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전 그 누구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아직 구할 수 있다 판단되는 한, 절대로."
베를린, 공항 근처의 임시 세이프하우스.
크루거와 연락이 두절된 지휘관은 다시 초조해하며 방을 서성였다.
그리고 방 안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카이바르한테 "훈작사"에게 연락하라고 해 줘.
네.
잠시 후.
삑.
마침 연락하려던 참이었네, 지휘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크루거 씨와 모두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당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진정하게, 나도 그 일 때문에 연락하려던 거였으니.
그건 단지,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라네.
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을 뿐이야.
이미 해결했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해결...했다고요...?
지휘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안도감에 목소리도 풀려버렸다.
그래, 바로 마땅한 대우를 받게 할 수 있네.
다만... 우리가 조금 양보를 해야 해.
...양보? 무슨 양보 말입니까?
지금 자네가 하는 것을 전부 중지하게.
하는 것을 중지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휘관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금 훈작사의 말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조사에 진전이 생겼습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게 크루거 씨, 헬리안 씨가 연행된 일과 무슨 관계가 있죠?
내 자네가 얼마나 안젤리아를 구출하고 싶은지는 이해하네만, 세상 어떤 일이든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네.
이 세상은 질서라는 지팡이에 기대어 움직이지. 함부로 규칙을 어기고, 충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이길 수 없어.
강인한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네.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크루거를 비롯한 모두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자네가 포기해야 할 것이 있네. 등가교환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안젤리아 씨를요?
부득이하게 무엇을 희생할지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잖은가.
어른으로서 마주해야 할 잔혹한 현실이지만 말일세.
또... 또 저희를 가지고 거래했다는 겁니까!?
지휘관, 자네가 그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네. 물론 자네 탓은 아니야.
하지만, 어떤 일이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보는 법도, 자네는 배워야 해...
이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결과일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는 없어.
그 말씀은 벌써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지금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고생하고, 손해만 보면서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야 겨우 기회가 바로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를 어딘가의 "승리"를 위해 그걸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누구든 희생될 수 있네.
더군다나 안젤리아는 요원일세, 그 정도 각오는 한 몸이야. 설마 자네는 안젤리아의 목숨이 크루거와 G&K보다 중요하다 여기는 건가?
그래요, 누구라도 희생될 수는 있죠...
하지만 왜 하필 안젤리아 씨입니까?
누가 희생하냐는 중요치 않아. 누가 됐든 마찬가지네.
당신에겐 누구를 희생시킬지 정할 자격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고집부리지 말게, 지휘관.
지금 기지와 동료를 잃은 저에게 고집 부리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당장 하던 일을 전부 중지하게, 크루거는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지휘관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절합니다.
......
크루거와 G&K를 포기하겠단 말인가?
아니오. 전 그 누구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아직 구할 수 있다 판단되는 한, 절대로.
지휘관 나는 지금 자네와 협상하려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
삑.
통신이 끊어졌다.
엑... 지휘관?
지휘관, 지금 우리 회사 CEO의 통화를 끊어버렸어요.
그것도 저쪽이 슬슬 화내려는 타이밍에.
......
...그런 것 같네.
아니, 예기치 못한 사고였어. 신호 불량은 늘상 있는 일이잖아?
...웬일로 네가 나랑 생각이 비슷하냐.
......
지휘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멈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휘관님,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에서 통신 요청입니다.
아이네이아스 회의실.
회의실 중앙에 떠 있는 거대한 전술 보드에 위치가 표시되는 각 작전팀들은 지휘관의 배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각 팀을 대표하는 색상 가까이서,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의 구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블랙존, "죽음의 바다".
모두 모였지?
네, 모두의 정보를 통합했습니다. 질소와 철분이 먼저 합류해 "죽음의 바다"로 돌입합니다.
우산, 유니콘, 체스 마스터는 뒤이어서 진입합니다.
두려움, 불안감, 긴장감이 한데 섞인 시선들이 철분과 질소 팀에게 모였다.
미리 건투를 빈다.
다만 "죽음의 바다"로 직접 발을 들이기 전에, 경험과 이전의 정보를 결합해 블랙존 내부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간단한 긴급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저희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현재 우리 데이터베이스에서 블랙존에 가장 가까웠던 상황은...
......아.
왜 그러죠?
그게... 저희가 경험한 상황 중 블랙존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안젤리아 씨가 더티밤을 터뜨렸던 그 지역에서의 기록이라서...
......
잠시만요, 안젤리아 씨는 이번의 구출 목표 아닙니까? 그녀가 직접 더티밤을 터뜨리고, 거기서 살아남았단 말인가요? 인간의 몸으로?
맞아.
......
더티밤은 폭발하면서 반경 500m 내의 모든 사물을 증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일대의 오염도는 바로 블랙존이 되어, 대기 중에 붕괴 입자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죠.
붕괴 입자는 통신을 비롯한 온갖 신호를 극도로 교란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통신을 위해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을 제작한 것이니 통신 장애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장시간 붕괴 복사에 노출되는 것은 인형 소체도 위험하므로 우리 모두 특수 항붕괴 입자 처리를 받았습니다만... 블랙존급 붕괴 복사에는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회의실의 모두는 더티밤 폭발 후에 펼쳐진 세상의 종말 같은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완전 외계 행성 같은 광경이야.
