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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9 · 세로변형

35-R2 여름 저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할 리도 없었다.

-54-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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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그린존의 중심지.

권위 있는 바이오 의학 포럼의 폐회식 현장. 각국의 의학 전문가와 교수 및 학자들이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고 술잔을 들고서 엄숙하면서도 편한 분위기를 즐겼다.

그중 식장 정중앙의, 회색 양복 차림에 나이는 마흔쯤 돼 보이는 남성이 모두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독일 약품 심사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유진 루고사였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옆을 지나가며 잔을 들어 인사하는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동업자A

축하드립니다, 루고사 선생님.

뮐러 의원께서 쟁쟁한 후보들을 전부 마다하고 선생님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신 걸 보면, 의원님께 크게 인정받은 거라 봐도 되겠지요?

닥터 루고사

과찬이십니다... 의료에 몸담은 자로서 약소하나마 힘을 다했을 뿐이죠.

하물며 저번에 추진한 신약은 합병증의 진행을 지연시킬 뿐 복사감염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는 못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봐야지요.

닥터 루고사는 겸손하게 잔을 들고, 신사의 품격이 넘치는 모습으로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

반갑습니다, 루고사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여기가 참으로 시끌벅적하군요!

???

제 소개를 깜박했군요, 하워드 슐츠입니다. 슐츠 제약 그룹의 상무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닥터 루고사는 품위 있게 손을 내밀며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슐츠의 기름기 많은 손바닥과 아부 떠는 태도는 그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지게 했다.

슐츠

아이고, 정말 귀인이 따로 없으십니다! 이렇게 팔팔한 나이에 나라의 기둥이 되시다니! 장래엔 분명 복사감염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을 가져다주고, 우리나라에 위대한 공헌을——

닥터 루고사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하던 말을 방해받은 하워드 슐츠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장사꾼 특유의 영리함과 포용력을 발휘하며 장단을 맞췄다.

슐츠

용무랄 것까진 없지만... 인사나 드릴까 싶어 찾아뵈었습죠!

저도 제약업계 사람이고, 저희 공장에서 추진하는 복사감염 관련 약품도 선생님의 눈을 거쳐야 하니까... 미리 말씀 잘 나눠서 앞으로 으쌰으쌰 해봅시다 뭐 그런 거지요.

닥터 루고사

알겠습니다, 슐츠 씨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쪽 공장의 약품이 검사를 통과하고 출시 조건에 부합하기만 하면 늦지 않게 판매 허가를 내 드릴 겁니다.

슐츠

여부가 있겠습니까! 과연 루고사 선생님, 원칙에 철저하십니다...

슐츠

그럼 건배하죠, 앞으로의 협력과 우정을 위하여!

닥터 루고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하워드 슐츠의 의미심장한 주시를 받으면서, 그는 등을 돌려 식장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2주일 후, 약품 심사 위원회 사무실.

유진 루고사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서 책상 위의 두 서류를 바라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닥터 루고사

슐츠 제약 그룹의 α형 시약, 3상 임상시험에서 불량반응 발생률이 기준치를 훨씬 넘었는데... 왜 이 많은 감독관과 심사 전문가 중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거지?

다들 이 측정 보고서를 본 게 확실한가?

비서

예, 루고사 위원장님. 이것 전부 각 전문가가 자세한 심사를 거쳐서 내린 결정입니다.

사무실 비서는 맞은편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닥터 루고사는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먹구름이 바로 앞의 높은 건물들 위에 드리우고, 정화탑 가장자리 지대에는 황폐한 빈민 지역이 도시의 상처처럼 하루하루 곪아가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비서

그럼 저번처럼 제가 대신 동의 도장을 찍을까요?

닥터 루고사

잠깐만 기다리게.

유진 루고사는 비서가 빼가려는 보고서를 눌렀다.

비서

위원장님?

닥터 루고사

"그 사람" 하고 얘기를 해봐야겠네.

비서

"그 사람" 이라 하시면...?

닥터 루고사

심사위원회 분들께 회의실에 모이라 하게, 그분들과 좀 대화해 봐야겠어.

......

약품 심사 위원회 건물 회의실.

닥터 루고사는 측정 보고서를 그 자리의 모두에게 다시 나눠주었다.

전문가A

...이건 이미 회답을 마친 서류 아닙니까?

닥터 루고사

약품 심사 위원회가 존재하는 의미는 마지막 선을 지키면서, 약의 품질과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다시 이 서류를 다시 살펴보고 각자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마땅한 회답을 하길 바라는 바요.

