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 황금방울새
나는 내 한 줌 남은 이 목숨으로 너에게 복수하러 왔다.
하하하...
M16A1은 허탈하게 웃으며 천천히 총을 내려놨다.
항복해야겠네.
털썩. 손 안의 총은 땅에 떨어지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M16의 뒤는 썰렁했다, 다른 그리폰 인형들은 추적 도중 전멸하여, 남은 건 총알이 바닥난 그녀뿐이었다.
위협 배제 완료.
얘는 어떡할까?
잔뼈가 굵은 녀석이라 대충 분해해서 최대한 멀리 던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보기보다 살벌하구만?
얘는 AR팀이야. 그렇게 난폭하게 처리했다가는 다신 못 고쳐.
행동 능력이랑 통신 모듈만 무력화시켜 놔.
알았다.
싱겁네...
AK-12는 안 내키는 척 하품하며 AN-94를 도와 M16A1을 붙잡고 소체의 신경 중추를 파괴했다.
온몸에 힘이 풀리며 얼굴을 진흙 바닥에 처박았지만, M16A1은 시선을 올곧게 안젤리아에게서 떼지 않았다.
할 말 더 있나 봐?
안젤리아, 그냥 기지에서 가만 있으면 다 조용히 지나갈 일이야.
대체 왜――
마음 바꼈다, 발성 모듈도 뽑아.
알았다.
철컥.
M16A1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다, 쓴웃음을 지으며 체념했다.
다른 애들도 시킨대로 잘 숨겨 두고 좌표를 페르시카한테 메일로 보냈어.
잘했어, 그럼 가자.
우선 너희가 그 놈들과 조우한 곳부터 확인하자.
여기서 그 신호 식별이 불가능한 적과 조우했다.
......
이거... 본 적 있는 건데.
지면은 싸운 흔적과 발자국으로 어지러웠지만, 안젤리아의 시선은 그걸 무시하고 전혀 다른 곳에 꽂혔다.
역시 이게 신경쓰여? 아깐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아직도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거 대충 안내판으로 만들어 둔 거 맞지?
......
눈에 잘 안 띄는 갈림길에, 기괴한 주검이 세워져 있었다.
여러 인간의 시체 토막을 꿰매 그럭저럭 인간 형태로 만든 주검은 오른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의 눈길을 끈 것은 그것도 아닌, 주검의 가슴에 걸린 나무 팻말이었다.
"안젤리아, 나는 네가 살인자인 걸 알고 있다."
어머나... 나랑 94가 보면 안 되는 걸 본 건 아니지?
필요하다면 실험실 돌아가서 이 기억 삭제할게.
......
안젤리아, 이런 메시지를 남길 만한 자로 짐작가는 게 있나?
...후보가 너무 많아서 바로 안 떠오르네.
아하하, 이런 데서 예상치 못한 원수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네~
상관없어.
그보다 신경쓰이는 건...
취조관이 그녀에게 보여 줬던 노비코프의 살해 현장 사진이 다시 떠올랐다.
익숙한 고문 흔적에, 익숙한 비수의 흔적...
그녀를 굉장히 잘 아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망자였다.
안젤리아?
가자. 대체 누가 뭣 때문에 나한테 이럴 만큼 원한이 있나 보자고.
......
강글라티 대위, 대위의 예상대로 목표가 기지를 탈출해 이곳으로 접근 중입니다.
선발 소대를 시켜 매복 위치로 유도해라.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만... 어째선지 매복이 어디 있는지 다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유도했는데도 매복 위치를 전부 피해 갔고, 그녀와 동행 중인 전술인형 2기도 상처가 털끝 하나도 없습니다.
......
목표도 대위의 전술을 잘 아는 듯합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지...
복수하는데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만 해선 너무 시시하잖아...
그는 잔뜩 녹슨 창가 앞에 서서, 양팔을 벌려 바람을 만끽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안젤리아.
너를 빨리 곤죽으로 만들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기괴한 안내판들을 따라 움직이는 안젤리아 일행은 도중에 몇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또 한 전장을 청소한 울프팩은 적의 시체를 몇 구 모아 확인했다.
