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른다 Ⅰ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장."
독일, 브레멘 교외.
브레멘은 동독의 정화구역 내에 위치한 중요 도시 중 하나다.
3차 대전 이래 브레멘은 다문화라는 지역적 특색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추진한 난민 수용 정책으로 도시에 대량의 난민이 유입됐다.
시 정부는 난민 정책에 따랐으나, 얼마 안 가 인구수 폭증으로 인한 자원 및 공간 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시 외곽에 형성된 난민촌에서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시 정부는 오염지대 난민들의 삶에 대한 갈망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생계 도모를 위해 브레멘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관문 앞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했다.
난민촌에 텐트 자리를 얻기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 현재, 모두가 브레멘의 비호를 받을 수는 없다.
난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경로로 브레멘에 입경하려면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정부가 허가한 통행증이 없다면, 격리 벨트를 통과하더라도 격리벽 너머엔 발도 들일 수 없다.
......
어이쿠, 부딪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먼저 가시죠.
괘, 괜찮습니까?
네.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서.
안젤리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상냥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안젤리아는 심사 관문 앞에서 벌써 15분째 계속 뒷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흉측한 흉터를 감추려고 팔다리를 꽁꽁 싸맨, 누가 봐도 처량한 노숙자 같은 모습이었다.
이 한여름에 어찌 보면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와 비슷한 차림인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두 명이 다인가.)
심사를 받는 행렬은 느리지만 막힘없이 나아갔다.
모두가 나란히 줄을 서진 않았지만, 적어도 규정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됐다. 이곳의 관리원들이 얼마나 숙련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그녀처럼 한가해 보이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무기는 없는 모양인데... 날 얕보는 건가?)
(아니면 숨기기 어려운 물건인가?)
안젤리아는 옆의 난간을 가볍게 툭 쳤다. 맑은 쇳소리는 북적거리는 인파의 소리에 묻혔고,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에게 주목당한 두 사람은 그녀의 암호 같은 움직임에 긴장했고, 애써 관심 없는 척하던 그들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나마 동시에 그녀에게 집중됐다.
안녕.
안젤리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두 사람은 뜨끔하며 시선을 홱 돌렸다.
상대의 의심을 막는 건 미행의 기초로, 가능하면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안젤리아는 그 조건 반사를 노렸다.
상대가 시선을 돌리는 그 순간, 안젤리아는 후드를 눌러쓰고 잽싸게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상대의 시선에서 아주 잠깐 벗어났지만, 노련한 특수요원에겐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제기랄!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그들은 허겁지겁 안젤리아를 뒤쫓았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인파를 헤쳐나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잘 훈련받은 요원에게도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녀석을 놓쳤다!
흩어져서 찾아!
절대 안에 들어가게 해선 안 돼!
관문 앞의 경비병들은 이쪽의 사소한 소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안젤리아에게도, 저 불청객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쓸데없이 일을 크기 벌려선 안 되니 말이다.
모종의 합의라도 본 듯, 그들은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최대한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렇다는 건...)
("내부인"이 아니란 건가?)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저들이 독일 정부나 브레멘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밖에서 기회를 노릴 이유가 없었다.
한편, 안젤리아는 지금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전 세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위험한 곳에 홀로 있다고?
이 자식, 대체 어디로 도망친――
으윽!?
요원 하나가 사람들을 밀치며 모습을 감춘 미행 대상을 찾던 도중, 힘 있는 팔 한 쌍이 순식간의 그의 목을 조였다.
아무런 기척도, 한 치의 살의도 느끼지 못하고 상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윽! 으으윽!
그는 목이 졸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졌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
...쉿.
때마침 이를 목격한 어린아이에게, 안젤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모른 척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아이는 곧장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그 와중 몇 번이고 안젤리아를 돌아보았지만, 이를 알 길이 없는 어머니는 똑바로 따라오라 재촉할 뿐이었다.
아무도 이곳의 소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설령 보았더라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는 일이니까.
