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봉우편
궁지에 몰린 지휘관은 크루거에게서 받은 권총을 쥐고 최후의 저항을 하려 했다... 한편 하벨은 한 사진을 가지고 페르시카의 연구실에 찾아왔다.
군의 분대가 지휘관이 숨은 엄폐물 근처까지 다가왔다.
지휘관은 손에 쥔 장비와 기폭 장치를 확인했다. 혼자인 건 둘째 치고, 겨우 이것만 가지고 저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아직 더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다.
지휘관은 벽의 틈새 사이로 신중하게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아까 숨어들어왔을 때처럼 그늘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병사들에게 빈틈없이 포위당한 상태였기에,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찾았다!
!!!
지휘관은 황급히 노획한 소총을 들어 병사들에게 난사했고, 그들이 엄폐물을 찾는 틈을 타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놈을 찾았다, 쏴라!
타타탕!
총알이 지휘관을 향해 쏟아졌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 놓친 소총을 주울 여유도 없었다.
지휘관은 전속력으로 마지막 교차로를 지나, 몸을 굴려 마지막 몇 방 총알을 피하면서 눈앞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숨 돌릴 여유도 갖지 않고 숨을 장소를 찾았다.
포위해! 녀석을 놓치면 안 된다!
병사들은 둘씩 두 조로 나뉘어, 서로 후방을 엄호하면서 지휘관이 숨은 골목으로 제압사격을 가하며 접근했다.
그리고 골목 입구 가까이 다가온 한 조가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젠장!!!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 지휘관은 가까스로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퍼엉!!
폭음에 귀가 멍해지고,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고 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선 구슬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왼팔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손가락의 감각까지 희미해지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오른손으로 옷 안을 더듬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재수가 옴 붙었구만...
지휘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기폭 장치를 꺼내려고 손을 품속으로 넣으니, 바로 옆의 차가운 물건이 주마등처럼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기상 시간이야, 어서 일어나게 신참.
운이 좋았군. 머리에 떨어진 게 저격소총 한 자루라 기절로 끝났지, 무기고 통째로 무너졌으면 큰일이었어.
사장님, 이력서 넣을 때 이렇게 위험한 직장이라 하신 적 없잖습니까...
하아... 하하하, 위험수당을 청구할 수 없는 게 참 아쉽네.
엄호 사격을 받으며, 병사들은 지휘관이 숨은 엄폐물 바로 앞까지 왔다.
이번에도 운이 따라 줄까?
지휘관은 이판사판 저항하기로 결심했고, 엄폐물에서 나와 권총을 들었다.
응?!
타타탕!!
그리고 총성과 함께, 다가오던 병사가 쓰러졌다. 다른 병사가 습격자의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똑같이 급소를 맞고 쓰러졌다.
뭐... 뭐지?
지휘관 구출은 추가 유료 서비스인 거 알지? 돌아가면 영수증에 0 하나 더 붙여 줘.
404...?
안녕, 기적 같은 타이밍에 지원군 도착이라니 기쁘지?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일러, 침투한 건 나랑 416뿐이거든. 일단 어떻게든 거기서 구출해 줄게.
금방 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UMP45와 HK416이 전속력으로 지휘관의 위치로 달려왔고, 그 둘을 발견한 병사들이 사격을 가했다.
HK416은 달리면서 몸을 돌려 뒤를 향해 사격했고, 병사들이 그걸 피하면서 빈틈이 생기자 UMP45와 함께 엄폐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엄폐물에 들어가자마자 HK416은 반격을 퍼부었고, UMP45는 상황을 보고했다.
카리나, 지휘관 찾았어! 적이 예상보다 엄청 많으니까 지원 있으면 빨리 보내!
알았어, 그대로 버텨 줘!
하하, 아직 끝장은 아닌가 보네.
오직 지휘관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니까, 돌아가서 금액 보고 드러누울 생각하지 마♪
카리나가 청구서를 보고 기절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걔도 이제 정신력이 단련됐을 테니 괜찮을걸? 그래서, 현재 상황은?