......
곧 우리가 마주할 광경이죠.
어떤 기척도 없고, 생명체도 없으며, 오직 걸쭉하게 느껴질 정도로 붕괴 입자 농도가 짙은 대기만이 있는 곳이에요.
모래폭풍 속에서 길을 헤매던 때가 떠오르는걸.
꽤 적절한 비유네.
복사 방호에 주의하고, 유사 시 즉각 채널로 보고하세요.
알겠습니다.
레드존과 블랙존의 경계선.
이제부터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생각하니, 질소 팀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온갖 비밀이 숨겨진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아, 맞나?
나도 진짜 블랙존 안으로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대비 연습이나 모의 훈련 같은 건 해봤지만, 역시... 진짜는 압박감부터가 다르네.
많이 돌아다녔대서 블랙존도 가본 줄 알았더니?
넌 출고된 지 그리 오래는 안 돼서 아직 많이 못 돌아다녀봤지? 좀만 지나면 나 못지않게 많은 곳을 가보게 될지도 몰라, 기대하라고.
하지만 세상 어디든, 블랙존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금기의 땅이죠.
하긴, 나도 블랙존에 들어가는 임무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다만...
다만?
딱 한 번, ELID 소탕 임무 도중 사고로 대열에서 이탈한 적이 있거든?
그때 실수로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블랙존의 변두리까지 간 적이... 있었지...
9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회상에 잠긴 듯했다.
9호?
끔찍한 기억이었나요?
...아니, 들어가진 못했지. 인솔자가 제때 나타나서 날 제지했거든.
그런데 나중에 듣기론, 그때 난 블랙존 가까이서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멍하니,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대.
으에...
마치... 무언가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위험한 곳에 관한 소문은 대개 그런 공통점이 있죠, 인간을 현혹하는 자기장을 발산한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설마 인형도 그런 영향을 받나요?
몰라, 결국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으니 해 줄 말이 없어. 대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될 곳이란 거야.
......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일 끝나고 돌아가면 남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경력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죄송하지만, 전 블랙존에서 비밀 임무도 맡아본 인형이라 그 정도 보수로는 일 안 해요" 같은 말도 할 수 있고.
아니 이게 무슨 스펙 쌓기인 줄 알아!?
아무래도 당신에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네요.
후훗, 궁금해? 나중에 간식이랑 차나 같이 하면서 천천히 얘기해 줄게.
오오...
갑자기 엄청 기대된다.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나면 꼭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응! 모나 대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자신감 다시 생겼어.
그럼 첫 번째 문제부터 해결할까요? 철분 팀을 기다리는 동안 백업을 한 번 더 업로드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만큼은 잊지 않기로.
좋아!
잠시 후.
서둘러 달려온 아키텍트와 게이저의 눈에 드디어 질소 팀의 모습이 보였다.
게이저! 저기 쟤들 보인다!
말 안 해도 알아.
쟤네랑 합류하면 바로 블랙존 직행이지?
그래.
만약에 들어갔다 무슨 일 터지면 그냥 나 버리고 가도 돼, 원망 안 하니까.
애초에 우리 기사님은 나 때문에 억지로 끌려왔잖아.
...시끄러.
에이 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둘 다 여기서 세상 하직할 거 같은 영 안 좋은 예감이 든다구.
뭐야, 그리폰으로 전향하더니 일에 열심이 됐나?
아~니, 전혀. 그러는 너야말로 나 때릴 정도로 싫어하더니 의외로 적응 잘하네?
하.
어느 다리 한 짝 뜯긴 얼간이를 구하려 하지만 않았어도 그딴 것에 사로잡힐 일 없었다.
하여간 절대 동료를 두고 가지 못하는 다정한 기사님이라니까~
......
그래도 이건 명심하도록 해. 가장 소중히해야 하는 건 바로 너 자신이야.
게이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키텍트는 팔을 높이 흔들며 질소 팀을 불렀다.
질소 팀과 철분 팀이 합류한 후.
철분 팀의 두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원거리 중화기 지원이 절실했어요.
앞으로의 전투에서 두 분이 화력 지원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문제 없다.
...저희는 "죽음의 바다"로 돌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두 분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아직 조율할 시간은 있습니다.
아하하, 친절도 하셔라~
괜찮아 괜찮아, 우린 진작에 백업해 뒀걸랑.
뭔 일 터져도 노 프라블럼이지!
최악을 상정한 임무라지만, 그 각오라니 대단한걸...
아니, 그냥 사고방식이 다른 걸까? 혹시 철혈공조의 인형은 다 이래?
미안하지만 먼저 지형을 확인해야 한다. 데이터를 압축 해제할 시간을 다오.
어... 그래서 어느 쪽이야?
...이 머저리는 무시하고.
누가 머저리라는 거야!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섯 명의 인형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익숙하든 낯설든, 죽이 맞든 안 맞든, 지금부터 운명을 함께 할 전우들을.
