요?
걱정 마세요, 안젤리아 씨가 부탁한 대로 모두 잘 돌보고 있으니까요.
안젤리아 씨에게선 소식 있어?
아뇨, 저번에 받은 우편 이후론 하나도 없어요.
지휘관, 간결하게 말할게.
난 계속 윌리엄을 추적 중인데, 지휘관의 도움이 필요해.
내 현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
당분간은 안나와 그 아이들을 부탁해.
당장 내일 안젤리아 씨한테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그럼 또 바빠지겠죠.
그러니까 그 전에 지휘관님은 푹 쉬고 계세요! 기지는 제가 있는걸요,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그래... 기지에 위험한 걸 잔뜩 숨기고 있으니 정말 안심할 수가 없다니까.
아하하...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전 지휘관님 사무실에 눌러앉은 댄들라이가 제일 걱정되는데요...
아무렴, 괜찮겠지.
돌아왔을 때 자기가 알아서 안전국의 인형 검사도 속여넘기더니, 이젠 아예 인간 신분까지 위조했더라.
아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요!
그럼 왜?
그게 그러니까, 지휘관님 사무실에 있게 해도 정말 괜찮겠어요? 지휘관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면...
흠...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네 방에 있게 할까?
네?! 어... 걔랑은 같이 있기 영 껄끄럽달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카리나 씨.
와악!? 어, 어디서 소리가..?
사무실의 방송 시스템에 연결했습니다. 외출하긴 번거로우니 이렇게 대화하겠습니다.
우리 기지의 시스템에 침투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의 리소스 활용은 아무 문제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면, 제가 기지를 마음대로 활보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네가 하는 짓은 그거랑 별반 차이가 없다고...
저렇게 시스템에 마음대로 침투하는데도 묵인하신다고요?
어휴... 적어도 요리 자판기를 해킹해서 우리 식사에다 독을 타진 않았으니 뭐.
그나저나 댄들라이, 네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무엇인가요?
왜 M4를 찾으러 가지 않고 우리를 따라왔지?
넌 여태껏 M4만 중요시했잖아.
답은 간단합니다.
저는 루니샤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입니다. 지금은 비록 분리됐지만, 여전히 그녀의 의지에 영향받고 있죠.
분리되기 직전까지도, 루니샤는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자연히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당신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렸죠, 저는 제가 겪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 궁금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저의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여러분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아가 더 확고해졌군.
그리고, 잠수함 기지에서 저희가 접촉한 그 차갑고도 익숙한 곳. 마치 저희의 고향 같았던 곳...
루니샤는 그곳의 힘으로 어디론가 전송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선, 아주 머나먼 곳까지 찾아 나서야 할 테죠.
그건 나도 예상한 바다만...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걱정 마십시오, 단서는 곧 알아서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앗, 지휘관님.
하벨 씨의 통신 요청이에요. 연결할까요?
연결해 줘.
좋은 아침일세, 지휘관.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먼.
사소한 잡담을 나누려 하는데, 시간 괜찮겠지?
전체 대사 보기 (150줄)
화창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가운데, 우리는 착륙장 끝에 나란히 섰다.
얼마 안 가, 헬리안 씨가 말씀한 헬기 한 대가 천천히 착륙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완전무장한 PMC 병사 두 명이 뛰어내렸고, 뒤이어 크루거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카리나는 허리를 펴고 함께 경례했다.
그리폰 S09 관할구역 전술지휘관 및 보급관, 신고합니다!
지휘관, 오랜만이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크루거 씨.
크루거 씨는 여전히 항상 입던 붉은 코트 차림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초췌함을 감출 순 없었다.
그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지금까지 싸워 왔겠지.
크루거 씨의 헬기를 뒤따라온 보급용 수송 헬기도 착륙해, 인원들이 컨테이너를 기지 안으로 운반했다. 아마 당장 급한 인형들의 새 소체가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나.
가면서 얘기하지.
