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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 거울단계

토리첼리 트럼펫 Ⅰ

"나는 세상의 빛이어라, 나를 따른 자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며 생명의 빛을 필히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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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슈타지가 제공한 아파트.

창문을 넘어 들어온 늦여름의 따스한 햇볕이 나무 장판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안젤리아는 잠결에서 바로 깨어나,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숨겨 둔 권총을 쥐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 그녀는 분명 커튼을 쳤었다.

안젤리아

......

AK12

굿 모닝, 안제.

하지만 불청객은 적이 아닌, 느긋하게 커피를 든 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AK-12였다.

안젤리아

...한 잔 줘.

안젤리아는 권총을 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하룻밤 만에 완치될 리는 없지만, 이 정도 회복된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했다.

AK12

옆의 테이블에 네 거 있어. 덤으로 블루베리 쿠키도.

지금 넌 탄수화물이랑 비타민 섭취가 절실해.

안젤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머리로 고개를 돌려봤다.

과연,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엔 커피와 쿠키가 놓여 있었다. 저 진한 커피향을 맡지 못한 것이 희한할 따름이었다.

뜨끈한 커피의 씁쓸한 향기가, 뇌 속의 남은 안개를 완전히 걷어냈다.

저 짜증나는 녀석의 솜씨는 아무리 높게 쳐 줘도 잘한다곤 못하지만, 최소한 언제, 뭐가 가장 필요한지는 훤히 알았다.

안젤리아

......온도 딱이네.

AK12

천만에.

안젤리아

근데, 내 바이탈 스캔하지 말라 했잖아.

AK12

넌 지금 간호가 필요해. 신체 검사도 하면 안 돼?

게다가, 스캔하지 않으면 네가 언제 일어날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안젤리아

흥...

블루베리 쿠키의 새콤달콤함도 입맛에 딱 맞았다.

AK12

아무튼, 지금 몸 상태는 어때?

안젤리아

스캔했다며.

AK12

네 지금 느낌 말이야.

안젤리아

여전히 온몸이 아파 죽겠어.

하지만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호전되는 중이란 뜻이지.

AK12

검사한 대로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1주일은 더 누워 있으라 했겠지만, 벌써 들쑤시고 다닐 의욕이 넘치지?

안젤리아

바깥 상황은?

AK12

뭐랄까... 과연 독일의 심장이라고나 할까?

이 아파트는 브레멘에서 빌렸던 데보다 조건이 훨씬 좋아. 거주 사양은 물론 감시 수준도.

RPK가 혼자서 찾아낸 도청기랑 카메라만으로도 가게 하나 차려도 될 정도라니까.

침대에서 일어난 안젤리아는 AK-12의 옆을 지나 창가에 다가가, 저 멀리의 건물을 바라봤다.

여기는 8층. 감시하기 용이하도록, 슈타지는 적당히 높은 위치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AK12

네가 자는 사이에 RPK랑 같이 감금 기간 중의 정보를 정리했어.

안젤리아

브레멘 쪽은 어때?

AK12

네 예상대로야, K가 몰리도를 놓쳐 버렸어.

안젤리아

쯧.

뭐, 그런 상황에서 녀석을 잡기도 어려웠겠지.

나조차도 녀석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으니.

이 아파트는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데도, 반대편 건물들에서 틈틈이 반짝이는 것들이 안젤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안젤리아

저것들, 슈타지야 딴 놈들이야?

AK12

글쎄? 다만 슈타지는 거의 다 이 아파트 안에 있을 거야.

애써 불편하게 다른 건물에서 여길 감시하니, 다른 동네 사람일지도.

안젤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커튼을 닫았다.

AK12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그쪽에서 몰리도의 자택을 수색한 결과, 이걸 찾아냈대.

AK-12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의 첫 장은 별다른 내용 없이 사진 한 장뿐이었다.

안젤리아가 고개를 돌려 확인한 테이블 위의 그 사진은, 익숙한 서양식 저택을 담고 있었다.

안젤리아

...익숙한 양옥이네.

AK12

아주 눈에 익지?

안젤리아

위치도 찾았어?

AK12

아직. RPK가 지금 노력 중이야.

하지만 찾아내더라도 과연 슈타지가 순순히 우리한테 자유 활동을 허가할까?

