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광 I
"저는 이해받을 필요 없고, 용서받을 필요도 없어요."
타타탕! 타타탕!
대기를 가르는 총탄들이 그레이의 꼬리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말 그대로 온갖 방향에서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꼬리로 모조리 손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총알을 아끼는 게 어떠냐.
헹!
SOP2가 그레이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녀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한 방 한 방 더 큰 공격을 퍼부었다.
물론 그레이도 양손의 칼날을 아끼지 않고 휘둘렀지만, 계속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칫...
SOP의 몸놀림은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날렵하고 매서워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레이도 여유를 조금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새 내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건가.
SOP2!
이야아압!!
그레이가 아주 잠깐 주춤하는 것을 포착한 RO635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SOP2는 곧장 팔을 잡아 뜯으려는 듯 그레이에게 돌진했다.
채앵!
SOP2의 돌격을 가까스로 튕겨냈지만, 그레이의 팔뚝엔 SOP2가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발전이 빠르구나.
찢을 때 비명 지르게 목청은 아껴 두라고!
하하하...
SOP2, 거리 조금 벌려.
오케이!
SOP2에게 움직임이 파훼당하자 그레이도 저번보다는 여유가 없어졌음이 RO635의 눈에도 잘 보였다.
하지만 체력 소모는 그레이보다 SOP2가 훨씬 심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오래 못 갈 터였다.
체력을 아껴야 해.
괜찮아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여전히 기세등등한 SOP2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쪽을 노려보는 RO635. 이들을 주시하는 그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희와 놀아 주는 것도 나름 재미있지만, 시간이 없구나.
나중에 다시 보자, 귀여운 강아지들.
내 손에 죽어야지 어딜 도망가!!
그레이가 SOP2의 공격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건물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SOP2! 침착――
쿠구구궁!!
그리고 그 잔해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SOP2의 머리 위로.
SOP2!! 유니콘! 도와줘!
알았어!
SOP2!! 대답해!
RO635는 황급히 달려가 잔해 더미를 파헤치면서 SOP2를 찾았다.
UMP45와 UMP9도 바로 와 그녀를 도왔다.
다행히도, 폐허 전체가 오랜 시간 동안 붕괴 입자에 침식된 탓에 무너진 잔해 더미는 전혀 콘크리트답지 않게 바스라졌다.
후우... 괜찮아?
캬아아악 퉷퉷퉷!
저 비겁한 자시이익!! 입에 모래 잔뜩 들어갔잖아!!
그래도 방금 달려들 때 포즈 엄청 멋졌어!
RO, 그레이의 신호가 사라졌어.
...네.
삐익.
아이네이아스 작전 회의실에서 통신이 왔다.
여기는 질소. 1차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발견한 것 있나요?
조금 전 몰리도의 흔적을 포착해 추적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철분을 보내겠습니다.
우산과 유니콘은 방금 목표 중 하나인 그레이와 조우해 교전했으나 놓쳤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깔끔하게 통신이 끝났다.
슈타지의 인형들, 대단한걸? J 같은 사람에 비하면 쟤넨...
후훗, 앞으로도 이렇게 기분 좋게 협력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겠지! 그치 RO?
......
응, 분명 그럴 거야.
RO635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절대, 지휘관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재정비한 후, RO635 일행은 탐지기에 표시되는 좌표를 따라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
............
어둠.
안젤리아는 자신이 더러운 흙탕물에 몸이 잠긴 채로 얼마나 오래 잠들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전장에서 너무 오래 벗어나, 그녀의 신경에 감겨 있던 지옥 같은 비명과 총성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지옥 같은 고요함이 그녀를 덮쳤다.
이젠 이 어둠 속에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
......
부스럭...
그때, 적막한 어둠 너머에서 희미하게 기척이 났다.
안젤리아는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무슨 무거운 물건에라도 깔린 듯 눈꺼풀마저 꿈쩍도 안 했다.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녀를 잘 돌보세요, 콜레다. 이제 그녀는 당신들 것이에요.
RPK-16의 목소리.
누구와 대화하는 거지?
...알았어.
치마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고막을 찔렀다.
이러면 안심할 수 있죠?
너...
이런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
다행히도, 저는 용서받을 필요가 없답니다.
이 목소리는...?
......
안젤리아.
