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바다
"그곳은 나는 새도 못 지나가는 죽음의 땅 '아베르누스'."
베를린, 소련군 측 세이프하우스.
삐이...
통신 연결.
이번에는 좀 좋은 소식이길 바라네.
실망시켜서 미안하게 됐군. 결국 놓치고 말았어.
지금까지 우리가 쫓았던 어떤 놈들보다도 끈질겨.
흐음... 내용은 전달받았네.
그 여자를 이 일대에서 놓친 것이 분명한가?
맞아.
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보고할 내용이 있겠지?
하.
이 근방엔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구역이 있더라.
3차대전 시기에 전쟁 폐기물을 투기하던 곳이었지. 지금은 새조차 못 지나가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블랙존"이다?
틀림없어.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인형은 물론 기갑마저도 거기서 오래 못 버텨.
......
아귀가 맞는구먼.
음?
이쪽에서 내부를 "청소"하던 도중 이름을 하나 들었다네, "아베르누스"라고.
"지옥의 입구". 그 죽음의 바다란 곳과 수상하게 어울리는 이름이란 생각 안 드나?
...그렇군.
그렇다면 그 여자가 이 근방에서 종적을 감춘 걸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어.
희소식을 기다리겠네.
삐이.
통신 종료.
......
......
안젤리아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발은 몰라도 손이 뒤로 묶인 상태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퉁.
퉁.
퉁.
얼마나 지났을까, 환하게 주위를 밝히는 등불이 멀리서부터 차례대로 꺼졌다.
마치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다가온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등불이 꺼지는 소리는 넓은 복도로부터 방으로 메아리쳐 리듬감 있게 가슴을 두드렸다.
...폼 잡기는.
가장 처음 난 소리에 흠칫했을 뿐, 안젤리아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들어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까.
후우...
이윽고, 주위의 소리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퉁.
강렬한 빛줄기가 안젤리아의 얼굴을 비추어, 그녀의 가려진 시야까지 희미한 분홍색으로 밝아졌다.
낯선 기척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느껴졌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입을 제외하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
...누구야.
먼저 입을 열어 떠보았는데도 묵묵부답인 점이 오히려 안젤리아의 추측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다만...
비록 만나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자신의 코앞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안녕하신가, 안젤리아.
나는 네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다. 계속 "윌리엄"이라 불러도 돼.
......
변성기가 온 소년 특유의 목소리.
안젤리아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음성 변조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쳐서일까, 그녀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확신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너무 젊은 수준을 넘어, 어리다는 것이었다.
네 진짜 이름 아니잖아.
진짜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야? 그저 호칭, 별명, 코드네임에 불과한데.
너만 좋다면 날 다르게 불러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리고 중요한 건 내 이름이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여기에 초대한 이유야, 안젤리아.
너랑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이게 간단한 대화나 하자고 사람 불러다 놓은 꼴이냐?
안젤리아가 몸에 힘을 줬지만, 당연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물론이지, 우리가 공평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인걸.
공평 좋아하네... 내가 네 머리통이라도 쥐어 터뜨릴까 봐 겁나?
그럴 리가. 그건 내가 아니라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솔직해지자고, 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
그래도 물어는 보자.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지? 네 친구의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그 얄팍한 정의를 위해서인가?
내가 그런 사적인 이유로 널 찾아다닌 줄 알아?
네 손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세어나 봤냐? 그런 것까지 얄팍하다 하면 세상에 뭐가 중요한데?
그래 그래 잘나셨어, 정의의 사도님.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안 해봤어? 난 그저 무기상일 뿐이라고.
내가 이런 무기를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려 들어. 돌멩이와 몽둥이를 써서라도 말이야.
지는 죄가 없다는 듯이 말하네.
적어도 네가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은 점점 엉망진창이 될 뿐이란 건 객관적인 사실이야.
객관적이라... 진짜 객관적인 사실은, 네가 성공하더라도... 그러니까, "윌리엄"이 죽어 패러데우스가 사라지더라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이 세상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든 만악의 근원이 정말 나라고 생각해?
