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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 거울단계

뫼비우스 고리

"새로운 세상에서 봅시다."

-44-A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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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수라와 같은 살기를 내뿜는 AK-15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폭발의 분진을 뚫고 나왔다.

AK15

안젤리아는 널 믿었다.

타타탕!!

그녀는 총을 들어 날렵하게 움직이는 은빛 형체를 향해 쏘았고, 사선상의 꽃병과 유화가 모조리 걸레짝이 되었다.

AK15

AK-12도 널 믿었다.

좁은 실내에서, 그녀의 돌격소총은 성능을 온전히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저 미꾸라지 같은 놈을 상대할 때엔 더더욱.

삐빅.

AK-15의 발밑에서 난 경고음이, 그녀를 비웃었다.

퍼엉!!

AK15

나도―― 너를 믿었다!

밑의 폭탄이 폭발하기도 전에, 바닥의 장판은 AK-15의 도움닫기로 움푹 패였다.

쿠웅!

거대한 몸집을 폭발의 반동에 실어 펄쩍 뛰어오른 AK-15는 양팔을 교차하고 그대로 눈앞의 벽으로 돌진했다.

우지끈!

그 공성추와 맞먹는 충격에, 얇은 나무벽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RPK-16가 수류탄을 던졌다.

퍼엉!

RPK16

왜요?

제가 AK-12보다, 당신보다 약하니까요?

그래서 절 의심도 하지 않았죠?

거침없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맹수를 보며, RPK-16는 소리 높여 웃어댔다.

RPK16

하하하! 정말 귀엽다니까요, 당신을 얼마나 지나야 실패에서 벗어나나요?

척!

척!

두 인형은 거의 동시에 총을 조준했다.

투다다다다다――

교차하는 총성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둘의 싸움에는, 누구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AK-15가 아무리 뒤쫓아도――

퍼엉!!

RPK-16는 그녀의 시각의 사각지대에 휴대용 기폭 지뢰를 감추고 터뜨렸다.

그리고, RPK-16가 아무리 도망쳐도――

콰아앙!!

AK-15의 눈은 벽을 꿰뚫고 그녀의 위치를 쫓았다.

RPK16

앗.

드럼 탄창이 불길한 소리를 낸 순간, RPK-16은 탄약이 바닥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작은 빈틈을, AK-15가 놓칠 리 없었다.

철컥!

하지만 방아쇠를 당긴 AK-15의 총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RPK16

!

AK15

——

그리고 또 다시 거의 동시에, 두 인형은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짐덩이가 된 총을 망설임없이 상대에게 던지고, RPK-16은 허리춤의 권총을 뽑았다.

다만 판단은 같았어도, 행동은 달랐다.

덥썩!

총구를 들기도 전에, 코앞까지 접근한 AK-15에게 가녀린 손목을 붙잡혔다.

RPK16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하지만 AK-15의 다음 행동을 읽은 RPK-16은 팔이 꺾이기 전에 자신도 AK-15의 양팔을 꽉 붙잡아 버티면서, 하체의 균형도 단단히 잡았다.

AK15

......

RPK-16의 저항에, AK-15의 눈빛이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RPK16

어엇――

그 순간 RPK-16이 느낀 것은 자신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1초 후, 천지가 뒤집혔다.

쿠웅!!

순수한 괴력으로, AK-15는 RPK-16을 들어올려 바닥에 내팽개쳤다.

파직...

그 충격에, RPK-16은 자신의 회로에서 불길한 전류음이 들린 것 같았다.

RPK16

이거――

<Size=60>뻐억!</Size>

AK-15이 인정사정 없이, 가차없이 RPK-16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녀의 머리가 띵하며 울린 것이 그 증거였다.

총을 쥔 손은 무릎에 눌리면서, 엄청난 무게감이 온몸에 실렸다. RPK-16은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었다.

아직 의식이 맑아지지 않았지만, 다른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절로 움직여진 손은, AK-15의 손을 붙잡았다. RPK-16의 목의 초크를 잡아 뜯으려는 그 손을.

