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꽃병
"이 이국타향에서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마 나뿐일 것이다."
"여기서 망설임은 금물이다.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공허로 사라진다.
생명이란 이토록 나약하다. 총알이나 화재, 혹은 단순한 잠깐의 불행만으로도 잃을 수 있다.
......
이젠 무섭지도 않아.
뇌리에 파고드는 회상 속을 걷던 안젤리아는 어느 재난의 한복판에 섰다.
폭탄이 든 상자 뒤에 웅크려 벌벌 떠는 소녀는 기도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소녀를 바라보는 안젤리아의 주위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터져 나오는 아비규환이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임마.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들어, 안젤리아를 마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소녀의 눈동자 속 깊은 어둠은, 그야말로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에, 안젤리아의 의식은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갔다.
......
......
안젤리아는 어질어질 침대에서 일어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머릿속을 휘젓는 것들을 쫓아냈다.
......
왜 AK-12가 또 자신의 방에 있는지도 묻기 귀찮았다.
차나 한 잔 줘.
...괜찮아?
잠기운이 좀 가시고 나니, 안젤리아는 AK-12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 것을 깨달았다.
왜, 어디 이상해?
그건 아니지만, 계속 잠꼬대하길래.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어. 평소의 너랑 하나도 안 어울리더라.
그래서 좀 징그러웠어.
아, 맞아...
일 다 끝나고 안전국으로 복귀했더니 젤린스키가 진수성찬 차리고 환영하는 꿈이었지.
요리가 죄다 오리고기더라고.
오리고기 싫어해?
차라리 흙을 먹고 말지.
안젤리아는 침대에 똑바로 앉아, 손으로 목덜미를 받치고 고개를 꺾었다.
AK-12는 눈치껏 더 묻지 않고, 대충 차를 진하게 우려내 테이블에 두었다.
지휘관하고 연락이 닿았어.
그럼 한 시간 후에 구시가지로 오라고 해.
"미네르바의 부엉이"에서 보자고.
OK.
침대 위에 정좌한 안젤리아가 불현듯 본 찻잔 속의 찻잎은, 곧게 선 채로 둥둥 떠 있었다.
AK-12, 넌 훈작사가 신용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 사람이 쇼의 친구란 걸 잊지 마. 난 그 사람에 관해서 나쁜 말 하기가 힘들어.
난 예전부터 그 양반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리고 이번에 직접 만나 보니까, 더 확신이 드네.
난 그 사람이랑은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릴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틀리지도 않았지. 지금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
안젤리아는 웃옷의 주머니에서 그 금화를 꺼내 다시 보곤,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렇게 놀아나기만 하니까 기분 나쁘다고.
하지만 정말 다른 수가 없는 걸 어떡해.
훈작사가 시킨 일도 어차피 원래 하려던 일이었잖아?
그냥 불쑥 튀어나와서는 그걸 귀띔해 주고, 덤으로 장난 좀 친 거라 생각하자.
아 참, 그 예정에 대해서 아까 그 꼬맹이 슈타지랑 연락을 했어.
라이트?
응, 걔.
마음에 안 드나 봐?
아니, 반대야.
안젤리아는 금화를 공중에 튕겨, 손등으로 받자마자 다른 손으로 덮었다.
어린데도 솜씨 좋고, 침착하면서 머리도 잘 돌아가. 예의까지 바르고 말이야.
J의 말대로 앞날이 밝은 녀석이야. 딱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지.
그런데?
AK-12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리도도 처음엔 그런 인상이었어.
손을 들추니, 동전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면을 드러냈다.
남자 니토는 본 적 없는데.
AK-12은 짐짓 우울한 체했다.
알면서 또 딴소리하긴.
녀석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지만, 브레멘에서 호되게 배웠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을 안심하고 믿을 수가 없어졌어.
안젤리아는 금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하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만약 걔가 정말 스파이라면, 패러데우스가 제발로 네게 돌파구의 열쇠를 쥐여 줬다는 뜻 아니겠어?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보다, 연락해서 뭐라도 알아냈어?
응, 훈작사가 말한 대로야.
슈타지가 리오니를 체포하고 얼마 안 지나서, 서류 한 장에 베를린으로 보내졌어.
그런데 여기로 보내지자마자 재심이 신청됐더라.
재심 결과, 그녀는 심각한 정신적 및 육체적 피해가 입증되어 복역이 불가능하다 인정받았어.
