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첼리 트럼펫 Ⅲ
"구원의 길은 이 안에 있다."
정부는 우리의 요구에 응답하라!
국민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무시하는 관료가 파시스트와 뭐가 다르냐! 응답하라!
응답하라! 응답하라!
......
보고, 안젤리아가 다리를 통과한다. 이상.
역시. 수고했다, 귀측의 임무는 이제 종료한다. 이상.
A팀이 임무를 완수했다. C팀, D팀, 인수인계 준비.
당측 C팀. 알았다, 이상.
당측 D팀. 알았다, 이상.
안젤리아는 사람들 무리를 이용해 추적을 따돌리는 것이 특기다. 각 팀은 시야의 사각지대에 특히 주의하도록.
더불어, 혼란을 틈타 상대가 공격해 오는 것도 주의하라. 안젤리아 본인부터가 뛰어난 전사다.
다른 인형들은 두말할 것 없고.
안젤리아가 다리를 건너왔음을 확인, 현재 베이커 가로 진입한다. 이상.
시위대의 이동 상황은?
현재 동쪽 웨일랑코 방면으로 전진 중. 이상.
E팀, F팀, 적당히 쫓아내도록.
목표가 쉽게 시선을 돌리게 만들 거리를 사전에 차단한다. 이상.
알겠다.
해당 구역 내에 경찰 측 인원이 있다. 그들에게 통지할까? 이상.
어떤 식으로든 시위대와 접촉하면 몸싸움이 되어 버린다.
훈련받지 않은 인원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니 내버려두도록.
나는 계속 고지대에서 위치를 파악하겠다. 모두 방심하지 마라. 이상.
Ja!
......
고층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청년은 통신을 종료하고, 시위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필 오늘 이렇게 대규모 시위행진이 일어난 걸까?
안젤리아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으로 왔을까?
뭔가가 영 찝찝해...
내 착각이면 좋겠는데.
콰앙!
......!
라이트가 혼잣말로 중얼대던 그때.
시위대의 가장 앞 방향에서 느닷없이 폭음이 들렸다.
......
다리 앞을 지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던 안젤리아는, 어째선지 행진하는 시위대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를 더 많이 끌어들이려는 건진 몰라도, 이 시위자들은 하나같이 지칠 줄 모르는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도시에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시위의 파급력을 키우기 위해서일까?
어찌 됐든 안젤리아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바글바글한 군중으로 추적자의 시선을 가리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우회해 적의 뒤를 치는 것이 그녀의 특기다.
이 수법은 지금까지 시원찮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쳇!
몸에 추적기라도 붙인 것처럼, 어떻게 움직여도 상대는 껌딱지처럼 그녀를 바짝 쫓았다.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어도, 상대의 시야에서 정말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를 못했다.
슬슬 무력행사라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시위대의 파도 속에선 시간도, 자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AK-12! AN-94!
안젤리아! 너 지금 어딨어!?
난 지금... 에이 씨!
지금 자신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알아낼 수조차 없었다.
뭣 때문인지 행렬 앞에서 충돌이 일어나, 시위대는 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서로 밀치는 이들이 긴밀하게 소통할 리도 없었으니, 뒷이어 오던 사람들은 앞사람을 밀어도 꿈쩍도 안 하니 점점 혼란에 빠졌다.
이로 인해 안젤리아와 리벨리온이 흩어진 지 벌써 5분. 리벨리온은 각자 신호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안젤리아에겐 통신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천하장사인 인형이라도 힘을 발휘할 공간이 없다.
게다가 사방의 길목에서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드는 통에, AK-15조차도 길을 열어 안젤리아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어? 이 자식 경찰이네!? 이봐요들! 여기 경찰 있어요!!
?!
어쩐지! 쁘락치다! 경찰놈들이 우리 사이에 쁘락치를 심어놨다!!
자, 잠깐! 나는――
고함은 신호탄이 되어, 이미 짜증으로 터지기 직전이던 시위자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사람이 정말 프락치인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 없이, 제발로 걸려든 목표에게 쌓였던 분노를 퍼부었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젤리아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팔을 잡혀 억지로 끌려갔다.
윽?! 이거 놔!
으아악!!
저항에 팔이 탈골된 남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안젤리아를 잡아당기는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상황을 파악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그녀 주위의 모두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어딘가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젠장...!
고장난 의수가 하필이면 또 이럴 때 말을 안 들었다.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안젤리아는 어떻게든 몸부림쳤지만, 결국 하수구로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자신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거 놓으라―― 우왓!
풀썩.
세게 밀쳐진 안젤리아는 인파 밖으로 튕겨져 나오면서 발을 살짝 헛디뎌, 하마터면 인도 위의 계단에 넘어질 뻔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밀고 당기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함께 행렬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계속 고함을 지르며 안젤리아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서, 안젤리아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겨우 내렸다. 몇 초만 늦었어도 최소 서너 명은 쓰러졌을 것이다.