모든 수문에 폭탄을 설치했어.
이제 좀 더 높은 위치로 이동해야 해. 폭탄이 터지면 여기도 바닷물에 잠기고 말 거야.
도저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대로 터뜨리는 수밖에 없어.
미안해, 너희들까지 말려들게 해서.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늦었지 뭐.
416, 어때? 빠져나갈 수 있겠어?
아니, 우리가 진입했던 틈새까지 봉쇄당했어! 수적으로도 한참 열세라 제압도 못 해!
UMP45가 고개를 내밀어 반대편을 확인하려 해도, 총알이 끊임없이 날아들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통에, 고개를 숙이고 소리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도 참 성가시구나.
적의 정확한 위치 파악도 못하겠어! 소리만으로 대충 가늠해야 해!
...지금 갈라져서 이쪽으로 우회 접근 중이야, 만약 수류탄 투척 가능 거리까지 접근시키면 끝장이야!
그럼 접근 못하게 하면 되지. 우리 엘리트 전술인형님께는 식은 죽 먹기 아닌가요?
젠장, 꼭 이럴 때만 엘리트라 부르고 말이야!
HK416이 다가오던 병사에게 정확한 사격을 날렸고, 곧바로 비명이 들렸다.
다른 탄약으론 놈들의 장갑도 못 뚫는데 이젠 철갑탄도 몇 발 안 남았네. 놈들도 곧 눈치챌 텐데...
지원군이 오기는 하는 거야?
여기는 404. 적의 화력이 너무 거센데, 지원 부대는 언제쯤에나 도착해?
지금 거기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인형들로 편성한 임시 구출팀이 가고 있어. 상황은 어때?
말도 마, 벌집 되기 직전이라고.
조금만 더 버텨 줘, 지금 구출팀과 연결해 줄게!
404 소대, 여기는 SL8! 우리 임시 구출팀이 지금 적의 포위망을 뚫을 방법을 찾고 있어!
그쪽은 몇 명이야?
많지는 않지만, 보급 탄약도 갖고 가는 중이야!
알았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게.
금방 갈 테니까 지휘관을 꼭 지켜 줘! 이상!
AR팀도 오고 있으니까, SL8 구출팀이 도착하는 대로 함께 방어선을 구축해 줘!
응? AR팀도 복귀했어?
전원은 아니지만! 아무튼 모두 합류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어!
일이 갈수록 재밌어지는걸.
페르시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쓰네...
인상을 찌푸리며 각설탕을 한 움큼 집어 컵에 넣고 다시 맛을 봤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똑! 똑! 똑!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리듬감 있게 노크했다.
페르시카는 아예 각설탕을 커피에 쏟아붓고는, 포장지를 휙 던졌다.
마침내 왔구나...
똑! 똑! 똑!
페르시카는 한숨을 푹 쉬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려 자동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와 하벨이 들어왔다.
잘 잤나, 페르시카?
삐져서 문도 안 열어 주는 건 아닌가 했더니만.
제가 안 열어도, 하벨 씨는 이 실험실 전체에 출입 권한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네만, 어떻게 숙녀의 방에 함부로 불쑥 들어가겠나? 신사된 자로서 기본적인 매너란 게 있어요.
숙녀의 방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건 신사의 취미고요?
그렇게까지 했으면 직접 찾아와서 감시할 필요도 없잖아요. 어차피 저 혼자선 이 실험실에 한 발짝도 못 나가는데.
허허허, 말이 좀 심하구먼.
난 그저 이 돼지우리를 청소하려고 청소부를 불렀을 뿐이네.
저 두 사람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
......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지.
내 눈앞의 아가씨도, 겉만 봐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일세.
......
그리고, 자네 같은 허약한 과학자를 상대하려고 이 전문가들을 부른 게 아니거든.
하벨이 손짓하자,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방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한 명이 통풍구 안쪽에서 초록색 캡슐을 꺼내, 밀봉 용기에 넣어 하벨에게 건넸다.
