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역설
"어쩌면 어느날 우린 같은 전선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싸우겠지."
갈라테아 그룹 산하의 요양원.
안젤리아 님!
라이트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겨우 안젤리아를 따라잡았다.
야, 꼬맹이.
안젤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네?
내가 지금 같은 처지만 아니었어도 네가 졸졸 쫓아오는 것조차 가만 안 놔뒀어.
그렇게 나랑 같이 일하고 싶으면, 지켜야 할 삼윈칙이 있다. 첫 번째, "님" 붙이지 말 것.
어... 알겠습니다.
나머진 나중에 말하지.
안젤리아는 차갑게 쏘아붙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너무 신경쓰지 마, 안젤리아도 널 괴롭히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야.
누구한테나 저러거든.
아하하... 감사합니다.
라이트는 AK-12에게 쓴웃음을 짓곤 다시 안젤리아의 뒤를 따랐다.
얼마 안 가 그 호화로운 건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안젤리아는 길을 서두르지 않고 다시 멈춰 섰다.
여기가 리오니가 입원한 요양원이라고?
맞습니다. 리오니는 현재 여기서 휴양하며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징징대면서 절대 보기 싫다고 할 줄 알았더니만.
이런 곳에 틀어박혔으니, 거절하면 나도 강요 못하는데 말이지.
다행히 리오니도 소통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이 면회를 요구한다 하니 바로 승낙하더군요.
제발 이번에는 좀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다.
팔짱을 끼고 건물 전체를 훑어보던 안젤리아가 정문을 흘깃 보았다.
그런데,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할 장소치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은걸.
어때, AK-15?
촬영 설비를 다수 감지.
아.
뭔가 떠올랐는지, 라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베를린 방송국 사람들입니다.
베를린 방송국?
민주독일 텔레비전 방송 총사죠. 현재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공식 권한까지 지닌 매스컴입니다.
기자들이 여긴 무슨 일이래? 리오니 말고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환자라도 더 있나?
어쩌면... 환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안젤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
요양원 내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표기된 방에서, 열띤 취재진이 어느 유명인사의 인터뷰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 박사님.
천만에요, 미리 예약도 하셨잖아요.
제 입장으로서도, 당신과 같은 훌륭한 기자님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죠.
재치 있는 농담이시네요.
박사님 같은 독일... 아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명외과의가 대중이나 여론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후후훗... 기자와 언론의 존재 의미는 그저 대중을 인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직도 저에게 오해와 궁금증이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기자란 사회의 진실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는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당신은 저희와 대중 사이를 잇는 소통의 교량이라 할 수 있죠. 저희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부 기사를 쓰는 손에 달렸으니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레이 박사님께선 스스로가 "대중"과는 다른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수려한 용모의 젊은 기자는 신랄하게 질문 공세를 했지만, "그레이"라는 이름의 여성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인정하길 두려워해 안타깝네요.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어요.
한 명의 의사로서, 저는 반평생을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되찾아 주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았죠, 수술용 메스만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요.
저는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에게 복지를 전달하는 선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선 지금 제가 그리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죠.
고작 이것 하나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저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는 방식이 점점 정치인 같아지시네요.
하지만 확실히 훌륭한 포부라 생각합니다. 만약 선거에 출마하신다면 꼭 한 표 드릴게요.
말씀 고마워요, 섀도리스 씨. 적어도 당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 대단히 영광이에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오늘의 인터뷰는 곧 출시 예정인 신형 항붕괴제 "이둔 III형", 통칭 "이둔"에 대해서입니다.
"이둔"은 갈라테아 그룹이 개발한 최신형 복사감염증 백신으로, 대변인 발표에 따르면 가격이 저렴하면서 효율도 혁신적인, 종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백신이라 하였습니다.
이 발표 내용은 업계의 수많은 전문가와 유명인의 질의를 받았는데요, 그 와중에 외과 명의이신 박사님께서 나서 이를 변호하셨습니다.
박사님의 의술과 명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갈라테아 그룹 소속의 의사로서 자사의 약품을 대변한다는 것은...
상업적 목적도 포함되어 있나요?
외과의인 제가 전혀 다른 분야인 항붕괴제에 대한 의혹을 변호했으니, 외부자가 보기엔 확실히 이상할 수도 있겠죠.