그 낯선 목소리가 안젤리아를 가볍게 불러, 어둠 속에 갇혔던 그녀의 의식에 틈새를 열었다.
바늘 같은 통증이 신경을 자극했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안젤리아는 온몸의 힘과 정신력을 눈꺼풀에 모았다.
정말 오랜만에 동공에 빛이 들어왔고, 이제는 익숙해진 투명 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누더기 옷을 입은, 마치 버려진 이성질체와 같아 보이는 니토가 안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니토는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지금 이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반가워. 내 이름은 콜레다. 오늘부터 내가 너를 돌보게 됐어.
...저번의 그 깡패 니토는?
......
그녀에겐 다른 일이 생겼어.
눈앞의 니토는 부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안젤리아는 멍든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은근히 비웃는 투로 입꼬리를 올렸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
이곳에 감금된 이후로, 안젤리아는 시간 개념을 상실했다.
이렇게 왼팔은 머리 뒤로, 오른팔은 허리 뒤로 고정된 채 허공에 매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특제 구속복에, 발목에는 족쇄까지 채워져 있어 몸이 마치 조각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만약 지금까지 그녀를 담당하던 니토가 툭하면 구타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전신의 감각을 상실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치료를 할게.
"콜레다"라는 이름의 니토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와, 차가운 약물을 밖으로 드러난 안젤리아의 상처에 발랐다.
......
......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내내, 콜레다는 그저 안젤리아의 상처를 부드럽게 처치했다.
...끝났어. 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안젤리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니토가, 자신이 코앞에서 더티밤을 터뜨렸을 때 생긴 상처에 손을 댈 때마다 더욱 조심스러워한 것을.
온갖 상처와 흉터로 이젠 겉으로 봐서는 구분이 가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게 정확히 어디인지 안다고?
너... 누구야?
......
안젤리아...
......
그 살며시 부르는 목소리에, 안젤리아는 인상을 쓰며 방금까지만 해도 관심도 안 가졌던 니토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니토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
나는 콜레다야.
두꺼운 강화 유리 너머로, 어안이 벙벙한 안젤리아의 얼굴이 콜레다의 눈동자에 비쳤다.
......
벤치에 앉은 니토들의 경건한 노래는 그들 앞 조각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빛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앞에는 하얀 예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RPK-16은 소리 없이 그 여인에게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그녀가 왔음을 모두가 알았지만,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
하얀 예복의 여인이 옆의 니토에게 눈짓을 주자, 그 니토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에서 걸어 나와 RPK-16의 앞에 섰다.
나는 애슐리다. 따라와라.
네에~
RPK-16는 미소를 지으며 안내하는 니토를 따라 예배당을 나왔다.
안젤리아는 잘 두었어?
그럼요.
네메아란 언니는 너를 높이 사는 모양이다.
그레이 언니보다 일처리가 깔끔하다시면서.
과찬이네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우리는 뛰어난 자에게 마땅한 상을 내린다.
너의 꿈, 패러데우스가 이루어 주겠다.
...고맙기도 하셔라.
이쪽으로.
RPK-16는 뒤를 따랐다.
특유의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 니토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
베를린 시외, 정적이 감도는 폐허의 어딘가.
세 인형이 조용히 페허가 드리우는 그림자 안에 쪼그려 앉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흔적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혹시 모를 목표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나는 뒤의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전진".
......
......
수신호를 받은 두 인형들은 엄폐를 유지하면서 목표에 조금 더 접근했다.
한편, 모나는 좁은 범위의 부대용 통신을 켰다.
신호 차폐 주의.
라저.
적은 이 건물 안에 있어.
네, 방금 스캔했습니다. 비록 잡졸들뿐이나, 저희만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목표 추적이니 불필요한 마찰은 피하세요.
잔해 뒤에 숨은 인형들이 석상처럼 요지부동하던, 그때였다.
주의. 목표 출현.
추적기 신호와 일치함을 확인. 목표 몰리도를 포착.
그 옆에 엄청 강해 보이는 녀석이 있는데?
저 자가 틸입니다. 우산 팀이 공유한 정보에 따르면 검술이 뛰어나 절대 근접전을 벌여선 안 됩니다.
생긴 걸 봐서는 고속전이 특기겠네. 확실히 성가신 타입이야.
......