...철혈공조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화력 지원 잘 부탁드립니다.
질문 사항이 없다면 바로 출발해요.
으음... 좋아, 가자.
대충 적이 보이면 펑펑! 하고 터뜨리면 되는 거지? 그거라면야 내가 전문이지...
대신, 지휘 부탁해도 되지?
모나 양.
...네.
아이네이아스 작전팀, 질소와 철분은 함께 블랙존으로 진입했다.
질소 팀과 철분 팀은 모두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각자 다른 때와 장소에서 레드존에 발을 디딘 적이 있다.
때문에, 레드존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모두가 경험했다.
붕괴 입자에 침식된 폐허와 그 사이를 서성이는 ELID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돌연변이 식물이 즐비하는, 황폐한 세계.
아무리 팔팔한 생명체도 그곳에선 붕괴 복사에 오염되어 쓰러지고, 운이 좋으면 그대로 죽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이 되어 다시 일어선다.
어떤 곳은 바람마저 굳어버린다. 붕괴 입자가 대기 그 자체와 엉겨붙어, 일년 365일 내내 끈적하고 역겨운 안개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들이 인지하는 "인간이면 픽 죽어버리는 오염지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는 그녀들마저, 블랙존으로 들어간 순간 차원을 넘는 "격차"를 느꼈다.
...꿀꺽.
라이노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의식이 붕 뜨는 것 같아, 언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9호 네가 말한 압박감이야?
......
9호는 블랙존에 들어오고부터 과묵해졌다.
대신 그녀 머리 위에서 부자연스럽게 까딱이는 장치가, 그녀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했다.
...그때 내 눈에 어렴풋이 보였던 광경이 딱 이거였어.
9호는 모나와 함께 대열의 선두에 섰다. 아직 적이랄 만한 것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극도로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는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군.
써, 썰렁한 농담 말아 줄래 게이저?
나 벌써 토할 거 같다구...
......
아무도, 지금 보이는 이 광경을 어떻게 형용하면 좋을지 떠오르질 않았다.
시야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뒤덮는 어둠은 거의 코앞까지 이어졌다.
주변 곳곳에는 불길한 초록색의 결정이 지면에 솟아나 있었고, 그중 암석 같은 거대한 가시는 속에서부터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그리고 발밑은 내딛을 때마다 걸쭉한 액체가 밟혔다.
붕괴 입자는 눈에 보일 수준으로 뭉쳐져, 조금이라도 파인 지형의 구석구석에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마치 생명력 왕성한 곰팡이가 꿈틀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꺼먼 암석과 불길한 녹색이 대조를 이루는,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시선을 너무 한 곳에다 두면 안 됩니다.
어... 응... 으으...
나 기분 이상해... 저것들이 내 몸속에서 증식하는 거 같아...
너도 무, 무무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돌아가서 씻으면 돼.
그냥 버섯 폈다고 생각해.
그것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바람도 마냥 조용하지 않아, 인형들의 주위를 맴돌면서 떠들고 고함을 질러댔다.
마치 한 맺힌 이들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내뱉은 욕설처럼 들렸다.
저기 있잖아... 누가 자꾸 우리한테 말 거는 거 같지 않아...?
바람 소리야.
그... 그치만...
라이노, 당신은 정찰 특화 모델이라 감지 능력이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붕괴 입자의 영향력이 더 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
응...
아 분위기 되게 꿀꿀하네!
행여 말하지만 쓸데없는 짓 마라.
신경이 너무 곤두서도 안 좋거든? 큰일난다고! 내가 웃긴 얘기로 분위기 전환 좀 할까?
너희들 그거 알아? 인간 중에 유난히 방귀 소리가 요란한 사람 있잖아, 왜 그렇게?
왜... 왜 그런데...?
아키텍트가 뜬금없이 우스꽝스런 얘기를 하자, 인형들은 아주 잠깐이나마 긴장을 풀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만.
누구냐!
손 들고 엎드려!
멀지 않은 곳에서 돌풍이 불어, 땅바닥에 고여 있던 녹색 안개가 인형들에게 밀려들었다.
그런데, 가까워진 안개 속에 어떤 형체가 보였다.
인간일까, 배배 꼬인 나무일까, 아니면 달빛에 드리운 나뭇가지의 그림자일까.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 그것은 인형들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 멈춰!
......
극도로 긴장한 인형들은 각자 무기의 안전장치를 풀고, 안개 속의 형체를 겨눴다.
오지 말라고!
타앙――
주변 환경에 극히 민감한 라이노가 결국 첫 총성을 터뜨렸다.
타타타탕!
뒤이어 다른 총성도 잇따랐다.
무작정 발포하지 마세요! 후퇴합니다!
늪지대에 빠져 허우적대듯, 인형들은 밀려드는 녹색 안개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안개는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몇 발자국 채 떼지도 못하고, 인형들은 그 기괴한 그림자를 품은 안개에 삼켜졌다.
싫어어어어!!
진정해!
라이노는 겁에 질려 그대로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기괴한 그림자가 무엇이든 간에 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라이노, 괜찮아요. 안개가 대기를 왜곡시켜 착각을 일으킨 거예요.
