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의 강 Ⅰ
"내가 총리 사무실에 더티밤을 보낼 수 있다면 내가 얻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
요양원의 정원. 공기 중엔 신선한 흙의 향이 풍겼고, 화사한 햇살이 풀밭을 어루만졌다.
저기 좀 보세요, 리오니 씨.
수레국화가 피었네요.
......
...다른 데로 가면 안 될까요?
지금은 꽃을 보기 싫어요.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리고 좀 서늘한데, 담요라도 가져다 주시겠어요?
서늘하다고요? 알겠습니다, 체력단련실에 담요가 있으니 가져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있어 주세요.
하하...
리오니는 시선을 붕대로 칭칭 감긴 손과 깁스를 찬 팔로 떨궜다.
지금 그녀에겐 휠체어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이 요양원의 정원은 어느 유명한 가든 디자이너가 직접 손본 곳으로, 꽃은 물론 잔디까지도 까다롭게 선별되어 심어지고 가꿔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심신을 편안하게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하지만 리오니는 그 풍경을 보고도 깊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지금 그녀만큼 꽃향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환자도 드물 테니 말이다.
과연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환자를, 여기선 어떻게 간호할까?
덥석.
그때, 뒤에서 간호사가 방금 놓았던 휠체어의 핸들을 누가 다시 붙잡았다.
빨리 돌아왔네요, 간호사 씨.
담요는 깜빡했는데, 괜찮지?
......히익!?
리오니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안젤리아의 의수가 어깨를 눌렀다.
쉬잇... 그냥 얘기나 하러 왔으니까 까칠하게 굴지 마.
리오니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라 대꾸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목덜미를 붙잡혔을 뿐더러, 안젤리아를 본 순간 그날의 창백한 악몽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 널 돌려보내라고 했는데...
그럼 내가 오냐하고 갈 줄 알았어?
......
만나자고 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대?
안젤리아가 스윽 훑어본 리오니는 좀 이상했다. 최고급 요양원에서 푹 쉬던 환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문에서 막 풀려난 죄수 같은 분위기였다.
아하... 그레이가 왔다 갔구나.
......!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동요하는 리오니의 모습에, 안젤리아도 자신의 추측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네가 우리랑 만난다고 듣고, 경고하러 왔지?
너보고 입단속하라 했어? 그년이 찔릴 만한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묻지 마... 저, 절대 말 안 해...
리오니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가녀린 몸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럼에도 무척 단호해 보였다.
내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너... 넌 아무것도 몰라.
그년은 너 같은 요원 나부랭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도 쓴맛 보기 싫으면... 그만 포기해. 나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리오니는 점점 감정이 격앙되어, 부러진 손까지 아주 약간이나마 움직인 것 같았다.
......난 그냥 살고 싶어.
권총으로 자살하려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풉... 네 부하 덕분이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거든.
...아, 어쩐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리오니가 고개를 들었다.
둘 다 같은 인상이었어.
누구랑 누가?
그레이랑 네 부하.
RPK-16 말이야?
걔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내 손 부러뜨린 그 인형.
괜한 참견이지만, 너도 그 녀석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말대로 괜한 참견이니까 신경 꺼.
안젤리아가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간호사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오지.
다신 오지 마.
와봤자 바뀌는 거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리오니가 대꾸했을 땐 이미 등뒤의 기척은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리오니 씨,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무릎에 덮으면 훨씬 따뜻할 거예... 어? 왜 이렇게 땀이...?
리오니 씨, 괜찮으세요?
......
잘 안 풀렸나 봐?
한발 늦었어.
그레이 그년이 입단속을 아주 단단히도 시켜놨더만.
우와, 안젤리아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 처음 봐요.
그럼 제가 할까요? 리오니 씨도 분명 저와의 재회를 엄청 기뻐할 텐데요...
됐어, 지금은 녀석의 반항심이 가장 강할 때야. 더 괴롭혀봤자 소용없어.
일단 내버려두자, 아직 다른 수가 있으니까.
안젤리아가 고개를 돌려 본 라이트는 왠지 기운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리오니는 중요 참고인이니, 혹시 모를 신변의 위협에 대비해 요양원에 보안인원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점도 확실히 주의해야지. 지금 안전하다 해서 언제까지고 그러리란 보장도 없고.
