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R 눈밭의 아침
세상사 인간관계는 그냥 돈으로 계산하는 편이 가장 간편하고 실속 있지.
베슬란 제1중학교.
1교시 시작까지 아직 30분은 남은 시각. 평소대로라면 하교 시간과 더불어 교문이 제일 붐빌 때다.
하지만 오늘은 등교하는 학생 수가 유난히 적었다.
......
안나는 오늘도 교내로 들어섰다. 다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일행이 있었다.
일행은 그녀 뒤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아니, 단순히 따라오기만 하는 것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
...하지 마.
♪~♫~~
아예 일부러 박자를 돌리기까지 했다.
나 학교 안으로 들어왔어.
응.
...혼자서 교실까지 갈 수 있어.
그래, 얼렁 가.
......
여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됐잖아.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 아흐민 오빠님이 내게 신신당부했는데.
네가 교실에 들어가는 걸 봐야 나도 내 교실로 갈 수 있다고. 나 참 할머니도 아니고 잔소리가 아주...
안 이를 테니까 가.
왜, 몰래 뭐 하게?
......
안나는 속으로 그냥 상대를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근데 말이다, 나도 공부는 그냥 손 놓긴 했는데 넌 대체 뭐하러 굳이 학교에 오냐? 그냥 휴학 같은 거라도 하지.
......
람잔.
엉?
......
마녀가 어떤 사람 고기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흠, 고집불통인 여자?
말 많은 남자.
잠시 후 둘은 안나의 교실 앞까지 왔고, 람잔도 슬슬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교내 방송으로 뉴스가 흘러나왔다.
베슬란 경비단의 과격파가 일으킨 "영원의 불" 사건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발생 2시간여만에 관련 인원이 전원 체포되었습니다.
직후 베슬란시 정부 당국은 현지 보안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기존의 베슬란 경비단은 해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람잔.
부름에 고개를 돌린 람잔의 눈빛에선 분함이 엿보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몰라.
모르면서 거기 끼었어?
진짜 바보 곰탱이야.
평소대로라면, 람잔은 바로 머리를 쥐어박으려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웬일로 반박은커녕, 그저 한숨만 푹 쉬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속담 알아? 동전은 면이 두 개지만 사람은 하나뿐이라고.
난 엉망진창인 세상의 이치보단 내 형제를 믿을란다.
경비단 사람들이랑도 호형호제했으면서.
한쪽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몇 번이고 이럴 거야.
의형제가 중요하겠냐 친가족이 중요하겠냐?
람잔은 손을 휘휘 저어 동행의 끝을 알리곤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안나는 입을 삐죽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사람이 많이 줄긴 했어도 소란스러움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신문 봤어?
봤어, 무섭다 진짜... 어쩐지 어제 학교에 나오지 말라더니만.
경비단 사람들 배짱 한번 두둑했네!
신문 보고서야 알았는데... 학교 말고도 길거리도, 사람 집도 쳐들어가서 정의구현했대.
"외국 인사"가 수십 명 넘게 죽었다는데... 그거 다 미국놈들이지?
캬아 속 시원하다!
진작에 이렇게 혼쭐을 냈어야――
쉬잇...! 목소리 줄여! 대놓고 떠들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뉴스에서 시장이 발광하는 거 못 봤어? 경비단까지 강제 해산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그리고...
...쉿, 쟤 왔다.
...칫.
두 "학우"들의 대화는 안나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오늘 등교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안나는 말없이 자리를 뒤졌지만, 어제 여기 두고 갔던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박살난 책상이 여럿인데 책가방이 무사하랴.
그런데,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안나.
......?
어제... 네 가족이 마사 마이트너를 감쌌다고 들었어.
......
넌 그 사람 도울 생각 없었잖아...
어떻게 된 일이야?
......
너한테 설명할 의무 없어.
남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안 써...?
너, 지금 반에서 배신자 취급받고 있어...
그러다 큰일나면 어쩌려고 그래...
...너랑은 상관 없는 일이잖아.
시니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쭈글쭈글한 책가방을 안나의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우리가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어.
안나는 곧장 먼지투성이인 책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전부 책상에 쏟았다.
나온 것은 필기도구와 동전, 그리고 포스트잇 몇 장이 전부였다.
...내 책, 어딨어?
...?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내 책 어딨냐고.
고맙다고도 안 해?
네가 책가방 간수 잘 안 한 걸 내가 대신 챙겨 준 것만으로도 다행 아니니?
