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증·끝
"운명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을 포기하는 사람만 있을 뿐."
삐이이이......
의식이 깨어나면서 이명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바늘이 신경을 찌르는 듯한 격통과 함께, 안젤리아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벽 너머로 총격전이 이어지고 있어, 안젤리아는 한순간 아직도 환각 속에 빠져 있나 생각했다.
우웁...
나한테 토하지 마.
나 이 옷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야.
AK-12...?
여긴...
어허,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안젤리아 씨. 약효가 가신 게 아니라고요.
지금 당신은 아주 허약한 상태입니다.
......!
갑자기 낯선 얼굴이 불쑥 나타나자,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등허리의 권총집으로 손을 뻗었지만 팔이 말을 똑바로 듣지 않았다.
자자자잠깐만요!
왜 총부터 꺼내려 합니까?! 전 당신 편이라고요!
......루치아가 네 목을 꺾지 않은 걸 봐서, 자기소개할 기회를 주지.
코끝이 뜨끈하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 코를 훔치자,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안젤리아는 겨우 어지러움을 참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벌써 K를 잊진 않으셨겠죠?
그 녀석의 직장 동료입니다, "J"라 불러 주세요.
아, 물론 안심하세요. 전 그 친구랑은 다르거든요. 어디가 다르냐고 물으신다면...
여러 가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얼굴이겠죠?
얼굴...?
어... 그러니까...
제가 더 잘생겼다고요.
......
안젤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J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황급히 손수건을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냈다.
...그럼 너도 슈타지겠군.
어지러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나서야, 안젤리아는 AK-12와 J 말고도 주위에 무장인원이 다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네 추측이 맞았어, 안젤리아.
슈타지 녀석들은 전부터 여길 주시 중이었대. 쟤네는 K가 우릴 지원하려고 보낸 거고.
하지만 참 운도 좋아,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 넌 저 비서 아가씨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직전었다고.
제, 제 머리를요?!
정말이에요!?
몰리도는 잔뜩 겁에 질려, 자신의 머리를 마구 더듬었다.
아이고야, 너무하시네요. 저희더러 "녀석들"이라뇨.
아까부터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닙니까?
아니 그야 뭐 저야 당신들을 사진으로만 봤지만, 이 정도면 서로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아닌가요?
...으억.
안젤리아 곁의 몰리도와 홉스도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 게, 둘 다 막 깨어난 참인 듯했다.
특히 몰리도는 건장한 홉스보다 신체적으로 약해서인지, 안색이 훨씬 더 창백했다.
반면 홉스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코를 쥐고 고개를 숙여, 콧속의 진물을 빼내려 했다.
당신도 코피예요?
...그게 뭐.
그럼 역시 그거네요.
당신들이 마신 꽃가루가 몸에 전혀 좋지 않은 물건인 건 아시죠?
이런 노란 거면... 흐음... 여러분의 목숨은 이제 길어봤자 2시간입니다.
뭣...?!
푸하하하! 당신 표정 정말 재밌네요.
걱정 마세요, 농담입니다.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것도 국가안전국 요원의 소양인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어휴 깜짝이야... 지금 유서 쓰려고 했다고요!
상황은 통제한 모양이네. 리오니는?
너희 셋 말곤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안전한 것도 지금뿐이야, 안티아가 보고한 적 부대가 여길 포위했어.
너희가 움직이질 못하니 우리도 꼼짝 못했지.
나 좀 부축해 줘.
그래서, 어떤 놈들인데?
그야 당연히 오합지졸이지, 딱히 성가신 것도 없어.
사격술 배운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보이던걸?
봐, 문 앞에서 몇 명 해치우니까 겁먹곤 고개도 안 내밀잖아.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지했겠죠.
이런 상황에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건, 인형 아니면 광신도들밖에 없습니다.
광신도?
네, 광신도요.
플로라 연구소는 사실, 빌딩 밑에 사이비 종교 단체를 하나 차려놨거든요. 그 교단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식물을 숭배하죠.
식물이야말로 더욱 우월한 생물이고, 인간은 그저 거름일 뿐이라나 뭐라나... 소름 끼치지 않아요?
패러데우스인가?
역시 "패러데우스"도 아시는군요.
하지만 좀 다릅니다, 저들은 그냥 평범한 사이비예요.
그냥 사이비가 저 정도일 리가 없지. 분명 패러데우스와 관계가 있을 거야.
그럴까요?
뭐, 정말이라도 저랑은 상관 없지만요. 패러데우스는 제 담당이 아닌지라.
아무튼, 뭡니까 대체? 난데없이 나타나서 제 잠입 임무도 망쳐 버리고, 어휴 진짜.