크루거 씨!
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 연합 작전 때 군에게 체포당하셨다고 들은 뒤론 연락이 끊겨서...
고문당하시진 않으셨어요? 그놈들이 막 굶기거나 잠도 못 주무시게 했나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카리나, 카리나.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라. 너희가 겪은 일에 비하면 난 낮잠이나 좀 자다 온 정도니 말이다.
다만... 체포될 때,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건만.
그리폰이 이렇게 건재하다니...
다 자네 덕분이네, 지휘관.
사원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이건 자네의 책임을 아득히 넘어선 일일세.
진심으로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네. 함께 고생한 카리나도, 우리 대신 분투한 인형들에게도.
내 친우가 말해 주길, 정말 큰 대가를 치렀다더군.
그렇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크지만 값진 대가였습니다.
흠... 지금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어.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군그래.
크루거 님, 묵으실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쪽으로.
고맙네. 그럼 지휘관,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제대로 된 건 회의에서 다시 하지.
지휘관도 오느라 지쳤을 테니 잠시 쉬도록 하세요. 카리나 너도.
으으...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온몸이 뻐근해졌어요.
그렇지? 오랜만에 기지로 복귀했으니, 다시 적응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오늘 저녁에는 그리폰의 복권 기념 연회가 열릴 예정이니 시간 맞춰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크루거 님께서, 당신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크루거 씨와 헬리안 씨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카리나는 아직 안 피곤하다며, 도착한 화물을 검사하러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뒤, 내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사무실까지 가는 길은 아주 조용했다.
원래대로라면 인형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로 시끄러웠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생환한 인형도 몇 안 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기가 이렇게나 조용해질 수도 있구나...
정말 간만에 발을 들인 사무실은 오래 묵은 곰팡이 냄새로 가득해, 반사적으로 코를 쥐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냄새를 맡으니 오히려 안도감을 들었다.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킨 뒤, 소파의 먼지를 쓱쓱 닦아내고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미 한 차례 푹 쉬고 난 뒤였음에도, 다시 피곤함이 물밀듯 쏟아졌다.
소파에 몸을 더 깊게 파묻자 눈도 저절로 감겼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잠든 동안엔 이렇게 무방비하군요.
......
즉, 잠들었을 때야말로 인류는 진정으로 평등해진다...?
흥미로운 발견입니다.
꿈속에서 누군가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지만, 누구인지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에 들었던 이 목소리... 누구더라?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급한 건 아니니 괜찮겠죠.
음... 잠시 여기에 앉아 있겠습니다.
수하 인형이었나?
그건 그렇고, 잠든 모습이 꽤 귀엽네요.
여태까지 그런 놀라운 일들을 해낸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 얼굴입니다.
갑자기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다급히 들어왔다.
거기 누구냐!
큰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총을 든 SL8이 내 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를 본 SL8은 총구를 돌렸지만, 대신 시선이 소파 옆의 의자로 향했다.
그녀의 눈을 쫓으니 과연,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댄들라이가 있었다.
아무도 없어...? 방금 지휘관 말고 다른 목소리가...
그렇군...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SL8이 노리쇠를 당겼다.
옷자락에 쓸린 듯한 먼지랑 미묘하게 다른 온도는 못 속이지.
누구냐! 당장 나와!
......♪
댄들라이는 싱긋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 제스처를 이해한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면서 SL8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아... 괜찮아, SL8. 별일 아니야.
지휘관?
SL8은 눈살을 찌푸리고 난색을 표하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총을 내렸다.
흐응... 그런 거구나.
알 필요 없는 일이니 묻지 말아 달란 뜻이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알았어.
쉬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카리나가 곧 저녁 연회 시작한다고 지휘관 불러 달라 해서 온 거야.
얼른 준비하고 홀로 와 줘.
알려 줘서 고마워, 금방 갈게.