질소 팀이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패러데우스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틸은 몰리도를 부축하면서 전방의 무너져 가는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점점 인형들의 가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모나는 다시 수신호로 쫓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다시금 거리를 좁히자, 시야의 사각지대에 가려졌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저거, 수송 차량 아니야?!
이런... 차량으로 도주할 셈이에요!
타이어 터뜨릴까?
안 됩니다. 발각돼선 안 돼요.
더 가까이엔 엄폐물이 없어 이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질소 팀은 그저 몰리도가 차에 오르는 것을 눈뜨고 두고볼 수밖에 없었다.
모나는 급히 아이네이아스 작전 회의실에 접속했다.
우산, 여기는 질소. 목표 몰리도를 포착했습니다.
지금 패러데우스의 수송 차량에 탑승해 도주하려 하는데, 발각되지 않고는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우산 수신. 무리하지 말고 추적기의 신호만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만 거리를 유지하세요.
알겠습니다.
현재 철분도 지원하러 그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네, 중화기 지원이 있다면 저희...도...?
모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통신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린 그 찰나에, 방금까지만 해도 저기 서 있었던 하얀 옷의 니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틸이 어디 갔죠?
어... 분명 저기 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부웅――
진동하며 울부짖는 장도의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그 하얀 섬광이 그들 눈앞에 닥친 뒤였다.
채앵——!!
하지만 정말 간발의 차로, 9호가 동료들을 감싸면서 가까스로 이 기습을 막아냈다.
빠르다...!
9호가 충격의 여운에서 벗어났을 때, 이미 고지에 착지한 하얀 옷의 검사는 무표정으로 검을 털어냈다.
저 괴물에 맞서, 질소 팀의 세 인형들은 당황하지 않고 호흡을 맞춰 각자 위치를 잡았다.
질소 팀, 영격 준비!
전체 대사 보기 (148줄)
타타탕! 타타탕!
대기를 가르는 총탄들이 그레이의 꼬리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말 그대로 온갖 방향에서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꼬리로 모조리 손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총알을 아끼는 게 어떠냐.
헹!
SOP2가 그레이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녀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한 방 한 방 더 큰 공격을 퍼부었다.
물론 그레이도 양손의 칼날을 아끼지 않고 휘둘렀지만, 계속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칫...
SOP의 몸놀림은 그레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날렵하고 매서워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레이도 여유를 조금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새 내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건가.
SOP2!
<size=50>이야아압!!</size>
그레이가 아주 잠깐 주춤하는 것을 포착한 RO635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SOP2는 곧장 팔을 잡아 뜯으려는 듯 그레이에게 돌진했다.
채앵!
SOP2의 돌격을 가까스로 튕겨냈지만, 그레이의 팔뚝엔 SOP2가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발전이 빠르구나.
찢을 때 비명 지르게 목청은 아껴 두라고!
하하하...
SOP2, 거리 조금 벌려.
오케이!
SOP2에게 움직임이 파훼당하자 그레이도 저번보다는 여유가 없어졌음이 RO635의 눈에도 잘 보였다.
하지만 체력 소모는 그레이보다 SOP2가 훨씬 심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오래 못 갈 터였다.
체력을 아껴야 해.
괜찮아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여전히 기세등등한 SOP2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쪽을 노려보는 RO635. 이들을 주시하는 그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희와 놀아 주는 것도 나름 재미있지만, 시간이 없구나.
나중에 다시 보자, 귀여운 강아지들.
<size=50>내 손에 죽어야지 어딜 도망가!!</size>
그레이가 SOP2의 공격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건물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SOP2! 침착――
<size=50>쿠구구궁!!</size>
그리고 그 잔해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SOP2의 머리 위로.
SOP2!! 유니콘! 도와줘!
<color=#00CCFF>알았어!</color>
SOP2!! 대답해!
RO635는 황급히 달려가 잔해 더미를 파헤치면서 SOP2를 찾았다.
UMP45와 UMP9도 바로 와 그녀를 도왔다.
다행히도, 폐허 전체가 오랜 시간 동안 붕괴 입자에 침식된 탓에 무너진 잔해 더미는 전혀 콘크리트답지 않게 바스라졌다.
후우... 괜찮아?
<size=50>캬아아악 퉷퉷퉷!</size>
저 비겁한 자시이익!! 입에 모래 잔뜩 들어갔잖아!!
그래도 방금 달려들 때 포즈 엄청 멋졌어!