아직 증거 간의 연결고리도 다 못 찾아냈다고요.
그래도 여기 아리따운 백랑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드릴게요.
안젤리아, 나 쟤 손가락 좀 분질러도 돼?
퍼엉!
꺄악!!
지, 지금 뭐예요!?
아이고 귀청이야, 아직 기운도 없을 텐데 목소리는 아주 쩌렁쩌렁하네요.
말했잖아, 별거 아닌 놈들이라고.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한차례 소란이 일어나더니, 바깥이 돌연 조용해졌다.
이윽고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
안전국 요원들이 총을 들었지만, 나타난 이들은 생각하던 적이 아니었다.
......
늦어서 미안하다.
어서 와 안티아~ 전혀 안 늦었어.
저 미친개가 발목 잡진 않았나 봐?
오오... 오오오!
이, 이게 바로 리벨리온인가요...!
완전 발키리 같아요!
잘했어.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야, 정말 단순한 사이비 단체라면 이렇게 많은 무기를 가졌을 리 없지.
분명 어딘가에 놈들의 자료와 단서가 있을 거야. 그걸 찾기 전엔 못 돌아가.
......?
잠깐, 레나테 어디 갔어?
후후후... 여우는 코가 좋잖아.
이게 아닌데... 젠장... 어째서 일이 이렇게...
리오니는 지하 연구 구역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 숨어 있었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무기를 얻었는데, 어째서 손도 못 쓰고 당했지?" 그녀는 패닉에 빠졌다.
어째서 슈타지 놈들이 여기 나타난 거야?
대기 중이던 부대까지 다 당하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상대가 저런 괴물이라고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건데!
마치 악몽처럼, 그 은빛 그림자가 리오니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안젤리아와 함께 온 전술인형들은 도저히 인간이 상대할 수 없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제대로 된 훈련도 못 받은 폭도 따위는 그들에겐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괴물... 하하하, 괴물이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
그게 바로 괴물이겠죠.
누구――으악!?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해, 비웃는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리오니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무쇠 집게 같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고,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윽... 아아아아악!
손, 내 손!
손목이 잘릴 것만 같은 격통에, 리오니는 손에 쥔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리오니는 상대의 모습을 똑바로 보았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마귀의 뼈처럼 창백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은발의 인형은 미소 지으며 쓰윽 다리를 걸어, 리오니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부러진 오른손을 붙잡아 꺾은 채, 무릎으로 등을 짓눌러 그녀를 제압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오늘 총을 안 챙겨 왔거든요.
이렇게 난폭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네요.
넌... 큭... 아윽!
계속되는 격통에 리오니는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고,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다.
이 인형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왔단 것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자아, 그럼 알려 주시겠어요?
이 연구소의 연구 자료는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꿈도... 꾸지 마... 너희 같은 놈들한테 자료를――
콰직.
아아아아아악!
RPK-16은 말도 다 듣지 않고 오른손의 검지를 부러뜨렸다.
괜찮아요, 아직 기회는 충분해요. 네 번이나 더 있는걸요.
RPK-16은 리오니가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손에 쥔 힘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아악... 콜록...
이... 이 망할 기계가...!
어머, 아직도 욕할 기운이 남아있군요. 사무직치고는 배짱이 두둑해요.
내가, 너... 너 따위한테, 굴복할 줄 알아...?!
그렇군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콰직.
끅... 아아악!!
싫어... 그만! 그만해!
리오니는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통각이 마비되었는지, 손가락이 하나 더 부러졌음에도 전보단 반응이 덜했다.
역시 이대로 죽고 싶진 않겠죠.
하지만, 이대로 거름이 되는 편이 당신의 종교 사상에 부합하지 않나요?
인간의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다면서요.
부질없는 목숨을 부지해서 뭐하려고요?
이 감정도 없는 괴물 자식...
네... 네가 뭘 안다고!
네, 저는 보름달 아래의 늑대인간, 눈보라 속의 설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죠.
하지만, 당신은 뭔가요?
무력하고 불쌍한 인간일 뿐이에요.
불쌍해? 네가...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나를 모욕해!
깔고 앉은 게 다야?! 힘으로 우위라고 내 의지를 마음대로 모욕할 자격이 있는 줄 알아!?
겨우 인형 따위가!
부정하는 건가요?
당신은 자신을 순교자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당신은 세상 누구보다 목숨을 아끼고 있어요.
위대한 대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니까, 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한 모든 일은 전부, 다른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마저도, 관객인 제 눈에는...
절도 있는 카자크 댄스가 아니라, 어릿광대의 막춤이지만요.