어우 깜짝이야... 나 놀라서 에러 나는 줄 알았어.
눈 떠라, 그냥 안개일 뿐이다.
라이노가 벌벌 떨며 눈을 떠 보니, 정말 인형들은 그냥 녹색 안개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 안개에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금세, 안개는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쳐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딸꾹.
이 상황을 정리해 아이네이아스에 전달하겠습니다. 그 동안 잠시 휴식할까요?
저희의 좌표 데이터를 바탕으로 체스 마스터가 꽤 많은 정보를 분석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길을 헤맬 일도 줄일 수 있겠죠.
제발 그렇게 해 줘...
한편, 그레이 일행은 목적지인 초소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아직 조금 더 걸립니다.
그때 멀리서 격렬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놈들이 쫓아왔다.
제기랄! 온다던 지원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레이가, 통신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 아주 잘 들리니까 소리 안 질러도 돼~♪
짜증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단다, 그레이.
당장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 어디에 있지?
뒤쫓아오는 꼬리가 너무 끈질기다.
알아. 그래도 내가 뭘 어떡하겠니?
나도 가는 데 시간이 걸리는걸.
느려 터진 너라도 여기서 아베르누스까지 적어도 3번은 왕복했을 시간이다만.
그래~? 거 참 희한하네에, 오늘따라 왜 이리 길이 긴 것 같지~?
......
아무튼 길 잘못 들면 안 되니까 이만 끊을게.
최대한 빨리 보자~♪
삑.
통신을 홱 끊어버리는 모양새가, 끝내 못 참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그레이...
......
그레이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지원은 오지 않을 것 같구나.
......
그래도 절망하기엔 아직 일러.
우선 비행기가 있는 초소까지 가야 해. 이 주변 최근 순찰 기록이――
그레이, 놈들이 계속 따라오게 놔둬서는 안 된다.
......
내가 가서 저지하겠어.
하지만 너도 부상을 입었잖니. 그 상태로 전투를 지속하기엔 부담이 너무 커.
나는... 괜찮다.
놈들의 침입을 방치하면, 아버님이 너를 벌하실 거다.
......
타타탕――
연달은 총성은 더 가까워진 듯했다.
어차피 비행기는 2인승이니 먼저 가라, 그레이.
놈들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놈들을 따돌리고 바로 가겠다.
...알았어.
그레이는 상처투성이인 틸을 보며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정신을 잃기 직전인 몰리도를 부축하며 발길을 옮겼다.
부우웅...
그리고 그들 뒤로, 틸의 칼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쉬익――
희미하게나마 달빛이 보이는 밤하늘을, 소름끼치는 섬광이 가로질렀다.
혼란 상태에서 벗어난 질소와 철분 팀은 다시 이동했다.
아까 정신없이 달리는 바람에 처음에 남긴 흔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괜찮으니까 침착하게 살펴봐, 너라면 찾아낼 수 있어.
......
왜 그러지?
모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바람 소리겠지 뭐, 나도 이젠 무덤덤해졌어.
적대적 신호는 감지되지 않아.
저기 있잖아, 나도 누가 이쪽을 노려보는 느낌이 드는데...?
......모두, 경계해라.
이 바보가 딱히 잘하는 건 없어도 감은 꽤 정확한 편이다.
아 너 진짜!
네, 혹시 모르니 대비――
부웅——
——!?
귀에 익은 진동음이 들려, 모나는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쉬익――!!
그 새하얀 유령이 잔상을 남기며 온통 검정과 초록 투성이인 주위를 맴도는 모습은, 마치 수풀을 헤치며 기회를 노리는 사마귀 같았다.
으윽...!
한발 앞서 눈치채고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지만, 성급하게 공격을 피하던 라이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슈욱——
뭐가 저리 빨라?!
틸입니다!
인형들이 간신히 눈으로 포착했을 때, 새하얀 옷의 틸은 높게 솟은 가시 바위 끝에서 냉혹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 기괴한 어두운 "이계"에서 밝게 빛났다.
날카롭게 굽은, 피를 뚝뚝 흘리는 초승달처럼.
슈욱!
인형들의 시선이 닿자마자, 틸은 바로 턱을 살짝 당기고 땅을 차 다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그대로 인형들에게 돌진하지 않았다. 저 불길한 녹색 안개 속으로 숨은것이었다.
주의하세요, 우리의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속셈입니다!
철분 팀! 화력 지원 바랍니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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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항 근처의 임시 세이프하우스.
크루거와 연락이 두절된 지휘관은 다시 초조해하며 방을 서성였다.
그리고 방 안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카이바르한테 "훈작사"에게 연락하라고 해 줘.
네.
잠시 후.
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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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크루거 씨와 모두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당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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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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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중지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휘관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금 훈작사의 말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조사에 진전이 생겼습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게 크루거 씨, 헬리안 씨가 연행된 일과 무슨 관계가 있죠?
