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틸루스의 강 Ⅰ
"새로운 세계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싶나요, 아니면 낡은 세계의 꺼져 가는 불씨를 살리려다 스러지고 싶나요?"
......
다음날 아침.
그레이 생물 과학 연구소.
그레이는 의료용 고무장갑을 벗고, 세면대 앞에 서서 손을 씻었다.
오늘 검진 결과도 이상적이네요.
당분간 식단 조절은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음주와 흡연은 계속 자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레이 선생.
이거 항상 신세만 져서 미안하군요.
천만에요, 의사로서 제가 마땅히 할 일인걸요.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이둔"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들었소만.
......
그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검지를 입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쉬잇. 사무실에서 그 건은 얘기하지 않아요.
여기서 저는 한 명의 의사일 뿐이에요.
아아...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따로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해도 될까요?
남자는 미안해하며 어느 레스토랑의 명함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호의에 감사드려요.
그레이는 조신하게 명함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자는 매우 흡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한 후 출구로 향했다.
......?!
......
하지만 남자가 나가려던 그 문을, 웬 인상 험악한 여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 여자의 시선은 그 너머의 그레이를 향했고, 살벌한 분위기에 남자는 겁을 먹었다.
다, 당신 누구야?! 누가 들여보냈어!
갈 거면 빨랑 가시지?
댁이랑은 상관 없는 일이야.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패리크 씨?
남자가 안젤리아의 무례함에 분노하려던 찰나, 그레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렸다.
그분은 제 고객입니다.
뭐... 뭐요? 선생의 손님이라고요?!
그 말에 충격받은 그는 단정한 옷차림의 그레이와 거지꼴인 안젤리아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 그럴 리가! 이런 거지가 어딜 봐서 그레이 선생의 지인입니까!?
게다가, 이 모습을 보세요! 딱 진상 부리러 온 거 아닙니까!
훗...
그레이가 히죽 웃었다.
그렇네요... 하긴, 어젯밤에 좀 거칠었거든요.
어... 어젯밤?!
...약속 잡고 왔다, 됐어?
안젤리아가 파우치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미묘한 색이었지만, 누가 봐도 그것이 그레이의 명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신 그대로예요, 패리크 씨.
숙녀들만의 대화를 하려 하는데, 자리를 내어 주시겠어요?
안젤리아는 묵묵히 방으로 들어왔고, 남자는 더더욱 얼떨떨해하며 길을 비켰다.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곤 씩씩대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방에는 두 여자만 남게 되었다.
저 남자, 얼굴이 낯익다 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 식약청 사람이지?
패리크 씨는 제 단골이시자 환자시죠.
제게 정기 정밀검진을 받으세요.
그레이는 담담하게 손의 레스토랑 명함을 조각조각 찢어 휴지통에 버리고 손을 털고선, 다시 세면대 앞에 섰다.
그녀의 느긋느긋한 동작을 지켜보던 안젤리아는 하마터면 또 그 자연스런 모습에 속을 뻔했다.
어젯밤에 좀 거칠었다고?
꽤나 완곡한 표현인걸.
의사는 상황에 따라 환자의 상태를 완곡하게 전달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손가락을 구석구석 깔끔하게 헹구고, 그레이는 수건을 뽑아 손을 닦곤 회색 장갑을 꺼냈다.
상태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닌가?
상냥한 의사는 완곡한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한답니다.
의료용 장갑을 손목까지 당겨 끼고, 그레이는 몸을 돌려 서서히 다가오는 안젤리아에게 방 한가운데의 수술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누우시죠.
...어디에?
수술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오직 두 가지예요. 의사, 그리고 환자.
의사는 물론 저고, 환자는 안젤리아죠.
그레이는 수술대를 교정하고, 기계팔들을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리곤 안젤리아에게 다시 한번 몸짓으로 요청했다.
당신의 의수는 이제 거의 한계잖아요?
누우세요, 안젤리아.
그녀의 어조는 거절은 안 받겠다는 투였다.
......
그 권유 아닌 권유에, 안젤리아는 천천히 수술대에,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날 봐도 전혀 안 놀랐단 눈치네?
지금 당장 총으로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면 만사 해결일 거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죠, 제가 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했고, 안젤리아는 코웃음치며 수술대에 몸을 기대고 주위를 살폈다.
간호사는 없어?