그래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 뭐야.
......
찻잔 깨지겠다, 손에 힘 풀어.
그래서 그년 지금 어딨는데?
어디긴 어디야, 요양원이지. 최고급 경호와 치료를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대.
얼씨구.
안젤리아가 찻잔을 쿵 내려놔, 그녀가 마신 것보다 훨씬 많은 차가 테이블에 쏟아졌다.
그리고 전에 RPK가, 플로라 연구소 내부 자료가 전부 삭제됐다 했잖아?
직접 추적할 순 없었지만, 다행히 브레멘 시 정부에 공개 서류가 좀 남아 있었어. 플로라와 협력한 적 있는 기관이나 개인 기록 말이야.
그걸로 명부를 하나 작성했어.
그중에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권력도 있고, 리오니의 연구에 흥미가 있거나, 자신도 관련 업종이거나, 최근 2년 안으로 갑자기 이름이 팔리기 시작한 배경이 불분명한 사람 죄다 찾아.
유감스럽게도, 이 명단에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더라.
...하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지.
안젤리아는 AK-12에게서 명부를 건네받아, 대충 넘겨 보곤, 테이블에 내려놨다.
잠깐 보류하고, 지휘관을 만나고 나서 논의하자.
많이 기대하는구나.
물고기도 산소가 부족해지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고.
가자.
OK~
......
지휘관은 술집의 문을 벌컥 열면서 한 발을 안으로 디뎠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마치 지각하기 직전에 도착한 고등학생 같았다.
......
이 엉뚱한 손님은 술집의 몇 안 되는 손님들과 종업원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고, 시선을 한몸에 받은 지휘관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죄, 죄송합니다.
머쓱해 하면서 다른 발도 문턱 안으로 옮기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쾅!
바로 그때, 술집 안쪽에서 난 더 요란한 소리가 이목을 모조리 끌었다.
뭘 봐 이것들아, 구경났냐?
장화 신은 발로 식탁 위를 내려찍으며, 딱 봐도 건드렸다간 큰일날 것 같은 여인이 적반하장으로 손님들에게 윽박질렀다.
그렇게 겁을 주니, 모두 다시 고개를 돌리고 원래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에 지휘관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 여인의 맞은자리로 가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발 좀 내려 주시겠습니까?
저런 놈들 상대하는 법도 좀 배워.
하하, 너무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 말이죠...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겁니까?
흥, 걱정일랑 마셔.
저들 중에 진짜 손님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안젤리아가 냉소하며 목소리를 낮추자, 바로 주위가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지휘관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나 대위.
그리폰&크루거, S09 구역 담당이자 AR팀의 현임 전술지휘관입니다.
풋... 그래, 만나서 반가워 지휘관. 난 안나 빅토로브나 최... 그냥 계속 안젤리아라 불러.
그런데 꼭 자기소개부터 해야 했어?
대화를 여는 말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휘관이 피식 웃었다.
뭐라도 주문할래?
아뇨, 후에 임무가 있어서 지금 마실 순 없습니다.
여기, 이 사람한테 진저에일 한 잔.
안젤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웨이터를 부르면서 다리를 식탁에서 내렸다.
지휘관은 그저 웃으면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 낯간지러운 시선에, 안젤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진저에일 싫어?
아뇨, 그냥... 드디어 이렇게 직접 마주보고 대화하게 되었구나 해서 말이죠.
통신기 너머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잖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안젤리아는 팔짱을 끼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애들이랑은 인사했지?
네, RPK-16과도 만나봤습니다. 팔디스키에서도 연락했죠.
지금도 당신 휘하입니까?
대충 그렇지. 그쪽은 얼마나 데려왔어?
AR팀과 404, 그리고 댄들라이와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훈작사께서 제게 1개 소대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 양반이랑도 만났어?
직접 만나뵙진 못했지만, 이야기는 나눴죠.
어땠어?
그리폰에 입사하고서 또 한 명의 설립자라고만 들었지, 직접 대화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크루거 씨와는 많이 다른 타입이지만... 그래도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시더군요.
너한텐 뭘 시켰는데?
당신과 같은 일이요.
내가 지금 뭘 하는지도 알아?
그리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패러데우스와 연관된 일이겠죠?
애당초 그래서 독일까지 오셨으니까요. 그리고... 브레멘에서의 일도 들었습니다.