의학에서 분야 간의 차이는 종종 일반적인 직종 간의 차이보다 훨씬 크기도 하니까요.
대부분의 외적 의혹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됐는데, 이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저의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자면... 여러분, 모두 안심해 주십시오.
저 스스로도 저의 명성이 높은 것은 압니다. 허나 저와 갈라테아 그룹은 절대, 결코 환자분들의 신용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갈라테아 그룹 소속이기 이전에, 저는 의사입니다. 의사로서 이 신약의 품질에 흠잡을 구석이 없음을 확인했고, 이 신약의 성공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갈라테아 그룹의 홍보 덕에, "이둔" 백신의 효능에 관해선 베를린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요.
박사님의 말씀처럼 이둔 자체는 임상시험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행정 과정을 거쳐야 하죠.
이는 일반인들에겐 정부가 "이둔"의 상용화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는 이로 인해 시위까지 벌어졌습니다.
혹시 이러한 홍보 전략도 그룹이 계획한 것인가요?
......
<Size=30>야, 섀도!</Size>
최근 발생한 베를린에서의 불법 시위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허나 갈라테아 그룹은 정부의 모든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며, 상용화를 위한 모든 검증 절차를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으리라 자신합니다.
여명이 도래하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부디 모두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햇빛이 다시 드리우기 전에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인상적인 말씀이네요.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 취재에 응해 주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섀도리스는 메모장을 덮고, 그레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 죄송해요, 예정보다 인터뷰 시간이 짧아져서.
괜찮습니다, 외과의이신 만큼 일정도 빠듯하고 변동도 잦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조금 궁금한 점이 있는데, 왜 갑자기 예정을 바꿔 요양원을 방문하셨나요? 여기에 담당 중인 환자분이 있나요?
아뇨, 업무와는 관계 없는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오늘의 인터뷰 내용은 편집 후에 송출될 거예요.
잘 부탁드릴게요, 섀도리스 씨.
천만에요, 저도 이게 일인걸――얼레?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물건을 정리하던 섀도리스가, 돌연 요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죠?
아, 아뇨... 그냥, 아는 사람이 보인 듯해서요.
저기, 위즐리 씨? 금방 돌아올 테니까 대신 정리해 줘요!
뭐? 야 잠깐, 어디가!?
촬영사의 부름도 듣지 않고, 섀도리스는 부랴부랴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이고 저 애가 진짜... 정말이지, 젊어서 기운이 넘친다니까요.
혹시 쟤가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요, 섀도리스 씨는 정말 뛰어난 기자분이시네요. 아주 날카로워요.
그레이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
......
조용한 화장실은 그레이가 손을 씻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레이는 비누거품으로 자신의 가는 손가락을 세심하게 닦고서, 다시 물을 틀어 거품을 씻어냈다.
사전 예약 없는 취재는 받지 않아요.
티슈를 몇 장 뽑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던 그레이가, 대뜸 허공에 대고 말했다.
......
그러자 거울에 비치는, 일반인이라면 눈치채기도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을 많이 들었어요, "닥터 그레이".
그냥 그레이라 불러 주세요.
그레이는 손을 다시 찬찬히 살펴 꼼꼼하게 닦았음을 확인한 뒤, 젖은 티슈를 뭉쳐 옆의 휴지통에 버렸다.
댁 같은 사람이 낯선 사람한테 미행당해도 신경도 안 쓰다니, 자기 안전에 관심이 없나 봐요?
낯선 사람이었다면 바로 경비원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라면, 무례도 참아드릴 수 있죠.
허? 나 알아요?
지금 베를린의 정치판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걸요?
의사가 정치 이야기를 하다니, 이거 깜짝 놀라 줘야 하나요?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환자가 많아서요.
안젤리아는 거울에 비치는 그레이의 평온한 얼굴을 주시하며, 조용히 화장실의 문을 닫았다.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같은 여성이면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줄 모르시는군요.
그레이도 거울을 통해 안젤리아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하지만, 여전히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핸드백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냈다.
난 화장실에서 거울이나 보면서 감정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 모습을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되네요.
리오니 미셸을 모르진 않겠죠?
물론이죠, 리오니는 생물 과학 분야의 전문가인걸요.