제 간호사는 보통 수술실에 들이지 않아요.
하기야... 한밤중에 여기저기 불지르고 다녀서 어지간히도 바쁘지?
안젤리아는 그레이의 코앞까지 다가가, 총구를 슬쩍 들었다.
네 말대로... 요즘 의수의 상태가 영 아니거든.
손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레이 의사 선생님?
기꺼이.
키가 눈에 띄게 차이나는 두 여자는 서로에게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선을 교환했다. 안젤리아는 지금 언제든지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
......
그레이의 시선이 상대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걸 들고 누우시려고요?
요원들이란 다 이렇게 신경질적이야.
안젤리아가 총을 고쳐 쥐었다. 총구가 향하진 않았지만, 그레이도 그 총의 안전장치가 풀린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전 심리학자가 아니라 외과의라서요.
당신의 PTSD는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네요. 제 충격요법을 원하신다면 또 모를까.
거참 고맙지만, 네 호의는 사양하겠어.
네가 가운만 그럴 듯하게 입은 미치광이인지 누가 알아?
오히려, 내가 네 심리 치료를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것도 꽤 재밌는 상상이네요.
저도 심리학을 좋아한답니다, 심리 테스트도 즐겨 하고요.
"로르샤흐 테스트"라고, 들어보셨나요?
들어봤지. 근데 그게 어쨌는데?
제가 난생 처음으로 해봤던 심리 테스트가 바로 로르샤흐 테스트랍니다.
제 스승님께 받았죠.
너도 스승이란 게 있었구나.
당신은 없었나요?
안젤리아의 시선은 그레이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대치 후, 결국 그녀는 수술대에 올라 몸을 눕혔다.
오른손엔 여전히 총을 쥐고서, 의수를 관찰대 위에 반듯하게 올렸다.
그레이는 모노클 확대경을 쓰고, 다른 쪽 선반에서 안젤리아가 본 적 없는 기구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지금 무슨 궁리신가요, 안젤리아?
궁리라니?
들어왔을 때부터 제 수술실을 관찰했잖아요.
그러면서도 저와는 마치 간만에 만난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죠. 솔직히, 절 위협할 때 정말로 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정말 제 앞에 누웠어요.
그레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안젤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요.
당신의 배짱이 두둑하단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모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이제 날 해치우려고?
그래, 지금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지. 이렇게 네 앞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데.
그 수술칼로 내 목이든 어디든 그어 버리면, 나라는 눈엣가시도 영영 사라질 테지.
서로에게 위험천만한 도박이군요.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저는 의사입니다. 제 수술대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의사로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레이는 안젤리아의 의수를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어떤 새로운 카드를 찾았나요?
베를린 교도소, 격리벽, 본 마을, 지하 터널.
구 시청, 마샬 거리, 베를린 방송국.
안젤리아는 서로 연관성을 찾기 힘든 장소들을 댔다.
......!
하지만 그레이의 손동작이 한순간 멈칫했다.
넌 몇 개월 전부터, 베를린 시내에 일련의 사건사고와 테러를 계획하고, 일으켰지.
지금 이 도시에 감도는 불안한 분위기의 대부분이, 다 네가 선동해서야.
안젤리아는 태연하게 그레이에게 말했다. 조금은 놀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늘어질 거라 예상은 했어요.
그래도 제가 리오니를 아낀다는 점만큼은 사실이랍니다. 그 재능은 얻기도, 복제하기도 힘들어요.
그레이는 의수의 결합구에 냉각액을 주입하고 시냅스 연결을 끊었다.
안젤리아는 정말 오랜만에 한쪽 팔을 잃은 공허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더 세게 쥐었다. 그레이가 정말 이대로 자신을 해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수상한 낌새 없이, 정교한 기구로 의수의 관절 부위를 해체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든 말든, 넌 신경쓰지 않고 그저 혼란을 야기했어.
또 계획은 하나같이 용의주도했지. 평범한 테러의 밑공작이라 치곤 너무나도 세심해.
네 목적은 결코 베를린이 아니야, 더 위의 인물들을 노리고 있어.
그레이가 확대경의 초점을 조절하고, 안젤리아의 의수의 손가락 관절에선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절 찾아왔군요.
당신 혼자서는 판을 뒤엎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남은 유일한 방법은, 제게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제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고 왔군요.
