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
"지휘관, 자네는 아직 피가 뜨거워."
베를린 어딘가의 세이프하우스.
달이 유별나게 밝은 밤, 예상치 못했던 전투가 일단락된 후.
어딘가에서 새로운 초연이 피어오르려 했다.
오랜만이네, 지휘관.
오랜만입니다, 훈작사.
지난번의 대화로부터 그리 많이 지나진 않았건만, 정말 간만에 보는 것 같군.
이렇게 자네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일을 망쳐버리고, 당신의 직속 소대마저...
사과 말게, 자네는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어.
오히려, 난 자네를 선택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네.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르니 말이지... 자아, 자네의 현재 상황을 말해 보게.
몰리도를 생포하여, 조치를 취해 무력화시켰습니다.
"고치 계획"에 관한 정보는 미리 전송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검증이 필요하지만, 놈들은 통일절을 노려 공격을 감행할 셈이라 합니다.
...알겠네, 유념하지.
여기까지만 들어도, 자네가 그동안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벌였는지 알겠군.
수고 많았네, 지휘관.
새로운 세계가 자네의 공헌을 기억할 거야.
그저 임무를 받아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많지만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끝내겠다고...?
지금 그만두겠다는 말인가?
정보도 부족한데다, 여긴 저희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제 휘하 인형들의 피해가 심각하고 탄약을 비롯한 보급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제 의견에 상관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건대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지금 저의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자네가 이렇게 무사하고, 큰 성과까지 이뤘잖은가.
어떻게 보아도 값진 승리인데... 자네는 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나 보군.
...더 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피와 눈물은 흔하다네.
너무 많이 본 나머지 무감각해진 사람도 수두룩하지.
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자넨 다르군, 지휘관. 자네는 아직 피가 뜨거워.
......
솔직히 말해 주게, 정말 이대로 끝내고 싶은가?
우리는 실패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승기를 잡은 것은 바로 우리일세.
자네가 이대로 포기하고, 대신하는 사람이 더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나였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
지휘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지원해 주십시오. 최대한, 가능한 한 많이.
......
조용한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든 공기를 깨웠다.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다 예상했다는 듯, 몰리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보러 올 줄 알았어, 니모겐.
...저는 당신이 자신의 컨셔스 파노라마를 직시하기를 도와주러 왔을 뿐이에요.
M4A1은 문을 살며시 닫고, 천천히 몰리도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내려다보는 M4A1을 마주보는 몰리도의 태도는 전보다 많이 애매해졌다.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니모겐? 덕분에 넌 이제 그런 공격을 다신 못하게 됐잖아.
만약에... 그냥, 만약에... 다음에 그들이 바로 너흴 노리고 온다면, 너흰 그대로 끝장이야.
저도 다시 할 생각 없어요.
그럼 대체 왜 그랬어?
......
M4A1이 몸을 숙여, 드물게 위압감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했잖아요? 그냥, 당신을 구해주고 싶다고요.
...웃긴다 정말, 그렇게 날 구해주고 싶다면 그냥 날 풀어 주지 그래?
그럴 거예요.
...뭐?
그럴 거라고요. 아직은 아니지만.
지금은, 가면을 벗은 당신을 보고 싶어요.
......
몰리도는 눈을 깜빡이며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훈작사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저 지원이 필요한 것이라면, 물론이지. 얼마든지 지원을 제공하겠네.
기지에 연락해 충분한 용적량의 이동 기지 차량을 조달한다면, 자네의 직속 전력을 자네 곁으로 보낼 수 있을걸세.
...그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내 의견은 변하지 않았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젊은이들 중, 자네가 가장 믿음직스러워.
이는 크루거도 나와 같은 생각일 테지.
그 신뢰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단지, 솔직히 과분한 칭찬이라 좀 부담스럽군요.
물론, 자넨 아직 젊고 완벽하지도 않아.
허나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하물며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갈고닦을 수 있을걸세.
다만... 갈고닦는 데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
앞으로 마주할 시련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네.
자네는 특히, 희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
저도 스스로의 의지로 희생하는 자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걸 태연히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동료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기회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인형이라 해도요.
허허, 말에 뼈가 있군.
안젤리아 씨와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그래, 행방불명이지.
제게 그녀의 수색 임무를 맡겨 주시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건 임무라 할 수 없네.
그건 사적인 감정이야.
훈작사께서 설득하셨기에 저는 베를린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이왕 남는 것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내가 어찌 잘 싸우는 맹수를 가둬 두겠나.