날 왜 산 채로 잡아왔나 했더니 그딴 자기 변호나 들려주려고였어? 그렇게 앳된 목소리라도 그건 좀 너무 유치하지 않냐?
바로 그거야, 뭐라 반박해야 할지 더는 안 떠오르지?
네가 그런 말로 대꾸했을 때에야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지.
......
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너도 알고 있어.
이 세상이 병든 원인은 내가 아니란 걸.
이 세상을... 이 세상의 권력 구조, 지금 세상의 흐름을 지배하려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세상이 썩어 들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이야.
......
떠오르는 사람 있지?
하긴, 예시가 차고 넘치니.
그 인간들. 그 정치인들. 세상을 쥐고 흔들면서,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 좇는 놈들.
그런데 너처럼 투지 넘치는 의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나 같은 일개 과학자나 뒤쫓으면서, 정작 그런 놈들은 못 본 척하지.
그런 걸 두고 정말 "정의"라 할 수 있을까?
그러는 너는 왜 그런 정의감을 안 보이고 그 정치인들이랑 줄다리기하다 흉기를 홀라당 넘겨 줬대?
그게 우리가 다른 점이야.
출발점은 같았지만, 너는 무력을 행사했고 나는 기술을 연구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도 나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지... 그래, 이게 잘못됐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런 아이러니가 바로 이 세상이 변해야만 한다는 증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세상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고 있어.
총 몇 자루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조무래기 여럿을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그런 힘을 손에 넣은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일을 행할 자본이 생기게 돼.
그때가 된다면 생각해 봐, 안젤리아.
과연 누구에게 그런 힘을 휘두를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넌 아니지.
그럴지도. 하지만 그런 힘을 만들 수 있는 자가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래서 나는 그런 힘을 만들어내겠어. 그리고 그것을 휘둘러 마땅한 자에게 쥐여 줄 거야.
너는 어때, 안젤리아?
넌 그런 힘을 갖고 싶어?
......
이것은 초대가 아니라 선별이었다. 투기장에 오를 정도로 탐욕스런 자를 가려내기 위한 선별.
......흥.
절대적인 힘이라.
그래, 절대적인 힘.
......
......
아베르누스.
첫 아침 햇살이 아베르누스를 비출 때, 의식은 시작된다.
두 태양은 각자 서로 다른 두 길을 밝히니,
속세로의 길과, 자애로운 아버지로의 길.
신전은 마굴로 변하고, 천칭은 죄악으로 물들어 피를 채우는 제단이 되었도다.
복수의 여신은 보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갈라,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외치노라.
......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으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끌려 내려간다.
그대 태어났을 때 나는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나,
그대 받은 고통 나의 기억에서 지워졌나니.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나는 죽지도 아니하고, 살아있지도 아니하다.
......
......
네메아란 언니,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올가.
내가 돌아오면, 내게 이 문서를 주렴.
예.
......
......
가벼운 벨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고, 네메아란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앞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고 들어가,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전부 아버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아버님의 목소리가 닿고 있습니다.
......
긴 침묵 끝에, 그늘 속의 그 인물이 대답했다.
늙은 것들이 드디어 눈치챘다고?
예. 그 누구도 아버님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이에나처럼 연명하면서 스스로가 고귀한 줄 착각하는 놈들.
시시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뇌속 마지막 뉴런 하나까지 쥐어짜면서, 세상의 미래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아.
아버님은 그들 위에 서시게 될 것입니다.
아니야 네메아란, 난 오직 힘만 있으면 돼.
힘과 권모술수 중에서, 그들은 결국 힘 앞에 머리를 조아릴 테니까.
세상 모든 이를 뛰어넘는 힘을 쥐게 되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세상은 싫어도 경청하게 되거든.
아버님의 힘은 이미 세상을 뒤흔들 관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힘만 있으면, 사람들은 저울질하고, 빼앗으려 들고, 실랑이를 벌이지.
그리고 그 후의 새로운 세계를 부술지, 새롭게 만들지는, 전부 아버님의 뜻에 달립니다.
하하하... 그놈의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
네메아란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보고는 끝났지만, 아직 떠나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가면을 벗었다.
...이리와.
무슨 스위치라도 켜진 듯, 그늘 속의 목소리가 돌연 아주 온화해졌다.