렌즈 너머로 안젤리아를 보는 그레이의 눈빛은 감탄으로 반짝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안젤리아.
당신 같은 사람은 어디서든 큰 일을 해낼 거예요.
소련인들이 당신을 장기말로 삼은 것도 그래서겠죠.
네가 노리는 게 "그들"이란 걸 인정하나 보네?
안젤리아, 입는 제복을 바꿀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당신은 그런 자기 자존심만 챙기기 바쁜 시대착오적인 귀족들과 어울리기 싫어하잖아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당신이 입에 구호만 달고 사는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알아요.
잘 생각해봐요, 당신의 재능이라면 그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어요.
새로운 세계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싶나요, 아니면 낡은 세계의 꺼져 가는 불씨를 살리려다 스러지고 싶나요?
...연설 참 거침없이 하는구만.
미안하게 됐지만, 난 그딴 거 전혀 흥미 없어서 말이야.
난 오직 나만을 위해 싸우거든.
......정말 유감이네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격앙된 말과 함께, 의수의 마지막 교정도 끝났다.
다시 시냅스가 연결되자, 의수의 실감이 안젤리아의 촉감으로 돌아왔다.
시험삼아 움직여 본 의수는 확실히 정비 전과 확연히 다른 가벼움이 느껴졌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나 뜻밖이었다.
왜 네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몸값도 높은지 알겠네.
이 시대에 인체와 의수, 전혀 다른 두 분야에 동시에 정점에 오른 의사는 사실상 없다시피 할 테니.
어딜 가도 환영받겠지.
하지만 의술만으론 세상을 치료할 수 없어요.
이 세계엔 "극약 처방"이 필요해요.
세상에 상처를 늘리는 짓일 뿐이야.
나와 "그들"은 단순히 의견이 갈리는 거지만, 넌 적의를 갖고 대립하는 거지.
너와 네 형재자매들은 세상의 암덩어리일 뿐이야.
극약 처방? 사약을 잘못 말했겠지.
안젤리아는 의수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른 손의 총을 그레이의 얼굴로 향했다.
그 삐뚤어진 사상도 네 "스승"한테 배운 거냐?
그레이는 안젤리아의 총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스승은 그저, 제 진정한 자아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을 뿐이에요.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남이 아닌 스스로가 정하는 것임을,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제 스승은 당신을 참 마음에 들어해요. 저도 그래서 처음부터 당신을 특별 대우했답니다.
네 스승이 날 안다고...? 누군데?
당신과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그 시간을 엄청 그리워하세요...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요.
그래도, 만약 당신이 제 앞을 가로막는다면 자기를 신경써 줄 필욘 없다고 했어요.
......몰리도?
쉬――잇...
그레이는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의수를 어루만지며, 점점 안색이 변하는 안젤리아를 관찰했다.
그리고 안젤리아의 손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 무거운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사람 이름은 말하지 말아요.
지금 당신의 상대는 저라고요.
몸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취제요. 수술할 땐 필수잖아요?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랍니다.
그레이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어, 안젤리아의 눈앞에서 살살 흔들었다.
리오니는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예요.
그녀보다 식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요.
으윽...!
안젤리아는 이를 악물었지만, 마비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수술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만약 그녀가 그런 안타까운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저와 그녀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레이는 탄식하며 바닥에 떨어진 안젤리아에게 다가가, 총을 겨눴다.
당신처럼 말이에요, 안젤리아.
당신의 대답이 달랐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요.
너...!
너... 너도 니토였냐...!
딩동댕, 정말 깜짝 놀랐어요.
몰리도에게 그렇게 호되게 당해 놓고도, 저한테 비슷한 의심조차 하지 않다니. 전혀 당신답지 않았어요.
"레이디 그레이"가 의료계의 전설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게 10년 전이야...
네 이력도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어... 네놈들이 10년 전부터 판을 짠 게 아닌 이상은...
어떻게 그럴 리가...
아하, 그건 확실히 맹점이네요.
그레이는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몸을 뒤집은 안젤리아의 눈에, 그레이의 지나친 동안이 들어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레이"는 죽었구나?
죽이고 네가 그 자리를 꿰어찼어...!
......
얼마나 더 있지?
절대 너 하나일 리 없어... 너 말고 사회에 침투한 니토가 대체 얼마나 더 있냐고!