그건...?
신경독가스가 든 캡슐이지. 이 짓거리를 한 놈을 건물을 빠져나가기 전에 겨우 붙잡았어.
손가락 아홉 마디가 부러지고 나서야 이 캡슐이 어디 있는지 불더구먼.
나 원 참, 이딴 걸 통풍구에다 던지다니. 아마추어나 할 짓인데 말이야.
자네를 죽이려는 작자는 전문가를 고용할 돈도 없는 모양이지? 차라리 내가 후원해 주고 싶을 지경이야.
......
만약 이게 터졌다면, 자넨 바로 의식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경련을 일으키다 질식사했을걸세.
참 상냥한 암살 방식이야.
아니 그게 뭐가 상냥해요...
웬걸, 총으로 자네 머리통을 날려 버리거나, 방바닥 밑에 폭탄을 잔뜩 설치하려 했던 놈들에 비하면 상냥한 편이지.
이것까지 해서, 자네를 암살하려 한 게 이번 달만 벌써 대여섯 번째네그려.
네...?! 저는 못 들었는데요...?
내가 애지중지하는 아가씨가 하루 종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하벨은 페르시카가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계속 불안한 눈초리로 흘겨보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페르시카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와 앉고, 손짓으로 남자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페르시카, 나는 자네를 의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네.
하지만 자네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있는데, 왜 그걸 내게 전혀 말해 준 적이 없지?
안전한 곳에 가서 천천히 얘기라도 나눠보는 게 어떻겠나?
아뇨... 아뇨, 전 여기서 안 나갈 거예요. 제 모든 노력이 다 여기 있다고요.
흠흠... 그래, 잘 알았네.
하벨은 군말 않고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나갈 생각이 없다면, 여기서 간단히 얘기하는 건 괜찮겠지?
이, 이건...
90Wish의 정보 보안은 아주 훌륭하더구먼. 그래도 고생한 끝에 조금이나마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어.
사진 속의 네 사람은 꼭 붙어 활짝 웃고 있었다.
하벨은 그중 늙은이와 헬쑥한 청년을 가리켰다.
이 영감은 루돌프 폰 오버스타인, 막스 플랑크 컴퓨터 과학 연구소 소장이었지.
지금쯤이라면 아마 독일민주공화국 과학기술부 부장으로 승진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물론 이 사람은 중요치 않고, 그 옆 사람이 중요하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젊은 친구가 리코지?
...네.
이때라면 90Wish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됐을 때겠군? 그놈도 이렇게 생기 넘치던 때가 다 있었구먼.
그나저나, 90Wish의 정식 명칭이 뭐였더라...
그래, "독일 국방군 특수기술 개발팀". 참 쓸데없이 거창한 이름이야.
보안이 철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지.
일반인은 90Wish를 인터넷 동아리 정도로나 알고 있던데, 젊은이의 취미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나 때였으면, 국가 관련 정보의 무단 유포는 국가반역죄로 총살감이었는데 말이야.
하벨은 이번엔 리코 옆의 소녀를 가리켰다. 그 소녀는 또 다른 어린 소녀를 껴안고 있었다.
하하하...
페르시카, 이때나 지금이나 얼굴은 별 차이가 없지만, 눈빛은 이때가 더 초롱초롱해 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도 초롱초롱한데요...
그래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본론은 이쪽일세.
하벨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페르시카의 품에 안긴 소녀를 가리켰다.
페르시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 아이... 이번에도 내 기억이 맞다면, 이름이 "루니샤"였지?
루니샤 폰 오버스타인.
...벌써 거기까지 조사하셨나요?
늙으면 따로 할 일이 없어져서, 옛날 사진 뒤지는 일이나 하게 되거든.
어디까지 알아내셨죠?
이 아이, 루니샤는 루돌프 소장의 장녀였지. 안타깝게도 3차 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 사진 외에, 루니샤에 관한 정보는 찾지 못했네.
그나저나, "루니샤"... 아주 익숙한 이름 아닌가?