광대...!?
이, 인형 주제에 감히 그딴 식으로 날 모욕해?!
절대 용서 못해...!
울부짖는 것 말고는 달리 반박할 말도 없나요? 가엾어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 못하나요?
당신처럼,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 여기는 사람마저 자기모순에 빠지다니요.
크윽...
사실, 리오니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상대한테 대꾸할 기운이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고통에 기절할 것 같으면서도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렇게 그녀가 아픔을 참는 사이, 그 인형은 또다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지경이 되고도 눈치 못 챘나요?
정말 왜 이렇게 꼴불견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 그게 무슨...
당신의 계획은 너무 어설펐어요.
그럼에도 승산이 확실하다 생각했죠.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힘을 손에 넣었으니까.
저 불쌍한 폭력배들은 당신의 신도들이죠? 하지만 그들이 쥔 무기는 당신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
리오니의 숨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RPK-16도 그녀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말을 듣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계속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무기들...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제공한 거죠? 아무리 봐도, 당신과 그 친구분들은 총을 많이 쏴본 것 같지 않아요.
게다가 제가 반나절 넘게 생각해 봐도, 당신이 안젤리아를 건드려서 무슨 이득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즉, 이건 당신이 꾸민 일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받은 거죠.
그러니까, 내가 이용당했단 말이야?
리오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전혀 놀라지 않네요.
하긴, 연구원씩이나 되는데 이 정도쯤이야 다 예상한 바겠죠.
난... 내가 이용당했다 생각한 적 없어.
연구에 지원이 필요했고, 그들도 내 연구가 필요했어.
우린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던 관계야... 하, 내가 왜 억울해?
RPK-16에게 한 방 먹였다는 듯, 리오니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겠네요, 당신은 머리가 비상한 과학자니까요.
아무리 세상물정 모른다 해도, 간단히 속아 넘어가진 않겠죠.
버림패 취급받아도 전혀 상관 없을 테죠.
...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는 양측에 동등한 가치가 있어야만 성립돼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처음부터 대상을 잘못 골랐어요.
이 게임에서 당신은 처음부터 버리는 패였어요. 설마, 자기한테 주도권이 있다 생각하진 않았겠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의 의뢰인은, 처음부터 당신이 실패할 걸 알았단 뜻이에요.
당신을 직접 연옥의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지금쯤 관중석에서 신나게 박수치며 구경하고 있겠죠.
......참 허접한 심문이네.
내가 그딴 말에 속을 줄 알아?
아직도 그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나요? 불쌍하기도 하지.
아직도 당신의 계획이 틀어진 이유... 우리의 존재가 정말 예상밖의 일이라 생각하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안젤리아가 여길 찾은 건 완전히 즉석에서 결정된 일이에요. 그런데 당신들은 이토록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죠.
상상 이상의 정보력... 우리 이마에다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설자"라도 써넣었나 싶을 정도예요.
그렇게까지 우리를 예의주시하던 인물이, 인형의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아요?
겉만 봐선... 인형이랑 인간은 구분이 안 가잖아.
당신의 말에서 슬슬 의구심이 느껴지는군요. 아주 좋은 현상이에요.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요?
정말 안젤리아를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파트너는 왜 무기만 제공했을까요?
당신이 우리의 실력을 겉모습만 보고 착각할 게 뻔하니,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에겐 전문 인력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인색하게 용병 한 명 보내 주지 않았을까요?
......
RPK-16이 천천히 리오니의 손을 놓았다.
이제 깨달았나요?
무기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잘 훈련된 병사는 아니에요.
지원군은커녕 예비책 하나 준비하지 않다니.
제가 맞춰 볼까요? 그 파트너, 당신에게 작전 후 어떻게 도주하라 말도 안 해 줬죠?
내게 무기를 제공하고, 반쪽짜리 정보를 알려 준 게...
다... 속임수였다고...?
당신은 버림패였다. 그게 현실이에요.
당신의 기습이 가지는 유일한 가치는, 그저 상대의 전력을 떠볼 수 있었단 것뿐이죠.
지금쯤 당신의 파트너는 결과에 아주 만족하고 있을 거예요.
더불어, 멍청한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을 비웃고 있겠죠.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행위가 유의미하다 여기나요?
......
내가... 속았어...?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지.
하지만... 바로 오늘일 줄은...
그래도 전 당신에게 경의를 표해요.
불꽃의 매력은 오직 나방만이 아는 법이니까요.
......
네가 원하는 건... 서버에 다 있어. 키카드는 사무책상 2번째 서랍 뒷면에 있고.
알아서 찾아봐.