...안내판들이랑 똑같네.
이것들은... 인간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에 기계를 조립해서 만든 것이다.
육체 부분의 상태로 봐서, 조립은 인간이 사망한 후 진행된 것 같은데... 이렇게 한 의미를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동력원으로 움직이는지도 원리를 모르겠다.
어우, 징그러워.
......
안젤리아는 주검 옆에 쪼그려 앉아, 주검이 입은 위장복과 계급장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옷의 앞섬을 풀어헤치자 나온 것은...
군의 인식표...
위조품은 아닌 것 같다.
......
표정이 무서운데, 왜 그래?
안젤리아가 인식표의 병과 표시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예전에 있었던 부대 거야.
내가 알기로, 안젤리아가 복무했던 부대는 군비 축소로 인해 해체됐다고...
그 전에, 이들은 이미...
안젤리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적들은 진작에 죽은 인간 군인들 방식으로 입고 무장했다고?
게다가 사망한 인간의 육체에 기계를 이식해 만들어졌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 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엉성하고, 신체 능력 강화가 목적이라기엔 성능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
미치광이나 할 짓이지.
배후에 있는 놈을 절대 가만 안 두겠어...
AK-12는 적의 주검을 뒤집으면서 한 번 더 살펴봤다.
어쩌면 그냥 버려진 불량품일지도?
불량품...
내 눈엔 그저 졸렬한 위조품일 뿐이야.
오. 안젤리아, 저기 "안내판"이 또 있어.
AK-12가 가리킨 방향, 주검 안내판이 또 하나 보였다. 멀리 아래의 폐허에 세워진 그것은 헤진 옷이 바람에 가볍게 펄럭였다.
가자.
이 인식표들은 따로 처리할까?
아니... 그냥 여기서 천천히 썩게 놔둬.
알았다.
안젤리아, 저 앞은 버려진 도시야. 오염도도 높고 매복에 기습당할 위험도 높은데, 어떡할래?
......
차가운 시선으로 폐허를 훑고, 안젤리아는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복수의 장소로는 완벽하잖아, 안 그래?
근데 누가 누구한테 복수하게 될지는 좀 두고봐야겠다.
안젤리아는 앞장서서 산을 내려가, 울프팩의 엄호를 받으며 폐허 위의 안내판에 다가갔다.
어김없이 걸린 나무 팻말에는...
"안젤리아, 너는 두 사람을 죽였다."
두 사람...
메시지 범위가 많이 축소됐다. 적은 아무래도 이런 메시지로 우릴 더 깊숙이 유인할 셈인 것 같다.
하지만 저쪽도 마음이 꽤 급한 거 같네.
주검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안젤리아에게 보인 것은...
이미 약간 기울어진 폐건물이었다.
우릴 빨리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
가자.
안젤리아, 이번 적의 신호를 감지할 수 없어 매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 봐도 뻔하지. 전투 준비해.
...알았다.
썰렁한 로비의 중앙에는 두 주검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걸려 있는 팻말에는...
"하나는, 내게 가족의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하나는, 내가 가족의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
죽은 두 사람이 가족 관계란 뜻인가?
복수귀 분이 참 가족애가 깊으시네.
......
슈우우―― 퍼억!
주검 한 구가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경계!
응!
울프팩이 동시에 총구를 들었고, AN-94의 엄호를 받으며 AK-12가 떨어진 주검에 천천히 접근했다.
안젤리아는 주검이 떨어졌던 방향을 올려다봤지만, 그곳엔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어... 이 녀석 팻말엔 "사나"라 적혀 있는데, 아는 이름이야?
...사나?
안나 언니...
조심해!
AN-94가 세게 밀쳐, 안젤리아는 옆으로 넘어졌다.
간발의 차로 그 자리에 다른 주검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안젤리아에게도 팻말에 적힌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흐민"
아흐민...
이것도 이름이네.
죽은 두 사람의 이름인가?
사나... 아흐민...?