...흥.
안젤리아는 다시 코웃음을 치곤, 테이블의 빈 유리잔에 큼지막한 얼음 한 조각과 함께 투명한 주황색 위스키를 따랐다.
그래서 그 양반이 널 부른 거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 대신 일해 줄 머저리 하나 더 두려고.
훈작사한테 불만이 꽤 많으신가 보군요.
훈작사는 크루거와 달라. 크루거가 너랑 같은 부류라면, 훈작사는 나 같은 부류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보다도 훨씬 냉혹한 사람이야.
그를 너무 믿지 않도록 조심해.
그럴 리 없습니다, 안젤리아 씨.
우리는 딱히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것만이 아니잖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나도 그렇길 바라.
아무튼...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새로이 발견한 단서라도 있나요?
아니, 아직 수확이랄 것도 없어. 조사해낸 것도 없고.
패러데우스 측 인물과는 접촉했지만 금세 놓쳐 버렸고.
그 인물... 몰리도라는 사람 맞습니까?
맞아.
실은... 훈작사에게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조사하던 도중 어느 인물을 찾아냈습니다.
자료로 본 몰리도와 매우 닮았더군요.
뭐라고?!
진정하시고 끝까지 들어 주세요.
외모만 닮았지, 지금까지의 언동으로 봐선 별개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마흐리안"이라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근방의 "본"이란 이름의 난민촌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몰리도의 특기는 잠입과 변장이야. 나와 울릭 주석은 물론, 리벨리온의 눈까지 속여넘겼어.
네, 물론 그 점도 철저히 고려했습니다.
때문에 현재도 집중 관찰 중입니다만... 지금으로선 댄들라이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무언가 알아내면 바로 안젤리아 씨에게도 공유하겠습니다.
잠깐, 걔를 혼자 두고 왔다고? 니토끼리만 두고 왔어?
댄들라이 외에도 지원받은 그리폰 소대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 혼수 상태라서요.
음... 알았어.
그래도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물론입니다.
훈작사 말로는, 윌리엄이 베를린에서 일을 아주 크게 터뜨릴 생각인 것 같다고 해.
문제는 그 말만 툭 던지고선, 자기한텐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다 나한테 떠넘겼단 말이지.
설마 네 비행기를 마중 나가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은 절 보러 오지도 않았고, 통신으로 제게 명령을 전달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윌리엄이 벌이려는 큰 일이란 건 뭐죠?
아직은 나도 몰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돌아가서 댄들라이에게 더 확인해 달라고 하죠.
어쩌면 쓸 만한 걸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저번에 브레멘에서 찾은 미끼에 누가 먹다 남은 흔적이 있었어.
여기가 누구 영역인진 몰라도, 녀석이 헛점을 드러낸 이상 분명 금방 단서가 생길 거야.
알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곧장 찾아가겠습니다.
......
안젤리아는 말없이 천천히 술잔을 흔들다,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관 곁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시죠? 설마 제 목이라도 꺾으시려는 겁니까?
의외의 행동에, 지휘관은 흠칫하면서도 여유롭게 농담했다.
......
안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지휘관의 어깨를 토닥이곤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빈 잔을 지휘관의 진저에일 옆에 내려놨다.
후우...
시원하다.
지휘관은 눈을 끔뻑이며 뭔가 말하려다, 입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안젤리아가 독일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일을 겪었음을, 지휘관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이국 타향에서, 그녀가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사실도.
이에 지휘관도 미소를 지으며, 진저에일이 가득 담긴 잔을 들어 안젤리아가 마신 빈 잔에 건배하곤 똑같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안젤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최대한임을 잘 알았기에, 지휘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에게 목이 꺾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까?
응, 이걸로 끝이야. 괜히 네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 되지.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마흐리안이 깨어나면 물어볼 것이 잔뜩이고 말이죠.
마흐리안이야, 몰리도야?
...마흐리안입니다, 아직은.
흐음... 알았어.
지휘관을 눈으로 배웅한 뒤, 안젤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뒤로 돌아 귀의 통신기를 톡톡 두드렸다.
AK-12, 수다 그만 떨어.
준비하고 리오니 보러 가자.
딸그락.
얼음 조각이 녹아 미끄러져, 잔의 바닥에 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술집은 어느새 텅 비었다.
......