다른 요원이 동료가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을 때, 안젤리아는 이미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슈나이더!
빌어먹을... 이 미꾸라지 같은 년이!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소름끼치는 느낌이.
분명 사냥꾼은 자신들일 터였는데, 몇 분만에 입장이 뒤집혀 버렸다.
그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호위도 없이 온 멍청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이야...
젠장! 완전히 얕보였잖아!
하지만 그렇게 욕을 해봤자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지금은 저 인파 속에서 그 빌어먹을 여자를 끄집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 난민들이 방해되는 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도 수라장을 겪을 만큼 겪어본 정예 요원이다. 거리만 좁힌다면, 저딴 여자 한 명쯤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으억!
퍽!
겨우 인파를 뚫고 발견한 안젤리아의 뒷모습을 쫓아 길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묵직한 주먹이 연약한 콧등에 명중했다.
한심하군. 경계심이 뭐 이따위로 부족해? 미행 대상이 반격하리라곤 생각도 안 했어?
이 XX!
남자는 악에 받쳐 주먹을 휘둘렀지만, 안젤리아는 가볍게 피했다.
너흰 누구지? 누가 보냈어?
닥치고 죽어 XXX아!
안젤리아는 상대의 폭언에 응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노려 날렵한 뒤돌려차기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선글라스는 박살나며 날아갔고, 그도 머리를 강타한 충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나가떨어졌다.
안젤리아는 자세를 바로잡고, 상대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놓았다.
후우... 이 두 명이 다인가? 너무 싱거운데.
손 들어.
내가 놓친 게 있나... 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지.
안젤리아가 일어서려던 순간, 권총을 든 세 번째 요원이 뒤에서 나타났다.
총은 안 쓸 줄 알았더니?
우리가 널 얕봤으니 말이지.
얌전히 따라오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다.
그래?
너야말로, 그냥 얌전히 떠나는 편이 좋을걸?
안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헛소리.
헛소린지 아닌지는, 정신 차리면 알겠지.
무――
뻐억!
안젤리아의 주먹질보다 훨씬 더 묵직한 무언가가 남자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린 듯했다.
방아쇠를 당길 새도 없이, 세 번째 남자도 바닥에 쓰러졌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구해 준 동료에게, 안젤리아는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안 죽었지?
힘조절은 했다.
흐음... 환자분의 척추는 아니라는데요?
어머, 아쉬워라. 아직 숨이 붙어있네요.
셋 다 저 뒷골목에 갖다 버려.
저희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어쩔 셈이셨나요?
붙어서 따라오지 말라 하시다니... 지금 당신이 몇 분만 혼자여도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알고는 계시죠?
내가 직접 상대하는 편이 이놈들한테도 나을 거 아니야. 방금처럼 불구는 안 될 테니.
안젤리아는 브레멘에 진입하기 전, 감시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유인한 거다.
우리가 곁에 있었다면 쉽게 걸려들지 않았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걸려든 것도 참 한심하지만 말이에요.
독일의 수준은 겨우 이 정도인가요?
정부에서 보낸 건 아닌 것 같고, 패러데우스의 끄나풀이라기에도 너무 허접해.
미행이랍시고 한 짓이 흔해 빠진 수작이었던 걸 보면, 보나마나 현지 세력 중 하나겠지.
다만 붙인 머릿수가 적은 걸로 봐선, 우리의 위장이 꽤 효과적인 모양이야.
그래서 두 조로 나눈 건가요?
하지만 인원 편성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어머, "안티아" 언니는 제가 파트너라서 불만이세요?
노, 놀리지 마라, "레나테".
너희 둘이 자매로 보이게끔 위장하기 쉬웠으니까.
명심해. 여긴 독일이고, 우린 놀러 온 게 아니야.
이번 임무는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해.
일리 있네요, 그 둘은 평범하게 입어도 눈에 띄니까요.
그나저나, 저희한테 이상한 가명을 지어 준 것도 그래서인가요?
이상해?