허나 지금 자네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잖은가.
......
"불꽃놀이"가 코앞이네. 자네 말곤 그걸 막을 사람이 없어.
하지만, 그럼 안젤리아 씨가...
자네가 "이아손의 상자"에 대해 파헤칠수록, 패러데우스는 어쩔 수 없이 자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할걸세. 그러면, 안젤리아를 구출하는 일의 난이도도 크게 떨어질 테지.
그러니 내가 자네를 믿듯 자네도 날 믿어 주길 바라네. 나도 뛰어난 전사를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당신이 맡기신 일을 해결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
당신의 "아버지"가 무고한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오로지 붕괴복사를 견뎌내는 면역체를 찾기 위해서죠.
...안타깝게도, 그건 헛수고예요.
그게 패러데우스의 존재 의의야.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있어... 우리의 이름처럼.
우매한 인류를 진정한 복음의 땅으로 인도하는 거라고.
자기기만 아닌가요?
닥쳐.
득의양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의 몰리도에게선 음울함만이 느껴졌다.
당신은 스스로를,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부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심층에 남아있죠. 기억이 바로 절대적인 증거예요.
"아버지"의 눈에 당신들은 모두 실패작이고, 당신도 그저 "그녀"의 그림자 중 하나일 뿐. 당신이 모든 것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녀... 루니샤...?
몰리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줄곧 두려워하던 생각을 뿌리쳐내려 했다.
아니야... 속일 생각 마...
웃기지 마... 내가 바로 완벽한 자란 말이야!
정말요?
그런 그녀를, M4A1은 측은하게 바라봤다.
진실은 당신도 잘 알 텐데요.
한층 더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M4A1에 겁먹은 몰리도가 뒷걸음질치다 뭔가에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것은, 그 오물 속에서 몸부림치던 시체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몰리도가 무너지며 비명을 질렀고, 거울 속의 시체도 그녀와 똑같이 움직였다.
난 실패작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내가 실패작이면 넌 뭔데!!
훈작사와의 통신을 마친 뒤, 지휘관을 생각을 정리하며 탁상을 두드렸다.
그가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앞으로의 행동이 지금보단 순조로워지겠지.
안젤리아 씨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노력하면 무사할 거야.
아무렴, 어떤 사람인데. 그녀를 믿자.
...네.
그리고... 음?
지휘관은 의자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M4는?
...응? 어라? 그러게, 그 신기한 애 어디 갔어?
또 언제 사라졌대...
이번에 돌아온 M4는 전보다 엄청 변한 거 같아.
그렇게 느껴지나요?
넌 안 그래?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이랑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고나 할까?
...솔직히, 좀 변한 것 같긴 해요.
하지만 M4 씨가 우리로선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을 수도 있잖아요? 조금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가? 하긴 뭐 그렇긴 한데...
......
조용히 두 인형의 토론을 듣던 AR-15가 자진해서 나섰다.
찾아보고 올게요.
그래, 보면 현재 상황도 전달해 주렴.
네.
......
쿵.
윽?
AR-15가 몰리도를 감금한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안에서 나오는 M4A1과 부딪혔다.
우왓, M4? 그 방에서 뭐하고 있었어?
아... AR-15. 몰리도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단둘이 얘기를 좀 했어요.
...그랬구나. 그럼 나머진 나한테 맡기고, 넌 가서 좀 푹 쉬도록 해.
네.
M4가 돌아가다 말고 멈추곤,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AR-15?
응?
제가... M4A1이라 생각하세요?
얘가 또 뭔 소릴... 그야 당연하지, 네가 M4가 아니면 누군데?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예전의 M4A1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나요?
여러 일을 겪은 지금, 모두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런데도 제가 여전히 당신이 알던 M4A1이라 확신할 수 있나요?
...네가 근본부터 뜯어고쳐지지 않은 이상, 너는 M4야.
내가 아는 M4는 심약하고 우유부단할 때가 많지만, 계속 성장하며 변화했어. 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그 선량함은 절대 흔들리는 일이 없었지.
그래서 난 믿어, 네가 틀림없는 M4라고.
......
그 말에 안도하듯 M4A1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곤, AR-15에게 싱긋 미소지었다.
...네, 고마워요.
......
신소련 변방.
부르릉...
군용 지프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허전한 땅 위를 달렸다.