RO, 그레이의 신호가 사라졌어.
...네.
삐익.
아이네이아스 작전 회의실에서 통신이 왔다.
<color=#00CCFF>여기는 질소. 1차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color>
발견한 것 있나요?
<color=#00CCFF>조금 전 몰리도의 흔적을 포착해 추적 중입니다.</color>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철분을 보내겠습니다.
우산과 유니콘은 방금 목표 중 하나인 그레이와 조우해 교전했으나 놓쳤습니다.
<color=#00CCFF>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color>
깔끔하게 통신이 끝났다.
슈타지의 인형들, 대단한걸? J 같은 사람에 비하면 쟤넨...
후훗, 앞으로도 이렇게 기분 좋게 협력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겠지! 그치 RO?
......
응, 분명 그럴 거야.
RO635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color=#A9A9A9>절대, 지휘관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어요.</color>
재정비한 후, RO635 일행은 탐지기에 표시되는 좌표를 따라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
............
어둠.
안젤리아는 자신이 더러운 흙탕물에 몸이 잠긴 채로 얼마나 오래 잠들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전장에서 너무 오래 벗어나, 그녀의 신경에 감겨 있던 지옥 같은 비명과 총성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지옥 같은 고요함이 그녀를 덮쳤다.
이젠 이 어둠 속에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
......
부스럭...
그때, 적막한 어둠 너머에서 희미하게 기척이 났다.
안젤리아는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무슨 무거운 물건에라도 깔린 듯 눈꺼풀마저 꿈쩍도 안 했다.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녀를 잘 돌보세요, 콜레다. 이제 그녀는 당신들 것이에요.
RPK-16의 목소리.
누구와 대화하는 거지?
...알았어.
치마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고막을 찔렀다.
이러면 안심할 수 있죠?
너...
이런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
다행히도, 저는 용서받을 필요가 없답니다.
이 목소리는...?
......
안젤리아.
그 낯선 목소리가 안젤리아를 가볍게 불러, 어둠 속에 갇혔던 그녀의 의식에 틈새를 열었다.
바늘 같은 통증이 신경을 자극했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안젤리아는 온몸의 힘과 정신력을 눈꺼풀에 모았다.
정말 오랜만에 동공에 빛이 들어왔고, 이제는 익숙해진 투명 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누더기 옷을 입은, 마치 버려진 이성질체와 같아 보이는 니토가 안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니토는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지금 이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반가워. 내 이름은 콜레다. 오늘부터 내가 너를 돌보게 됐어.
...저번의 그 깡패 니토는?
......
그녀에겐 다른 일이 생겼어.
눈앞의 니토는 부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안젤리아는 멍든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은근히 비웃는 투로 입꼬리를 올렸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
이곳에 감금된 이후로, 안젤리아는 시간 개념을 상실했다.
이렇게 왼팔은 머리 뒤로, 오른팔은 허리 뒤로 고정된 채 허공에 매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특제 구속복에, 발목에는 족쇄까지 채워져 있어 몸이 마치 조각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만약 지금까지 그녀를 담당하던 니토가 툭하면 구타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전신의 감각을 상실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치료를 할게.
"콜레다"라는 이름의 니토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와, 차가운 약물을 밖으로 드러난 안젤리아의 상처에 발랐다.
......
......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내내, 콜레다는 그저 안젤리아의 상처를 부드럽게 처치했다.
...끝났어. 나는 이만 갈게.
기다려.
안젤리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니토가, 자신이 코앞에서 더티밤을 터뜨렸을 때 생긴 상처에 손을 댈 때마다 더욱 조심스러워한 것을.
온갖 상처와 흉터로 이젠 겉으로 봐서는 구분이 가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게 정확히 어디인지 안다고?
너... 누구야?
......
안젤리아...
......
그 살며시 부르는 목소리에, 안젤리아는 인상을 쓰며 방금까지만 해도 관심도 안 가졌던 니토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니토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
나는 콜레다야.
두꺼운 강화 유리 너머로, 어안이 벙벙한 안젤리아의 얼굴이 콜레다의 눈동자에 비쳤다.
......
벤치에 앉은 니토들의 경건한 노래는 그들 앞 조각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빛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앞에는 하얀 예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RPK-16은 소리 없이 그 여인에게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그녀가 왔음을 모두가 알았지만,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
하얀 예복의 여인이 옆의 니토에게 눈짓을 주자, 그 니토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에서 걸어 나와 RPK-16의 앞에 섰다.
