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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8 · 고정점

휘파람

"산과 고지를 그리려면 평원을 가야 하고, 평원을 살피려면 산을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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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타지 본부.

쿵!

J가 성질을 내며 사무실 탁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내리쳤다.

J

<size=50>이걸로 18번째다! 18번째!</size>

<size=50>야 슈바벤! 진짜 그 빌어먹을 놈들 이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냐!? 엉?!</size>

K

...진정해.

J

<size=50>이 자식은 진정하란 말밖에 모르나!</size>

<size=50>이번 달에 순직한 동료들 수가 지난 5년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size>

그리고... 이게 다 누구 짓인지 알잖아...

K

입단속도 해라, 확실한 증거 없이는 함부로 말을 꺼내선 안 돼.

K는 침착하게 어질러진 서류 더미를 가지런히 모은 후 깊게 심호흡했다.

K

후우... 우리 슈타지도 전술인형을 전격 도입하기로 한 것은 확실히 현명한 판단이지만, 인력 부족을 메꿀 정도는 아니니 더는 멋대로 움직여선 안 돼.

지금으로선 자기 분수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야.

J

아니, 그 녹음 기록으로도 부족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얻은 증거인데!

K

진실도 손쉽게 가짜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어설프게 들이밀었다 가짜라 낙인 찍혀 버리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그딴 것쯤 위조할 방법이 얼마나 널리고 널렸는지는 너도 알잖아.

J

......

K가 맞는 말만 하니, J는 반박도 못하고 주먹만 쥐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탁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며,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J

...그래서, 넌 요즘 뭐하냐?

말해도 되는 거 있음 좀 말해 봐.

K

우리의 차후 임무를 위한 준비 작업 중이지.

J

어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K

케빈, 네가 보기에 "그녀"는 얼마나 있을 것 같나?

J

......여기 상관 갈아치워지는 속도로 봤을 때, 길어봤자 2년?

K

나 참... 정말 윗선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구만.

J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론 슈타지는 원래부터 안 그래도 제약 많던 권한이 아주 쥐꼬리만큼까지 축소돼서 그냥 경찰한테 다른 이름만 붙은 수준이 되어버렸담마.

이런데 내가 윗선 신경쓰게 생겼냐?

K

너는 고생할 몸도 없으면서 머리도 나쁘다 해야 하나...

그녀는 어쩌면 "안전국"이 "안전부"가 된 이래 재임 기간이 가장 긴 사람이 될 수 있어. 내가 미래를 걸고 장담하지.

J

...너 진짜 그 여자한테 무슨 세뇌라도 당한 건 아니지?

K

"불꽃놀이" 사건 이후, 우린 이상하게도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J

그렇긴 한데... 솔직히 그거 우리랑은 상관 없는 일 아니야?

K

넌 진짜 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슈타지는 첩보 기관이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슈타지의 대모스크바 첩보 활동이 20년 전으로 후퇴한 이래, 거기서 무슨 일만 나면 여긴 바로 리더가 교체되어버렸지.

J

그거에 태클 좀 걸자면 슈타지가 20년 후퇴했어도 지금보단 나았다.

K

머리 좀 굴려 봐.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이면 통일절에 "불꽃놀이"가 터진 걸 한발 늦게 알았으니, 슈타지는 바로 징계를 먹었어야 했어.

J

하지만 그 여자는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다, 그 전에 여기서 비슷한 임무를 맡은 사람도 없었잖아.

비록 예전부터 내부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적어도 "눈"은 있어서 누가 뭘 하는지는 알았다고.

우리가 모르는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K

생각이 조금 짧았군. 그래서 그 여자가 대단하다는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상층부는 진작부터 "불꽃놀이"에 대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단 뜻이지. 슈타지조차 모르는 와중에,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어.

J

......

K

게다가 지난번 지휘관과의 협력 작전도 성공적이었고, 굉장한 정보까지 입수했건만, 우린 후속 임무를 받지 못했다.

K

이는 즉 지휘관이 우릴 통해 그녀와 연락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우릴 통해 지휘관과의 협력을 얻어냈다는 뜻이지.

그녀는 "윗선"은 물론 "아랫선"과의 연락망까지 다 구축해놨어.

J

...공장에서의 실책은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K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K

"산과 고지를 그리려면 평원을 가야 하고, 평원을 살피려면 산을 올라야 한다."

그녀는 굉장한 야심가다.

J

흐음... 네 분석은 대충 이해했어.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대체... 이제 우린 뭘 해야 하는데?

K

크흠크흠.