안나는 벌떡 일어서 시니아를 툭 밀치고, 그대로 교실 문으로 향했다.
야! 너 어디 가!
안나가 잠깐 멈춰 시니아를 뒤돌아봤다.
...수업 곧 시작이야, 어디 가려고?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걸 찾는 거라면... 그냥 흔한 고전 SF소설이잖아.
서점 가면 새것으로 살 수 있어.
......
우리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자.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툭 쏘아붙이고, 안나는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섰다.
......
베슬란 제1중학교, 도서관.
안나에게 도서관이란 매우 낯선 장소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때도 전학 온 첫날 아흐민이 학교를 구경시켜 줄 때였다.
그리고, 이 시간대에 도서관은 아무도 없어서 불도 안 켜 어두웠다.
물론, 이는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시대엔 지루하게 가만히 독서하는 것보단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훨씬 재미있으니까.
......
그 판본, 여기에도 있으면 좋겠는데.
......
어두운 책장 사이를 밝히는 것은 미약한 등불뿐.
시대가 시대다 보니,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학교도 다만 관습적으로 모양새만이라도 내려고 이런 곳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안나는 이 이제는 허울뿐인 관습에 감사하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했다.
...찾았다.
1972년 판본——?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안나는 구석에 꽂힌 책에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런데 빠지질 않았다.
좀 더 세게 당겨봐도 소용없었다.
다만 이는 그녀의 탓도, 책장과 책의 탓도 아니었다.
책장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 때문이었다.
으아앗!?
책에서 저항력이 갑자기 사라져 쑥 빠졌고, 안나는 관성으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잇... 소리는 왜 질러?
누구야? 나와!
성질머리는 여전히 사납네.
책장 뒷편으로부터, 눈에 익은 얼굴의 그 그림자가 천천히 정체를 드러냈다.
천연 곱슬머리인 여자가 조롱하는 듯한 미소로, 안나가 꺼내려던 책을 쥐고 있었다.
《노변의 피크닉》, 1972년 판본.
네가 다른 데도 아니고 여길 오다니...
귀신인 줄 알았다 야.
.....
아주 고약한 귀신.
그래도 마침 잘됐어, 아흐민 찾으러 가려고 고생 안 해도 돼서.
너흰 아직 미성년자니까, 대신 너네 아버지한테 푼돈 좀 넣었다.
무슨...?
난 남한테 빚지는 게 싫거든.
특히 입장이 다른 사람한텐.
오빠는 돈 때문에 널 구한 게 아니야!
그때 오빠가 말했잖아, 무고한 어린애가 휘말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너 같은 미국인이랑은 친구할 생각 없어!
아아 그러셔? 유감이네, 만난 김에 공부 제대로 했나 좀 보려 했는데.
됐어.
너하고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야!
응, 찬성.
세상사 인간관계는 그냥 돈으로 계산하는 편이 가장 간편하고 실속 있지.
나도 애새끼들이랑 무슨 관계가 어쩌네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말을 마친 마사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상대가 발길을 돌리는 걸 본 안나는 조금 다급하게 외쳤다.
기다려!
엉?
그 책... 내가 먼저 찾았어.
마사는 흥미로운 듯 씨익 웃으며, 손의 책과 안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
그 책... 나 줘. 조건 아무거나 말해.
허어~?
마사의 입꼬리가 더 쭉 올라갔다.
그렇게 나오니까 궁금해지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안나 학생?
이 책은 그다지 귀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야.
베슬란에 있는 서점 아무 데나 가도 살 수 있어.
그런데 왜 하필 꼭 이거여야 해?
...페이지 수.
응?
판본마다 페이지 수가 달라. 그래서 내용도 조금 달라.
그래서?
...129페이지, 생긴 게 달라.
하...?
너 책 읽을 때 페이지 수랑 양식만 보고 내용은 안 보는 성격이었냐?
...페이지만 알면 돼.
내용까지 기억할 필요 없어.
어... 뭐 이해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어?
이 책에 7학년한테 어려운 문법 같은 건 없을 텐데?
질문 끝났어? 그래서 줄 거야?
하아...
너 같은 독자가 있단 걸 알면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나무한테 미안하다고 사죄하겠다.
잔뜩 비아냥대며, 마사는 책을 안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안나의 손끝이 표지에 닿았을 때——
팟.
갑자기 도서관이 칠흑 속에 잠겼다.
그나마 있던 광원마저 전부 사라지자, 한 순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뭐야... 차단기 내려갔나? 아님 정전?
