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쇼크
EP.14 · 만성쇼크

WTR 사슴벌레

서로 다른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게 바로 입장 차이야.

-58-1-A4

1 / 105
전체 대사 보기 (100줄)

베슬란 제1중학교, 운동장.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에 더해, 바닥의 눈까지 먼지와 초연 때문에 퇴폐적인 회색으로 물든 세상.

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들은 새하얀 입김을 내쉬며 총구를 들이대 서로 편을 가르고 있었다.

다만 8명 가량의 경비단원들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저 "양키년"들을 처단해야 하는데, 아흐민을 시작으로 생각지도 않은 불청객들이 나타났으니까.

저들을 주시하는 아흐민도 곤란해했다. 자신 혼자면 모를까, 이런 위험한 상황에 안나가 나타나서 그녀를 등뒤로 숨기려 했다.

그리고 침묵은 금방 다시 깨졌다.

람잔

야 이 자식들아, 내 형은 왜 겨누고 있어!?

마찬가지로 이 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한발 뒤늦게 온 람잔 때문에.

그는 곧장 경비단원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의 총구를 눌러 내렸다.

람잔

아니 XX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냐고!

경비단원

네가 직접 물어봐라.

네 친형이 아니었음 진작에 쐈어.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고.

그 말에 람잔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람잔

그렇다는데 형, 설명 좀 해 줘봐.

아흐민은 람잔을 노려봤다.

아흐민

저들이 먼저 무고한 여자와 아이한테 총을 겨눴어.

람잔이 아흐민의 어깨 너머로 눈을 흘기니 과연, 두 명이 보였다.

여자아이의 얼굴엔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고, 람잔의 시선을 느끼자 마사의 품에 웅크렸다.

경비단원

저것들 다 양키년이라고!

양키놈들이 전선에 우리 동포를 학살할 때 남녀노소 가려서 죽이디?!

그 말에 아흐민은 경멸하며 반박했다.

아흐민

이러는 너넨 그들과 무슨 차이인데?

경비단원

<size=50>너 이 ㅆ——</size>

욕을 내뱉으며 경비단원 한 명이 달려들려 했지만...

람잔이 먼저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

람잔

워워워 진정하시고.

형? 봐봐, 미국인은 미국인을 낳지? 그치? 그리고 미국인 아이가 크면 뭐가 될까? 미국 군인이 되겠지?

우리랑 놈들은 그냥 입장이 다른 거야.

총을 겨누고 정반대편의 의자에 앉은 거라고.

아흐민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흐민

그러냐? 그럼 보리스의 어머니는 어느 나라 사람이시지? 그리고 마리아 씨는? 지금 전선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랑스런 우리 국군의 지휘관 아닌가?

람잔

에이 그거랑은 다르지! 그 사람들은 우리 편이니까――

아흐민

정말?

정말 그게 이유야?

경비단원

더는 못 듣겠네, 그냥 쏴버려! XX 이게 다 나라를 위해서라고!

아흐민

"나라를 위해서"라...

역겨운 자식들.

그게 도덕을 버리고 인간성을 버릴 이유냐!

아흐민

무기는 적을 향해야 하는 거지, 무고한 사람들을 향하는 게 아니야!

지금 네놈들이 하려는 짓은――

용맹한 의거가 아니라 치졸한 범죄다!

경비단원B

젠장 말이 안 통하네!

람잔, 기다려 줄 테니까 제발 네 형 좀 끌고 가라!

람잔

......

람잔은 경비단원들과 아흐민을 번갈아 바라봤다.

눈빛에는 망설임이 보이는 듯했다.

아흐민

약자를 괴롭히는 짓거리가 무슨 나라를 지키는 일이냐!

아버지는 네가 우리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경비단에 들어간 걸로 아시고 기특하다 하셨는데, 지금 저놈들이랑 같이 어린이한테 총을 겨누는 걸 보면 뭐라 하시겠냐!

람잔

난...

성난 아흐민은 안나를 람잔의 품으로 힘껏 떠밀었다.

아흐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안나 데리고 당장 꺼져!

안나

오빠...!

안나를 받아낸 람잔은 아흐민에게 돌아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아 누르면서, 착잡한 눈빛으로 아흐민에게 물었다.

람잔

...그럼 형은?

아흐민

아버지 말씀 잊었냐, 사나이답게 살 거다.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울렸다.

경비단원

아흐민, 어쨌든 너도 우리 동지다. 하지만 우린 나라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타앙!

위협적인 총알이 아흐민의 발치에 떨어졌다.

경비단원

그러니 네 입장 확실히 해, 마지막 경고야.