윽...
최근 들어 이 이름을 데이터베이스에서 너무 자주 본단 말일세.
자네의 M4A1, 철혈의 엘더 브레인, 그 클론 암살자들과 탈린의 이성질체들. 모두 이 루니샤와 지나치게 닮았어.
자 그럼 페르시카양,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을 개체들이 다 이 오래전 사망한 소녀와 이렇게나 닮았지?
......
자네의 묵비권 행사도 이해하네.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신, 여기서 이 늙은이가 멋대로 퍼즐을 맞춰 봐도 괜찮겠지?
안 괜찮다고 해도 말할 거잖아요.
그야 물론이지, 그 일로 왔으니까.
그럼 서론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아이고, 계속 말했더니 목이 타는데, 마실 것 있나?
......
이 커피밖에 없어요.
어이쿠, 그건 사양하지. 자네의 커피로 녹인 설탕을 마셨다간 목만 더 탈 거야.
하벨은 손사래를 치고, 주머니에서 은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일부러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두 모금을 마신 뒤 주섬주섬 술병을 도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지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이 아가씨가 생사람 잡기는, 긴장한 자네의 표정을 즐기거나 한 적 없네.
......
그럼 계속할까?
난 "나비 작전"을 시작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가 자네가 아니라고 믿네. 애당초, 자네에게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말이지.
다만, 그렇다고 자네가 그 일들과 아예 관계가 없다는 소린 아닐세.
내 생각이 맞다면, 자네가 계속 나비 작전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이유는... 리코가 자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
......
그리고 "90Wish", "루니샤", 자네가 설계한 전술인형과도 분명 관련이 있겠지.
그 작전엔 자네가 만든 인형 말고도, 자네의 절친인 안젤리아도 참여했어. 둘 다 그 작전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고, 존재도 철저하게 기밀로 부쳐졌지.
뭐, 정확히는 자네가 애원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뒤처리를 떠맡은 거지만.
쿨럭쿨럭...
자네와 안젤리아가 서로의 비밀을 숨겨 주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원래는 자네들의 계집애들 소꿉놀이에 이 늙은이가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네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
...왜요?
페르시카리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뭐, 뭔데요...?
하벨의 얼굴에서 갑자기 평소의 인자한 웃음기가 사라지고, 서글서글하던 눈빛에선 한기마저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리코의 죽음은 자네와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보네.
......
그래서 그 퍼즐을 풀 마지막 조각이 필요한데, 그건 분명 자네가 쥐고 있겠지?
그렇게 계속 묵비권을 행사해도 상관없네. 내가 인재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 터 아닌가? 설령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난 자네를 어쩌지 못할걸세.
하지만 명심하게나. 중요한 정보를 계속 혼자 간직하고 있다간, 결국 또 다른 사람이 자네의 그 비밀 때문에 희생되고 말 게야.
그게 안젤리아가 될 수도 있고, 자네가 아끼는 그 인형이 될 수도, 어쩌면 지금 팔디스키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그리폰 지휘관이 될 수도 있어.
이를 명심했다면, 나도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캐묻지 않겠네. 나머진 내가 알아서 조사하지.
저...
할 말은 이게 다일세.
자, 식기 전에 커피 타임이나 마저 즐기시게나.
하벨은 탁상을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페르시카의 머릿속은 실뭉치처럼 뒤엉켰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땐, 하벨은 이미 나가고 문도 닫힌 뒤였다.
떨리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들자, 컵에 담긴 갈색빛 액체도 요동쳤다.
한 모금 들이키니, 설탕을 잔뜩 들이부었음에도 여전히 쓴맛이었다.
페르시카는 평소처럼 설탕통을 집어 들려 했지만, 초조함 때문인지, 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뚜껑은 양탄자 위를 구르며 연구실의 어느 틈새로 들어갔지만, 설탕은 하나도 쏟아지지 않았다.
설탕통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리코... 나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페르시카는 컵 안에 담긴 씁쓸한 액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지만,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땡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지고, 커피가 양탄자를 적셨다.