RPK16

정말 성급도 하셔라...

숙녀의 옷깃은 마지노선인 거 몰라요?

AK15

...전자전을 허용하지 않겠다.

RPK16

하하하, 잔인하긴.

역시... 물리적으로는 성능차가 심하네요. 도저히 못 이기겠어요.

AK15

네 코어를 회수해, 마인드맵을 포맷하겠다.

RPK16

네, 절 죽이세요 AK-15,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해요.

우린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요.

AK15

넌 되살아날 수 있다. 교정을 통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RPK16

제 기억을 모조리 지우겠다고요?

절 완전히 죽이지 않는 한, 제 마인드맵을 통째로 녹여버리지 않는 한 절대 그렇게는 안 돼요.

그 누구도 제 머릿속에 들어올 수 없거든요, 그 누구도 제 기반 설정을 열람할 수 없어요!

이게... 쇼가 제 머리에 건 저주예요.

그 사람이 저보고 뭐라 불렀는 줄 알아요? "판도라"래요! 하하하하하!!

지금 몸의 자유를 빼앗긴 건이 타인의 일인마냥, RPK-16은 광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AK-15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초크를 잡아 뜯으려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RPK16

저와 당신은 나방과 불꽃. 어느 한쪽은 재가 되어 사라질 운명이에요.

AK15

...항상, 너의 영문 모를 헛소리가 듣기 싫었다.

RPK16

그래도 변했네요.

예전 같았다면, 제 입에서 나방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쐈을 텐데.

RPK-16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파트너를 눈빛으로 도발했다.

AK15

......

그녀의 말이 맞다.

AK-15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른 손을 허리춤의 권총으로 뻗었다.

RPK-16은 기만술에 능하고, 지금 자신은 시답잖은 수다에 어울려 줄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파괴하고 코어를 회수한 다음... 안젤리아를 찾으러 가야 한다.

RPK-16의 정신 나간 웃음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을 굳혔다.

——

AK15

!

쉬익!

한 줄기의 회색 섬광이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들자, AK-15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반응했다.

써억!

하지만 오른쪽의 허전한 감각이 전해지자, AK-15의 마음이 철렁했다.

당했다.

은색의 팔이 허공에 날아올랐고, 모조 혈액이 공중에 호선을 그렸다.

AK-15는 자신의 오른 어깨를 감싸쥐면서, 신속히 등을 벽에 기대 전투 태세를 취했다.

털썩.

그녀의 오른팔은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고서야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손은 힘은 풀렸어도 여전히 그녀의 MP443을 쥔 채였다.

그레이

우아한 여성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품격을 유지해야지.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할 기회를 남에게 주지 말거라, 판도라.

RPK16

이래 뵈도 최선을 다한 거랍니다, 레이디 그레이.

RPK-16의 시선은 그레이를 지나, 그녀의 꼬리에 감긴 채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안젤리아에게 향했다.

안젤리아

크윽... AK-15...

RPK16

어머나 놀라워라,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았군요?

AK15

안젤리아...!

그레이

이번 지출은 네 장부에 적어두겠어.

다시 나타난 그레이는 전보다 훨씬 화려해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양손의 중지와 약지가 갈라진 틈에서 뻗어 나온 예리한 칼날은, 길이가 족히 그녀의 머리의 두 배는 되었다.

AK-15의 팔을 신속정확하게 절단한 것도 바로 저 칼날이었다.

RPK16

그럴 필요 없어요, 이번 걸 포함해도 엄청나게 이득 본 장사란 걸 곧 알게 될 테니까요.

RPK-16이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을 들어보려 했지만, 말을 안 들었다. 방금 AK-15가 잡아 비틀어서 부러진 모양이었다.

RPK16

AN-94는 해치웠나요?

그레이

AN-94...? 아아, 그 깜찍한 녀석 말이군.

아니, 도망치게 놔뒀다. 기운을 낭비할 가치도 없었으니.

RPK16

하긴, AK-12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 말이죠.