전체 대사 보기 (149줄)
"여기서 망설임은 금물이다.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공허로 사라진다.
생명이란 이토록 나약하다. 총알이나 화재, 혹은 단순한 잠깐의 불행만으로도 잃을 수 있다.
......
이젠 무섭지도 않아.
뇌리에 파고드는 회상 속을 걷던 안젤리아는 어느 재난의 한복판에 섰다.
폭탄이 든 상자 뒤에 웅크려 벌벌 떠는 소녀는 기도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소녀를 바라보는 안젤리아의 주위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터져 나오는 아비규환이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임마.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들어, 안젤리아를 마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소녀의 눈동자 속 깊은 어둠은, 그야말로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에, 안젤리아의 의식은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갔다.
......
......
안젤리아는 어질어질 침대에서 일어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머릿속을 휘젓는 것들을 쫓아냈다.
......
왜 AK-12가 또 자신의 방에 있는지도 묻기 귀찮았다.
차나 한 잔 줘.
...괜찮아?
잠기운이 좀 가시고 나니, 안젤리아는 AK-12의 표정이 사뭇 진지한 것을 깨달았다.
왜, 어디 이상해?
그건 아니지만, 계속 잠꼬대하길래.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어. 평소의 너랑 하나도 안 어울리더라.
그래서 좀 징그러웠어.
아, 맞아...
일 다 끝나고 안전국으로 복귀했더니 젤린스키가 진수성찬 차리고 환영하는 꿈이었지.
요리가 죄다 오리고기더라고.
오리고기 싫어해?
차라리 흙을 먹고 말지.
안젤리아는 침대에 똑바로 앉아, 손으로 목덜미를 받치고 고개를 꺾었다.
AK-12는 눈치껏 더 묻지 않고, 대충 차를 진하게 우려내 테이블에 두었다.
지휘관하고 연락이 닿았어.
그럼 한 시간 후에 구시가지로 오라고 해.
"미네르바의 부엉이"에서 보자고.
OK.
침대 위에 정좌한 안젤리아가 불현듯 본 찻잔 속의 찻잎은, 곧게 선 채로 둥둥 떠 있었다.
AK-12, 넌 훈작사가 신용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 사람이 쇼의 친구란 걸 잊지 마. 난 그 사람에 관해서 나쁜 말 하기가 힘들어.
난 예전부터 그 양반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리고 이번에 직접 만나 보니까, 더 확신이 드네.
난 그 사람이랑은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릴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틀리지도 않았지. 지금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
안젤리아는 웃옷의 주머니에서 그 금화를 꺼내 다시 보곤,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렇게 놀아나기만 하니까 기분 나쁘다고.
하지만 정말 다른 수가 없는 걸 어떡해.
훈작사가 시킨 일도 어차피 원래 하려던 일이었잖아?
그냥 불쑥 튀어나와서는 그걸 귀띔해 주고, 덤으로 장난 좀 친 거라 생각하자.
아 참, 그 예정에 대해서 아까 그 꼬맹이 슈타지랑 연락을 했어.
라이트?
응, 걔.
마음에 안 드나 봐?
아니, 반대야.
안젤리아는 금화를 공중에 튕겨, 손등으로 받자마자 다른 손으로 덮었다.
어린데도 솜씨 좋고, 침착하면서 머리도 잘 돌아가. 예의까지 바르고 말이야.
J의 말대로 앞날이 밝은 녀석이야. 딱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지.
그런데?
AK-12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몰리도도 처음엔 그런 인상이었어.
손을 들추니, 동전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면을 드러냈다.
남자 니토는 본 적 없는데.
AK-12은 짐짓 우울한 체했다.
알면서 또 딴소리하긴.
녀석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지만, 브레멘에서 호되게 배웠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을 안심하고 믿을 수가 없어졌어.
안젤리아는 금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하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만약 걔가 정말 스파이라면, 패러데우스가 제발로 네게 돌파구의 열쇠를 쥐여 줬다는 뜻 아니겠어?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보다, 연락해서 뭐라도 알아냈어?
응, 훈작사가 말한 대로야.
슈타지가 리오니를 체포하고 얼마 안 지나서, 서류 한 장에 베를린으로 보내졌어.
그런데 여기로 보내지자마자 재심이 신청됐더라.
재심 결과, 그녀는 심각한 정신적 및 육체적 피해가 입증되어 복역이 불가능하다 인정받았어.