안젤리아를 부축해 일으킨 AK-12는 그녀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그 자식이야... 그 자식밖에 없어...!
누구의 짓인지 파악했나?
라플라스... 이 세상에 이 두 이름을 기억하는 건 나와 그놈뿐이야!
그러자 빛이 사라졌다. 마치 하늘이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적이 다수 접근 중.
안젤리아, 너무 떨어지지 마.
...내 명령 없이 사격 금지.
알았다.
뚜벅... 뚜벅... 뚜벅...
느릿한 발소리와 예리한 쇠붙이가 벽을 긁는 소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안젤리아,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누구냐! 마이트너가 보냈냐?
나? 나는 본디 묘에서 썩어 문드러질 망령이었지.
허나 선생님께서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역시 그년이었어! 전부 그년이 벌인 짓이었어!
그리고 나는 한 줌 남은 이 목숨으로, 너에게 복수하러 왔다.
슈욱!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안젤리아에게 날아들었다.
바닥에 꽂힐 때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엎드려!
안젤리아, 지금 그 꼴로 내 앞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적은 3층 높이에 있다, 안젤리아! 지시를!
......
쫓아.
어금니를 악물고, 단 두 글자만을 뱉었다.
두 총구가 내뿜는 화염이 어둠을 갈랐다.
안젤리아는 울프팩의 엄호를 받으며,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올랐다.
예상한 바였지만 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건지, 층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누더기 주검들이 안젤리아 일행을 덮쳤다.
포위당했다!
그 자식 어디 갔어?
저 놈들 신호 안 잡힌다니깐!
나를 찾나?
혼란스러운 총성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더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마이트너는 어딨어! 그년 나오라 해!
실망이군, 안젤리아.
이제 와서 네게 선생님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다 생각하는 거냐?
......
이건 너와 나 사이의 복수다. 선생님이 아니라.
계속 그런 건방진 말투로 선생님을 부르면, 내가――
철근 한 가닥이 마치 시공간을 꿰뚫은 듯한 속도로 날아와 AN-94를 찔렀다.
큭...!
AN-94!
괜찮다, 가벼운 손상이다. 작전에 지장 없다.
내가 선두 설 테니까 물러서.
......!
발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멀어진다.
이 자식, 거기 서!!
안젤리아, 진상을 알고 싶다면 옥상으로 와라.
물론 네가 몸 성히 올 수 있다면 말이지만...
저게 XX!!
안젤리아, 단독 행동은 위험하다!
누더기 주검들은 걸음도, 공격도 빠르지 않아 울프팩이 상대하기엔 쉬웠다. 문제는 물량. 모든 열세를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찍어 눌렀다.
울프팩이 화력으로 한 무리를 처치해도, 몇 초도 안 되어 다른 무리가 자리를 채웠다.
시간 벌고 있어, 난 놈을 쫓는다.
하지만...!
명령이야, 지휘관의 판단에 복종해.
총은 있고?
설마 그 칼 한 자루로 맞짱 뜨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없네, 하나 줘.
AK-12가 짐짓 질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권총을 던져 줬다.
우리가 따라갈 때까지 죽지 말라구~
알았어.
희미한 빛줄기에 의지해, 안젤리아는 칠흑같은 나선계단의 난간을 짚으며 올랐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점점 다리의 감각이 마비되어 갔고, 의식마저 조금 흐려지는 듯했다.
마침내 시야 끝에 문 한짝이 나타났다.
당연히, 안젤리아는 일말의 주저 없이 문을 들이받아 열었다.
땅거미가 아직 하늘 끝에 걸려서, 하루 종일 쫓은 적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마르고 삭은 윤곽에, 광택 없는 두 눈, 그리고 건초처럼 마른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는, 마치 한 그루의 말라 비틀어진 나무처럼 꿋꿋하면서도 삐뚤어진 형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
오직 그의 굵다란 금속 의체만이 이 어두워져 가는 풍경 속에서 서늘한 빛을 반사했다.
......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방아쇠에 걸은 안젤리아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굳었다.
넌...!
안젤리아 지휘관.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 기쁘군.
