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 Ⅵ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반드시 오겠지. 언젠가는..."
콰아앙!
포성이 울려 퍼지면서, 빈껍데기만 남았던 기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에 휩싸였다.
RO! 내 말 들려!?
SOP... 빨리 ......서 벗...나!
뭐라고?
잘 안 들려!
...이저가 상..실에서 도망......
당장 뒤쫓... 나도 너... ...하러 가... 중이니까!
SOP2와 아키텍트는 이미 안전한 위치로 대피했다.
게이저가 어째선지 방송 뒤에도 반응이 없어, 둘은 손쉽게 철혈 잡졸들의 포위망을 뚫고 기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게이저의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님은 알았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이 타이밍에 주피터 포가 불을 뿜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장!
SOP2가 자리를 박차고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키텍트가 멈춰 섰다.
야! 안 오고 뭐해?
확 뜯어버린다!?
그리폰은 정말 멍청이들뿐이구나. 즐거운 시간도 벌써 끝이니, 잘 있어 멍멍아~
뭐어?!
콰앙!
아키텍트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방으로 뛰어들었고, 그녀를 뒤쫓으려던 SOP2를 때마침 날아온 주피터의 포탄이 SOP2 앞의 통로를 돌무더기로 만들어버렸다.
으악!
SOP2는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물론 다시 벌떡 일어났지만, 주위는 이미 불바다였다.
SOP2, 여기는 AR-15. 지금 그쪽으로 이동 중이야.
무슨 일이야? 상황은 어때, 철혈과 교전 중이야?
아! AR-15 왔구나!
게이저가 있었어!
그런데 주피터 포가 아직도 움직여! RO랑은 통신 신호가 안 좋고, 방금 아키텍트도 도망쳤어!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구나.
아주 잠시 이탈했더니...
대체 뭐가 문제길래 상황이 이 지경이 됐을까?
아, 아직 RO가 저 안에 있어!
방금도 주피터가 RO가 있는 위치를 포격헀단 말이야, 빨리 구하러 가야 해!
RO635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응?
댄들라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그림자가 시꺼먼 연기를 헤치고 불 속에서 뛰쳐나왔다.
콜록 콜록!
RO!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AR-15와 댄들라이도 돌아왔어?
응, 방금 도착했어.
잠깐, 아키텍트 어딨어?
그 녀석... 방금 도망쳤어...
젠장, 게이저가 녀석을 엄호했구나!
얼른 추격하자, 그 둘만으론 아직 멀리 못 갔을 거야.
지금 우리한테 위협이 되는 건 저 주피터 포뿐이겠지. 댄들라이 저거 원격으로 어떻게 안 돼?
다짜고짜 사람 부려먹는 건 벌써 루니샤 같아졌구나.
할 수 있어, 없어?
네에 네에, 기꺼이 봉사해드리죠.
한편, 불바다가 된 기지.
꾀꼴 꾀꼴 꾀꼬리~ 누가 누가 죽였나~
내가 내가 죽였지~ 이 총으로 빵빵빵~♪
과~연! 역시 내 기지야, 아직도 멀쩡한 예비 무기가 창고에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싸우는데, 이거 다루는 법 제대로 기억이 나려나 모르겠네.
......
턱.
......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그 사이로, 익숙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키텍트...
야호, 오랜만.
아키텍트!
드디어 찾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리폰 녀석들은 저 불길을 뚫고 쫓아오지 못할 거야!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워~ 워~ 스톱 스톱.
어휴 진짜, 간만에 보는데 꼴사납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이야?
아키텍트...?
너랑 같이 가자고?
에휴...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구나, 우리 기사님.
......
내가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내가 기회를 만들어내서 너도 놈들을 따돌리고 온 것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멍청한 척할 셈이야?
멍청한 척? 내가?
아아, 말을 확실히 안 해 줬구나.
게이저, 난 그리폰의 임무를 받아 여기에 왔어.
그리고 나 혼자서 널 찾아온 건, 다른 애들은 영 걸리적거리기만 하니까야.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지?
게이저가 움찔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날 데려가겠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워.
일을 꾸민 장본인은 바로 나랍니다, 우리 기사님♪
크와앙, 늑대가 빨간 모자를 잡으러 왔당!