그래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 뭐야.
......
찻잔 깨지겠다, 손에 힘 풀어.
그래서 그년 지금 어딨는데?
어디긴 어디야, 요양원이지. 최고급 경호와 치료를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대.
얼씨구.
안젤리아가 찻잔을 쿵 내려놔, 그녀가 마신 것보다 훨씬 많은 차가 테이블에 쏟아졌다.
그리고 전에 RPK가, 플로라 연구소 내부 자료가 전부 삭제됐다 했잖아?
직접 추적할 순 없었지만, 다행히 브레멘 시 정부에 공개 서류가 좀 남아 있었어. 플로라와 협력한 적 있는 기관이나 개인 기록 말이야.
그걸로 명부를 하나 작성했어.
그중에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권력도 있고, 리오니의 연구에 흥미가 있거나, 자신도 관련 업종이거나, 최근 2년 안으로 갑자기 이름이 팔리기 시작한 배경이 불분명한 사람 죄다 찾아.
유감스럽게도, 이 명단에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더라.
...하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지.
안젤리아는 AK-12에게서 명부를 건네받아, 대충 넘겨 보곤, 테이블에 내려놨다.
잠깐 보류하고, 지휘관을 만나고 나서 논의하자.
많이 기대하는구나.
물고기도 산소가 부족해지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고.
가자.
OK~
......
지휘관은 술집의 문을 벌컥 열면서 한 발을 안으로 디뎠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마치 지각하기 직전에 도착한 고등학생 같았다.
......
이 엉뚱한 손님은 술집의 몇 안 되는 손님들과 종업원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고, 시선을 한몸에 받은 지휘관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죄, 죄송합니다.
머쓱해 하면서 다른 발도 문턱 안으로 옮기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쾅!
바로 그때, 술집 안쪽에서 난 더 요란한 소리가 이목을 모조리 끌었다.
뭘 봐 이것들아, 구경났냐?
장화 신은 발로 식탁 위를 내려찍으며, 딱 봐도 건드렸다간 큰일날 것 같은 여인이 적반하장으로 손님들에게 윽박질렀다.
그렇게 겁을 주니, 모두 다시 고개를 돌리고 원래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에 지휘관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 여인의 맞은자리로 가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발 좀 내려 주시겠습니까?
저런 놈들 상대하는 법도 좀 배워.
하하, 너무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 말이죠...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겁니까?
흥, 걱정일랑 마셔.
저들 중에 진짜 손님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안젤리아가 냉소하며 목소리를 낮추자, 바로 주위가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지휘관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나 대위.
그리폰&크루거, S09 구역 담당이자 AR팀의 현임 전술지휘관입니다.
풋... 그래, 만나서 반가워 지휘관. 난 안나 빅토로브나 최... 그냥 계속 안젤리아라 불러.
그런데 꼭 자기소개부터 해야 했어?
대화를 여는 말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휘관이 피식 웃었다.
뭐라도 주문할래?
아뇨, 후에 임무가 있어서 지금 마실 순 없습니다.
여기, 이 사람한테 진저에일 한 잔.
안젤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웨이터를 부르면서 다리를 식탁에서 내렸다.
지휘관은 그저 웃으면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 낯간지러운 시선에, 안젤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진저에일 싫어?
아뇨, 그냥... 드디어 이렇게 직접 마주보고 대화하게 되었구나 해서 말이죠.
통신기 너머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잖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안젤리아는 팔짱을 끼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애들이랑은 인사했지?
네, RPK-16과도 만나봤습니다. 팔디스키에서도 연락했죠.
지금도 당신 휘하입니까?
대충 그렇지. 그쪽은 얼마나 데려왔어?
AR팀과 404, 그리고 댄들라이와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훈작사께서 제게 1개 소대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 양반이랑도 만났어?
직접 만나뵙진 못했지만, 이야기는 나눴죠.
어땠어?
그리폰에 입사하고서 또 한 명의 설립자라고만 들었지, 직접 대화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크루거 씨와는 많이 다른 타입이지만... 그래도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시더군요.
너한텐 뭘 시켰는데?
당신과 같은 일이요.
내가 지금 뭘 하는지도 알아?
그리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패러데우스와 연관된 일이겠죠?
애당초 그래서 독일까지 오셨으니까요. 그리고... 브레멘에서의 일도 들었습니다.