고마워요.
RPK-16은 제압을 풀고 천천히 반 발짝 물러나, 리오니가 움직일 공간을 내주었다.
그리곤 바닥에서 꿈틀대는 리오니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뿐사뿐 걸어가면서 목에 손을 가져다댔다.
탕! 탕! 탕!
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고, RPK-16의 가녀린 등에 불꽃이 튀었다.
RPK-16가 태연하게 뒤돌아보니, 리오니가 아직 멀쩡한 손으로 권총을 주워 쏜 것이었다.
그런 소구경 권총으로 방탄복을 입은 인형을 정말 쏴야겠어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건 알 텐데.
탕!
RPK-16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총알을 피했다. 총알은 그녀의 볼을 스치고 날아갔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왜 나를 안 죽였어?
제 임무는 자료를 찾는 거니까요.
그게 어딘지 아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고요.
이제 알았잖아.
아직 확인도 안 했는걸요.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이길 바라나요?
그 역겨운 이상주의자들에게 모욕받느니, 차라리 그렇게 끝나겠어.
하지만 전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요.
네 일방적인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 이번엔 네가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야.
모든 희망을 잃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면... 넌 그래도 살아가겠어?
......
죽음은 인간의 특권이죠. 저는 그게 정말 부럽답니다.
훗... 이딴 게 인간의 "미래"라니...
하하하... 웃기지도 않아...
그 대답에 잠깐 넋을 잃은 리오니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 같은 게 "미래"라면... 그런 미래를 사느니 차라리...
리오니는 총구를 천천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댔다.
하지만 RPK-16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철컥.
방아쇠를 당겼지만, 약실엔 총알이 없었다.
RPK-16은 볼에 묻은 탄매를 엄지로 닦아냈다.
역시 이게 마지막 한 발이었네요.
왜... 운명마저 나를 버렸단 거야...?
아뇨, 당신을 버린 건 운명이 아니라 당신 본인이에요.
다 당신의 선택에서 비롯됐죠.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총알을 전부 쏴 버린 것처럼요.
리오니가 완전히 의지를 상실하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RPK-16은 고개를 돌려 구석의 컴퓨터를 응시했다.
목에 감긴 붕대를 풀어, 밑에 감췄던 "초커"를 드러내고 가져온 케이스도 탁상에 놓았다.
그리고 케이블을 꽂은 다음,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이런.
하지만...
이거야 원... 한 방 먹었네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엔 아무것도 없었다.
연구 자료, 연락 기록, RPK-16이 흥미있어 할 만한 것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RPK-16은 리오니를 흘겨봤다.
이게 당신 짓이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럼 적어도 마지막에 1점은 따낸 셈이니.
하지만, 이 수법을 봐서는... 아주 예전에 처리한 것 같네요.
음, 대충 알겠어요.
RPK-16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결국 우리 모두 놀아났어요.
쿵쿵!
여기 있었군.
아, 오셨어요?
다음엔 이탈하기 전에 귀뜸이라도 하고 가.
상황 보고해.
연구 자료를 비롯한 모든 자료가 말끔하게 지워졌어요.
여기 이 리오니 씨의 솜씨는 아닌 것 같고요.
우리의 상대는 예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모양이에요.
칫...
뭐, 오늘은 그냥 인사치레였으니――
...응?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글쎄요, 삶에 대한 희망이라도 잃은 게 아닐까요?
너 때문이지?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안 그래요?
흥...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고 들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역시 인간은 같은 인간이 잘 아는군요, 본인도 방금 그러려고 했어요.
잔인한 녀석...
어쨌든, 이 녀석의 심문은 슈타지한테 맡기자고.
그런데 말이에요, 궁금한 게 생겼어요.
안젤리아 씨는 식물이 세상의 미래라 보시나요?
당연히 아니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어.
정말 식물만으로 문제를 뚝딱 해결할 수 있으면 우리가 왜 있겠냐?
설마, 너도 그 종교에 빠졌어?
글쎄요, 제가 뭐라 대답하길 바라세요?
식물이 아니라 인형을 미래라 보면서 저희에게 의미를 부여해, 저희에게서 "올바른 길"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는걸요.
하지만, 저희에게 무엇이 올바른지 누가 가르쳐 준 적 있나요?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식물도 못하는 걸 인형이 해낼 수 있을까요?
쟤한테 세뇌라도 당했냐?
그럴 리가요. 전 그저, 한 사람의 본성을 보고 난 감상을 말하는 거예요.
짜증나니까 네 철학 논문은 딴 데 가서 낭독하고, 저 녀석이나 챙겨.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야.