그 차의 목적지인 어느 군사 기지의 검문소 앞에는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이열종대로 정렬해 있었고, 그들의 인솔 장교도 매우 비장한 표정이었다.
......
장교로부터 약 5m가량 떨어진 거리에 지프차가 멈춰 섰다.
철컥.
차의 문이 열리자, 검은 장화가 안에서 뻗어 나와 얇게 쌓인 눈을 밟았다.
전원, 경례!
장교의 구령에 맞춰, 정렬한 병사들이 차에서 내린 이에게 일제히 경례했다.
이럴 필요 없네, 동지.
직위 해제되어 위대한 조국의 일개 국민이 된 놈에게 뭐하는 건가.
농담 마십시오!
저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카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저희는 배신을 택한 정부를 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참기만 하다간, 언제 저 위를 꿰찬 매국노들이 숙청의 칼날을 휘둘러 저희의 목을 앗아갈지 모릅니다.
저희는 진정한 지도자, 조국의 영광을 되찾고 저희를 승리로 이끌어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장교는 카터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지휘를 맡아 주십시오!
......
이것은 국경 1718 특구의 동지 전원의 뜻입니다!
눈앞의 병사들을 살펴보며, 카터는 등뒤의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의 부하 수행원도 차에서 내려, 그 합의서를 그에게 건넸다.
...조국을 위해.
조국을 위해!
조국을 위해!
병사들의 격앙된 함성을 받으며, 카터는 서류봉투의 매듭을 풀었다.
"두고보아라."
"불씨는, 결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전체 대사 보기 (135줄)
베를린 어딘가의 세이프하우스.
달이 유별나게 밝은 밤, 예상치 못했던 전투가 일단락된 후.
어딘가에서 새로운 초연이 피어오르려 했다.
<color=#00CCFF>오랜만이네, 지휘관.</color>
오랜만입니다, 훈작사.
<color=#00CCFF>지난번의 대화로부터 그리 많이 지나진 않았건만, 정말 간만에 보는 것 같군.</color>
<color=#00CCFF>이렇게 자네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어.</color>
정말 죄송합니다.
일을 망쳐버리고, 당신의 직속 소대마저...
<color=#00CCFF>사과 말게, 자네는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어.</color>
<color=#00CCFF>오히려, 난 자네를 선택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네.</color>
<color=#00CCFF>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르니 말이지... 자아, 자네의 현재 상황을 말해 보게.</color>
몰리도를 생포하여, 조치를 취해 무력화시켰습니다.
"고치 계획"에 관한 정보는 미리 전송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검증이 필요하지만, 놈들은 통일절을 노려 공격을 감행할 셈이라 합니다.
<color=#00CCFF>...알겠네, 유념하지.</color>
<color=#00CCFF>여기까지만 들어도, 자네가 그동안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벌였는지 알겠군.</color>
<color=#00CCFF>수고 많았네, 지휘관.</color>
<color=#00CCFF>새로운 세계가 자네의 공헌을 기억할 거야.</color>
그저 임무를 받아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많지만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color=#00CCFF>끝내겠다고...?</color>
<color=#00CCFF>지금 그만두겠다는 말인가?</color>
정보도 부족한데다, 여긴 저희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제 휘하 인형들의 피해가 심각하고 탄약을 비롯한 보급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제 의견에 상관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건대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지금 저의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color=#00CCFF>자네가 이렇게 무사하고, 큰 성과까지 이뤘잖은가.</color>
<color=#00CCFF>어떻게 보아도 값진 승리인데... 자네는 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나 보군.</color>
...더 잘할 수 있었습니다.
<color=#00CCFF>이 시대에 피와 눈물은 흔하다네.</color>
<color=#00CCFF>너무 많이 본 나머지 무감각해진 사람도 수두룩하지.</color>
<color=#00CCFF>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자넨 다르군, 지휘관. 자네는 아직 피가 뜨거워.</color>
......
<color=#00CCFF>솔직히 말해 주게, 정말 이대로 끝내고 싶은가?</color>
<color=#00CCFF>우리는 실패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승기를 잡은 것은 바로 우리일세.</color>
<color=#00CCFF>자네가 이대로 포기하고, 대신하는 사람이 더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color>
<color=#00CCFF>"나였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color>
......
지휘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지원해 주십시오. 최대한, 가능한 한 많이.
......
조용한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든 공기를 깨웠다.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다 예상했다는 듯, 몰리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보러 올 줄 알았어, 니모겐.