갈라테아에서도 여러 번 그분을 섭외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요.
아주 개성 있는 여성이죠. 당신처럼요, 안젤리아 씨.
그 개성 때문에 좋은 꼴은 못 봤지만 말이죠.
당신도 앞으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 장담할 수 없답니다.
그레이의 잔가시 돋힌 말에, 안젤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참 이상하네요, 당신 말처럼 그녀와 그렇게 단순한 관계가 아니던데.
죄송하지만 저는 생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평범한 여성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면 리오니보단 당신과 사귀고 싶었을 거예요.
......
그레이는 파운데이션을 도로 넣고, 이번엔 립스틱을 꺼내고선 뒤돌아 안젤리아를 마주봤다.
립스틱을 본 안젤리아는 무의식적으로 그레이의 입술을 보았다. 그녀가 다소 도발적인 말을 한 것도 마침 이때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립스틱을 바를 생각이 없는지, 그저 손잡이를 돌려대며 손장난을 할 뿐이었다.
놀려먹는 듯한 언동에, 안젤리아는 입을 씰룩거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왜 리오니 얘기를 꺼냈는지 모른다 하지 마시죠.
그녀가 브레멘에서 저지른 범행은 그녀 홀로 실행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고, 리오니가 체포되자 인맥을 동원해 그녀를 베를린으로, 그리고 다시 여기로 피신시켰죠.
법의 제재까지 피하게 해 주면서까지.
정말 암울한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당신은, 누군가 직권을 남용해 리오니를 도와 처벌을 면하도록 했다고 의심하고 있군요.
그리고 그 의심을 품고서 제 앞에 나타났고요.
이것 참 놀랍네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는 거죠?
플로라 연구소와 협력한 곳은 손에 꼽을 수였고, 더군다나 베를린에선 더 적었죠.
그리고 내 명단에 이름이 있으면서 오늘 여기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닥터 그레이.
그레이는 몇 번이나 만지작거린 끝에 드디어 립스틱을 빼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안젤리아는 그 능숙한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했다. 원래부터 생기 있던 그레이의 입술은, 립스틱을 바르자 더욱 매혹적이게 되었다.
그래서요?
대체 뭐라 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중간 과정을 너무 건너뛴 것 아닌가요?
제가 들은 바로는 안젤리아 씨는 아주 뛰어난 요원이라던데.
뜬구름 잡는 억측만 하는 삼류 탐정이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립스틱의 뚜껑을 닫고, 그레이는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안젤리아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반응을 관찰했다.
협력 관계였단 것만으로 증거는 충분합니다.
외과의사가 생물 과학, 그것도 식물학 전문가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렇게 빈번하게 교류했다?
대체 뭘 하고 있었습니까?
그레이는 살짝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응시하며 한손을 가운의 주머니로 넣었다.
......
그 주머니에서 무엇이 나올지 안젤리아는 경계했지만, 그레이가 꺼내 든 것은 그냥 평범한 막대사탕이었다.
안젤리아 씨.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당신은 소련 안전국의 요원이죠?
그리고 당신은 소련 안전국과 마찰을 빚어, 지금은 그들의 관할 밖으로 나왔다고도 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혼자 우리나라에 와 슈타지와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다면서요?
제게 말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해지네요.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건가요? 소련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흥.
그레이는 포장을 벗겨 쓰레기통 대신 주머니에 넣고, 혀를 내밀어 과일맛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죠, 안젤리아 씨. 제 호기심을 채워 주지 않아도 이해해요.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저도 상황이 복잡한 처지랍니다. 국가 기밀과 비교할 순 없지만, 사업 기밀도 엄연한 기밀이에요.
그레이의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안젤리아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은 대답이죠.
원래부터 개연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개연성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내 나름대로 개연성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이의 입가의 사탕 막대는 메트로놈처럼 위아래로 까딱였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분 전에 대답한 질문이네요... 어느 기자분께였지만 말이죠.
확실히, 플로라 연구소의 연구 내용은 저의 직업과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 옛날부터 제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요.
저는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솔직한 진심이랍니다.
직접 말하긴 부끄럽지만, 저는 대담한 성격이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즐겨 하거든요. 물론 그럴 만한 잠재력과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요.
