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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 세로변형

35-R1 치간

가끔, 인생의 갈림길이 결국 한 곳으로 통할 때가 있다.

-54-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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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독일.

옐로우존의 한 거점 도시.

슬럼가 골목 끝의 낡은 나무 문짝이 끼익 하고 열려 어두운 밤에 따듯한 빛을 뿌렸다.

누더기 외투를 두른 부녀가 아이를 안고 진료소에서 나오더니, 뒤돌아서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난민의 어머니

고맙습니다, 루고사 선생님... 선생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닥터 루고사

천만에요.

닥터 루고사는 가벼운 한숨을 쉬고서 진료소 문을 닫았다.

진료소 안.

닥터 루고사는 팔걸이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커피잔을 집었지만 이미 방울 하나 남김없이 말라 있었다.

루고사 부인이 안방에서 깨끗하게 빤 붕대 더미를 들고 나왔다.

루고사 부인

환자는 좀 어땠어?

루고사 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의 일 상황을 물어보았지만, 무기질적인 말투는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유진 루고사는 머리를 긁적이고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닥터 루고사

일단 목숨은 붙여 놨어. 하지만 지속해서 약물 치료를 하지 않으면 결국엔 악화될 거야.

내일 시간 내서 약을 좀 구해봐야겠어...

루고사 부인

......

루고사 부인은 붕대를 내려놓고, 말없이 닥터 루고사가 든 커피잔을 받아가서 앞치마로 겉을 닦았다.

닥터 루고사

왜 그래?

루고사 부인

우리 저축해 둔 돈이 얼마 안 남았어.

남은 돈으로 환자 약을 사면 다음 주 빵 살 돈도 안 남을 거야.

아내의 그 말은 유진 루고사를 깊은 근심에 빠뜨렸다.

몇 년 전, 그는 붕괴복사를 완전히 치료하겠다는 뜻을 품고서 그린존을 떠나 이곳에 와서 자신의 사비를 털어 옐로우존 주민들을 치료했다.

그는 모든 정신력과 열정을 이 황폐한 땅에 바쳤지만, 이는 동시의 자신의 가정까지 휘청거리게 했다.

루고사 부인

...루카스를 위해서라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원래부터 몸이 안 좋은 애였는데, 당신 진료소를 뒷바라지하느라 상태가 더 악화됐어.

딱 한번만이라도 괜찮아, 우리 미래도 진지하게 생각해줘, 응?

천천히 흔들리는 촛불은 마치 닥터 루고사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같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닥터 루고사는 결정을 내렸다.

닥터 루고사

그래... 여보 말이 맞을지도.

루카스를 위해선 우리부터 잘 살아야지...

......

몇 개월 후, 번화가 부근에 새로 차린 진료소.

슬럼가를 떠난 닥터 루고사는 노련한 의술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 순식간에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다.

수많은 부호와 유명인들이 쓴 초청장을 받아든 루고사 일가는 다시 그린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루고사 부인은 들뜬 기분으로 짐을 싸다가도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초청장을 꺼내 몇 번이고 읽었다.

루고사 부인

여보, 이게 정말 꿈이야 생시야... 우리가 그린존에 돌아가다니!

집 안은 아내의 흥분된 목소리로 가득했지만, 닥터 루고사는 여전히 근심에 잠긴 듯했다.

루카스

아빠, 무슨 생각해?

루카스는 닥터 루고사의 팔을 흔들며 호기심에 두 눈을 반짝였다.

루고사 인형은 미소 지으며 루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의 키는 몇 개월 전보다 꽤 자랐고 안색도 많이 좋아졌다.

닥터 루고사

아빤 출발하기 전에 어디 좀 갔다 올게...

루카스

어디에?

닥터 루고사

아빠가 예전에 진료소를 하던 곳 말이야, 그 좁고 낡은 골목에... 루카스도 같이 갈까?

루고사 부인

그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에 뭘 보러 가게? 감상에 젖고 싶으면 혼자 가든가, 루카스 힘들게 데려가지 말고.

아내의 다소 차가운 말이 부자간의 화목한 대화를 깼다. 루카스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선 곧바로 엄마 곁으로 돌아갔다.

유진은 아내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몸도 마음도 고생하다가 드디어 벗어났으니, 이제 그곳은 쳐다보기도 싫은 게 당연하다...

닥터 루고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묵묵히 코트를 걸치고 집 문을 열었다.

루고사 부인

일찍 돌아와, 오후에 열차 시간 늦지 말고!

