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 백조, 9그룹 1번
이들은 죽이기 위해 태어나지만, 할 수 있는 건 결코 싸움뿐만이 아니네
친애하는 블랙웰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빌어 부디 나를 도와주길 바라.
지금 내 심정을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
사나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고, 유적기구 놈들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궁지에 몰려서일 수도 있지.
선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성이 전부 닳아 사라질 때, 사람들은 무슨 인류의 가치를 내세우려 할까.
동족상잔은 인류의 전통.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원죄야.
지금 이 세상에 날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2050년 베슬란에서, 마이트너가.
전쟁은 겉보기엔 끝났으나 사람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희망은 마치 빛을 바라는 개미처럼, 흑야 속에서 묵묵히 기다린 끝에... 여명이 도래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 같았다.
모두가 평온함을 추구했다. 혼돈이 끝나고 도래한 것이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리폰 기지, 지휘실.
자동문이 열리면서 진지한 얼굴의 인형이 안으로 들어왔다.
헬리안 님, LAMG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렴, 너의 최근자 훈련 보고서를 방금 받았어.
네, 지적하실 점이 있나요?
아니, 네 성적은 아주 훌륭해. 지금 기지에서 가장 뛰어난 인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고평가 감사합니다,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그래서, 네게 어려운 임무를 하나 맡기려고 해.
헬리안은 모노클을 벗고 콧등을 주물렀다.
이는 고민이 있다는 표현이라고, LAMG는 속으로 판단했다.
어느 인물의 프로필과 현재 위치의 주소를 줄 테니, 이 사람을 사지 멀쩡하게 우리 기지로 데려올 것.
맡겨 주십시오, 전력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헬리안의 고민을 대신 해결한다는 기대감을 품고, LAMG는 정중하게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약 45분 후, 목표가 있는 방 앞 복도의 모퉁이에서 LAMG는 몸을 숙인 채 정황을 살폈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서 내부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주변 주민들에게 수소문해봐도, 방의 번호를 듣자마자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직접 문 바로 앞까지 가 봐도, 목표는커녕 방 내부의 상태를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헬리안 님, 지정 위치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목표의 방 앞에서 대기 중, 내부 상황은 파악 불가능합니다. 지시 바랍니다.
돌입해.
예. 그런데, 온건한 방식을 취할지, 아니면...
......
일단 온건하게 시도해 봐.
네!
LAMG는 공손히 통신을 종료한 후 지금부터 어떡할지 계획을 구상했다.
실례합니다,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 계시나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에서 나온 LAMG라고 합니다. 귀하를 저희 그리폰 사의 지휘관으로 모시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싫은데.
냉혹한 얼굴의 이 여성은 사람을 멀리하는 타입 같았다.
대대적인 군비 축소로 인해 명예 전역 "당한" 군인임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였다.
"당황 말자, LAMG. 카리나 씨가 전수해 준 멘트로 대응하면 돼."
매정하게 그러지 마시고 내용을 자세히 보고 고려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그리폰은 비록 신생 기업이지만 매력적인 임금 급여 체계와 복지 제도도 이미 마련되어 있답니다.
저희 그리폰의 전술지휘관분들은 탄력근무제에 매달 요구량 이상의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시면 돼요.
여기, 저희 기지의 내부 사진도 있으니 한번 봐 보세요.
......
미동도 않는 듯했지만, LAMG는 이 여성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는 것을 포착했다. 나름 흥미를 보인다는 뜻이었다.
...생각은 해 보지.
말 나온 김에 직접 기지를 둘러보지 않으시겠어요? 교통은 저희가 전용 셔틀을 제공하는데...
물살을 탔으니, 당장 노를 저어 이 사람을 기지행 차량에 태우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됐고, 나중에.
에이 사양 마시고요~
끝까지 거절 내지는 저항한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그냥 들어 업어서 차로 직행한다.
그리고 안에 던져 넣고 문을 잠그면 상대도 도망칠 길이 없고, 그대로 기지로 돌아가면 임무 완료.
여기까지가 LAMG의 "완벽한" 시뮬레이션이었다.