매일같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여자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문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전체 대사 보기 (146줄)
군의 분대가 지휘관이 숨은 엄폐물 근처까지 다가왔다.
지휘관은 손에 쥔 장비와 기폭 장치를 확인했다. 혼자인 건 둘째 치고, 겨우 이것만 가지고 저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게다가, 아직 더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다.
지휘관은 벽의 틈새 사이로 신중하게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아까 숨어들어왔을 때처럼 그늘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병사들에게 빈틈없이 포위당한 상태였기에,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찾았다!
!!!
지휘관은 황급히 노획한 소총을 들어 병사들에게 난사했고, 그들이 엄폐물을 찾는 틈을 타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놈을 찾았다, 쏴라!
타타탕!
총알이 지휘관을 향해 쏟아졌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 놓친 소총을 주울 여유도 없었다.
지휘관은 전속력으로 마지막 교차로를 지나, 몸을 굴려 마지막 몇 방 총알을 피하면서 눈앞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숨 돌릴 여유도 갖지 않고 숨을 장소를 찾았다.
포위해! 녀석을 놓치면 안 된다!
병사들은 둘씩 두 조로 나뉘어, 서로 후방을 엄호하면서 지휘관이 숨은 골목으로 제압사격을 가하며 접근했다.
그리고 골목 입구 가까이 다가온 한 조가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젠장!!!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 지휘관은 가까스로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퍼엉!!
폭음에 귀가 멍해지고,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고 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선 구슬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왼팔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손가락의 감각까지 희미해지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오른손으로 옷 안을 더듬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재수가 옴 붙었구만...
지휘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기폭 장치를 꺼내려고 손을 품속으로 넣으니, 바로 옆의 차가운 물건이 주마등처럼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기상 시간이야, 어서 일어나게 신참.
운이 좋았군. 머리에 떨어진 게 저격소총 한 자루라 기절로 끝났지, 무기고 통째로 무너졌으면 큰일이었어.
사장님, 이력서 넣을 때 이렇게 위험한 직장이라 하신 적 없잖습니까...
하아... 하하하, 위험수당을 청구할 수 없는 게 참 아쉽네.
엄호 사격을 받으며, 병사들은 지휘관이 숨은 엄폐물 바로 앞까지 왔다.
이번에도 운이 따라 줄까?
지휘관은 이판사판 저항하기로 결심했고, 엄폐물에서 나와 권총을 들었다.
응?!
타타탕!!
그리고 총성과 함께, 다가오던 병사가 쓰러졌다. 다른 병사가 습격자의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똑같이 급소를 맞고 쓰러졌다.
뭐... 뭐지?
지휘관 구출은 추가 유료 서비스인 거 알지? 돌아가면 영수증에 0 하나 더 붙여 줘.
404...?
안녕, 기적 같은 타이밍에 지원군 도착이라니 기쁘지?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일러, 침투한 건 나랑 416뿐이거든. 일단 어떻게든 거기서 구출해 줄게.
금방 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UMP45와 HK416이 전속력으로 지휘관의 위치로 달려왔고, 그 둘을 발견한 병사들이 사격을 가했다.
HK416은 달리면서 몸을 돌려 뒤를 향해 사격했고, 병사들이 그걸 피하면서 빈틈이 생기자 UMP45와 함께 엄폐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엄폐물에 들어가자마자 HK416은 반격을 퍼부었고, UMP45는 상황을 보고했다.
카리나, 지휘관 찾았어! 적이 예상보다 엄청 많으니까 지원 있으면 빨리 보내!
알았어, 그대로 버텨 줘!
하하, 아직 끝장은 아닌가 보네.
오직 지휘관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니까, 돌아가서 금액 보고 드러누울 생각하지 마♪
카리나가 청구서를 보고 기절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걔도 이제 정신력이 단련됐을 테니 괜찮을걸? 그래서, 현재 상황은?
모든 수문에 폭탄을 설치했어.
