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속의 조화
"폭스 시스터후드에서 온 유실물이 엘마를 새로운 여정으로 인도한다."
...철푸덕, 쿠웅——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폭스 시스터후드 패거리의 맹공에 밀려, 두 인형은 얼마 못 가서 박사가 있는 곳으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쳐야 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문을 틀어막은 뒤 스티븐스 520은 흄 박사에게 걸어갔다.
......
박사님, 죄송해요. 막아낼 수가 없었어요...
뭐가 저렇게 많은 건데!
한심한 몰골을 한 둘을 보며 엘마는 어리둥절한 눈치로 레네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 이땐 왜 이렇게 약했던 거야?
...나도 몰라. 이 부분은 기억이 전혀 없어. 박사의 이름도 내가 기억하기론 아서 흄 딱 하나였는데.
하지만 지금 100%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 있는 루이 흄이 바로 우리가 아는 아서 흄이라는 거야.
어... 이럴 거면 이름은 뭐 하러 바꾼 거지?
얼굴도 똑같고 성도 그대로고.
...설마, 내가 이걸 보게 된 것까지 전부 "그 사람"의 계획인가?
그래서 네 목적은 대체 뭔데?
...아직은 알려줄 수 없어.
흥.
탕탕탕!
쿠웅!
튼튼하지 않은 문은 금세 박살났고, 문짝이 있던 자리에 매기가 잔망스러운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
또 만났네, 흄 박사. 얼굴 한번 보는 게 참 쉽지가 않아.
레이디 폰지,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어쭈, 해 봐! 어? 하라니까?
내가 너 불쌍해서 말해 주는데, 나는 지금 정식으로 상장한 기업의 명예 이사고, 댁은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진 전과자야.
경찰에 신고하면 과연 누가 잡혀갈까?
......
어머머, 저저저 표정 좀 봐. 진짜 화났어?
...레이디께서 이 실험실이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면야.
엘마, 스티븐스 520. 짐 정리하고 이사할 준비해.
어이구, 실험실 새로 차릴 돈은 있고?
댁네 계좌 잔고 확인해 봤거든? 아주 깨~끗하던데?
그건 레이디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 그렇네, 댁 같은 구닥다리 귀족들은 가상 화폐보단 현금을 좋아하지?
캐서린?
네엥~ 방금 소피아가 여기 있는 모든 금고를 열어봤어요.
이 실험실에 다른 금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 이곳의 모든 금괴는 폰지네 거랍니다!
근데 금괴가 몇억 정돈 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겨우 몇만밖에 없더라. 박사님 왜 이렇게 가난해요? 우리 소피아가 쟁여둔 돈도 이것보단 많은데!
!!! 캐서린 아가씨, 제 비상금이 얼만지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소피아의 아우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흄 박사의 안색은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매기는 그걸 지켜보며 흄 박사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사뿐하게 앉았다.
그래서 아직도 이사할 생각이야?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댁 말대로 나는 과학을 잘 몰라.
내 "호프콘" 프로젝트에 나 대신 혓바닥을 놀려 줄 전문가 간판이 필요해.
그게 얼굴 반반한 남자라면 완전 최고지, 홈페이지에 사진 딱 박아두면 투자자 끌어오는 데 좋으니까.
당신네 조직에 들어와라, 이겁니까?
맞아!
...폭스 '시스터후드' 아니었습니까? 남자가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시스터후드라고 성별 가려서 받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본인이 원한다면야 루이 언니라고 불러 줄 수도 있고...
......
정 그렇게 신경쓰이면 폭스 시블링후드라고 이름 고쳐버리지 뭐.
……
좋아, 농담은 이쯤 하자고.
댁의 "파일럿고래"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했지. 내용상 문제는 없었어, 그저 투자자의 돈을 좀 날려 먹었을 뿐이지. 그것 자체는 아주 좋은 아이템이고 판돈 키우기에 딱이야.
나도 지금까지 이런저런 아이템으로 몇백만에서 몇천만까지도 땡겨본 적은 있지만, 요즘 시대에 크게 한탕 해먹으려면 역시 첨단과학 이슈가 최고라니까.
댁의 프로젝트는 해봤자 10억짜리지만 내 "호프콘"은 투자금을 100억까지도 끌어올 수 있어.
루이 흄의 표정에 금이 갔다.
"파일럿고래" 프로젝트는... 사기가 아닙니다.
댁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사기라고 생각하는걸.
그건 사람들이 진정한 미래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계획을 꼭 성공시킬 겁니다.
판돈은 있어?
무슨 말입니까?
왜 도박꾼은 십중팔구 돈을 잃을까?
...타짜들 때문이겠죠.
쯧쯧, 그런 건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써먹는 거고.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진짜 큰물에선 타짜 따위 안 써.
그런 도박장이 돈을 쓸어담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손님은 한 번 판돈을 잃으면 다음 기회가 없기 때문이지.
특히 그 사람이 영끌 대출금까지 싹 탕진한 다음엔 정말로 개털 되는 거고.
......
간단한 예시를 들게, 동전 던지기로 앞면뒷면 맞히기.
한 판당 1크레딧씩 돈을 거는 거야. 수학적으론 이길 확률이 50%나 되겠지?
매기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공중에 튕기더니 깔끔한 솜씨로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선 가난한 쪽이 반드시 지게 되어있어. 지갑에 50크레딧이 있다 치면 50크레딧을 잃는 순간 게임에 더 참여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니까.