문 앞에 선 LAMG는 옷깃과 머리를 정리한 다음, 절도 있고 예절 바른 리듬으로 문을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 계시나요?
그리폰 안전계약사――
콰아앙!!
시뮬레이션한 첫 대사를 다 읊기도 전에 문짝이 안면을 들이받으려 해, LAMG는 가까스로 몸을 뒤로 굴리며 피했다.
헉... 헉... 저기, 안나 씨? 혹시 무슨 오해라도――
아앙...?
모습을 드러낸 임무 목표는 조롱하듯 씨익 미소지으며, 지금 막 운명을 달리한 문짝을 밟았다.
아주 진한 알코올 냄새. 보드카가 유력했다.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귀하를――커흑!?
퍼버벅!
번개 같은 속도로, 안나가 냅다 LAMG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복부에 연속 보디 블로우를 꽂아 넣었다.
LAMG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고 양발이 지면에 닿는 감각이 사라졌다.
안전계약사는 얼어뒤질 안전! 툭하면 문 두들기고 짜증나게 앵앵대기나 하고 말이야!
저는... 으악?!
쿠웅!
이번엔 바닥에 메치기였다.
다만 이번에는 낙법으로 굴러, 안나와 조금 거리를 벌렸다.
흐응, 제법인데? 나한테 콤보로 쳐 맞고도 일어서다니.
안나 씨, 적대 행위를 멈춰 주십시오. 정말 불순한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흡흡허!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귓등을 스치는 생생한 소리.
안나는 LAMG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점점 펀치의 속도를 올렸다.
상황이 이러니, LAMG는 하는 수 없이 비좁은 복도에서 저 주먹의 비를 피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시뮬레이션한 대로 설득을 시도했다.
잠시만 들...! 저희!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비록 신생 기업이지만, 윽... 매력적인, 임금, 급여 체계와, 복지 제도도...!
......
저희이 전술지휘관분들은...! 탄력근무제에, 매달 요구량 이상의,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시면――
안나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너 왜 반격 안 하냐?
헉... 헉... 저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 소속의 전술인형, LAMG입니다. 권한을 받지 않는 이상 인간에 대한 적대 행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허어.
인형이라.
복도에 드리운 은은한 빛줄기처럼,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가늠했다.
네 지휘관은?
잠시만요... 헬리안 님? 안나 씨께서 대화를 요청하십니다.
LAMG가 홀로그램 통신을 켰다.
반갑습니다, 안나 씨.
댁이 이 인형 지휘관이야?
얘한테 명령해, 나랑 싸우라고.
......
그러길 원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LAMG, 권한 부여했다.
...권한 확인. 무력 행위 제한을 해제합니다.
LAMG는 습관적으로 총을 집었다가, 잠깐 멈칫하고 대신 비수를 뽑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저 "임무 목표"가 희열에 찬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진지하게 한판 붙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그리폰 기지, 지휘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헬리안 님, 보고드립니다. 안나 씨를 모셔왔습니다.
잘했다.
몇 번 VIP룸에 있지?
......
의무실에 있습니다.
뭣?! 내가 사지 멀쩡하게 데려오라 했잖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분이 뒤에서 다짜고짜 관절기를 거는 바람에 함께 건물 밖으로 추락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나 씨가 제 밑에 깔리셔서...
......
제가 간단히 검사한 결과 골절이나 내부 장기 손상은 없었어요. 지금 의무실에서 전문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말은 덤덤했지만, 헬리안의 눈에 비치는 LAMG도 만신창이에 한쪽 팔은 아예 움직이질 못하는 꼴이었다.
...그래, 수고했어. 가서 수복받으렴.
네.
의무실.
낯선 방의 공기는 따뜻했지만, 소독약의 냄새가 진동했다.
깨셨습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있으신지요?
............
안나는 눈앞에 나타난 깐깐한 인상인 여자의 얼굴에 주의를 집중하려 했지만, 아직도 의식이 좀 몽롱하고 몸도 영 찝찝해서 잘 되질 않았다.