이제 좀 더 높은 위치로 이동해야 해. 폭탄이 터지면 여기도 바닷물에 잠기고 말 거야.
도저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대로 터뜨리는 수밖에 없어.
미안해, 너희들까지 말려들게 해서.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늦었지 뭐.
416, 어때? 빠져나갈 수 있겠어?
아니, 우리가 진입했던 틈새까지 봉쇄당했어! 수적으로도 한참 열세라 제압도 못 해!
UMP45가 고개를 내밀어 반대편을 확인하려 해도, 총알이 끊임없이 날아들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통에, 고개를 숙이고 소리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도 참 성가시구나.
적의 정확한 위치 파악도 못하겠어! 소리만으로 대충 가늠해야 해!
...지금 갈라져서 이쪽으로 우회 접근 중이야, 만약 수류탄 투척 가능 거리까지 접근시키면 끝장이야!
그럼 접근 못하게 하면 되지. 우리 엘리트 전술인형님께는 식은 죽 먹기 아닌가요?
젠장, 꼭 이럴 때만 엘리트라 부르고 말이야!
HK416이 다가오던 병사에게 정확한 사격을 날렸고, 곧바로 비명이 들렸다.
다른 탄약으론 놈들의 장갑도 못 뚫는데 이젠 철갑탄도 몇 발 안 남았네. 놈들도 곧 눈치챌 텐데...
지원군이 오기는 하는 거야?
여기는 404. 적의 화력이 너무 거센데, 지원 부대는 언제쯤에나 도착해?
지금 거기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인형들로 편성한 임시 구출팀이 가고 있어. 상황은 어때?
말도 마, 벌집 되기 직전이라고.
조금만 더 버텨 줘, 지금 구출팀과 연결해 줄게!
404 소대, 여기는 SL8! 우리 임시 구출팀이 지금 적의 포위망을 뚫을 방법을 찾고 있어!
그쪽은 몇 명이야?
많지는 않지만, 보급 탄약도 갖고 가는 중이야!
알았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게.
금방 갈 테니까 지휘관을 꼭 지켜 줘! 이상!
AR팀도 오고 있으니까, SL8 구출팀이 도착하는 대로 함께 방어선을 구축해 줘!
응? AR팀도 복귀했어?
전원은 아니지만! 아무튼 모두 합류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어!
일이 갈수록 재밌어지는걸.
페르시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쓰네...
인상을 찌푸리며 각설탕을 한 움큼 집어 컵에 넣고 다시 맛을 봤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똑! 똑! 똑!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리듬감 있게 노크했다.
페르시카는 아예 각설탕을 커피에 쏟아붓고는, 포장지를 휙 던졌다.
마침내 왔구나...
똑! 똑! 똑!
페르시카는 한숨을 푹 쉬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려 자동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와 하벨이 들어왔다.
잘 잤나, 페르시카?
삐져서 문도 안 열어 주는 건 아닌가 했더니만.
제가 안 열어도, 하벨 씨는 이 실험실 전체에 출입 권한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네만, 어떻게 숙녀의 방에 함부로 불쑥 들어가겠나? 신사된 자로서 기본적인 매너란 게 있어요.
숙녀의 방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건 신사의 취미고요?
그렇게까지 했으면 직접 찾아와서 감시할 필요도 없잖아요. 어차피 저 혼자선 이 실험실에 한 발짝도 못 나가는데.
허허허, 말이 좀 심하구먼.
난 그저 이 돼지우리를 청소하려고 청소부를 불렀을 뿐이네.
저 두 사람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
......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지.
내 눈앞의 아가씨도, 겉만 봐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일세.
......
그리고, 자네 같은 허약한 과학자를 상대하려고 이 전문가들을 부른 게 아니거든.
하벨이 손짓하자,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방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한 명이 통풍구 안쪽에서 초록색 캡슐을 꺼내, 밀봉 용기에 넣어 하벨에게 건넸다.
그건...?
신경독가스가 든 캡슐이지. 이 짓거리를 한 놈을 건물을 빠져나가기 전에 겨우 붙잡았어.