......
당신이 뛰어난 사회공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죠.
하지만 미안하군요. 저는 사업 파트너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니, 댁이 딱 좋다니까?
어휴, 설명해 봤자 못 알아먹을 테고. 인형 보는 눈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이쪽이 전문가야.
왜 전문가가 말하는데 믿지를 못해?
...그런다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흄 박사는 옆에 서 있는 엘마와 520에게 손짓해서 짐을 싸도록 했다.
매기는 단념하지 않고 흄 박사가 가져가려는 연구 자료 뭉치를 손으로 눌렀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지금 댁의 통장 잔고랑 명성이랑 빽 가지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겠어?
그건 레이디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는 댁은 진짜 깨끗한 과학자라 할 수 있어?
...하실 말씀은 끝났습니까?
이만 떠나시지요.
흄 박사는 매기의 손 밑에서 연구 자료를 홱 잡아챘다.
쯧쯧,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결과로만 평가한다고.
흄 박사, 댁의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어. 댁은 지금 세상이 공인하는 사기꾼이라니까?
나보다 더한 놈 취급이라고~
......
"호프콘"은 내가 원하는 결과지만 그쪽의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어.
일단은 내 프로젝트의 간판만 걸어놓고, 뭐든 간에 댁이 성공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내 "호프콘"은 그냥 자금 조달로 끝나고 댁의 그 험난한 여정을 도와주는 수단이 되는 거지.
......
난 과학은 몰라. 하지만 과학 연구에 들어가는 돈이 어떨 땐 국가 단위 사기극에 모이는 액수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아.
어쭙잖은 사기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저더러 뭘 하라는 겁니까?
댁의 이력과 작위, 인맥, 그리고 사진이 필요해.
아, 가끔 투자자가 방문하면 얼굴마담 좀 해 주고.
대화는 특기 분야가 아닙니다만.
걱정 마, 입 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흄 박사는 긴 침묵에 빠졌다.
...수당은 필요없습니다.
대신 제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자금 일체를 대 주셔야 합니다.
콜!
매기는 호쾌하게 흄 박사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이거 혹시 내가 사기당하는 쪽인 건 아니겠지?
......
서로 불편한 악수로 두 사람의 협업 계약이 체결되었다.
박사가 시스터후드에 가담했었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시스터후드가 왜? 뭘 그렇게 성별을 따지는 건지...
......
됐다. 그것보다 나한테 이 기억이 없는 게 더 신경쓰여.
박사와 나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봐.
나도.
......
우리 둘 다 이 장면은 처음 본 거지? "호프콘" 앵커 포인트를 다시 재생할까?
아니, 됐어. 저 대화에 맞춰서 다음 앵커 포인트로 이동하자.
"파일럿고래" 앵커 포인트를 찾아봐.
찾았어.
케케묵은 종이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사무실.
물방울 자국 가득한 유리창 너머로 찌푸린 하늘과, 사무실과 똑같이 낡고 오래된 길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창가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브로이 공작.
여전하십니까, 미샤 영감님.
창조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이미 늙은 몸이었고, 자네는 오늘처럼 젊고 활력이 넘쳤었지.
그때 자네의 이름이... 모리스 흄이었지?
추억 이야기나 하려고 오신 건 아니시겠죠.
2003년, 자네는 모리스 흄의 이름으로 그 《샘물에서 태어나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 논문을 발표했었지. "그 공간"에서 본 것에 관한 논문인가?
예, 저는 그것을 "GRCh38"라고 명명했죠.
당시 그 논문은 인형 기계의 핵심적 구상과 미래 발전상을 논증하여 학계에 제법 큰 파장을 일으켰지.
그런데 자네는 그 후 종적을 감춰버렸고.
당시엔 아직 풋내기였던 시절이라 단순히 그 기적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당시 학계에선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학 작품" 취급을 받았지만요.
심지어 이슈 냄새를 맡고 컨택해온 SF소설 출판사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모리스 흄의 아들 루이 흄"으로서 여기에 온 것처럼 말이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네만, 연구는 성공했는가?
아쉽게도... 아무래도 신의 축복은 아주 잠깐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약간 씁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때 자네가 예언한 곤경은 오늘날에 와서야 입증되었지.
인간 두뇌의 복잡함은 우리의 이해력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것이 밝혀졌어. 인류는 끝끝내 자아를 완벽하게 인지하는 데 실패했네.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뇌 구조를 가진 유사 인류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원천 차단되었지.
마치 지금 유행하는 인형이라는 무쇠덩어리들처럼 말이야. 인간을 체스로 이기는 인형을 만드는 건 쉽지만, 그들에게 한 살배기 아기 수준의 자아를 형성시키는 건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지.
"설계도"는 제 손에 들어왔지만, 그 설계를 검증할 매개체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죠.
자네는 여기서 멈춰선 안 되네. 그런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자네와 나 모두 살아남았고, 거기서 얻은 보상으로 나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네.
자네도 자네가 본 것을 세상에 펼쳐 보여야 해, "GRCh38"이 자네에게 보여준 완전한 모형을 말일세.
...그건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재능과 동원할 수 있는 힘에 제약이 있다면 조직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떤가? 우리도 물론 환영일세.
......
외람된 말씀이오나 돈과 자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보게나.
천재는 절대 단 한 명만 출현하지 않네. 이런 난세에는 반드시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기 마련이지.