리오니나 "이둔"만이 아니에요, 다른 분야의 연구를 많이 지원했죠. 흥미 있으시다면 하나씩 조사해보세요. 리오니와 비슷한 케이스가 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그레이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입 속의 막대사탕이 치아와 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리오니는 참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예요. 원래대로라면, 그 연구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잘못된 길로 빠져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남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도구일 뿐이죠.
정말로 사악한 건 뒤에서 배후에서 그녀를 조종한 흑막입니다.
그 흑막을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요. 꼭 찾아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세요.
......
그때, 안젤리아가 무심코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 마주한 상대는, 여태까지 보아 왔던 놈들과는 다른 개념으로 성가신 적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아까 당신을 취재한 사람한테 이 스캔들을 알리면 어떡할 겁니까?
그렇다면 저는 사과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죠.
협력자의 범법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해 유감이며, 플로라 연구소의 부도덕한 행위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비난해야겠죠.
그러는 동시에, 그레이 생물 과학 연구소는 거액의 자선 기부를 할 겁니다.
그러면 이 스캔들은 감쪽같이 묻히고, 조사하던 사람들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소련 사람은 생각하는 게 정말 재밌네요.
저를 너무 영화 속의 악당처럼 보지 말아 주세요, 안젤리아 씨.
저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든다고요.
허, 그러세요? 그거 참 황송할 따름이군요.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가 같은 입장에 서서, 하나된 목적을 위해 분투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저는 당신 같은 사람도 개의치 않고 친구로 삼고 싶어요. 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한테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 그레이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
그레이의 팔은 무척 가늘어, 안젤리아는 문뜩 아주 조금만 힘을 주어도 이 의사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을 망가뜨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
안젤리아의 선을 넘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레이는 그저 사탕 막대를 까딱 위로 올리기만 할 뿐 전혀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은 의수를 3초가량 살펴본 그녀는 왼손을 가운의 안주머니로 뻗었다.
의수의 상태가 엉망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시간 내서 제 개인 진료소를 찾아 주세요.
성심성의껏 정비해드릴게요. 물론, 무료로.
그리곤 명함 한 장을 꺼내, 안젤리아에게 내밀었다.
미묘한 색감이 돋보이는 그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직장 주소가 멋들어진 폰트로 적혀 있었다.
......
안젤리아는 서서히 그녀의 팔을 놓고, 말없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
당신은 누구한테나 이렇게 친절합니까?
물론 아니죠. 안젤리아 씨가 특별한 거랍니다.
그래요? 그건 몰랐네.
그레이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으로 다 먹지도 않은 막대사탕을 입에서 빼 문 옆의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리더니, 돌연 얼굴을 안젤리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나려 했지만, 바로 뒤가 벽인 탓에 그러지 못했다.
즐거운 대화였어요, 안젤리아.
내심 궁금하네요... 브레멘에선 즐거우셨나요?
그레이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또박또박 안젤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
안젤리아가 잠시 얼떨떨해하는 사이, 그레이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유유히 떠났다.
기다려!
안젤리아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을 홱 열며 뒤따라 나갔다.
하지만 그레이는 이미 복도 저 멀리의 모퉁이까지 가 있었고, 보안인원 두 명이 함께였다.
그리고 방향을 꺾는 그 순간, 그레이는 안젤리아를 향해 도발하는 눈빛과 미소를 던지며 사라졌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예상치 못하게 한방 먹었단 분함에 안젤리아는 힘껏 벽을 쳤고, 천장이 떨리며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갑자기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잠겼던 칸막이 문을 열고 RPK-16이 느긋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저놈이다.
리오니의 배후는 바로 저놈이었어! 확실해!
어머, 정말요? 제가 방금 확보했어야 했나요?
...아니, 우린 저놈을 못 건드려.
그걸 아니까 저렇게 뻔뻔하게 나왔지.
그럼 그냥 해치워버리는 건 어때요?
더 의미 없지. 패러데우스에 "닥터 그레이"를 대신할 사람 하나 없겠어?
알았어요.
안젤리아는 크게 심호흡하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녀의 뇌리엔 도발하는 그레이의 미소가 단단히 박혔다.
이게 끝인 줄 알면 큰 오산이지... 두고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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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그룹 산하의 요양원.