닥터 루고사

그래 그래.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닥터 루고사는 짐을 살짝 정리하고 기억 속 익숙한 슬럼가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수록 주변의 풍경은 서서히 초라해져 갔다——

황폐한 화단, 늘어진 전깃줄, 흔들거리는 간판...

익숙한 길거리가 닥터 루고사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니, 옛날 추억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몇 년 전, 의학원 졸업식.

학생들은 한 줄 한 줄씩 단상에 올라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스승들에게서 졸업장을 받았다.

스포트라이트가 젊고 열의에 찬 얼굴들을 비추고, 좌석에선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그중에는 방금 단상에서 내려와 첫 줄에 앉아있는 졸업생 대표 유진 루고사도 있었다.

동기A

유진, 베오그라드랑 모스크바 쪽 랩실에서 싸그리 초대장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갈 거야?

동기B

아직도 안 고른 걸 보면 더 좋은 곳을 찾았나 보지! 야, 숨기지 말고 좀 말해 봐!

닥터 루고사

응, 이미 결정했어.

닥터 루고사의 눈은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 원대하고 광명에 찬 비전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다...

닥터 루고사

나는 옐로우존에 가겠어, 환자들이 가장 의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

동기A

옐로우존!? 유진, 너 뭐 잘못 먹었냐!?

옆자리 동기의 놀란 소리가 주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동기B

유진, 생각 잘해야 돼, 이상주의는 이 시대에 안 통한다니까!

동기C

그래, 네가 뭐 억만장자라서 돈이 썩어 넘친다면야 오염지대에 기부 좀 하고 그래도 상관 없지.

근데 네 지금 경제 상황으로 그 가난한 깡촌에 내려가겠다고? 백퍼 본전은커녕 적자만 볼 거라니까?

아무리 봐도 진짜 에바야!

닥터 루고사

다들 고마워.

하지만,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나는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킨다"...

이것이 의료인으로서 나의 초심이고 내 삶의 의미야.

난 포기하지 않겠어.

......

닥터 루고사는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눈 앞의 길거리는 몇 년 전 그가 이곳에 막 왔을 때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 당시 자신의 의술로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고치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장대한 뜻을 품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허무하기만 했다.

???

하아...

문득 들려온 힘없는 한숨이 닥터 루고사를 다시 현실로 불러냈다.

연세가 지긋지긋한 난민 노인이 수심 깊은 얼굴로 계단가에 앉아, 쭈글쭈글한 손으로 오른다리를 계속 주무르고 있었다.

닥터 루고사

안톤 어르신, 어디 편찮으십니까?

노인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 겨우 유진 루고사의 얼굴을 알아봤다.

늙은 난민

오... 루고사 선생 아닌가? 오랜만이구먼, 잘 지내고 있나?

닥터 루고사는 쪼그려 앉아 배낭을 열고 노인의 다리 상처를 살펴보았다.

몇 개월 전 노인에게 감아 주었던 붕대가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규소화가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닥터 루고사

상처가 심해지셨잖아요...

늙은 난민

나 같은 늙은이가 낫든 안 낫든 무슨 차이가 있겠나...

난민 노인은 껄껄 웃다가, 바로 또 한숨을 쉬었다.

늙은 난민

불쌍한 건 유리야지... 아들 때문에 선생을 줄기차게 찾아다니더만.

유진 루고사는 그 이름을 듣고, 그가 떠나기로 한 그날 밤 방문했던 난민 모자를 기억해냈다.

닥터 루고사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는 아직 괜찮습니까?

늙은 난민

하아... 유리야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긴 했는데... 며칠 전에 결국 리온이 죽어버렸지 뭔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살아봐야 계속 고통에 시달렸을 텐데, 차라리...

닥터 루고사

......

닥터 루고사의 눈에 짙은 암운이 드리웠다. 황폐한 과거의 풍경은 지금도 여전하고, 잠깐뿐인 빛으론 결국 쉴 틈 없이 들이닥치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다...

노인을 간호한 후 그는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곳에 있을수록 마음은 더욱 아파 올 뿐이었다.

닥터 루고사

<color=#A9A9A9>여기는 아직도 내가 필요한데...</color>

닥터 루고사는 기운 없이 왔던 길을 따라서 돌아갔다.

......

집 문을 여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그의 귀를 찔렀다.

닥터 루고사

......?!

나갈 때만 해도 깔끔했던 집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피웅덩이가 천천히 굳어가고, 그 웅덩이 한가운데엔 루카스의 마른 몸이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제야 돌아오셨네, 의사 양반.

