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로변형
EP.13.9 · 세로변형

35-R3 피아노 오중주 B단조

그 때의 아름다움과 행복은 이미 되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변해 있었다.

-54-D-3

1 / 96
전체 대사 보기 (84줄)

수십 년 후, 갈라테아 그룹 대강당.

신형 복사감염증 치료제 "이둔"의 신문 발표회로 현장은 한창 뜨거웠다.

강단 아래에선 쉴새없이 터지는 플래시가 발표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비췄다.

비록 임상시험 초기에 "이둔"의 치료효과에 대한 갈라테아의 발언은 여러 전문가들의 의혹 제기를 받았지만,

오늘 발표회에선 그레이 여사와 또 한 명의 거물급 의학 전문가의 참석으로 요란하던 여론이 많이 가라앉았다.

기자A

그레이 선생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다음 질문은 유진 루고사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국가 약품 심사 위원장직을 사퇴한 후 묵묵히 2선으로 물러나셨죠... 독일 위생부도 결국은 선생님의 의혹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고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선생님께선 "의학 전문가" 신분으로 대중 앞에서 활동을 재개하셨는데... 혹시 당시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신의 전문성과 권위를 확실히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감사합니다.

머리숱이 새하얀 노인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할 때, 사회자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사회자

죄송하지만, 지금은 "이둔" 발표회이니 무관계한 질문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루고사 선생님께선 붕괴복사 치료제 연구 분야에서 무척 실력 있는 임상 전문가이십니다.

재작년 슐츠 제약 그룹의 악질 사건이 폭로되고 관련 내부 문건의 공개로도 충분한 증명이 되고...

닥터 루고사

커험, 괜찮습니다.

닥터 루고사는 상냥하게 손을 흔들고, 사회자와 앞에 있는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단상 아래의 소동도 바로 조용해졌다. 마치 방금 전의 어떤 것도 닥터 루고사의 초연함과 여유로움을 흔들 수 없는 것 같았다.

닥터 루고사

저는 어떠한 학술부정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위원장직을 사퇴한 것은 부정 의혹 때문이 아니라, 일부 기업의 압박과 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로 비롯된 부득이한 희생이었습니다.

물론 제게 과오가 전혀 없다고 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위원장으로서 슐츠 그룹의 불법 약품 유통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소불위를 눈 뜨고 지켜보다 심각한 후폭풍을 초래했지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닥터 루고사

그래서 오늘 제가 갈라테아 그룹의 "이둔"을 홍보하는 자리에 나선 것은, 의학 전문가로서의 판단뿐 아니라 양심적 고민에서 비롯된 선택입니다.

"이둔"의 실험 데이터는 모두가 보셨을 것이고, 이것이 짊어진 사명은 더없이 숭고합니다.

반평생 제자리걸음이었던 제가 이렇게 늙어서라도 저렴하고 효율적이고 안전한 복사감염증 약품을 보게 되어... 정말 진심으로 감동을 느낍니다.

"이둔"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중이 함께 여명의 광휘를 지켜보게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상으로 발언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하던 대강당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꽤 많은 사람이 기립 환호를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닥터 루고사에게 탈모 경례를 했다.

같이 관계자석에 앉은 그레이 여사는 곁눈질로 닥터 루고사를 훑어보며,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갈라테아 그룹, 고급 사무실.

그레이

바쁜 와중에 "이둔" 발표회에 참석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요즘 일은 잘돼 가시나요?

그레이는 커피잔을 닥터 루고사 앞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은 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닥터 루고사

사람이 늙어서 몸이 좀 불편합니다만... 일에 지장은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좋소이다.

그레이

다행이군요.

그레이는 닥터 루고사가 차분하게 커피를 마시는 움직임을 주시했다.

세월이 이 연세 지긋한 노인의 몸에 자국을 잔뜩 남겼음에도 그의 맑고 지혜로운 눈빛은 변함없었다.

그 바다처럼 깨끗한 푸른 눈동자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암류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레이

오늘의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이둔"에 대한 찬사로 많은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셨죠.