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AN-94는 "축복받은 자", 저는 "되살아난 자"라.
참 이해하기 쉬운 작명법이네요.
안에 들어가서도 서로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거 잊지 마.
저희보다 더 친자매 같은 두 사람은 안 기다려도 되나요?
걔넨 알아서 들어올 예정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눈엣가시였던 추적자들을 제거하고 합류한 세 사람은 다시 검문 행렬에 끼어들어, 그대로 브레멘의 위성 도시로 진입했다.
높이 솟은 격리벽 가까이, 척 봐도 대충 지어진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때때로 고개를 들어, 도시를 가로질러 브레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를 구경하는 것이 몇 안되는 낙이었다.
이제 통과했다.
접선책은 어디 있지?
먼저 "루치아"와 "에르빈"과 합류부터 해야지.
브레멘 경내로 들어왔으니 당분간은 안전해.
AK-12와 AK-15 말이죠? 이름이 아직도 영 익숙하지 않네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동독은 처음이다.
이런 곳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선한 광경인가 봐?
내 눈에는 여기나 우리나라나 그게 그거로 보이는데.
음... 나도 그리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관문 앞의 난민들은, 브레멘의 관할구역에 들어온다 해도 대부분 이런 위성 도시에서 살아야겠지.
이 정도만으로도 그들이 꿈꾸던 안락한 삶이야.
옐로우존에서 붕괴 복사에 노출된 채 벌벌 떠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세상 어딜 가나 똑같아.
학식 교류도 좋지만, 그러면 주위의 눈길을 끌지 않을까요?
그보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 둘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집합 장소가 어딘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나요?
아니. 아직 안 와서 안 보이는 거야.
아직 안 왔다고...? 위치도 안 알려줬는데 우리 먼저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
안젤리아의 서류 없이 인형 둘이서 격리 벨트를 통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안티아.
슬슬 때가 됐어.
무슨 때?
안젤리아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그들은 넓은 공터에 서 있었다.
격리 벨트와 위성 도시 사이의 미개발 지역이었다.
참 한적한 곳이네요. 하지만 딱히 길이라고 할만한 것도 안 보여요.
아, 알았다. 땅굴을 팠군요?
땡.
그렇다면...... 아하, 그런 거였어요?
RPK-16은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그래서 조를 이렇게 나눴군요.
그, 그게 무슨 뜻이지?
왔다.
안젤리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까만 점 하나가 저 하늘 끝에서 나타났다.
점은 가까워지면서 점점 비행기의 형체가 되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송 항공기가 되었다.
항공기는 착륙할 기세로 날아왔고, 고도도 낮아져 랜딩 기어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안젤리아는 말없이 계속 그 항공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항공기의 꼬리에서 무언가가 휙 던져지더니, 그대로 낙하했다. 대략 차량만한 크기의 컨테이너였다.
엄청난 속도로 자유 낙하한 컨테이너는 안젤리아 일행에게서 얼마 안 되는 위치에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잡초투성이던 땅에 크레이터가 생길 지경이었다.
도착했어.
...응?!
안젤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컨테이너에 달린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컨테이너의 측면이 열렸고, 안에서 은빛을 내는 두 형체가 굴러 나왔다.
A... 아니 루치아, 괜찮나?!
으으...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
발신기로부터 오차 약 4.75m. 의뢰한 항공대, 솜씨가 대단한걸.
풉... 푸하하하...!
푸흐흡... 죄,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설마 이렇게 올 줄은...
휴우... 그래도 하란다고 그대로 따르다니, 정말 충실한 부하들이네요.
...이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컨테이너 속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있어야 했던 건 괜찮은데...
최소한 낙하산이라도 달아 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한테 사진이라도 찍히면 큰일나. 그리고, 애초에 네가 제안했잖아.
"나랑 AK-15는 위장 잠입은 도저히 무리지."
"도보로 국경을 넘느니, 차라리 비행기를 타는 게 좋을걸?"
나중에 딴소리 할까 봐 녹음도 해뒀지.