Yes, ma'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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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
의식이 깨어나면서 이명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바늘이 신경을 찌르는 듯한 격통과 함께, 안젤리아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벽 너머로 총격전이 이어지고 있어, 안젤리아는 한순간 아직도 환각 속에 빠져 있나 생각했다.
우웁...
나한테 토하지 마.
나 이 옷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야.
AK-12...?
여긴...
어허,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안젤리아 씨. 약효가 가신 게 아니라고요.
지금 당신은 아주 허약한 상태입니다.
......!
갑자기 낯선 얼굴이 불쑥 나타나자,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등허리의 권총집으로 손을 뻗었지만 팔이 말을 똑바로 듣지 않았다.
자자자잠깐만요!
왜 총부터 꺼내려 합니까?! 전 당신 편이라고요!
......루치아가 네 목을 꺾지 않은 걸 봐서, 자기소개할 기회를 주지.
코끝이 뜨끈하고 축축한 느낌이 들어 코를 훔치자,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안젤리아는 겨우 어지러움을 참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벌써 K를 잊진 않으셨겠죠?
그 녀석의 직장 동료입니다, "J"라 불러 주세요.
아, 물론 안심하세요. 전 그 친구랑은 다르거든요. 어디가 다르냐고 물으신다면...
여러 가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얼굴이겠죠?
얼굴...?
어... 그러니까...
제가 더 잘생겼다고요.
......
안젤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J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황급히 손수건을 안젤리아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냈다.
...그럼 너도 슈타지겠군.
어지러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나서야, 안젤리아는 AK-12와 J 말고도 주위에 무장인원이 다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네 추측이 맞았어, 안젤리아.
슈타지 녀석들은 전부터 여길 주시 중이었대. 쟤네는 K가 우릴 지원하려고 보낸 거고.
하지만 참 운도 좋아,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 넌 저 비서 아가씨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직전었다고.
제, 제 머리를요?!
정말이에요!?
몰리도는 잔뜩 겁에 질려, 자신의 머리를 마구 더듬었다.
아이고야, 너무하시네요. 저희더러 "녀석들"이라뇨.
아까부터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닙니까?
아니 그야 뭐 저야 당신들을 사진으로만 봤지만, 이 정도면 서로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아닌가요?
...으억.
안젤리아 곁의 몰리도와 홉스도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 게, 둘 다 막 깨어난 참인 듯했다.
특히 몰리도는 건장한 홉스보다 신체적으로 약해서인지, 안색이 훨씬 더 창백했다.
반면 홉스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코를 쥐고 고개를 숙여, 콧속의 진물을 빼내려 했다.
당신도 코피예요?
...그게 뭐.
그럼 역시 그거네요.
당신들이 마신 꽃가루가 몸에 전혀 좋지 않은 물건인 건 아시죠?
이런 노란 거면... 흐음... 여러분의 목숨은 이제 길어봤자 2시간입니다.
뭣...?!
푸하하하! 당신 표정 정말 재밌네요.
걱정 마세요, 농담입니다.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것도 국가안전국 요원의 소양인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군.
어휴 깜짝이야... 지금 유서 쓰려고 했다고요!
상황은 통제한 모양이네. 리오니는?
너희 셋 말곤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안전한 것도 지금뿐이야, 안티아가 보고한 적 부대가 여길 포위했어.
너희가 움직이질 못하니 우리도 꼼짝 못했지.
나 좀 부축해 줘.
그래서, 어떤 놈들인데?
그야 당연히 오합지졸이지, 딱히 성가신 것도 없어.
사격술 배운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보이던걸?
봐, 문 앞에서 몇 명 해치우니까 겁먹곤 고개도 안 내밀잖아.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지했겠죠.
이런 상황에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건, 인형 아니면 광신도들밖에 없습니다.
광신도?
네, 광신도요.
플로라 연구소는 사실, 빌딩 밑에 사이비 종교 단체를 하나 차려놨거든요. 그 교단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식물을 숭배하죠.
식물이야말로 더욱 우월한 생물이고, 인간은 그저 거름일 뿐이라나 뭐라나... 소름 끼치지 않아요?
패러데우스인가?
역시 "패러데우스"도 아시는군요.
하지만 좀 다릅니다, 저들은 그냥 평범한 사이비예요.
그냥 사이비가 저 정도일 리가 없지. 분명 패러데우스와 관계가 있을 거야.
그럴까요?
뭐, 정말이라도 저랑은 상관 없지만요. 패러데우스는 제 담당이 아닌지라.
아무튼, 뭡니까 대체? 난데없이 나타나서 제 잠입 임무도 망쳐 버리고, 어휴 진짜.