인파 속에서 밖으로 튕겨나온 느낌은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개운하여, 두 번 다신 이 방법을 쓰기 싫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들은 일부러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덤으로 그녀를 미행하던 슈타지 요원들까지 대신 처리해 주었다.
안젤리아는 권총을 홀스터에 도로 넣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뭔가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찰나,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뭐어...?
"미네르바의 부엉이".
저 "시위대"가 안젤리아를 인도한 그곳은 바로 메시지에 적혔던 주소의 술집이었다.
소란스러운 거리로 묵묵히 입구를 향하는 술집은, 밝은 대낮인데도 간판의 네온 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쪽으로 고개는커녕 곁눈질도 않고, 감정 분출에만 몰두했다. 안젤리아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집의 문 앞 계단엔, 누더기 차림의 거지가 앉아 있었다.
지그시 안젤리아를 바라보는 그 후드 밑의 눈은 전혀 흐리멍텅하지 않고,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안젤리아도 어렵잖게 그녀를 눈치챘다. 방금 자신이 총을 수납하던 것이 눈에 띈 것이 아닌가 싶었다.
......
안젤리아?
......!!
거지는 나지막이 안젤리아의 이름을 말했고, 반응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의 길은 이 안에 있소이다.
거지는 지팡이를 들어 술집의 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문틀에 기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술집에 구원은 무슨.
무슨 디스토피아 문학이야?
리벨리온을 기다릴까? 혼자서 쳐들어갈까?
......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안젤리아는 발을 내디뎠다.
대충 누군지 알겠다.
옆에서 벌써 잠꼬대를 하는 "거지"를 곁눈질하고, 가볍게 문을 노크한 안젤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서 힘껏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초인종이 경쾌하게 딸랑이며 안젤리아의 입장을 알렸다.
주인쟈앙! 여기 스크류드라이버 한 잔 더어!
동작 그만, 어디서 밑장빼기여!?
두꺼운 나무 문이 의외로 방음 효과가 있단 것을, 그리고 이 좁은 공간이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안젤리아는 문을 여는 순간 알게 되었다.
바글바글한 손님들의 언성으로 피아노의 선율이 묻혀버릴 정도인, 이 온갖 인간 군상이 모인 곳. 비밀스런 만남을 가지기 적당한 장소였다.
......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일까? 술집은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 아무도 안젤리아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구시가지의 시설처럼, 베를린의 중산층과 하류층 시민들이 하소연하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렇게나 시끄러우니, 안젤리아의 발소리를 들은 사람이 안젤리아 본인뿐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천천히, 낡은 바닥 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리며 나아가면서도, 0.5초 안에 권총을 뽑아 들 수 있는 태세를 유지했다.
휘유우~ 휙!!
카운터 앞의 건달 티 나는 남자가, 안젤리아 너머의 웨이트리스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온통 누런 이를 시원스럽게 드러내는 미소로 낄낄대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젤리아가 그를 흘깃 봤지만,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문제의 인물과 대면하기도 전에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인지, 여전히 안젤리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술잔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건달은 안젤리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술집 안의 모두가,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어디서 왔냐 말을 걸지도, 주문하겠냐 묻지도, 수상쩍은 시선을 향하지도 않았다.
마침 이쪽을 보는 사람조차도 그저 멍하니 허공을 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짚었군...
노련한 요원으로서, 안젤리아는 위기에 대한 후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비록 눈앞의 광경이 누가 봐도 뒤숭숭함에도,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전혀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안젤리아는 다시 술집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술집처럼, 담배, 맥주, 노름으로 가득한 분위기로. 만약 쉬는 날이었다면 여기서 한잔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칫.
이렇게 자연스러운 이곳에서 안젤리아의 존재 자체가 이물질이었다.
그렇기에, 또 다른 "이물질"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목표를 찾았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술집에선 손님을 더 들일 수 있도록, 한낮엔 보통 테이블을 댄스홀 주변에 둔다. 물론 여기도 예외가 아닐 터.
하지만 세팅된 테이블이 가득 놓인 댄스홀의 중앙은 텅텅 비어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종업원도, 손님도 없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눈에 띄는 자리가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에 마주앉은 의자 두 개.
그 중 한 자리엔 벌써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안젤리아를 등진 탓에, 팔걸이에 얹은 손등만이 보였다.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테이블 위엔 상당히 고급인 술병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안젤리아를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저 괴상한 자리를 보지 않았다.
마치, 안젤리아의 눈에만 보이는 "다른 세계" 같았다.
어서 와서 앉으시게, 안젤리아 양.
밖이 꽤 소란스러운데, 힘들진 않았나?
진중한 목소리가 그 테이블 쪽에서 들려왔다. 안젤리아는 아직 이렇다 할 소리도 내지 않았건만, 저 사람은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녀가 왔음을 알아챘다.
안젤리아는 말없이 빙 돌아가, 테이블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문에 들어오기 전, 여러 가능성을 최대한 생각해봤습니다.
여러 가지 예상안이 나왔지만, 보아하니 상황이 완전히 제 예상 밖이군요.