질문이 너무 많으시네요, 안젤리아.
안심하세요, 아직 당신을 죽이진 않아요. 당신이 가진 정보에 흥미가 있거든요.
그레이가 허리를 숙여, 안젤리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놀리는 것처럼.
안젤리아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그레이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무 자만했어요, 안젤리아.
어떻게 여기 혼자 올 수가 있어요?
흥...
그레이를 노려보던 안젤리아가 돌연 낄낄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죠?
웃기니까 웃지...
정말 몰리도랑 사제 관계가 맞구나.
얼마나 잘 배웠으면... 똑같은 데서 방심하냐?
......!
그레이의 안색이 뒤집혔다.
퍼엉!!
폭발과 함께, 연구소의 벽이 통째로 무너졌다.
탕!
그리고 총알 한 발이 먼지를 뚫고 날아와,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 손의 총에 불꽃이 튀었다.
치잇!
권총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그레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안젤리아는 마비된 몸으로 잘도 기어가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목표 고정! 안젤리아와 가까우니 주의하라!
제압 개시.
AK-15가 다시 총을 들어, 그레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쇠붙이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만 났다.
눈 뜨고도 코가 베일 거리였지만, 그레이의 등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총알을 막아낸 것이었다.
가늘고 기다란, 끝에는 예리한 칼날이 달린 기계팔이었다.
흡사 전갈의 꼬리와도 같은 형상.
매서운 기세의 인형들을 마주했음에도, 그레이는 전혀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몸을 던져 안쪽 벽에 붙었다.
......
그리곤 매우 위험한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노려보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의 꼬리가 비상벨을 덮은 유리를 힘껏 쳐 깨뜨리자, AK-15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뒤의 벽이 뒤집혀 사라졌다.
이런, 비밀 통로다!
AK-15!
특수 소재다, 안이 안 보여!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면서 수술실 사방의 벽에 두꺼운 방화벽이 내려왔다.
안젤리아, 후퇴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갇히고 만다.
빌어먹을...!
AK-15의 부축을 받아, 안젤리아는 간신히 일어났다.
빨리... 빨리 가야 해.
어디로 갑니까?
안젤리아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요양원!
그 자식은 분명 리오니한테 갈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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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아침.
그레이 생물 과학 연구소.
그레이는 의료용 고무장갑을 벗고, 세면대 앞에 서서 손을 씻었다.
오늘 검진 결과도 이상적이네요.
당분간 식단 조절은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음주와 흡연은 계속 자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레이 선생.
이거 항상 신세만 져서 미안하군요.
천만에요, 의사로서 제가 마땅히 할 일인걸요.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이둔"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들었소만.
......
그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검지를 입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쉬잇. 사무실에서 그 건은 얘기하지 않아요.
여기서 저는 한 명의 의사일 뿐이에요.
아아...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따로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해도 될까요?
남자는 미안해하며 어느 레스토랑의 명함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호의에 감사드려요.
그레이는 조신하게 명함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자는 매우 흡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한 후 출구로 향했다.
......?!
......
하지만 남자가 나가려던 그 문을, 웬 인상 험악한 여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 여자의 시선은 그 너머의 그레이를 향했고, 살벌한 분위기에 남자는 겁을 먹었다.
다, 당신 누구야?! 누가 들여보냈어!
갈 거면 빨랑 가시지?
댁이랑은 상관 없는 일이야.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패리크 씨?
남자가 안젤리아의 무례함에 분노하려던 찰나, 그레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렸다.
그분은 제 고객입니다.
뭐... 뭐요? 선생의 손님이라고요?!
그 말에 충격받은 그는 단정한 옷차림의 그레이와 거지꼴인 안젤리아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 그럴 리가! 이런 거지가 어딜 봐서 그레이 선생의 지인입니까!?
게다가, 이 모습을 보세요! 딱 진상 부리러 온 거 아닙니까!
훗...
그레이가 히죽 웃었다.
그렇네요... 하긴, 어젯밤에 좀 거칠었거든요.
어... 어젯밤?!
...약속 잡고 왔다, 됐어?
안젤리아가 파우치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미묘한 색이었지만, 누가 봐도 그것이 그레이의 명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신 그대로예요, 패리크 씨.
숙녀들만의 대화를 하려 하는데, 자리를 내어 주시겠어요?