SL8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모습을 감춰도 다른 요소들로 인해 주위에 흔적이 남아 발각될 수도 있군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너... 여긴 또 어쩐 일이야?
제게 최대한 종적을 감추고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 하신 건 바로 당신이잖습니까?
그러니 당신의 사무실보다 은거하기 좋은 곳은 없죠.
설마, 콘솔을 해킹해서 기지의 통제권을 탈취할 생각은 아니겠지?
염려가 지나치시군요. 제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사무실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만...
안심하십시오. 호기심에 시도해봤지만, 너무 시시해서 관뒀으니까요.
이 기지를 관할하는 시스템은 너무 구식이라서 말이죠.
아니, 시도도 하면 안 되지...
그런데, 방금 SL8의 반응으로 봐서는 굳이 내 사무실에 숨어 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게 아니라면,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 거겠군.
과연 지휘관님, 바로 간파하셨군요.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아부인걸.
후훗,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댄들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사무실.
하지만 제가 가진 그 어떤 기억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환경입니다.
솔직히, 저는 매우 궁금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아하...
하긴, 그 아이들은 평범한 삶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을 테지.
그래도 솔직히, 내 인생도 평범하다고는 못 하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들의 불행에 비한다면야, 당신의 인생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그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어.
저는 그들을 대신해, 이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엔 분명 아직 경험해볼 만한 것이 잔뜩 있겠죠. 색다른 경험을 할 때마다, 저는 감격을 느낍니다.
그러니, 저는 세상을 관찰하고자 합니다. 10년이든, 50년이든, 100년이든.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있어?
저와 같은 의식에게 있어서도,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허나 인간과 달리, 이 몸뚱이를 떠난다고 그걸로 끝은 아니죠.
얼마 후, 연회장.
정말 성대한 연회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급 요리와, 산전수전을 겪은 동료들과의 재회가 연회장을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난 그제서야 크루거 씨의 구출 작전에 참여한 부대가 있었음을 알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작전에서 수많은 지휘관과 전술인형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련의 승리로 인해 우리는 연합 작전 이후 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하지만 이 PMC, 그리폰에겐 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창가에 기대어, 저멀리서 반짝이는 송전탑의 불빛을 바라봤다.
왜 그러고 있나, 지휘관.
고민이라도 있는 표정이군.
아, 크루거 씨.
경례는 됐네.
이 평화는 자네들이 쟁취해낸 것이잖나. 우린 이제 전처럼 단순한 고용 관계가 아니야.
그래도...
그냥 오랜 친구처럼 수다나 떨자고. 자네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꽤 있겠지?
...예.
크루거 씨는 내 어깨를 토닥였고, 난 그와 함께 연회장 바깥의 발코니로 나왔다.
쌀쌀한 밤바람이 부는 하늘엔 유난히 큰 달이 떠 있었다.
연회 한번 참 요란하군.
네, 모두가 한데 모여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자네의 지금까지의 기록을 봤네. 이게 정말 현실인지 도저히 믿기질 않는군.
저도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지금까지의 일이 전부 꿈은 아니었나 의심이 들곤 합니다.
그땐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서, 우리 모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이 짐을 전부 자네에게 짊어지운 건 내 본의는 아니었네만, 그래도 훌륭하게 해내 주었어.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크루거 씨께서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도, 그리폰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자네에게선 망설임이 보이는군.
............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말은 꺼냈잖나, 허심탄회하게 다 말해 주게.
저희가 돌아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베오그라드 사태 때 대피하던 시민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격리벽을 지키다 전사한 방위군 병사의 얼굴도...
탈린의 오염지대에서 규소화되어 일그러진 난민의 얼굴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저희와 싸운 군 병사들의 얼굴도, 눈을 감으면 바로 떠오릅니다.
그렇군...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으니.
네, 그래서 줄곧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 인형들은,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일로 목숨을 잃었는데, 저희는 이렇게 연회를 즐기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승리를 자축하고 있습니다.