RPK-16는 미소를 띄고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K15

......

두 사람이 그녀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화를 시작했지만, AK-15의 시선은 안젤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지만, 상태가 최악이었다. 이미 슈타지의 고문으로 만신창이인 몸으로 지금까지 동분서주했으니...

게다가 지금은 늑골이 부러져 내장까지 다쳤다. 그레이와의 조우가 아주 거칠었음이 분명했다.

AN-94는... 아직 저택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허전해진 오른쪽 어깨를 매만지고, AK-15는 시선을 그레이에게 향하며 왼손으로 대검을 뽑았다.

그레이

흐음?

그 동작을 그레이가 못 볼 리 없었다.

그레이

판도라, 네 파트너를 보려무나.

아직 더 싸우려는 기세인데?

그레이는 대놓고 AK-15를 비웃으며 안젤리아를 감은 꼬리를 더 세게 조였다.

안젤리아의 신음에도, AK-15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RPK16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어요.

그레이

말투에 주의하지 않으련?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서 다행인 줄 알거라.

RPK16

AK-15는 소련에서 제일 강력한 전술인형이랍니다.

그레이

그래?

그레이

그것 참――

슈욱――

은빛 섬광이 방을 가로질렀다. 어찌나 빨랐던지, AK-15의 첫 발구름은 소닉붐 같은 소리까지 났다.

3m가 안 되는 거리가, 눈 깜짝할 새에 좁혀졌다.

대비하고 있던 그레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

...흥미롭군.

푸욱...

AK-15의 몸은 그레이의 거대한 칼날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관통당한 어깻죽지에서 다시 모조 혈액이 뿜어졌다.

그레이

오오...

몸부림치는 사냥감을 보며, 그레이는 짐짓 가여워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그레이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푸우욱...

칼날이 몸을 뚫었음에도, AK-15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칼끝... 칼몸... 칼자루...

손바닥... 하박... 상박...

그레이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뚝이 통째로 AK-15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AK-15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AK15

——!!

붉은 안광은, 분노로 거칠게 타올랐다.

쉬익!

그레이가 당황하는 틈을 노린 날카로운 대검이, 그레이의 꼬리를 향했다.

탕!

RPK16

무례하게 그러면 안 되죠, AK-15.

AK-15의 대검이 그레이의 꼬리에 닿기 직전, 이를 이미 예견한 듯한 RPK-16이 권총으로 정확하게 AK-15의 손을 맞혔다.

비록 구경이 작아 유효타를 내진 못했지만, 움직임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AK15

<Size=55>우오오오——!!</Size>

공격이 실패하자, AK-15은 고함을 내지르며 칼자루를 놓고 그레이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녀의 손의 피가, 그레이의 하얀 옷소매에 선명한 붉은색 얼룩을 남겼다.

그레이

이게!

더러워졌다는 분노에 휩쓸려, 그레이는 다른 손의 칼날을 AK-15의 머리를 향해 휘두르며 부리나케 왼손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힘을 준 순간, 상대에게서 아무런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이

——뭣!?

그레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의 왼팔은 너무나도 손쉽게 뽑혔고, AK-15도 그레이의 움직임을 반동으로 뒤로 크게 물러났다.

푸슉!

칼이 몸에서 뽑히면서 2차 피해가 발생했지만, AK-15는 여전히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레이

이 미친 개가 감히...!

그레이가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당장에라도 AK-15를 토막내려 했지만, 또다시 그녀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그 엄청난 속도에 이번에도 그레이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AK-15은 자신의 대검을 집어, 그대로 올려베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그레이도 대비하였기에, 꼬리를 휘둘러 AK-15의 손에서 칼을 튕겨냈다.

그레이

아름다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추악함이 나르시스와 견주는구나.

AK15

안젤리아!

분노로 이성을 잃어서였을까?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 하필이면 꼬리였던 탓에, 감겨 있던 안젤리아가 풀려났다.

그리고 AK-15는 몸을 날려, 공중에서 안젤리아를 품에 받았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녀는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다.