안젤리아 님!
라이트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겨우 안젤리아를 따라잡았다.
야, 꼬맹이.
안젤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네?
내가 지금 같은 처지만 아니었어도 네가 졸졸 쫓아오는 것조차 가만 안 놔뒀어.
그렇게 나랑 같이 일하고 싶으면, 지켜야 할 삼윈칙이 있다. 첫 번째, "님" 붙이지 말 것.
어... 알겠습니다.
나머진 나중에 말하지.
안젤리아는 차갑게 쏘아붙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아...
너무 신경쓰지 마, 안젤리아도 널 괴롭히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야.
누구한테나 저러거든.
아하하... 감사합니다.
라이트는 AK-12에게 쓴웃음을 짓곤 다시 안젤리아의 뒤를 따랐다.
얼마 안 가 그 호화로운 건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안젤리아는 길을 서두르지 않고 다시 멈춰 섰다.
여기가 리오니가 입원한 요양원이라고?
맞습니다. 리오니는 현재 여기서 휴양하며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징징대면서 절대 보기 싫다고 할 줄 알았더니만.
이런 곳에 틀어박혔으니, 거절하면 나도 강요 못하는데 말이지.
다행히 리오니도 소통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이 면회를 요구한다 하니 바로 승낙하더군요.
제발 이번에는 좀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다.
팔짱을 끼고 건물 전체를 훑어보던 안젤리아가 정문을 흘깃 보았다.
그런데,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할 장소치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은걸.
어때, AK-15?
촬영 설비를 다수 감지.
아.
뭔가 떠올랐는지, 라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베를린 방송국 사람들입니다.
베를린 방송국?
민주독일 텔레비전 방송 총사죠. 현재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공식 권한까지 지닌 매스컴입니다.
기자들이 여긴 무슨 일이래? 리오니 말고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환자라도 더 있나?
어쩌면... 환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안젤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
요양원 내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표기된 방에서, 열띤 취재진이 어느 유명인사의 인터뷰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 박사님.
천만에요, 미리 예약도 하셨잖아요.
제 입장으로서도, 당신과 같은 훌륭한 기자님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죠.
재치 있는 농담이시네요.
박사님 같은 독일... 아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명외과의가 대중이나 여론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후후훗... 기자와 언론의 존재 의미는 그저 대중을 인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직도 저에게 오해와 궁금증이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기자란 사회의 진실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는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당신은 저희와 대중 사이를 잇는 소통의 교량이라 할 수 있죠. 저희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부 기사를 쓰는 손에 달렸으니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레이 박사님께선 스스로가 "대중"과는 다른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수려한 용모의 젊은 기자는 신랄하게 질문 공세를 했지만, "그레이"라는 이름의 여성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인정하길 두려워해 안타깝네요.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어요.
한 명의 의사로서, 저는 반평생을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되찾아 주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았죠, 수술용 메스만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요.
저는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에게 복지를 전달하는 선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선 지금 제가 그리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죠.
고작 이것 하나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저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는 방식이 점점 정치인 같아지시네요.
하지만 확실히 훌륭한 포부라 생각합니다. 만약 선거에 출마하신다면 꼭 한 표 드릴게요.
말씀 고마워요, 섀도리스 씨. 적어도 당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 대단히 영광이에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오늘의 인터뷰는 곧 출시 예정인 신형 항붕괴제 "이둔 III형", 통칭 "이둔"에 대해서입니다.
"이둔"은 갈라테아 그룹이 개발한 최신형 복사감염증 백신으로, 대변인 발표에 따르면 가격이 저렴하면서 효율도 혁신적인, 종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백신이라 하였습니다.
이 발표 내용은 업계의 수많은 전문가와 유명인의 질의를 받았는데요, 그 와중에 외과 명의이신 박사님께서 나서 이를 변호하셨습니다.
박사님의 의술과 명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갈라테아 그룹 소속의 의사로서 자사의 약품을 대변한다는 것은...
상업적 목적도 포함되어 있나요?
외과의인 제가 전혀 다른 분야인 항붕괴제에 대한 의혹을 변호했으니, 외부자가 보기엔 확실히 이상할 수도 있겠죠.