<color=#00CCFF>내 자네가 얼마나 안젤리아를 구출하고 싶은지는 이해하네만, 세상 어떤 일이든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네.</color>
<color=#00CCFF>이 세상은 질서라는 지팡이에 기대어 움직이지. 함부로 규칙을 어기고, 충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이길 수 없어.</color>
<color=#00CCFF>강인한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네.</color>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color=#00CCFF>크루거를 비롯한 모두가 무사하길 바란다면...</color>
<color=#00CCFF>자네가 포기해야 할 것이 있네. 등가교환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나.</color>
......안젤리아 씨를요?
<color=#00CCFF>부득이하게 무엇을 희생할지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잖은가.</color>
<color=#00CCFF>어른으로서 마주해야 할 잔혹한 현실이지만 말일세.</color>
또... <size=50>또 저희를 가지고 거래했다는 겁니까!?</size>
<color=#00CCFF>지휘관, 자네가 그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네. 물론 자네 탓은 아니야.</color>
<color=#00CCFF>하지만, 어떤 일이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보는 법도, 자네는 배워야 해...</color>
<color=#00CCFF>이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결과일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는 없어.</color>
그 말씀은 벌써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지금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고생하고, 손해만 보면서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야 겨우 기회가 바로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를 어딘가의 "승리"를 위해 그걸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color=#00CCFF>대의를 위해서는 누구든 희생될 수 있네.</color>
<color=#00CCFF>더군다나 안젤리아는 요원일세, 그 정도 각오는 한 몸이야. 설마 자네는 안젤리아의 목숨이 크루거와 G&K보다 중요하다 여기는 건가?</color>
그래요, 누구라도 희생될 수는 있죠...
하지만 왜 하필 안젤리아 씨입니까?
<color=#00CCFF>누가 희생하냐는 중요치 않아. 누가 됐든 마찬가지네.</color>
당신에겐 누구를 희생시킬지 정할 자격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color=#00CCFF>...고집부리지 말게, 지휘관.</color>
지금 기지와 동료를 잃은 저에게 고집 부리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color=#00CCFF>당장 하던 일을 전부 중지하게, 크루거는 내가 해결해 줄 테니.</color>
지휘관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절합니다.
<color=#00CCFF>......</color>
<color=#00CCFF>크루거와 G&K를 포기하겠단 말인가?</color>
아니오. 전 그 누구도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아직 구할 수 있다 판단되는 한, 절대로.
<color=#00CCFF>지휘관 나는 지금 자네와 협상하려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color>
삑.
통신이 끊어졌다.
엑... 지휘관?
지휘관, 지금 우리 회사 CEO의 통화를 끊어버렸어요.
그것도 저쪽이 슬슬 화내려는 타이밍에.
......
...그런 것 같네.
아니, 예기치 못한 사고였어. 신호 불량은 늘상 있는 일이잖아?
...웬일로 네가 나랑 생각이 비슷하냐.
......
지휘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멈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휘관님,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에서 통신 요청입니다.
아이네이아스 회의실.
회의실 중앙에 떠 있는 거대한 전술 보드에 위치가 표시되는 각 작전팀들은 지휘관의 배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각 팀을 대표하는 색상 가까이서,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의 구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블랙존, "죽음의 바다".
모두 모였지?
<color=#00CCFF>네, 모두의 정보를 통합했습니다. 질소와 철분이 먼저 합류해 "죽음의 바다"로 돌입합니다.</color>
<color=#00CCFF>우산, 유니콘, 체스 마스터는 뒤이어서 진입합니다.</color>
두려움, 불안감, 긴장감이 한데 섞인 시선들이 철분과 질소 팀에게 모였다.
미리 건투를 빈다.
<color=#00CCFF>다만 "죽음의 바다"로 직접 발을 들이기 전에, 경험과 이전의 정보를 결합해 블랙존 내부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간단한 긴급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color>
<color=#00CCFF>지금 저희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color>
<color=#00CCFF>현재 우리 데이터베이스에서 블랙존에 가장 가까웠던 상황은...</color>
<color=#00CCFF>......아.</color>
<color=#00CCFF>왜 그러죠?</color>
<color=#00CCFF>그게... 저희가 경험한 상황 중 블랙존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안젤리아 씨가 더티밤을 터뜨렸던 그 지역에서의 기록이라서...</color>
......
<color=#00CCFF>잠시만요, 안젤리아 씨는 이번의 구출 목표 아닙니까? 그녀가 직접 더티밤을 터뜨리고, 거기서 살아남았단 말인가요? 인간의 몸으로?</color>
맞아.