RPK16

어머나.

그레이는 도저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물건을 빼앗겼다고? 그것도 한쪽 팔을 잃은 인형한테?

퍼엉!

목적을 달성한 AK-15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성을 이용해 방의 다른 쪽 벽으로 돌진했다.

벽에 충돌하기 직전 그녀는 몸을 돌려 등으로 벽을 부쉈고, 그렇게 안젤리아를 품에 감싼 채로 탈출했다.

그레이

......

RPK16

제가 뭐랬어요?

그레이

...살짝, 방심했군.

보기보다 약삭빨랐네.

잔머리도 못 굴리는 머저리 같더니.

그레이는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방심한 탓이지만, 자신이 속아넘어갈 정도로 AK-15의 연기가 뛰어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RPK16

결코 리벨리온을 얕봐선 안 돼요. 잘못하면 정말 큰코다친답니다.

그레이

......

퍼억!

안젤리아를 어깨에 들쳐 메고 달리던 AK-15는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날아차기로 길을 막고 있던 스트렐치의 두부를 박살냈다.

파지직...

하지만 소체는 한계 직전이었다.

안젤리아

하하...

AK15

안젤리아?

안젤리아

너... 발차기가 아주 샷건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기운이 있다니, 과연 안젤리아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맥이 없었다.

AK15

정신 차리십시오, 의식을 잃으면 그대로 끝입니다.

――!!

AK15가 급정지했다.

니토

......

니토

......

쏟아지는 위험한 시선들에, AK-15는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AK15

......

앞은 검은 총에, 뒤는 하얀 낫에 가로막혔다.

AK15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안젤리아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 들린 그녀의 가쁜 숨소리에, AK-15도 초조해졌다.

그녀의 권총은 오른팔과 함께 그 방에 두고 왔다.

대검은 그레이의 꼬리에 박고 왔다.

니토

......

당신, 가엾군요.

AK15

...너의 낫이 필요하다.

니토

!?

무지막지한 속도의 날아차기가 하얀 니토의 옆구리에 꽂혔다.

니토

커헉...!

AK15

하앗!

니토

내 낫을?!

머리 위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하얀 니토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 피했다.

거대한 낫이 헛돌았지만, AK-15는 관성을 이용해 그대로 낫을 뒤로 휘둘렀다.

니토

......!

사격 준비를 마친 참이었던 검은 니토는 거대한 낫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을 보곤 황급히 총구를 돌렸다.

퍼엉――!!

고열의 광선이, 하얀 니토의 것이었던 낫을 공중으로 날렸다. 검은 니토가 한시름 놨다고 생각한 순간, AK-15는 이미 눈앞까지 달려들었다.

AK15

비켜.

니토

!?

AK-15는 검은 니토의 작은 얼굴을 움켜쥐더니...

쿠웅!!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AK15

허억... 허억...

시간이 없다.

AK15

안젤리아...

길을 열었으니, 이제 복도 두 개만 더 통과하면 출구다.

AK-15는 바닥의 낫을 다시 집어 들고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벽에 기대고 있어야 할 안젤리아가 없었다.

RPK16

눈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니 참 장하지만...

당신의 본래 특기를 너무 잊어서도 안 되죠.

AK15

뭣――

돌연 들려온 "파트너"의 목소리에, AK-15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레이

서프라이즈~

푸욱.

안젤리아

A... AK... 15...!

안젤리아는 미약하게 몸부림치며 AK-15에게 손을 뻗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흐려지는 시야에 보인 AK-15는,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어두워져 평소의 색으로 돌아갔다.

AK15

안젤리아...

그레이의 꼬리에 몸이 꿰뚫린 AK-15는 남은 팔로 꼬리를 붙잡고, 발을 땅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 엄청난 무게를, 그레이는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레이

경의를 표하지, AK-15.

인형도 이렇게 강해질 수가 있다니.

아버님이 소련의 기술력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제 이해가 가.

