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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 세로변형

35-W1 솔베이지의 노래

우리는 법률을 따르지 않으며, 감옥은 우리의 집과 마찬가지다.

-54-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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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십 년 전, 신소련.

어두운 길거리엔 햇빛조차 지나지 못하는 자욱한 안개가 끼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한때 그물처럼 가지런했던 도로를 어지럽고 굽이치게 만들었다.

그 사이로 두 남자와 한 젊은 여자가, 무척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러 가는 듯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지날 때, 여자의 높은 구두굽이 땅의 갈라진 틈에 박혔다. 구두는 단단히 끼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글레프

...그냥 벗어 던지면 안 돼, 발레리야!? 이러다 늦겠다고!

앞에서 두 번째로 가던 남자가 짜증을 부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윤기가 흐르는 가죽 구두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에, 길가의 곯아떨어진 술꾼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

괜찮아, 글레프. 아직 시간 많으니까.

제수씨도 고귀한 물리학자시니까, 품위 유지 의무는 존중해 드려야지, 암.

앞장선 남자는 조롱하듯 웃으며, 자신을 뒤따라오는 궁상맞으면서도 콧대 높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발레리야는 남편 글레프의 흉흉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을 시도해도 도저히 뽑히지 않자, 발레리야는 모자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냈다.

싹둑, 소리와 함께 날씬한 구두굽이 잘려나갔다. 신고 있는 다른 한 쪽 굽과 함께.

발레리야

가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발레리야는 일어서서 남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갱단 안내인은 살짝 놀라 웃음을 지으며, 감탄하는 눈빛으로 저 과감한 여인을 다시 살펴봤다.

안내인

설마 그런 흉기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네?.

발레리야

이것도 맡겨야 하나요? 아까 저희 권총처럼요.

안내인은 웃으며 날파리를 쫓듯이 팔을 내저었다.

안내인

레이디라면 액세서리로 칼 한두 자루쯤은 기본 소양 아니겠어? 그 정도쯤 물론 눈감아 줘야지.

그리고 꼴랑 그런 걸로 황천길 갈 거면 뭔 놈의 보르 브 자코녜를 하겠냐? 집에서 배나 긁고 있지, 하하하...

글레프

그렇죠, 하하하....

글레프는 입으론 맞장구를 쳤지만 등 뒤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삶이란 초콜릿 상자 같은 것.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를 뽐내던 그는 지금 살기 위해 이 지저분한 건달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발레리야는 남편의 그런 사소한 동작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녀는 단도를 도로 집어넣고, 안내인에게 공손하게 그러나 차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안내인

영감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가자고.

차가운 겨울 바람 속, 안내인은 한 손을 주머니 속에 쑤셔넣고서 등을 돌리고, 휘파람을 불며 글레프 부부를 데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폐건물의 깊은 곳.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문 앞을 지키던 거한은 그들을 힐끗 보고서, 팔각성과 비수 문신을 새긴 굵직한 팔로 방폭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방이 그들 눈앞에 나타났다.

KGB의 신중한 특무기관 스타일과 달리, 옐로우존에 자리한 보르 브 자코녜의 핵심 거점은 아무런 숨김 없이 사무실 안 풍경을 완전히 밖으로 드러내어 글레프를 놀라게 했다.

반듯한 옷차림에 냉혹한 인상의 노인이 천천히 등을 돌려, 빛을 등지고 그들을 주시했다.

글레프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수석 금융가" 어르신.

글레프는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뒤의 발레리야도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다.

보르 브 자코녜의 명실상부한 두목 사하로프는 터프한 절도 스타일과 엄청난 성과로 조직에서 "수석 금융가"라는 존칭을 얻었다.

글레프는 자신이 사하로프와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된 건 그가 옥중에서 도적단원의 추천을 받은 것 외에도, 그가 KGB에서 걸출한 재직 경력을 가졌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하로프

반갑구려, 글레프 선생. 내 어느 부하가 자네가 "왕림"한다 하기에, 자네에게 큰 선물을 안겨 주라 부탁을 했네.

사하로프가 오른손으로 가볍게 가리키자, 건장한 검은 옷의 남성이 글레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남자는 글레프의 복부에 강렬한 주먹을 꽂아넣어 그를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글레프

커헉... 이건 정말... 푸짐한 선물이시군요...

한참이 걸려서야 글레프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발레리야가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바로 그 손을 뿌리쳤다.

글레프

이 선물로도 어르신과 부하 분들의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저는 아무리 더 고생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옥중에서 전 이미 결심했습니다. KGB를 그만두고 조직에 의탁하겠다고요.

충성을 맹세한 부하를 저버리고 KGB와 정부 놈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날려버리지는 않으시겠지요?

사하로프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비웃음이 묻어나던 눈빛은 점점 감탄의 미소로 바뀌었다.

KGB 고급 요원 출신에 정세를 읽을 줄 아는 총명한 인간... 그가 조직에 들어오는 것은 확실히 만족할 만한 수확이었다.

사하로프는 글레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이 초라하면서도 기개 있는 젊은이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글레프가 입을 맞추게 했다.

사하로프

자네의 뜻은 당연히 알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자네와 부인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네.

발레리야도 이에 글레프 뒤에서 나와, 똑같이 예의를 갖추어 사하로프의 손을 잡고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

사하로프

하지만 조직에 들어오기 위해선 충성 맹세만으론 부족하네. 조직의 수칙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해.

사하로프는 뜸을 들이며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손가락으로 매끈한 총알 한 발을 굴렸다.

사하로프

첫째, "우리는 법률을 따르지 않으며, 감옥은 우리의 집과 마찬가지다", 이건 이미 합격이라 해도 되겠지.

하지만 두 번째,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 이것을 직접 증명해 보여야 하네. 사소한 입단 테스트라고 보면 될 걸세.

글레프

알겠습니다, "수석 금융가" 어르신. 성의를 다해서 행동으로 직접 충성심과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분명 어르신께서 만족하실 만한 선물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하로프는 그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 방을 나가는 글레프 부부를 미소로 배웅했다.

수많은 인간을 겪어 본 그의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저 글레프란 이름의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분명 조직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