아무튼 여긴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니, 다른 쪽을 찔러보러 가자.
닥터 그레이의 자료를 정리해 드릴까요?
좋은 아이디어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을 거다. 세간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면서 사는 사람한테 무슨 트집거리가 있다면, 진작에 이슈가 됐을걸.
그럼...?
파월을 보고 싶은데, 시간 잡을 수 있어?
파월이요...? 현재 베를린 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만, 면회가 가능할지... 우선 요청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파월이죠?
알 거 없어,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만 알아둬.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죠.
안젤리아의 다소 매정한 말에 라이트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RPK-16은 희한한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보면서, 라이트가 떠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애를 의심하시나 보네요, 안젤리아.
불만 있어?
그럴 리가요. 그냥 충고드리고 싶어서요.
너무 그렇게 신경질적이면 판단력에 지장이 생긴답니다. 여긴 브레멘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레이가 너무 일찍 찾아왔어, 그것도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브레멘에서랑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야.
라이트가 아니더라도 녀석 휘하의 누군가가 누설했을 수도 있어.
잊지 마, 그레이의 수완으로 리오니를 법정에서 빼돌릴 수 있다면...
슈타지에 스파이 하나 심어 놓는 것도 쉬운 일이야.
나도 생각이 있다니까.
라이트가 소식을 가져오기까진 시간이 좀 있으니 우린 먼저 돌아가자.
......!
AN-94가 무언가를 눈치채곤 안젤리아 곁으로 다가갔다.
계단 조심해라.
......고마워.
안젤리아는 AN-94의 손을 잡고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
다음날.
기운을 회복한 안젤리아는 엄격한 검문을 거친 뒤, 라이트가 어렵사리 마련한 심문실에 도착했다.
문앞의 라이트는 안젤리아가 다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저도 동행할까요?
아니, 넌 리벨리온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잘했다. 일처리 빠르네.
신청이 빨리 통과됐습니다. ...의심스러올 정도로요.
보고를 올리면 보통 확인에만 며칠이 소요되는데...
라이트는 무언가를 에둘러 말하려는 듯했지만, 안젤리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뭐든지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도련님~
......
문을 열고 홀로 심문실 안으로 들어간 안젤리아의 눈에, 파월의 그 역겨운 얼굴이 들어왔다.
빠르게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안젤리아는 파월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교도소 침대는 어때? 잘 못 자나 봐?
......본론이나 말하시지.
파월은 그 퉁퉁한 입술을 깨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젤리아는 의자를 당겨 파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복은 압수 안 당했네? 브레멘의 대부가 베를린에서도 대접받을 줄은 몰랐는걸.
흥... 내가 친구 사귀는 법을 몰랐으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어.
파월은 눈을 굴리며 방의 다른 구석을 계속해서 곁눈질했고, 수갑 찬 손에 쥔 손수건으로 몇 번이나 이마를 훔쳤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널 여기다 버렸지.
듣자하니, 리오니는 VIP 룸에서 푹신한 침대서 잔다던데. 못 들었어?
나한테서 뭐라도 캐내려는 모양인데 헛수고야, 내가 아는 건 슈타지한테 말한 게 전부라고.
날 심문해봤자 시간 낭비밖에 안 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안 믿는데.
너처럼 간사한 여우놈은 반드시 비장의 수를 마지막까지 꿍쳐 두는 법이거든. 지금도 뭐든지 다 네 손바닥 안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실상은 어떻지? 넌 지금 모가지나 안 달아나면 다행인 상황이야.
우, 웃기고 있네!
정곡을 찔렸는지, 파월이 대뜸 흥분하며 손바닥으로 탁상을 탕탕 쳤다.
네깟 계집애가 뭘 안다고!
두고 봐! 나도 금방 나가서, 날 건드린 녀석한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까!
......
안젤리아는 콧등을 쓱쓱 문지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뭐... 뭐야?
그냥 가려고? 말한 것도 없는데?
안젤리아가 일어나자, 파월은 그녀가 나가려는 줄 알고 역으로 당황했다.
역시 자기 입장을 잘 알고 있네...
