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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5 · 재귀정리

"미래는 너무나 가물가물한 단어요, 당장 독일은 현재에 집중하는 데만해도 여력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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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련 S09 특구, 그리폰 기지.

페르시카

카리나는 전문 병원에 도착했대?

헬리안

그렇습니다.

지휘실에서 따끈따끈한 커피를 마시던 페르시카가 대뜸 헬리안에게 물었다.

페르시카

그애가 정리한 자료, 내가 여태까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상세하던데...

증세가 악화되지 않으면 좋겠다.

헬리안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약품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기만 하면 상태가 호전될 겁니다.

페르시카

그랬으면 좋겠네.

...그 어린 니토들은?

헬리안

지휘관이 부재 중이니, 당분간은 하벨 씨가 맡기로 했습니다.

페르시카

그 영감탱이... 아쉽게 됐네.

헬리안

카리나가 병가 중이니, 그동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피곤한 페르시카의 얼굴이 더욱 우거지상이 되었다.

페르시카

IOP에서보다는야 훨씬 낫지만...

설마 여기 와서까지 야근하게 될 줄은...

헬리안

덕분에 전술인형들의 수복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죠.

페르시카

그야 당연하지...

나도 밥이나 축내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고...

헬리안

지휘관도 복귀하면 분명 기뻐할――

삑.

그때, 통신기가 갑자기 울렸다.

헬리안

......

발신자 표시 제한?

페르시카

뭐야?

헬리안은 잠깐 고민하다 통신을 받았다.

헬리안

여기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 S09 기지다.

귀측의 신분과 용건을 밝혀라.

......

............

독일 베를린의 시가지.

짠.

웨이터에게서 술잔을 받아, 나란히 놓인 고급진 소파에 앉은 두 남자가 가볍게 건배했다.

???

요즘 들어 베를린이 소란스러운데, 갑자기 초대해서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하오, 훈작사.

그리폰

국가인민군이 지키고 있는데, 그런 소란쯤 흐르는 강물의 작은 일렁임에 불과하다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슈바인슈타이거 장군.

슈바인슈타이거

그 "작은 일렁임"으로부터 시작된 파도에 무너진 정권이 얼마나 많소이까? 국방부 장관인 나도 귀공만큼은 자신이 없소.

민주독일 국방부 장관이자 국방위원회 부주석, 하인리히 슈바인슈타이거 장군.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력과 경험 모두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리폰

다 장군께서 직책에 사명감을 느끼신단 뜻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독일산 브랜디 한 잔이나 대접하려고 저를 부르시진 않으셨겠죠?

슈바인슈타이거

귀공은 여전하구려. 이번에는 한 10년만에 다시 보는 건가?

그리폰

정확히 14년만입니다.

슈바인슈타이거

맙소사, 벌써 그렇게 지났다니. 그땐 우리도 팔팔했을 때인데. 귀공은 당시에 무슨 일을 했었지? 기자였던가?

그리폰

그냥 작은 신문사의 편집장 노릇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전쟁 때가 그립기라도 하신 겁니까?

슈바인슈타이거

하, 전쟁이 그리운 사람이 어딨다고.

훈작사, 젊은이들을 참호에 밀어넣던 나날이 내가 왜 그립겠소? 허나 같은 일이 다신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때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하지. 안 그런가, "기자 양반"?

그리폰

......

슈바인슈타이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미리 사과하는 바이오만, 귀공은 베를린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요?

그리폰

그저 모처럼만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을 뿐입니다.

슈바인슈타이거

허허, 휴가라. 귀공에겐 휴가일지 몰라도, 지금 귀공 때문에 머리가 아픈 사람이 잔뜩이라오.

그리폰

그야 그렇겠지요, 미래를 좌우할 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필요한 준비 작업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슈바인슈타이거

훈작사, 귀공이 누구를 대표하여 어떤 일을 하는지는 나도 잘 아오.

이사회의 입장과, 당 내부의 태도도 아주 잘 알지.

내 미리 귀띔해 주자면, 국가인민군에게도 입장과 처지라는 것이 있고, 독일의 국민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다 알고있소.

그러니, 우리의 결정을 존중해 주길 바라오.

그리폰

정말 그리 된다면 대단히 유감스럽겠군요.

슈바인슈타이거

유감스럽지 않도록, 귀공도 자제를 해 주었으면 하는 바요.

그리폰

"그분"의 경고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리폰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슈바인슈타이거

하하하하, 아니, 경고는 아니오.

그저, 선의의 충고로서 우리 모두 난처한 입장이 되지 말자는 뜻이지.

아무렴, 곧 루크사트의 이름 아래 국경을 넘어선 공동체가 탄생할 때가 머지않았는데. 우리 모두 "연맹"의 이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 않소?

그리폰

그야 물론이죠. 단지 유럽의 미래는 독일의 판단에 달렸고, 독일의 미래는 당신들의 판단에 달렸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이사회를 향한 독일의 답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슈바인슈타이거

하여간 귀공은 넘겨짚는 덴 선수란 말이야. 그냥 이 노인네가 귀공과의 취중담에 뱉은 옛날 이야기일 뿐이외다.

그리폰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밤의 "파우스트", 기대하겠습니다.

슈바인슈타이거

아 참, 그러고 보니 최근에 또 긴장 상태인 모양이던데... 특히, 회의가 결정된 이후로 더욱 말이오.

