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점월
군번줄. 사망한 특전사의 묘비. 그 의미를 엘리아나는 잘 알았고, 아마리스는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갈라테아 그룹의 소유였던 빌딩.
뚜벅.
싸늘한 밤과 어우러지는 주위의 고요함이 가벼운 발소리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모두가 잠들어 네온사인의 야경도 모호하게 삼켜지고 흐릿해진 세상을,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홀로 가로질렀다.
......
그녀는 썰렁한 길거리를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녀의 발밑에는 양쪽의 가로등이 드리우는 기다란 그림자만이 밟혔다.
기온차로 인한 옅은 안개는 그녀의 시야를 몽롱하게 가렸다.
13년 전 그날과 판박이로 불쾌한 축축함이었다.
시간 참 끝내주게 골랐네...
드디어 아마리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저곳, 버려진 빌딩이 그들의 약속 장소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저 텅 빈 건물을 훑었다. 한때 꺼지지 않는 불과 으리으리한 자태를 뽐냈을 터인 이 건물은, 지금은 버려진 폐허에 불과했다.
높이 걸렸던 간판도 모서리 한 쪽으로 위태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정도로.
여기가 바로 아마리스와 엘리아나가 약속한 운명의 종착지, 갈라테아 그룹 제3지부였다.
...장소도 썩 괜찮고.
한껏 내리깔은 목소리는 혼잣말 같았다.
전기가 끊어진 지 한참 된 건물은 온통 깜깜했고, 입구의 유리문도 완전히 박살나 계단 위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흩뿌린 상태였다.
찢어진 엘레베이터의 문 사이로는 그 통로가 훤히 보였고, 저 높은 천장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시계 대신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
아마리스는 어렵잖게 안으로 진입할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찌그러진 문은 그녀가 살짝 힘을 주었는데도 싱겁게 열렸다.
......
벽을 감싸고 꼭대기까지 이어진 계단은 올려다보자니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만화경 같았다.
가까스로 새어드는 달을 제외한다면,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그래서일까. 아마리스의 발걸음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겹쳐, 한 걸음씩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을 과시했다.
척.
봉쇄된 정문을 돌아, 그녀가 중앙 홀에 들어섰다.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 아마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 더없이 익숙하고 가증스러운 얼굴을 응시했다.
엘리아나는 지금 3층 정도 위, 중앙 홀 끄트머리에서 아마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숙하지?
이 물리적인 거리감. 너와 나의 실력차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겠지.
13년이나 지났는데도 넌 여전히 자신만만하구나... 아, 너한텐 그냥 어제 일인가?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리고, 내가 자신만만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 건물, 케찰코아틀 작전 때의 건물이랑 많이 닮았어.
확인하고 보니 비슷하더군, 하지만 구조상 그럴 뿐이야.
특별한 공기 여과 장치라든가, 시끄러운 함정이나 적도 없어.
여기엔 오직 너와 나뿐이야.
아니, 다 합해서 아홉이야. 모두 여기 있어.
올리비아, 크리스탈, 로우렐, 그리고 유라까지.
...그렇지. 그들의 능력 대부분을 내가 갖고 있지.
7명, 그들 모두의 "군번줄"을.
군번줄. 사망한 특전사의 묘비.
그 의미를 엘리아나는 잘 알았고, 아마리스는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늘 밤, 너한테 마지막 선물을 줄게.
그리고 너의 "군번줄"을 받아가겠어.
그러자 엘리아나가 웃었다. 달빛을 등졌는데도, 아마리스에겐 그 웃음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엘리아나는 웃음 자체를 보인 적이 없다시피 했다. 다만 그 손에 꼽을 미소는 볼 때마다 항상 밤을 찢어발기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엘리아나가 갑자기 뭔가를 집어 들더니, 아마리스의 발치로 휙 던졌다.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역시 전사로서의 감각도 잃어버렸구나 아마리스, 방탄복도 안 입고 오다니. "서광"의 작전 장비 규정에 어긋나.