나한테 협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치?
일어난 것 가지고 잔뜩 쫄기나 하고 말이야.
뭣...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오히려 네가 나한테 절하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 아니야?! 엉!?
하아아...
라이트, 녹화 꺼 봐.
무, 무슨 속셈이야?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파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안젤리아는 그저 빙 돌아서, 파월의 뒤에 섰다.
경고하는데, 나한테——
쾅!
파월의 머리가 금속제 탁상 위에 처박혔다.
으억!!
안젤리아는 그의 머리끄덩이를 놓지 않고 다시 잡아당겼고, 파월은 돼지 멱 따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이거 놓으, 아니, 제발 놔 줘! 제발!
너 같은 쓰레기는 내가 질리도록 상대해봤어.
얼마나, 비굴한, 족속인지도, 아주 잘 알아.
쿵!
쿠웅!!
쿠우웅!!!
안젤리아는 파월의 머리를 몇 번이고 탁상에 처박았다.
눈 깜짝할 새에, 파월은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어억... 아아악!!
난 지금 너 같은 태우지도 못하는 쓰레기한테 낭비할 시간 없단 말이야.
안젤리아가 살짝 쉰 목소리를 냈지만, 파월의 귀에는 악마의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말해. 누가 리오니를 보석했지? 왜 꺼내 줬어? 리오니한테 대체 뭐가 있는데!
마,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이 XXX아!
그러니까 이거, 이거 놔!
철푸덕!
안젤리아는 파월의 머리를 탁상에 그대로 내팽개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파월은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의 손수건은 진작에 멀리 날아가, 피범벅인 얼굴을 닦을 수도 없었다.
누가 리오니를 꺼냈는지는 나도 몰라... 하, 하지만 왜 꺼냈는지는 알지.
왜 꺼내 줬는데.
그년의 연구 때문에.
네가 플로라를 박살내기 직전, 리오니의 연구가 마침 아주 중요한 시기였어.
그 사람은 리오니의 핵심 기술을 원했지만, 리오니는 그때 환각제의 조합법만 제공한 상태였으니까...
하, 내가 남 좋은 일만 해 버린 꼴이네.
리오니의 지금 처지론 다른 선택지가 없겠지.
젠장, 이것도 녀석의 속셈이었던 건가.
그래서, 그 연구가 대체 뭔데?
자세힌 몰라도 일종의 대량 살상 병기인 것만은 확실해.
대량 살상 병기? 세상에 그런 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리오니의 연구에 눈독을 들인 거지?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어?
나도 직접 써볼 기회가 있었어서 어느 정도 알게 됐어... 그래도 조금뿐이지만.
내가 아는 건, 그 물건은 은폐성이 굉장해서 일반적인 장비로는 절대 발각될 일 없다는 거야.
그걸 써먹기 딱 좋은 장소가...
기습 테러겠군.
그래, 그거야. 어디에든 아주 손쉽게 들여보낼 수 있어.
생각해 봐, 만약 내가 더티밤 하나를 수상의 관저에 보낸다면...?
내가 얻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 나라가 나를 두려워할 텐데!
아픔이 좀 가셨는지, 파월이 다시 건방진 태도를 되찾았다.
입 안까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으면서, 자신의 상상에 껄껄 웃어댔다.
드륵!
안젤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
안젤리아의 움직임에 파월은 다시 식겁했다.
더, 더는 진짜 몰라! 진짜로!
그놈이 꾸미고 있다는 게, 설마... 젠장...
안젤리아는 파월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양팔로 몸을 받친 채,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직 부족해... 이것만으론 부족해, 증거가 모자라...
안젤리아가 자신을 건드리려는 게 아닌 것 같자, 다시 잔뜩 긴장했던 파월은 움츠렸던 몸을 다시 풀었다.
그리고 망설이다, 코를 쓰윽 닦으며 짐짓 진중한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 수중의 패가 부족한 모양이구만.
뭐, 그래서 가르침이라도 주게?
가르침이랄 것도 아니지만... 아니, 근데 내가 왜 너 같은 미친...<Size=30>년을 가르쳐...</Size>
무심코 한 말실수에 아차 싶었는지, 파월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런데도 말은 끝까지 다 했고, 시뻘겋게 부은 얼굴만으론 겁을 먹었는지 억지를 부리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안젤리아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파월에게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이미 효과는 충분했으니까.