안젤리아는 묵묵히 방으로 들어왔고, 남자는 더더욱 얼떨떨해하며 길을 비켰다.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곤 씩씩대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방에는 두 여자만 남게 되었다.
저 남자, 얼굴이 낯익다 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 식약청 사람이지?
패리크 씨는 제 단골이시자 환자시죠.
제게 정기 정밀검진을 받으세요.
그레이는 담담하게 손의 레스토랑 명함을 조각조각 찢어 휴지통에 버리고 손을 털고선, 다시 세면대 앞에 섰다.
그녀의 느긋느긋한 동작을 지켜보던 안젤리아는 하마터면 또 그 자연스런 모습에 속을 뻔했다.
어젯밤에 좀 거칠었다고?
꽤나 완곡한 표현인걸.
의사는 상황에 따라 환자의 상태를 완곡하게 전달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손가락을 구석구석 깔끔하게 헹구고, 그레이는 수건을 뽑아 손을 닦곤 회색 장갑을 꺼냈다.
상태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닌가?
상냥한 의사는 완곡한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한답니다.
의료용 장갑을 손목까지 당겨 끼고, 그레이는 몸을 돌려 서서히 다가오는 안젤리아에게 방 한가운데의 수술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누우시죠.
...어디에?
수술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오직 두 가지예요. 의사, 그리고 환자.
의사는 물론 저고, 환자는 안젤리아죠.
그레이는 수술대를 교정하고, 기계팔들을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리곤 안젤리아에게 다시 한번 몸짓으로 요청했다.
당신의 의수는 이제 거의 한계잖아요?
누우세요, 안젤리아.
그녀의 어조는 거절은 안 받겠다는 투였다.
......
그 권유 아닌 권유에, 안젤리아는 천천히 수술대에,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날 봐도 전혀 안 놀랐단 눈치네?
지금 당장 총으로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면 만사 해결일 거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죠, 제가 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했고, 안젤리아는 코웃음치며 수술대에 몸을 기대고 주위를 살폈다.
간호사는 없어?
제 간호사는 보통 수술실에 들이지 않아요.
하기야... 한밤중에 여기저기 불지르고 다녀서 어지간히도 바쁘지?
안젤리아는 그레이의 코앞까지 다가가, 총구를 슬쩍 들었다.
네 말대로... 요즘 의수의 상태가 영 아니거든.
손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레이 의사 선생님?
기꺼이.
키가 눈에 띄게 차이나는 두 여자는 서로에게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선을 교환했다. 안젤리아는 지금 언제든지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
......
그레이의 시선이 상대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걸 들고 누우시려고요?
요원들이란 다 이렇게 신경질적이야.
안젤리아가 총을 고쳐 쥐었다. 총구가 향하진 않았지만, 그레이도 그 총의 안전장치가 풀린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전 심리학자가 아니라 외과의라서요.
당신의 PTSD는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네요. 제 충격요법을 원하신다면 또 모를까.
거참 고맙지만, 네 호의는 사양하겠어.
네가 가운만 그럴 듯하게 입은 미치광이인지 누가 알아?
오히려, 내가 네 심리 치료를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것도 꽤 재밌는 상상이네요.
저도 심리학을 좋아한답니다, 심리 테스트도 즐겨 하고요.
"로르샤흐 테스트"라고, 들어보셨나요?
들어봤지. 근데 그게 어쨌는데?
제가 난생 처음으로 해봤던 심리 테스트가 바로 로르샤흐 테스트랍니다.
제 스승님께 받았죠.
너도 스승이란 게 있었구나.
당신은 없었나요?
안젤리아의 시선은 그레이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대치 후, 결국 그녀는 수술대에 올라 몸을 눕혔다.
오른손엔 여전히 총을 쥐고서, 의수를 관찰대 위에 반듯하게 올렸다.
그레이는 모노클 확대경을 쓰고, 다른 쪽 선반에서 안젤리아가 본 적 없는 기구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지금 무슨 궁리신가요, 안젤리아?
궁리라니?
들어왔을 때부터 제 수술실을 관찰했잖아요.
그러면서도 저와는 마치 간만에 만난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죠. 솔직히, 절 위협할 때 정말로 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정말 제 앞에 누웠어요.
그레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안젤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요.
당신의 배짱이 두둑하단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모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이제 날 해치우려고?