아마리스는 눈 앞에 떨어진 방탄복을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십몇 년 전이든 어제 같든 넌 잘난 척이구나.
뭐, 이번에도 똑같은 루트로 침투하라고? 이번엔 네가 "사형수" 역할이야?
아니... 그건 불공평하지.
공평? 네가 그들을 기습했을 땐 공평했고!?
그들은 모두 정정당당히 맞섰다.
지금 내가 널 마주하는 것처럼.
똑같은 지형, 똑같은 탄약 보급 포인트.
그날마저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네가 잊더라도 난 절대 못 잊어.
다행이네. 10분 주겠어.
오늘 여기서, 내가 너에게, 왜 내가 "서광"에 걸맞는 자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
......
깨어났다... 해냈어!
......
측정 수치가 하나같이 예상 초과야, 이거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의미에 걸맞는...!
밤을 비추는 서광... 팀의 첫 번째 아이니까...
이 애에게 태양을 맡기자.
부디 얘가 우리를 도와, 전부 끝내 줄 수 있기를...
그럼 이름을 "엘리아나"로 하자. 태양의 아이, 하늘이 내린 선물.
......
그래... 그게 좋겠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엘리아나야.
엘리아나, 넌 이 팀의 최중요 인물이다.
그러니 네가 "군번줄"을 계승한다.
...그럼 그들은요?
네가 살아있는 한, 그들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다.
...이는 필수적인 기밀 유지 수단이자,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전술입니까?
그래.
엘리아나 중사, 미안하다.
전투기는 방향을 돌려야 한다.
뭣?! 안 돼, "사형수"가 최우선 목표다!
불가피하다, 사령부를 방어하란 명령이 하달됐다.
큭...!
엘리아나, "군번줄"을 실행하라.
뭐라고요?
아니오... 안 됩니다, 아직 그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케찰코아틀 작전의 총지휘관으로서 명령한다, 즉시 "군번줄"을 실행하라.
그 프로그램을 지금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프로그램 강제 기동. 명령을 실행하라.
......
치직——아마리스... 치직——파괴하라...
......
......아마리스.
너와 나, 우리의 일을... 오늘 밤 끝내자.
...3, 2, 1.
10분. 간다.
0.1초의 오차도 없이, 엘리아나는 정확히 10분 후 총을 쥐고 몸을 돌려 계단을 타고 올랐다.
이 길과 루트. 마인드맵에 새겨진 것처럼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 "죽음의 바다" 위를 부유하던 건물에서도 이렇게 달렸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주위가 온통 전장의 굉음만 들렸었다.
반면, 지금은 조용했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엘리아나의 정신이 붕 뜨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눈팔 때가 아니었다.
너는 항상 고지대에, 항상 남들 배후에 숨길 좋아했지.
그늘 속에 숨은 동생에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씨익 자신감에 가득찬 미소를 지었다.
쉬익!
엘리아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곧장 사무실로 돌격했다.
그러자 바로 반응이 왔다.
탕!
일부러 엘리아나의 추측에 맞장구를 쳐 주듯, 공허한 격발음과 총성이 빌딩 안에서 메아리쳤다.
날아든 총탄은 엘리아나가 딛고 있던 바닥을 스쳐 불똥을 튀겼다.
탕!
탕!
탕!
엘리아나를 뒤쫓는 총탄들은 발자국처럼 뒤를 바짝 따랐고, 그녀가 날렵하게 한 방으로 숨고서야 추격을 멈췄다.
쿠웅!
엘리아나가 문을 세게 닫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총성은 애초부터 헛것이었다는 것처럼 달빛에 숨었다.
그때, 날렵한 그림자가 창문과 창문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녀야말로 최상위 포식자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격수에겐 두꺼운 장애물이 무엇보다 위협적인 적.
적당히 유인만 한다면, 사냥감이라도 사냥꾼이 어디 있는지 추측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아마리스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잘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냈으니,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었다.