......거래 하나 하지.
거래?
내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아는데... 쓸모 있다고 내 장담하지.
그러니 내 안전을 보장해 줘.
얼른 말하기나 해.
내 마음 바뀌기 전에.
그 말에 파월은 입을 뻐끔거리며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달리 선택지가 없음을 이해하고서, 어금니를 깨물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이건?
안젤리아가 담뱃갑을 받아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튜브 같은 것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감옥마다 전문적으로 물건을 들이는 브로커가 있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여기도 마찬가지야.
담배, 위스키, 그라비아 잡지...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이지.
더러는 자기도 이득을 보거나, 의외로 교도소 내에서의 질서 유지에 도움되는 구석도 있어서 큰 말썽만 아니면 교도관들도 넘어가는 편이지...
하지만 마약은 선을 한참 넘는데?
아니 아니, 이건 마약이 아니야. 절대 아니지.
마약이면 내가 이걸 왜 가져와?
그럼 뭔데?
내가 브레멘에서 썼던 물건 기억해?
리오니가 나한테 제공한 거.
......환각제?
이 베를린 교도소에도 내 친구가 있어서 다 알아봤어.
최근 들어 갑자기 유행하는 물건이래.
환각제가? 감옥에서? 어째서?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싶지도 않구만.
아무튼, 내가 도와준 거 맞지? 약속 꼭 지켜라!
......
안젤리아는 담뱃갑을 살짝 흔들어보고, 품속에 넣었다.
......
이거, 나 말고 알려 준 사람 있어?
너 말곤 없어.
나도 슈타지한테 심문당할 땐 모르는 일이었다고.
그러니, 나 말곤 이걸 아는 사람은 이제 너뿐이야.
물론, 이걸 쓰는 놈들한테서 소문이 새어 나갈 수도 있겠는데... 그건 나도 어쩌지 못해.
적어도 넌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가 협력했단 건... 내 장부에 잘 적어 두도록 하지.
......
전체 대사 보기 (167줄)
......
요양원의 정원. 공기 중엔 신선한 흙의 향이 풍겼고, 화사한 햇살이 풀밭을 어루만졌다.
저기 좀 보세요, 리오니 씨.
수레국화가 피었네요.
......
...다른 데로 가면 안 될까요?
지금은 꽃을 보기 싫어요.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리고 좀 서늘한데, 담요라도 가져다 주시겠어요?
서늘하다고요? 알겠습니다, 체력단련실에 담요가 있으니 가져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있어 주세요.
하하...
리오니는 시선을 붕대로 칭칭 감긴 손과 깁스를 찬 팔로 떨궜다.
지금 그녀에겐 휠체어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이 요양원의 정원은 어느 유명한 가든 디자이너가 직접 손본 곳으로, 꽃은 물론 잔디까지도 까다롭게 선별되어 심어지고 가꿔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심신을 편안하게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하지만 리오니는 그 풍경을 보고도 깊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지금 그녀만큼 꽃향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환자도 드물 테니 말이다.
과연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환자를, 여기선 어떻게 간호할까?
덥석.
그때, 뒤에서 간호사가 방금 놓았던 휠체어의 핸들을 누가 다시 붙잡았다.
빨리 돌아왔네요, 간호사 씨.
담요는 깜빡했는데, 괜찮지?
......히익!?
리오니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안젤리아의 의수가 어깨를 눌렀다.
쉬잇... 그냥 얘기나 하러 왔으니까 까칠하게 굴지 마.
리오니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라 대꾸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목덜미를 붙잡혔을 뿐더러, 안젤리아를 본 순간 그날의 창백한 악몽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 널 돌려보내라고 했는데...
그럼 내가 오냐하고 갈 줄 알았어?
......
만나자고 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대?
안젤리아가 스윽 훑어본 리오니는 좀 이상했다. 최고급 요양원에서 푹 쉬던 환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문에서 막 풀려난 죄수 같은 분위기였다.
아하... 그레이가 왔다 갔구나.