루돌프도 런던에서 돌아온 이후로 계속 근심 가득한 모습이고...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라오, 훈작사. 대체 런던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그리폰

미래.

슈바인슈타이거

미래?

그리폰

네, 장군. 이사회는 오직 미래를 바라봅니다.

슈바인슈타이거

미래란 너무 두루뭉술한 단어요, 훈작사. 독일은 당장 현재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볼 여력이 없소.

그리폰

그렇기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보시진 않으셨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이 이토록 힘겨운 것이라 생각해보시진 않으셨습니까?

안목이 짧은 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죠.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편입니다.

슈바인슈타이거

그렇지, 시간은 우리 편이지. 이 낡은 집을 허물어 버리기 전까진.

슈바인슈타이거 장군이 세련된 장식의 초대장을 꺼내 탁상에 올려 그리폰에게 내밀었다.

슈바인슈타이거

우리 모두 운명의 교차로에 섰소. 그릇된 선택을 하면, 그대로 역사의 죄인으로 남겠지.

우리는 조국을 책임지는 몸이오, 훈작사. 귀공이 말하는 미래에, 유럽의 안녕은 포함되어 있는 것이오?

그리폰

물론입니다.

슈바인슈타이거

그렇다면 내 친구와도 이야기를 해야겠구려. 어쩌면 우리 함께 이 힘든 시기에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리폰

......

그리폰이 고개를 숙여 초대장에 적힌 주소를 읽었다.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명백했다.

이것이 바로 파우스트의 계약이리라.

그리폰

오버슈타인 씨께, 오늘밤의 초대에 반드시 참석하겠다 전해 주십시오.

그리폰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대장을 집어 외투의 안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슈바인슈타이거의 손이 여전히 초대장을 꾹 눌러, 놓아주질 않았다.

그리폰

무슨 의미입니까?

슈바인슈타이거

사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서 말이오.

그리폰

...말씀하십시오.

슈바인슈타이거

루돌프는... 두 가지 일로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소.

여기까지 왔으니, 내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보오.

그리폰

하지만 그분에 대해선 저보다 장군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슈바인슈타이거

루니샤.

그리폰

......

슈바인슈타이거

루돌프의 딸.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제서야 그리폰은 깨달았다.

슈바인슈타이거 장군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독일 베를린의 교외.

지휘관

......

지휘관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축축한 흙 너머로, 눈앞의 고르게 다져진 땅을 멍하니 바라봤다.

RO635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이런 금속판밖에 찾지 못했어요...

지휘관

괜찮아, 그거면 충분해.

RO635에게서 길쭉한 금속판을 받아든 지휘관은 그 고르게 다져진 땅 앞에 깊숙이 박았다.

"고결한 두 영혼이 여기 잠들다."

"이들의 희생이, 어두운 세상에서 사람들을 이끌 등불을 밝히리."

UMP45

이름은 안 적는 게 좋겠어.

지휘관

그래도 누군가는 기억해 주겠지... 적어도, 우리는.

지휘관은 합장하고 눈을 감아 기도했다.

그리고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M4 SOPMOD II

정말 데리고 돌아가면 안 돼?

AR15

아직도 그 소리냐... 우린 지금 우리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 벅차다니까.

게다가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겨서 시신이 훼손되기라도 하면... 더 후회하게 될 거야.

여기면 돼... 인적도 드물고, 경치도 좋잖아.

UMP45

너한테도 보는 눈이 있긴 했구나.

언젠가 나도 땅에 묻히게 되면 너한테 장의사 일 맡겨도 될까?

AR15

.....

놀리는 UMP45를 무시하면서, AR-15는 조용히 지휘관의 시선을 따라 초라한 묘비를 바라봤다.

지휘관

......가자.

AR15

네.

UMP45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기만 하고, 그들과 함께 차로 돌아갔다.

UMP9

언니――!! 큰일났어――!!

지휘관

무슨 일이지?

모두가 슬픔에 젖은 그때, 차 안에서 UMP9이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HK416

지휘관! 빨리 타세요!

지휘관

무슨 일이야?

HK416는 고개를 돌려 감금된 몰리도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HK416

우려하던 일이 결국 터졌어요.

저년이 저희가 심문할 때 열었던 틈으로, 아주 잠깐이었지만 봉쇄를 뚫었어요.

다행히 제때 빠져나와서 다시 데이터스트림을 막았지만...

메시지 전송을 막는 덴 실패했어요.

RO635

뭐?! 무슨 메시지를 보냈는데!?

UMP45

그야 우리로선 알 턱이 없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보낼 메시지라면...

지휘관

...위치겠지.

SOP2! AR-15!

즉시――

콰아아앙!!!

M4 SOPMOD II

우와악!?

HK416

지휘관!!

갑작스런 폭음에 뒤이어 격렬한 충격파가 지휘관 일행을 덮쳤다.

그 순간, 지휘관은 물리적으로 천지가 뒤집히는 감각을 새삼스레 다시 느꼈다.

차량이 폭발에 전복된 것이었다.

지휘관

크윽...!

UMP9

으아아 언니 진짜 큰일났어!!

패러데우스의 병력이 이쪽으로 접근 중!

AR15

지휘관! 다친 덴 없어요!?

AR-15가 황급히 전복된 차 안에서 지휘관을 끌어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지휘관의 눈에도 저 멀리서 몰려오는 하얀 군단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지휘관

치잇... RO, 45, 포위 돌파 준비해!

RO635

네!

UMP45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기는...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