손가락 아홉 마디가 부러지고 나서야 이 캡슐이 어디 있는지 불더구먼.
나 원 참, 이딴 걸 통풍구에다 던지다니. 아마추어나 할 짓인데 말이야.
자네를 죽이려는 작자는 전문가를 고용할 돈도 없는 모양이지? 차라리 내가 후원해 주고 싶을 지경이야.
......
만약 이게 터졌다면, 자넨 바로 의식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경련을 일으키다 질식사했을걸세.
참 상냥한 암살 방식이야.
아니 그게 뭐가 상냥해요...
웬걸, 총으로 자네 머리통을 날려 버리거나, 방바닥 밑에 폭탄을 잔뜩 설치하려 했던 놈들에 비하면 상냥한 편이지.
이것까지 해서, 자네를 암살하려 한 게 이번 달만 벌써 대여섯 번째네그려.
네...?! 저는 못 들었는데요...?
내가 애지중지하는 아가씨가 하루 종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하벨은 페르시카가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계속 불안한 눈초리로 흘겨보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페르시카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와 앉고, 손짓으로 남자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페르시카, 나는 자네를 의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네.
하지만 자네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있는데, 왜 그걸 내게 전혀 말해 준 적이 없지?
안전한 곳에 가서 천천히 얘기라도 나눠보는 게 어떻겠나?
아뇨... 아뇨, 전 여기서 안 나갈 거예요. 제 모든 노력이 다 여기 있다고요.
흠흠... 그래, 잘 알았네.
하벨은 군말 않고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나갈 생각이 없다면, 여기서 간단히 얘기하는 건 괜찮겠지?
이, 이건...
90Wish의 정보 보안은 아주 훌륭하더구먼. 그래도 고생한 끝에 조금이나마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어.
사진 속의 네 사람은 꼭 붙어 활짝 웃고 있었다.
하벨은 그중 늙은이와 헬쑥한 청년을 가리켰다.
이 영감은 루돌프 폰 오버스타인, 막스 플랑크 컴퓨터 과학 연구소 소장이었지.
지금쯤이라면 아마 독일민주공화국 과학기술부 부장으로 승진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물론 이 사람은 중요치 않고, 그 옆 사람이 중요하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젊은 친구가 리코지?
...네.
이때라면 90Wish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됐을 때겠군? 그놈도 이렇게 생기 넘치던 때가 다 있었구먼.
그나저나, 90Wish의 정식 명칭이 뭐였더라...
그래, "독일 국방군 특수기술 개발팀". 참 쓸데없이 거창한 이름이야.
보안이 철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지.
일반인은 90Wish를 인터넷 동아리 정도로나 알고 있던데, 젊은이의 취미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나 때였으면, 국가 관련 정보의 무단 유포는 국가반역죄로 총살감이었는데 말이야.
하벨은 이번엔 리코 옆의 소녀를 가리켰다. 그 소녀는 또 다른 어린 소녀를 껴안고 있었다.
하하하...
페르시카, 이때나 지금이나 얼굴은 별 차이가 없지만, 눈빛은 이때가 더 초롱초롱해 보이는 것 같은데?
<size=25>지금도 초롱초롱한데요...</size>
그래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본론은 이쪽일세.
하벨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페르시카의 품에 안긴 소녀를 가리켰다.
페르시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 아이... 이번에도 내 기억이 맞다면, 이름이 "루니샤"였지?
루니샤 폰 오버스타인.
...벌써 거기까지 조사하셨나요?
늙으면 따로 할 일이 없어져서, 옛날 사진 뒤지는 일이나 하게 되거든.
어디까지 알아내셨죠?
이 아이, 루니샤는 루돌프 소장의 장녀였지. 안타깝게도 3차 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 사진 외에, 루니샤에 관한 정보는 찾지 못했네.
그나저나, "루니샤"... 아주 익숙한 이름 아닌가?
윽...
최근 들어 이 이름을 데이터베이스에서 너무 자주 본단 말일세.