......!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동요하는 리오니의 모습에, 안젤리아도 자신의 추측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네가 우리랑 만난다고 듣고, 경고하러 왔지?
너보고 입단속하라 했어? 그년이 찔릴 만한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묻지 마... 저, 절대 말 안 해...
리오니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가녀린 몸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럼에도 무척 단호해 보였다.
내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너... 넌 아무것도 몰라.
그년은 너 같은 요원 나부랭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도 쓴맛 보기 싫으면... 그만 포기해. 나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리오니는 점점 감정이 격앙되어, 부러진 손까지 아주 약간이나마 움직인 것 같았다.
......난 그냥 살고 싶어.
권총으로 자살하려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풉... 네 부하 덕분이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거든.
...아, 어쩐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리오니가 고개를 들었다.
둘 다 같은 인상이었어.
누구랑 누가?
그레이랑 네 부하.
RPK-16 말이야?
걔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내 손 부러뜨린 그 인형.
괜한 참견이지만, 너도 그 녀석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말대로 괜한 참견이니까 신경 꺼.
안젤리아가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간호사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오지.
다신 오지 마.
와봤자 바뀌는 거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리오니가 대꾸했을 땐 이미 등뒤의 기척은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리오니 씨,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무릎에 덮으면 훨씬 따뜻할 거예... 어? 왜 이렇게 땀이...?
리오니 씨, 괜찮으세요?
......
잘 안 풀렸나 봐?
한발 늦었어.
그레이 그년이 입단속을 아주 단단히도 시켜놨더만.
우와, 안젤리아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 처음 봐요.
그럼 제가 할까요? 리오니 씨도 분명 저와의 재회를 엄청 기뻐할 텐데요...
됐어, 지금은 녀석의 반항심이 가장 강할 때야. 더 괴롭혀봤자 소용없어.
일단 내버려두자, 아직 다른 수가 있으니까.
안젤리아가 고개를 돌려 본 라이트는 왠지 기운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리오니는 중요 참고인이니, 혹시 모를 신변의 위협에 대비해 요양원에 보안인원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점도 확실히 주의해야지. 지금 안전하다 해서 언제까지고 그러리란 보장도 없고.
아무튼 여긴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니, 다른 쪽을 찔러보러 가자.
닥터 그레이의 자료를 정리해 드릴까요?
좋은 아이디어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을 거다. 세간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면서 사는 사람한테 무슨 트집거리가 있다면, 진작에 이슈가 됐을걸.
그럼...?
파월을 보고 싶은데, 시간 잡을 수 있어?
파월이요...? 현재 베를린 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만, 면회가 가능할지... 우선 요청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파월이죠?
알 거 없어,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만 알아둬.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죠.
안젤리아의 다소 매정한 말에 라이트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RPK-16은 희한한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보면서, 라이트가 떠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애를 의심하시나 보네요, 안젤리아.
불만 있어?
그럴 리가요. 그냥 충고드리고 싶어서요.
너무 그렇게 신경질적이면 판단력에 지장이 생긴답니다. 여긴 브레멘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레이가 너무 일찍 찾아왔어, 그것도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브레멘에서랑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야.
라이트가 아니더라도 녀석 휘하의 누군가가 누설했을 수도 있어.
잊지 마, 그레이의 수완으로 리오니를 법정에서 빼돌릴 수 있다면...
슈타지에 스파이 하나 심어 놓는 것도 쉬운 일이야.
나도 생각이 있다니까.
라이트가 소식을 가져오기까진 시간이 좀 있으니 우린 먼저 돌아가자.
......!
AN-94가 무언가를 눈치채곤 안젤리아 곁으로 다가갔다.
계단 조심해라.
......고마워.
안젤리아는 AN-94의 손을 잡고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
다음날.
기운을 회복한 안젤리아는 엄격한 검문을 거친 뒤, 라이트가 어렵사리 마련한 심문실에 도착했다.
문앞의 라이트는 안젤리아가 다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저도 동행할까요?
아니, 넌 리벨리온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잘했다. 일처리 빠르네.
신청이 빨리 통과됐습니다. ...의심스러올 정도로요.
보고를 올리면 보통 확인에만 며칠이 소요되는데...