어두운 거실 구석에, 누더기 차림의 한 난민 여성이 날카로운 비수를 루고사 부인의 목에 대고서 비참하고 독기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루고사 부인

여, 여보...

이 여자가... 루카스를 죽였어... 이 미친 여자가...

루고사 부인은 눈물이 범벅이 되어 무력하게 떨고 있었다. 반면 칼을 쥐고 있는 난민 부녀의 눈빛은 갈수록 어두운 광기에 물들어갔다.

난민 부녀

루고사 선생, 정말 오랜만이야... 엄청 기다렸다고...

닥터 루고사

칼을 내려놓으세요... 유리야 씨...

유리야

그날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하지?

댁이... 댁이 책임지고 약을 구해서 우리 리온을 살려주겠다고 했잖아...

유리야

<size=50>근데 왜 도망쳤어!?</size>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내뺄 수가 있냐고! 우릴 내팽개치고, 네 맹세를 내팽개치고!

닥터 루고사

그게 아니라...

유리야

못 살리겠으면 애초에 장담을 하지 말든가!

우리 불쌍한 리온, 마지막까지도 널 찾고 있었어... 네가 자기의 천사라고... 절대 버리지 않을 거라고...

네가 알아...? 내 품에 안겨서, 미친 듯이 괴로워하면서, 괴물처럼 어떤 꼴로 죽어갔는지 네가 아냐고!

닥터 루고사

......

유리야

<size=50>네가 우리 아들을 죽였어!</size>

맹세해 놓고, 지 혼자 살겠다고 우리는 아는 척도 안 하고!

너 같은 상류 사회에서 온 위선자들은 다 똑같아, 속으론 우릴 무시하고 우리가 다 사라지길 바라지!?

내 새낀 이미 죽었으니... 너도 똑같이 대가를 치러야지!

유리야는 미친듯이 웃으며 자기 목에 칼을 갖다댔다.

유리야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어! 깔깔깔깔깔....

<size=50>내 마지막 가는 길, 똑똑히 지켜봐!!</size>

유리야가 자신의 대동맥을 그었다.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눈엔 초점이 사라지고, 입에선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닥터 루고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닥터 루고사

아니야... 아니야...

격렬한 이명이 엄습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괴로움에 까무러치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닥터 루고사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게 내 평생의 뜻이야... 루카스도 분명 이해해 줄 거야.

......

2주일 후, 루고사의 진료소.

마지막 한 푼까지 환자를 치료하는 사업에 쏟아붓고, 닥터 루고사의 가정은 완전히 곤경에 빠졌다.

닥터 루고사

...꼭 가야겠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루고사는 이미 마음을 굳힌 아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내는 시선을 떨군 채 캐리어를 끌고 문가에 서있었다.

어린 루카스는 어머니의 왼손을 잡고, 얼떨떨하고 섭섭한 눈빛으로 닥터 루고사를 바라봤다.

루고사 부인

주방에 마지막 빵이 한 조각 있어, 오늘 아침에 만든 거야... 건강 잘 챙겨, 유진.

닥터 루고사

......

닥터 루고사는 침묵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루카스가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닥터 루고사는 그제서야 루카스의 옷이 이미 누더기꼴인 것을 알아챘다.

분명 한창 뛰놀아야 하는 나이인데, 그의 얼굴은 영양실조로 누렇게 떠 있었다...

닥터 루고사

루카스...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닥터 루고사는 힘겹게 미소를 짜내어, 거친 손바닥으로 루카스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루고사 부인

가자, 루카스.

쿵쿵쿵!

갑자기 바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루고사 부인은 한숨을 쉬고 평소처럼 문을 열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난민 몇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다들 얼굴이 흥분으로 발그레했다.

루고사 부인

유진을 찾아오신 거죠? 지금 안에 있어요...

난민A

아닙니다, 루고사 부인... 저, 저흰 부인과 루고사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러 왔어요!

난민B

선생님께서 돈도 한푼 안 받고 제 아이와 남편을 구해주신 빚은 정말 평생 못 갚을 겁니다! 치료비에 대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저희의 작은 성의입니다!

난민들은 각자 등에 지고 온 바구니를 꺼냈다. 안에는 온갖 음식으로 가득했다. 감자, 채소, 우유... 바구니마다 가득 담긴 마음이 황금보다 눈부시게 반짝였다.

난민C

아이고, 우리 루카스 얼굴 야윈 것 좀 보소, 이거 아무리 봐도 영양실조 아니요! 고기 좀 든든허게 멕여야겠구마...