그의 부름에, 네메아란은 걸어가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 앞의 식탁에는 고급스런 음식들이 깨끗한 은쟁반에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에겐 낯설고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지만,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맛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식전 기도를 드리자.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루시.
그녀의 눈빛엔 희미하게나마 자애로움이 비쳤다.
그 자애로운 시선이 향하는 곳, 방의 한구석에는 홀로그램이 서 있었다.
......
......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감고, 서로의 열 손가락을 마주잡았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
조용한 "거실"에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
평범한 가정처럼, 자리의 모두가 식탁에 모여 식사 전 찬미의 기도문을 읊었다.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나는 죽지도 아니하고, 살아있지도 아니하다.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홀로그램이 약간 노이즈 낀 소리를 내며 기도를 끝냈다. 그리고 네메아란은 눈을 떠, 맞은편에 앉은 자와 온화한 눈빛을 교환했다.
...곧, 네가 이길 거란다.
물론이죠... 어머니.
기도가 끝나자마자,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는 더는 못 참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소고기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고, 은제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네가 이 세상을 바꿀 거란다.
물론이에요. 오직...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어요.
어머니... 그리고 누나.
그래... 루시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
조금만 더 참아, 누나...
얼마 안 남았어... 그 미치광이들이 대가를 치를 날이...
......
네메아란은 더는 말하지 않으면서 이 기괴한 광경을 지켜봤다.
이것이 그녀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직책이자, 사명이었다.
......
......
.....
네메아란 언니.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네메아란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대롱거리는 가면 대신 멍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러다 올가의 부름을 듣자,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약간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니?
예...?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단다.
...올가입니다. 언니께서 직접 지어 주신 올가입니다.
올가...
네메아란은 뭔가 떠오른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여기서 기다리라 했니?
예.
네메아란은 재차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올가에게 살짝 다가섰다.
그럼 내게 줄 물건이 있겠지?
예.
어딘가 기묘한 네메아란의 모습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올가는 여태까지 들고 있던 문서를 공손히 내밀었다.
네메아란은 그 문서를 받아, 말없이 그것을 읽었다.
데이터 동기화 시작.
동기화 진행 중...
동기화 완료.
......음.
한참 후, 네메아란은 또 한 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문서를 덮었다.
네메아란 언니...?
올가.
앗...!?
수고 많았다.
네메아란의 차가운 표정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진 올가의 눈에 담긴 마지막 그림이었다.
올가는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으니까.
...일하자꾸나.
파기를 끝낸 문서를 올가의 시체 위에 휙 던지고선, 네메아란은 고개를 들고 곧장 출구로 향했다.
멍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다. 아버님과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이.
여태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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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NUSSR/DDR, 압축 해제.
■기록■ AS, 불러오는 중...
패러데우스의 임시 기지.
늘씬한 몸매의 니토가 휴면 중으로 보이는 한 인형에게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있었느냐, 판도라.
......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RPK-16은 눈을 떴다.
아아, 잘 지냈나요 레이디 그레이.
정말 간만에 아직도 저를 기억하는 손님이군요.
네게 낭비할 시간 없어.
그러시겠죠.
또 부탁할 일이 생겼나요? 이유야 짐작은 가지만.
아니, 너와의 약속을 이행하려 한다.
오오?
RPK-16의 눈이 가늘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잠시 베를린을 포기한다.
곧 너를 기지로 데려갈 사람이 올 거다.
당신들의 기지...
그래, 우리의 진짜 기지.
이제부터 너도 진정한 의미로 우리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지.
그러니 기뻐해라, 판도라.
그렇네요... 정말,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가볍게 눈을 깜빡이며, RPK-16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체 대사 보기 (173줄)
베를린, 소련군 측 세이프하우스.
삐이...
통신 연결.
<color=#00CCFF>이번에는 좀 좋은 소식이길 바라네.</color>
실망시켜서 미안하게 됐군. 결국 놓치고 말았어.
지금까지 우리가 쫓았던 어떤 놈들보다도 끈질겨.