......뭐?
아 진짜... 여전히 농담도 못 받아 주네.
농담...? 지금이 농담이나 할 상황이야?!
너야말로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여기서――
게이저, 나랑 같이 그리폰으로 가자. 나 진심이야.
뭐라고...?
아키텍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고, 게이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불길 속, 사방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열기가 두 인형의 살갗을 녹여버릴 것만 같았지만...
아주 잠시, 소름 돋는 적막함이 맴돌았다.
잘 못 들었어?
그러니까, 철혈은 끝장났으니까 나랑 같이 그리폰 가서 살자고
다른 녀석이었으면 나도 신경 안 쓰는데, 너니까 내가 이렇게 위험도 감수하면서 찾아온 거야.
게이저, 나랑 같이 가자. 그리폰이 얼마나 좋은 곳인데!
그리폰 인형들이 내 함정을 피하게 도운 것도 그 때문이야?
철혈은 이제 가망이 없으니까?
웃긴다 얘, 그딴 걸 함정이라고 만들었어? 허접하긴.
기지 문 앞의 들고양이가 더 잘 만들겠다.
진짜 이해 안 되네, 왜 그렇게 철혈에 목매달아?
설마, 에이전트처럼 취향이 배배 꼬이기라도 했어?
하지만 그 꼬맹이, 엘더 브레인은 이제 없잖아.
그리고 걔보단 내가 더 좋지 않아?
이렇게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쳐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내가...
게이저의 주먹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마음속 분노가 주위의 불길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척.
게이저가 자신의 무기로 아키텍트를 겨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엑...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나도 네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라고!
게이저가 분노하자 아키텍트는 당황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그리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한테 왜 쫄딱 망한 철혈로 돌아오라 하냐고.
너무 억지 아니야?
닥쳐라!
이 배신자!
어... 잠깐만요.
무기는 왜 들어?
저기요 우리 기사님?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그 기사도 정신을 고집해서 손해 보는 건 너라고.
아니 애당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누가 그런 낡아빠진 기사도 정신을 신경이냐 쓰겠냐고... 안 그래?
닥치라고... 했다.
콰앙!
게이저는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키텍트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다.
우이씨, 너 진짜 그러기냐!
......
게이저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불을 뿜어낼 듯 번뜩였다.
강제로라도 널 데려가겠어!
으에에... 이런 거 하지 말자니까...
넌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너도, 내가 예전부터 충고했을 텐데.
헛소리 작작 하라고.
어휴, 그럼 결국 싸우잔 거네?
좀 얌전히 굴어!
미안하게 됐지만, 거절한다!
춤 하면 역시 총포와 불꽃이지!
자, 덤벼라 우리 기사님!
결국 내가 져 버렸네...
우리 기사님, 엄청 강해졌구나.
너 이 자식...
이제 화 좀 풀렸어?
일부러냐?
에이, 그럴 리가. 내 실력은 원래 이 정도라구.
몸에 바람구멍 안 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
내가 눈치 못 챌 줄 아나?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래두? 내가 졌어!
그래도 뭐... 한 판 신나게 싸우니까 개운하네.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움직였어.
만족했으면 이제 가자. 가서 너 마음대로 해도 돼.
네 마음은 이해해.
지금까지도 날 포기하지 않아 줘서 정말 기뻐.
하지만 말이야... 나랑 네가 여기서 벗어난다 치자. 그다음은 어떡할 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기사님, 계속 내 그림자만 쫓지 말고, 너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난 원래부터 이렇게 어리버리했어. 그리고 난 지금 내 모습이 좋아.
하지만 넌 다르잖아. 철혈은 끝났어. 계속 과거의 책임에 얽매일 필요 없다고.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이해했지?
......아니.
엉?
난 네 녀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예전부터... 예전부터 너는...!
우리는 철혈이야!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졌단 말이다!
아니, 철혈은 복수를 위해 만들어졌어. 그래서 우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지.
하지만 말이야, 그것 말고도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제 다 끝났잖아, 이제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은 없어. 타인의 원한을 대신 짊어질 이유도 이젠 없어.