아직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 강글라티를.
강글라티...?
안젤리아는 지금 권총이 몇 배나 무거워진 기분이었지만, 팔이 떨어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저 말라 비틀어진 형상을 겨눴다.
어떻게...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넌 분명, 죽었는데... 분명히... 내 눈앞에서...
오오, 죽음. 분명 아바돈의 문은 나를 집어삼켰지. 허나 선생님께서 손을 뻗어 주셨다.
그년이...!
그 여자가 널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래.
그분이 아니었으면 네게 복수할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
그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마다 들리는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 그제서야 안젤리아는 상대의 의체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몸을 끌면서 안젤리아를 조금씩 궁지로 몰아 넣었다.
그만해...
몇 걸음 앞에서 멈춰, 그는 광택 없는 눈으로 안젤리아를 노려봤다. 그리고 굳었던 입가를 천천히 벌려,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바돈의 문은 지금, 너를 향해 활짝 열렸어. 안젤리아, 죽어라.
――!
그의 예고 없는 총격을, 안젤리아는 가까스로 피했다.
...지금 너야말로 아바돈으로 다시 들어갈 꼴인데.
내 동생 사나, 그리고 형 아흐민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
모두 이미 죽었어...
아니.
그는 잔혹하게 안젤리아의 말을 끊는 동시에 유탄을 발사했다.
안젤리아는 가까스로 몸을 옆으로 날려 직격은 피했지만,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이었기에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죽음은 그저 시작에 불과해!
죽은 건 죽은 거야!
선생님께서, 그들을 다시 내 곁으로 데려와 주실 거야!
무아지경에 빠져, 그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다.
쾅! 콰광!!
안젤리아는 권총을 단단히 쥐고서, 이 비좁은 옥상의 몇 없는 엄폐물 사이를 번갈아 이동했다.
왜...
또 왜 나한테...
흔들리는 엄폐물에 기댄 안젤리아의 눈에, 상대의 생전 마지막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몇 번이든... 너를 해방시켜 주겠어.
전체 대사 보기 (193줄)
하하하...
M16A1은 허탈하게 웃으며 천천히 총을 내려놨다.
항복해야겠네.
털썩. 손 안의 총은 땅에 떨어지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M16의 뒤는 썰렁했다, 다른 그리폰 인형들은 추적 도중 전멸하여, 남은 건 총알이 바닥난 그녀뿐이었다.
위협 배제 완료.
얘는 어떡할까?
잔뼈가 굵은 녀석이라 대충 분해해서 최대한 멀리 던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보기보다 살벌하구만?
얘는 AR팀이야. 그렇게 난폭하게 처리했다가는 다신 못 고쳐.
행동 능력이랑 통신 모듈만 무력화시켜 놔.
알았다.
싱겁네...
AK-12는 안 내키는 척 하품하며 AN-94를 도와 M16A1을 붙잡고 소체의 신경 중추를 파괴했다.
온몸에 힘이 풀리며 얼굴을 진흙 바닥에 처박았지만, M16A1은 시선을 올곧게 안젤리아에게서 떼지 않았다.
할 말 더 있나 봐?
안젤리아, 그냥 기지에서 가만 있으면 다 조용히 지나갈 일이야.
대체 왜――
마음 바꼈다, 발성 모듈도 뽑아.
알았다.
철컥.
M16A1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다, 쓴웃음을 지으며 체념했다.
다른 애들도 시킨대로 잘 숨겨 두고 좌표를 페르시카한테 메일로 보냈어.
잘했어, 그럼 가자.
우선 너희가 그 놈들과 조우한 곳부터 확인하자.
여기서 그 신호 식별이 불가능한 적과 조우했다.
......
이거... 본 적 있는 건데.
지면은 싸운 흔적과 발자국으로 어지러웠지만, 안젤리아의 시선은 그걸 무시하고 전혀 다른 곳에 꽂혔다.
역시 이게 신경쓰여? 아깐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아직도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거 대충 안내판으로 만들어 둔 거 맞지?
......