라이트는 무언가를 에둘러 말하려는 듯했지만, 안젤리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뭐든지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도련님~
......
문을 열고 홀로 심문실 안으로 들어간 안젤리아의 눈에, 파월의 그 역겨운 얼굴이 들어왔다.
빠르게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안젤리아는 파월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교도소 침대는 어때? 잘 못 자나 봐?
......본론이나 말하시지.
파월은 그 퉁퉁한 입술을 깨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젤리아는 의자를 당겨 파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복은 압수 안 당했네? 브레멘의 대부가 베를린에서도 대접받을 줄은 몰랐는걸.
흥... 내가 친구 사귀는 법을 몰랐으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어.
파월은 눈을 굴리며 방의 다른 구석을 계속해서 곁눈질했고, 수갑 찬 손에 쥔 손수건으로 몇 번이나 이마를 훔쳤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널 여기다 버렸지.
듣자하니, 리오니는 VIP 룸에서 푹신한 침대서 잔다던데. 못 들었어?
나한테서 뭐라도 캐내려는 모양인데 헛수고야, 내가 아는 건 슈타지한테 말한 게 전부라고.
날 심문해봤자 시간 낭비밖에 안 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안 믿는데.
너처럼 간사한 여우놈은 반드시 비장의 수를 마지막까지 꿍쳐 두는 법이거든. 지금도 뭐든지 다 네 손바닥 안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실상은 어떻지? 넌 지금 모가지나 안 달아나면 다행인 상황이야.
우, 웃기고 있네!
정곡을 찔렸는지, 파월이 대뜸 흥분하며 손바닥으로 탁상을 탕탕 쳤다.
네깟 계집애가 뭘 안다고!
두고 봐! 나도 금방 나가서, 날 건드린 녀석한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까!
......
안젤리아는 콧등을 쓱쓱 문지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뭐... 뭐야?
그냥 가려고? 말한 것도 없는데?
안젤리아가 일어나자, 파월은 그녀가 나가려는 줄 알고 역으로 당황했다.
역시 자기 입장을 잘 알고 있네...
나한테 협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치?
일어난 것 가지고 잔뜩 쫄기나 하고 말이야.
뭣...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오히려 네가 나한테 절하고 부탁해야 하는 입장 아니야?! 엉!?
하아아...
라이트, 녹화 꺼 봐.
무, 무슨 속셈이야?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파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안젤리아는 그저 빙 돌아서, 파월의 뒤에 섰다.
경고하는데, 나한테——
쾅!
파월의 머리가 금속제 탁상 위에 처박혔다.
으억!!
안젤리아는 그의 머리끄덩이를 놓지 않고 다시 잡아당겼고, 파월은 돼지 멱 따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이거 놓으, 아니, 제발 놔 줘! 제발!
너 같은 쓰레기는 내가 질리도록 상대해봤어.
얼마나, 비굴한, 족속인지도, 아주 잘 알아.
쿵!
쿠웅!!
쿠우웅!!!
안젤리아는 파월의 머리를 몇 번이고 탁상에 처박았다.
눈 깜짝할 새에, 파월은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어억... 아아악!!
난 지금 너 같은 태우지도 못하는 쓰레기한테 낭비할 시간 없단 말이야.
안젤리아가 살짝 쉰 목소리를 냈지만, 파월의 귀에는 악마의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말해. 누가 리오니를 보석했지? 왜 꺼내 줬어? 리오니한테 대체 뭐가 있는데!
마,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이 XXX아!
그러니까 이거, 이거 놔!
철푸덕!
안젤리아는 파월의 머리를 탁상에 그대로 내팽개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파월은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의 손수건은 진작에 멀리 날아가, 피범벅인 얼굴을 닦을 수도 없었다.
누가 리오니를 꺼냈는지는 나도 몰라... 하, 하지만 왜 꺼냈는지는 알지.
왜 꺼내 줬는데.
그년의 연구 때문에.
네가 플로라를 박살내기 직전, 리오니의 연구가 마침 아주 중요한 시기였어.
그 사람은 리오니의 핵심 기술을 원했지만, 리오니는 그때 환각제의 조합법만 제공한 상태였으니까...
하, 내가 남 좋은 일만 해 버린 꼴이네.