...흥.
안젤리아는 다시 코웃음을 치곤, 테이블의 빈 유리잔에 큼지막한 얼음 한 조각과 함께 투명한 주황색 위스키를 따랐다.
그래서 그 양반이 널 부른 거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 대신 일해 줄 머저리 하나 더 두려고.
훈작사한테 불만이 꽤 많으신가 보군요.
훈작사는 크루거와 달라. 크루거가 너랑 같은 부류라면, 훈작사는 나 같은 부류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보다도 훨씬 냉혹한 사람이야.
그를 너무 믿지 않도록 조심해.
그럴 리 없습니다, 안젤리아 씨.
우리는 딱히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것만이 아니잖습니까.
우리의 목적은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나도 그렇길 바라.
아무튼...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새로이 발견한 단서라도 있나요?
아니, 아직 수확이랄 것도 없어. 조사해낸 것도 없고.
패러데우스 측 인물과는 접촉했지만 금세 놓쳐 버렸고.
그 인물... 몰리도라는 사람 맞습니까?
맞아.
실은... 훈작사에게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조사하던 도중 어느 인물을 찾아냈습니다.
자료로 본 몰리도와 매우 닮았더군요.
뭐라고?!
진정하시고 끝까지 들어 주세요.
외모만 닮았지, 지금까지의 언동으로 봐선 별개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마흐리안"이라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근방의 "본"이란 이름의 난민촌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몰리도의 특기는 잠입과 변장이야. 나와 울릭 주석은 물론, 리벨리온의 눈까지 속여넘겼어.
네, 물론 그 점도 철저히 고려했습니다.
때문에 현재도 집중 관찰 중입니다만... 지금으로선 댄들라이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무언가 알아내면 바로 안젤리아 씨에게도 공유하겠습니다.
잠깐, 걔를 혼자 두고 왔다고? 니토끼리만 두고 왔어?
댄들라이 외에도 지원받은 그리폰 소대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 혼수 상태라서요.
음... 알았어.
그래도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물론입니다.
훈작사 말로는, 윌리엄이 베를린에서 일을 아주 크게 터뜨릴 생각인 것 같다고 해.
문제는 그 말만 툭 던지고선, 자기한텐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다 나한테 떠넘겼단 말이지.
설마 네 비행기를 마중 나가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은 절 보러 오지도 않았고, 통신으로 제게 명령을 전달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윌리엄이 벌이려는 큰 일이란 건 뭐죠?
아직은 나도 몰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돌아가서 댄들라이에게 더 확인해 달라고 하죠.
어쩌면 쓸 만한 걸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저번에 브레멘에서 찾은 미끼에 누가 먹다 남은 흔적이 있었어.
여기가 누구 영역인진 몰라도, 녀석이 헛점을 드러낸 이상 분명 금방 단서가 생길 거야.
알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곧장 찾아가겠습니다.
......
안젤리아는 말없이 천천히 술잔을 흔들다,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관 곁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시죠? 설마 제 목이라도 꺾으시려는 겁니까?
의외의 행동에, 지휘관은 흠칫하면서도 여유롭게 농담했다.
......
안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지휘관의 어깨를 토닥이곤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빈 잔을 지휘관의 진저에일 옆에 내려놨다.
후우...
시원하다.
지휘관은 눈을 끔뻑이며 뭔가 말하려다, 입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안젤리아가 독일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일을 겪었음을, 지휘관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이국 타향에서, 그녀가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사실도.
이에 지휘관도 미소를 지으며, 진저에일이 가득 담긴 잔을 들어 안젤리아가 마신 빈 잔에 건배하곤 똑같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안젤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최대한임을 잘 알았기에, 지휘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에게 목이 꺾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까?
응, 이걸로 끝이야. 괜히 네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 되지.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마흐리안이 깨어나면 물어볼 것이 잔뜩이고 말이죠.
마흐리안이야, 몰리도야?
...마흐리안입니다, 아직은.
흐음... 알았어.
지휘관을 눈으로 배웅한 뒤, 안젤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뒤로 돌아 귀의 통신기를 톡톡 두드렸다.
AK-12, 수다 그만 떨어.
준비하고 리오니 보러 가자.
딸그락.
얼음 조각이 녹아 미끄러져, 잔의 바닥에 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술집은 어느새 텅 비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