브로이 공작, 이제는 자네의 재능을 약간 공유하고 양보할 때라고 보네.
......
저는 명성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연구 성과가 누구의 소유물이 되든 신경쓰지 않아요.
제가 무슨 사심이 있어서 제 연구를 숨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저 가끔 자네가 너무 집착이 강하지 않나 싶어서 그러네.
혹은 상상력이 여전히 틀에 박혀 있다고 말해야 할까.
...다른 방법을 좀 시도해 보죠.
지금 자네가 고른 폭스 시스터후드도 제법 괜찮은 협력 대상이라네. 관련 연구도 그들의 역량을 빌려서 진행할 수 있을걸세.
그들은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세상엔 사기꾼이 우리보다 잘하는 일도 있다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우리도 그저 신의 축복에 기대서 사기를 치는 족속으로 보일 수도 있지.
미샤 영감님,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저는 정치에 손대거나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흄 박사는 탁자에서 몇 걸음 물러나 약간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제가 아버지의 프랑스 성씨와 작위를 버린 것은 그저 순수한 인형공학자 흄으로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께서 축복하시어 이 언제 끝날지 모를 생명을 얻긴 했지만, 당신과 저는 결코 불사신이 아닙니다.
미샤 영감님, 저는 당신과 다른 이상을 쫓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저 알아줬으면 했다네. 자네에겐 언제나 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이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재난에서 살아남은 단 둘뿐인 생존자 아닌가.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인가 보군. 헤어지기 전에 내 한 가지만 부탁함세.
...말씀하시죠.
자네가 완성한 인형 중 한 대를 구매하고 싶네.
군에서 발주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아니면 협력의 증표라 봐도 좋네.
자네가 동의한다면 내 자네에게 푸짐한 보답을 약속하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좋은 대답 기대하겠네.
...감사합니다.
내가 우리 공작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구먼. 나도 이만 떠나겠네.
루이 흄은 일어서서 그늘에 몸을 감춘 그를 방 밖으로 모셨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계속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엘마가 스티븐스 520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팔려가는 건 너일까 나일까?
그야 당연히 너겠지! 이 애물단지야!
다른 구석, 멀리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던 엘마도 자신 옆의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결국 너였네.
...응.
저 영감님이 너한테 임무 내리는 사람이야?
...맞아. 저 사람이 너의 좌표, 그리고 네가 들어간 PMC의 자료를 전부 알려 줬어.
저 사람 믿을 수 있어?
글쎄...
루이 흄이 문을 열고 돌아왔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자료 한 뭉치를 집어들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레이디 폰지, 평안하신지요.
...무슨 일이야? 설마 또 돈 달라고?
아이고 형씨, 올해 예산을 이미 미친 듯이 초과했다니까... 더는 못 줘!
그쪽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폭스 시스터후드는 암시장 인맥도 제법 된다지요?
뭐야, 합법 채널만으로는 재료 조달이 부족하다는 거야?
시스터후드는 소원을 비는 우물이 아니라고...
제게 극비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한 국가의 1년 세입액에 상당하는 가치가 있죠.
형씨, 설마 또 그 《인류 지성 연구》 얘긴 아니지? 그건 살 사람이 없다니까? 괜히 내 마케팅 비용이랑 추천 칸만 낭비한다고!
...이번에 내는 건 제2판입니다.
저번 판본에선 기기의 자율주행을 구성하는 기반 구조인 "샘물"이라는 핵심 부분만 간략하게 서술했었죠.
개념 설명만 해선 고객들이 조금 어렵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강조하고 싶군요. 새 판본에는 "샘물"의 일부 제작 기술과 응용 사례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1탄은 예고고, 2탄이 본문이라는 거네?
이보세요, 그딴 식으로 하면 바로 사기꾼 소리 듣는다니깐!
사기꾼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이미 당신께 이 자료의 구성을 디테일하게 설명드렸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듣지 않으시더군요.
...그랬나?
멋대로 지어낸 거 아냐?
...잠시 뒤에 파일 전문을 캐서린 폰지 씨께 보내겠습니다.
알았어.
"파일럿고래"의 앵커 포인트가 닫혔다.
엘마와 레네트는 현실에 돌아왔다.
엄마는 계속 폭스 시스터후드의 암시장에서 자신의 연구 성과를 팔고 있었구나...
응, 연구 비용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대했으니까.
왠지 엄마는 원래는 자신의 연구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도구 자체에는 방향성이 없지만, 인간은 도구에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낫은 농부에겐 양식을 수확하는 도구지만 살인범에겐 목숨을 빼앗는 흉기인 것처럼.
바나나 껍질조차 살인 흉기가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박사의 연구는 어떻겠어.
그래서 엄마가 하는 연구는 대체 뭐야?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른 앵커 포인트를 계속 보자...
응.
엘마는 "인류 지성 연구"란 이름의 앵커 포인트를 열었다.
콰앙! 포화가 쉬지 않고 건물 단지를 때려댔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도 그 주변 일대가 온통 휘청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튼튼하게 우뚝 서 있었던 건물들은 마치 믹서기에 쑤셔넣은 과일처럼 살점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레이디 폰지, 아직 무사하십니까?
화상 통신으론 얼굴이 잘 안 보입니다만.
...안 무사해.
칫, 이런 때까지 내 목숨 걱정해 주는 건 우리 동업자뿐이네.