그러고 보니 아직 선생님과 "이둔"에 관해서 깊게 토론해 본 적이 없군요.

닥터 루고사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그레이의 시선을 마주봤다.

닥터 루고사

젊었을 때라면 오늘과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지금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결국 대가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이둔"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희생도 모두 값진 것이 되겠지.

설사 이것으로 천년만년 오명을 짊어진다 하여도, "이둔"으로 살아남은 인류는 우리의 공적에 감사를 표할 것이라 믿소.

그레이

시비와 공과는 모두 후대의 평가에 맡기겠단 말씀이시군요?

닥터 루고사

그렇소.

그레이는 의미심장하게 웃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이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오늘 루고사 선생님께 드릴 중요한 물건이 있답니다.

새하얀 안방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왜소한 형체가 낯을 가리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수줍음과 순수함을 띤 얼굴로 그늘에서 나왔다.

닥터 루고사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빛이 격변했다.

닥터 루고사

루... 루카스?

루카스

......

그의 목소리는 저절로 떨렸고, 몸은 두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그레이

조심하세요.

그레이가 손을 내밀어, 노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전에 부축했다. 차가운 감촉에 닥터 루고사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린 끝에, 눈앞의 모습이 헛것이 아님을 겨우 받아들였다.

그레이

루고사 선생님, 우리의 협력에 대한 성의로 갈라테아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비록 생체모방 인형으로 세상을 떠난 아드님을 대신할 수야 없겠지만, 이 아이에게 상당한 의학 지식을 주입하였으니 조수로서는 충분할 것입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닥터 루고사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남자아이 인형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아 그 맑은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일어서서 감탄하며 그레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루고사

갈라테아 그룹의 과학 실력은 정말 굉장하구려.

그레이

칭찬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협력 기회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루카스

......

"루카스"는 순진하고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묘한 정적이 지나고, 자상한 얼굴의 백발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따듯한 손으로 인형의 손을 쥐었다...

......

1개월 후, 유진 루고사와 청년 의사 일동은 "국제 인도주의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신소련 옐로우존에 가서 의료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닥터 루고사는 루카스의 조심스러운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황량한 폐허를 밟는 순간, 과거의 일들이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 희망을 품고 옐로우존에 향했고, 또 어떻게 신념을 잃지 않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갔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단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아내도 떠나고...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조수인 "루카스"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인형이라 해도, 그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한 진짜 자식에 비하면 결국 저열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

<size=50>의사 선생님...! 제발 저희 아버지를 구해주세요!</size>

처절한 호소가 등뒤에서 들려와, 닥터 루고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루한 옷차림의 난민이 눈에 들어왔다.

난민 뒤에는 얼굴이 엉망인 노인이 그의 등에 업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노인의 몸엔 복사 감염증으로 인해 끔찍한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다.

닥터 루고사가 망설이며 발을 떼려 할 때, 옆에 있던 청년 의사가 갑자기 그를 제지했다.

젊은 의사

루고사 선생님, 복사감염증은 이번 진료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쪽 환자분도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저쪽을 보시죠.

청년 의사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가까운 테이블 앞에 노인 환자들이 일찍부터 줄을 서 있었다.

하지만 슬쩍 보기만 해도 닥터 루고사는 이게 전부 사전에 짜인 단순한 보여주기용 쇼임을 간파했다...

그는 묵묵히 주먹을 움켜쥐고서... 결정을 내렸다.

닥터 루고사

이쪽은 말기에 가까운 환자요... 내버려둘 수는 없소.

청년 의사의 주시를 받으며, 유진 루고사는 루카스를 데리고 아버지를 업은 난민에게 다가갔다...

닥터 루고사

환자 피부 규소화 수준은?

루카스

3급, 18.6%입니다.

닥터 루고사

합병증 가능성은?

루카스

...스캐너가 없어 지금은 측정하기 힘듭니다.