너는 과연 어디에 숨을까...
평소처럼, 그 위치에 있을까?
우리의 셀 수도 없이 많은 훈련처럼, 만사 태평하게 내 뒤에 숨어서...
땅그랑!
탄피가 발치에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마리스는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바로 다음 위치로 이동했다.
더 빨리, 더욱 더 빨리 움직여야만 한다. 엘리아나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총을 쥐고 달리는 아마리스의 머릿속엔 이미 이 건물 전체의 구조가 그려졌다.
반드시 엘리아나와 충분히 거리를 벌린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녀의 회피 경로를 예측하고, 최적의 저격 포인트를 찾아야만 했다.
언제나 엘리아나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와 마주하고, 쏘아 맞혀야만 했다.
네 행동 패턴... 다 외우고 있다고...
예전엔 네가 앞에서 모두를 엄호했지...
나는 너 대신 위협을 제거했고...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이번엔 네 어깨 너머가 아니라, 바로 너야...!
타앙——!
우레처럼 울리는 쪽은 밤하늘을 가르는 저격. 소총은 불꽃으로 포효하며 중앙 홀을 가로지르며 사선상의 모든 장애물을 꿰뚫었다.
타타탕!!
비처럼 쏟아지는 쪽은 어둠을 밝히는 총구의 화염. 돌격소총은 불꽃으로 울부짖으며 광풍과 폭우처럼 사선상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두 인형이 퍼붓는 총탄은 교차하며 복도, 난간, 벽을 가리지 않고 꿰뚫고 박살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에 무한히 반사되어 비치는 그들의 얼굴은 믿을 수 없도록 차가웠다.
동시에 탄창을 교체하는 소리, 동시에 전력 질주하는 발소리, 교차하는 탄환과 총성. 13년의 세월에 축적된 감정, 그동안 쌓여 온 울화가 맞부딪혀 폭발했다.
넓고 휑한 빌딩도 이를 다 품기엔 비좁았다.
재장전도 느려!
고작 이 정도도 못 버티는 거냐!?
아 그러셔!
타앙——!
탄창을 교체하는 소리, 멈추지 않고 달리는 소리, 그 와중에 물러서지 않고 응수하는 욕설...
온갖 소음이 뒤섞인 채 건물 안에서 진동해, 양측 다 서로의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탄환은 발사될 때마다 놓쳐선 안 될 기회를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했다.
타앙——!
한 발이 엘리아나의 어깨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아마리스는 그 정도론 아직 한참 모자라단 것을 알았다.
상대의 소체는 예전과 차원이 다르니, 그만큼 쓰러뜨리기 어려워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달리고, 다음 한 발. 다시 달리고 또 다음 한 발...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더 맞혀야 했다.
항상 날 아주 아니꼽게 봤지?
전부터 날 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네, 저격을 내 뒤에서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야!
하, 자의식 과잉이네! 아니꼽게 본 적 없거든!
타타탕!
철컥!
엄폐물 뒤로 몸을 굴리는 0.5초 동안, 엘리아나가 빈 탄창을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압 사격을 멈춰선 안 되었다. 노련한 저격수를 상대하려면, 지속적인 화력을 퍼부어 접근하는 동안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다른 애들만큼 널 존경하거나 우러러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니꼽게 보진 않았다고.
...그래?
우리 아홉 명 중 너는 가장 존재감이 옅은 녀석이었어.
서맨사와 함께일 때조차도 넌 항상 그늘에 숨었지.
그런 너인데, "달"보단 그림자란 별명이 더 어울리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네, 서광 팀은 언제나 너 하나만을 비췄으니까.
우리 모두가 그림자였어!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왜 모두를 배신한 거야!!
모두 너를 사랑했다고! 왜 네 손으로 모두를 죽인 거야!!
그건 자비를 구걸하는 말이냐?
이유란 약자들의 변명이다!
나는 해명 따위 필요 없어!
모두 너를 믿었는데...