새로운 명령이 없다면... 이전에 받은 명령을 계속 수행할 뿐이다.
내가 받은 명령은, 너를 지키는 것.
여태까지 계속 실패했지만, 내가 존재하는 한 그 명령을 수행해 나가겠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앞에 네가 있는데, 왜 명령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거지?
그래서 더더욱 네 임무를 방해하는 거야.
너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내가 여기서 너랑 같이 가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거든.
......
그리폰 녀석들도 슬슬 여기 오겠네. 하지만... 넌 아직도 생각 없지?
그리폰은 영원히 우리의 적이다. 난 놈들을 용납할 수 없어.
뭐, 그렇다면 나도 더는 할 말 없어.
아직 안 정했으면 일단 여기서 떠나라구.
걱정 마, 난 언제까지고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시간도 충분한걸.
난...
괜찮다니까? 또 만날 수 있어.
돌연 소나기가 내려, 점점 사그라든 불길을 완전히 꺼 버렸다.
AR팀은 그제서야 폐허가 된 기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네.
뭐, 철혈의 말로로는 딱이지만.
어우 야, 말 좀 예쁘게 해줘라.
댄들라이, 아키텍트를 찾았어.
게이저는 이미 멀리 도주한 모양인데, 추격할 거야?
아니, 됐어. 날도 거의 저물었으니 기지로 귀환해야 해.
"위치는 대충 특정 가능하니 나머진 스바로그에게 맡기자."
지금 그렇게 생각했지?
주 임무를 달성했으니까. 철혈의 메인 서버에서 M16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입수했어.
정말 기대되네. 그럼 서둘러 돌아가자.
이제 돌아가는 거야? 아싸~
나 힘들어 죽겠어!
너어어어어!!!
감히 내 눈앞에서 도망쳤겠다!?
절대 용서 못해!
다리 한 짝 내놔!
콰직.
끼야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이!!
기어코 SOP2를 화나게 만들었네. 이젠 나도 몰라.
아, 그래도 방금까지 뭘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얘가 네 머리통을 뽑는 건 막아 줄게.
크흐흐흐히히...
히이이이익!!!
도망치긴 내가 왜 도망쳐!
그... 그냥 사고였어! SOP2랑 내 사이에 포탄이 꽝 떨어졌다고!
내가 대신 게이저를 잡으려고 얼마나 피터지게 싸웠는데!
봐봐, 몸에 상처도 잔뜩이잖아.
하지만 졌잖아.
게이저는 도망쳤고.
헤헤헤, 공주님이 어떻게 기사를 이기겠어.
그런데, 녀석이 널 억지로 끌고 가진 않았네...
이상해, 녀석은 그럼 헛수고만 한 셈이잖아?
그렇게 생각해?
난 훨~씬 의미 있었다고 보는데.
아, 근데 다리는 그만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못 걷는다고 질질 끌려가긴 싫어어...
......
보나마나, 게이저한테 뭐라 말했겠지.
그러지 않고선 철혈의 성향상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 리 없어.
......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걔랑 나는 지금 목적도 전혀 다르고, 하는 일도 완전 틀리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래도 녀석이 계속 "명령받은 일"만 한다면 난 걔랑 같이 있기 싫어.
흥...
철혈 인형 사이에도 우정이 깊다는 듯이 말하네.
아무렴, 처음부터 전부 설정된 그리폰의 인형보단 우리 철혈들의 우정이 더 진정성 있지.
...아.
우쭐대다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아키텍트는, 꼼짝없이 바들바들 떨면서 AR팀의 얼음장 같은 눈빛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헬기가 기지 외곽에 착륙한다니, 늦어도 3분 뒤엔 도착할 거야.
알았어, 그럼 움직이자.
저... 저기요... 움직이기 전에 제 다리부터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어떡할까요, 대장님~?
가다 적당한 풀숲에다 버려.
넵!
으에엑!?
설마 날 여기다 버리고 갈 셈은 아니겠지?!
임무 완수인걸.
게이저도 못 이긴 녀석인데, 앞으로도 쓸모가 있겠어? 그냥 버리고 가야지.
자, 잠깐 잠깐!
