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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75 · 재귀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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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예전에 선생님의 눈빛을 보곤 선생님에겐 자애로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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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그룹 본사.

그레이 생물과학 연구 센터.

에케지에

죄송하지만 지금 연구 센터는 어떤 취재도 받지 않습――넬레!?

아직 실험실에 남아있던 연구원이 방문자를 알아보자 깜짝 놀라 소리를 냈다.

넬레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에케지에 선배.

저번에 제가 좀 충동적으로 굴어서... 죄송해요.

에케지에

괜찮아 괜찮아, 사회생활을 한다는 게 다 그렇지 뭐.

나도 예전엔 충동적으로 막나가고 그렇기도 했어.

넬레

...여기서 그레이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어쩌다 보니 좀 일찍 왔네요.

넬레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에케지에

그렇구나. 직장 관두는 거 때문이지?

다들 지금 절차 밟고 있어. 나도 금방 끝날 거야.

넬레

하아... 전 아직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넬레는 에케지에를 흘깃 보며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자신의 것이었던 컴퓨터를 켰다.

에케지에

아이버슨 교수님이 브레멘에 있는 연구소에 간다셨잖아, 거긴 흥미 없어?

넬레

...브레멘은 너무 먼걸요.

전 역시 베를린이 좋아요.

심장이 쿵쾅댔지만, 어떻게든 평상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넬레는 에케지에가 보는 앞에서 몰래 USB를 꽂는 중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무엇이 됐든 증거를 확보해야 했다.

에케지에

그래도 넌 젊잖아. 어딜 가도 괜찮지 않을까?

넬레

그래도... 베를린에 있는 게 편할 거 같아요.

에케지에

뭐,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지.

띠 띠 띠 띠...

권한 인증 성공.

자료의 복사가 시작되었다...

에케지에

아 참, 너 퇴직금으로 월급 몇 개월치 받을 거야?

넬레

네? 어, 그, 그건 아직 생각을 안 해봤네요.

에케지에

응? 그런 거 정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넬레

...그러니까 제 말은, 얼마를 받을지 생각해보질 않았다고요.

그냥 선생님이 주시는대로 받을까 싶어요.

에케지에

뭐어? 확실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계약서대로 쥐꼬리만큼밖에 안 주려 할 거야!

우리 모두 재직 기간 1년도 못 채워서 규정상으로는 얼마 안 나올 거라고.

넬레

네?! 1년을 못 채웠다니... 다들 들어온 지 1년 안 됐어요?

에케지에

그렇지, 최고참인 아이버슨 교수님도 작년 11월에 들어오셨어.

넬레

...에케지에 선배, 선배들은 입사할 때부터 연구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알고 있었던 거죠?

에케지에

...그렇지.

넬레

그런데, 이 연구소는 설립된 지 꽤 되지 않았어요? 그 전 기수 선배들은요?

에케지에

들은 바로는 일 못해서 잘렸다던데?

......

에케지에

아 선생님, 오셨어요?

넬레, 너 선생님이랑 어디서 얘기한댔더라?

넬레

.......

자료 전송 진행도는 아직 87%... 그 말을 들은 넬레는 긴장으로 얼굴에 피가 몰려 빨개졌다.

조심조심 뒤를 돌아보니...

넬레

...선생님.

문앞의 그레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넬레를 지켜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레이

에케지에, 잠깐 나가 주겠어요? 넬레와 할 얘기가 있답니다.

에케지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그레이

오랜만이에요, 넬레.

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마주하며, 넬레는 용기를 냈다.

넬레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 아직도 다 기억해요.

"기술은 둘째, 첫째는 품성이다."

그레이

대외적으론 그야 당연히 그리 말해야 하는 법이죠. 하지만 세상은 매정하답니다, 다들 기술과 성과를 보고 지갑을 열지, 품성을 보진 않아요.

넬레

이둔의 연구 방향성이 변경된 뒤로 임상 실험도 불가능해졌다는 거, 모르시진 않죠?

그레이

그 점도 제가 좀 더 일찍 넬레에게 말해 줬어야 했네요. 난민이 뇌사한 사건은 제가 잘 처리했으니, 넬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넬레

...예전에, 선생님이 난민 거주 구역에 여러 번 방문해서, 이둔을 테스트하셨잖아요?

그레이

전부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진행됐죠.

넬레

아무리 성분 검사를 통과했다지만, 복사감염증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 촉매 성분은 변이 세포의 확산을 촉진시킬 뿐이에요.