<color=#00CCFF>흐음... 내용은 전달받았네.</color>
<color=#00CCFF>그 여자를 이 일대에서 놓친 것이 분명한가?</color>
맞아.
<color=#00CCFF>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보고할 내용이 있겠지?</color>
하.
이 근방엔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구역이 있더라.
3차대전 시기에 전쟁 폐기물을 투기하던 곳이었지. 지금은 새조차 못 지나가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color=#00CCFF>"블랙존"이다?</color>
틀림없어.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인형은 물론 기갑마저도 거기서 오래 못 버텨.
<color=#00CCFF>......</color>
<color=#00CCFF>아귀가 맞는구먼.</color>
음?
<color=#00CCFF>이쪽에서 내부를 "청소"하던 도중 이름을 하나 들었다네, "아베르누스"라고.</color>
<color=#00CCFF>"지옥의 입구". 그 죽음의 바다란 곳과 수상하게 어울리는 이름이란 생각 안 드나?</color>
...그렇군.
그렇다면 그 여자가 이 근방에서 종적을 감춘 걸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어.
<color=#00CCFF>희소식을 기다리겠네.</color>
삐이.
통신 종료.
......
......
안젤리아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발은 몰라도 손이 뒤로 묶인 상태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퉁.
퉁.
퉁.
얼마나 지났을까, 환하게 주위를 밝히는 등불이 멀리서부터 차례대로 꺼졌다.
마치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다가온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등불이 꺼지는 소리는 넓은 복도로부터 방으로 메아리쳐 리듬감 있게 가슴을 두드렸다.
...폼 잡기는.
가장 처음 난 소리에 흠칫했을 뿐, 안젤리아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들어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까.
후우...
이윽고, 주위의 소리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퉁.
강렬한 빛줄기가 안젤리아의 얼굴을 비추어, 그녀의 가려진 시야까지 희미한 분홍색으로 밝아졌다.
낯선 기척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느껴졌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입을 제외하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
...누구야.
먼저 입을 열어 떠보았는데도 묵묵부답인 점이 오히려 안젤리아의 추측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다만...
비록 만나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자신의 코앞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안녕하신가, 안젤리아.
나는 네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다. 계속 "윌리엄"이라 불러도 돼.
......
변성기가 온 소년 특유의 목소리.
안젤리아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음성 변조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쳐서일까, 그녀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확신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너무 젊은 수준을 넘어, 어리다는 것이었다.
네 진짜 이름 아니잖아.
진짜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야? 그저 호칭, 별명, 코드네임에 불과한데.
너만 좋다면 날 다르게 불러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리고 중요한 건 내 이름이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여기에 초대한 이유야, 안젤리아.
너랑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
이게 간단한 대화나 하자고 사람 불러다 놓은 꼴이냐?
안젤리아가 몸에 힘을 줬지만, 당연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물론이지, 우리가 공평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인걸.
공평 좋아하네... 내가 네 머리통이라도 쥐어 터뜨릴까 봐 겁나?
그럴 리가. 그건 내가 아니라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솔직해지자고, 네가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
그래도 물어는 보자.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지? 네 친구의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그 얄팍한 정의를 위해서인가?
내가 그런 사적인 이유로 널 찾아다닌 줄 알아?
네 손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세어나 봤냐? 그런 것까지 얄팍하다 하면 세상에 뭐가 중요한데?
그래 그래 잘나셨어, 정의의 사도님.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안 해봤어? 난 그저 무기상일 뿐이라고.
내가 이런 무기를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려 들어. 돌멩이와 몽둥이를 써서라도 말이야.
지는 죄가 없다는 듯이 말하네.
적어도 네가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은 점점 엉망진창이 될 뿐이란 건 객관적인 사실이야.
객관적이라... 진짜 객관적인 사실은, 네가 성공하더라도... 그러니까, "윌리엄"이 죽어 패러데우스가 사라지더라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이 세상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든 만악의 근원이 정말 나라고 생각해?
날 왜 산 채로 잡아왔나 했더니 그딴 자기 변호나 들려주려고였어? 그렇게 앳된 목소리라도 그건 좀 너무 유치하지 않냐?
바로 그거야, 뭐라 반박해야 할지 더는 안 떠오르지?