안젤리아

지금 여길 감시하는 놈들은 몇 명이나 돼?

AK12

정확히 몇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브레멘 때보단 훨씬 많아. 게다가 전혀 친절하지 않지.

아무래도 배달 주문은 포기해야겠어.

안젤리아

따돌릴 만한 방법은?

놈들이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AK12

있더라도 아주 어렵지. 이번엔 우릴 도와줄 슈타지 요원도 없을뿐더러, 우리의 동향을 낱낱이 감시하려고 우르르 몰려나올 테니까.

여긴 저쪽의 홈그라운드라고. 우리들만으로 저들의 눈 밑에서 움직이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야.

안젤리아

......망할.

그 말을 듣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안젤리아

이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거기에 계속 잡아 두는 게 자기들도 편했을 텐데.

우릴 꺼내 준 게 대체 누군지는 알아냈어?

AK12

안 그래도 막 그 얘길 하려던 참이야.

RPK랑 밤새 고생했지만 헛수고였어.

일단 확실한 건, 보다시피 독일놈들은 우릴 풀어 준 거에 불만이 잔뜩이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단 점이려나?

안젤리아

흥...

그래서 수확이 전혀 없다는 거지?

AK12

전혀 없진 않거든?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아무래도 베를린은 지금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쁜가 봐.

안젤리아

앞가림?

AK12

이걸 봐.

AK-12가 리모컨을 들어, 방의 텔레비전을 켰다.

때마침 아침 뉴스가 방송 중이었고, 씩씩한 분위기의 여성 기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

네, 지금 현장에 나와 있는 기자 섀도리스입니다.

제가 나와 있는 이 강변 구역 동부는 지금 시위행진이 백열화 상태로 치달은 상황입니다.

취재한 영상을 보시죠.

영상 속의 빽빽하게 모여 시위대를 이룬 사람들은, 얼굴엔 같은 심볼을 그리고, 표어를 높이 들고서, 지난 세기의 의인이라도 되는마냥 행진하며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쳐댔다.

유사시를 대비해 진압용 무기를 들었음에도, 경찰들은 쉽사리 접근하질 못했다.

거리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메우고 공권력에 대항하는 군중 앞에 스스로 나설 담력이 없는 자는 그저 슬슬 뒷걸음질칠 뿐이었다.

섀도리스

불만의 함성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으며, 시위대의 대표는 이를 게으른 정부에 대한 정당한 항의라 주장했습니다.

저희가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이는 수일 전 갈라테아 그룹이 선보인 항붕괴 치료제 "이둔 III형"의 상용화 추진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과 관계 있어 보이며...

안젤리아는 한 모금 마신 커피를 내려놓고,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양옥의 사진 외에도 "몰리도 포거트"의 신상 정보도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쓸모가 없었다.

안젤리아

저 사람들은 왜 저런대?

AK12

지난 3개월간, 베를린에서 악질적인 범죄 사건이 다수 발생했더라.

그 이전부터도 몇 개월째 베를린 시내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나 폭탄 테러 등 갖가지 소란이 일어났는데, 발생 빈도와 수사 난이도 탓에 상황은 점점 경찰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피해가 누적된 끝에, 결국 대충 1개월 전쯤부터 민간인의 생활에까지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나?

오랫동안 쌓인 불만이 마침내 터진 게 저 난리라 봐야지.

안젤리아

하지만 시위라며. 지금?

AK12

응, 현재진행형. 여긴 정부의 행정 구역이니까 태평한 척 꾸밀 수라도 있지, 구시가지는 지금 가면 얼마나 난장판인지 바로 보일 거야.

지금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안젤리아는 텔레비전에서 송출되는 화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결코 일시적인 불만 때문이 아니다.

헌데, 어째선지 영문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젤리아는 다시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려고 왼손을 뻗었다.

철썩.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AK12

안젤리아?!

안젤리아

......

오작동을 일으킨 왼손을 본 안젤리아는 드물게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상태를 확인하듯, 가볍게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이고, 주먹도 쥐어보았다.

어지간히도 놀랐던지, AK-12도 눈을 떴다.

안젤리아

손질 안 한 지 꽤 됐으니...

속에서 어딘가 고장이라도 났나 보네.

AK12

...정밀 점검할까?

안젤리아

됐어, 의사도 못 부르고 교환할 부품도 없는데.