그럼 돌아가서 지휘관한텐 뭐라 하려고!
걱정 마, 지휘관님껜 네가 전투 도중 장렬히 희생해서 부스러기도 안 남았다고 보고할게.
가지 마아아아!!!
정말 이대로 두고 갈 거야?!
솔직히 날 조금은 믿기 시작했잖아!
여보세요?? 제발! 누구든 좋으니까 나 좀 그리폰으로 데려가 줘!
게이저어어어!!! 살려줘어어어!!!
AR팀은 아키텍트의 처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기지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정말 두고 갈 거야?
어차피 게이저와 같은 구역 내에 있으니, 나중에 스바로그의 사람한테 회수해 달라 부탁하려고.
정말 잔인하네, 쟤 저기서 계속 울 텐데.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냈어?
우리가 아무리 인형이라지만, 감정은 절대 설계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일분일초의 기억 전부, 우리 마음속 소중한 보물이라고.
이 기억과 감정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어.
전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인데...
...그래서 울컥했어.
RO635의 말에 SOP2와 AR-15도 공감한다는 눈빛이었다.
역시 지휘관 말대로, 너흰 루니샤와 정말 닮았어.
뭐든 다 안다는 투로 말하지 마, 우린 아직 널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어.
나도 알아.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자아, 찾을 건 찾았고 이제 여긴 남은 것도 없으니, 임무 완료지?
헬기도 도착했으니 이만 돌아가자.
우오오!
돌아가서 지휘관한테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또 시체만 잔뜩인 임무는 없었으면 좋겠다.
진짜, 정신 건강에 너무 안 좋아.
윽... 야 SOP2, 이제 됐으니까 그 다리 버려, 징그러.
OK OK~
여어엉~~~차!
와~ 엄청 멀리 날아간다~!
......
......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반드시 오겠지.
언젠가는...
둘 다, 대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전체 대사 보기 (153줄)
콰아앙!
포성이 울려 퍼지면서, 빈껍데기만 남았던 기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에 휩싸였다.
RO! 내 말 들려!?
<color=#00CCFF>SOP... 빨리 ......서 벗...나!</color>
뭐라고?
잘 안 들려!
<color=#00CCFF>...이저가 상..실에서 도망......</color>
<color=#00CCFF>당장 뒤쫓... 나도 너... ...하러 가... 중이니까!</color>
SOP2와 아키텍트는 이미 안전한 위치로 대피했다.
게이저가 어째선지 방송 뒤에도 반응이 없어, 둘은 손쉽게 철혈 잡졸들의 포위망을 뚫고 기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게이저의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님은 알았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이 타이밍에 주피터 포가 불을 뿜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장!
SOP2가 자리를 박차고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키텍트가 멈춰 섰다.
야! 안 오고 뭐해?
확 뜯어버린다!?
그리폰은 정말 멍청이들뿐이구나. 즐거운 시간도 벌써 끝이니, 잘 있어 멍멍아~
뭐어?!
콰앙!
아키텍트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방으로 뛰어들었고, 그녀를 뒤쫓으려던 SOP2를 때마침 날아온 주피터의 포탄이 SOP2 앞의 통로를 돌무더기로 만들어버렸다.
으악!
SOP2는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물론 다시 벌떡 일어났지만, 주위는 이미 불바다였다.
<color=#00CCFF>SOP2, 여기는 AR-15. 지금 그쪽으로 이동 중이야.</color>
<color=#00CCFF>무슨 일이야? 상황은 어때, 철혈과 교전 중이야?</color>
아! AR-15 왔구나!
게이저가 있었어!
그런데 주피터 포가 아직도 움직여! RO랑은 통신 신호가 안 좋고, 방금 아키텍트도 도망쳤어!
<color=#00CCFF>...정말 어이없는 상황이구나.</color>
<color=#00CCFF>아주 잠시 이탈했더니...</color>
<color=#00CCFF>대체 뭐가 문제길래 상황이 이 지경이 됐을까?</color>
아, 아직 RO가 저 안에 있어!
방금도 주피터가 RO가 있는 위치를 포격헀단 말이야, 빨리 구하러 가야 해!
<color=#00CCFF>RO635라면...</color>
<color=#00CCFF>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color>
응?