...저는 당신이 자신의 컨셔스 파노라마를 직시하기를 도와주러 왔을 뿐이에요.
M4A1은 문을 살며시 닫고, 천천히 몰리도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내려다보는 M4A1을 마주보는 몰리도의 태도는 전보다 많이 애매해졌다.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니모겐? 덕분에 넌 이제 그런 공격을 다신 못하게 됐잖아.
만약에... 그냥, 만약에... 다음에 그들이 바로 너흴 노리고 온다면, 너흰 그대로 끝장이야.
저도 다시 할 생각 없어요.
그럼 대체 왜 그랬어?
......
M4A1이 몸을 숙여, 드물게 위압감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했잖아요? 그냥, 당신을 구해주고 싶다고요.
...웃긴다 정말, 그렇게 날 구해주고 싶다면 그냥 날 풀어 주지 그래?
그럴 거예요.
...뭐?
그럴 거라고요. 아직은 아니지만.
지금은, 가면을 벗은 당신을 보고 싶어요.
......
몰리도는 눈을 깜빡이며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훈작사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color=#00CCFF>그저 지원이 필요한 것이라면, 물론이지. 얼마든지 지원을 제공하겠네.</color>
<color=#00CCFF>기지에 연락해 충분한 용적량의 이동 기지 차량을 조달한다면, 자네의 직속 전력을 자네 곁으로 보낼 수 있을걸세.</color>
...그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color=#00CCFF>내 의견은 변하지 않았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젊은이들 중, 자네가 가장 믿음직스러워.</color>
<color=#00CCFF>이는 크루거도 나와 같은 생각일 테지.</color>
그 신뢰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단지, 솔직히 과분한 칭찬이라 좀 부담스럽군요.
<color=#00CCFF>물론, 자넨 아직 젊고 완벽하지도 않아.</color>
<color=#00CCFF>허나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하물며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갈고닦을 수 있을걸세.</color>
<color=#00CCFF>다만... 갈고닦는 데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color>
<color=#00CCFF>앞으로 마주할 시련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네.</color>
<color=#00CCFF>자네는 특히, 희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color>
저도 스스로의 의지로 희생하는 자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걸 태연히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동료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기회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인형이라 해도요.
<color=#00CCFF>허허, 말에 뼈가 있군.</color>
안젤리아 씨와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color=#00CCFF>...그래, 행방불명이지.</color>
제게 그녀의 수색 임무를 맡겨 주시겠습니까?
<color=#00CCFF>유감스럽게도, 그건 임무라 할 수 없네.</color>
<color=#00CCFF>그건 사적인 감정이야.</color>
훈작사께서 설득하셨기에 저는 베를린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이왕 남는 것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color=#00CCFF>그야 물론이지, 내가 어찌 잘 싸우는 맹수를 가둬 두겠나.</color>
<color=#00CCFF>허나 지금 자네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잖은가.</color>
......
<color=#00CCFF>"불꽃놀이"가 코앞이네. 자네 말곤 그걸 막을 사람이 없어.</color>
하지만, 그럼 안젤리아 씨가...
<color=#00CCFF>자네가 "이아손의 상자"에 대해 파헤칠수록, 패러데우스는 어쩔 수 없이 자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할걸세. 그러면, 안젤리아를 구출하는 일의 난이도도 크게 떨어질 테지.</color>
<color=#00CCFF> 그러니 내가 자네를 믿듯 자네도 날 믿어 주길 바라네. 나도 뛰어난 전사를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color>
...알겠습니다.
당신이 맡기신 일을 해결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
당신의 "아버지"가 무고한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오로지 붕괴복사를 견뎌내는 면역체를 찾기 위해서죠.
...안타깝게도, 그건 헛수고예요.
그게 패러데우스의 존재 의의야.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있어... 우리의 이름처럼.
우매한 인류를 진정한 복음의 땅으로 인도하는 거라고.
자기기만 아닌가요?
닥쳐.
득의양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의 몰리도에게선 음울함만이 느껴졌다.
당신은 스스로를,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부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심층에 남아있죠. 기억이 바로 절대적인 증거예요.
"아버지"의 눈에 당신들은 모두 실패작이고, 당신도 그저 "그녀"의 그림자 중 하나일 뿐. 당신이 모든 것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녀... 루니샤...?
몰리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줄곧 두려워하던 생각을 뿌리쳐내려 했다.
아니야... 속일 생각 마...
웃기지 마... 내가 바로 완벽한 자란 말이야!