그런데 그 경비단원이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뺨에 가늘고 빨간 상처가 생겼다.

총알이 스친 흔적.

그런데, 누구도 예상했던 방향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경비단원

<size=50>람잔?! 너도 미쳤냐!?</size>

람잔

입장 X까.

내 가족은 내가 지키는 게 내 입장이다 이 XXX들아!

람잔은 경비단원들에게 등을 돌려, 자신의 가족, 형 옆에 서 총구를 동료였던 이들에게 돌렸다.

이 광경을 보고 넋을 잃은 아흐민은 복잡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아흐민

람잔, 너...

람잔

형은 왜 아버지가 허구한 날 술주정으로 씨부리는 말도 진지하게 주워 담냐...

그 개똥철학은 형이나 많이 설파하셔, 누가 뭐래도 멀쩡히 살아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근데, 어휴...

우리 형인데 어쩌겠어.

똑같이 한숨을 푹 쉬는 아흐민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흐민

어휴... 말 참 드럽게도 안 들어먹지만...

어쩌겠어, 내 동생인데.

경비단원

너희 꼭 그래야만――?

아흐민의 뒤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말을 끊었다.

타앙!

MP443의 총성과 함께, 짙은 연막과 눈부신 섬광이 또 다시 번쩍였다.

람잔

콜록콜록콜록...!

자리의 모두가 질끈 감은 눈을 부여잡았다.

람잔은 감으로 손을 뻗어, 안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람잔

콜록...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오빠들 따라와 이 밥통아...!

안나

저 여자가...

저 여자가 또!

아흐민도 뭐라 말하려던 그때, 버둥거리는 여자아이가 그의 품에 안겨졌다.

겁먹은 아이

콜록콜록... 엄마아...

마사

너, 성품은 괜찮은데 너무 우직해.

저런 것들이랑은 대화한답시고 힘 빼지 마라.

알았음 얼른 흩어져서 뛰어!

안나는 눈을 감싸고 몸부림쳤지만 람잔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안나

콜록콜록, 내, 내 총...!

내 총 돌려줘!

마사

쯧.

마침내 권총 한 자루가 안나의 손에 다시 쑤셔넣어졌다.

마사

됐지? 너흰 왼쪽으로 가, 교문까지 제일 빠른 길이야.

아흐민

당신은요?

마사

흥, 저런 애송이들 상대로 걱정도 다 받네.

너네보단 나으니까 얼른 뛰기나 해.

람잔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마사

......재수 옴 붙은 물리 선생.

......

안나 일행이 약간 엉망인 꼴로 학교 밖 도로로 나왔을 때, 뒤늦게 출동해 이제야 교문 앞에 도착한 노란 경찰차들과 마주쳤다.

베슬란 경찰

너희들!

실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차에서 우르르 내려, 재빨리 안나 일행을 에워쌌다.

다만 그중 한 명이 이들이 학생임을 알아보았고, 모자를 고쳐쓰며 옆 대원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진압 부대는 그대로 교내로 돌입했다.

아흐민

어... 이게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요...

경찰을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의 품에 안긴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아이

으아앙! 나쁜 사람들이 엄마를 죽이려 해요...!

베슬란 경찰

전화 신고를 받았다, 이런 학교에 테러라고?

경비단이 주동자라니,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너희들, 저 안에 몇 명인지 봤니?

람잔

..."영원의 불 작전"이에요.

경비단원 몇 명이랑, 학교 학생들 몇 명이랑, 그리고... 경찰도 몇 명 있어요.

베슬란 경찰

뭐...?

람잔

다 합쳐서 몇 명인진 가서 천천히 세어 보세요.

형, 그만 집에――

람잔

...엥?

람잔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함께 나온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안나밖에 없었다.

람잔

야, 형 어디 갔어?

안나

......

안나는 말도 없이 대뜸 여자아이를 람잔에게 떠밀곤 다시 운동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람잔

<size=50>야 이 씨!</size> ...어휴 진짜.

저러니 람잔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 2초 정도 고민한 끝에, 양손으로 여자아이의 어깨를 붙들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람잔

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함부로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여자아이

......

람잔

이 오빠가 지켜본다? 가만 있어!

여자아이

훌쩍...

람잔은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성큼성큼 후진했다.

람잔

보고 있으니까 꼼짝 말고 있으라고!

여자애는 람잔이 점점 뒤로 멀어지는 걸 보면서, 눈물은 글썽여도 정말 얌전히 제자리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람잔은 냉큼 뒤돌아 안나를 쫓아 전력질주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건만, 어찌 이토록 사고방식이 다를까. 람잔도 종종 드는 의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