...보아하니 아직 팔팔한 것 같군요. 비상 피난소까지 살아서 도착하실 수 있겠습니다.
여기 신호가 잘 안 터지네. 웹사이트 주소 몇 개 보낼 테니까 거기 차트에 폭스 시스터후드가 다 1등인지 좀 봐줘.
...캐서린 폰지 씨께서 매일 보고 계십니다.
현상금 금액이든 사기 피해액이든 개인 자산 랭킹이든 전부 매기 폰지 씨가 1등이십니다.
그래, 이제야 안심이 되네.
저번에 댁을 찾은 그 군부 영감 말이야, 고집 그만 부리고 요구 들어줘 버려.
내가 보니까 러시아인들이 괜찮더라고, 명줄이 질기거든.
......
이런 세상에서 보통 사람은 못 살아남아.
...그 레이디 폰지께서 본인을 보통 사람이라 하시다니, 날아가던 새가 웃겠습니다.
...아무튼, 아직 포장할 수 있는 자산은 댁이랑 캐서린한테 물려 줄게.
다만 댁의 그 씀씀이론 몇 년도 못 가서 다 바닥날걸? 그러니까 빨리 그 호구한테 그만 튕기고 요구 들어주라고!
통신 너머에서 포성이 연달아 터져 두 사람의 짧은 침묵을 덮어버렸다.
언제 또 기회 있으면 말이야, 나 대신 자서전 같은 거 출판해 주라. 제목은 이미 생각해 뒀어, 《암흑 제국을 지배하는 전설의 여왕 매기》!
에이, 말하고 보니 촌스럽네. 어디 문학 전공한 박사님한테 부탁해서 제목도 좀 이쁘게 지어 줘.
...그래서 폭격 지대에선 못 벗어나신 겁니까?.
왜, 네가 복수해주게?
...저는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인형공학자입니다.
됐다... 나도 대체 누구 원한을 사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이렇게 하는 걸로. 돈이랑 뒷일 모두 처리한 거다? 또 묻고 싶은 거 있어?
...레이디 폰지, 만약 부활의 기회가 있다면... 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 당신에게 새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이미 전설의 여왕이잖아, 난.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라고. 계속 연명해봤자 내리막길뿐이지.
굳이 말하자면...
나 말곤 혈연도 없는 캐서린이랑 어떻게 될지 모를 폭스 시스터후드를 부탁해. 대충이라도 괜찮으니까.
공덕 쌓는 셈 치고 말야, 응? 지옥에선 브로이 공작 전하라고 불러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할 말은 없습니다.
아 잠깐만, 내가 아마 프랑크푸르트에 장원이 하나 있을 거거든?
거기 인테리어 바꾸지 마... 댁의 그 서머 가든, 완전 겉멋만 들어가지고...
죄송하지만 그건 약속해 드릴 수 없군요.
그리고 또 브레멘이었나 베를린이었나, 장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
폭음이 또 울렸다. 저번보다 더 가까이에서.
그래, 이걸로 진짜 마지막.
다른 인형이 내 얼굴 쓰는 거, 난 상관없어. 나는 예쁘니까...
그 인형이 어디 기차 같은 데서 허접한 사기 치다가 꼬리 잡히고 그런 것만 아니면 돼.
......
콰앙——!
지지직——
통신 맞은편, 그 쫑알거리던 목소리가 마침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
시대를 풍미한 사기꾼 여왕이 결국엔 박사한테 사기를 당했구나...
나는 여왕님이 이득 본 것 같은데.
무슨 이득?
그녀의 이름을 이어받은 사람이 있잖아. 그녀는 잊히지 않았어.
진짜로 기차에서 사기 치다가 잡히긴 했지만...
......
그리고 그녀의 일대기는 모두 내 앵커 포인트에 저장돼 있어. 내가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넌 나한테도 그런 말을 했지.
.......
말 나온 김에 "전설의 여왕" 앵커 포인트를 보자고.
송신
받는 사람 - 매기 폰지
지금 누가 이 이름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이 이름에 걸린 재화와 역량을 활용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이것은 카지노 특급의 보관 주소입니다. 이를 허용하는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계속해서 폭스 시스터후드의 이름을 쓸 것.
둘째, 《인류 지성 연구(제17판)》을 판매할 것.
판매 방식은 그쪽의 전문 분야일 테니 저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아서 흄.
회신
받는 사람 - 아서 흄
물건 잘 받았습니다. 부탁하신 일도 말씀대로 처리했고요. 그런데 그 책, 한참 동안 안 팔리다가 최근에 겨우 한 여성분이 헐값에 사 가셨어요.
——매기 폰지.
몇 번이나 검색해 봤는데, 관련된 앵커 포인트는 이제 더 없어.
......
왜 아무 말도 안 해?
......
이제 알겠어.
뭘?
어디로 가야 그 흄 대주교를 찾을 수 있는지.
수배령은 어떻게 해결할지도 알아냈어?
응.
그 자식이 분명 다 알고 있을 거야...
레네트는 엘마에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쁘게 복도 반대쪽 끝으로 달려갔다.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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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푸덕, 쿠웅——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폭스 시스터후드 패거리의 맹공에 밀려, 두 인형은 얼마 못 가서 박사가 있는 곳으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쳐야 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문을 틀어막은 뒤 스티븐스 520은 흄 박사에게 걸어갔다.
......
박사님, 죄송해요. 막아낼 수가 없었어요...