아니 그래도 착륙 방식이...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지 뭘.
무기랑 통신 설비는 멀쩡하지?
출발 전에 전부 충격 흡수 상자에 수납해 둬서 손상은 없을 테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컨테이너에 숨었다지만 비행기로도 밀항은 어렵지 않나요?
우리한테 이렇게 편리한 수단을 제공해 주다니,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제 다 모였으니 알려 주세요.
굳이 다시 소개할 필요가 있나?
흐음...? 제 기억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없는데요.
......
격리벽 안쪽.
흐음...? 제 기억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없는데요.
나 참.
오자마자 무시당하다니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안젤리아 일행을 마중 나온 건, 팔디스키에서의 사투 이후 첩보 임무를 마치고 조국으로 귀환한 K였다.
안젤리아가 사용한 동독 정부의 인증을 받은 통행 허가 서류도, 다 K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헛소린 딴 데 가서 하셔.
준비는 어떻게 됐어?
은신처도, 너희의 위장용 신분증도 진작에 다 마련했다.
그런데, 정말 너처럼 남한테 그토록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은 살다살다 처음 보는군.
지금 이 세상에 날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여기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줄을 섰거든.
그리고, 나한테 빚이 있잖아?
귀찮기는, 난 우리가 그래도 파트너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건 다 옛날 얘기고.
그리고, 동독은 우리의 행동에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그럼 네가 잔소리할 것도 없지.
알아. 하지만 나도 내 할일을 해야지.
개인적으로 널 돕는 걸 개의치는 않는다만, 여긴 독일이고 난 네 안전 책임자다.
그러니 상황을 파악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
흥, 굳이 말 안 해 줘도 대충 짐작했으면서.
애당초 무슨 거창한 기밀 임무 같은 걸로 여기 온 것도 아니잖아.
패러데우스의 조사. 서로 일치하는 목적이지.
이쪽에선 이미 조사한 게 있으니, 우리와의 협력이 최선책이지 않나?
난 파트너 따위 필요 없어. 그리고, 네가 만약 윌리엄의 앞잡이면 어떡해?
그럼 넌 진작에 잠수함 기지에서 죽었지.
됐으니까 보자마자 시비 거는 건 그만하고, 새 친구를 소개해 줄 테니 따라와.
K의 안내를 받으며, 안젤리아 일행은 격리벽을 빠져나와 브레멘 시내로 들어왔다.
그들 앞의 도로에는 검은 리무진이 정차 중이었다. 아무래도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차 옆의 용모가 수려한 여성이, K를 보자마자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 이쪽이요 이쪽!
새 친구라는 게 저 사람이야?
저분한테까지 괜한 소리 말도록.
오랜만이에요, 케인 씨.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다 제 업무인걸요.
소개드리죠, 이쪽이 안젤리아입니다.
오! 안녕하세요 안젤리아 씨! 사탕 드실래요?
그녀는 반가워하며 핸드백에서 사탕을 꺼내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안젤리아는 묵묵히 사탕을 받았지만, 입에 넣지는 않았다.
울릭 주석님의 비서, 몰리도 포거트입니다.
몰리도라 불러 주세요.
울릭...?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던 그 길다 울릭?
그래, 그분이다.
그 사람은 또 이 일이랑 무슨 관계야?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이렇게 브레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 덕이다.
은신처로 가기 전에 주석님을 뵙도록.
그분이 사전에 요청하셨다.
그렇게 됐어요. 자 안젤리아 씨, 어서 타세요.
긴장하실 것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만나자는 거니까요!
......
다는 못 탈 거 같은데.
네, 인형분들은 우선 K 씨와 함께 은신처로 가 주시면 돼요.
주석님께선 안젤리아 씨와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하셨거든요.
그러죠.
레나테, 에르빈이랑 안티아 데리고 먼저 가 있어.
루치아, 타.
네? 주석님께선――
그렇게 됐으니 사이좋게 지내요, 몰리도 씨.
아...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함께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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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브레멘 교외.