정말요?
그런 그녀를, M4A1은 측은하게 바라봤다.
진실은 당신도 잘 알 텐데요.
한층 더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M4A1에 겁먹은 몰리도가 뒷걸음질치다 뭔가에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것은, 그 오물 속에서 몸부림치던 시체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몰리도가 무너지며 비명을 질렀고, 거울 속의 시체도 그녀와 똑같이 움직였다.
난 실패작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내가 실패작이면 넌 뭔데!!
훈작사와의 통신을 마친 뒤, 지휘관을 생각을 정리하며 탁상을 두드렸다.
그가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앞으로의 행동이 지금보단 순조로워지겠지.
안젤리아 씨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노력하면 무사할 거야.
아무렴, 어떤 사람인데. 그녀를 믿자.
...네.
그리고... 음?
지휘관은 의자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M4는?
...응? 어라? 그러게, 그 신기한 애 어디 갔어?
또 언제 사라졌대...
이번에 돌아온 M4는 전보다 엄청 변한 거 같아.
그렇게 느껴지나요?
넌 안 그래?
으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이랑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고나 할까?
...솔직히, 좀 변한 것 같긴 해요.
하지만 M4 씨가 우리로선 상상도 못할 일을 겪었을 수도 있잖아요? 조금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가? 하긴 뭐 그렇긴 한데...
......
조용히 두 인형의 토론을 듣던 AR-15가 자진해서 나섰다.
찾아보고 올게요.
그래, 보면 현재 상황도 전달해 주렴.
네.
......
쿵.
윽?
AR-15가 몰리도를 감금한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안에서 나오는 M4A1과 부딪혔다.
우왓, M4? 그 방에서 뭐하고 있었어?
아... AR-15. 몰리도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단둘이 얘기를 좀 했어요.
...그랬구나. 그럼 나머진 나한테 맡기고, 넌 가서 좀 푹 쉬도록 해.
네.
M4가 돌아가다 말고 멈추곤,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AR-15?
응?
제가... M4A1이라 생각하세요?
얘가 또 뭔 소릴... 그야 당연하지, 네가 M4가 아니면 누군데?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예전의 M4A1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나요?
여러 일을 겪은 지금, 모두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런데도 제가 여전히 당신이 알던 M4A1이라 확신할 수 있나요?
...네가 근본부터 뜯어고쳐지지 않은 이상, 너는 M4야.
내가 아는 M4는 심약하고 우유부단할 때가 많지만, 계속 성장하며 변화했어. 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그 선량함은 절대 흔들리는 일이 없었지.
그래서 난 믿어, 네가 틀림없는 M4라고.
......
그 말에 안도하듯 M4A1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곤, AR-15에게 싱긋 미소지었다.
...네, 고마워요.
......
신소련 변방.
부르릉...
군용 지프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허전한 땅 위를 달렸다.
그 차의 목적지인 어느 군사 기지의 검문소 앞에는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이열종대로 정렬해 있었고, 그들의 인솔 장교도 매우 비장한 표정이었다.
......
장교로부터 약 5m가량 떨어진 거리에 지프차가 멈춰 섰다.
철컥.
차의 문이 열리자, 검은 장화가 안에서 뻗어 나와 얇게 쌓인 눈을 밟았다.
전원, 경례!
장교의 구령에 맞춰, 정렬한 병사들이 차에서 내린 이에게 일제히 경례했다.
이럴 필요 없네, 동지.
직위 해제되어 위대한 조국의 일개 국민이 된 놈에게 뭐하는 건가.
농담 마십시오!
저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카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저희는 배신을 택한 정부를 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참기만 하다간, 언제 저 위를 꿰찬 매국노들이 숙청의 칼날을 휘둘러 저희의 목을 앗아갈지 모릅니다.
저희는 진정한 지도자, 조국의 영광을 되찾고 저희를 승리로 이끌어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장교는 카터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지휘를 맡아 주십시오!
......
이것은 국경 1718 특구의 동지 전원의 뜻입니다!
눈앞의 병사들을 살펴보며, 카터는 등뒤의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의 부하 수행원도 차에서 내려, 그 합의서를 그에게 건넸다.
...조국을 위해.
조국을 위해!
<size=52>조국을 위해!</size>
병사들의 격앙된 함성을 받으며, 카터는 서류봉투의 매듭을 풀었다.
"두고보아라."
"불씨는, 결코 쉽게 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