전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긴 하지.
기품 있게 앉은,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이 중년 남성은 말하면서도 손의 안경을 닦는 데 열중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 기품에 어울리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입을 더 열지 않아도, 안젤리아는 그가 십중팔구 영국인이리라 짐작했다. 몸에서부터 영국인의 특징이 넘쳐흘렀으니까.
당당하고, 신사적이고, 고고하고, 거리감 있고... 그리고, 한껏 겉멋을 내는 점까지.
안젤리아는 그를 주시했지만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천천히 안경을 오뚝한 콧등에 걸치고, 잿빛이 감도는 눈으로 안젤리아를 스윽 훑었다.
찰나였지만,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번뜩임이었다.
뭐, 어차피 요원 나부랭이는 잘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를 해야죠.
여기까지 오면서, 이곳이 어떤 모습인지는 체험했을 터이니...
부디 그들의 무례만으로 베를린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네.
안젤리아의 떠보는 말은 무시하고, 남자는 깍지 낀 손을 다리에 올려놓고서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브레멘과는 인상이 상당히 달랐겠지?
...예.
입술을 질끈 깨물어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안젤리아는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네, 끔찍했죠.
베를린은 더 끔찍하다네.
남자는 담담하게 말하며,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런 세상 한탄이나 하려고 불렀습니까?
필시 이런 대화가 시간 낭비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안젤리아 양, 우린 언제나 자기자신을 기만한다네. 세상이 이미 올바른 궤도에 올랐다 착각하고 있지.
하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고, 너무나도 많은 어둠이 여전히 묻혀 있지.
베슬란과 같은 참극을 몇 번이고 초래할 어둠이.
세상만사가 정말 마음 먹는대로 된다면... 자네의 부모님이 어찌 그런 불행에 휘말렸겠나?
콰당!
그 말에 안젤리아가 자리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가 넘어졌다.
......
그리고 그 순간, 시장 바닥이던 술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 덕에 안젤리아는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모두가, 방금까지 안젤리아를 못 본 척하던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이 술집에 진짜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
독수리 같은 남자의 시선과,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안젤리아의 시선이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였다.
잠시 후, 남자가 숟가락으로 눈앞의 빈 접시를 종처럼 가볍게 탁 쳤다. 접시는 경쾌한 소리를 냈고, 일제히 멈췄던 술집은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넘쳐 쏟아지는 맥주의 거품, 떠나갈 듯한 사람들의 웅성거림... 전부 안젤리아가 막 들어왔을 때로 돌아왔다.
살기를 내뿜던 "술집 사람들"은 다시 베를린의 소시민들로 되돌아갔고, 순간 그녀에게 쏟아졌던 압박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위협하는 겁니까?
양해해 주시게. 자넨 노련한 특수요원이고, 난 무력한 노인이잖나.
저 친구들은 그저, 만약 우리가 다툼이라도 벌일 경우 내가 우위를 점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을 뿐일세.
노인이라... 눈빛은 전혀 아닌데 말이죠.
방금 제가 정말 뭘 어쩔 셈이었어도, 당신은 굳이 저들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잖습니까.
아무튼 앉으시게, 안젤리아 양.
아직 대화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잖나?
그리고 내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슈타지의 심문실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을 터 아닌가.
안젤리아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엄지로 휙 튕겼다. 금화는 공중에서 회전하다, 안젤리아 앞에 툭 떨어졌다.
......
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금화가 서서히 느려지다 쓰러지는 것을 끝까지 본 뒤, 안젤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응시했다.
정말로 당신이라니.
우리는 적이 아니라네, 안젤리아 양.
오히려... 아주 끈끈한 전우지.
당신이랑요? 흥... 과연 어떨까요.
저보다 훨씬 손이 더러운 주제에, 뻔뻔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논할 자격은 있습니까?
우리의 목표는 같아. 그걸 부정하진 않겠지?
물론, 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이상은 일치하지, 바로 루크사트를 위해서.
운명공동체... 그런 말장난은 벌써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당신 쪽 똘마니를 구슬리는 덴 먹힐지 몰라도, 저한텐 됐으니까 도로 넣으시죠.
젤린스키와 미하일이 왜 하필 자네를 독일로 보냈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
안젤리아 양, 난 자네가 우수한 요원임을 믿어 의심치 않네. 상황 판단력도 보통 뛰어난 게 아니잖나. 그러니 잘 생각하길 바라.
어쩌면 자네는 처음부터 나와 손을 잡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네. 내키지 않았어도 결국 이 술집의 문을 연 것처럼.
하지만 지금 자네는 궁지에 몰린 생쥐야. 이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가릴 여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래도 날 믿지 못하겠다면, 자네의 직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렇다면, 여기선 아무 일도 없었네. 당당하게, 들어왔을 때처럼 여길 나가도 좋아.
......제 직감으론, 위스키라도 뿌려서 당신 머리를 좀 식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남자의 미소는 시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위스키도 좋지. 자, 앉으시게.