뭐가 저렇게 많은 건데!
한심한 몰골을 한 둘을 보며 엘마는 어리둥절한 눈치로 레네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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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쿠웅!
튼튼하지 않은 문은 금세 박살났고, 문짝이 있던 자리에 매기가 잔망스러운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
또 만났네, 흄 박사. 얼굴 한번 보는 게 참 쉽지가 않아.
레이디 폰지,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어쭈, 해 봐! 어? 하라니까?
내가 너 불쌍해서 말해 주는데, 나는 지금 정식으로 상장한 기업의 명예 이사고, 댁은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진 전과자야.
경찰에 신고하면 과연 누가 잡혀갈까?
......
어머머, 저저저 표정 좀 봐. 진짜 화났어?
...레이디께서 이 실험실이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면야.
엘마, 스티븐스 520. 짐 정리하고 이사할 준비해.
어이구, 실험실 새로 차릴 돈은 있고?
댁네 계좌 잔고 확인해 봤거든? 아주 깨~끗하던데?
그건 레이디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 그렇네, 댁 같은 구닥다리 귀족들은 가상 화폐보단 현금을 좋아하지?
캐서린?
네엥~ 방금 소피아가 여기 있는 모든 금고를 열어봤어요.
이 실험실에 다른 금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 이곳의 모든 금괴는 폰지네 거랍니다!
근데 금괴가 몇억 정돈 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겨우 몇만밖에 없더라. 박사님 왜 이렇게 가난해요? 우리 소피아가 쟁여둔 돈도 이것보단 많은데!
<size=50>!!! 캐서린 아가씨, 제 비상금이 얼만지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size>
소피아의 아우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흄 박사의 안색은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매기는 그걸 지켜보며 흄 박사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사뿐하게 앉았다.
그래서 아직도 이사할 생각이야?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댁 말대로 나는 과학을 잘 몰라.
내 "호프콘" 프로젝트에 나 대신 혓바닥을 놀려 줄 전문가 간판이 필요해.
그게 얼굴 반반한 남자라면 완전 최고지, 홈페이지에 사진 딱 박아두면 투자자 끌어오는 데 좋으니까.
당신네 조직에 들어와라, 이겁니까?
맞아!
...폭스 '시스터후드' 아니었습니까? 남자가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시스터후드라고 성별 가려서 받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본인이 원한다면야 루이 언니라고 불러 줄 수도 있고...
......
정 그렇게 신경쓰이면 폭스 시블링후드라고 이름 고쳐버리지 뭐.
……
좋아, 농담은 이쯤 하자고.
댁의 "파일럿고래"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했지. 내용상 문제는 없었어, 그저 투자자의 돈을 좀 날려 먹었을 뿐이지. 그것 자체는 아주 좋은 아이템이고 판돈 키우기에 딱이야.
나도 지금까지 이런저런 아이템으로 몇백만에서 몇천만까지도 땡겨본 적은 있지만, 요즘 시대에 크게 한탕 해먹으려면 역시 첨단과학 이슈가 최고라니까.
댁의 프로젝트는 해봤자 10억짜리지만 내 "호프콘"은 투자금을 100억까지도 끌어올 수 있어.
루이 흄의 표정에 금이 갔다.
"파일럿고래" 프로젝트는... 사기가 아닙니다.
댁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사기라고 생각하는걸.
그건 사람들이 진정한 미래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계획을 꼭 성공시킬 겁니다.
판돈은 있어?
무슨 말입니까?
왜 도박꾼은 십중팔구 돈을 잃을까?
...타짜들 때문이겠죠.
쯧쯧, 그런 건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써먹는 거고.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진짜 큰물에선 타짜 따위 안 써.
그런 도박장이 돈을 쓸어담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손님은 한 번 판돈을 잃으면 다음 기회가 없기 때문이지.
특히 그 사람이 영끌 대출금까지 싹 탕진한 다음엔 정말로 개털 되는 거고.
......
간단한 예시를 들게, 동전 던지기로 앞면뒷면 맞히기.
한 판당 1크레딧씩 돈을 거는 거야. 수학적으론 이길 확률이 50%나 되겠지?
매기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공중에 튕기더니 깔끔한 솜씨로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선 가난한 쪽이 반드시 지게 되어있어. 지갑에 50크레딧이 있다 치면 50크레딧을 잃는 순간 게임에 더 참여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니까.
......
당신이 뛰어난 사회공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죠.
하지만 미안하군요. 저는 사업 파트너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니, 댁이 딱 좋다니까?
어휴, 설명해 봤자 못 알아먹을 테고. 인형 보는 눈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이쪽이 전문가야.
왜 전문가가 말하는데 믿지를 못해?
...그런다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흄 박사는 옆에 서 있는 엘마와 520에게 손짓해서 짐을 싸도록 했다.
매기는 단념하지 않고 흄 박사가 가져가려는 연구 자료 뭉치를 손으로 눌렀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지금 댁의 통장 잔고랑 명성이랑 빽 가지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겠어?
그건 레이디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는 댁은 진짜 깨끗한 과학자라 할 수 있어?
...하실 말씀은 끝났습니까?
이만 떠나시지요.
흄 박사는 매기의 손 밑에서 연구 자료를 홱 잡아챘다.
쯧쯧,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결과로만 평가한다고.
흄 박사, 댁의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어. 댁은 지금 세상이 공인하는 사기꾼이라니까?