니콜은 작전에선 항상 너부터 엄호했고, 로우렐은 네가 유탄에 맞아 팔이 망가졌을 때 묻지도 않고 자기 걸로――
...잡았다.
——!
아마리스의 다음 저격 포인트에 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얼굴.
버려진 빌딩의 최상층은 탁 트인 시야에 엄폐하기도 수월해 저격수에겐 최고의 선택지였다.
엘리아나는 항상 잘 알았다. 아마리스는 언제나 가장 좋은 위치를 찾아낸다는 것을.
강해졌구나...
――하지만 한참 부족해!
SCAR-L의 총구를 마주친 아마리스는 단 0.5초만에 경악에서 벗어났다.
냉철한 판단이었다. 이 거리에서 저 돌격소총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는 그녀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타앙——!
초연을 머금은 불꽃이 뿜어졌고, 총구를 떠난 탄환은 바람을 가르며 아마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쨍그랑!
마인드맵이 사고를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마리스는 곧장 몸을 뒤로 날려, 창문을 깨부쉈다.
——!
틀림없는, 지옥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뒤로 몸을 던지는 아마리스보다도 더 빠르게, 엘리아나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탄환이 문짝을 꿰뚫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그녀도 깨져 흐트러지는 유리창에 도달했다.
창문 너머는 바닥 없는 심연이었다.
휘우웅——
——덥석!
............
아마리스의 몸뚱이는 빌딩의 외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휘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빛은 없기에 누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더라도, 위태롭게 매달린 인형을 알아볼 순 없을 것이었다.
상반신을 창문 바깥으로 뻗은 엘리아나는 다리를 방 안에 단단히 걸쳤다.
그 두 다리의 힘이 지금 두 인형의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알아, 네가 그들한테서 뭘 좀 가져간 거.
이제 그만 돌려줘야지.
...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럼 잘 봐둬, 네가 죽기 전에 보는 마지막 얼굴이니까.
불어온 칼바람이 아마리스의 머리에 붙었다.
그리고, 엘리아나는 아마리스의 마인드맵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전체 대사 보기 (131줄)
갈라테아 그룹의 소유였던 빌딩.
뚜벅.
싸늘한 밤과 어우러지는 주위의 고요함이 가벼운 발소리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모두가 잠들어 네온사인의 야경도 모호하게 삼켜지고 흐릿해진 세상을,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홀로 가로질렀다.
......
그녀는 썰렁한 길거리를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녀의 발밑에는 양쪽의 가로등이 드리우는 기다란 그림자만이 밟혔다.
기온차로 인한 옅은 안개는 그녀의 시야를 몽롱하게 가렸다.
13년 전 그날과 판박이로 불쾌한 축축함이었다.
시간 참 끝내주게 골랐네...
드디어 아마리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저곳, 버려진 빌딩이 그들의 약속 장소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저 텅 빈 건물을 훑었다. 한때 꺼지지 않는 불과 으리으리한 자태를 뽐냈을 터인 이 건물은, 지금은 버려진 폐허에 불과했다.
높이 걸렸던 간판도 모서리 한 쪽으로 위태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정도로.
여기가 바로 아마리스와 엘리아나가 약속한 운명의 종착지, 갈라테아 그룹 제3지부였다.
...장소도 썩 괜찮고.
한껏 내리깔은 목소리는 혼잣말 같았다.
전기가 끊어진 지 한참 된 건물은 온통 깜깜했고, 입구의 유리문도 완전히 박살나 계단 위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흩뿌린 상태였다.
찢어진 엘레베이터의 문 사이로는 그 통로가 훤히 보였고, 저 높은 천장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시계 대신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
아마리스는 어렵잖게 안으로 진입할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찌그러진 문은 그녀가 살짝 힘을 주었는데도 싱겁게 열렸다.
......
벽을 감싸고 꼭대기까지 이어진 계단은 올려다보자니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만화경 같았다.