안젤리아는 계속해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곤 안젤리아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내 자신 있게 추천하는 브랜드일세.
......
결국 안젤리아는 깊게 심호흡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높이 사는 거야.
흐름을 볼 줄 알거든.
됐으니까 얼른 본론이나 말하세요. 단서라도 찾았습니까?
자 그럼, 다시 베를린 이야기로 돌아가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진 이미 보았겠지?
시위 말입니까?
얼마 전만 해도 베를린은 이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네. 오히려, 정화된 지역들 중 회복과 성장이 가장 빠른 곳이었지.
뭐든 좋다고만 할 수도 없네만, 평소대로였다면 이곳에서 불온의 씨앗은 찾기 힘들었을걸세.
제가 본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군요.
씨앗은 바람에 실려 오기도, 짐승이 물어 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그걸 조사해 달라?
그렇네.
그럴 여유 없습니다.
제가 독일에 온 목적은 당신도 아주 잘 알 텐데요.
날 믿어 주시게, 안젤리아 양.
우리의 목적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도 금방 알게 될 터이니.
...윌리엄과 관계 있는 겁니까?
내가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 사건의 뿌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네.
브레멘에 이어 베를린에, 패러데우스는 더욱 큰 규모의 테러를 계획 중일세.
테러...?!
안젤리아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난 몇 개월간 발생했던 사건들 전부, 배후에서 그 하얀 교단의 그림자를 찾았다네.
그들은 선동하고 있어. 민심에 불안을 심고 선동하고 있어.
내 추측건대, 때가 무르익으면 그들은 이 불안을 이용해 베를린의 시스템을 단숨에 무너뜨릴 테지.
그리 함으로서... 그들이 꺼리는 어떤 일이 진전되는 것을 막을 속셈임이 분명하네.
그들이 꺼리는 일...?
당신네와 관계 있는 일입니까?
중요한 회의가 있을 예정이네.
남자는 술잔을 들었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더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출처는요?
출처는 물론 나의 개인적인 정보통이네만, 신빙성이라면 걱정 말게.
하지만 그것뿐. 자세한 시간, 장소, 실행 인원, 계획의 내용...
다 당신이 조사해야 하는 사항이네.
그거 말곤 저한테 도움되는 거 없습니까?
물론 있지. 내 힘이 닿는 한, 당신에게 공권력을 포함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겠다 약속하네.
여전히 의심스럽다면, 이미 내 도움을 받았잖나?
네, 절 지원하라고 독일 정부를 설득했죠. 어련하시겠습니까.
안젤리아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하죠?
다른 곳도 아니고 베를린이니, 테러 행각을 벌이려면 폭약만으론 턱없이 모자라네.
그러니, 일반적으론 탐지가 불가능한 신개념의 무기임이 분명해.
자네와 나... 모두에게 익숙한 무기 말일세.
익숙한 무기... 그 꽃가루 폭탄 말입니까?
그럼 플로라 연구소의 리오니를 조사하면 되나요?
그녀는 마침 그저께 비밀리에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네.
분명 이 일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서일 게야.
......
질문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양옥, 어딨는지 아시죠? 말해 주시죠.
그건 지금으로선 전혀 중요치 않아.
제가 포기 안 한다는 건 아실 텐데요.
......
남자는 술을 한 모금 홀짝이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베를린에서의 일을 해결하면, 양옥의 위치를 알아봐 주지.
좋습니다.
허나 취사선택에 유의하길 바라네, 요원.
무엇이 우선인지, 잘 판단하게.
전 지금도 당신을 의심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조사는 해드리죠, 제 방식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을 쓰든 상관없네.
그 외에는요?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려고요? 다른 지원도 없이?
이래 봬도 난 바쁜 몸이라네, 요원. 나의 싸움은 자네 모르는 곳에서 아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
그래도...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내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지.
깜짝 선물이라뇨?
자네의 오랜 친구가 이리로 오는 중이네. 지금 자네에게 절실한 지원과 정보와 함께.
방향성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이 만남이 진심으로 반가우리라, 내 장담하네.
......누구 말입니까.
크루거가 총애하는 그 젊은이.
......
안젤리아의 눈썹이 살짝 들썩했다.
진작에 생각 못한 내가 바보지... 하긴, 그야 당신이 부른 지원인데.
서로 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라네.
부디 제 시간 낭비가 아니길 바라죠.
내 정보망에 새로운 진전이 있다면 바로 자네에게도 전달하겠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기를 추천하지. 지금 정문 방향은 많이 혼란스러워서 말이야.
남자는 테이블의 금화를 내밀었고, 안젤리아는 그걸 흘깃 보곤 덥석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
똑 똑.
안젤리아가 떠나는 걸 확인한 남자는 팔걸이를 두드리고 일어나, 그대로 다른 문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에서 뜨고 1분 후, 술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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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우리의 요구에 응답하라!
국민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무시하는 관료가 파시스트와 뭐가 다르냐! 응답하라!