난민D

여기 잘 말린 소시지가 있어요! 부담 갖지 마시고 꼭 받으세요!

루고사 부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난민들이 가져온 음식을 앞다투어 진료소 테이블에 쌓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때 수술대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얼굴들이 지금은 모두 건강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루고사 부인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닥터 루고사가 아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훈훈하게 마주보는 둘은 이미 서로를 향한 믿음을 되찾았다...

......

몇 개월 후, 오늘도 피곤하면서 보람으로 가득한 이른 아침이었다.

난폭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닥터 루고사는 팔걸이의자에서 화들짝 깨어나 허겁지겁 코트를 걸치고 진료소 문을 열었다.

웬 건장한 남자가 문틀에 손을 짚은 채 닥터 루고사를 깔보듯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낯선 남자

댁이 유진 루고사야?

닥터 루고사

맞습니다만... 어떻게 도와드릴——

퍼억!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건장한 남자는 루고사에게 주먹을 날려 바닥에 넘어뜨렸다.

닥터 루고사

커헉...

낯선 남자

의사 양반, 여기서 영업을 쫌 오래 했다더만? 근데도 우리 의뢰인한테 인사 한마디 없었다면서?

당신 지금 우리 의뢰인한테 찍혔어. 얼른 떠나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타앙!

낯선 남자가 갑자기 총을 뽑아 탁상의 비커를 쏘아 깨뜨렸다.

닥터 루고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닥터 루고사

그쪽이 말하는 의뢰인이란 건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사명이 있습니다, 여길 떠날 이유는 없어요.

낯선 남자

하,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이유가 있든 없든 댁이 떠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니깐?

혼란 속에, 유진 루고사는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닥터 루고사

알겠다... 의학회의 그 빌어먹을 옹고집들이로군?

낯선 남자

...그건 말하기 좀 그렇고.

닥터 루고사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닥터 루고사

이곳 사람들에겐 내가 필요해, 사명을 다하기 전까진 떠나지 않을 거다!

낯선 남자

그러니까... 마음 굳혔다 이거지?

낯선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걸음을 떼 방 안에 들어왔다.

???

아빠... 무슨 일이야?

그때, 루카스가 2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뽀얗고 작은 손으로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낯선 남자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루고사의 얼굴을 빼닮은 작은 모습을 훑어봤다.

낯선 남자

댁 아들이야? 억수로 귀엽게 생겼네...

닥터 루고사

루카스,신경쓰지 마! 빨리 올라가——!

타앙!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닥터 루고사는 반사적으로 루카스에게 몸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뜨거운 액체가 루카스의 작은 흉곽에서 스며나와 닥터 루고사의 하얀 코트를 붉게 물들였다.

생명의 기운이 조금씩 루카스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순진하고 선량한 아이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천사처럼 어루만졌다...

철컥.

낯선 남자의 총구가 닥터 루고사의 뒤통수에 닿았다.

낯선 남자

이번 한 번은 따끔한 경고로 끝내겠어.

당장 병원 정리하고 여기서 꺼져. 안 그러면 다음엔 누가 죽을지 장담 못하니까... 알아들었지?

격렬한 이명이 엄습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식어가는 루카스의 시신을 부둥켜안은 채 바닥에 쓰러져 혼절했다...

닥터 루고사

아니야, 여보. 아직 궁지에 몰린 건 아니야.

날 믿어줘, 내일부터 이 돈으로 가족에게, 그리고 환자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줄 테니까...

사흘 후, 진료소.

쾅!

닥터 루고사는 낡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흥분하며 집 문을 몸으로 부딪쳐 열었다.

닥터 루고사

여보! 우리 이제 살았어! 첫 달치 이자를 받았다고!

고기하고 우유를 샀으니까 빨리 와서 보라고!

루고사 부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방에서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오랜만에 탁상에 놓인 식재료들을 보며, 초췌한 얼굴에 드디어 빛이 돌아왔다.

루고사 부인

우유는 살짝 갔고, 고기도 그냥저냥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루카스도 굶지 않겠네!

루고사 부인은 식재료의 질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주방으로 가져갔다.

루카스는 씩씩하게 어머니 대신 식빵을 자르면서, 몰래 아버지에게 귀엽게 메롱을 했다.

닥터 루고사

...첫 이자라 많진 않지만, 일부는 환자 치료에 써야 해.

돈을 더 벌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쿵쿵쿵——

다급한 노크 소리가 부부의 대화를 끊었다.