나보다 더한 놈 취급이라고~
......
"호프콘"은 내가 원하는 결과지만 그쪽의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어.
일단은 내 프로젝트의 간판만 걸어놓고, 뭐든 간에 댁이 성공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내 "호프콘"은 그냥 자금 조달로 끝나고 댁의 그 험난한 여정을 도와주는 수단이 되는 거지.
......
난 과학은 몰라. 하지만 과학 연구에 들어가는 돈이 어떨 땐 국가 단위 사기극에 모이는 액수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아.
어쭙잖은 사기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저더러 뭘 하라는 겁니까?
댁의 이력과 작위, 인맥, 그리고 사진이 필요해.
아, 가끔 투자자가 방문하면 얼굴마담 좀 해 주고.
대화는 특기 분야가 아닙니다만.
걱정 마, 입 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흄 박사는 긴 침묵에 빠졌다.
...수당은 필요없습니다.
대신 제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자금 일체를 대 주셔야 합니다.
콜!
매기는 호쾌하게 흄 박사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이거 혹시 내가 사기당하는 쪽인 건 아니겠지?
......
서로 불편한 악수로 두 사람의 협업 계약이 체결되었다.
박사가 시스터후드에 가담했었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시스터후드가 왜? 뭘 그렇게 성별을 따지는 건지...
......
됐다. 그것보다 나한테 이 기억이 없는 게 더 신경쓰여.
박사와 나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봐.
나도.
......
우리 둘 다 이 장면은 처음 본 거지? "호프콘" 앵커 포인트를 다시 재생할까?
아니, 됐어. 저 대화에 맞춰서 다음 앵커 포인트로 이동하자.
"파일럿고래" 앵커 포인트를 찾아봐.
찾았어.
케케묵은 종이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사무실.
물방울 자국 가득한 유리창 너머로 찌푸린 하늘과, 사무실과 똑같이 낡고 오래된 길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창가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브로이 공작.
여전하십니까, 미샤 영감님.
창조주가 불공평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이미 늙은 몸이었고, 자네는 오늘처럼 젊고 활력이 넘쳤었지.
그때 자네의 이름이... 모리스 흄이었지?
추억 이야기나 하려고 오신 건 아니시겠죠.
2003년, 자네는 모리스 흄의 이름으로 그 《샘물에서 태어나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 논문을 발표했었지. "그 공간"에서 본 것에 관한 논문인가?
예, 저는 그것을 "GRCh38"라고 명명했죠.
당시 그 논문은 인형 기계의 핵심적 구상과 미래 발전상을 논증하여 학계에 제법 큰 파장을 일으켰지.
그런데 자네는 그 후 종적을 감춰버렸고.
당시엔 아직 풋내기였던 시절이라 단순히 그 기적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당시 학계에선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학 작품" 취급을 받았지만요.
심지어 이슈 냄새를 맡고 컨택해온 SF소설 출판사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모리스 흄의 아들 루이 흄"으로서 여기에 온 것처럼 말이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네만, 연구는 성공했는가?
아쉽게도... 아무래도 신의 축복은 아주 잠깐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약간 씁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때 자네가 예언한 곤경은 오늘날에 와서야 입증되었지.
인간 두뇌의 복잡함은 우리의 이해력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것이 밝혀졌어. 인류는 끝끝내 자아를 완벽하게 인지하는 데 실패했네.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뇌 구조를 가진 유사 인류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원천 차단되었지.
마치 지금 유행하는 인형이라는 무쇠덩어리들처럼 말이야. 인간을 체스로 이기는 인형을 만드는 건 쉽지만, 그들에게 한 살배기 아기 수준의 자아를 형성시키는 건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지.
"설계도"는 제 손에 들어왔지만, 그 설계를 검증할 매개체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죠.
자네는 여기서 멈춰선 안 되네. 그런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자네와 나 모두 살아남았고, 거기서 얻은 보상으로 나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네.
자네도 자네가 본 것을 세상에 펼쳐 보여야 해, "GRCh38"이 자네에게 보여준 완전한 모형을 말일세.
...그건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재능과 동원할 수 있는 힘에 제약이 있다면 조직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떤가? 우리도 물론 환영일세.
......
외람된 말씀이오나 돈과 자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보게나.
천재는 절대 단 한 명만 출현하지 않네. 이런 난세에는 반드시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기 마련이지.
브로이 공작, 이제는 자네의 재능을 약간 공유하고 양보할 때라고 보네.
......
저는 명성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연구 성과가 누구의 소유물이 되든 신경쓰지 않아요.
제가 무슨 사심이 있어서 제 연구를 숨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저 가끔 자네가 너무 집착이 강하지 않나 싶어서 그러네.
혹은 상상력이 여전히 틀에 박혀 있다고 말해야 할까.
...다른 방법을 좀 시도해 보죠.
지금 자네가 고른 폭스 시스터후드도 제법 괜찮은 협력 대상이라네. 관련 연구도 그들의 역량을 빌려서 진행할 수 있을걸세.
그들은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세상엔 사기꾼이 우리보다 잘하는 일도 있다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우리도 그저 신의 축복에 기대서 사기를 치는 족속으로 보일 수도 있지.
미샤 영감님,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저는 정치에 손대거나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흄 박사는 탁자에서 몇 걸음 물러나 약간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제가 아버지의 프랑스 성씨와 작위를 버린 것은 그저 순수한 인형공학자 흄으로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께서 축복하시어 이 언제 끝날지 모를 생명을 얻긴 했지만, 당신과 저는 결코 불사신이 아닙니다.