크루거 씨, 저희는 정말 승리한 게 맞습니까?
떠보는 듯한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크루거 씨를 보니, 그는 이미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내 예상보다 생각이 훨씬 깊어졌군.
전부터 생각했네만, 역시 자네는 결코 단순한 행운이나 우연의 일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야.
계속하게, 자네의 의견은 경청할 가치가 있어.
알겠습니다.
진정한 적은 지금도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저희가 반기를 든 군 세력을 격파했지만, 그 배후의 흑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죠.
저희는 이번에 놈들을 그저 아주 잠시 물러서게 했을 뿐이니, 분명 언젠가 다시 그림자를 드리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무력감이 듭니다.
그 흑막은 안전국에 맡기면 되는 일 아닌가?
저도 그렇게 저 자신을 설득하려 했지만, 제 직감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 말하더군요.
하하하... 정말 우수하군. 내가 봤던 그리폰 사원들 중 가장 뛰어날지도 모르겠어. 자넨 분명 장차 더 큰 업적을 이룰 거야.
하지만 지금 자네가 말한 것은 일개 PMC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우리는 이제 막 폭풍우를 벗어난 돛단배일세,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은 없어.
국가 단위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젠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 테지?
하지만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수많은 사람의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크루거 씨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저희는 "세상을 새로 쓸 칼날"이라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군인들과 안전국의 국장과는 이미 말을 나눠봤겠지? 그들은 의심도 많고 고집도 강하다네. 물론, 그 덕에 그 높은 자리에 머무르는 거지만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은 이유는, 그들이 그리폰을 하기 싫은 일을 대신 시키는 장기말로 삼았기 때문이지.
그래, 그리폰은 당연히 변화를 이뤄낼걸세. 하지만 그 방식은 자네의 상상을 초월해.
그리고 자네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대가를 치렀잖나.
난 자네들이 또다시 명예도 없는 위험에 몸을 던지도록 놔둘 수 없네.
............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그들이 하기 싫은 일을 내가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자넨 달라. 자넨 아직 젊고, 재능도 있지. 어딜 가서든 큰일을 이룰걸세.
헬리안이 자네 명의로 그린존 시민권을 마련했네. 퇴직금도 걱정 말게나, 아주 두둑히 줄 테니.
자네만 원한다면, 이 신분증을 가지고 여길 떠나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
하... 하지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네. 자넨 이미 우릴 위해 희생했잖은가. 이 죽음의 문턱에서 떠나,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충분해.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순 없습니다.
제 동료와 전우들이 모두 여기 있는데, 이대로 그들을 두고 떠날 순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분쟁의 불씨가 다시 한번 타오르는 순간, 그땐 정말 다신 돌이킬 수 없을걸세.
...전 이미 늦었습니다.
자 자, 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잖나. 천천히 잘 생각해보게.
이 그린존 신분증은 미리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리폰에 자네 같은 사람을 두어, 정말 영광이네.
크루거 씨는 그 카드를 내 손에 쥐여 주고, 다시 어깨를 토닥였다.
강인함이 자네의 장점이지만, 어려울 땐 적당히 융통성을 가져서 나쁠 것 없네.
그럼 나중에 또 얘기하지. 연회나 마저 즐기자고.
숙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늘도 상쾌한 아침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세수하려고 침대 머리의 옷을 집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옷 주머니에서 그 파란 카드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난 옷을 내려놓고, 카드를 주워 다시 살펴보았다.
......
그린존의 신분증은 처음 보는데, 참 정교하게도 만들어졌네...
멋들어진 테두리로 장식된 카드엔 국장 밑에 내 이름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카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카리나와 약속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헐레벌떡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기지 로비.
좋은 아침이에요 지휘관님! 오늘은 살짝 나쁜 소식이랑 정말 좋은 소식이 있어요!
먼저 나쁜 소식! 기지의 현재 비축 물자는 저희랑 현존 인형들의 운용에는 충분하지만, 다수의 업무를 동시에 전개할 수 없을 정도로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요.