의사가 문을 열자마자 아이를 안은 난민 어머니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왔다.

난민의 어머니

의사 선생님, 우리 애의 상태가 악화된 것 같아요. 제발——

닥터 루고사

걱정 마십시오, 부인.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닥터 루고사의 여유로운 어조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마력을 품고 있었다. 초조해하던 여자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행낭에서 약물을 한 병 꺼내 빠르고 정확하게 아이의 혈관에 주사했다.

수술대에 누운 아이는 곧 괴로운 신음을 멈추고, 가쁜 호흡도 점차 안정되었다...

난민의 어머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난민 어머니는 닥터 루고사에게 꾸벅 감사를 드리다, 순간 문가에 있는 루카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방금 사온 빵을 베어물고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진료실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고사 부인

이리 온, 루카스! 접시 좀 들어주렴!

루카스

꿀꺽... 네!

난민 어머니는 멀어지는 루카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이의 야위고 괴로워하는 얼굴을 봤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퍼져나갔다...

......

닥터 루고사가 투자로 큰 수익을 보면서 일가족의 생활엔 여유가 생겼다. 그와 동시에 루고사의 도움을 찾는 환자들도 갈수록 많아졌다.

어느 날, 슬럼가 깊은 곳.

닥터 루고사는 환자의 상처를 소독해 주고, 등을 돌려 배낭을 정리하고 진료소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난민A

의사 선생, 가방에 주사약이 그렇게 많은데 저한테 한 대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닥터 루고사

이 약은 중증 환자에게만 쓰는 겁니다, 당신처럼 증상이 경미할 땐 필요가 없어요...

난민B

약이 부족할 일도 있나요? 선생님은 지금 고리대금으로 두둑하게 벌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들었는데요.

역시 그린존 출신이라 돈 버는 솜씨도 기가 막히시네...

닥터 루고사

......

닥터 루고사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집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한 노인이 골목 입구에 앉아 담뱃대를 들고서 느릿느릿 말했다.

늙은 난민

그 바닥은 흉흉한 소문이 많거든, 돈 들고 튀었다는 얘기도 몇 번이나 들었고.

닥터 루고사

설마 그럴 리가요...

닥터 루고사는 겉으론 침착했지만 속으론 떨림을 참을 수 없었다.

난민 노인은 유유히 담배를 한 모금 빨고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

닥터 루고사

<size=50>뭐라고요?! 이사를 가요!?</size>

감쪽같이 텅 비어버린 사무실을 바라보면서, 닥터 루고사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닥터 루고사

그럴 리가요, 분명 오늘 이자를 받으러 오라고 연락했는데...

아 그래, 혹시 바르첼 씨가 새 주소나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나요? 아니면 언제쯤 돌아온다는 언질 없었어요?

난민D

바르첼이 누구요? 그 사람 이름 두덴 아니었소?

당신하고 비즈니스 파트너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닥터 루고사

그럴 수가...

닥터 루고사는 눈앞이 깜깜해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닥터 루고사

망했다... 다 망했어...

닥터 루고사는 넋이 빠진 채 집으로 향했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투자할 자금도, 더 버틸 여력도 없었다...

1개월 후, 궁지에 몰린 의사는 진료소 중앙에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본적인 의료용품을 제외하고 다른 가구와 집기는 죄다 전당포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그래봤자 다달이 나가는 돈을 메꾸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루고사 부인

<size=50>루카스!? 루카스!!</size>

아내의 비명이 닥터 루고사의 쇠약해진 신경을 자극했다.

루카스는 어젯밤부터 고열로 혼수 상태에 빠졌고, 집에 남은 마지막 약을 먹여도 영 차도가 없었다...

닥터 루고사는 바로 안방으로 달려갔다가, 루카스를 안고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아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루고사 부인

루카스... 루카스가...

아내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닥터 루고사는 떨리는 손으로 루카스를 건네받아 수술대 위에 눕혔다.

청진기의 차가운 감촉을 따라, 루카스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가슴에서 튀어나와 터져버릴 듯이 쾅쾅 울렸다...

닥터 루고사

<size=50>하늘이시여, 제발 루카스를 놓아주십시오!!</size>

닥터 루고사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진료소의 정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조용하고 쌀쌀한 길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소리질렀다.

닥터 루고사

<size=50>제발...! 제발 음식을 좀 나눠주십시오!! 저희 집 아이가 죽어갑니다! 우리 루카스가 죽어간다고요!!!</size>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차가운 바람 속, 누추한 문짝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그의 외침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