아직 증거 간의 연결고리도 다 못 찾아냈다고요.
그래도 여기 아리따운 백랑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드릴게요.
안젤리아, 나 쟤 손가락 좀 분질러도 돼?
퍼엉!
꺄악!!
지, 지금 뭐예요!?
아이고 귀청이야, 아직 기운도 없을 텐데 목소리는 아주 쩌렁쩌렁하네요.
말했잖아, 별거 아닌 놈들이라고.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한차례 소란이 일어나더니, 바깥이 돌연 조용해졌다.
이윽고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
안전국 요원들이 총을 들었지만, 나타난 이들은 생각하던 적이 아니었다.
......
늦어서 미안하다.
어서 와 안티아~ 전혀 안 늦었어.
저 미친개가 발목 잡진 않았나 봐?
오오... 오오오!
이, 이게 바로 리벨리온인가요...!
완전 발키리 같아요!
잘했어.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야, 정말 단순한 사이비 단체라면 이렇게 많은 무기를 가졌을 리 없지.
분명 어딘가에 놈들의 자료와 단서가 있을 거야. 그걸 찾기 전엔 못 돌아가.
......?
잠깐, 레나테 어디 갔어?
후후후... 여우는 코가 좋잖아.
이게 아닌데... 젠장... 어째서 일이 이렇게...
리오니는 지하 연구 구역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 숨어 있었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무기를 얻었는데, 어째서 손도 못 쓰고 당했지?" 그녀는 패닉에 빠졌다.
어째서 슈타지 놈들이 여기 나타난 거야?
대기 중이던 부대까지 다 당하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상대가 저런 괴물이라고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건데!
마치 악몽처럼, 그 은빛 그림자가 리오니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안젤리아와 함께 온 전술인형들은 도저히 인간이 상대할 수 없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제대로 된 훈련도 못 받은 폭도 따위는 그들에겐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괴물... 하하하, 괴물이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
그게 바로 괴물이겠죠.
누구――으악!?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해, 비웃는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리오니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무쇠 집게 같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고,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윽... 아아아아악!
손, 내 손!
손목이 잘릴 것만 같은 격통에, 리오니는 손에 쥔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리오니는 상대의 모습을 똑바로 보았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마귀의 뼈처럼 창백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은발의 인형은 미소 지으며 쓰윽 다리를 걸어, 리오니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 부러진 오른손을 붙잡아 꺾은 채, 무릎으로 등을 짓눌러 그녀를 제압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오늘 총을 안 챙겨 왔거든요.
이렇게 난폭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네요.
넌... 큭... 아윽!
계속되는 격통에 리오니는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고,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다.
이 인형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왔단 것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자아, 그럼 알려 주시겠어요?
이 연구소의 연구 자료는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꿈도... 꾸지 마... 너희 같은 놈들한테 자료를――
콰직.
아아아아아악!
RPK-16은 말도 다 듣지 않고 오른손의 검지를 부러뜨렸다.
괜찮아요, 아직 기회는 충분해요. 네 번이나 더 있는걸요.
RPK-16은 리오니가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손에 쥔 힘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아악... 콜록...
이... 이 망할 기계가...!
어머, 아직도 욕할 기운이 남아있군요. 사무직치고는 배짱이 두둑해요.
내가, 너... 너 따위한테, 굴복할 줄 알아...?!
그렇군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콰직.
끅... 아아악!!
싫어... 그만! 그만해!
리오니는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통각이 마비되었는지, 손가락이 하나 더 부러졌음에도 전보단 반응이 덜했다.
역시 이대로 죽고 싶진 않겠죠.
하지만, 이대로 거름이 되는 편이 당신의 종교 사상에 부합하지 않나요?
인간의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다면서요.
부질없는 목숨을 부지해서 뭐하려고요?
이 감정도 없는 괴물 자식...
네... 네가 뭘 안다고!
네, 저는 보름달 아래의 늑대인간, 눈보라 속의 설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죠.
하지만, 당신은 뭔가요?
무력하고 불쌍한 인간일 뿐이에요.
불쌍해? 네가...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나를 모욕해!
깔고 앉은 게 다야?! 힘으로 우위라고 내 의지를 마음대로 모욕할 자격이 있는 줄 알아!?
겨우 인형 따위가!
부정하는 건가요?
당신은 자신을 순교자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당신은 세상 누구보다 목숨을 아끼고 있어요.
위대한 대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니까, 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한 모든 일은 전부, 다른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마저도, 관객인 제 눈에는...
절도 있는 카자크 댄스가 아니라, 어릿광대의 막춤이지만요.
광대...!?