뭐어 전쟁통이라 민간용 전기는 툭하면 끊긴다니까.
마사는 자리를 옮기려 했다.
퉁.
바닥에 쇳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 움직이지 마... 나 물건 떨어뜨렸어.
내가 찾은 다음에 가...
...소리로 봐선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책은 내가 들고 있어.
혹시 그 장난감 총이냐?
......
선심 써서 충고하는데, 그런 건 애들이 갖고 놀 게 아니야.
너 손질하는 법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 걸 들고 다니면 나쁜 사람한테 총알이랑 목숨 갖다 바치는 꼴밖에 안 돼.
......
손질할 줄 알아.
오?
그냥... 원래 모습으로 두고 싶어서.
손질하는 법은 알아.
아아... 그래서, 찾았어?
자신의 주변을 더듬는 작은 인기척이 옷자락까지 스치자, 마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이야.
스윽.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마사는 작업복 속에서 교편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몇 번 만지작하자, 끄트머리에서 작은 빛이 났다.
그거 뭐야...?
준결정을 응용하는 법 중 하나지.
준결정...이 뭔데?
...너 어디 가서 내 학생이었다 하지 마라.
......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주위를 밝히는 조명 덕분에, 안나는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을 금방 찾아냈다.
찾았어.
그럼 간다.
마사는 몇 걸음 가다 말고 뒤돌아, 교편의 레이저 포인터로 아직 바닥에 쪼그린 채인 안나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그거, 시간 내서 한번 찬찬히 읽어봐.
...무슨 내용인데?
조금은 애답게 탐구심과 호기심을 가져라 좀. 네가 직접 읽어, 남한테 답부터 물으려 들지 말고.
넌 선생이잖아,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게 일 아니야?
선생이라고 항상 네 곁에 있어 주는 거 아니다, 사회로 나가서 마주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너 스스로 찾아야 해.
......
답은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나와.
그런 어쭙잖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솟는 거야?
이 세상엔 평생을 들여도 답을 못 찾는 문제가 잔뜩이라고.
...아니.
모든 문제엔 반드시 답이 있어.
마사는 질색하는 눈으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냐? 그럼...
삶이 결국 덧없을 운명이라면, 몸부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체 대사 보기 (160줄)
베슬란 제1중학교.
1교시 시작까지 아직 30분은 남은 시각. 평소대로라면 하교 시간과 더불어 교문이 제일 붐빌 때다.
하지만 오늘은 등교하는 학생 수가 유난히 적었다.
......
안나는 오늘도 교내로 들어섰다. 다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일행이 있었다.
일행은 그녀 뒤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아니, 단순히 따라오기만 하는 것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size=50>♪~</size>
...하지 마.
<size=50>♪~♫~~</size>
아예 일부러 박자를 돌리기까지 했다.
나 학교 안으로 들어왔어.
응.
...혼자서 교실까지 갈 수 있어.
그래, 얼렁 가.
......
여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됐잖아.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 아흐민 오빠님이 내게 신신당부했는데.
네가 교실에 들어가는 걸 봐야 나도 내 교실로 갈 수 있다고. 나 참 할머니도 아니고 잔소리가 아주...
안 이를 테니까 가.
왜, 몰래 뭐 하게?
......
안나는 속으로 그냥 상대를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근데 말이다, 나도 공부는 그냥 손 놓긴 했는데 넌 대체 뭐하러 굳이 학교에 오냐? 그냥 휴학 같은 거라도 하지.
......
람잔.
엉?
......
마녀가 어떤 사람 고기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흠, 고집불통인 여자?
말 많은 남자.
잠시 후 둘은 안나의 교실 앞까지 왔고, 람잔도 슬슬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교내 방송으로 뉴스가 흘러나왔다.
<color=#00CCFF>베슬란 경비단의 과격파가 일으킨 "영원의 불" 사건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발생 2시간여만에 관련 인원이 전원 체포되었습니다.</color>
<color=#00CCFF>직후 베슬란시 정부 당국은 현지 보안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기존의 베슬란 경비단은 해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color>
...람잔.
부름에 고개를 돌린 람잔의 눈빛에선 분함이 엿보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몰라.
모르면서 거기 끼었어?
진짜 바보 곰탱이야.
평소대로라면, 람잔은 바로 머리를 쥐어박으려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웬일로 반박은커녕, 그저 한숨만 푹 쉬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속담 알아? 동전은 면이 두 개지만 사람은 하나뿐이라고.
