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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 만성쇼크

SPR 밤: 붉은 나무

눈꽃 한두 송이야 불에 다가가기도 전에 바로 녹아버리겠지. 하지만 시베리아의 눈보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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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블랙웰에게.

나도 지금이 아직 "성배"를 재가동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나도 전에는 모든 준비가 갖춰지길 기다리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

과거의 자신이 정말 원망스러워. 그때 내가 좀 더 둥글게 타협했더라면, 망할 유적기구 놈들이 날 그렇게 몰아넣지도 않았을 텐데.

덕분에 미국에도 못 돌아가고 말이야. 외국인이 여기 현지 병원에서 덱사메타손 주사 한 대 맞으려면 사흘이나 기다려야 해.

...어쩌면, 과거의 내가 너무 나약했기 때문일지도. 기술적으로는 이미 실행 가능했는데, 단지 내가 겁먹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한 걸지도 몰라...

이젠 결심할 수밖에 없어,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헬라"로 바꿨어.

내 품에서 눈을 감은 사나가, 어느날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2051년 모스크바에서, 마이트너가.

2051년 봄, 제3차 세계대전 발발 7년차.

광범위한 붕괴복사 오염과 치열한 재래식 전쟁에, 세계 인구는 급감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보는 광경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황무지.

희망을 상징하는 "초록"이 과연 언제 이 땅에 다시 돌아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태평양 서남측, 옐로우존의 어느 군도.

초록빛 결정 가루들이 습기로 끈적한 바람에 실려 흩날리다 군홧발에 짓밟혔다.

방호복을 입은 알렉산더는 축축한 진흙 위에 서서,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통신기의 신호감도 램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판, 레인저의 수송 차량에 움직임은?

2분대장 판

<color=#00CCFF>보자아... 제길, 가시 범위가 푸시킨의 시보다 아리송하네...</color>

<color=#00CCFF>일단 저 차량은 아직은 주차된 채로 미동도 없어.</color>

알렉산더

잘 지켜봐, 상황 발생 즉시 보고하고.

2분대장 판

<color=#00CCFF>예이~</color>

<color=#00CCFF>아아, 얼른 이 빌어먹을 싸움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내 뮤즈들에게 입맞춤하고 싶구나아~</color>

알렉산더

참 기특한 꿈이다 이 자식아, 소대장이 들으면 대신 군홧발에다 딥키스시켜 줄 거다.

그 말에 통신 채널의 다른 관측 초소 병사들이 키득였다.

2분대장 판

<color=#00CCFF><size=50>뭘 웃엄마!</size></color>

<color=#00CCFF>전장에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바로 소대장 딱지라니! 하여간 사관 학교 출신은 다르다니까.</color>

<color=#00CCFF>순정 총알받이인 우리하곤 천지 차이야.</color>

알렉산더

요점이 뭔데?

2분대장 판

<color=#00CCFF>아 물론 거기 나왔다고 다 이런 대접은 아니겠지. 요컨대 근본적인 수저 차이란 거야.</color>

<color=#00CCFF>오라비가 대위라고 벌써 마빡에다 별을 다섯 개 그려 넣을 기세라고!</color>

알렉산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2번 초소나 잘 지켜.

우리 소대장이 이번에 처음 부대 끌고 임무 나온 거라 깔끔하게 완수할 생각일 텐데, 네가 망치기라도 했다간――

판은 투덜대며 통신을 꺼버렸다.

알렉산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사이에 다른 통신이 들어와,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그에게 보고했다.

윅토르

<color=#00CCFF>알렉산더, 여기는 1번 초소. 낌새가 포착됐다.</color>

알렉산더

놈들의 증원이 도착했어? 잠깐, 소대장에게 보고는 했어?

윅토르

<color=#00CCFF>그 계집애한테 보고는 무슨, 내 눈에 소대장은 너뿐이라고.</color>

알렉산더

...그래도 전장이니까 위계질서는 지켜라.

윅토르

<color=#00CCFF>쨌든 증원은 아니고, 여기 1번 초소에서 무전 신호가 아주 잠깐 감지됐어. 이건 아마도...</color>

알렉산더

...레인저의 통신 채널인가.

암호 해독 가능하겠어?