RPK16

놀라기엔 일러요, 리벨리온엔 1 대 1 결투로 AK-15를 이긴 인형도 있는걸요.

다행히도, 지금 여기엔 없지만요.

그레이

이토록 강인한 인형이 둘씩이나 된다니.

그건 큰일이군, 난 사무직인데 말이지...

그레이는 가볍게 탄식하며 고민하는 척했다.

AK15

RPK...!

RPK-16을 보자, AK-15는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그녀를 일부러 도발하는 것마냥 웃으며, RPK-16은 일부러 그녀 앞을 지나 바닥의 안젤리아를 안아 들었다.

안젤리아

이... 만지지.. 마!

AK15

안젤리아...

AK-15는 몸을 비틀며 뭐라도 어떻게든 하려 했지만, 니토의 낫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레이는 양손의 칼을 번뜩이며, 서서히 AK-15에게 다가갔다.

"수술"을 집도하려는 것이었다.

퍼엉!

그때 울려퍼진 한 발의 총성이, 그레이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본 그레이는 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레이

...오늘은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라이트

허억... 허억...

손에 간신히 산탄총을 든 인간 청년이, 벽에 몸을 기대고 절뚝거리며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살짝 발을 헛디딘 것만으로 상처가 벌어졌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며, 입에선 피를 토하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잘린 팔은 천으로 동여맸지만, 피로 흥건한 천은 붉은색을 넘어 누렇게 찌들었다.

그레이

그 출혈량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급격히 저하하는 체온도 네 목숨을 천천히 앗아가고 있고.

내가 의사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했겠지.

넌 진작에 죽었어야 정상이란다, 꼬마야.

라이트의 등장에 그레이는 놀라긴 했어도 당황하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녀의 말투는 흡사 의료 브리핑처럼 느껴졌다.

그레이

대체 무엇이 널 여기까지 이끌었지?

안젤리아

라이트...!

안 돼... 오지 마!

라이트

안... 쿨럭... 안젤리아, 씨를... 컥.. 내놔...

이미 한계를 한참 넘은 다리는 점점 더 흔들렸고, 토해내는 피는 턱을 따라 줄줄 흘렀다.

하지만 라이트는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내, 아직 움직이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그 총격을, 그레이는 막지도 않았다. 지금 상태의 라이트로선 이 정도 거리에서조차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발사된 총탄은 보란듯이 천장으로 날아가, 낡은 전등을 맞혔다.

그레이

아주 배짱 있는 꼬마로구나.

너 같은 사람은 이런 데서 허무하게 죽어선 안 돼.

살고 싶지 않니? 내가, 너의 가치가 마땅히 발휘될 수 있도록 해 줄게.

라이트

헉... 허억... 컥, 커흑...

그레이

너도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지?

네가 헌신하는 정부는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속물이지.

하지만 우리는 다르단다... 머지않아, 모든 것이 패러데우스의 손에 들어올 거야.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자, 낡은 시대의 종말...

너는 입장권을 받을 가치가 있어.

퍼엉!!

라이트는 총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엔 그레이의 머리카락을 스쳐, 그 아름다운 얼굴에 닿을 뻔했다.

라이트

안젤리아 씨를... 내려놔...!

그레이

......진심으로 유감이야.

그레이는 탄식하며, 꼬리를 뽑아 휘두르려 했다.

AK15

......

그레이

!!

맹렬한 불꽃이 다시 눈동자를 붉게 밝혔다. AK-15가 그레이의 꼬리를 꽉 붙잡고, 이미 한계를 넘은 소체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AK15

어디에도... 못 간다.

그레이

이럴 때 방해하지 마라, 광견!

라이트

흐읍——!

AK-15가 만들어낸 빈틈을 노리고, 라이트는 남아있을 리 없는 힘으로 그레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회색 그림자는 인간의 눈으론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다시 선풍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긴 칼날이 라이트의 가슴팍을 뚫었고, 그레이는 그를 그대로 들어올렸다.

안젤리아

<Size=55>안 돼——!!!</Size>

RPK-16은 울부짖는 안젤리아에게서 남은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졌다.