몸의 감촉도 조금 달라 고개를 살짝 내리니, 술냄새에 찌든 옷이 아니라 깨끗한 제복이 입혀져 있었다.
반갑네, 안나 양. 내가 이 안전계약사의 책임자 크루거네.
자네와는 한 번 만난 적 있다만, 아마 기억도 안 날 테지?
......
우리 그리폰에 뛰어난 전술지휘관이 부족하던 차에, 내 어느 친구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래서 억지로 납치해 오셨다?
안나가 차가운 수갑을 짤랑였다.
신변이 염려되어 기지로 모셔온 겁니다. 당신이 폭력을 행사해 제 부하 인형이 기절시킨 것, 기억하시겠죠?
꼼수에 실수로 넘어갔을 뿐이야, 훈수 필요 없어.
안나 양에게 식사 좀 가져와 주게.
예.
헬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떠났다.
전술인형... 아직 그들에겐 전사로서 모자란 점이 많네만, 자네의 지휘와 앞으로 발전할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언젠가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걸세.
일하겠다고 안 했는데.
지금 이건 회사일 이야기가 아니야. 안나, 자네는 인형을 어떻게 보는가?
크루거가 들고 있던 전술 태블릿을 안나 앞에 내려놓았고, 화면에는 그녀와 격투전을 치렀던 그 인형의 프로필이 보였다.
미련한 쇳덩어리.
훈련받은 티는 나지만 머리는 유연하지 않고, 전술 운용법도 형편없어.
그래. 이 인형은 매일 꾸준히 훈련을 하고 있지만 효과가 예상보다 미미하네.
그런 녀석들한테 필요한 건 훈련이 아니라 실전 경험과 전술적 사고야.
그럼 자네라면 그들을 어떻게 훈련할 건가?
하하...
유도심문도 좀 숨기면서 하시지?
그냥 수다나 좀 떨자는 거니 긴장 말게나.
오히려 당신의 생각부터 좀 듣고 싶네, 크루거 씨.
PMC라면 숱하게 봤어. 그런데 인형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덴 이 회사가 처음이야.
저 쇳덩어리들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길래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한 거지?
...재미있는 질문이군.
안나, 자네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갓 군사 훈련을 받는 인간 병사가 적을 사살할 수 있을 수준으로 AK-12 사용에 숙달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병사의 재능에 따라 다르겠지, 일반적으론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리지만.
인형은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
그런 기술 쪽은 잘 몰라서.
날 때부터.
......
이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일세. 죽이기 위해 태어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싸움이 전부가 아니야.
그 쇳덩어리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지. 저들은 1세대야. 머지않아 발전된 2세대가 탄생할 테고, 그 다음은 3세대겠지.
인형의 진화의 끝은 아직 지평선 너머 저 멀리 있다네.
미래가 아주 창창하단 거에 올인하셨다 이거군.
도중에 어떤 이유에서든 발전이 막히면 어떡하려고?
일단은 이론상 인형의 수명은 무한하다네. 발전에 제동이 걸린다 해도, 그들은 나를,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무한한 수명...?
똑똑.
들어오게.
안녕하십니까, 크루거 님. 안녕하세요, 안나 씨. 점심 식사 차려드리러 왔습니다.
너는...
절 부르셨습니까, 안나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부드럽게 미소짓는 인형은 점심 식사와 수저를 준비해 주고 방을 떠났고, 뒤이어 헬리안이 돌아왔다.
방금 그 애는 당신과 함께 건물 밖으로 떨어졌던 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동형 모델일 뿐이죠.
참고로 그 아이는 현재 수복 캡슐에서 수복 중에, 금방 다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
현재 인형에겐 아직 기억을 계승하는 기능이 없어, 임무 도중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역시 곤란합니다.
물론 인형의 기억에 관한 기술도 금방 혁신이 이뤄질 걸세.
안나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인형이 떠난 방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 나한테 앙심은 안 품어?
아니오.
왜?
그렇게 설정됐으니까죠.
하아...
설마 인형은 선량하고 포용력 넘쳐서 세상 모든 악의를 용서한다는 무슨 그런 건 아니지?