넬레

선생님, 그건 살인 행위예요!

그레이

아뇨, 이건 사람을 구하는 행위예요.

인체 자신의 항체만이 복사감염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에요.

넬레

하, 하지만 여태까지 면역 체계를 형성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잖아요!

그레이

그건 그들이 나약했기 때문이에요. 신체 능력이 너무 약해서 실패한 거죠.

성공적으로 항체를 생성해내는 면역체를 확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현 인류의 숙원인 ELID 근절이라는 숙원을 이룰 수 있어요.

넬레

...이 실험실의 모두가 그 정신 나간 생각에 동의하나요?

그레이

넬레, 넬레는 총명한 사람이잖아요?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넬레도 역사에 이름이 기록될 거예요.

넬레

그럼 그동안 죽은 사람은요?

그레이

인류 발전의 역사는, 그 한 걸음마다 희생이란 발자국을 남겼죠.

슬프지만, 필요한 대가랍니다.

"희생"이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레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넬레는 극한의 모욕감에 몸서리를 쳤다.

넬레

선생님... 아니, 당신 누구예요?

그레이

......

넬레

의약품은 인류가 병에 걸린 동료를 버리지 못해 탄생했어요!

짐승처럼 다치고 병들어서 약해진 무리의 구성원을 버리고, 잡아먹지 못하니까, 인류는 약을 찾아 만들어서 동료의 고통을 줄여 준 거라고요!

그레이

......

넬레

질병 앞에선 모두가 약자다!!

우리도 모두 언젠가는 약자가 될 날이 온다!!

그래서 어떤 의약품의 연구 개발도 경외심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레이

......

넬레

그랬던 선생님이, 어떻게 지금 내 눈앞의 당신일 수가 있어요?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희생"이란 말로 퉁쳐요...? 그 사람... 지금도 성 마리엔 병원에 누워있는 페터 씨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서, 전 아직도 잠을 제대로 못 자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 일을 "처리했다"고요? 어떻게요? 어떻게 "처리"했는데요?

넬레

전 예전에 선생님의 눈빛을 보곤 선생님에겐 자애로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 당신은 아니에요...

그레이

...그야 당연하지. 내게 그런 약점 따위 없으니까.

넬레

...?!

그레이의 미소가 변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대드는 풋내기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사냥감을 만난 희열이었다.

뒤로 숨겼던 칼날을 서서히 드러내며, 그레이는 저 풋내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넬레

당신은...

그레이

내가 이런 곳에서 방심할 줄이야...

일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너처럼 백지 같은 이력서를 낸 사람이라면 써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아하니... 더 이상 말은 안 통하겠구나.

넬레

......

그레이가 흥미로워하며 웃었다.

그레이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했지?

넬레

...말 안 해도 이제 대충 알겠네요.

평소보다 푸짐하게 차린 저녁 식사를 담은 식판을 들고, 미아는 넬레의 침실 앞에 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미아

넬레, 저녁 먹어야지.

미아

...성질 그만 부려. 다 너 생각해서 가지 말라는 거야.

내가 너 좋아하는 스파게티랑 버섯 스프 만들었어. 같이 저녁 먹자, 응?

넬레는 아직도 삐졌는지, 방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없다?

미아

넬레?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미아가, 식판을 옆의 서랍에 올려놓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미아

——넬레?!

방은 썰렁했다. 그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침대 시트와 커튼 등을 꼬아 만든 동아줄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미아

네... 넬레!!!

곧장 방을 뛰쳐나가는 미아가 서랍에 부딪혔다.

서랍 위에 뒀던 식판도 엎질러져, 걸쭉한 버섯 스프와 토마토 소스 듬뿍인 스파게티가 바닥에 쏟아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J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다.

J

요 호 호~

――헉 너 아직도 여깄었어?!

모나

소요 시간, 36분 47초. J 요원, 혹시 스트레스로 인해 소화기에 문제가 생겼나요?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J

그런 거 재지 마, 기분 더럽다 야...

너 꼴보기 싫어서 안에서 멍때리고 있었다, 됐냐?

모나

하지만——

똑똑똑.

모나

——!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모나가 벌떡 일어나, 총을 견착하고 현관을 주시했다.

모나

누가 방문한다는 통보는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확인할 테니 J 요원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J

아, 그거――

J의 말도 다 듣지 않고, 모나는 총을 들고 현관까지 가 문을 조심조심 열었다.

RPK16

반가워요~♪

모나

엑!?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그 인형"에, J가 뭐라 해도 차분하던 모나가 깜짝 놀라 소리를 냈다.