이, 인형 주제에 감히 그딴 식으로 날 모욕해?!
절대 용서 못해...!
울부짖는 것 말고는 달리 반박할 말도 없나요? 가엾어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 못하나요?
당신처럼,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 여기는 사람마저 자기모순에 빠지다니요.
크윽...
사실, 리오니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상대한테 대꾸할 기운이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고통에 기절할 것 같으면서도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렇게 그녀가 아픔을 참는 사이, 그 인형은 또다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지경이 되고도 눈치 못 챘나요?
정말 왜 이렇게 꼴불견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 그게 무슨...
당신의 계획은 너무 어설펐어요.
그럼에도 승산이 확실하다 생각했죠.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힘을 손에 넣었으니까.
저 불쌍한 폭력배들은 당신의 신도들이죠? 하지만 그들이 쥔 무기는 당신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
리오니의 숨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RPK-16도 그녀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말을 듣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계속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무기들...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제공한 거죠? 아무리 봐도, 당신과 그 친구분들은 총을 많이 쏴본 것 같지 않아요.
게다가 제가 반나절 넘게 생각해 봐도, 당신이 안젤리아를 건드려서 무슨 이득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즉, 이건 당신이 꾸민 일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받은 거죠.
그러니까, 내가 이용당했단 말이야?
리오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전혀 놀라지 않네요.
하긴, 연구원씩이나 되는데 이 정도쯤이야 다 예상한 바겠죠.
난... 내가 이용당했다 생각한 적 없어.
연구에 지원이 필요했고, 그들도 내 연구가 필요했어.
우린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던 관계야... 하, 내가 왜 억울해?
RPK-16에게 한 방 먹였다는 듯, 리오니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겠네요, 당신은 머리가 비상한 과학자니까요.
아무리 세상물정 모른다 해도, 간단히 속아 넘어가진 않겠죠.
버림패 취급받아도 전혀 상관 없을 테죠.
...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는 양측에 동등한 가치가 있어야만 성립돼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처음부터 대상을 잘못 골랐어요.
이 게임에서 당신은 처음부터 버리는 패였어요. 설마, 자기한테 주도권이 있다 생각하진 않았겠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의 의뢰인은, 처음부터 당신이 실패할 걸 알았단 뜻이에요.
당신을 직접 연옥의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지금쯤 관중석에서 신나게 박수치며 구경하고 있겠죠.
......참 허접한 심문이네.
내가 그딴 말에 속을 줄 알아?
아직도 그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나요? 불쌍하기도 하지.
아직도 당신의 계획이 틀어진 이유... 우리의 존재가 정말 예상밖의 일이라 생각하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안젤리아가 여길 찾은 건 완전히 즉석에서 결정된 일이에요. 그런데 당신들은 이토록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죠.
상상 이상의 정보력... 우리 이마에다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설자"라도 써넣었나 싶을 정도예요.
그렇게까지 우리를 예의주시하던 인물이, 인형의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아요?
겉만 봐선... 인형이랑 인간은 구분이 안 가잖아.
당신의 말에서 슬슬 의구심이 느껴지는군요. 아주 좋은 현상이에요.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요?
정말 안젤리아를 해치울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파트너는 왜 무기만 제공했을까요?
당신이 우리의 실력을 겉모습만 보고 착각할 게 뻔하니,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에겐 전문 인력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인색하게 용병 한 명 보내 주지 않았을까요?
......
RPK-16이 천천히 리오니의 손을 놓았다.
이제 깨달았나요?
무기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잘 훈련된 병사는 아니에요.
지원군은커녕 예비책 하나 준비하지 않다니.
제가 맞춰 볼까요? 그 파트너, 당신에게 작전 후 어떻게 도주하라 말도 안 해 줬죠?
내게 무기를 제공하고, 반쪽짜리 정보를 알려 준 게...
다... 속임수였다고...?
당신은 버림패였다. 그게 현실이에요.
당신의 기습이 가지는 유일한 가치는, 그저 상대의 전력을 떠볼 수 있었단 것뿐이죠.
지금쯤 당신의 파트너는 결과에 아주 만족하고 있을 거예요.
더불어, 멍청한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을 비웃고 있겠죠.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행위가 유의미하다 여기나요?
......
내가... 속았어...?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지.
하지만... 바로 오늘일 줄은...
그래도 전 당신에게 경의를 표해요.
불꽃의 매력은 오직 나방만이 아는 법이니까요.
......
네가 원하는 건... 서버에 다 있어. 키카드는 사무책상 2번째 서랍 뒷면에 있고.
알아서 찾아봐.
고마워요.