브레멘은 동독의 정화구역 내에 위치한 중요 도시 중 하나다.
3차 대전 이래 브레멘은 다문화라는 지역적 특색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추진한 난민 수용 정책으로 도시에 대량의 난민이 유입됐다.
시 정부는 난민 정책에 따랐으나, 얼마 안 가 인구수 폭증으로 인한 자원 및 공간 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시 외곽에 형성된 난민촌에서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시 정부는 오염지대 난민들의 삶에 대한 갈망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생계 도모를 위해 브레멘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관문 앞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했다.
난민촌에 텐트 자리를 얻기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 현재, 모두가 브레멘의 비호를 받을 수는 없다.
난민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경로로 브레멘에 입경하려면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정부가 허가한 통행증이 없다면, 격리 벨트를 통과하더라도 격리벽 너머엔 발도 들일 수 없다.
......
어이쿠, 부딪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먼저 가시죠.
괘, 괜찮습니까?
네.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서.
안젤리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상냥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안젤리아는 심사 관문 앞에서 벌써 15분째 계속 뒷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흉측한 흉터를 감추려고 팔다리를 꽁꽁 싸맨, 누가 봐도 처량한 노숙자 같은 모습이었다.
이 한여름에 어찌 보면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와 비슷한 차림인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두 명이 다인가.)
심사를 받는 행렬은 느리지만 막힘없이 나아갔다.
모두가 나란히 줄을 서진 않았지만, 적어도 규정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됐다. 이곳의 관리원들이 얼마나 숙련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그녀처럼 한가해 보이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무기는 없는 모양인데... 날 얕보는 건가?)
(아니면 숨기기 어려운 물건인가?)
안젤리아는 옆의 난간을 가볍게 툭 쳤다. 맑은 쇳소리는 북적거리는 인파의 소리에 묻혔고,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에게 주목당한 두 사람은 그녀의 암호 같은 움직임에 긴장했고, 애써 관심 없는 척하던 그들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나마 동시에 그녀에게 집중됐다.
안녕.
안젤리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두 사람은 뜨끔하며 시선을 홱 돌렸다.
상대의 의심을 막는 건 미행의 기초로, 가능하면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안젤리아는 그 조건 반사를 노렸다.
상대가 시선을 돌리는 그 순간, 안젤리아는 후드를 눌러쓰고 잽싸게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상대의 시선에서 아주 잠깐 벗어났지만, 노련한 특수요원에겐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제기랄!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그들은 허겁지겁 안젤리아를 뒤쫓았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인파를 헤쳐나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잘 훈련받은 요원에게도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녀석을 놓쳤다!
흩어져서 찾아!
절대 안에 들어가게 해선 안 돼!
관문 앞의 경비병들은 이쪽의 사소한 소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안젤리아에게도, 저 불청객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쓸데없이 일을 크기 벌려선 안 되니 말이다.
모종의 합의라도 본 듯, 그들은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최대한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렇다는 건...)
("내부인"이 아니란 건가?)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저들이 독일 정부나 브레멘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밖에서 기회를 노릴 이유가 없었다.
한편, 안젤리아는 지금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전 세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위험한 곳에 홀로 있다고?
이 자식, 대체 어디로 도망친――
으윽!?
요원 하나가 사람들을 밀치며 모습을 감춘 미행 대상을 찾던 도중, 힘 있는 팔 한 쌍이 순식간의 그의 목을 조였다.
아무런 기척도, 한 치의 살의도 느끼지 못하고 상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윽! 으으윽!
그는 목이 졸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졌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
...쉿.
때마침 이를 목격한 어린아이에게, 안젤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모른 척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아이는 곧장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그 와중 몇 번이고 안젤리아를 돌아보았지만, 이를 알 길이 없는 어머니는 똑바로 따라오라 재촉할 뿐이었다.
아무도 이곳의 소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설령 보았더라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는 일이니까.
다른 요원이 동료가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을 때, 안젤리아는 이미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슈나이더!
