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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 세로변형

5-β5 죽음의 무도

드라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54-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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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베를린, 그레이 생명과학 연구소.

매기와 캐서린은 제시간에 맞춰 초청장을 가지고 연구소에 들어왔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과 새하얀 벽에 밝은 빛이 반사되어 약간 눈부신 광택이 퍼졌다.

캐서린

완전 인간 냄새로 가득한 고급 연구소네.

우리하곤 평생 연이 없을 곳인데...

매기

...굳이 여기에 맞추려 할 필요 없어, 우리가 일할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

캐서린

그래? 여기서 오랫동안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매기

인형은 인형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연구소의 접수 데스크엔 아무도 없었다. 두 인형은 서로 마주보고는 그냥 데스크를 지나쳐 들어갔다.

캐서린

"이둔"... 뒤에 있는 저건 뭐야?

매기

여긴 복사감염증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구역이겠지.

???

거기 두 분은...?

제복 차림의 여성이 의문을 띤 얼굴로 매기와 캐서린에게 다가와, 조심스런 눈초리로 둘을 살펴보았다.

매기가 초청장을 꺼내 보였다.

???

아, 선생님의 손님이군요. 반가워요, 전 넬레라고 해요.

넬레

데스크가 또 비어 있나 보죠?

그럼 매기 씨, 선생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옆의 분은 밖에서 기다려 주시고요.

매기

부탁하죠.

캐서린

넬레 씨의 선생님이란 분은...?

넬레

예? 초청장에 적혀 있지 않나요?

넬레는 안경 코받침을 밀고, 초청장의 서명을 가리켰다.

넬레

"серый", 저희 스승님 성함이 바로 "그레이"예요.

매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레이는 사무 탁상 뒤에 앉아 향긋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레이

또 만났네, 매기 양.

매기

그러네요, "회색" 씨.

그레이

베를린 날씨는 좀 적응이 되나?

매기

뭐 싫어도 적응해야겠죠.

그레이

뭐라도 마실래?

매기

전 위스키나 데킬라가 좋습니다.

그레이

아쉽지만 여긴 사무실이라서 말이지,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할 수 있도록 차나 커피 같은 카페인 듬뿍 든 것들밖에 없어.

매기는 히죽 웃었다.

매기

그레이 씨는 무슨 술을 좋아하시는지요?

그레이

드라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매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아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엔 작은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레이는 자연스레 동전을 집었다.

현실과 허상 사이, 불빛이 안개로 변했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열차가 힘차게 달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레이는 레트로풍 객차 안에 앉아 눈썹을 살짝 씰룩거렸다.

매기는 이미 노련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안 지나서 키 큰 와인잔에 맑은 액체가 담겼다.

그리고 탱탱한 올리브 열매 한 알이 잔 안에 떨어졌다.

매기

드시죠, 손님께 드리는 마티니입니다.

그레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 앞의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고 살짝 맛을 보았다.

그레이

딱 좋군.

그러고선 그레이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마티니가 최고의 상태일 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것이 바텐더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매기

그레이 씨의 칭찬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레이

이 인사 선물, 무척 마음에 들어.

진한 술에 그레이의 뺨이 약간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매기를 바라보았다.

그레이

이것도 폭스 시스터후드의 유산인가?

매기

예, 지금까지 멀쩡하게 간직하느라 애 좀 먹었죠.

그레이

하지만 좀 낡았어. 네 재머처럼 말야.

동전에다 재머를 숨겨놓다니, 너무 고전적이라 이젠 잘 쓰이지도 않는 수법이야.

매기

확실히 시대에 뒤처지긴 했죠, 하지만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데엔 엄청난 자금과 설비가 필요하니까요.

그레이

자금과 설비를 달라고 돌려서 말하는 걸까?

매기

우훗.

사업을 하려면 기본적인 투자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레이

내가 저번에도 가치있는 인물에겐 흔쾌히 베풀어준다고 했지.

마티니 한 잔 더 줘보렴.

매기

문제 없죠.

잠시 후 매기가 드라이 마티니를 한 잔 더 따랐다.

매기

드시죠.

그레이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그녀는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술잔 옆을 지나쳐 더욱 앞을 향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이 매기의 머릿결을 살며시 건드렸다.

매기

......

매기는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약 1초간 고민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그레이

겁먹은 거니?

매기

...시종이 어찌 감히 하느님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겠습니까.

그레이

폭스 시스터후드의 인형들은 다 너처럼 혀를 잘 놀리니?

매기

사회공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이죠.

그레이

긴장 마렴, 그냥 소체를 좀 보는 거니까.

그런데 네 소체는 완전 난장판이구나. 요즘 민수용 인형은 어쩌다 개조 수준이 이 지경이 됐니?

매기

그래서 당신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레이

그렇겠구나.

그레이는 손을 펴서 매기의 심장 위치에 갖다댔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힘을 주어 손바닥 전체가 매기의 흉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레이

마인드맵 공간도 청소를 해야겠고.

매기

......

진찰 고마워요.

통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매기는 그레이가 이미 그녀의 마인드맵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푹신푹신한 좌석과 창 밖의 풍경은 여전했다.

하지만 맞은 편의 그레이는 사라져 있었다.

매기

......

지직... 열차 창문에 생기 없는 얼굴이 비쳤다.

하얀 니토

객차 안에 가만히 있어라, 개조가 끝날 때까지.

매기

적어도 내 마인드맵에 무슨 짓을 할 셈인지는 알려주는 게 도리 아니야?

하얀 니토

......

너의 노후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거다. 네게 일시적으로 정보 시스템의 포트를 개방했다.

매기

...정보 시스템?

하얀 니토

빈틈없이 파고드는 "벌침".

마지막으로 반복한다. 객차 안에서 나오지 말고 기다려라, 한 발짝만 기어나오면 폐품으로 만들어 주지.

소녀의 얼굴이 창문에서 사라졌다.

매기는 손을 뻗어 레모네이드를 호출했지만, 엄습해오는 초조와 불안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었다.

매기

잠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객차 문을 열었다. 복도 밖엔 역시나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기다란 객실 통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둡고 넓은 로비가 대신 펼쳐져 있었다.

매기

......

하얀 옷의 소녀 몇 명이 촛불을 들고서 그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치 죽은 자의 침대로 향하는 창백한 유령처럼.

테이블 위의 위저 보드가 멋대로 움직이며, 공중엔 트럼프 카드가 마구 흩날렸다.

매기

...이런 식의 개조구나.

광원이 거의 없는 지하실, 텅 빈 방 안쪽 구석에 소녀 한 명이 홀로 서 있었다.

촤르륵——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트럼프 카드가 그녀의 손에서 펄럭였다.

???

연습 시작.

매기

......

슉—— 슉——

카드가 정확하게 날아가 표시된 지점에 착지했다.

매기는 그 소리를 귀 기울여 자세히 들었다. 저 하얀 소녀들은 아직 이 지하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매기는 살짝 안심이 되어 미소를 지었다.

매기

그레이 씨,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구만...

나는 말이지... 얌전히 죽어 주는 녀석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