그래, 지금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지. 이렇게 네 앞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데.
그 수술칼로 내 목이든 어디든 그어 버리면, 나라는 눈엣가시도 영영 사라질 테지.
서로에게 위험천만한 도박이군요.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저는 의사입니다. 제 수술대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의사로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레이는 안젤리아의 의수를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어떤 새로운 카드를 찾았나요?
베를린 교도소, 격리벽, 본 마을, 지하 터널.
구 시청, 마샬 거리, 베를린 방송국.
안젤리아는 서로 연관성을 찾기 힘든 장소들을 댔다.
......!
하지만 그레이의 손동작이 한순간 멈칫했다.
넌 몇 개월 전부터, 베를린 시내에 일련의 사건사고와 테러를 계획하고, 일으켰지.
지금 이 도시에 감도는 불안한 분위기의 대부분이, 다 네가 선동해서야.
안젤리아는 태연하게 그레이에게 말했다. 조금은 놀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늘어질 거라 예상은 했어요.
그래도 제가 리오니를 아낀다는 점만큼은 사실이랍니다. 그 재능은 얻기도, 복제하기도 힘들어요.
그레이는 의수의 결합구에 냉각액을 주입하고 시냅스 연결을 끊었다.
안젤리아는 정말 오랜만에 한쪽 팔을 잃은 공허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더 세게 쥐었다. 그레이가 정말 이대로 자신을 해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수상한 낌새 없이, 정교한 기구로 의수의 관절 부위를 해체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든 말든, 넌 신경쓰지 않고 그저 혼란을 야기했어.
또 계획은 하나같이 용의주도했지. 평범한 테러의 밑공작이라 치곤 너무나도 세심해.
네 목적은 결코 베를린이 아니야, 더 위의 인물들을 노리고 있어.
그레이가 확대경의 초점을 조절하고, 안젤리아의 의수의 손가락 관절에선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절 찾아왔군요.
당신 혼자서는 판을 뒤엎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남은 유일한 방법은, 제게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제 입에서 정보를 캐내려고 왔군요.
렌즈 너머로 안젤리아를 보는 그레이의 눈빛은 감탄으로 반짝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안젤리아.
당신 같은 사람은 어디서든 큰 일을 해낼 거예요.
소련인들이 당신을 장기말로 삼은 것도 그래서겠죠.
네가 노리는 게 "그들"이란 걸 인정하나 보네?
안젤리아, 입는 제복을 바꿀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당신은 그런 자기 자존심만 챙기기 바쁜 시대착오적인 귀족들과 어울리기 싫어하잖아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당신이 입에 구호만 달고 사는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알아요.
잘 생각해봐요, 당신의 재능이라면 그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어요.
새로운 세계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싶나요, 아니면 낡은 세계의 꺼져 가는 불씨를 살리려다 스러지고 싶나요?
...연설 참 거침없이 하는구만.
미안하게 됐지만, 난 그딴 거 전혀 흥미 없어서 말이야.
난 오직 나만을 위해 싸우거든.
......정말 유감이네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격앙된 말과 함께, 의수의 마지막 교정도 끝났다.
다시 시냅스가 연결되자, 의수의 실감이 안젤리아의 촉감으로 돌아왔다.
시험삼아 움직여 본 의수는 확실히 정비 전과 확연히 다른 가벼움이 느껴졌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나 뜻밖이었다.
왜 네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몸값도 높은지 알겠네.
이 시대에 인체와 의수, 전혀 다른 두 분야에 동시에 정점에 오른 의사는 사실상 없다시피 할 테니.
어딜 가도 환영받겠지.
하지만 의술만으론 세상을 치료할 수 없어요.
이 세계엔 "극약 처방"이 필요해요.
세상에 상처를 늘리는 짓일 뿐이야.
나와 "그들"은 단순히 의견이 갈리는 거지만, 넌 적의를 갖고 대립하는 거지.
너와 네 형재자매들은 세상의 암덩어리일 뿐이야.
극약 처방? 사약을 잘못 말했겠지.
안젤리아는 의수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른 손의 총을 그레이의 얼굴로 향했다.
그 삐뚤어진 사상도 네 "스승"한테 배운 거냐?