응답하라! 응답하라!
......
보고, 안젤리아가 다리를 통과한다. 이상.
<color=#00CCFF>역시. 수고했다, 귀측의 임무는 이제 종료한다. 이상.</color>
<color=#00CCFF>A팀이 임무를 완수했다. C팀, D팀, 인수인계 준비.</color>
당측 C팀. 알았다, 이상.
당측 D팀. 알았다, 이상.
<color=#00CCFF>안젤리아는 사람들 무리를 이용해 추적을 따돌리는 것이 특기다. 각 팀은 시야의 사각지대에 특히 주의하도록.</color>
<color=#00CCFF>더불어, 혼란을 틈타 상대가 공격해 오는 것도 주의하라. 안젤리아 본인부터가 뛰어난 전사다.</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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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아가 다리를 건너왔음을 확인, 현재 베이커 가로 진입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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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쪽 웨일랑코 방면으로 전진 중. 이상.
<color=#00CCFF>E팀, F팀, 적당히 쫓아내도록.</color>
<color=#00CCFF>목표가 쉽게 시선을 돌리게 만들 거리를 사전에 차단한다. 이상.</color>
알겠다.
해당 구역 내에 경찰 측 인원이 있다. 그들에게 통지할까? 이상.
<color=#00CCFF>어떤 식으로든 시위대와 접촉하면 몸싸움이 되어 버린다.</color>
<color=#00CCFF>훈련받지 않은 인원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니 내버려두도록.</color>
<color=#00CCFF>나는 계속 고지대에서 위치를 파악하겠다. 모두 방심하지 마라. 이상.</color>
Ja!
<color=#00CCFF>......</color>
고층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청년은 통신을 종료하고, 시위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필 오늘 이렇게 대규모 시위행진이 일어난 걸까?
안젤리아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으로 왔을까?
뭔가가 영 찝찝해...
내 착각이면 좋겠는데.
콰앙!
......!
라이트가 혼잣말로 중얼대던 그때.
시위대의 가장 앞 방향에서 느닷없이 폭음이 들렸다.
......
다리 앞을 지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던 안젤리아는, 어째선지 행진하는 시위대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를 더 많이 끌어들이려는 건진 몰라도, 이 시위자들은 하나같이 지칠 줄 모르는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도시에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시위의 파급력을 키우기 위해서일까?
어찌 됐든 안젤리아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바글바글한 군중으로 추적자의 시선을 가리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우회해 적의 뒤를 치는 것이 그녀의 특기다.
이 수법은 지금까지 시원찮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쳇!
몸에 추적기라도 붙인 것처럼, 어떻게 움직여도 상대는 껌딱지처럼 그녀를 바짝 쫓았다.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어도, 상대의 시야에서 정말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를 못했다.
슬슬 무력행사라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시위대의 파도 속에선 시간도, 자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AK-12! AN-94!
<color=#00CCFF>안젤리아! 너 지금 어딨어!?</color>
난 지금... 에이 씨!
지금 자신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알아낼 수조차 없었다.
뭣 때문인지 행렬 앞에서 충돌이 일어나, 시위대는 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서로 밀치는 이들이 긴밀하게 소통할 리도 없었으니, 뒷이어 오던 사람들은 앞사람을 밀어도 꿈쩍도 안 하니 점점 혼란에 빠졌다.
이로 인해 안젤리아와 리벨리온이 흩어진 지 벌써 5분. 리벨리온은 각자 신호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안젤리아에겐 통신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천하장사인 인형이라도 힘을 발휘할 공간이 없다.
게다가 사방의 길목에서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드는 통에, AK-15조차도 길을 열어 안젤리아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어? 이 자식 경찰이네!? 이봐요들! 여기 경찰 있어요!!
?!
어쩐지! 쁘락치다! 경찰놈들이 우리 사이에 쁘락치를 심어놨다!!
자, 잠깐! 나는――
고함은 신호탄이 되어, 이미 짜증으로 터지기 직전이던 시위자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사람이 정말 프락치인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 없이, 제발로 걸려든 목표에게 쌓였던 분노를 퍼부었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젤리아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팔을 잡혀 억지로 끌려갔다.
윽?! 이거 놔!
으아악!!
저항에 팔이 탈골된 남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안젤리아를 잡아당기는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상황을 파악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그녀 주위의 모두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어딘가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젠장...!
고장난 의수가 하필이면 또 이럴 때 말을 안 들었다.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안젤리아는 어떻게든 몸부림쳤지만, 결국 하수구로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자신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거 놓으라―― 우왓!
풀썩.
세게 밀쳐진 안젤리아는 인파 밖으로 튕겨져 나오면서 발을 살짝 헛디뎌, 하마터면 인도 위의 계단에 넘어질 뻔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밀고 당기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함께 행렬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계속 고함을 지르며 안젤리아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서, 안젤리아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겨우 내렸다. 몇 초만 늦었어도 최소 서너 명은 쓰러졌을 것이다.