<color=#00CCFF>......</color>
<color=#00CCFF>더티밤은 폭발하면서 반경 500m 내의 모든 사물을 증발시켰습니다.</color>
<color=#00CCFF>그리고 그 일대의 오염도는 바로 블랙존이 되어, 대기 중에 붕괴 입자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죠.</color>
<color=#00CCFF>붕괴 입자는 통신을 비롯한 온갖 신호를 극도로 교란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통신을 위해 아이네이아스 회의실을 제작한 것이니 통신 장애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color>
<color=#00CCFF>그리고, 장시간 붕괴 복사에 노출되는 것은 인형 소체도 위험하므로 우리 모두 특수 항붕괴 입자 처리를 받았습니다만... 블랙존급 붕괴 복사에는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 미지수입니다.</color>
회의실의 모두는 더티밤 폭발 후에 펼쳐진 세상의 종말 같은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color=#00CCFF>완전 외계 행성 같은 광경이야.</color>
<color=#00CCFF>......</color>
<color=#00CCFF>곧 우리가 마주할 광경이죠.</color>
<color=#00CCFF>어떤 기척도 없고, 생명체도 없으며, 오직 걸쭉하게 느껴질 정도로 붕괴 입자 농도가 짙은 대기만이 있는 곳이에요.</color>
<color=#00CCFF>모래폭풍 속에서 길을 헤매던 때가 떠오르는걸.</color>
<color=#00CCFF>꽤 적절한 비유네.</color>
<color=#00CCFF>복사 방호에 주의하고, 유사 시 즉각 채널로 보고하세요.</color>
<color=#00CCFF>알겠습니다.</color>
레드존과 블랙존의 경계선.
이제부터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생각하니, 질소 팀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온갖 비밀이 숨겨진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아, 맞나?
나도 진짜 블랙존 안으로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대비 연습이나 모의 훈련 같은 건 해봤지만, 역시... 진짜는 압박감부터가 다르네.
많이 돌아다녔대서 블랙존도 가본 줄 알았더니?
넌 출고된 지 그리 오래는 안 돼서 아직 많이 못 돌아다녀봤지? 좀만 지나면 나 못지않게 많은 곳을 가보게 될지도 몰라, 기대하라고.
하지만 세상 어디든, 블랙존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금기의 땅이죠.
하긴, 나도 블랙존에 들어가는 임무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다만...
다만?
딱 한 번, ELID 소탕 임무 도중 사고로 대열에서 이탈한 적이 있거든?
그때 실수로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블랙존의 변두리까지 간 적이... 있었지...
9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회상에 잠긴 듯했다.
9호?
끔찍한 기억이었나요?
...아니, 들어가진 못했지. 인솔자가 제때 나타나서 날 제지했거든.
그런데 나중에 듣기론, 그때 난 블랙존 가까이서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멍하니,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대.
으에...
마치... 무언가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위험한 곳에 관한 소문은 대개 그런 공통점이 있죠, 인간을 현혹하는 자기장을 발산한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설마 인형도 그런 영향을 받나요?
몰라, 결국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으니 해 줄 말이 없어. 대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될 곳이란 거야.
......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일 끝나고 돌아가면 남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경력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죄송하지만, 전 블랙존에서 비밀 임무도 맡아본 인형이라 그 정도 보수로는 일 안 해요" 같은 말도 할 수 있고.
<size=50>아니 이게 무슨 스펙 쌓기인 줄 알아!?</size>
아무래도 당신에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네요.
후훗, 궁금해? 나중에 간식이랑 차나 같이 하면서 천천히 얘기해 줄게.
오오...
갑자기 엄청 기대된다.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나면 꼭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응! 모나 대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자신감 다시 생겼어.
그럼 첫 번째 문제부터 해결할까요? 철분 팀을 기다리는 동안 백업을 한 번 더 업로드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만큼은 잊지 않기로.
좋아!
잠시 후.
서둘러 달려온 아키텍트와 게이저의 눈에 드디어 질소 팀의 모습이 보였다.
게이저! 저기 쟤들 보인다!
말 안 해도 알아.
쟤네랑 합류하면 바로 블랙존 직행이지?
그래.
만약에 들어갔다 무슨 일 터지면 그냥 나 버리고 가도 돼, 원망 안 하니까.
애초에 우리 기사님은 나 때문에 억지로 끌려왔잖아.
...시끄러.
에이 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둘 다 여기서 세상 하직할 거 같은 영 안 좋은 예감이 든다구.
뭐야, 그리폰으로 전향하더니 일에 열심이 됐나?
아~니, 전혀. 그러는 너야말로 나 때릴 정도로 싫어하더니 의외로 적응 잘하네?
하.
어느 다리 한 짝 뜯긴 얼간이를 구하려 하지만 않았어도 그딴 것에 사로잡힐 일 없었다.
하여간 절대 동료를 두고 가지 못하는 다정한 기사님이라니까~
......
그래도 이건 명심하도록 해. 가장 소중히해야 하는 건 바로 너 자신이야.
게이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키텍트는 팔을 높이 흔들며 질소 팀을 불렀다.
질소 팀과 철분 팀이 합류한 후.
철분 팀의 두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원거리 중화기 지원이 절실했어요.
앞으로의 전투에서 두 분이 화력 지원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문제 없다.
...저희는 "죽음의 바다"로 돌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두 분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아직 조율할 시간은 있습니다.
아하하, 친절도 하셔라~
괜찮아 괜찮아, 우린 진작에 백업해 뒀걸랑.
뭔 일 터져도 노 프라블럼이지!
최악을 상정한 임무라지만, 그 각오라니 대단한걸...
아니, 그냥 사고방식이 다른 걸까? 혹시 철혈공조의 인형은 다 이래?
미안하지만 먼저 지형을 확인해야 한다. 데이터를 압축 해제할 시간을 다오.