가까스로 새어드는 달을 제외한다면,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그래서일까. 아마리스의 발걸음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겹쳐, 한 걸음씩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을 과시했다.
척.
봉쇄된 정문을 돌아, 그녀가 중앙 홀에 들어섰다.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 아마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 더없이 익숙하고 가증스러운 얼굴을 응시했다.
엘리아나는 지금 3층 정도 위, 중앙 홀 끄트머리에서 아마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숙하지?
이 물리적인 거리감. 너와 나의 실력차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겠지.
13년이나 지났는데도 넌 여전히 자신만만하구나... 아, 너한텐 그냥 어제 일인가?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리고, 내가 자신만만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 건물, 케찰코아틀 작전 때의 건물이랑 많이 닮았어.
확인하고 보니 비슷하더군, 하지만 구조상 그럴 뿐이야.
특별한 공기 여과 장치라든가, 시끄러운 함정이나 적도 없어.
여기엔 오직 너와 나뿐이야.
아니, 다 합해서 아홉이야. 모두 여기 있어.
올리비아, 크리스탈, 로우렐, 그리고 유라까지.
...그렇지. 그들의 능력 대부분을 내가 갖고 있지.
7명, 그들 모두의 "군번줄"을.
군번줄. 사망한 특전사의 묘비.
그 의미를 엘리아나는 잘 알았고, 아마리스는 더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늘 밤, 너한테 마지막 선물을 줄게.
그리고 너의 "군번줄"을 받아가겠어.
그러자 엘리아나가 웃었다. 달빛을 등졌는데도, 아마리스에겐 그 웃음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엘리아나는 웃음 자체를 보인 적이 없다시피 했다. 다만 그 손에 꼽을 미소는 볼 때마다 항상 밤을 찢어발기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엘리아나가 갑자기 뭔가를 집어 들더니, 아마리스의 발치로 휙 던졌다.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역시 전사로서의 감각도 잃어버렸구나 아마리스, 방탄복도 안 입고 오다니. "서광"의 작전 장비 규정에 어긋나.
아마리스는 눈 앞에 떨어진 방탄복을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십몇 년 전이든 어제 같든 넌 잘난 척이구나.
뭐, 이번에도 똑같은 루트로 침투하라고? 이번엔 네가 "사형수" 역할이야?
아니... 그건 불공평하지.
공평? 네가 그들을 기습했을 땐 공평했고!?
그들은 모두 정정당당히 맞섰다.
지금 내가 널 마주하는 것처럼.
똑같은 지형, 똑같은 탄약 보급 포인트.
그날마저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네가 잊더라도 난 절대 못 잊어.
다행이네. 10분 주겠어.
오늘 여기서, 내가 너에게, 왜 내가 "서광"에 걸맞는 자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
......
깨어났다... 해냈어!
......
측정 수치가 하나같이 예상 초과야, 이거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의미에 걸맞는...!
밤을 비추는 서광... 팀의 첫 번째 아이니까...
이 애에게 태양을 맡기자.
부디 얘가 우리를 도와, 전부 끝내 줄 수 있기를...
그럼 이름을 "엘리아나"로 하자. 태양의 아이, 하늘이 내린 선물.
......
그래... 그게 좋겠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엘리아나야.
엘리아나, 넌 이 팀의 최중요 인물이다.
그러니 네가 "군번줄"을 계승한다.
...그럼 그들은요?
네가 살아있는 한, 그들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다.
...이는 필수적인 기밀 유지 수단이자,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전술입니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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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00CCFF>전투기는 방향을 돌려야 한다.</color>
뭣?! 안 돼, "사형수"가 최우선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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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color=#00CCFF>엘리아나, "군번줄"을 실행하라.</color>
뭐라고요?
아니오... 안 됩니다, 아직 그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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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프로그램을 지금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color=#00CCFF>...프로그램 강제 기동. 명령을 실행하라.</color>
......
<color=#FF0000>치직——아마리스... 치직——파괴하라...</color>
......