그리 설정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과 달리 인형은 수정 불가능한 "기반 설정"이란 것이 있어, 이에 따라 자신의 지휘관에게 복종해야만 합니다.
......
전장에서 인형에게 배신당할 걱정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안나 씨.
...내 뒷조사도 아주 철저히 했구만.
헬리안은 비아냥에 입사 계약서를 탁상에 내미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급료도 많고, 근무 시간도 자유롭죠.
자네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네. 그리고 거기에 간섭할 셈도 없어.
그리폰은 꽉 막힌 데가 아닐세. 그저, 맡는 일을 깔끔하게 완수할 수 있는지만 보지.
근무 시간 외에 무엇을 하든 나는 신경쓰지 않네.
그리고 헬리안이 입사 계약서를 조금 더 가까이 밀며 덧붙였다.
저희가 보일 수 있는 성의는 다 보여드렸습니다.
......
안나는 인형이 떠난 방향에서 시선을 떼고, 계약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팔의 부상 때문에, 안나는 조금 꼴사납지만 입으로 사인펜 뚜껑을 물어 뽑아 서명칸에 이름을 적어넣으려 했다.
잠시만요.
뭐야, 사인하겠다니까 이상한 조건 붙이려는 거야?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보안을 고려해 본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뭐... 일종의 사내 코드네임이라 생각하세요.
하아...
안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고, 초췌하고, 뺨은 조금 움푹 들어갔고, 그런데도 두 눈은 사납게 번쩍이는 얼굴...
흡사 전설 속의——
"아바돈". 아바돈 지휘관, 어때?
......
...영 안 어울리는군.
사생활에 간섭 안 한다면서 바로 퇴짜부터 놓네...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이 악마 같은 얼굴인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듯, 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안젤리아"로 하지 뭐!
삐... 삐... 삐...
시설은 조용하게 가동 중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실험체 옆에 선 한 여자는, 짙은 색의 로브로 이 고요한 환경에 완전히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은 실험체의 프로필을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읽어 내려가며 넘겼고, 그러던 도중 하얀 옷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실험체의 신체 측정 데이터, 정리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그래.
대충 몇 쪽을 넘겨보고서, 서류를 하얀 소녀에게 넘겼다.
알았다, 계속해서 실험체의 수치 변화를 관찰하도록.
그리고 모두에게 통보해라, 실험체를 깨울 준비를 한다.
예.
하얀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물러나다, 문턱에 닿았을 즈음 그대로 멈췄다.
궁금한 게 있는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예전에 내가 교사 노릇을 할 적에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 있었지. 틈만 나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런데 이렇게 옆이 조용하니 되려 어색하구나. 궁금한 게 있다면 말하거라.
......
하얀 소녀는 실험체에게 시선을 향했다.
알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물학적 유전자, 혹은 외형입니까? 아니면 좀 더 내적인 이력이나 사상입니까?
그러니까, 이 실험체가 여전히 이전의 그 인간인가 아닌가가 궁금하다?
예... 조금, 궁금합니다...
나는 철학에 관해서는 잘 몰라. 허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 누워 있는 자는 그 인간이 맞단다.
...알겠습니다.
하얀 소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만 방에서 물러나려 했다.
허나 인간의 신분을 구성하는 요소는 그리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것.
그녀는 실험체의 기계팔을 들어올려 보고, 턱을 만져봤다.
육체? 사고? 기억?
내 눈엔 어느 것도 중요치 않아.
인간의 존재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란다.
어떤... 의미십니까?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야.
한 번 존재하면 반드시 누군가의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킬 흔적을 남긴단다.
그렇기에 돌아온 망자는 남은 부분이 겨우 얼굴뿐이더라도, 생자에게 감동과 눈물의 포옹을 받을 수 있지.
......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어. 지금 이 실험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 때가 아니야...
그녀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실험체 옆에 앉아, 호흡에 따라 경미하게 떨리는 실험체의 속눈썹을 주시했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렴. 아바돈에서 현세로 돌아오거라.
전체 대사 보기 (187줄)
친애하는 블랙웰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빌어 부디 나를 도와주길 바라.
