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귀정리
EP.13.75 · 재귀정리

Tera

"먼저 간 이들의 족쇄를 풀어 안녕과 광명 가득한 천국으로 인도하시어, 자애로운 아버지 곁에서의 영생을 하사하시기를 비나이다."

-48-6-12

1 / 129
전체 대사 보기 (119줄)

아수라장을 뒤로하고, 아직 작전 능력이 있는 인형들이 크루거와 헬리안을 호위하며 천천히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크루거

콜록... 콜록콜록...

헬리안

크루거 씨!?

크루거

...난 괜찮아.

크루거는 저쪽에서 폐허로 진입해 생존 인형들과 함께 잔해를 수습하는 지원군들을 보며,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

헬리안도, 드문드문 폐허를 뒤지며 아직 쓸 수 있는 물품이 없나 확인하는 인형들을 보며 가슴아파했다.

헬리안

...다 사라졌군요.

크루거

아니, 충분히 남았네.

인형들의 부축을 받는 크루거는 그저 조용히 폐허가 된 기지를 바라보았다.

크루거

...모두가 기억할걸세.

우리 모두가 기억할 거야.

헬리안

크루거 씨...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 크루거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흙 한 줌을 움켜쥐었다.

그걸 본 헬리안은 묵묵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완장을 뜯어 문앞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녀의 행동을 본 크루거도, 잠시 뜸을 들이다 자신의 완장을 뜯었다.

크루거

이것으로 "그리폰"은 사라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우린 소중한 것을 지켜냈어.

헬리안

예.

헬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크루거를 부축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헬리안

10년이나 되었으니 떠날 때도 되었죠.

그래도 저는 평생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이 몸이 바스러지더라도, 제 영혼이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경건하게 경례하는 두 사람 뒤로, 어느샌가 모여든 인형들도 엄숙한 동작으로 석양을 향해 손을 들어, "집"이었던 곳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 기묘한 풍경을 향해, 저 멀리서 이동 기지 차량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

익숙했던 복도는 정부 기관의 차단 테이프에 가로막혔기에, 넬레는 복도 밖에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 차례의 수사가 들쑤시고 지나간 실험실은 가지런했던 원래의 모습을 잃어 낯설게 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미아는 가장 앞의 현수막을 뜯어버렸다.

미아

넬레...

넬레

...괜찮아, 미아.

넬레가 가볍게 코를 풀곤 차단선을 넘어 들어갔다.

익숙한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 넬레는 방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때, 그녀가 꿈과 동경심을 품었던 곳이다.

넬레

선생님...

미아는 말없이 문 밖에서 기다렸다. 지금 넬레에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다.

넬레

실험실이 이 꼴이 된 걸 보시면, 선생님 엄청 화내실 텐데...

세상에 하나뿐인 서적, 연구 보고서, 자료 파일... 그레이가 무엇보다 소중히하던 물건들이, 쓰레기처럼 바닥에 쌓여있었다.

넬레

이 사람들... 서류를 정말 함부로 다룬다...

넬레는 쪼그려앉아 자료 겉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종이 상자에 담았다.

이제와서 그녀가 이것들을 가져간다고 참견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두꺼운 보고서 아래에 깔려있던 액자가 드러났다.

그걸 본 넬레의 눈빛이 흔들렸다.

넬레

선생님의 젊을 적 사진...

액자 뒤편엔 좌우명이 적혀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생명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눈물 한 방울이 액자에 떨어졌다.

넬레는 눈물을 훔치며 액자도 상자에 담았다.

미아

......

실험실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문 밖의 미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큰 비를 맞으며 J는 현관으로 내달렸다.

J

재수도 좋지...

나갈 때만 해도 날씨 멀쩡했는데.

K

많이 젖지도 않을 텐데 좀 참아.

J

...다 모인 거 맞아?

K

그래.

J는 고개를 들어 숙연한 얼굴로 K와 시선을 마주했다.

계단을 딛고 올라, 둘은 교회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J

그나저나, 관에다 뭘 담았대?

K

유족들이 기부한 유품들.

규정 알잖아, 묘비에 이름을 적어선 안 돼.

J

...그건 나도 알아.

둘은 잡담을 나누며 예배당에 도착했다.

장엄한 신상 아래로, 자상한 눈매의 신부가 성경을 들고 추도문을 읊었다.

특별 조문객으로 온 J와 K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장 앞줄에 앉았다.

J

......

J는 그 화려한 관 속에 가득 담긴 온갖 물건들이 보이자 착잡함이 들었다.

동화책 "무지개 꽃", 잔뜩 녹슨 오토바이 핸들, 멋진 선글라스...

J

(섀도는 아직 안 왔나...)

관 속을 여러 번 살펴봤지만, 라이트의 유품은 보이지 않았다.

J

...저기, 잠깐 실례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려는 신부에게 손을 들면서, J가 일어나 관 앞으로 갔다.

J

......

관 바닥에 깔린 깨끗한 하얀색 천을 보며, 그는 옷소매에서 "U" 뱃지를 떼어내 살며시 내려놓았다.

신부는 그런 그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숨을 푹 쉬면서, J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신부의 낮으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예배당에 울려퍼졌다.

신부

하느님께서 그 무한한 지혜로 우리의 손에 결실을 내려 주시니...

오로지 그분의 육신이 사라진 곳이 우리 영혼이 다시 자리잡을 곳이라.

하느님께 통하는 길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으니...