닥터 루고사

그럼 먼저 1호 약물로 상태를 안정시키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품함 안에서 맑은 용액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약물을 주사기로 빨아들인 후 닥터 루고사에게 건넸다.

닥터 루고사는 습관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어 더듬거리다, 몇 초 후에야 환자 옆이 텅 비어있음을 인식했다.

여긴 실험실이 아니니 주사 보조 설비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구에 너무 오래 의존했다. 마치 항상 남이 밥을 떠먹여 주는 아이가 가장 간단한 수저 하나 쓰질 못하는 것처럼...

닥터 루고사가 멈칫하자 난민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루카스

선생님, 제가 할게요.

루카스가 주사기를 자연스레 받아서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했다.

닥터 루고사는 약간 자책감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고, 주머니를 한참 뒤지다가 겨우겨우 명함을 한 장 꺼냈다.

닥터 루고사

어음... 아버님의 상태는 일단 안정됐습니다. 하지만 증상을 완전히 억제하려면 추가적인 혈청 주사가 필요합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여기 제 진료실 주소가 있으니, 한 달 후 아버님의 상황이 안정되면 찾아오시면 됩니다, 치료비는 저희 쪽에서 전액 부담하겠습니다...

난민

하지만 통행증이 없어서 그린존엔 못 들어가요...

마음만은 감사합니다, 일단 하루하루 버티면서 다른 의료봉사 단체를 찾아볼게요.

닥터 루고사

......

난민의 무거운 미소는 닥터 루고사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저 난민 부자가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봤다...

닥터 루고사

...가자꾸나, 루카스.

닥터 루고사는 난민에게 허리를 숙이고, 난민의 절망에 찬 울먹임과 만류를 뒤로한 채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닥터 루고사

...염증이 의심되는군요, 채혈 검사가 필요합니다.

환자의 증상을 간단히 진찰하고 닥터 루고사는 능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루카스가 약품함에서 시험관과 채혈 바늘을 꺼냈다.

닥터 루고사

왼팔을 뻗어주십시오.

환자는 지시에 따라 손을 수건 위에 올렸고, 닥터 루고사는 소독약을 묻힌 솜구슬로 피부 표면을 문지른 다음 바늘을 받았다.

가느다란 혈관은 마치 바닥에 떨어진 실오라기처럼 찾기가 힘들어, 닥터 루고사는 몇 번을 찔러봐도 혈관을 찾지 못했다.

환자가 아픔에 이를 악물자, 닥터 루고사의 심정은 더욱 초조해졌다.

루카스

선생님, 제가 할게요.

닥터 루고사

...미안하구나.

닥터 루고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늘을 루카스에게 넘겼다.

루카스는 빠르게 혈관을 찾아내어 능숙하게 채혈을 마쳤다.

환자에게 이후 주의사항을 연신 당부하고 나서야, 루카스는 환자의 팔을 부축하며 천천히 멀리 배웅했다.

닥터 루고사는 망연하고도 풀죽은 눈으로 루카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노쇠한 자신의 두 손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난민A

열이 내렸다! 우리 여동생 이제 살 수 있겠어!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좁은 진료실 안에서 10대 소년이 흥분하며 방방 뛰어, 낡은 바닥이 삐그덕거렸다.

닥터 루고사

자자, 우리 어린 친구, 흥분하지 말아요...

입으로는 진정하라면서도 닥터 루고사는 이 어린 친구의 환희에 전염되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양팔을 벌려 소년의 포옹을 받았다.

곁눈질로 아내와 아들이 문가에 기댄 채 환하게 웃는 게 보였다...

???

선생님, 일어나세요. 열차가 곧 와요.

닥터 루고사는 피곤에 찌든 눈을 떴다. 마음은 아직도 방금 전 꿈 속의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귀빈 영접실의 환한 불빛에 눈부심을 느끼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닥터 루고사

......

아주 잠깐, 낙담과 허전함이 망치처럼, 그의 가슴에 우울이라는 못을 박았다.

수십 년의 시간, 어둡고 기구했던 세월... 그 때의 아름다움과 행복은 이미 되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변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