의학에서 분야 간의 차이는 종종 일반적인 직종 간의 차이보다 훨씬 크기도 하니까요.
대부분의 외적 의혹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됐는데, 이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저의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자면... 여러분, 모두 안심해 주십시오.
저 스스로도 저의 명성이 높은 것은 압니다. 허나 저와 갈라테아 그룹은 절대, 결코 환자분들의 신용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갈라테아 그룹 소속이기 이전에, 저는 의사입니다. 의사로서 이 신약의 품질에 흠잡을 구석이 없음을 확인했고, 이 신약의 성공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갈라테아 그룹의 홍보 덕에, "이둔" 백신의 효능에 관해선 베를린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요.
박사님의 말씀처럼 이둔 자체는 임상시험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행정 과정을 거쳐야 하죠.
이는 일반인들에겐 정부가 "이둔"의 상용화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는 이로 인해 시위까지 벌어졌습니다.
혹시 이러한 홍보 전략도 그룹이 계획한 것인가요?
......
<Size=30>야, 섀도!</Size>
최근 발생한 베를린에서의 불법 시위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허나 갈라테아 그룹은 정부의 모든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며, 상용화를 위한 모든 검증 절차를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으리라 자신합니다.
여명이 도래하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부디 모두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햇빛이 다시 드리우기 전에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인상적인 말씀이네요.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 취재에 응해 주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섀도리스는 메모장을 덮고, 그레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 죄송해요, 예정보다 인터뷰 시간이 짧아져서.
괜찮습니다, 외과의이신 만큼 일정도 빠듯하고 변동도 잦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조금 궁금한 점이 있는데, 왜 갑자기 예정을 바꿔 요양원을 방문하셨나요? 여기에 담당 중인 환자분이 있나요?
아뇨, 업무와는 관계 없는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오늘의 인터뷰 내용은 편집 후에 송출될 거예요.
잘 부탁드릴게요, 섀도리스 씨.
천만에요, 저도 이게 일인걸――얼레?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물건을 정리하던 섀도리스가, 돌연 요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죠?
아, 아뇨... 그냥, 아는 사람이 보인 듯해서요.
저기, 위즐리 씨? 금방 돌아올 테니까 대신 정리해 줘요!
뭐? 야 잠깐, 어디가!?
촬영사의 부름도 듣지 않고, 섀도리스는 부랴부랴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이고 저 애가 진짜... 정말이지, 젊어서 기운이 넘친다니까요.
혹시 쟤가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요, 섀도리스 씨는 정말 뛰어난 기자분이시네요. 아주 날카로워요.
그레이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
......
조용한 화장실은 그레이가 손을 씻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레이는 비누거품으로 자신의 가는 손가락을 세심하게 닦고서, 다시 물을 틀어 거품을 씻어냈다.
사전 예약 없는 취재는 받지 않아요.
티슈를 몇 장 뽑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던 그레이가, 대뜸 허공에 대고 말했다.
......
그러자 거울에 비치는, 일반인이라면 눈치채기도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성을 많이 들었어요, "닥터 그레이".
그냥 그레이라 불러 주세요.
그레이는 손을 다시 찬찬히 살펴 꼼꼼하게 닦았음을 확인한 뒤, 젖은 티슈를 뭉쳐 옆의 휴지통에 버렸다.
댁 같은 사람이 낯선 사람한테 미행당해도 신경도 안 쓰다니, 자기 안전에 관심이 없나 봐요?
낯선 사람이었다면 바로 경비원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라면, 무례도 참아드릴 수 있죠.
허? 나 알아요?
지금 베를린의 정치판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걸요?
의사가 정치 이야기를 하다니, 이거 깜짝 놀라 줘야 하나요?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환자가 많아서요.
안젤리아는 거울에 비치는 그레이의 평온한 얼굴을 주시하며, 조용히 화장실의 문을 닫았다.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같은 여성이면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줄 모르시는군요.
그레이도 거울을 통해 안젤리아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하지만, 여전히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핸드백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냈다.
난 화장실에서 거울이나 보면서 감정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 모습을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되네요.
리오니 미셸을 모르진 않겠죠?
물론이죠, 리오니는 생물 과학 분야의 전문가인걸요.
갈라테아에서도 여러 번 그분을 섭외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요.