지금 내 심정을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
사나에 대한 미안함일 수도 있고, 유적기구 놈들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궁지에 몰려서일 수도 있지.
선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성이 전부 닳아 사라질 때, 사람들은 무슨 인류의 가치를 내세우려 할까.
동족상잔은 인류의 전통.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원죄야.
지금 이 세상에 날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2050년 베슬란에서, 마이트너가.
전쟁은 겉보기엔 끝났으나 사람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희망은 마치 빛을 바라는 개미처럼, 흑야 속에서 묵묵히 기다린 끝에... 여명이 도래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 같았다.
모두가 평온함을 추구했다. 혼돈이 끝나고 도래한 것이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리폰 기지, 지휘실.
자동문이 열리면서 진지한 얼굴의 인형이 안으로 들어왔다.
헬리안 님, LAMG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렴, 너의 최근자 훈련 보고서를 방금 받았어.
네, 지적하실 점이 있나요?
아니, 네 성적은 아주 훌륭해. 지금 기지에서 가장 뛰어난 인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고평가 감사합니다,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그래서, 네게 어려운 임무를 하나 맡기려고 해.
헬리안은 모노클을 벗고 콧등을 주물렀다.
이는 고민이 있다는 표현이라고, LAMG는 속으로 판단했다.
어느 인물의 프로필과 현재 위치의 주소를 줄 테니, 이 사람을 사지 멀쩡하게 우리 기지로 데려올 것.
맡겨 주십시오, 전력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헬리안의 고민을 대신 해결한다는 기대감을 품고, LAMG는 정중하게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약 45분 후, 목표가 있는 방 앞 복도의 모퉁이에서 LAMG는 몸을 숙인 채 정황을 살폈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서 내부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주변 주민들에게 수소문해봐도, 방의 번호를 듣자마자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직접 문 바로 앞까지 가 봐도, 목표는커녕 방 내부의 상태를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헬리안 님, 지정 위치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목표의 방 앞에서 대기 중, 내부 상황은 파악 불가능합니다. 지시 바랍니다.
<color=#00CCFF>돌입해.</color>
예. 그런데, 온건한 방식을 취할지, 아니면...
<color=#00CCFF>......</color>
<color=#00CCFF>일단 온건하게 시도해 봐.</color>
네!
LAMG는 공손히 통신을 종료한 후 지금부터 어떡할지 계획을 구상했다.
실례합니다,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 계시나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에서 나온 LAMG라고 합니다. 귀하를 저희 그리폰 사의 지휘관으로 모시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싫은데.
냉혹한 얼굴의 이 여성은 사람을 멀리하는 타입 같았다.
대대적인 군비 축소로 인해 명예 전역 "당한" 군인임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였다.
"당황 말자, LAMG. 카리나 씨가 전수해 준 멘트로 대응하면 돼."
매정하게 그러지 마시고 내용을 자세히 보고 고려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그리폰은 비록 신생 기업이지만 매력적인 임금 급여 체계와 복지 제도도 이미 마련되어 있답니다.
저희 그리폰의 전술지휘관분들은 탄력근무제에 매달 요구량 이상의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시면 돼요.
여기, 저희 기지의 내부 사진도 있으니 한번 봐 보세요.
......
미동도 않는 듯했지만, LAMG는 이 여성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는 것을 포착했다. 나름 흥미를 보인다는 뜻이었다.
...생각은 해 보지.
말 나온 김에 직접 기지를 둘러보지 않으시겠어요? 교통은 저희가 전용 셔틀을 제공하는데...
물살을 탔으니, 당장 노를 저어 이 사람을 기지행 차량에 태우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됐고, 나중에.
에이 사양 마시고요~
끝까지 거절 내지는 저항한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그냥 들어 업어서 차로 직행한다.
그리고 안에 던져 넣고 문을 잠그면 상대도 도망칠 길이 없고, 그대로 기지로 돌아가면 임무 완료.
여기까지가 LAMG의 "완벽한" 시뮬레이션이었다.
문 앞에 선 LAMG는 옷깃과 머리를 정리한 다음, 절도 있고 예절 바른 리듬으로 문을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안나 빅토로브나 최 씨 계시나요?