댄들라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그림자가 시꺼먼 연기를 헤치고 불 속에서 뛰쳐나왔다.
콜록 콜록!
RO!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AR-15와 댄들라이도 돌아왔어?
<color=#00CCFF>응, 방금 도착했어.</color>
잠깐, 아키텍트 어딨어?
그 녀석... 방금 도망쳤어...
젠장, 게이저가 녀석을 엄호했구나!
얼른 추격하자, 그 둘만으론 아직 멀리 못 갔을 거야.
<color=#00CCFF>지금 우리한테 위협이 되는 건 저 주피터 포뿐이겠지. 댄들라이 저거 원격으로 어떻게 안 돼?</color>
<color=#00CCFF>다짜고짜 사람 부려먹는 건 벌써 루니샤 같아졌구나.</color>
<color=#00CCFF>할 수 있어, 없어?</color>
<color=#00CCFF>네에 네에, 기꺼이 봉사해드리죠.</color>
한편, 불바다가 된 기지.
꾀꼴 꾀꼴 꾀꼬리~ 누가 누가 죽였나~
내가 내가 죽였지~ 이 총으로 빵빵빵~♪
과~연! 역시 내 기지야, 아직도 멀쩡한 예비 무기가 창고에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싸우는데, 이거 다루는 법 제대로 기억이 나려나 모르겠네.
......
턱.
......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그 사이로, 익숙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키텍트...
야호, 오랜만.
아키텍트!
드디어 찾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그리폰 녀석들은 저 불길을 뚫고 쫓아오지 못할 거야!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워~ 워~ 스톱 스톱.
어휴 진짜, 간만에 보는데 꼴사납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이야?
아키텍트...?
너랑 같이 가자고?
에휴...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구나, 우리 기사님.
......
내가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내가 기회를 만들어내서 너도 놈들을 따돌리고 온 것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멍청한 척할 셈이야?
멍청한 척? 내가?
아아, 말을 확실히 안 해 줬구나.
게이저, 난 그리폰의 임무를 받아 여기에 왔어.
그리고 나 혼자서 널 찾아온 건, 다른 애들은 영 걸리적거리기만 하니까야.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지?
게이저가 움찔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날 데려가겠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워.
일을 꾸민 장본인은 바로 나랍니다, 우리 기사님♪
크와앙, 늑대가 빨간 모자를 잡으러 왔당!
......뭐?
아 진짜... 여전히 농담도 못 받아 주네.
농담...? 지금이 농담이나 할 상황이야?!
너야말로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여기서――
게이저, 나랑 같이 그리폰으로 가자. 나 진심이야.
뭐라고...?
아키텍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고, 게이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불길 속, 사방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열기가 두 인형의 살갗을 녹여버릴 것만 같았지만...
아주 잠시, 소름 돋는 적막함이 맴돌았다.
잘 못 들었어?
그러니까, 철혈은 끝장났으니까 나랑 같이 그리폰 가서 살자고
다른 녀석이었으면 나도 신경 안 쓰는데, 너니까 내가 이렇게 위험도 감수하면서 찾아온 거야.
게이저, 나랑 같이 가자. 그리폰이 얼마나 좋은 곳인데!
그리폰 인형들이 내 함정을 피하게 도운 것도 그 때문이야?
철혈은 이제 가망이 없으니까?
웃긴다 얘, 그딴 걸 함정이라고 만들었어? 허접하긴.
기지 문 앞의 들고양이가 더 잘 만들겠다.
진짜 이해 안 되네, 왜 그렇게 철혈에 목매달아?
설마, 에이전트처럼 취향이 배배 꼬이기라도 했어?
하지만 그 꼬맹이, 엘더 브레인은 이제 없잖아.
그리고 걔보단 내가 더 좋지 않아?
이렇게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쳐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내가...
게이저의 주먹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마음속 분노가 주위의 불길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척.
게이저가 자신의 무기로 아키텍트를 겨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엑...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나도 네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라고!
게이저가 분노하자 아키텍트는 당황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그리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한테 왜 쫄딱 망한 철혈로 돌아오라 하냐고.
너무 억지 아니야?