인파 속에서 밖으로 튕겨나온 느낌은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개운하여, 두 번 다신 이 방법을 쓰기 싫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들은 일부러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덤으로 그녀를 미행하던 슈타지 요원들까지 대신 처리해 주었다.
안젤리아는 권총을 홀스터에 도로 넣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뭔가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찰나,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뭐어...?
"미네르바의 부엉이".
저 "시위대"가 안젤리아를 인도한 그곳은 바로 메시지에 적혔던 주소의 술집이었다.
소란스러운 거리로 묵묵히 입구를 향하는 술집은, 밝은 대낮인데도 간판의 네온 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쪽으로 고개는커녕 곁눈질도 않고, 감정 분출에만 몰두했다. 안젤리아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집의 문 앞 계단엔, 누더기 차림의 거지가 앉아 있었다.
지그시 안젤리아를 바라보는 그 후드 밑의 눈은 전혀 흐리멍텅하지 않고,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안젤리아도 어렵잖게 그녀를 눈치챘다. 방금 자신이 총을 수납하던 것이 눈에 띈 것이 아닌가 싶었다.
......
안젤리아?
......!!
거지는 나지막이 안젤리아의 이름을 말했고, 반응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의 길은 이 안에 있소이다.
거지는 지팡이를 들어 술집의 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문틀에 기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술집에 구원은 무슨.
무슨 디스토피아 문학이야?
리벨리온을 기다릴까? 혼자서 쳐들어갈까?
......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안젤리아는 발을 내디뎠다.
대충 누군지 알겠다.
옆에서 벌써 잠꼬대를 하는 "거지"를 곁눈질하고, 가볍게 문을 노크한 안젤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서 힘껏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초인종이 경쾌하게 딸랑이며 안젤리아의 입장을 알렸다.
주인쟈앙! 여기 스크류드라이버 한 잔 더어!
동작 그만, 어디서 밑장빼기여!?
두꺼운 나무 문이 의외로 방음 효과가 있단 것을, 그리고 이 좁은 공간이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안젤리아는 문을 여는 순간 알게 되었다.
바글바글한 손님들의 언성으로 피아노의 선율이 묻혀버릴 정도인, 이 온갖 인간 군상이 모인 곳. 비밀스런 만남을 가지기 적당한 장소였다.
......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일까? 술집은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 아무도 안젤리아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구시가지의 시설처럼, 베를린의 중산층과 하류층 시민들이 하소연하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렇게나 시끄러우니, 안젤리아의 발소리를 들은 사람이 안젤리아 본인뿐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천천히, 낡은 바닥 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리며 나아가면서도, 0.5초 안에 권총을 뽑아 들 수 있는 태세를 유지했다.
휘유우~ 휙!!
카운터 앞의 건달 티 나는 남자가, 안젤리아 너머의 웨이트리스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온통 누런 이를 시원스럽게 드러내는 미소로 낄낄대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안젤리아가 그를 흘깃 봤지만,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문제의 인물과 대면하기도 전에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인지, 여전히 안젤리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술잔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건달은 안젤리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술집 안의 모두가, 안젤리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어디서 왔냐 말을 걸지도, 주문하겠냐 묻지도, 수상쩍은 시선을 향하지도 않았다.
마침 이쪽을 보는 사람조차도 그저 멍하니 허공을 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짚었군...
노련한 요원으로서, 안젤리아는 위기에 대한 후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비록 눈앞의 광경이 누가 봐도 뒤숭숭함에도,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전혀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안젤리아는 다시 술집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술집처럼, 담배, 맥주, 노름으로 가득한 분위기로. 만약 쉬는 날이었다면 여기서 한잔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칫.
이렇게 자연스러운 이곳에서 안젤리아의 존재 자체가 이물질이었다.
그렇기에, 또 다른 "이물질"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목표를 찾았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술집에선 손님을 더 들일 수 있도록, 한낮엔 보통 테이블을 댄스홀 주변에 둔다. 물론 여기도 예외가 아닐 터.
하지만 세팅된 테이블이 가득 놓인 댄스홀의 중앙은 텅텅 비어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종업원도, 손님도 없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눈에 띄는 자리가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에 마주앉은 의자 두 개.
그 중 한 자리엔 벌써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안젤리아를 등진 탓에, 팔걸이에 얹은 손등만이 보였다.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테이블 위엔 상당히 고급인 술병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안젤리아를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저 괴상한 자리를 보지 않았다.
마치, 안젤리아의 눈에만 보이는 "다른 세계" 같았다.
어서 와서 앉으시게, 안젤리아 양.
밖이 꽤 소란스러운데, 힘들진 않았나?
진중한 목소리가 그 테이블 쪽에서 들려왔다. 안젤리아는 아직 이렇다 할 소리도 내지 않았건만, 저 사람은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녀가 왔음을 알아챘다.
안젤리아는 말없이 빙 돌아가, 테이블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문에 들어오기 전, 여러 가능성을 최대한 생각해봤습니다.