......아마리스.
너와 나, 우리의 일을... 오늘 밤 끝내자.
...3, 2, 1.
10분. 간다.
0.1초의 오차도 없이, 엘리아나는 정확히 10분 후 총을 쥐고 몸을 돌려 계단을 타고 올랐다.
이 길과 루트. 마인드맵에 새겨진 것처럼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 "죽음의 바다" 위를 부유하던 건물에서도 이렇게 달렸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주위가 온통 전장의 굉음만 들렸었다.
반면, 지금은 조용했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엘리아나의 정신이 붕 뜨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눈팔 때가 아니었다.
너는 항상 고지대에, 항상 남들 배후에 숨길 좋아했지.
그늘 속에 숨은 동생에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씨익 자신감에 가득찬 미소를 지었다.
쉬익!
엘리아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곧장 사무실로 돌격했다.
그러자 바로 반응이 왔다.
탕!
일부러 엘리아나의 추측에 맞장구를 쳐 주듯, 공허한 격발음과 총성이 빌딩 안에서 메아리쳤다.
날아든 총탄은 엘리아나가 딛고 있던 바닥을 스쳐 불똥을 튀겼다.
탕!
탕!
탕!
엘리아나를 뒤쫓는 총탄들은 발자국처럼 뒤를 바짝 따랐고, 그녀가 날렵하게 한 방으로 숨고서야 추격을 멈췄다.
쿠웅!
엘리아나가 문을 세게 닫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총성은 애초부터 헛것이었다는 것처럼 달빛에 숨었다.
그때, 날렵한 그림자가 창문과 창문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녀야말로 최상위 포식자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격수에겐 두꺼운 장애물이 무엇보다 위협적인 적.
적당히 유인만 한다면, 사냥감이라도 사냥꾼이 어디 있는지 추측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엘리아나는 아마리스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잘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냈으니,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었다.
너는 과연 어디에 숨을까...
평소처럼, 그 위치에 있을까?
우리의 셀 수도 없이 많은 훈련처럼, 만사 태평하게 내 뒤에 숨어서...
땅그랑!
탄피가 발치에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마리스는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바로 다음 위치로 이동했다.
더 빨리, 더욱 더 빨리 움직여야만 한다. 엘리아나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총을 쥐고 달리는 아마리스의 머릿속엔 이미 이 건물 전체의 구조가 그려졌다.
반드시 엘리아나와 충분히 거리를 벌린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녀의 회피 경로를 예측하고, 최적의 저격 포인트를 찾아야만 했다.
언제나 엘리아나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와 마주하고, 쏘아 맞혀야만 했다.
네 행동 패턴... 다 외우고 있다고...
예전엔 네가 앞에서 모두를 엄호했지...
나는 너 대신 위협을 제거했고...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이번엔 네 어깨 너머가 아니라, 바로 너야...!
타앙——!
우레처럼 울리는 쪽은 밤하늘을 가르는 저격. 소총은 불꽃으로 포효하며 중앙 홀을 가로지르며 사선상의 모든 장애물을 꿰뚫었다.
타타탕!!
비처럼 쏟아지는 쪽은 어둠을 밝히는 총구의 화염. 돌격소총은 불꽃으로 울부짖으며 광풍과 폭우처럼 사선상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두 인형이 퍼붓는 총탄은 교차하며 복도, 난간, 벽을 가리지 않고 꿰뚫고 박살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에 무한히 반사되어 비치는 그들의 얼굴은 믿을 수 없도록 차가웠다.
동시에 탄창을 교체하는 소리, 동시에 전력 질주하는 발소리, 교차하는 탄환과 총성. 13년의 세월에 축적된 감정, 그동안 쌓여 온 울화가 맞부딪혀 폭발했다.
넓고 휑한 빌딩도 이를 다 품기엔 비좁았다.
재장전도 느려!
고작 이 정도도 못 버티는 거냐!?
아 그러셔!
타앙——!