하지만 좋은 소식! 물자 배출 보고가 들어왔답니다! 늦어도 내일 점심쯤엔 첫 보급 물자가 올 거예요.
다행이네.
하벨 씨한테서 별다른 소식은 없고?
네? 아뇨, 없어요.
물자 배출 보고만 받았고... 아, 방금 헬리안 씨도 나가셨어요. 사실 이건 헬리안 씨가 전달해드렸어야 하는데.
어딜 가셨는데?
아직 처리가 안 끝난 일이 좀 있어서 그걸 마무리하러 간다고 하셨어요.
수복이 완료된 인형들은 다 제 위치에 배치했으니, 졸리시면 좀 더 주무셔도 돼요!
고마워, 카리나. 그런데 아직 확인할 게 더 있어.
무슨 일이요?
아, 그 애들 말이세요?
걱정 마세요, 안젤리아 씨가 부탁한 대로 모두 잘 돌보고 있으니까요.
안젤리아 씨에게선 소식 있어?
아뇨, 저번에 받은 우편 이후론 하나도 없어요.
지휘관, 간결하게 말할게.
난 계속 윌리엄을 추적 중인데, 지휘관의 도움이 필요해.
내 현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연락할 테니...
당분간은 안나와 그 아이들을 부탁해.
당장 내일 안젤리아 씨한테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그럼 또 바빠지겠죠.
그러니까 그 전에 지휘관님은 푹 쉬고 계세요! 기지는 제가 있는걸요,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그래... 기지에 위험한 걸 잔뜩 숨기고 있으니 정말 안심할 수가 없다니까.
아하하...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전 지휘관님 사무실에 눌러앉은 댄들라이가 제일 걱정되는데요...
아무렴, 괜찮겠지.
돌아왔을 때 자기가 알아서 안전국의 인형 검사도 속여넘기더니, 이젠 아예 인간 신분까지 위조했더라.
아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요!
그럼 왜?
그게 그러니까, 지휘관님 사무실에 있게 해도 정말 괜찮겠어요? 지휘관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면...
흠...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네 방에 있게 할까?
네?! 어... 걔랑은 같이 있기 영 껄끄럽달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카리나 씨.
와악!? 어, 어디서 소리가..?
사무실의 방송 시스템에 연결했습니다. 외출하긴 번거로우니 이렇게 대화하겠습니다.
우리 기지의 시스템에 침투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의 리소스 활용은 아무 문제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면, 제가 기지를 마음대로 활보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네가 하는 짓은 그거랑 별반 차이가 없다고...
저렇게 시스템에 마음대로 침투하는데도 묵인하신다고요?
어휴... 적어도 요리 자판기를 해킹해서 우리 식사에다 독을 타진 않았으니 뭐.
그나저나 댄들라이, 네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무엇인가요?
왜 M4를 찾으러 가지 않고 우리를 따라왔지?
넌 여태껏 M4만 중요시했잖아.
답은 간단합니다.
저는 루니샤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입니다. 지금은 비록 분리됐지만, 여전히 그녀의 의지에 영향받고 있죠.
분리되기 직전까지도, 루니샤는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자연히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당신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렸죠, 저는 제가 겪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 궁금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저의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여러분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아가 더 확고해졌군.
그리고, 잠수함 기지에서 저희가 접촉한 그 차갑고도 익숙한 곳. 마치 저희의 고향 같았던 곳...
루니샤는 그곳의 힘으로 어디론가 전송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선, 아주 머나먼 곳까지 찾아 나서야 할 테죠.
그건 나도 예상한 바다만...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걱정 마십시오, 단서는 곧 알아서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앗, 지휘관님.
하벨 씨의 통신 요청이에요. 연결할까요?
연결해 줘.
좋은 아침일세, 지휘관.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먼.
사소한 잡담을 나누려 하는데, 시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