자네의 M4A1, 철혈의 엘더 브레인, 그 클론 암살자들과 탈린의 이성질체들. 모두 이 루니샤와 지나치게 닮았어.
자 그럼 페르시카양,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을 개체들이 다 이 오래전 사망한 소녀와 이렇게나 닮았지?
......
자네의 묵비권 행사도 이해하네.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신, 여기서 이 늙은이가 멋대로 퍼즐을 맞춰 봐도 괜찮겠지?
안 괜찮다고 해도 말할 거잖아요.
그야 물론이지, 그 일로 왔으니까.
그럼 서론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아이고, 계속 말했더니 목이 타는데, 마실 것 있나?
......
이 커피밖에 없어요.
어이쿠, 그건 사양하지. 자네의 커피로 녹인 설탕을 마셨다간 목만 더 탈 거야.
하벨은 손사래를 치고, 주머니에서 은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일부러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두 모금을 마신 뒤 주섬주섬 술병을 도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지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이 아가씨가 생사람 잡기는, 긴장한 자네의 표정을 즐기거나 한 적 없네.
......
그럼 계속할까?
난 "나비 작전"을 시작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가 자네가 아니라고 믿네. 애당초, 자네에게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 말이지.
다만, 그렇다고 자네가 그 일들과 아예 관계가 없다는 소린 아닐세.
내 생각이 맞다면, 자네가 계속 나비 작전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이유는... 리코가 자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
......
그리고 "90Wish", "루니샤", 자네가 설계한 전술인형과도 분명 관련이 있겠지.
그 작전엔 자네가 만든 인형 말고도, 자네의 절친인 안젤리아도 참여했어. 둘 다 그 작전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고, 존재도 철저하게 기밀로 부쳐졌지.
뭐, 정확히는 자네가 애원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뒤처리를 떠맡은 거지만.
쿨럭쿨럭...
자네와 안젤리아가 서로의 비밀을 숨겨 주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원래는 자네들의 계집애들 소꿉놀이에 이 늙은이가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네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
...왜요?
페르시카리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뭐, 뭔데요...?
하벨의 얼굴에서 갑자기 평소의 인자한 웃음기가 사라지고, 서글서글하던 눈빛에선 한기마저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리코의 죽음은 자네와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보네.
......
그래서 그 퍼즐을 풀 마지막 조각이 필요한데, 그건 분명 자네가 쥐고 있겠지?
그렇게 계속 묵비권을 행사해도 상관없네. 내가 인재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 터 아닌가? 설령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난 자네를 어쩌지 못할걸세.
하지만 명심하게나. 중요한 정보를 계속 혼자 간직하고 있다간, 결국 또 다른 사람이 자네의 그 비밀 때문에 희생되고 말 게야.
그게 안젤리아가 될 수도 있고, 자네가 아끼는 그 인형이 될 수도, 어쩌면 지금 팔디스키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그리폰 지휘관이 될 수도 있어.
이를 명심했다면, 나도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캐묻지 않겠네. 나머진 내가 알아서 조사하지.
저...
할 말은 이게 다일세.
자, 식기 전에 커피 타임이나 마저 즐기시게나.
하벨은 탁상을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페르시카의 머릿속은 실뭉치처럼 뒤엉켰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땐, 하벨은 이미 나가고 문도 닫힌 뒤였다.
떨리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들자, 컵에 담긴 갈색빛 액체도 요동쳤다.
한 모금 들이키니, 설탕을 잔뜩 들이부었음에도 여전히 쓴맛이었다.
페르시카는 평소처럼 설탕통을 집어 들려 했지만, 초조함 때문인지, 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뚜껑은 양탄자 위를 구르며 연구실의 어느 틈새로 들어갔지만, 설탕은 하나도 쏟아지지 않았다.
설탕통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리코... 나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페르시카는 컵 안에 담긴 씁쓸한 액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지만,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땡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지고, 커피가 양탄자를 적셨다.
매일같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여자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문밖으로 뛰쳐나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