아주 개성 있는 여성이죠. 당신처럼요, 안젤리아 씨.
그 개성 때문에 좋은 꼴은 못 봤지만 말이죠.
당신도 앞으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 장담할 수 없답니다.
그레이의 잔가시 돋힌 말에, 안젤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참 이상하네요, 당신 말처럼 그녀와 그렇게 단순한 관계가 아니던데.
죄송하지만 저는 생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평범한 여성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면 리오니보단 당신과 사귀고 싶었을 거예요.
......
그레이는 파운데이션을 도로 넣고, 이번엔 립스틱을 꺼내고선 뒤돌아 안젤리아를 마주봤다.
립스틱을 본 안젤리아는 무의식적으로 그레이의 입술을 보았다. 그녀가 다소 도발적인 말을 한 것도 마침 이때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립스틱을 바를 생각이 없는지, 그저 손잡이를 돌려대며 손장난을 할 뿐이었다.
놀려먹는 듯한 언동에, 안젤리아는 입을 씰룩거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왜 리오니 얘기를 꺼냈는지 모른다 하지 마시죠.
그녀가 브레멘에서 저지른 범행은 그녀 홀로 실행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고, 리오니가 체포되자 인맥을 동원해 그녀를 베를린으로, 그리고 다시 여기로 피신시켰죠.
법의 제재까지 피하게 해 주면서까지.
정말 암울한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당신은, 누군가 직권을 남용해 리오니를 도와 처벌을 면하도록 했다고 의심하고 있군요.
그리고 그 의심을 품고서 제 앞에 나타났고요.
이것 참 놀랍네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는 거죠?
플로라 연구소와 협력한 곳은 손에 꼽을 수였고, 더군다나 베를린에선 더 적었죠.
그리고 내 명단에 이름이 있으면서 오늘 여기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닥터 그레이.
그레이는 몇 번이나 만지작거린 끝에 드디어 립스틱을 빼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안젤리아는 그 능숙한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했다. 원래부터 생기 있던 그레이의 입술은, 립스틱을 바르자 더욱 매혹적이게 되었다.
그래서요?
대체 뭐라 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중간 과정을 너무 건너뛴 것 아닌가요?
제가 들은 바로는 안젤리아 씨는 아주 뛰어난 요원이라던데.
뜬구름 잡는 억측만 하는 삼류 탐정이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립스틱의 뚜껑을 닫고, 그레이는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안젤리아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반응을 관찰했다.
협력 관계였단 것만으로 증거는 충분합니다.
외과의사가 생물 과학, 그것도 식물학 전문가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렇게 빈번하게 교류했다?
대체 뭘 하고 있었습니까?
그레이는 살짝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응시하며 한손을 가운의 주머니로 넣었다.
......
그 주머니에서 무엇이 나올지 안젤리아는 경계했지만, 그레이가 꺼내 든 것은 그냥 평범한 막대사탕이었다.
안젤리아 씨.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당신은 소련 안전국의 요원이죠?
그리고 당신은 소련 안전국과 마찰을 빚어, 지금은 그들의 관할 밖으로 나왔다고도 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혼자 우리나라에 와 슈타지와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다면서요?
제게 말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해지네요.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무얼 하는 건가요? 소련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흥.
그레이는 포장을 벗겨 쓰레기통 대신 주머니에 넣고, 혀를 내밀어 과일맛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죠, 안젤리아 씨. 제 호기심을 채워 주지 않아도 이해해요.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저도 상황이 복잡한 처지랍니다. 국가 기밀과 비교할 순 없지만, 사업 기밀도 엄연한 기밀이에요.
그레이의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안젤리아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은 대답이죠.
원래부터 개연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개연성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내 나름대로 개연성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이의 입가의 사탕 막대는 메트로놈처럼 위아래로 까딱였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분 전에 대답한 질문이네요... 어느 기자분께였지만 말이죠.
확실히, 플로라 연구소의 연구 내용은 저의 직업과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 옛날부터 제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요.
저는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솔직한 진심이랍니다.
직접 말하긴 부끄럽지만, 저는 대담한 성격이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즐겨 하거든요. 물론 그럴 만한 잠재력과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요.