미샤 영감님, 저는 당신과 다른 이상을 쫓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저 알아줬으면 했다네. 자네에겐 언제나 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이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재난에서 살아남은 단 둘뿐인 생존자 아닌가.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인가 보군. 헤어지기 전에 내 한 가지만 부탁함세.
...말씀하시죠.
자네가 완성한 인형 중 한 대를 구매하고 싶네.
군에서 발주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아니면 협력의 증표라 봐도 좋네.
자네가 동의한다면 내 자네에게 푸짐한 보답을 약속하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좋은 대답 기대하겠네.
...감사합니다.
내가 우리 공작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구먼. 나도 이만 떠나겠네.
루이 흄은 일어서서 그늘에 몸을 감춘 그를 방 밖으로 모셨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계속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엘마가 스티븐스 520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팔려가는 건 너일까 나일까?
그야 당연히 너겠지! 이 애물단지야!
다른 구석, 멀리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던 엘마도 자신 옆의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color=#66CDAA>...결국 너였네.</color>
<color=#66CDAA>...응.</color>
<color=#66CDAA>저 영감님이 너한테 임무 내리는 사람이야?</color>
<color=#66CDAA>...맞아. 저 사람이 너의 좌표, 그리고 네가 들어간 PMC의 자료를 전부 알려 줬어.</color>
<color=#66CDAA>저 사람 믿을 수 있어?</color>
<color=#66CDAA>글쎄...</color>
루이 흄이 문을 열고 돌아왔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자료 한 뭉치를 집어들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레이디 폰지, 평안하신지요.
<color=#00CCFF>...무슨 일이야? 설마 또 돈 달라고?</color>
<color=#00CCFF>아이고 형씨, 올해 예산을 이미 미친 듯이 초과했다니까... 더는 못 줘!</color>
그쪽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폭스 시스터후드는 암시장 인맥도 제법 된다지요?
<color=#00CCFF>뭐야, 합법 채널만으로는 재료 조달이 부족하다는 거야?</color>
<color=#00CCFF>시스터후드는 소원을 비는 우물이 아니라고...</color>
제게 극비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한 국가의 1년 세입액에 상당하는 가치가 있죠.
<color=#00CCFF>형씨, 설마 또 그 《인류 지성 연구》 얘긴 아니지? 그건 살 사람이 없다니까? 괜히 내 마케팅 비용이랑 추천 칸만 낭비한다고!</color>
...이번에 내는 건 제2판입니다.
저번 판본에선 기기의 자율주행을 구성하는 기반 구조인 "샘물"이라는 핵심 부분만 간략하게 서술했었죠.
개념 설명만 해선 고객들이 조금 어렵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강조하고 싶군요. 새 판본에는 "샘물"의 일부 제작 기술과 응용 사례도 언급했습니다.
<color=#00CCFF>...그러니까 1탄은 예고고, 2탄이 본문이라는 거네?</color>
<color=#00CCFF>이보세요, 그딴 식으로 하면 바로 사기꾼 소리 듣는다니깐!</color>
사기꾼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이미 당신께 이 자료의 구성을 디테일하게 설명드렸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듣지 않으시더군요.
<color=#00CCFF>...그랬나?</color>
<color=#00CCFF>멋대로 지어낸 거 아냐?</color>
...잠시 뒤에 파일 전문을 캐서린 폰지 씨께 보내겠습니다.
<color=#00CCFF>알았어.</color>
"파일럿고래"의 앵커 포인트가 닫혔다.
엘마와 레네트는 현실에 돌아왔다.
엄마는 계속 폭스 시스터후드의 암시장에서 자신의 연구 성과를 팔고 있었구나...
응, 연구 비용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대했으니까.
왠지 엄마는 원래는 자신의 연구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도구 자체에는 방향성이 없지만, 인간은 도구에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낫은 농부에겐 양식을 수확하는 도구지만 살인범에겐 목숨을 빼앗는 흉기인 것처럼.
바나나 껍질조차 살인 흉기가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박사의 연구는 어떻겠어.
그래서 엄마가 하는 연구는 대체 뭐야?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른 앵커 포인트를 계속 보자...
응.
엘마는 "인류 지성 연구"란 이름의 앵커 포인트를 열었다.
콰앙! 포화가 쉬지 않고 건물 단지를 때려댔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도 그 주변 일대가 온통 휘청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튼튼하게 우뚝 서 있었던 건물들은 마치 믹서기에 쑤셔넣은 과일처럼 살점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레이디 폰지, 아직 무사하십니까?
화상 통신으론 얼굴이 잘 안 보입니다만.
<color=#00CCFF>...안 무사해.</color>
<color=#00CCFF>칫, 이런 때까지 내 목숨 걱정해 주는 건 우리 동업자뿐이네.</color>
...보아하니 아직 팔팔한 것 같군요. 비상 피난소까지 살아서 도착하실 수 있겠습니다.
<color=#00CCFF>여기 신호가 잘 안 터지네. 웹사이트 주소 몇 개 보낼 테니까 거기 차트에 폭스 시스터후드가 다 1등인지 좀 봐줘.</color>
...캐서린 폰지 씨께서 매일 보고 계십니다.
현상금 금액이든 사기 피해액이든 개인 자산 랭킹이든 전부 매기 폰지 씨가 1등이십니다.
