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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5 · 재귀정리

"병에 묻은 먼지를 소매로 닦아내자... 이건 갈라테아 그룹의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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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지 족히 몇 년은 되어 보이는 저택은 달빛을 받아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경찰도 수사하고 슈타지도 철저히 내부를 수색했기에, 그들이 제공한 보고서는 매우 상세했고 J 본인도 몇 번이고 열람했다.

안젤리아의 부하 인형들의 잔해가 이곳에서 발견됐지만, 정작 그녀 본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문제는, 오직 그 사실만으로 안젤리아가 라이트를 비롯한 슈타지 요원들을 살해했다 단정짓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J

전혀 납득이 안 된단 말이지...

벽지도 다 떨어져 가는 벽면의 핏자국 덕분에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그들도 사망자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

J

(여기구나... 라이트가 최초로 공격당한 곳이.)

J가 고개를 들어 손전등으로 벽을 비추자, 소름끼치는 형태의 혈흔이 선명히 보였다.

마치 피가 가득 든 혈액 팩이 터진 듯했다.

J

......

그 혈흔 가까이엔 마찬가지로 대량의 출혈과 지혈 흔적, 응급 처치용 상처 봉합 테이프와 소독용 알코올 병이 있었다.

J

......

J가 이번엔 바닥의 다른 쪽을 비췄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쪽에서도 눈에 띄는 흔적이 발견됐다.

J

(이건가...)

척 봐도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혈흔. 피로 무언가를 그린 듯한 모양새지만, 누군가가 특수 약품으로 그 그림을 깨끗이 지워버린 뒤였다.

단지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 경찰과 슈타지 모두 피로 그린 작전 계획도로 추정할 뿐이었다.

J

(라이트 녀석이 누군가와 무슨 계획을 짤 때 남은 흔적인 건가...)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라이트는 몸이 그 상태가 되어서도 행동했을까?

J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단...?

음?

J가 사색에 잠겨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가까운 잔해에서 부자연스러운 반사광이 비쳤다.

J

저건 뭐지...?

벽이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 판자 조각들 사이로, 무언가가 J가 흔드는 손전등 빛을 따라 반짝이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약병이었다.

J

저건...

J는 허겁지겁 나무 조각들을 치우고 그 약병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병에 묻은 먼지를 소매로 닦아내니 크고 작은 두 개의 로고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그중 하나는 J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갈라테아 그룹.

요원

거기 누구냐!

J

쳇...!

한눈파는 사이에 들키고 말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J는 당장 그자리서 벗어나야만 했다.

찾아낸 병을 파우치에 쑤셔넣고, 곧장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요원A

침입자다!

요원B

긴급 상황 발생! 침입자가――

J

아오 진짜 왜 꼭 이럴 때만 일 잘하냐고!

......

J

휴우...!

소란스러워진 양옥에서 벗어나, J는 골목길로 들어선 뒤에야 한숨 돌리면서 위장을 벗었다. 슈타지의 동료들 중에서도 J의 위장을 간파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신원을 들켰을 리는 없었다.

이제 저들이 코앞에서 놓친 "침입자"를 찾느라 시끄러운 틈을 타 차를 타고 사라지기만 하면, 자신이 여기 왔었단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을 터였다.

J

......엉?

차로 돌아온 J가 문 손잡이를 당겼지만, 어째선지 잠겨 있었다.

약속과는 다른 상황에, J는 눈살을 찌푸리고 차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J

야, 뭐해? 문 열어!

대답이 없었다.

설마 싶어 차의 정면으로 돌아가 안을 살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J

이런 ㅆ――

파앗!

J의 뒤에서 탐조등이 켜져, 등진 상태인데도 그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셨다.

J는 체념한 표정으로 뒤돌아, 손으로 그 빛을 가리면서 탐조등까지 끌고 나타난 사람들을 바라봤다.

J

케인 슈바벤 이 망할 자식아...

K

......

J의 욕설에도 K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어쩔 수 없었다는 얼굴로 자신의 옆에 선 사람을 눈짓했다.

???

...네 쪽 사람이야?

첫인상만 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여자라면 숱하게 상대해본 J의 눈에도, 흔치 않은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의 질문에 K가 묵묵히, 그리고 공손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정체는 대강 짐작이 갔다.

???

끌고 가.

독일 베를린의 어딘가, 패러데우스의 기지.

깔끔한 사무실에서, 하얀 니토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해 하며 그레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얀 니토

시내의 갈라테아 시설 약 5할이 가동 중단되었습니다만...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 그룹 측에서도 정부와 교섭에 노력 중이며...

그레이

......

한 손으로 턱을 괸 그레이는 하얀 니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녀가 손가락으로 금속제 탁상을 톡톡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 하나하나가, 하얀 니토의 몸 속까지 울렸다.

하얀 니토

그리고... 그리고...

D8 구역 지하 기지의 잔해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몰리도 님의 흐, 흔적은... 여전히 찾지... 못하였...

언제 자신에게 화풀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하얀 니토는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다.

하얀 니토

그, 그리고 나르시스 님은...

부상이 심각하여 수복에 시, 시간이 소요되는 바, 당분간 작전 참여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툭.

탁상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하얀 니토

힉...

그레이

내 명의로 그룹 전체에 메시지 보내.

당장 약품 공장 내 모든 자료를 파기하라고. 특히 거래 명부.

사소한 증거 하나라도 남겨선 안 돼.

하얀 니토

아, 알겠습니다...

그레이

가 봐.

두려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얀 니토는 여전히 벌벌 떨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레이

나르시스는 중상에, 스승님은 실종...

안전계약사와 니모겐의 몸을 탈취한 오가스 일행의 행방도 불명.

가장 큰 문제는 책임자가 사라져서 "고치 계획"이 정체된 상황인 건데...

아버님이 들으시면 뭐라 하실지...

그레이

하여간 얼간이들밖에 없――

???

...그레이.

그레이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그녀만 있던 방에 난데없이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레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레이

아아... 돌아왔니?

그 인사 한 마디에, 그레이의 울화가 감쪽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