RPK16

들어갈게요~

모나

자, 잠깐만요, 기다리세요!

J

들여보내.

내가 오라 했어.

모나

불렀다니... J 요원, 화장실에서 대체 뭘 한 겁니까!

그녀와 어떻게 연락했죠? 이 인형은 실종됐다던 신소련의 안젤리아 요원 휘하 리벨리온 소대의 멤버 아닙니까!

RPK16

어머, 설명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J 씨.

미안해요 예쁜 아가씨~ 사실 제가 먼저 연락한 거예요.

모나

당신이...?

여태까지 행방불명이다 대뜸 J에게 연락하고 왔다는 RPK-16을, 모나는 극도로 경계했다.

모나

왜 갑자기, 하필 지금 모습을 드러냈죠? 당신의 대장, 신소련의 안젤리아 요원이 행방불명됐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RPK16

자세한 설명은 J 씨한테 먼저 했어요.

당신에게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안젤리아는 패러데우스에게 사로잡혔고, 저 혼자서는 중과부적이었기에 몰래 숨어서 그들이 안젤리아를 감금한 위치를 이제야 겨우 파악했답니다.

원래는 그리폰의 지휘관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J

아까 어떤 좌표를 얻었는데, 아무래도 거기 있는 건 패러데우스의 공장 같단 말이죠... 은여우 아가씨가 제공한 정보와 합쳐 본다면, 1등상 당첨이겠군요.

일이 아직 잘못되지 않았다면, 안젤리아 씨는... 거기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죠?

RPK16

네, 맞아요.

모나

...저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판단하기엔 너무 섣불러요.

죄송합니다 RPK-16 씨, 실례되는 말이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당신을 신용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국장님께 보고해 어떡할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RPK16

의심되고 걱정스러운 건 당연하죠, 이해해요. 하지만 전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삶도 그렇지만, 전장은 1초 뒤에 어떻게 급변할지 몰라요.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 뒤에도 안젤리아를 찾아낼 단서가 나오리란 보장이 없죠.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RPK-16이 전술 파우치에 손을 넣어 잠깐 뒤적이더니, 한 작은 물건을 J에게 휙 던져 줬다.

RPK16

지휘관님께 좌표를 보냈다 했죠?

J 씨가 못 가겠다면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마침 저도 이제 지휘관님과 합류할 생각이었거든요.

RPK-16이 던져 준 물건은 차가웠다.

그걸 받은 손을 천천히 열어 본 J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모나

..."U"?

알파벳 "U"가 새겨진 배지였다.

J

...나도 갈게.

모나

J요원?

J

모나, 보고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이젠 진짜 그 여자도 나 못 막는다.

J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그 배지를 자신의 옷소매에 달았다.

J

각오했다고. 주사위도 던졌으니 이젠 후회해도 늦었어.

모나

주사위를 던졌다니... 설마, 또 뭔가 한――

슈타지 요원

J 형님! 계십니까!

그 부름과 함께 현관이 시끌벅적해졌다.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챈 모나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고개를 돌리니, 열 명이 넘는 슈타지 요원들이 모여있었다.

J

내가 화장실에서 "36분 47초"나 있으면서 고작 은여우 아가씨랑만 통화한 줄 알았냐?

모나

......

슈타지 요원

형님, 최대한 불러 모았어요.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하겠습니다!

슈타지 요원

먼저 간 녀석들의 한을 풀어 줘야죠!

RPK16

이것 참... 의외네요.

J 씨, 의외로 인망이 높았군요?

J

벌써 시간을 많이 끌었어, 다 모였으면 바로 출발해야지.

소련에서 온 친구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진 말자고. 가자 이것들아!

모나

자... 잠깐만요!

J

...은여우 아가씨, 잠깐 우리 모나 양 좀 조용히시켜 줄래요?

RPK16

저야 상관없지만, 책임은 안 질 거예요?

모나

......

열혈로 똘똘 뭉친 그들의 모습에, 모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체념했다.

모나

...알겠습니다.

당장은 국장님께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J

뭣...?

모나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니까, 저도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제 임무는 당신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모나가 당당하게 나오자, J도 할말을 잃었다.

RPK16

전력이야 많을수록 좋잖아요?

J

하아... 그래, 마음대로 해라.

모나

......

J의 수락에 모나도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고개를 기울여, 들이닥쳤을 때부터 계속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는 RPK-16를 흘겨봤다.

착각이면 좋겠지만, 왠지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