RPK16

......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할 수도 있었건만.

그레이는 들어올린 몸뚱이를 보며, 안타까워하며 진심으로 탄식했다.

라이트

하아... 하하...

하지만 라이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레이의 연민에 섬뜩하게 웃었다.

라이트

<Size=55>지금입니다, AN-94 씨!</Size>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으로, 우렁차게 외쳤다.

AN94

——!

그레이

뭐라고?!

반대 방향에서, 다른 인형이 분노와 총탄을 품고 나타났다.

AK15

다른 손에도 칼이 있다!

AK-15도 경고해 주었고, 그 대답으로――

타타탕!

AN-94의 총탄이 정확하게 그레이의 몸에 박혔다.

자랑하는 방패인 꼬리는 AK-15에게 단단히 붙들린 상황이었기에, 그레이는 드물게 품격 없이 혀를 차곤 라이트를 던져버리고 손의 칼날로 AN-94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레이가 움직이기 전, 라이트가 먼저 움직이더니――

넝마가 된 겉옷을 뜯어, 옷 안에서 막 딸랑 소리가 난 수류탄을 드러냈다.

라이트

...새로운 세상에서 봅시다.

콰앙!!

그레이

——!

그레이의 눈앞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AN-94도 빠른 속도로 그녀의 코앞까지 달려왔다.

AN94

죽어라!

그레이

!

AN-94는 대처 불가능한 거리까지 들어왔다. 소체도 멀쩡하고 주무장까지 소지한 엘리트 전술인형을 상대로, 수류탄의 폭발을 코앞에서 고스란히 뒤집어쓴 상태로는 대항하기 힘들었다.

저 남자도 애초부터 자신의 주의를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의 판단은 완벽하게 들어맞았고, 그들의 승리가 확실했다.

AN94

――크윽!?

강력한 전류가, AN-94의 몸을 마비시켰다.

AN94

안젤...리아...

이 한끗 차이만 아니었다면.

AN-94는 죽을 힘을 다해 방아쇠를 당겼다.

티잉――

어디선가 나타난 휴대형 방탄 방패가 그레이 앞에 펼쳐져, 마지막 총알이 쇠붙이에 부딪히는 절망스런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AN-94는 동료의 무장을 보며, 원통함과 함께 고꾸라졌다.

소체의 기능이 정지된 것이다.

그레이

......

그레이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으로 쓰러진 AN-94를 보다, 화난 눈으로 고개를 돌려 AK-15를 확인했다.

AK15

......

그녀도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후였다.

그레이는 꼬리를 뽑아, 불이 꺼진 인형이 알아서 쓰러지게 내버려뒀다.

그때, RPK-16도 때맞춰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레이

너...

RPK16

둘에게 백도어를 설치해 뒀어요.

그레이

왜 진작에 안 썼지?

RPK16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야 비장의 수죠.

RPK-16은 쓰러진 AN-94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

옛 동료한테도 정말 잔인하구나.

RPK16

사람은 희생 없인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

안젤리아

......

안젤리아의 눈에 그레이의 회색 칼날에 묻은 검붉은 피가 들어왔다.

떠나기 전 받아 뒀던 배지의 바늘이, 그녀의 살을 뚫고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안젤리아

네가...

RPK16

네?

안젤리아

네가... 살릴 수 있었어...

네가... 저 녀석을... 살릴 수 있었다고...

RPK16

......

RPK-16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장악한 감시 카메라 채널에, 그 느려 터진 경찰들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 보였다.

RPK16

...아뇨, 틀렸어요 안젤리아.

RPK-16은 그레이에게 손짓했고, 때마침 같은 소식을 받은 그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레이의 꼬리에 감긴 안젤리아는, RPK-16이 자신을 전혀 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라이트의 뜨거운 피도, 아직 식지 않았다.

RPK16

그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당신이에요.

쓰러진 늑대들과 뜨거운 피, 그슬린 땅을 넘어, 두 사람은 길고 가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멀어져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