어... 그래서 어느 쪽이야?
...이 머저리는 무시하고.
<size=50>누가 머저리라는 거야!</size>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섯 명의 인형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익숙하든 낯설든, 죽이 맞든 안 맞든, 지금부터 운명을 함께 할 전우들을.
...철혈공조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화력 지원 잘 부탁드립니다.
질문 사항이 없다면 바로 출발해요.
으음... 좋아, 가자.
대충 적이 보이면 펑펑! 하고 터뜨리면 되는 거지? 그거라면야 내가 전문이지...
대신, 지휘 부탁해도 되지?
모나 양.
...네.
아이네이아스 작전팀, 질소와 철분은 함께 블랙존으로 진입했다.
질소 팀과 철분 팀은 모두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각자 다른 때와 장소에서 레드존에 발을 디딘 적이 있다.
때문에, 레드존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모두가 경험했다.
붕괴 입자에 침식된 폐허와 그 사이를 서성이는 ELID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돌연변이 식물이 즐비하는, 황폐한 세계.
아무리 팔팔한 생명체도 그곳에선 붕괴 복사에 오염되어 쓰러지고, 운이 좋으면 그대로 죽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이 되어 다시 일어선다.
어떤 곳은 바람마저 굳어버린다. 붕괴 입자가 대기 그 자체와 엉겨붙어, 일년 365일 내내 끈적하고 역겨운 안개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들이 인지하는 "인간이면 픽 죽어버리는 오염지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는 그녀들마저, 블랙존으로 들어간 순간 차원을 넘는 "격차"를 느꼈다.
...꿀꺽.
라이노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의식이 붕 뜨는 것 같아, 언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9호 네가 말한 압박감이야?
......
9호는 블랙존에 들어오고부터 과묵해졌다.
대신 그녀 머리 위에서 부자연스럽게 까딱이는 장치가, 그녀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했다.
...그때 내 눈에 어렴풋이 보였던 광경이 딱 이거였어.
9호는 모나와 함께 대열의 선두에 섰다. 아직 적이랄 만한 것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극도로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생각보다는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군.
써, 썰렁한 농담 말아 줄래 게이저?
나 벌써 토할 거 같다구...
......
아무도, 지금 보이는 이 광경을 어떻게 형용하면 좋을지 떠오르질 않았다.
시야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뒤덮는 어둠은 거의 코앞까지 이어졌다.
주변 곳곳에는 불길한 초록색의 결정이 지면에 솟아나 있었고, 그중 암석 같은 거대한 가시는 속에서부터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그리고 발밑은 내딛을 때마다 걸쭉한 액체가 밟혔다.
붕괴 입자는 눈에 보일 수준으로 뭉쳐져, 조금이라도 파인 지형의 구석구석에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마치 생명력 왕성한 곰팡이가 꿈틀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꺼먼 암석과 불길한 녹색이 대조를 이루는,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시선을 너무 한 곳에다 두면 안 됩니다.
어... 응... 으으...
나 기분 이상해... 저것들이 내 몸속에서 증식하는 거 같아...
너도 무, 무무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돌아가서 씻으면 돼.
그냥 버섯 폈다고 생각해.
그것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바람도 마냥 조용하지 않아, 인형들의 주위를 맴돌면서 떠들고 고함을 질러댔다.
마치 한 맺힌 이들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내뱉은 욕설처럼 들렸다.
저기 있잖아... 누가 자꾸 우리한테 말 거는 거 같지 않아...?
바람 소리야.
그... 그치만...
라이노, 당신은 정찰 특화 모델이라 감지 능력이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붕괴 입자의 영향력이 더 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
응...
<size=50>아 분위기 되게 꿀꿀하네!</size>
행여 말하지만 쓸데없는 짓 마라.
신경이 너무 곤두서도 안 좋거든? 큰일난다고! 내가 웃긴 얘기로 분위기 전환 좀 할까?
너희들 그거 알아? 인간 중에 유난히 방귀 소리가 요란한 사람 있잖아, 왜 그렇게?
왜... 왜 그런데...?
아키텍트가 뜬금없이 우스꽝스런 얘기를 하자, 인형들은 아주 잠깐이나마 긴장을 풀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만.
누구냐!
손 들고 엎드려!
멀지 않은 곳에서 돌풍이 불어, 땅바닥에 고여 있던 녹색 안개가 인형들에게 밀려들었다.
그런데, 가까워진 안개 속에 어떤 형체가 보였다.
인간일까, 배배 꼬인 나무일까, 아니면 달빛에 드리운 나뭇가지의 그림자일까.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 그것은 인형들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 멈춰!
......
극도로 긴장한 인형들은 각자 무기의 안전장치를 풀고, 안개 속의 형체를 겨눴다.
<size=50>오지 말라고!</size>
타앙――
주변 환경에 극히 민감한 라이노가 결국 첫 총성을 터뜨렸다.
타타타탕!
뒤이어 다른 총성도 잇따랐다.
무작정 발포하지 마세요! 후퇴합니다!
늪지대에 빠져 허우적대듯, 인형들은 밀려드는 녹색 안개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안개는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몇 발자국 채 떼지도 못하고, 인형들은 그 기괴한 그림자를 품은 안개에 삼켜졌다.