그리폰 안전계약사――
콰아앙!!
시뮬레이션한 첫 대사를 다 읊기도 전에 문짝이 안면을 들이받으려 해, LAMG는 가까스로 몸을 뒤로 굴리며 피했다.
헉... 헉... 저기, 안나 씨? 혹시 무슨 오해라도――
아앙...?
모습을 드러낸 임무 목표는 조롱하듯 씨익 미소지으며, 지금 막 운명을 달리한 문짝을 밟았다.
아주 진한 알코올 냄새. 보드카가 유력했다.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귀하를――커흑!?
퍼버벅!
번개 같은 속도로, 안나가 냅다 LAMG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복부에 연속 보디 블로우를 꽂아 넣었다.
LAMG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고 양발이 지면에 닿는 감각이 사라졌다.
안전계약사는 얼어뒤질 안전! 툭하면 문 두들기고 짜증나게 앵앵대기나 하고 말이야!
저는... 으악?!
쿠웅!
이번엔 바닥에 메치기였다.
다만 이번에는 낙법으로 굴러, 안나와 조금 거리를 벌렸다.
흐응, 제법인데? 나한테 콤보로 쳐 맞고도 일어서다니.
안나 씨, 적대 행위를 멈춰 주십시오. 정말 불순한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흡흡허!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귓등을 스치는 생생한 소리.
안나는 LAMG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점점 펀치의 속도를 올렸다.
상황이 이러니, LAMG는 하는 수 없이 비좁은 복도에서 저 주먹의 비를 피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시뮬레이션한 대로 설득을 시도했다.
잠시만 들...! 저희!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는! 비록 신생 기업이지만, 윽... 매력적인, 임금, 급여 체계와, 복지 제도도...!
......
저희이 전술지휘관분들은...! 탄력근무제에, 매달 요구량 이상의,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시면――
안나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너 왜 반격 안 하냐?
헉... 헉... 저는 그리폰&크루거 안전계약사 소속의 전술인형, LAMG입니다. 권한을 받지 않는 이상 인간에 대한 적대 행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허어.
인형이라.
복도에 드리운 은은한 빛줄기처럼,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가늠했다.
네 지휘관은?
잠시만요... 헬리안 님? 안나 씨께서 대화를 요청하십니다.
LAMG가 홀로그램 통신을 켰다.
<color=#00CCFF>반갑습니다, 안나 씨.</color>
댁이 이 인형 지휘관이야?
얘한테 명령해, 나랑 싸우라고.
<color=#00CCFF>......</color>
<color=#00CCFF>그러길 원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color>
<color=#00CCFF>LAMG, 권한 부여했다.</color>
...권한 확인. 무력 행위 제한을 해제합니다.
LAMG는 습관적으로 총을 집었다가, 잠깐 멈칫하고 대신 비수를 뽑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저 "임무 목표"가 희열에 찬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진지하게 한판 붙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그리폰 기지, 지휘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 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헬리안 님, 보고드립니다. 안나 씨를 모셔왔습니다.
잘했다.
몇 번 VIP룸에 있지?
......
의무실에 있습니다.
뭣?! 내가 사지 멀쩡하게 데려오라 했잖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분이 뒤에서 다짜고짜 관절기를 거는 바람에 함께 건물 밖으로 추락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나 씨가 제 밑에 깔리셔서...
......
제가 간단히 검사한 결과 골절이나 내부 장기 손상은 없었어요. 지금 의무실에서 전문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말은 덤덤했지만, 헬리안의 눈에 비치는 LAMG도 만신창이에 한쪽 팔은 아예 움직이질 못하는 꼴이었다.
...그래, 수고했어. 가서 수복받으렴.
네.
의무실.
낯선 방의 공기는 따뜻했지만, 소독약의 냄새가 진동했다.
깨셨습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있으신지요?
............
안나는 눈앞에 나타난 깐깐한 인상인 여자의 얼굴에 주의를 집중하려 했지만, 아직도 의식이 좀 몽롱하고 몸도 영 찝찝해서 잘 되질 않았다.