눈에 잘 안 띄는 갈림길에, 기괴한 주검이 세워져 있었다.
여러 인간의 시체 토막을 꿰매 그럭저럭 인간 형태로 만든 주검은 오른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젤리아의 눈길을 끈 것은 그것도 아닌, 주검의 가슴에 걸린 나무 팻말이었다.
"안젤리아, 나는 네가 살인자인 걸 알고 있다."
어머나... 나랑 94가 보면 안 되는 걸 본 건 아니지?
필요하다면 실험실 돌아가서 이 기억 삭제할게.
......
안젤리아, 이런 메시지를 남길 만한 자로 짐작가는 게 있나?
...후보가 너무 많아서 바로 안 떠오르네.
아하하, 이런 데서 예상치 못한 원수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네~
상관없어.
그보다 신경쓰이는 건...
취조관이 그녀에게 보여 줬던 노비코프의 살해 현장 사진이 다시 떠올랐다.
익숙한 고문 흔적에, 익숙한 비수의 흔적...
그녀를 굉장히 잘 아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망자였다.
안젤리아?
가자. 대체 누가 뭣 때문에 나한테 이럴 만큼 원한이 있나 보자고.
......
강글라티 대위, 대위의 예상대로 목표가 기지를 탈출해 이곳으로 접근 중입니다.
선발 소대를 시켜 매복 위치로 유도해라.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만... 어째선지 매복이 어디 있는지 다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유도했는데도 매복 위치를 전부 피해 갔고, 그녀와 동행 중인 전술인형 2기도 상처가 털끝 하나도 없습니다.
......
목표도 대위의 전술을 잘 아는 듯합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지...
복수하는데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만 해선 너무 시시하잖아...
그는 잔뜩 녹슨 창가 앞에 서서, 양팔을 벌려 바람을 만끽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안젤리아.
너를 빨리 곤죽으로 만들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기괴한 안내판들을 따라 움직이는 안젤리아 일행은 도중에 몇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또 한 전장을 청소한 울프팩은 적의 시체를 몇 구 모아 확인했다.
...안내판들이랑 똑같네.
이것들은... 인간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에 기계를 조립해서 만든 것이다.
육체 부분의 상태로 봐서, 조립은 인간이 사망한 후 진행된 것 같은데... 이렇게 한 의미를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동력원으로 움직이는지도 원리를 모르겠다.
어우, 징그러워.
......
안젤리아는 주검 옆에 쪼그려 앉아, 주검이 입은 위장복과 계급장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옷의 앞섬을 풀어헤치자 나온 것은...
군의 인식표...
위조품은 아닌 것 같다.
......
표정이 무서운데, 왜 그래?
안젤리아가 인식표의 병과 표시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예전에 있었던 부대 거야.
내가 알기로, 안젤리아가 복무했던 부대는 군비 축소로 인해 해체됐다고...
그 전에, 이들은 이미...
안젤리아는 말꼬리를 흐리며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적들은 진작에 죽은 인간 군인들 방식으로 입고 무장했다고?
게다가 사망한 인간의 육체에 기계를 이식해 만들어졌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 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엉성하고, 신체 능력 강화가 목적이라기엔 성능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
미치광이나 할 짓이지.
배후에 있는 놈을 절대 가만 안 두겠어...
AK-12는 적의 주검을 뒤집으면서 한 번 더 살펴봤다.
어쩌면 그냥 버려진 불량품일지도?
불량품...
내 눈엔 그저 졸렬한 위조품일 뿐이야.
오. 안젤리아, 저기 "안내판"이 또 있어.
AK-12가 가리킨 방향, 주검 안내판이 또 하나 보였다. 멀리 아래의 폐허에 세워진 그것은 헤진 옷이 바람에 가볍게 펄럭였다.
가자.
이 인식표들은 따로 처리할까?
아니... 그냥 여기서 천천히 썩게 놔둬.
알았다.
안젤리아, 저 앞은 버려진 도시야. 오염도도 높고 매복에 기습당할 위험도 높은데, 어떡할래?
......