빌어먹을... 이 미꾸라지 같은 년이!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소름끼치는 느낌이.
분명 사냥꾼은 자신들일 터였는데, 몇 분만에 입장이 뒤집혀 버렸다.
그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호위도 없이 온 멍청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이야...
젠장! 완전히 얕보였잖아!
하지만 그렇게 욕을 해봤자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지금은 저 인파 속에서 그 빌어먹을 여자를 끄집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 난민들이 방해되는 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도 수라장을 겪을 만큼 겪어본 정예 요원이다. 거리만 좁힌다면, 저딴 여자 한 명쯤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으억!
퍽!
겨우 인파를 뚫고 발견한 안젤리아의 뒷모습을 쫓아 길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묵직한 주먹이 연약한 콧등에 명중했다.
한심하군. 경계심이 뭐 이따위로 부족해? 미행 대상이 반격하리라곤 생각도 안 했어?
이 XX!
남자는 악에 받쳐 주먹을 휘둘렀지만, 안젤리아는 가볍게 피했다.
너흰 누구지? 누가 보냈어?
닥치고 죽어 XXX아!
안젤리아는 상대의 폭언에 응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노려 날렵한 뒤돌려차기로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선글라스는 박살나며 날아갔고, 그도 머리를 강타한 충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나가떨어졌다.
안젤리아는 자세를 바로잡고, 상대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놓았다.
후우... 이 두 명이 다인가? 너무 싱거운데.
손 들어.
내가 놓친 게 있나... 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지.
안젤리아가 일어서려던 순간, 권총을 든 세 번째 요원이 뒤에서 나타났다.
총은 안 쓸 줄 알았더니?
우리가 널 얕봤으니 말이지.
얌전히 따라오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다.
그래?
너야말로, 그냥 얌전히 떠나는 편이 좋을걸?
안젤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응수했다.
헛소리.
헛소린지 아닌지는, 정신 차리면 알겠지.
무――
뻐억!
안젤리아의 주먹질보다 훨씬 더 묵직한 무언가가 남자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린 듯했다.
방아쇠를 당길 새도 없이, 세 번째 남자도 바닥에 쓰러졌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구해 준 동료에게, 안젤리아는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안 죽었지?
힘조절은 했다.
흐음... 환자분의 척추는 아니라는데요?
어머, 아쉬워라. 아직 숨이 붙어있네요.
셋 다 저 뒷골목에 갖다 버려.
저희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어쩔 셈이셨나요?
붙어서 따라오지 말라 하시다니... 지금 당신이 몇 분만 혼자여도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알고는 계시죠?
내가 직접 상대하는 편이 이놈들한테도 나을 거 아니야. 방금처럼 불구는 안 될 테니.
안젤리아는 브레멘에 진입하기 전, 감시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유인한 거다.
우리가 곁에 있었다면 쉽게 걸려들지 않았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걸려든 것도 참 한심하지만 말이에요.
독일의 수준은 겨우 이 정도인가요?
정부에서 보낸 건 아닌 것 같고, 패러데우스의 끄나풀이라기에도 너무 허접해.
미행이랍시고 한 짓이 흔해 빠진 수작이었던 걸 보면, 보나마나 현지 세력 중 하나겠지.
다만 붙인 머릿수가 적은 걸로 봐선, 우리의 위장이 꽤 효과적인 모양이야.
그래서 두 조로 나눈 건가요?
하지만 인원 편성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어머, "안티아" 언니는 제가 파트너라서 불만이세요?
노, 놀리지 마라, "레나테".
너희 둘이 자매로 보이게끔 위장하기 쉬웠으니까.
명심해. 여긴 독일이고, 우린 놀러 온 게 아니야.
이번 임무는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해.
일리 있네요, 그 둘은 평범하게 입어도 눈에 띄니까요.
그나저나, 저희한테 이상한 가명을 지어 준 것도 그래서인가요?
이상해?
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AN-94는 "축복받은 자", 저는 "되살아난 자"라.