몸의 감촉도 조금 달라 고개를 살짝 내리니, 술냄새에 찌든 옷이 아니라 깨끗한 제복이 입혀져 있었다.
반갑네, 안나 양. 내가 이 안전계약사의 책임자 크루거네.
자네와는 한 번 만난 적 있다만, 아마 기억도 안 날 테지?
......
우리 그리폰에 뛰어난 전술지휘관이 부족하던 차에, 내 어느 친구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래서 억지로 납치해 오셨다?
안나가 차가운 수갑을 짤랑였다.
신변이 염려되어 기지로 모셔온 겁니다. 당신이 폭력을 행사해 제 부하 인형이 기절시킨 것, 기억하시겠죠?
꼼수에 실수로 넘어갔을 뿐이야, 훈수 필요 없어.
안나 양에게 식사 좀 가져와 주게.
예.
헬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떠났다.
전술인형... 아직 그들에겐 전사로서 모자란 점이 많네만, 자네의 지휘와 앞으로 발전할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언젠가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걸세.
일하겠다고 안 했는데.
지금 이건 회사일 이야기가 아니야. 안나, 자네는 인형을 어떻게 보는가?
크루거가 들고 있던 전술 태블릿을 안나 앞에 내려놓았고, 화면에는 그녀와 격투전을 치렀던 그 인형의 프로필이 보였다.
미련한 쇳덩어리.
훈련받은 티는 나지만 머리는 유연하지 않고, 전술 운용법도 형편없어.
그래. 이 인형은 매일 꾸준히 훈련을 하고 있지만 효과가 예상보다 미미하네.
그런 녀석들한테 필요한 건 훈련이 아니라 실전 경험과 전술적 사고야.
그럼 자네라면 그들을 어떻게 훈련할 건가?
하하...
유도심문도 좀 숨기면서 하시지?
그냥 수다나 좀 떨자는 거니 긴장 말게나.
오히려 당신의 생각부터 좀 듣고 싶네, 크루거 씨.
PMC라면 숱하게 봤어. 그런데 인형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덴 이 회사가 처음이야.
저 쇳덩어리들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길래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한 거지?
...재미있는 질문이군.
안나, 자네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갓 군사 훈련을 받는 인간 병사가 적을 사살할 수 있을 수준으로 AK-12 사용에 숙달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병사의 재능에 따라 다르겠지, 일반적으론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리지만.
인형은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
그런 기술 쪽은 잘 몰라서.
날 때부터.
......
이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일세. 죽이기 위해 태어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싸움이 전부가 아니야.
그 쇳덩어리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지. 저들은 1세대야. 머지않아 발전된 2세대가 탄생할 테고, 그 다음은 3세대겠지.
인형의 진화의 끝은 아직 지평선 너머 저 멀리 있다네.
미래가 아주 창창하단 거에 올인하셨다 이거군.
도중에 어떤 이유에서든 발전이 막히면 어떡하려고?
일단은 이론상 인형의 수명은 무한하다네. 발전에 제동이 걸린다 해도, 그들은 나를,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무한한 수명...?
똑똑.
들어오게.
안녕하십니까, 크루거 님. 안녕하세요, 안나 씨. 점심 식사 차려드리러 왔습니다.
너는...
절 부르셨습니까, 안나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부드럽게 미소짓는 인형은 점심 식사와 수저를 준비해 주고 방을 떠났고, 뒤이어 헬리안이 돌아왔다.
방금 그 애는 당신과 함께 건물 밖으로 떨어졌던 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동형 모델일 뿐이죠.
참고로 그 아이는 현재 수복 캡슐에서 수복 중에, 금방 다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
현재 인형에겐 아직 기억을 계승하는 기능이 없어, 임무 도중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역시 곤란합니다.
물론 인형의 기억에 관한 기술도 금방 혁신이 이뤄질 걸세.
안나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인형이 떠난 방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 나한테 앙심은 안 품어?
아니오.
왜?
그렇게 설정됐으니까죠.
하아...
설마 인형은 선량하고 포용력 넘쳐서 세상 모든 악의를 용서한다는 무슨 그런 건 아니지?