차가운 시선으로 폐허를 훑고, 안젤리아는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복수의 장소로는 완벽하잖아, 안 그래?
근데 누가 누구한테 복수하게 될지는 좀 두고봐야겠다.
안젤리아는 앞장서서 산을 내려가, 울프팩의 엄호를 받으며 폐허 위의 안내판에 다가갔다.
어김없이 걸린 나무 팻말에는...
"안젤리아, 너는 두 사람을 죽였다."
두 사람...
메시지 범위가 많이 축소됐다. 적은 아무래도 이런 메시지로 우릴 더 깊숙이 유인할 셈인 것 같다.
하지만 저쪽도 마음이 꽤 급한 거 같네.
주검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안젤리아에게 보인 것은...
이미 약간 기울어진 폐건물이었다.
우릴 빨리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
가자.
안젤리아, 이번 적의 신호를 감지할 수 없어 매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 봐도 뻔하지. 전투 준비해.
...알았다.
썰렁한 로비의 중앙에는 두 주검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걸려 있는 팻말에는...
"하나는, 내게 가족의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하나는, 내가 가족의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
죽은 두 사람이 가족 관계란 뜻인가?
복수귀 분이 참 가족애가 깊으시네.
......
슈우우―― 퍼억!
주검 한 구가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경계!
응!
울프팩이 동시에 총구를 들었고, AN-94의 엄호를 받으며 AK-12가 떨어진 주검에 천천히 접근했다.
안젤리아는 주검이 떨어졌던 방향을 올려다봤지만, 그곳엔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어... 이 녀석 팻말엔 "사나"라 적혀 있는데, 아는 이름이야?
...사나?
안나 언니...
조심해!
AN-94가 세게 밀쳐, 안젤리아는 옆으로 넘어졌다.
간발의 차로 그 자리에 다른 주검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안젤리아에게도 팻말에 적힌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흐민"
아흐민...
이것도 이름이네.
죽은 두 사람의 이름인가?
사나... 아흐민...?
안젤리아를 부축해 일으킨 AK-12는 그녀의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그 자식이야... 그 자식밖에 없어...!
누구의 짓인지 파악했나?
라플라스... 이 세상에 이 두 이름을 기억하는 건 나와 그놈뿐이야!
그러자 빛이 사라졌다. 마치 하늘이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적이 다수 접근 중.
안젤리아, 너무 떨어지지 마.
...내 명령 없이 사격 금지.
알았다.
뚜벅... 뚜벅... 뚜벅...
느릿한 발소리와 예리한 쇠붙이가 벽을 긁는 소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안젤리아,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누구냐! 마이트너가 보냈냐?
나? 나는 본디 묘에서 썩어 문드러질 망령이었지.
허나 선생님께서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역시 그년이었어! 전부 그년이 벌인 짓이었어!
그리고 나는 한 줌 남은 이 목숨으로, 너에게 복수하러 왔다.
슈욱!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안젤리아에게 날아들었다.
바닥에 꽂힐 때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엎드려!
안젤리아, 지금 그 꼴로 내 앞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적은 3층 높이에 있다, 안젤리아! 지시를!
......
쫓아.
어금니를 악물고, 단 두 글자만을 뱉었다.
두 총구가 내뿜는 화염이 어둠을 갈랐다.
안젤리아는 울프팩의 엄호를 받으며,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올랐다.
예상한 바였지만 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건지, 층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누더기 주검들이 안젤리아 일행을 덮쳤다.
포위당했다!
그 자식 어디 갔어?
저 놈들 신호 안 잡힌다니깐!
나를 찾나?
혼란스러운 총성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더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마이트너는 어딨어! 그년 나오라 해!
실망이군, 안젤리아.
이제 와서 네게 선생님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다 생각하는 거냐?
......
이건 너와 나 사이의 복수다. 선생님이 아니라.
계속 그런 건방진 말투로 선생님을 부르면, 내가――
철근 한 가닥이 마치 시공간을 꿰뚫은 듯한 속도로 날아와 AN-94를 찔렀다.
큭...!
AN-94!