RPK-16은 제압을 풀고 천천히 반 발짝 물러나, 리오니가 움직일 공간을 내주었다.
그리곤 바닥에서 꿈틀대는 리오니를 돌아보지도 않고, 사뿐사뿐 걸어가면서 목에 손을 가져다댔다.
탕! 탕! 탕!
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고, RPK-16의 가녀린 등에 불꽃이 튀었다.
RPK-16가 태연하게 뒤돌아보니, 리오니가 아직 멀쩡한 손으로 권총을 주워 쏜 것이었다.
그런 소구경 권총으로 방탄복을 입은 인형을 정말 쏴야겠어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건 알 텐데.
탕!
RPK-16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총알을 피했다. 총알은 그녀의 볼을 스치고 날아갔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왜 나를 안 죽였어?
제 임무는 자료를 찾는 거니까요.
그게 어딘지 아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고요.
이제 알았잖아.
아직 확인도 안 했는걸요.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이길 바라나요?
그 역겨운 이상주의자들에게 모욕받느니, 차라리 그렇게 끝나겠어.
하지만 전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요.
네 일방적인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 이번엔 네가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야.
모든 희망을 잃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면... 넌 그래도 살아가겠어?
......
죽음은 인간의 특권이죠. 저는 그게 정말 부럽답니다.
훗... 이딴 게 인간의 "미래"라니...
하하하... 웃기지도 않아...
그 대답에 잠깐 넋을 잃은 리오니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 같은 게 "미래"라면... 그런 미래를 사느니 차라리...
리오니는 총구를 천천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댔다.
하지만 RPK-16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철컥.
방아쇠를 당겼지만, 약실엔 총알이 없었다.
RPK-16은 볼에 묻은 탄매를 엄지로 닦아냈다.
역시 이게 마지막 한 발이었네요.
왜... 운명마저 나를 버렸단 거야...?
아뇨, 당신을 버린 건 운명이 아니라 당신 본인이에요.
다 당신의 선택에서 비롯됐죠.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총알을 전부 쏴 버린 것처럼요.
리오니가 완전히 의지를 상실하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RPK-16은 고개를 돌려 구석의 컴퓨터를 응시했다.
목에 감긴 붕대를 풀어, 밑에 감췄던 "초커"를 드러내고 가져온 케이스도 탁상에 놓았다.
그리고 케이블을 꽂은 다음,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이런.
하지만...
이거야 원... 한 방 먹었네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엔 아무것도 없었다.
연구 자료, 연락 기록, RPK-16이 흥미있어 할 만한 것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RPK-16은 리오니를 흘겨봤다.
이게 당신 짓이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럼 적어도 마지막에 1점은 따낸 셈이니.
하지만, 이 수법을 봐서는... 아주 예전에 처리한 것 같네요.
음, 대충 알겠어요.
RPK-16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결국 우리 모두 놀아났어요.
쿵쿵!
여기 있었군.
아, 오셨어요?
다음엔 이탈하기 전에 귀뜸이라도 하고 가.
상황 보고해.
연구 자료를 비롯한 모든 자료가 말끔하게 지워졌어요.
여기 이 리오니 씨의 솜씨는 아닌 것 같고요.
우리의 상대는 예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모양이에요.
칫...
뭐, 오늘은 그냥 인사치레였으니――
...응?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글쎄요, 삶에 대한 희망이라도 잃은 게 아닐까요?
너 때문이지?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안 그래요?
흥...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고 들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역시 인간은 같은 인간이 잘 아는군요, 본인도 방금 그러려고 했어요.
잔인한 녀석...
어쨌든, 이 녀석의 심문은 슈타지한테 맡기자고.
그런데 말이에요, 궁금한 게 생겼어요.
안젤리아 씨는 식물이 세상의 미래라 보시나요?
당연히 아니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어.
정말 식물만으로 문제를 뚝딱 해결할 수 있으면 우리가 왜 있겠냐?
설마, 너도 그 종교에 빠졌어?
글쎄요, 제가 뭐라 대답하길 바라세요?
식물이 아니라 인형을 미래라 보면서 저희에게 의미를 부여해, 저희에게서 "올바른 길"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는걸요.
하지만, 저희에게 무엇이 올바른지 누가 가르쳐 준 적 있나요?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식물도 못하는 걸 인형이 해낼 수 있을까요?
쟤한테 세뇌라도 당했냐?
그럴 리가요. 전 그저, 한 사람의 본성을 보고 난 감상을 말하는 거예요.
짜증나니까 네 철학 논문은 딴 데 가서 낭독하고, 저 녀석이나 챙겨.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야.
Yes, ma'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