난 엉망진창인 세상의 이치보단 내 형제를 믿을란다.
경비단 사람들이랑도 호형호제했으면서.
한쪽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몇 번이고 이럴 거야.
의형제가 중요하겠냐 친가족이 중요하겠냐?
람잔은 손을 휘휘 저어 동행의 끝을 알리곤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안나는 입을 삐죽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사람이 많이 줄긴 했어도 소란스러움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신문 봤어?
봤어, 무섭다 진짜... 어쩐지 어제 학교에 나오지 말라더니만.
경비단 사람들 배짱 한번 두둑했네!
신문 보고서야 알았는데... 학교 말고도 길거리도, 사람 집도 쳐들어가서 정의구현했대.
"외국 인사"가 수십 명 넘게 죽었다는데... 그거 다 미국놈들이지?
캬아 속 시원하다!
진작에 이렇게 혼쭐을 냈어야――
쉬잇...! 목소리 줄여! 대놓고 떠들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뉴스에서 시장이 발광하는 거 못 봤어? 경비단까지 강제 해산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 그리고...
...쉿, 쟤 왔다.
...칫.
두 "학우"들의 대화는 안나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오늘 등교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안나는 말없이 자리를 뒤졌지만, 어제 여기 두고 갔던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박살난 책상이 여럿인데 책가방이 무사하랴.
그런데,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안나.
......?
어제... 네 가족이 마사 마이트너를 감쌌다고 들었어.
......
넌 그 사람 도울 생각 없었잖아...
어떻게 된 일이야?
......
너한테 설명할 의무 없어.
남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안 써...?
너, 지금 반에서 배신자 취급받고 있어...
그러다 큰일나면 어쩌려고 그래...
...너랑은 상관 없는 일이잖아.
시니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쭈글쭈글한 책가방을 안나의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우리가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어.
안나는 곧장 먼지투성이인 책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전부 책상에 쏟았다.
나온 것은 필기도구와 동전, 그리고 포스트잇 몇 장이 전부였다.
...내 책, 어딨어?
...?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내 책 어딨냐고.
고맙다고도 안 해?
네가 책가방 간수 잘 안 한 걸 내가 대신 챙겨 준 것만으로도 다행 아니니?
안나는 벌떡 일어서 시니아를 툭 밀치고, 그대로 교실 문으로 향했다.
야! 너 어디 가!
안나가 잠깐 멈춰 시니아를 뒤돌아봤다.
...수업 곧 시작이야, 어디 가려고?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걸 찾는 거라면... 그냥 흔한 고전 SF소설이잖아.
서점 가면 새것으로 살 수 있어.
......
우리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자.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툭 쏘아붙이고, 안나는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섰다.
......
베슬란 제1중학교, 도서관.
안나에게 도서관이란 매우 낯선 장소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때도 전학 온 첫날 아흐민이 학교를 구경시켜 줄 때였다.
그리고, 이 시간대에 도서관은 아무도 없어서 불도 안 켜 어두웠다.
물론, 이는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시대엔 지루하게 가만히 독서하는 것보단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훨씬 재미있으니까.
......
그 판본, 여기에도 있으면 좋겠는데.
......
어두운 책장 사이를 밝히는 것은 미약한 등불뿐.
시대가 시대다 보니,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학교도 다만 관습적으로 모양새만이라도 내려고 이런 곳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안나는 이 이제는 허울뿐인 관습에 감사하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했다.
...찾았다.
1972년 판본——?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안나는 구석에 꽂힌 책에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런데 빠지질 않았다.
좀 더 세게 당겨봐도 소용없었다.
다만 이는 그녀의 탓도, 책장과 책의 탓도 아니었다.
책장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 때문이었다.
<size=50>으아앗!?</size>
책에서 저항력이 갑자기 사라져 쑥 빠졌고, 안나는 관성으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잇... 소리는 왜 질러?
누구야? 나와!
성질머리는 여전히 사납네.
책장 뒷편으로부터, 눈에 익은 얼굴의 그 그림자가 천천히 정체를 드러냈다.
천연 곱슬머리인 여자가 조롱하는 듯한 미소로, 안나가 꺼내려던 책을 쥐고 있었다.
《노변의 피크닉》, 1972년 판본.
네가 다른 데도 아니고 여길 오다니...
귀신인 줄 알았다 야.
.....
아주 고약한 귀신.
그래도 마침 잘됐어, 아흐민 찾으러 가려고 고생 안 해도 돼서.