리오니의 지금 처지론 다른 선택지가 없겠지.
젠장, 이것도 녀석의 속셈이었던 건가.
그래서, 그 연구가 대체 뭔데?
자세힌 몰라도 일종의 대량 살상 병기인 것만은 확실해.
대량 살상 병기? 세상에 그런 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리오니의 연구에 눈독을 들인 거지?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어?
나도 직접 써볼 기회가 있었어서 어느 정도 알게 됐어... 그래도 조금뿐이지만.
내가 아는 건, 그 물건은 은폐성이 굉장해서 일반적인 장비로는 절대 발각될 일 없다는 거야.
그걸 써먹기 딱 좋은 장소가...
기습 테러겠군.
그래, 그거야. 어디에든 아주 손쉽게 들여보낼 수 있어.
생각해 봐, 만약 내가 더티밤 하나를 수상의 관저에 보낸다면...?
내가 얻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 나라가 나를 두려워할 텐데!
아픔이 좀 가셨는지, 파월이 다시 건방진 태도를 되찾았다.
입 안까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으면서, 자신의 상상에 껄껄 웃어댔다.
드륵!
안젤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
안젤리아의 움직임에 파월은 다시 식겁했다.
더, 더는 진짜 몰라! 진짜로!
그놈이 꾸미고 있다는 게, 설마... 젠장...
안젤리아는 파월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양팔로 몸을 받친 채,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직 부족해... 이것만으론 부족해, 증거가 모자라...
안젤리아가 자신을 건드리려는 게 아닌 것 같자, 다시 잔뜩 긴장했던 파월은 움츠렸던 몸을 다시 풀었다.
그리고 망설이다, 코를 쓰윽 닦으며 짐짓 진중한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 수중의 패가 부족한 모양이구만.
뭐, 그래서 가르침이라도 주게?
가르침이랄 것도 아니지만... 아니, 근데 내가 왜 너 같은 미친...<Size=30>년을 가르쳐...</Size>
무심코 한 말실수에 아차 싶었는지, 파월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런데도 말은 끝까지 다 했고, 시뻘겋게 부은 얼굴만으론 겁을 먹었는지 억지를 부리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안젤리아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파월에게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이미 효과는 충분했으니까.
......거래 하나 하지.
거래?
내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아는데... 쓸모 있다고 내 장담하지.
그러니 내 안전을 보장해 줘.
얼른 말하기나 해.
내 마음 바뀌기 전에.
그 말에 파월은 입을 뻐끔거리며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달리 선택지가 없음을 이해하고서, 어금니를 깨물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이건?
안젤리아가 담뱃갑을 받아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튜브 같은 것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감옥마다 전문적으로 물건을 들이는 브로커가 있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여기도 마찬가지야.
담배, 위스키, 그라비아 잡지...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이지.
더러는 자기도 이득을 보거나, 의외로 교도소 내에서의 질서 유지에 도움되는 구석도 있어서 큰 말썽만 아니면 교도관들도 넘어가는 편이지...
하지만 마약은 선을 한참 넘는데?
아니 아니, 이건 마약이 아니야. 절대 아니지.
마약이면 내가 이걸 왜 가져와?
그럼 뭔데?
내가 브레멘에서 썼던 물건 기억해?
리오니가 나한테 제공한 거.
......환각제?
이 베를린 교도소에도 내 친구가 있어서 다 알아봤어.
최근 들어 갑자기 유행하는 물건이래.
환각제가? 감옥에서? 어째서?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싶지도 않구만.
아무튼, 내가 도와준 거 맞지? 약속 꼭 지켜라!
......
안젤리아는 담뱃갑을 살짝 흔들어보고, 품속에 넣었다.
......
이거, 나 말고 알려 준 사람 있어?
너 말곤 없어.
나도 슈타지한테 심문당할 땐 모르는 일이었다고.
그러니, 나 말곤 이걸 아는 사람은 이제 너뿐이야.
물론, 이걸 쓰는 놈들한테서 소문이 새어 나갈 수도 있겠는데... 그건 나도 어쩌지 못해.
적어도 넌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가 협력했단 건... 내 장부에 잘 적어 두도록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