네가 그런 말로 대꾸했을 때에야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지.
......
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너도 알고 있어.
이 세상이 병든 원인은 내가 아니란 걸.
이 세상을... 이 세상의 권력 구조, 지금 세상의 흐름을 지배하려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세상이 썩어 들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이야.
......
떠오르는 사람 있지?
하긴, 예시가 차고 넘치니.
그 인간들. 그 정치인들. 세상을 쥐고 흔들면서,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 좇는 놈들.
그런데 너처럼 투지 넘치는 의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나 같은 일개 과학자나 뒤쫓으면서, 정작 그런 놈들은 못 본 척하지.
그런 걸 두고 정말 "정의"라 할 수 있을까?
그러는 너는 왜 그런 정의감을 안 보이고 그 정치인들이랑 줄다리기하다 흉기를 홀라당 넘겨 줬대?
그게 우리가 다른 점이야.
출발점은 같았지만, 너는 무력을 행사했고 나는 기술을 연구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도 나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지... 그래, 이게 잘못됐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런 아이러니가 바로 이 세상이 변해야만 한다는 증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세상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고 있어.
총 몇 자루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조무래기 여럿을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그런 힘을 손에 넣은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일을 행할 자본이 생기게 돼.
그때가 된다면 생각해 봐, 안젤리아.
과연 누구에게 그런 힘을 휘두를 자격이 있을까?
적어도 넌 아니지.
그럴지도. 하지만 그런 힘을 만들 수 있는 자가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래서 나는 그런 힘을 만들어내겠어. 그리고 그것을 휘둘러 마땅한 자에게 쥐여 줄 거야.
너는 어때, 안젤리아?
넌 그런 힘을 갖고 싶어?
......
이것은 초대가 아니라 선별이었다. 투기장에 오를 정도로 탐욕스런 자를 가려내기 위한 선별.
......흥.
절대적인 힘이라.
그래, 절대적인 힘.
......
......
아베르누스.
첫 아침 햇살이 아베르누스를 비출 때, 의식은 시작된다.
두 태양은 각자 서로 다른 두 길을 밝히니,
속세로의 길과, 자애로운 아버지로의 길.
신전은 마굴로 변하고, 천칭은 죄악으로 물들어 피를 채우는 제단이 되었도다.
복수의 여신은 보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갈라,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외치노라.
......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 올바른 길을 잃으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끌려 내려간다.
그대 태어났을 때 나는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나,
그대 받은 고통 나의 기억에서 지워졌나니.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나는 죽지도 아니하고, 살아있지도 아니하다.
......
......
네메아란 언니,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올가.
내가 돌아오면, 내게 이 문서를 주렴.
예.
......
......
가벼운 벨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고, 네메아란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앞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고 들어가,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전부 아버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아버님의 목소리가 닿고 있습니다.
......
긴 침묵 끝에, 그늘 속의 그 인물이 대답했다.
늙은 것들이 드디어 눈치챘다고?
예. 그 누구도 아버님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이에나처럼 연명하면서 스스로가 고귀한 줄 착각하는 놈들.
시시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뇌속 마지막 뉴런 하나까지 쥐어짜면서, 세상의 미래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아.
아버님은 그들 위에 서시게 될 것입니다.
아니야 네메아란, 난 오직 힘만 있으면 돼.
힘과 권모술수 중에서, 그들은 결국 힘 앞에 머리를 조아릴 테니까.
세상 모든 이를 뛰어넘는 힘을 쥐게 되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세상은 싫어도 경청하게 되거든.
아버님의 힘은 이미 세상을 뒤흔들 관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힘만 있으면, 사람들은 저울질하고, 빼앗으려 들고, 실랑이를 벌이지.
그리고 그 후의 새로운 세계를 부술지, 새롭게 만들지는, 전부 아버님의 뜻에 달립니다.
하하하... 그놈의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
네메아란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보고는 끝났지만, 아직 떠나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가면을 벗었다.
...이리와.
무슨 스위치라도 켜진 듯, 그늘 속의 목소리가 돌연 아주 온화해졌다.