<size=50>싫어어어어!!</size>
진정해!
라이노는 겁에 질려 그대로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기괴한 그림자가 무엇이든 간에 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라이노, 괜찮아요. 안개가 대기를 왜곡시켜 착각을 일으킨 거예요.
어우 깜짝이야... 나 놀라서 에러 나는 줄 알았어.
눈 떠라, 그냥 안개일 뿐이다.
라이노가 벌벌 떨며 눈을 떠 보니, 정말 인형들은 그냥 녹색 안개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 안개에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금세, 안개는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쳐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딸꾹.
이 상황을 정리해 아이네이아스에 전달하겠습니다. 그 동안 잠시 휴식할까요?
저희의 좌표 데이터를 바탕으로 체스 마스터가 꽤 많은 정보를 분석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길을 헤맬 일도 줄일 수 있겠죠.
제발 그렇게 해 줘...
한편, 그레이 일행은 목적지인 초소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아직 조금 더 걸립니다.
그때 멀리서 격렬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놈들이 쫓아왔다.
<size=50>제기랄! 온다던 지원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size>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레이가, 통신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color=#00CCFF>어~ 아주 잘 들리니까 소리 안 질러도 돼~♪</color>
<color=#00CCFF>짜증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단다, 그레이.</color>
당장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 어디에 있지?
뒤쫓아오는 꼬리가 너무 끈질기다.
<color=#00CCFF>알아. 그래도 내가 뭘 어떡하겠니?</color>
<color=#00CCFF>나도 가는 데 시간이 걸리는걸.</color>
느려 터진 너라도 여기서 아베르누스까지 적어도 3번은 왕복했을 시간이다만.
<color=#00CCFF>그래~? 거 참 희한하네에, 오늘따라 왜 이리 길이 긴 것 같지~?</color>
......
<color=#00CCFF>아무튼 길 잘못 들면 안 되니까 이만 끊을게.</color>
<color=#00CCFF>최대한 빨리 보자~♪</color>
삑.
통신을 홱 끊어버리는 모양새가, 끝내 못 참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그레이...
......
그레이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지원은 오지 않을 것 같구나.
......
그래도 절망하기엔 아직 일러.
우선 비행기가 있는 초소까지 가야 해. 이 주변 최근 순찰 기록이――
그레이, 놈들이 계속 따라오게 놔둬서는 안 된다.
......
내가 가서 저지하겠어.
하지만 너도 부상을 입었잖니. 그 상태로 전투를 지속하기엔 부담이 너무 커.
나는... 괜찮다.
놈들의 침입을 방치하면, 아버님이 너를 벌하실 거다.
......
타타탕――
연달은 총성은 더 가까워진 듯했다.
어차피 비행기는 2인승이니 먼저 가라, 그레이.
놈들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놈들을 따돌리고 바로 가겠다.
...알았어.
그레이는 상처투성이인 틸을 보며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정신을 잃기 직전인 몰리도를 부축하며 발길을 옮겼다.
부우웅...
그리고 그들 뒤로, 틸의 칼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쉬익――
희미하게나마 달빛이 보이는 밤하늘을, 소름끼치는 섬광이 가로질렀다.
혼란 상태에서 벗어난 질소와 철분 팀은 다시 이동했다.
아까 정신없이 달리는 바람에 처음에 남긴 흔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괜찮으니까 침착하게 살펴봐, 너라면 찾아낼 수 있어.
......
왜 그러지?
모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바람 소리겠지 뭐, 나도 이젠 무덤덤해졌어.
적대적 신호는 감지되지 않아.
저기 있잖아, 나도 누가 이쪽을 노려보는 느낌이 드는데...?
......모두, 경계해라.
이 바보가 딱히 잘하는 건 없어도 감은 꽤 정확한 편이다.
<size=50>아 너 진짜!</size>
네, 혹시 모르니 대비――
부웅——
——!?
귀에 익은 진동음이 들려, 모나는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쉬익――!!
그 새하얀 유령이 잔상을 남기며 온통 검정과 초록 투성이인 주위를 맴도는 모습은, 마치 수풀을 헤치며 기회를 노리는 사마귀 같았다.
<size=50>으윽...!</size>
한발 앞서 눈치채고 경계 태세로 전환했다지만, 성급하게 공격을 피하던 라이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슈욱——
뭐가 저리 빨라?!
<size=50>틸입니다!</size>
인형들이 간신히 눈으로 포착했을 때, 새하얀 옷의 틸은 높게 솟은 가시 바위 끝에서 냉혹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 기괴한 어두운 "이계"에서 밝게 빛났다.
날카롭게 굽은, 피를 뚝뚝 흘리는 초승달처럼.
슈욱!
인형들의 시선이 닿자마자, 틸은 바로 턱을 살짝 당기고 땅을 차 다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그대로 인형들에게 돌진하지 않았다. 저 불길한 녹색 안개 속으로 숨은것이었다.
주의하세요, 우리의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속셈입니다!
철분 팀! 화력 지원 바랍니다!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