너흰 아직 미성년자니까, 대신 너네 아버지한테 푼돈 좀 넣었다.
무슨...?
난 남한테 빚지는 게 싫거든.
특히 입장이 다른 사람한텐.
오빠는 돈 때문에 널 구한 게 아니야!
그때 오빠가 말했잖아, 무고한 어린애가 휘말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너 같은 미국인이랑은 친구할 생각 없어!
아아 그러셔? 유감이네, 만난 김에 공부 제대로 했나 좀 보려 했는데.
됐어.
너하고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야!
응, 찬성.
세상사 인간관계는 그냥 돈으로 계산하는 편이 가장 간편하고 실속 있지.
나도 애새끼들이랑 무슨 관계가 어쩌네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말을 마친 마사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상대가 발길을 돌리는 걸 본 안나는 조금 다급하게 외쳤다.
기다려!
엉?
그 책... 내가 먼저 찾았어.
마사는 흥미로운 듯 씨익 웃으며, 손의 책과 안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
그 책... 나 줘. 조건 아무거나 말해.
허어~?
마사의 입꼬리가 더 쭉 올라갔다.
그렇게 나오니까 궁금해지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안나 학생?
이 책은 그다지 귀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야.
베슬란에 있는 서점 아무 데나 가도 살 수 있어.
그런데 왜 하필 꼭 이거여야 해?
...페이지 수.
응?
판본마다 페이지 수가 달라. 그래서 내용도 조금 달라.
그래서?
...129페이지, 생긴 게 달라.
하...?
너 책 읽을 때 페이지 수랑 양식만 보고 내용은 안 보는 성격이었냐?
...페이지만 알면 돼.
내용까지 기억할 필요 없어.
어... 뭐 이해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어?
이 책에 7학년한테 어려운 문법 같은 건 없을 텐데?
질문 끝났어? 그래서 줄 거야?
하아...
너 같은 독자가 있단 걸 알면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나무한테 미안하다고 사죄하겠다.
잔뜩 비아냥대며, 마사는 책을 안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안나의 손끝이 표지에 닿았을 때——
팟.
갑자기 도서관이 칠흑 속에 잠겼다.
그나마 있던 광원마저 전부 사라지자, 한 순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뭐야... 차단기 내려갔나? 아님 정전?
뭐어 전쟁통이라 민간용 전기는 툭하면 끊긴다니까.
마사는 자리를 옮기려 했다.
퉁.
바닥에 쇳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 움직이지 마... 나 물건 떨어뜨렸어.
내가 찾은 다음에 가...
...소리로 봐선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책은 내가 들고 있어.
혹시 그 장난감 총이냐?
......
선심 써서 충고하는데, 그런 건 애들이 갖고 놀 게 아니야.
너 손질하는 법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 걸 들고 다니면 나쁜 사람한테 총알이랑 목숨 갖다 바치는 꼴밖에 안 돼.
......
손질할 줄 알아.
오?
그냥... 원래 모습으로 두고 싶어서.
손질하는 법은 알아.
아아... 그래서, 찾았어?
자신의 주변을 더듬는 작은 인기척이 옷자락까지 스치자, 마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이야.
스윽.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마사는 작업복 속에서 교편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몇 번 만지작하자, 끄트머리에서 작은 빛이 났다.
그거 뭐야...?
준결정을 응용하는 법 중 하나지.
준결정...이 뭔데?
...너 어디 가서 내 학생이었다 하지 마라.
......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주위를 밝히는 조명 덕분에, 안나는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을 금방 찾아냈다.
찾았어.
그럼 간다.
마사는 몇 걸음 가다 말고 뒤돌아, 교편의 레이저 포인터로 아직 바닥에 쪼그린 채인 안나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그거, 시간 내서 한번 찬찬히 읽어봐.
...무슨 내용인데?
조금은 애답게 탐구심과 호기심을 가져라 좀. 네가 직접 읽어, 남한테 답부터 물으려 들지 말고.
넌 선생이잖아,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게 일 아니야?
선생이라고 항상 네 곁에 있어 주는 거 아니다, 사회로 나가서 마주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너 스스로 찾아야 해.
......
답은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나와.
그런 어쭙잖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솟는 거야?
이 세상엔 평생을 들여도 답을 못 찾는 문제가 잔뜩이라고.
...아니.
모든 문제엔 반드시 답이 있어.
마사는 질색하는 눈으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냐? 그럼...
삶이 결국 덧없을 운명이라면, 몸부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