리오니나 "이둔"만이 아니에요, 다른 분야의 연구를 많이 지원했죠. 흥미 있으시다면 하나씩 조사해보세요. 리오니와 비슷한 케이스가 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그레이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입 속의 막대사탕이 치아와 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리오니는 참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예요. 원래대로라면, 그 연구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잘못된 길로 빠져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남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도구일 뿐이죠.
정말로 사악한 건 뒤에서 배후에서 그녀를 조종한 흑막입니다.
그 흑막을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요. 꼭 찾아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세요.
......
그때, 안젤리아가 무심코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 마주한 상대는, 여태까지 보아 왔던 놈들과는 다른 개념으로 성가신 적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아까 당신을 취재한 사람한테 이 스캔들을 알리면 어떡할 겁니까?
그렇다면 저는 사과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죠.
협력자의 범법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해 유감이며, 플로라 연구소의 부도덕한 행위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비난해야겠죠.
그러는 동시에, 그레이 생물 과학 연구소는 거액의 자선 기부를 할 겁니다.
그러면 이 스캔들은 감쪽같이 묻히고, 조사하던 사람들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소련 사람은 생각하는 게 정말 재밌네요.
저를 너무 영화 속의 악당처럼 보지 말아 주세요, 안젤리아 씨.
저는 당신이 꽤 마음에 든다고요.
허, 그러세요? 그거 참 황송할 따름이군요.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가 같은 입장에 서서, 하나된 목적을 위해 분투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저는 당신 같은 사람도 개의치 않고 친구로 삼고 싶어요. 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한테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 그레이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
그레이의 팔은 무척 가늘어, 안젤리아는 문뜩 아주 조금만 힘을 주어도 이 의사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을 망가뜨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
안젤리아의 선을 넘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레이는 그저 사탕 막대를 까딱 위로 올리기만 할 뿐 전혀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은 의수를 3초가량 살펴본 그녀는 왼손을 가운의 안주머니로 뻗었다.
의수의 상태가 엉망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시간 내서 제 개인 진료소를 찾아 주세요.
성심성의껏 정비해드릴게요. 물론, 무료로.
그리곤 명함 한 장을 꺼내, 안젤리아에게 내밀었다.
미묘한 색감이 돋보이는 그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직장 주소가 멋들어진 폰트로 적혀 있었다.
......
안젤리아는 서서히 그녀의 팔을 놓고, 말없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
당신은 누구한테나 이렇게 친절합니까?
물론 아니죠. 안젤리아 씨가 특별한 거랍니다.
그래요? 그건 몰랐네.
그레이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으로 다 먹지도 않은 막대사탕을 입에서 빼 문 옆의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리더니, 돌연 얼굴을 안젤리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안젤리아는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나려 했지만, 바로 뒤가 벽인 탓에 그러지 못했다.
즐거운 대화였어요, 안젤리아.
내심 궁금하네요... 브레멘에선 즐거우셨나요?
그레이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또박또박 안젤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
안젤리아가 잠시 얼떨떨해하는 사이, 그레이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유유히 떠났다.
기다려!
안젤리아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을 홱 열며 뒤따라 나갔다.
하지만 그레이는 이미 복도 저 멀리의 모퉁이까지 가 있었고, 보안인원 두 명이 함께였다.
그리고 방향을 꺾는 그 순간, 그레이는 안젤리아를 향해 도발하는 눈빛과 미소를 던지며 사라졌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예상치 못하게 한방 먹었단 분함에 안젤리아는 힘껏 벽을 쳤고, 천장이 떨리며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갑자기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잠겼던 칸막이 문을 열고 RPK-16이 느긋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저놈이다.
리오니의 배후는 바로 저놈이었어! 확실해!
어머, 정말요? 제가 방금 확보했어야 했나요?
...아니, 우린 저놈을 못 건드려.
그걸 아니까 저렇게 뻔뻔하게 나왔지.
그럼 그냥 해치워버리는 건 어때요?
더 의미 없지. 패러데우스에 "닥터 그레이"를 대신할 사람 하나 없겠어?
알았어요.
안젤리아는 크게 심호흡하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녀의 뇌리엔 도발하는 그레이의 미소가 단단히 박혔다.
이게 끝인 줄 알면 큰 오산이지... 두고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