탄창을 교체하는 소리, 멈추지 않고 달리는 소리, 그 와중에 물러서지 않고 응수하는 욕설...
온갖 소음이 뒤섞인 채 건물 안에서 진동해, 양측 다 서로의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탄환은 발사될 때마다 놓쳐선 안 될 기회를 하나도 빠짐없이 포착했다.
타앙——!
한 발이 엘리아나의 어깨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아마리스는 그 정도론 아직 한참 모자라단 것을 알았다.
상대의 소체는 예전과 차원이 다르니, 그만큼 쓰러뜨리기 어려워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달리고, 다음 한 발. 다시 달리고 또 다음 한 발...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더 맞혀야 했다.
항상 날 아주 아니꼽게 봤지?
전부터 날 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네, 저격을 내 뒤에서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야!
하, 자의식 과잉이네! 아니꼽게 본 적 없거든!
타타탕!
철컥!
엄폐물 뒤로 몸을 굴리는 0.5초 동안, 엘리아나가 빈 탄창을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압 사격을 멈춰선 안 되었다. 노련한 저격수를 상대하려면, 지속적인 화력을 퍼부어 접근하는 동안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다른 애들만큼 널 존경하거나 우러러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니꼽게 보진 않았다고.
...그래?
우리 아홉 명 중 너는 가장 존재감이 옅은 녀석이었어.
서맨사와 함께일 때조차도 넌 항상 그늘에 숨었지.
그런 너인데, "달"보단 그림자란 별명이 더 어울리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네, 서광 팀은 언제나 너 하나만을 비췄으니까.
우리 모두가 그림자였어!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왜 모두를 배신한 거야!!
모두 너를 사랑했다고! 왜 네 손으로 모두를 죽인 거야!!
그건 자비를 구걸하는 말이냐?
이유란 약자들의 변명이다!
나는 해명 따위 필요 없어!
모두 너를 믿었는데...
니콜은 작전에선 항상 너부터 엄호했고, 로우렐은 네가 유탄에 맞아 팔이 망가졌을 때 묻지도 않고 자기 걸로――
...잡았다.
——!
아마리스의 다음 저격 포인트에 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얼굴.
버려진 빌딩의 최상층은 탁 트인 시야에 엄폐하기도 수월해 저격수에겐 최고의 선택지였다.
엘리아나는 항상 잘 알았다. 아마리스는 언제나 가장 좋은 위치를 찾아낸다는 것을.
강해졌구나...
――하지만 한참 부족해!
SCAR-L의 총구를 마주친 아마리스는 단 0.5초만에 경악에서 벗어났다.
냉철한 판단이었다. 이 거리에서 저 돌격소총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는 그녀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타앙——!
초연을 머금은 불꽃이 뿜어졌고, 총구를 떠난 탄환은 바람을 가르며 아마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쨍그랑!
마인드맵이 사고를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마리스는 곧장 몸을 뒤로 날려, 창문을 깨부쉈다.
——!
틀림없는, 지옥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뒤로 몸을 던지는 아마리스보다도 더 빠르게, 엘리아나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탄환이 문짝을 꿰뚫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그녀도 깨져 흐트러지는 유리창에 도달했다.
창문 너머는 바닥 없는 심연이었다.
휘우웅——
——덥석!
............
아마리스의 몸뚱이는 빌딩의 외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휘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빛은 없기에 누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더라도, 위태롭게 매달린 인형을 알아볼 순 없을 것이었다.
상반신을 창문 바깥으로 뻗은 엘리아나는 다리를 방 안에 단단히 걸쳤다.
그 두 다리의 힘이 지금 두 인형의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알아, 네가 그들한테서 뭘 좀 가져간 거.
이제 그만 돌려줘야지.
...네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럼 잘 봐둬, 네가 죽기 전에 보는 마지막 얼굴이니까.
불어온 칼바람이 아마리스의 머리에 붙었다.
그리고, 엘리아나는 아마리스의 마인드맵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