그레이는 안젤리아의 총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스승은 그저, 제 진정한 자아를 깨닫도록 도와주었을 뿐이에요.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남이 아닌 스스로가 정하는 것임을,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제 스승은 당신을 참 마음에 들어해요. 저도 그래서 처음부터 당신을 특별 대우했답니다.
네 스승이 날 안다고...? 누군데?
당신과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그 시간을 엄청 그리워하세요...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요.
그래도, 만약 당신이 제 앞을 가로막는다면 자기를 신경써 줄 필욘 없다고 했어요.
......몰리도?
쉬――잇...
그레이는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의수를 어루만지며, 점점 안색이 변하는 안젤리아를 관찰했다.
그리고 안젤리아의 손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 무거운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사람 이름은 말하지 말아요.
지금 당신의 상대는 저라고요.
몸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취제요. 수술할 땐 필수잖아요?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랍니다.
그레이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어, 안젤리아의 눈앞에서 살살 흔들었다.
리오니는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예요.
그녀보다 식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요.
으윽...!
안젤리아는 이를 악물었지만, 마비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수술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만약 그녀가 그런 안타까운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저와 그녀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레이는 탄식하며 바닥에 떨어진 안젤리아에게 다가가, 총을 겨눴다.
당신처럼 말이에요, 안젤리아.
당신의 대답이 달랐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요.
너...!
너... 너도 니토였냐...!
딩동댕, 정말 깜짝 놀랐어요.
몰리도에게 그렇게 호되게 당해 놓고도, 저한테 비슷한 의심조차 하지 않다니. 전혀 당신답지 않았어요.
"레이디 그레이"가 의료계의 전설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게 10년 전이야...
네 이력도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어... 네놈들이 10년 전부터 판을 짠 게 아닌 이상은...
어떻게 그럴 리가...
아하, 그건 확실히 맹점이네요.
그레이는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몸을 뒤집은 안젤리아의 눈에, 그레이의 지나친 동안이 들어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레이"는 죽었구나?
죽이고 네가 그 자리를 꿰어찼어...!
......
얼마나 더 있지?
절대 너 하나일 리 없어... 너 말고 사회에 침투한 니토가 대체 얼마나 더 있냐고!
질문이 너무 많으시네요, 안젤리아.
안심하세요, 아직 당신을 죽이진 않아요. 당신이 가진 정보에 흥미가 있거든요.
그레이가 허리를 숙여, 안젤리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놀리는 것처럼.
안젤리아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그레이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무 자만했어요, 안젤리아.
어떻게 여기 혼자 올 수가 있어요?
흥...
그레이를 노려보던 안젤리아가 돌연 낄낄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죠?
웃기니까 웃지...
정말 몰리도랑 사제 관계가 맞구나.
얼마나 잘 배웠으면... 똑같은 데서 방심하냐?
......!
그레이의 안색이 뒤집혔다.
퍼엉!!
폭발과 함께, 연구소의 벽이 통째로 무너졌다.
탕!
그리고 총알 한 발이 먼지를 뚫고 날아와,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 손의 총에 불꽃이 튀었다.
치잇!
권총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그레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안젤리아는 마비된 몸으로 잘도 기어가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목표 고정! 안젤리아와 가까우니 주의하라!
제압 개시.
AK-15가 다시 총을 들어, 그레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쇠붙이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만 났다.
눈 뜨고도 코가 베일 거리였지만, 그레이의 등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총알을 막아낸 것이었다.
가늘고 기다란, 끝에는 예리한 칼날이 달린 기계팔이었다.
흡사 전갈의 꼬리와도 같은 형상.
매서운 기세의 인형들을 마주했음에도, 그레이는 전혀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몸을 던져 안쪽 벽에 붙었다.
......
그리곤 매우 위험한 눈빛으로 안젤리아를 노려보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의 꼬리가 비상벨을 덮은 유리를 힘껏 쳐 깨뜨리자, AK-15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뒤의 벽이 뒤집혀 사라졌다.
이런, 비밀 통로다!
AK-15!
특수 소재다, 안이 안 보여!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면서 수술실 사방의 벽에 두꺼운 방화벽이 내려왔다.
안젤리아, 후퇴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갇히고 만다.
빌어먹을...!
AK-15의 부축을 받아, 안젤리아는 간신히 일어났다.
빨리... 빨리 가야 해.
어디로 갑니까?
안젤리아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요양원!
그 자식은 분명 리오니한테 갈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