K가 대뜸 헛기침을 하더니, 탁상 아래서 20인치 짐가방을 하나 꺼냈다.

K

마침 너에게 맡길 일이 하나 생겼다.

네 말대로, 우린 더 이상 동료를 잃을 수 없어. 이 사무실 월세가 아까워서라도.

J

하지만 우린 그 사람 못 건드리니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된다며.

K

표면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그건 네 주특기고.

J

...뭐?

K

우리 쪽 사람이 더는 희생하지 않으면 돼.

네 새 동료들을 소개해 주마.

J

어...

J는 K가 폴더에서 꺼낸 프로필을 받아 빠르게 넘겨봤다.

J

또 인형이야?

그것도, 한 번에 4명씩이나?

K

인간 신참 잔뜩 들이는 것보다는 일처리가 빠르고 깔끔하잖아.

그리고... 아주 심각한 사달만 안 나면 희생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J

......

그럼 모나는? 걔 수복도 다 끝났잖아.

K

모나는 따로 일이 있다, 너랑은 다르게 말이지.

스스로가 얼마나 믿음직한 슈타지 요원인지를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거든.

J는 입을 괴상한 모양으로 뻐끔거리며 반박할 말을 고민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여 네 인형의 자료를 읽었다.

로미 리펜슈탈 국장의 사무실.

로미

마무리 작업의 진행 상황은?

<color=#00CCFF>"불꽃놀이" 이후 꽤 진전되었고,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color>

<color=#00CCFF>현재 모스크바는 문단속이 정말 철저해졌어요. 대사관은 철통 감시에, 심지어는 택배 배달하는 우체부의 집에까지 카메라를 40개는 넘게 달았다니까요.</color>

로미

아직 정식 요원 송환 통보를 받진 못했다. 적어도 그곳에서의 활동이 여기까지 닿을 파급력은 없었단 것이겠지.

우리가 심어 둔 사람을 찾기보단 그들의 내부 문제 해결에 더 급급하단 뜻이기도 하고. 너도 임무 수행에 더욱 신중하도록.

로미

우리는 그들의 내란에 입장을 내비쳐서는 안 돼. 표면적이라곤 해도, 엄연히 국가의 입장이 그러하니까.

<color=#00CCFF>뭐 어때요, 어차피 우린 "불법" 요원인데. 붙잡혀도 님이 꺼내 주실 거죠?</color>

로미

아무래도 넌 모스크바 감옥의 식단이 궁금한가 보구나.

<color=#00CCFF>설마요. 저도 엄청 힘들다고요, 들통난 동료가 얼마나 많은데.</color>

로미

못 하겠으면 딴 사람한테 넘기든가.

하지만 해외 파견 보너스는 고정된 총액을 등분하는 것은 알지? 그래도 지원이 필요해?

<color=#00CCFF>지금 보너스 따지게 생겼어요? 이건 이상이 걸린 일이라고요!</color>

<color=#00CCFF>님, 저는 추구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에요. 해외 파견 임무는 이상과 신념이 있는 사람만 하는 거, 님이야말로 몰라요? 저 좀 믿어 주세요.</color>

로미

흥.

<color=#00CCFF>암튼 확실한 건, 그 "인간도 아닌 것들"은 지금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거예요.</color>

로미

놈들이 파기한 자료, 복구할 수 있겠어?

<color=#00CCFF>어렵겠어요, 녀석들 시스템의 연산 효율은 우리 부서의 낡아 빠진 고물딱지랑은 천지 차이라서.</color>

<color=#00CCFF>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 기술팀은 민간에서라도 전문가나 고수 좀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color>

로미

그 무기들의 입수 기록은 찾아냈고?

<color=#00CCFF>그게 좀 희한하단 말이죠... 그 무기들은 반군――일단 반군이라 부를게요, 그들의 루트를 통해 들어왔어요.</color>

<color=#00CCFF>건설부를 통해서가 아니라요.</color>

로미

...자료 정리해 줘, 최대한 자세하게.

모스크바의 어느 카페.

웨이터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만능 플러그도 여기 있습니다.

아아 고마워요.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온 8인용 테이블에는 온갖 영수증이 한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앉은 사람은 테이블의 크기에 비해 상당히 왜소해 보이는 젊은 여성 한 명뿐이었다.

웨이터

저... 손님? 이건...?

영수증 찍고 있어요.

...나 원 참, 2064년인데 경비 신청에 종이 영수증이 필요하다니.

웨이터

도와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여기에 제 하반기 실적 평가도 걸려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