여러 가지 예상안이 나왔지만, 보아하니 상황이 완전히 제 예상 밖이군요.
전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긴 하지.
기품 있게 앉은, 구레나룻이 하얗게 센 이 중년 남성은 말하면서도 손의 안경을 닦는 데 열중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 기품에 어울리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입을 더 열지 않아도, 안젤리아는 그가 십중팔구 영국인이리라 짐작했다. 몸에서부터 영국인의 특징이 넘쳐흘렀으니까.
당당하고, 신사적이고, 고고하고, 거리감 있고... 그리고, 한껏 겉멋을 내는 점까지.
안젤리아는 그를 주시했지만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천천히 안경을 오뚝한 콧등에 걸치고, 잿빛이 감도는 눈으로 안젤리아를 스윽 훑었다.
찰나였지만,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번뜩임이었다.
뭐, 어차피 요원 나부랭이는 잘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를 해야죠.
여기까지 오면서, 이곳이 어떤 모습인지는 체험했을 터이니...
부디 그들의 무례만으로 베를린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네.
안젤리아의 떠보는 말은 무시하고, 남자는 깍지 낀 손을 다리에 올려놓고서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브레멘과는 인상이 상당히 달랐겠지?
...예.
입술을 질끈 깨물어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안젤리아는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네, 끔찍했죠.
베를린은 더 끔찍하다네.
남자는 담담하게 말하며,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런 세상 한탄이나 하려고 불렀습니까?
필시 이런 대화가 시간 낭비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안젤리아 양, 우린 언제나 자기자신을 기만한다네. 세상이 이미 올바른 궤도에 올랐다 착각하고 있지.
하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고, 너무나도 많은 어둠이 여전히 묻혀 있지.
베슬란과 같은 참극을 몇 번이고 초래할 어둠이.
세상만사가 정말 마음 먹는대로 된다면... 자네의 부모님이 어찌 그런 불행에 휘말렸겠나?
콰당!
그 말에 안젤리아가 자리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가 넘어졌다.
......
그리고 그 순간, 시장 바닥이던 술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 덕에 안젤리아는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모두가, 방금까지 안젤리아를 못 본 척하던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이 술집에 진짜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
독수리 같은 남자의 시선과,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안젤리아의 시선이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였다.
잠시 후, 남자가 숟가락으로 눈앞의 빈 접시를 종처럼 가볍게 탁 쳤다. 접시는 경쾌한 소리를 냈고, 일제히 멈췄던 술집은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넘쳐 쏟아지는 맥주의 거품, 떠나갈 듯한 사람들의 웅성거림... 전부 안젤리아가 막 들어왔을 때로 돌아왔다.
살기를 내뿜던 "술집 사람들"은 다시 베를린의 소시민들로 되돌아갔고, 순간 그녀에게 쏟아졌던 압박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위협하는 겁니까?
양해해 주시게. 자넨 노련한 특수요원이고, 난 무력한 노인이잖나.
저 친구들은 그저, 만약 우리가 다툼이라도 벌일 경우 내가 우위를 점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을 뿐일세.
노인이라... 눈빛은 전혀 아닌데 말이죠.
방금 제가 정말 뭘 어쩔 셈이었어도, 당신은 굳이 저들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잖습니까.
아무튼 앉으시게, 안젤리아 양.
아직 대화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잖나?
그리고 내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슈타지의 심문실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을 터 아닌가.
안젤리아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엄지로 휙 튕겼다. 금화는 공중에서 회전하다, 안젤리아 앞에 툭 떨어졌다.
......
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금화가 서서히 느려지다 쓰러지는 것을 끝까지 본 뒤, 안젤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응시했다.
정말로 당신이라니.
우리는 적이 아니라네, 안젤리아 양.
오히려... 아주 끈끈한 전우지.
당신이랑요? 흥... 과연 어떨까요.
저보다 훨씬 손이 더러운 주제에, 뻔뻔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논할 자격은 있습니까?
우리의 목표는 같아. 그걸 부정하진 않겠지?
물론, 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이상은 일치하지, 바로 루크사트를 위해서.
운명공동체... 그런 말장난은 벌써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당신 쪽 똘마니를 구슬리는 덴 먹힐지 몰라도, 저한텐 됐으니까 도로 넣으시죠.
젤린스키와 미하일이 왜 하필 자네를 독일로 보냈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
안젤리아 양, 난 자네가 우수한 요원임을 믿어 의심치 않네. 상황 판단력도 보통 뛰어난 게 아니잖나. 그러니 잘 생각하길 바라.
어쩌면 자네는 처음부터 나와 손을 잡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네. 내키지 않았어도 결국 이 술집의 문을 연 것처럼.
하지만 지금 자네는 궁지에 몰린 생쥐야. 이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가릴 여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래도 날 믿지 못하겠다면, 자네의 직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렇다면, 여기선 아무 일도 없었네. 당당하게, 들어왔을 때처럼 여길 나가도 좋아.