참 이해하기 쉬운 작명법이네요.
안에 들어가서도 서로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거 잊지 마.
저희보다 더 친자매 같은 두 사람은 안 기다려도 되나요?
걔넨 알아서 들어올 예정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눈엣가시였던 추적자들을 제거하고 합류한 세 사람은 다시 검문 행렬에 끼어들어, 그대로 브레멘의 위성 도시로 진입했다.
높이 솟은 격리벽 가까이, 척 봐도 대충 지어진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때때로 고개를 들어, 도시를 가로질러 브레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를 구경하는 것이 몇 안되는 낙이었다.
이제 통과했다.
접선책은 어디 있지?
먼저 "루치아"와 "에르빈"과 합류부터 해야지.
브레멘 경내로 들어왔으니 당분간은 안전해.
AK-12와 AK-15 말이죠? 이름이 아직도 영 익숙하지 않네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동독은 처음이다.
이런 곳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선한 광경인가 봐?
내 눈에는 여기나 우리나라나 그게 그거로 보이는데.
음... 나도 그리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관문 앞의 난민들은, 브레멘의 관할구역에 들어온다 해도 대부분 이런 위성 도시에서 살아야겠지.
이 정도만으로도 그들이 꿈꾸던 안락한 삶이야.
옐로우존에서 붕괴 복사에 노출된 채 벌벌 떠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세상 어딜 가나 똑같아.
학식 교류도 좋지만, 그러면 주위의 눈길을 끌지 않을까요?
그보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 둘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집합 장소가 어딘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나요?
아니. 아직 안 와서 안 보이는 거야.
아직 안 왔다고...? 위치도 안 알려줬는데 우리 먼저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
안젤리아의 서류 없이 인형 둘이서 격리 벨트를 통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안티아.
슬슬 때가 됐어.
무슨 때?
안젤리아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그들은 넓은 공터에 서 있었다.
격리 벨트와 위성 도시 사이의 미개발 지역이었다.
참 한적한 곳이네요. 하지만 딱히 길이라고 할만한 것도 안 보여요.
아, 알았다. 땅굴을 팠군요?
땡.
그렇다면...... 아하, 그런 거였어요?
RPK-16은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그래서 조를 이렇게 나눴군요.
그, 그게 무슨 뜻이지?
왔다.
안젤리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까만 점 하나가 저 하늘 끝에서 나타났다.
점은 가까워지면서 점점 비행기의 형체가 되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송 항공기가 되었다.
항공기는 착륙할 기세로 날아왔고, 고도도 낮아져 랜딩 기어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안젤리아는 말없이 계속 그 항공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항공기의 꼬리에서 무언가가 휙 던져지더니, 그대로 낙하했다. 대략 차량만한 크기의 컨테이너였다.
엄청난 속도로 자유 낙하한 컨테이너는 안젤리아 일행에게서 얼마 안 되는 위치에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잡초투성이던 땅에 크레이터가 생길 지경이었다.
도착했어.
...응?!
안젤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컨테이너에 달린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컨테이너의 측면이 열렸고, 안에서 은빛을 내는 두 형체가 굴러 나왔다.
A... 아니 루치아, 괜찮나?!
으으...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
발신기로부터 오차 약 4.75m. 의뢰한 항공대, 솜씨가 대단한걸.
풉... 푸하하하...!
푸흐흡... 죄,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설마 이렇게 올 줄은...
휴우... 그래도 하란다고 그대로 따르다니, 정말 충실한 부하들이네요.
...이게 훨씬 효율적이니까.
컨테이너 속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있어야 했던 건 괜찮은데...
최소한 낙하산이라도 달아 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한테 사진이라도 찍히면 큰일나. 그리고, 애초에 네가 제안했잖아.
"나랑 AK-15는 위장 잠입은 도저히 무리지."
"도보로 국경을 넘느니, 차라리 비행기를 타는 게 좋을걸?"
나중에 딴소리 할까 봐 녹음도 해뒀지.