나는 애슐리다. 따라와라.
네에~
RPK-16는 미소를 지으며 안내하는 니토를 따라 예배당을 나왔다.
안젤리아는 잘 두었어?
그럼요.
네메아란 언니는 너를 높이 사는 모양이다.
그레이 언니보다 일처리가 깔끔하다시면서.
과찬이네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우리는 뛰어난 자에게 마땅한 상을 내린다.
너의 꿈, 패러데우스가 이루어 주겠다.
...고맙기도 하셔라.
이쪽으로.
RPK-16는 뒤를 따랐다.
특유의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 니토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
베를린 시외, 정적이 감도는 폐허의 어딘가.
세 인형이 조용히 페허가 드리우는 그림자 안에 쪼그려 앉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흔적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혹시 모를 목표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나는 뒤의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전진".
......
......
수신호를 받은 두 인형들은 엄폐를 유지하면서 목표에 조금 더 접근했다.
한편, 모나는 좁은 범위의 부대용 통신을 켰다.
<color=#00CCFF>신호 차폐 주의.</color>
<color=#00CCFF>라저.</color>
<color=#00CCFF>적은 이 건물 안에 있어.</color>
<color=#00CCFF>네, 방금 스캔했습니다. 비록 잡졸들뿐이나, 저희만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한 숫자입니다.</color>
<color=#00CCFF>우리의 임무는 목표 추적이니 불필요한 마찰은 피하세요.</color>
잔해 뒤에 숨은 인형들이 석상처럼 요지부동하던, 그때였다.
<color=#00CCFF>주의. 목표 출현.</color>
<color=#00CCFF>추적기 신호와 일치함을 확인. 목표 몰리도를 포착.</color>
<color=#00CCFF>그 옆에 엄청 강해 보이는 녀석이 있는데?</color>
<color=#00CCFF>저 자가 틸입니다. 우산 팀이 공유한 정보에 따르면 검술이 뛰어나 절대 근접전을 벌여선 안 됩니다.</color>
<color=#00CCFF>생긴 걸 봐서는 고속전이 특기겠네. 확실히 성가신 타입이야.</color>
<color=#00CCFF>......</color>
질소 팀이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패러데우스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틸은 몰리도를 부축하면서 전방의 무너져 가는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점점 인형들의 가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모나는 다시 수신호로 쫓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다시금 거리를 좁히자, 시야의 사각지대에 가려졌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color=#00CCFF>뭐야 저거, 수송 차량 아니야?!</color>
<color=#00CCFF>이런... 차량으로 도주할 셈이에요!</color>
<color=#00CCFF>타이어 터뜨릴까?</color>
<color=#00CCFF>안 됩니다. 발각돼선 안 돼요.</color>
더 가까이엔 엄폐물이 없어 이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질소 팀은 그저 몰리도가 차에 오르는 것을 눈뜨고 두고볼 수밖에 없었다.
모나는 급히 아이네이아스 작전 회의실에 접속했다.
우산, 여기는 질소. 목표 몰리도를 포착했습니다.
지금 패러데우스의 수송 차량에 탑승해 도주하려 하는데, 발각되지 않고는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color=#00CCFF>우산 수신. 무리하지 말고 추적기의 신호만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만 거리를 유지하세요.</color>
알겠습니다.
<color=#00CCFF>현재 철분도 지원하러 그쪽으로 이동 중입니다.</color>
네, 중화기 지원이 있다면 저희...도...?
모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통신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린 그 찰나에, 방금까지만 해도 저기 서 있었던 하얀 옷의 니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틸이 어디 갔죠?
어... 분명 저기 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부웅――
진동하며 울부짖는 장도의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그 하얀 섬광이 그들 눈앞에 닥친 뒤였다.
<size=50>채앵——!!</size>
하지만 정말 간발의 차로, 9호가 동료들을 감싸면서 가까스로 이 기습을 막아냈다.
빠르다...!
9호가 충격의 여운에서 벗어났을 때, 이미 고지에 착지한 하얀 옷의 검사는 무표정으로 검을 털어냈다.
저 괴물에 맞서, 질소 팀의 세 인형들은 당황하지 않고 호흡을 맞춰 각자 위치를 잡았다.
질소 팀, 영격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