윅토르

<color=#00CCFF>불가능해, 복사 농도가 너무 높아서 우리보다 나이 많은 이 고물딱지들로 이렇게 신호가 잡힌 것도 기적이야.</color>

알렉산더는 통신하는 와중 임시 집결 지점인 섬의 버려진 공장 건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주둔 중인 세 운전병 중 한 명이 위병소를 맡고 있었고, 알렉산더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렉산더

그리고 너보다 젊은 설비는 죄다 수리 중이거나 쓰레기장에 있고 말이지.

불평할 시간에 1번 초소나 잘 지켜.

윅토르

<color=#00CCFF>아 그냥 좀 대충대충 하자, 우린 정찰 담당이잖아. 그놈의 작전이 우리가 알 바야?</color>

폐공장의 문 앞까지 다 와 통신을 끄려 할 때까지도 윅토르의 넋두리는 계속됐다.

윅토르

<color=#00CCFF>내 장담하는데, 이번은 그냥 단순한 정찰 임무라서 우리가 무사한 거다. 신임 쏘가리가 지휘를 맡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color>

<color=#00CCFF>학원 나온 것들은 다 교과서에 나온대로 할 줄밖에 모른다니까!</color>

알렉산더

야... 됐으니까 그만해.

넓은 폐공장 건물 안에서는 신임 소대장 안나가 통신 설비가 설치된 탁자 너머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씬한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 둔 채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통신기에선 윅토르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나오고 있었다.

윅토르

<color=#00CCFF>니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냐, 엉?! 책벌레는 믿을 게 못 돼!</color>

알렉산더

소대장님, 항붕괴제 보충하러 왔습니다!

윅토르

<color=#00CCFF>엥? 뭐야 왜 목소리가... 헉!</color>

1번 초소가 황급히 통신을 종료했다.

안나는 여전히 시선을 태블릿에서 떼지 않고, 그저 한 손 엄지로 옆의 수송 차량을 가리켰다.

안나

저 차 안에 보급상자. 알아서 꺼내.

수송 차량 안에서 대기 중이던 운전병은 소리를 듣곤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알렉산더에게 엄지를 척 내보이며 눈치를 줬다.

알렉산더

...다 듣고 계셨습니까?

안나

어. 지휘부에서 슬쩍한 신삥인데 수신 성능 쥑이더라.

......

알렉산더가 항붕괴제를 보충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안나는 여전히 태블릿의 화면을 보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알렉산더

뭐 생각하고 계십니까?

안나

어, 레인저의 목적.

알렉산더

저흰 그냥 동향만 감시하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만으로는 놈들과의 정면 충돌은 자살 행위입니다.

안나

그야 당연하지, 아무것도 없는 이 군도가 무슨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데.

그런데 레인저 부대는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어깨 위의 그게 장식이 아니라면 머리를 굴려 봐. 공적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지 않아.

알렉산더

설마 섬으로 들어가서 정찰할 생각은 아니시죠? 거긴 레드존에...

안나

복사 레벨이 인체가 견디는 한계를 넘은 곳이란 거, 알지.

안나가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킨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두 초소가 참깨 알갱이만큼 작은 스케일의 지형도가 띄워져 있었다.

그중 한 섬 구역은 온통 공백이어서, 그곳의 붕괴 복사 레벨이 높아 각종 탐측 설비가 무용지물임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안나

그런데 레인저는 국경을 넘어 임무를 수행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지.

우리가 이 "임무 목표"를 잡으면, 최소 3계급 특진은 가능하지 않을까?

허나 알렉산더는 공리심에 눈이 멀지 않고, 계속 안나를 주시했다.

알렉산더

소대장님, 우리 3소대는 고작 2개 분대 규모에 일반인에게 총을 줘여 준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입니다.

안나

그래도 해볼 만은 해.

잘만 하면 성공도 불가능은 아니야.

알렉산더

...선임 소대장과는 다를 줄 알았습니다만.

안나

그 부하들 목숨으로 대포 구멍 막으려던 새끼? 내가 왜 그딴 쓰레기랑 같은 짓을 하려 하겠어.

그놈이라면 너희더러 죽으러 가라 했겠지만, 난 아니야. 난 너희를 다 살려보낼 거야. 전쟁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서, 영광을 목에 걸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알렉산더

당신이 진짜 전장을 겪어봤다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지 아실 겁니다.

전쟁의 불길 속에 떨어진 시베리아의 눈송이처럼 아무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안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안나

알지... 아주 잘 알지.