<color=#00CCFF>그래, 이제야 안심이 되네.</color>
<color=#00CCFF>저번에 댁을 찾은 그 군부 영감 말이야, 고집 그만 부리고 요구 들어줘 버려.</color>
<color=#00CCFF>내가 보니까 러시아인들이 괜찮더라고, 명줄이 질기거든.</color>
......
<color=#00CCFF>이런 세상에서 보통 사람은 못 살아남아.</color>
...그 레이디 폰지께서 본인을 보통 사람이라 하시다니, 날아가던 새가 웃겠습니다.
<color=#00CCFF>...아무튼, 아직 포장할 수 있는 자산은 댁이랑 캐서린한테 물려 줄게.</color>
<color=#00CCFF>다만 댁의 그 씀씀이론 몇 년도 못 가서 다 바닥날걸? 그러니까 빨리 그 호구한테 그만 튕기고 요구 들어주라고!</color>
통신 너머에서 포성이 연달아 터져 두 사람의 짧은 침묵을 덮어버렸다.
<color=#00CCFF>언제 또 기회 있으면 말이야, 나 대신 자서전 같은 거 출판해 주라. 제목은 이미 생각해 뒀어, 《암흑 제국을 지배하는 전설의 여왕 매기》!</color>
<color=#00CCFF>에이, 말하고 보니 촌스럽네. 어디 문학 전공한 박사님한테 부탁해서 제목도 좀 이쁘게 지어 줘.</color>
...그래서 폭격 지대에선 못 벗어나신 겁니까?.
<color=#00CCFF>왜, 네가 복수해주게?</color>
...저는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인형공학자입니다.
<color=#00CCFF>됐다... 나도 대체 누구 원한을 사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color>
<color=#00CCFF>아무튼 이렇게 하는 걸로. 돈이랑 뒷일 모두 처리한 거다? 또 묻고 싶은 거 있어?</color>
...레이디 폰지, 만약 부활의 기회가 있다면... 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 당신에게 새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color=#00CCFF>...이미 전설의 여왕이잖아, 난. 지금이 인생의 정점이라고. 계속 연명해봤자 내리막길뿐이지.</color>
<color=#00CCFF>굳이 말하자면...</color>
<color=#00CCFF>나 말곤 혈연도 없는 캐서린이랑 어떻게 될지 모를 폭스 시스터후드를 부탁해. 대충이라도 괜찮으니까.</color>
<color=#00CCFF>공덕 쌓는 셈 치고 말야, 응? 지옥에선 브로이 공작 전하라고 불러 줄 테니까.</color>
알겠습니다, 이제 할 말은 없습니다.
<color=#00CCFF>아 잠깐만, 내가 아마 프랑크푸르트에 장원이 하나 있을 거거든?</color>
<color=#00CCFF>거기 인테리어 바꾸지 마... 댁의 그 서머 가든, 완전 겉멋만 들어가지고...</color>
죄송하지만 그건 약속해 드릴 수 없군요.
<color=#00CCFF>그리고 또 브레멘이었나 베를린이었나, 장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color>
......
폭음이 또 울렸다. 저번보다 더 가까이에서.
<color=#00CCFF>그래, 이걸로 진짜 마지막.</color>
<color=#00CCFF>다른 인형이 내 얼굴 쓰는 거, 난 상관없어. 나는 예쁘니까...</color>
<color=#00CCFF>그 인형이 어디 기차 같은 데서 허접한 사기 치다가 꼬리 잡히고 그런 것만 아니면 돼.</color>
......
콰앙——!
지지직——
통신 맞은편, 그 쫑알거리던 목소리가 마침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
시대를 풍미한 사기꾼 여왕이 결국엔 박사한테 사기를 당했구나...
나는 여왕님이 이득 본 것 같은데.
무슨 이득?
그녀의 이름을 이어받은 사람이 있잖아. 그녀는 잊히지 않았어.
진짜로 기차에서 사기 치다가 잡히긴 했지만...
......
그리고 그녀의 일대기는 모두 내 앵커 포인트에 저장돼 있어. 내가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넌 나한테도 그런 말을 했지.
.......
말 나온 김에 "전설의 여왕" 앵커 포인트를 보자고.
송신
받는 사람 - 매기 폰지
지금 누가 이 이름을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이 이름에 걸린 재화와 역량을 활용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이것은 카지노 특급의 보관 주소입니다. 이를 허용하는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계속해서 폭스 시스터후드의 이름을 쓸 것.
둘째, 《인류 지성 연구(제17판)》을 판매할 것.
판매 방식은 그쪽의 전문 분야일 테니 저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아서 흄.
회신
받는 사람 - 아서 흄
물건 잘 받았습니다. 부탁하신 일도 말씀대로 처리했고요. 그런데 그 책, 한참 동안 안 팔리다가 최근에 겨우 한 여성분이 헐값에 사 가셨어요.
——매기 폰지.
몇 번이나 검색해 봤는데, 관련된 앵커 포인트는 이제 더 없어.
......
왜 아무 말도 안 해?
......
이제 알겠어.
뭘?
어디로 가야 그 흄 대주교를 찾을 수 있는지.
수배령은 어떻게 해결할지도 알아냈어?
응.
그 자식이 분명 다 알고 있을 거야...
레네트는 엘마에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쁘게 복도 반대쪽 끝으로 달려갔다.
같이 가!