그리 설정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과 달리 인형은 수정 불가능한 "기반 설정"이란 것이 있어, 이에 따라 자신의 지휘관에게 복종해야만 합니다.
......
전장에서 인형에게 배신당할 걱정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안나 씨.
...내 뒷조사도 아주 철저히 했구만.
헬리안은 비아냥에 입사 계약서를 탁상에 내미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급료도 많고, 근무 시간도 자유롭죠.
자네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네. 그리고 거기에 간섭할 셈도 없어.
그리폰은 꽉 막힌 데가 아닐세. 그저, 맡는 일을 깔끔하게 완수할 수 있는지만 보지.
근무 시간 외에 무엇을 하든 나는 신경쓰지 않네.
그리고 헬리안이 입사 계약서를 조금 더 가까이 밀며 덧붙였다.
저희가 보일 수 있는 성의는 다 보여드렸습니다.
......
안나는 인형이 떠난 방향에서 시선을 떼고, 계약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팔의 부상 때문에, 안나는 조금 꼴사납지만 입으로 사인펜 뚜껑을 물어 뽑아 서명칸에 이름을 적어넣으려 했다.
잠시만요.
뭐야, 사인하겠다니까 이상한 조건 붙이려는 거야?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보안을 고려해 본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뭐... 일종의 사내 코드네임이라 생각하세요.
하아...
안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하고, 초췌하고, 뺨은 조금 움푹 들어갔고, 그런데도 두 눈은 사납게 번쩍이는 얼굴...
흡사 전설 속의——
"아바돈". 아바돈 지휘관, 어때?
......
...영 안 어울리는군.
사생활에 간섭 안 한다면서 바로 퇴짜부터 놓네...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이 악마 같은 얼굴인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듯, 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안젤리아"로 하지 뭐!
삐... 삐... 삐...
시설은 조용하게 가동 중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실험체 옆에 선 한 여자는, 짙은 색의 로브로 이 고요한 환경에 완전히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은 실험체의 프로필을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읽어 내려가며 넘겼고, 그러던 도중 하얀 옷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실험체의 신체 측정 데이터, 정리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그래.
대충 몇 쪽을 넘겨보고서, 서류를 하얀 소녀에게 넘겼다.
알았다, 계속해서 실험체의 수치 변화를 관찰하도록.
그리고 모두에게 통보해라, 실험체를 깨울 준비를 한다.
예.
하얀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물러나다, 문턱에 닿았을 즈음 그대로 멈췄다.
궁금한 게 있는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예전에 내가 교사 노릇을 할 적에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 있었지. 틈만 나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런데 이렇게 옆이 조용하니 되려 어색하구나. 궁금한 게 있다면 말하거라.
......
하얀 소녀는 실험체에게 시선을 향했다.
알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물학적 유전자, 혹은 외형입니까? 아니면 좀 더 내적인 이력이나 사상입니까?
그러니까, 이 실험체가 여전히 이전의 그 인간인가 아닌가가 궁금하다?
예... 조금, 궁금합니다...
나는 철학에 관해서는 잘 몰라. 허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 누워 있는 자는 그 인간이 맞단다.
...알겠습니다.
하얀 소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이만 방에서 물러나려 했다.
허나 인간의 신분을 구성하는 요소는 그리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것.
그녀는 실험체의 기계팔을 들어올려 보고, 턱을 만져봤다.
육체? 사고? 기억?
내 눈엔 어느 것도 중요치 않아.
인간의 존재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란다.
어떤... 의미십니까?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야.
한 번 존재하면 반드시 누군가의 마음에 감정을 불러일으킬 흔적을 남긴단다.
그렇기에 돌아온 망자는 남은 부분이 겨우 얼굴뿐이더라도, 생자에게 감동과 눈물의 포옹을 받을 수 있지.
......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어. 지금 이 실험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 때가 아니야...
그녀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실험체 옆에 앉아, 호흡에 따라 경미하게 떨리는 실험체의 속눈썹을 주시했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렴. 아바돈에서 현세로 돌아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