알렉산더

......

그때 통신이 들어와, 안나가 벌떡 몸을 일으켜 받았다.

2분대장 판

<color=#00CCFF>2번 초소에서 이상 정황 포착. 복사 측량기의 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color>

안나

얼마나? 지속 시간은? 자세한 수치로 말해.

2분대장 판

<color=#00CCFF>그게... 어라, 수치가 바로 떨어졌습니다...?</color>

안나

...너, 정찰 교범은 읽어봤냐?

2분대장 판

<color=#00CCFF>그게 뭡니까?</color>

안나

보병 기본 전술 교범은?

2분대장 판

<color=#00CCFF>어...</color>

안나

주둔지로 돌아가면 내가 친히 읽어 주지.

아무튼 알았다, 방호 주의하면서 계속 관측 유지해.

삑.

판이 억울해하며 항의하는 걸 무시하고, 안나는 통신기를 툭 껐다.

알렉산더

정말 저들을 육성할 생각이십니까?

안나

아니면?

안나는 티없이 맑은 눈빛으로 알렉산더와 마주봤다.

안나

눈꽃 한두 송이야 불에 다가가기도 전에 바로 녹아버리겠지. 하지만 시베리아의 눈보라라면?

알렉산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나

마빡에다 그려놨잖아, 별 다섯 개 달 거야.

그 농담에 알렉산더도 피식 웃었다가 바로 정색하며 자세를 고쳤다.

알렉산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안나

너희가 내 부하가 된 이상, 난 너희를 뛰어난 군인으로 만들어 줄 거다.

지금 고민되는 것쯤이야 정상이지. 그래도 난 시간이 모든 걸 증명할 거라 믿어.

안나는 살짝 기대감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이에 알렉산더도 더는 웃음을 참지 않았고, 똑같이 주먹을 뻗어 맞댔다.

알렉산더

3소대 놈들이 다 소대장님 오라버니 같은 특전사가 되면 세계 통일까지 하려 하시겠습니다?

안나가 급격히 정색하더니 손을 내렸다.

안나

내 오라버니는 아흐민 한 명뿐이야.

이미 고인이고.

알렉산더는 항붕괴제를 나눠 주러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났고, 대기 중인 운전병들은 차 안에서 찌그러진 채 조용히했다.

다시 혼자가 된 안나는 멍하니 지형도를 바라봤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통신기가 다시 울렸고, 안나는 무심하게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안나

여기는 근위 57사단 주P섬 부대, 보병 소대장 안나 최.

???

<color=#00CCFF>람잔 대위다.</color>

상대의 얼굴은 무덤덤한 반면, 안나는 안색이 급변했다.

람잔

<color=#00CCFF>미 정규 육전 부대가 레인저와 합류하러 이동 중이란 보고다. 우리 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했다.</color>

<color=#00CCFF>하지만 이미 1개 중대가 저지선을 넘은 상황이니, 귀측이 즉시 놈들을 저지해 레인저와의 합류를 막아라.</color>

안나

귀측에게 당측 병력을 징발할 권한은 없다.

람잔

<color=#00CCFF>이미 지휘부의 상급 권한을 받았다. 이곳의 초기 군사작전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color>

안나

대위, 당측 상황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3소대는 겨우 2개 분대에 정찰용 장비와 화력만 소지 중이다. 게다가 현재 2개 초소로 분산해 적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다.

람잔

<color=#00CCFF>내가 즉시 부대를 지원 파견할 테니 정찰 장비는 포기하고 즉시 전원 집결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color>

<color=#00CCFF>이건 명령이다.</color>

안나

그럼 이거나 대답해, 레인저는 레드존 안에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적어도 3소대가 뭘 위해 싸워야 하는진 알아야겠어!

람잔

<color=#00CCFF>...좋아. 놈들은 한 범죄자를 체포하려 하고 있어. 콜사인 "사형수", 극비 기밀인 유적 기술을 장악한 것이 유력한 위험 인물이지.</color>

<color=#00CCFF>이외의 정보는 미상이야, 정보부가 아직도 조사 중이라.</color>

<color=#00CCFF>본대가 도착하려면 3시간은 걸려. 지금 외곽에서 적의 증원 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야... 알았나, 소위?</color>

안나

......

안나

명령 접수했다... "대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