......제 직감으론, 위스키라도 뿌려서 당신 머리를 좀 식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남자의 미소는 시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위스키도 좋지. 자, 앉으시게.
안젤리아는 계속해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곤 안젤리아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내 자신 있게 추천하는 브랜드일세.
......
결국 안젤리아는 깊게 심호흡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높이 사는 거야.
흐름을 볼 줄 알거든.
됐으니까 얼른 본론이나 말하세요. 단서라도 찾았습니까?
자 그럼, 다시 베를린 이야기로 돌아가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진 이미 보았겠지?
시위 말입니까?
얼마 전만 해도 베를린은 이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네. 오히려, 정화된 지역들 중 회복과 성장이 가장 빠른 곳이었지.
뭐든 좋다고만 할 수도 없네만, 평소대로였다면 이곳에서 불온의 씨앗은 찾기 힘들었을걸세.
제가 본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군요.
씨앗은 바람에 실려 오기도, 짐승이 물어 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그걸 조사해 달라?
그렇네.
그럴 여유 없습니다.
제가 독일에 온 목적은 당신도 아주 잘 알 텐데요.
날 믿어 주시게, 안젤리아 양.
우리의 목적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도 금방 알게 될 터이니.
...윌리엄과 관계 있는 겁니까?
내가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 사건의 뿌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네.
브레멘에 이어 베를린에, 패러데우스는 더욱 큰 규모의 테러를 계획 중일세.
테러...?!
안젤리아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난 몇 개월간 발생했던 사건들 전부, 배후에서 그 하얀 교단의 그림자를 찾았다네.
그들은 선동하고 있어. 민심에 불안을 심고 선동하고 있어.
내 추측건대, 때가 무르익으면 그들은 이 불안을 이용해 베를린의 시스템을 단숨에 무너뜨릴 테지.
그리 함으로서... 그들이 꺼리는 어떤 일이 진전되는 것을 막을 속셈임이 분명하네.
그들이 꺼리는 일...?
당신네와 관계 있는 일입니까?
중요한 회의가 있을 예정이네.
남자는 술잔을 들었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더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출처는요?
출처는 물론 나의 개인적인 정보통이네만, 신빙성이라면 걱정 말게.
하지만 그것뿐. 자세한 시간, 장소, 실행 인원, 계획의 내용...
다 당신이 조사해야 하는 사항이네.
그거 말곤 저한테 도움되는 거 없습니까?
물론 있지. 내 힘이 닿는 한, 당신에게 공권력을 포함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겠다 약속하네.
여전히 의심스럽다면, 이미 내 도움을 받았잖나?
네, 절 지원하라고 독일 정부를 설득했죠. 어련하시겠습니까.
안젤리아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하죠?
다른 곳도 아니고 베를린이니, 테러 행각을 벌이려면 폭약만으론 턱없이 모자라네.
그러니, 일반적으론 탐지가 불가능한 신개념의 무기임이 분명해.
자네와 나... 모두에게 익숙한 무기 말일세.
익숙한 무기... 그 꽃가루 폭탄 말입니까?
그럼 플로라 연구소의 리오니를 조사하면 되나요?
그녀는 마침 그저께 비밀리에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네.
분명 이 일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서일 게야.
......
질문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양옥, 어딨는지 아시죠? 말해 주시죠.
그건 지금으로선 전혀 중요치 않아.
제가 포기 안 한다는 건 아실 텐데요.
......
남자는 술을 한 모금 홀짝이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베를린에서의 일을 해결하면, 양옥의 위치를 알아봐 주지.
좋습니다.
허나 취사선택에 유의하길 바라네, 요원.
무엇이 우선인지, 잘 판단하게.
전 지금도 당신을 의심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조사는 해드리죠, 제 방식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을 쓰든 상관없네.
그 외에는요?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려고요? 다른 지원도 없이?
이래 봬도 난 바쁜 몸이라네, 요원. 나의 싸움은 자네 모르는 곳에서 아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
그래도...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내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지.
깜짝 선물이라뇨?
자네의 오랜 친구가 이리로 오는 중이네. 지금 자네에게 절실한 지원과 정보와 함께.
방향성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이 만남이 진심으로 반가우리라, 내 장담하네.
......누구 말입니까.
크루거가 총애하는 그 젊은이.
......
안젤리아의 눈썹이 살짝 들썩했다.
진작에 생각 못한 내가 바보지... 하긴, 그야 당신이 부른 지원인데.
서로 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라네.
부디 제 시간 낭비가 아니길 바라죠.
내 정보망에 새로운 진전이 있다면 바로 자네에게도 전달하겠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기를 추천하지. 지금 정문 방향은 많이 혼란스러워서 말이야.
남자는 테이블의 금화를 내밀었고, 안젤리아는 그걸 흘깃 보곤 덥석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
똑 똑.
안젤리아가 떠나는 걸 확인한 남자는 팔걸이를 두드리고 일어나, 그대로 다른 문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에서 뜨고 1분 후, 술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