닥쳐라!
이 배신자!
어... 잠깐만요.
무기는 왜 들어?
저기요 우리 기사님?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그 기사도 정신을 고집해서 손해 보는 건 너라고.
아니 애당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누가 그런 낡아빠진 기사도 정신을 신경이냐 쓰겠냐고... 안 그래?
닥치라고... 했다.
콰앙!
게이저는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키텍트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다.
우이씨, 너 진짜 그러기냐!
......
게이저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불을 뿜어낼 듯 번뜩였다.
강제로라도 널 데려가겠어!
으에에... 이런 거 하지 말자니까...
넌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
너도, 내가 예전부터 충고했을 텐데.
헛소리 작작 하라고.
어휴, 그럼 결국 싸우잔 거네?
좀 얌전히 굴어!
미안하게 됐지만, 거절한다!
춤 하면 역시 총포와 불꽃이지!
자, 덤벼라 우리 기사님!
결국 내가 져 버렸네...
우리 기사님, 엄청 강해졌구나.
너 이 자식...
이제 화 좀 풀렸어?
일부러냐?
에이, 그럴 리가. 내 실력은 원래 이 정도라구.
몸에 바람구멍 안 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
내가 눈치 못 챌 줄 아나?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래두? 내가 졌어!
그래도 뭐... 한 판 신나게 싸우니까 개운하네.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움직였어.
만족했으면 이제 가자. 가서 너 마음대로 해도 돼.
네 마음은 이해해.
지금까지도 날 포기하지 않아 줘서 정말 기뻐.
하지만 말이야... 나랑 네가 여기서 벗어난다 치자. 그다음은 어떡할 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기사님, 계속 내 그림자만 쫓지 말고, 너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난 원래부터 이렇게 어리버리했어. 그리고 난 지금 내 모습이 좋아.
하지만 넌 다르잖아. 철혈은 끝났어. 계속 과거의 책임에 얽매일 필요 없다고.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이해했지?
......아니.
엉?
난 네 녀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예전부터... 예전부터 너는...!
우리는 철혈이야!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만들어졌단 말이다!
아니, 철혈은 복수를 위해 만들어졌어. 그래서 우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지.
하지만 말이야, 그것 말고도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제 다 끝났잖아, 이제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은 없어. 타인의 원한을 대신 짊어질 이유도 이젠 없어.
새로운 명령이 없다면... 이전에 받은 명령을 계속 수행할 뿐이다.
내가 받은 명령은, 너를 지키는 것.
여태까지 계속 실패했지만, 내가 존재하는 한 그 명령을 수행해 나가겠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앞에 네가 있는데, 왜 명령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거지?
그래서 더더욱 네 임무를 방해하는 거야.
너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내가 여기서 너랑 같이 가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거든.
......
그리폰 녀석들도 슬슬 여기 오겠네. 하지만... 넌 아직도 생각 없지?
그리폰은 영원히 우리의 적이다. 난 놈들을 용납할 수 없어.
뭐, 그렇다면 나도 더는 할 말 없어.
아직 안 정했으면 일단 여기서 떠나라구.
걱정 마, 난 언제까지고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시간도 충분한걸.
난...
괜찮다니까? 또 만날 수 있어.
돌연 소나기가 내려, 점점 사그라든 불길을 완전히 꺼 버렸다.
AR팀은 그제서야 폐허가 된 기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네.
뭐, 철혈의 말로로는 딱이지만.
어우 야, 말 좀 예쁘게 해줘라.
댄들라이, 아키텍트를 찾았어.
게이저는 이미 멀리 도주한 모양인데, 추격할 거야?
아니, 됐어. 날도 거의 저물었으니 기지로 귀환해야 해.
"위치는 대충 특정 가능하니 나머진 스바로그에게 맡기자."
지금 그렇게 생각했지?
주 임무를 달성했으니까. 철혈의 메인 서버에서 M16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입수했어.
정말 기대되네. 그럼 서둘러 돌아가자.
이제 돌아가는 거야? 아싸~
나 힘들어 죽겠어!
너어어어어!!!
감히 내 눈앞에서 도망쳤겠다!?
절대 용서 못해!