괜찮다, 가벼운 손상이다. 작전에 지장 없다.
내가 선두 설 테니까 물러서.
......!
발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멀어진다.
이 자식, 거기 서!!
안젤리아, 진상을 알고 싶다면 옥상으로 와라.
물론 네가 몸 성히 올 수 있다면 말이지만...
저게 XX!!
안젤리아, 단독 행동은 위험하다!
누더기 주검들은 걸음도, 공격도 빠르지 않아 울프팩이 상대하기엔 쉬웠다. 문제는 물량. 모든 열세를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찍어 눌렀다.
울프팩이 화력으로 한 무리를 처치해도, 몇 초도 안 되어 다른 무리가 자리를 채웠다.
시간 벌고 있어, 난 놈을 쫓는다.
하지만...!
명령이야, 지휘관의 판단에 복종해.
총은 있고?
설마 그 칼 한 자루로 맞짱 뜨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없네, 하나 줘.
AK-12가 짐짓 질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권총을 던져 줬다.
우리가 따라갈 때까지 죽지 말라구~
알았어.
희미한 빛줄기에 의지해, 안젤리아는 칠흑같은 나선계단의 난간을 짚으며 올랐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점점 다리의 감각이 마비되어 갔고, 의식마저 조금 흐려지는 듯했다.
마침내 시야 끝에 문 한짝이 나타났다.
당연히, 안젤리아는 일말의 주저 없이 문을 들이받아 열었다.
땅거미가 아직 하늘 끝에 걸려서, 하루 종일 쫓은 적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마르고 삭은 윤곽에, 광택 없는 두 눈, 그리고 건초처럼 마른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는, 마치 한 그루의 말라 비틀어진 나무처럼 꿋꿋하면서도 삐뚤어진 형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
오직 그의 굵다란 금속 의체만이 이 어두워져 가는 풍경 속에서 서늘한 빛을 반사했다.
......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방아쇠에 걸은 안젤리아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굳었다.
넌...!
안젤리아 지휘관.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 기쁘군.
아직 기억하고 있으려나? 나, 강글라티를.
강글라티...?
안젤리아는 지금 권총이 몇 배나 무거워진 기분이었지만, 팔이 떨어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저 말라 비틀어진 형상을 겨눴다.
어떻게...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넌 분명, 죽었는데... 분명히... 내 눈앞에서...
오오, 죽음. 분명 아바돈의 문은 나를 집어삼켰지. 허나 선생님께서 손을 뻗어 주셨다.
그년이...!
그 여자가 널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래.
그분이 아니었으면 네게 복수할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
그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마다 들리는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 그제서야 안젤리아는 상대의 의체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몸을 끌면서 안젤리아를 조금씩 궁지로 몰아 넣었다.
그만해...
몇 걸음 앞에서 멈춰, 그는 광택 없는 눈으로 안젤리아를 노려봤다. 그리고 굳었던 입가를 천천히 벌려,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바돈의 문은 지금, 너를 향해 활짝 열렸어. 안젤리아, 죽어라.
――!
그의 예고 없는 총격을, 안젤리아는 가까스로 피했다.
...지금 너야말로 아바돈으로 다시 들어갈 꼴인데.
내 동생 사나, 그리고 형 아흐민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
모두 이미 죽었어...
아니.
그는 잔혹하게 안젤리아의 말을 끊는 동시에 유탄을 발사했다.
안젤리아는 가까스로 몸을 옆으로 날려 직격은 피했지만,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이었기에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죽음은 그저 시작에 불과해!
죽은 건 죽은 거야!
선생님께서, 그들을 다시 내 곁으로 데려와 주실 거야!
무아지경에 빠져, 그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다.
쾅! 콰광!!
안젤리아는 권총을 단단히 쥐고서, 이 비좁은 옥상의 몇 없는 엄폐물 사이를 번갈아 이동했다.
왜...
또 왜 나한테...
흔들리는 엄폐물에 기댄 안젤리아의 눈에, 상대의 생전 마지막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몇 번이든... 너를 해방시켜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