아니 그래도 착륙 방식이...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지 뭘.
무기랑 통신 설비는 멀쩡하지?
출발 전에 전부 충격 흡수 상자에 수납해 둬서 손상은 없을 테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컨테이너에 숨었다지만 비행기로도 밀항은 어렵지 않나요?
우리한테 이렇게 편리한 수단을 제공해 주다니,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제 다 모였으니 알려 주세요.
굳이 다시 소개할 필요가 있나?
흐음...? 제 기억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없는데요.
......
격리벽 안쪽.
흐음...? 제 기억에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없는데요.
나 참.
오자마자 무시당하다니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안젤리아 일행을 마중 나온 건, 팔디스키에서의 사투 이후 첩보 임무를 마치고 조국으로 귀환한 K였다.
안젤리아가 사용한 동독 정부의 인증을 받은 통행 허가 서류도, 다 K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헛소린 딴 데 가서 하셔.
준비는 어떻게 됐어?
은신처도, 너희의 위장용 신분증도 진작에 다 마련했다.
그런데, 정말 너처럼 남한테 그토록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은 살다살다 처음 보는군.
지금 이 세상에 날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여기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줄을 섰거든.
그리고, 나한테 빚이 있잖아?
귀찮기는, 난 우리가 그래도 파트너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건 다 옛날 얘기고.
그리고, 동독은 우리의 행동에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그럼 네가 잔소리할 것도 없지.
알아. 하지만 나도 내 할일을 해야지.
개인적으로 널 돕는 걸 개의치는 않는다만, 여긴 독일이고 난 네 안전 책임자다.
그러니 상황을 파악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
흥, 굳이 말 안 해 줘도 대충 짐작했으면서.
애당초 무슨 거창한 기밀 임무 같은 걸로 여기 온 것도 아니잖아.
패러데우스의 조사. 서로 일치하는 목적이지.
이쪽에선 이미 조사한 게 있으니, 우리와의 협력이 최선책이지 않나?
난 파트너 따위 필요 없어. 그리고, 네가 만약 윌리엄의 앞잡이면 어떡해?
그럼 넌 진작에 잠수함 기지에서 죽었지.
됐으니까 보자마자 시비 거는 건 그만하고, 새 친구를 소개해 줄 테니 따라와.
K의 안내를 받으며, 안젤리아 일행은 격리벽을 빠져나와 브레멘 시내로 들어왔다.
그들 앞의 도로에는 검은 리무진이 정차 중이었다. 아무래도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차 옆의 용모가 수려한 여성이, K를 보자마자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아! 이쪽이요 이쪽!
새 친구라는 게 저 사람이야?
저분한테까지 괜한 소리 말도록.
오랜만이에요, 케인 씨.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다 제 업무인걸요.
소개드리죠, 이쪽이 안젤리아입니다.
오! 안녕하세요 안젤리아 씨! 사탕 드실래요?
그녀는 반가워하며 핸드백에서 사탕을 꺼내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안젤리아는 묵묵히 사탕을 받았지만, 입에 넣지는 않았다.
울릭 주석님의 비서, 몰리도 포거트입니다.
몰리도라 불러 주세요.
울릭...?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던 그 길다 울릭?
그래, 그분이다.
그 사람은 또 이 일이랑 무슨 관계야?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이렇게 브레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분 덕이다.
은신처로 가기 전에 주석님을 뵙도록.
그분이 사전에 요청하셨다.
그렇게 됐어요. 자 안젤리아 씨, 어서 타세요.
긴장하실 것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만나자는 거니까요!
......
다는 못 탈 거 같은데.
네, 인형분들은 우선 K 씨와 함께 은신처로 가 주시면 돼요.
주석님께선 안젤리아 씨와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하셨거든요.
그러죠.
레나테, 에르빈이랑 안티아 데리고 먼저 가 있어.
루치아, 타.
네? 주석님께선――
그렇게 됐으니 사이좋게 지내요, 몰리도 씨.
아...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함께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