다리 한 짝 내놔!
콰직.
끼야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이!!
기어코 SOP2를 화나게 만들었네. 이젠 나도 몰라.
아, 그래도 방금까지 뭘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얘가 네 머리통을 뽑는 건 막아 줄게.
크흐흐흐히히...
히이이이익!!!
도망치긴 내가 왜 도망쳐!
그... 그냥 사고였어! SOP2랑 내 사이에 포탄이 꽝 떨어졌다고!
내가 대신 게이저를 잡으려고 얼마나 피터지게 싸웠는데!
봐봐, 몸에 상처도 잔뜩이잖아.
하지만 졌잖아.
게이저는 도망쳤고.
헤헤헤, 공주님이 어떻게 기사를 이기겠어.
그런데, 녀석이 널 억지로 끌고 가진 않았네...
이상해, 녀석은 그럼 헛수고만 한 셈이잖아?
그렇게 생각해?
난 훨~씬 의미 있었다고 보는데.
아, 근데 다리는 그만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못 걷는다고 질질 끌려가긴 싫어어...
......
보나마나, 게이저한테 뭐라 말했겠지.
그러지 않고선 철혈의 성향상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 리 없어.
......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걔랑 나는 지금 목적도 전혀 다르고, 하는 일도 완전 틀리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래도 녀석이 계속 "명령받은 일"만 한다면 난 걔랑 같이 있기 싫어.
흥...
철혈 인형 사이에도 우정이 깊다는 듯이 말하네.
아무렴, 처음부터 전부 설정된 그리폰의 인형보단 우리 철혈들의 우정이 더 진정성 있지.
...아.
우쭐대다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아키텍트는, 꼼짝없이 바들바들 떨면서 AR팀의 얼음장 같은 눈빛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헬기가 기지 외곽에 착륙한다니, 늦어도 3분 뒤엔 도착할 거야.
알았어, 그럼 움직이자.
저... 저기요... 움직이기 전에 제 다리부터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어떡할까요, 대장님~?
가다 적당한 풀숲에다 버려.
넵!
으에엑!?
설마 날 여기다 버리고 갈 셈은 아니겠지?!
임무 완수인걸.
게이저도 못 이긴 녀석인데, 앞으로도 쓸모가 있겠어? 그냥 버리고 가야지.
자, 잠깐 잠깐!
그럼 돌아가서 지휘관한텐 뭐라 하려고!
걱정 마, 지휘관님껜 네가 전투 도중 장렬히 희생해서 부스러기도 안 남았다고 보고할게.
가지 마아아아!!!
정말 이대로 두고 갈 거야?!
솔직히 날 조금은 믿기 시작했잖아!
여보세요?? 제발! 누구든 좋으니까 나 좀 그리폰으로 데려가 줘!
게이저어어어!!! 살려줘어어어!!!
AR팀은 아키텍트의 처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기지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정말 두고 갈 거야?
어차피 게이저와 같은 구역 내에 있으니, 나중에 스바로그의 사람한테 회수해 달라 부탁하려고.
정말 잔인하네, 쟤 저기서 계속 울 텐데.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냈어?
우리가 아무리 인형이라지만, 감정은 절대 설계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일분일초의 기억 전부, 우리 마음속 소중한 보물이라고.
이 기억과 감정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어.
전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인데...
...그래서 울컥했어.
RO635의 말에 SOP2와 AR-15도 공감한다는 눈빛이었다.
역시 지휘관 말대로, 너흰 루니샤와 정말 닮았어.
뭐든 다 안다는 투로 말하지 마, 우린 아직 널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어.
나도 알아.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자아, 찾을 건 찾았고 이제 여긴 남은 것도 없으니, 임무 완료지?
헬기도 도착했으니 이만 돌아가자.
우오오!
돌아가서 지휘관한테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또 시체만 잔뜩인 임무는 없었으면 좋겠다.
진짜, 정신 건강에 너무 안 좋아.
윽... 야 SOP2, 이제 됐으니까 그 다리 버려, 징그러.
OK OK~
여어엉~~~차!
와~ 엄청 멀리 날아간다~!
......
......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반드시 오겠지.
언젠가는...
둘 다, 대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