슈타지 놈들한테 맡겼다간 여기다 뭘 심을지도 모르고.

AK12

알았어... 적이랑 서로 총 겨누다 대뜸 떨어뜨리지만 마.

안젤리아

내가 총을 쥐는 건 오른손이야.

똑똑.

안젤리아

들어와.

RPK16

안젤리아~ 잘 주무셨어요?

RPK-16이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시선이 창가에 앉은 AK-12에게 고정됐다.

RPK16

꽤 잘 잤나 보네요.

안젤리아

시답잖은 말은 됐고, 무슨 일이야?

RPK16

그야 당연히 우릴 구해준 그 친절한 분에 관해서죠.

어제 밤을 꼬박 새면서 우리 선배님이랑 같이 고생했는데도 빵 부스러기 하나 못 찾아냈는데, 방금 막 전환점이 생겼어요.

안젤리아

전환점?

RPK16

내부 통신망으로 메시지를 받았답니다.

제 방화벽까지 완벽하게 우회해서, 수신하고 나서야 눈치챘다니까요.

추적해보려 했지만... 말 안 해도 알겠죠? 흔적조차 안 남겼어요.

AK12

너마저도 무리였어?

RPK16

저마저도 무리였어요.

안젤리아

내용은?

RPK16

제목은 그냥 ID예요.

"요한복음.8.12".

안젤리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겉멋만 잔뜩 든 놈이군.

AK12

진짜 징그럽네. 괜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짐작 가는 사람 있어?

안젤리아

내가 이렇게 폼이나 잡는 사람을 알 거 같아?

RPK16

메시지 내용도 그냥 인사치레예요.

"경애하는 안나 빅토로브나 최 양."

"저의 참견에 미리 사과드리며, 브레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과 슈타지의 내부 경쟁과 그로 인한 그릇된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패러데우스에 관해 필히, 그리고 긴히 상담할 일이 있사오니, 오늘 오후까지 만나러 와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추신 - 아파트의 환경이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군요."

마지막은 주소고요. 확인해보니 구시가지의 술집이라네요?

AK12

나 빗자루 좀 가져올게.

안젤리아

빗자루는 왜?

AK12

닭살 돋다 못해 바닥에 쏟아진 것 좀 치우려고.

RPK16

갈 건가요?

안젤리아

솔직히... 진짜 가기 싫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 셋이 뭔지 알아?

RPK16

AK-12랑 저 같은 사람이요?

안젤리아

쓸데없이 의지박약한 놈이랑 같잖게 허세 부리는 놈.

RPK16

또 하나는요?

안젤리아

윌리엄.

안젤리아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과자도 으적으적 씹어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입었다.

안젤리아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도 없지. 게다가 그 사람이 우릴 거기서 꺼내준 것도 사실이고.

어디, 무슨 헛소리나 지껄일지나 들어보러 가자.

RPK16

네~ 그럼 AN-94랑 AK-15도 불러올게요.

안젤리아

아 참, 그 전에...

......

슈타지 요원 A

목표가 건물에서 이탈.

현재 북동쪽으로 이동 중이다, 이상.

슈타지 요원 B

당측에서도 확인.

목표 수 5명임을 관측.

안젤리아 및 휘하 전술인형임을 확인했다, 이상.

??

<color=#00CCFF>소련 국가 안전국의 최고급 전술인형 소대, "늑대 무리"다.</color>

<color=#00CCFF>정밀 시각 시스템을 지녔으니 B팀은 즉시 무기를 수납하라, 이상.</color>

슈타지 요원 B

알았다, 무기를 수납한다. 이상.

??

<color=#00CCFF>안젤리아는 실전 경험이 매우 풍부한 베테랑이다. 정면에서의 힘싸움은 금물이니 유의하도록.</color>

<color=#00CCFF>불가피할 경우, 목표를 놓친 위치를 보고하라.</color>

<color=#00CCFF>예비 팀이 그 즉시 백업할 거다. 이상.</color>

슈타지 요원 A

알겠다, 이상.

??

<color=#00CCFF>지형과 유동인구가 우리의 최대 이점이니, 최대한으로 활용하도록.</color>

<color=#00CCFF>그녀를 이겨보자, 제군들. 슈타지의 근성을 보여 주자.</color>

슈타지 요원 A&B

J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