회의실이 침묵에 빠졌다, 꽤 많은 구성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루고사의 시선을 피했다.

전문가A

루고사 위원장님, 슐츠 그룹이 저렴한 가격으로 난민에게 약품을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선행위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다루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닥터 루고사

난민들은 불량 약품이나 쓰라는 말이오?

전문가A

......

전문가B

난민들은 의료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렴한 약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해결법이 아니겠습니까?

닥터 루고사

난민 의료서비스 부족과 불량 약품 생산은 별개의 문제요.

슐츠 그룹이 저렴한 약품을 생산해서 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건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이지.

하지만 그건 절대 불량 약품을 생산해도 될 이유가 아니오.

전문가C

세상에 저렴하면서 안전한 약품이 어딨습니까!? 그런 손해 보는 장사를 누가 하겠...

닥터 루고사

어떻게 해내냐는 건 우리가 신경쓸 게 아니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약품의 품질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유진 루고사의 단호한 눈빛이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여전히 답답한 침묵이었다.

전문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선 하나둘씩 일어나 회의실에서 줄줄이 나갔다...

험난한 여정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 정신 나간 광경을 보고 있으니 닥터 루고사마저 한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대체 틀린 건 이 세상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비서

위원장님... 모두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위원장님의 뜻은요?

닥터 루고사는 팔걸이의자에 등을 기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닥터 루고사

......

나는 서명하지 않을 걸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돼...

닥터 루고사

하워드 슐츠에게 전화해.

시간을 잡아서 내가 직접 대화하겠네.

......

다음날, 슐츠 제약회사, 상무이사 사무실.

닥터 루고사는 측정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반면 슐츠는 하찮다는 듯 웃으며 손에 든 담뱃대에 불을 지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넓고 깔끔한 방 안에 퍼졌다.

슐츠

루고사 위원장님. 이건 그냥 사소한, 고작 0.01%의 차이지 않습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지 않을까요?

닥터 루고사

고작 0.01%라고? 슐츠 씨, 이 약품이 허가를 받고 출시되면 0.01%에 수백만의 인구가 곱해지는 거요.

그래도 이게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시오?

하워드 슐츠는 피곤하다는 듯 닥터 루고사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슐츠

α 시약은 저가 시장에서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만들었기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가격으론 이윤이 거의 나오지도 않아요...

불량반응율을 이 정도까지 억제한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겁니다... 소비자들도 분명 양해해 줄 거라고 봅니다.

닥터 루고사

그렇다고 불량 약품을 생산해도 되는 건 아니오.

슐츠

유진 루고사 선생,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 못하시나 본데...

당신의 선택지는 두 개뿐입니다. 찬성 아니면 기권이죠.

당신이 테이블을 엎고 세 번째 선택을 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대신 수정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닥터 루고사

...좋소, 충고 고맙군.

닥터 루고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홱 뒤돌아서 사무실에서 나갔다.

한편 그 뒤에선, 하워드 슐츠가 비꼬는 듯 콧방귀를 뀌고서 교활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2주일 후.

- 곧이어 [이슈 포커스]가 방송됩니다 -

국가 약품 심사 위원회 위원장 유진 루고사의 학술부정 의혹을 둘러싼 소송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국 의사협회의 전문가 수십 명이 근일 공동성명을 내어, 루고사 위원장이 학부생 시절과 현업 시절에 발표한 연구 논문들의 표절 의혹을 조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현재 독일 위생부가 이 안건에 개입하여, 루고사 위원장은 정직되어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관련자의 언급에 따르면, 표절 의혹이 확실시될 경우 유진 루고사는 의사 면허를 영구 박탈당해 이후 어떠한 의료 활동에도 종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약품 심사 위원회 사무실.

비서

루고사 선생님, 뮐러 의원의 전화는 아직도 연결이 안 됩니다. 계속 걸까요?

닥터 루고사

...됐다.

닥터 루고사는 손을 내젓고, 창가에서 팔걸이의자 옆에 돌아와 천천히 앉았다.

고작 1개월만에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이렇게 추락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이젠 뮐러 의원마저 그를 포기했다...

비서

...물건은 다 정리했습니다.

차도 뒷문에 도착했는데, 지금 가시겠습니까?

루고사는 의자를 돌려 마지막으로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짙은 먹구름에, 저 멀리 보이는 황무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할 리도 없었다.

닥터 루고사

가야지, 나도 이젠 떠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