그의 부름에, 네메아란은 걸어가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 앞의 식탁에는 고급스런 음식들이 깨끗한 은쟁반에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그녀에겐 낯설고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지만,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맛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식전 기도를 드리자.
나를 거쳐 번뇌의 성으로,
나를 거쳐 극락의 탑으로,
나를 거쳐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갈지어니.
루시.
그녀의 눈빛엔 희미하게나마 자애로움이 비쳤다.
그 자애로운 시선이 향하는 곳, 방의 한구석에는 홀로그램이 서 있었다.
......
......
정의로 창조주는 움직이시어,
전능하신 힘과 지고하신 지혜,
원초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도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감고, 서로의 열 손가락을 마주잡았다.
나 이전에 태어난 것 없었으며,
나 영원히 존재하리.
......
조용한 "거실"에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
평범한 가정처럼, 자리의 모두가 식탁에 모여 식사 전 찬미의 기도문을 읊었다.
우리는 함께하리라.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저주도 축복도 받지 아니하매. 나는 죽지도 아니하고, 살아있지도 아니하다.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게 하시어,
사랑이 우리를 함께 죽게 하리라.
홀로그램이 약간 노이즈 낀 소리를 내며 기도를 끝냈다. 그리고 네메아란은 눈을 떠, 맞은편에 앉은 자와 온화한 눈빛을 교환했다.
...곧, 네가 이길 거란다.
물론이죠... 어머니.
기도가 끝나자마자,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는 더는 못 참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소고기 스테이크를 자르기 시작했고, 은제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네가 이 세상을 바꿀 거란다.
물론이에요. 오직...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어요.
어머니... 그리고 누나.
그래... 루시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
조금만 더 참아, 누나...
얼마 안 남았어... 그 미치광이들이 대가를 치를 날이...
......
네메아란은 더는 말하지 않으면서 이 기괴한 광경을 지켜봤다.
이것이 그녀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직책이자, 사명이었다.
......
......
.....
네메아란 언니.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네메아란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대롱거리는 가면 대신 멍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러다 올가의 부름을 듣자,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약간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니?
예...?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단다.
...올가입니다. 언니께서 직접 지어 주신 올가입니다.
올가...
네메아란은 뭔가 떠오른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여기서 기다리라 했니?
예.
네메아란은 재차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올가에게 살짝 다가섰다.
그럼 내게 줄 물건이 있겠지?
예.
어딘가 기묘한 네메아란의 모습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올가는 여태까지 들고 있던 문서를 공손히 내밀었다.
네메아란은 그 문서를 받아, 말없이 그것을 읽었다.
데이터 동기화 시작.
동기화 진행 중...
동기화 완료.
......음.
한참 후, 네메아란은 또 한 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문서를 덮었다.
네메아란 언니...?
올가.
앗...!?
수고 많았다.
네메아란의 차가운 표정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진 올가의 눈에 담긴 마지막 그림이었다.
올가는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으니까.
...일하자꾸나.
파기를 끝낸 문서를 올가의 시체 위에 휙 던지고선, 네메아란은 고개를 들고 곧장 출구로 향했다.
멍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다. 아버님과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이.
여태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래왔던 것처럼.
Loading...
■기록■ NUSSR/DDR, 압축 해제.
■기록■ AS, 불러오는 중...
패러데우스의 임시 기지.
늘씬한 몸매의 니토가 휴면 중으로 보이는 한 인형에게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있었느냐, 판도라.
......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RPK-16은 눈을 떴다.
아아, 잘 지냈나요 레이디 그레이.
정말 간만에 아직도 저를 기억하는 손님이군요.
네게 낭비할 시간 없어.
그러시겠죠.
또 부탁할 일이 생겼나요? 이유야 짐작은 가지만.
아니, 너와의 약속을 이행하려 한다.
오오?
RPK-16의 눈이 가늘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잠시 베를린을 포기한다.
곧 너를 기지로 데려갈 사람이 올 거다.
당신들의 기지...
그래, 우리의 진짜 기지.
이제부터 너도 진정한 의미로 우리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지.
그러니 기뻐해라, 판도라.
그렇네요... 정말,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가볍게 눈을 깜빡이며, RPK-16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