우산을 접어 땅을 짚으면서, J는 관이 흙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J

......

머리 위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으로 짚어보니, 하얀 장미꽃잎이었다.

부드럽고 연약한 꽃잎은, J의 손바닥에 기대어 몸을 움츠렸다.

J

케인... 녀석들 시신은 어떻게 처리되지?

K

가족들에게 인계되거나, 의료 기관에 기부되지.

K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들었다.

신부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

다시 한번 은혜를 베푸시어, 먼저 간 이들의 족쇄를 풀어 안녕과 광명 가득한 천국으로 인도하시어, 자애로운 아버지 곁에서의 영생을 하사하시기를 비나이다.

아멘.

조문객

아멘.

기도문이 막바지에 이르자, 장의사도 삽으로 흙을 퍼 관을 덮기 시작했다.

푸석... 푸석...

한 줌 한 줌, 조문객들의 마음과 함께 영령들은 흙으로 돌아갔다.

J

......

손 안의 장미 꽃잎을 꼭 쥔 채, J는 고개를 기울여 사람들 사이를 훑어봤다.

...아직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K

돌아가자.

J

...그래.

J는 몸을 숙여 흙을 한움큼 떠, 이젠 거의 다 묻힌 관 위로 뿌렸다.

J

<color=#A9A9A9>...이대로 끝내지 않아.</color>

지휘관은 멀찍이 떨어진 그늘 아래에 서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휘관

국장님이 보러 가시면 그들도 기뻐할 겁니다.

로미

저들 눈에 난 그저 낙하산이다. 딱히 친분도 없어.

미움받는 상사는 환영받지 않아.

코트 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낸 로미는 검은 필터를 물고 가느다란 담배를 뽑았다.

로미

그리고... 난 희생을 질리도록 봤거든.

지휘관

익숙해졌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로미

후우...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을 빨고서,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었다.

로미

...내가 널 여기로 부른 건, 이런 얘기나 하려고가 아니다.

지휘관

그래도 이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 눈으로 직접 저 영웅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로미

인정해야겠군, 너를 다시봤다.

인재는 대부분 그저 서류상에 그 우수함이 적힌 게 다지만, 너는 달라. 가능성이 보여.

이상주의자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믿게 하는 가능성이.

지휘관

....과찬이십니다.

로미

그럼 내가 과대평가했다 쳐라.

지휘관

......

관이 매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로미 국장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는 조용히 타들어 갔다.

로미

...네게 줄 게 있다.

지휘관

뭡니까?

로미 국장이 바닥에 내려 뒀던 케이스를 집어, 지휘관에게 들이밀었다.

로미

그럼, 또 보도록 하지.

장례식이 끝나자, 로미는 휴대용 재떨이에 불을 끄면서 손짓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휘관

......

바람처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지휘관은 잠시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그리고 단추를 풀고 덮개를 연 케이스의 안에는, 인형의 마인드맵 코어 2개가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엔 그 코어의 주인의 이름도 있었다.

AN-94, AK-15.

지휘관

...안젤리아 씨.

......

......

태양이 점점 저물어 갔고, 조문객도 모두 떠나 치장까지 마친 묘지 앞에, 꽃을 든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섀도리스

...누나 왔다, 라이트.

섀도리스는 천천히 묘비에 다가가 쪼그려앉고, 공물들 사이에 꽃을 살며시 내려놨다.

섀도리스

그날 네가 냉장고에 넣어둔 밥, 먹는 거 깜빡하다 오늘 아침에야 생각나서 봤더니... 다 쉬었더라.

네가 키우던 화분도, 흙이 다 말랐길래 물 줬어.

...너, 딴 일로는 누나한테 뭐라 않으면서 꼭 맥주 사오라 하면 화냈잖아?

이젠 가게에다 주문하면 알아서 배달해 준대. 정말 편리하지?

섀도리스는 꽃다발의 꽃잎을 뜯으며 중얼거렸지만, 소리는 점점 작아지다 끝내 침묵에 빠졌다.

묘비를 바라봤지만, 그 위엔 누구의 이름도 없었다.

섀도리스

내가 좀 더... 끝까지 강하게... 엄마 아빠의 길을 걷지 말라 말렸으면...

뚝...

뚝뚝...

눈물이 구슬처럼 눈가에서 굴러, 묘비 앞에 떨어졌다.

섀도리스

라이트... 내동생... 어떡해... 왜... 라이트...

차분하고 침착하던 표정이, 마침내 무너졌다.

동생을 잃은 누나는 무릎을 팔로 감싼 채, 이름 없는 묘비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재귀정리] END

부웅——

칠흑같은 밤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수송기가, 관제탑의 안내를 받으며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리고 지상 근무원의 지시에 따라, 수송기는 천천히 격납고로 들어갔다.

격납고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 수송기가 보이자 웅성거림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병사

...장군님.

카터

화물을 확인해라.

병사가 격양된 눈빛으로 경례하고, 곧장 동료들과 함께 막 문이 열린 수송기의 화물칸으로 뛰어들어갔다.

카터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들 뒤를 따라 들어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화물을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병사

화물 검품 완료했습니다.

손상된 것은 없습니다, 언제든지 투입 가능합니다.

카터

좋아.

카터는 컨테이너 하나 앞으로 다가가, 그 차가운 상자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새하얀 상자의 표면에는 패러데우스의 문양이 선명했다.

카터

제군들, 함께 경축하세.

오늘밤부터 시작될... 신소련의 여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